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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계숭절사(滄溪崇節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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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에 세워진 숭절사는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의 처형 소식을 듣고 자결한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 1408∼1456)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고 있다.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은 1685년(숙종 11) 건립된 것이 처음이다. 강원도 관찰사 홍만종(洪萬鐘)이 영월에 있는 노산대군의 사당 수리를 청하였고, 영월부사 조이한(趙爾翰)과 더불어 6신의 사당을 그 곁에 건립하기를 의논하였다. 사육신과 호장 엄흥도(嚴興道, 단종이 영월에서 죽음을 당했을 때 시신을 수습)의 신위를 모시고 '육신사(六臣祠)'라고 하여 송시열이 액자를 썼다. 1709년 영월 유생 엄세영(嚴世英)이 상소하여 '창절(彰節)'이라 사액하였는데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홍리에 있다. 1971년에는 생육신(生六臣)이었던 김시습(金時習)과 남효온(南孝溫)을 배향하였다.
1804년(순조 4)에는 순조가 "박심문의 충성과 절의는 6신에 못지 않다"라는 글씨를 손수 써주면서 그에게 이조참의를 증직하였고, 1828년에 창절사에 배향하게 하였다. 원래 대전지역에서 사육신과 관련된 인물을 배향했던 곳은 동구 가양동 흥농(興農)에 1719년(숙종 45)세워진 정절서원에서 송유(宋愉)·박팽년·송갑조(宋甲祚)·송상민(宋尙敏)·김경여(金慶餘)·송국택(宋國澤)등 대전 지역과 관련된 6명을 배향하였다. 그러나 정절서원은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고, 대전 지역에서 단종 때의 절신(節臣)을 모신 곳은 없어졌다.
그후 박심문과 박팽년을 모신 숭절사가 건립되었다. 『숭절사기(崇節祠記)』에는 사당이 건립되게 된 연유가 간략히 소개되어 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6신들의 사당을 세운 곳은 그들의 고향이나, 거주지 그리고 묘소가 있는 곳에 세웠으나 자손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사당을 세운 것이 없다. 따라서 박심문은 후손인 박연황(朴淵璜)이 창계에 거주한지 여러 대가 되어 조상을 추모하고자 사림들의 여론을 모아 집 근처에 사당을 세워 '숭절사'라는 현판을 달고 박심문과 사육신중에 이 지역과 연고를 같이 하는 박팽년을 함께 배향하였다."
숭절사는 1977년에 세워졌고, 그후 외삼문과 강당이 계속 증축되었다. 구조는 야산을 배경으로 동향(東向)하여 1983년에 세워진 외삼문이 있고, 외삼문의 안으로 들어가면 1978년에 증축되어 상의당(尙儀堂)이란 현판이 붙은 강당이 있다.
박팽년은 본관이 순천(順天)으로 한석당(閑碩堂) 중림(仲林)의 아들이다. 그가 살았던 동구 가양동(더퍼리)에는 유허비가 보존되어 있다. 박팽년은 1434년(세종 16)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成三問)등과 함께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가 되어 각종 편찬사업에 참가하였다. 외직에 있을 때 수양대군(세조)이 황보인·김종서와 안평대군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박팽년은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모의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잡혀 죽었다.
박심문은 본관이 밀양으로조선 세종 때 집현전학사와 부제학을 지낸 박강생(朴剛生)의 셋째 아들로서, 아버지와 두 형이 모두 일찍 돌아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장성하였다. 29세(세종 1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함길도 도절제사인 김종서의 종사관으로 여진을 몰아내고 남도민을 이주시킬 것을 건의하여 6진개척에 공을 세웠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양군의 임진 나루로 집을 옮겨 살았다. 1456년(세조 2)에 명나라에 질정관에 임명되어 굳이 사양했으나 피할 수 없이 가게 되었다. 떠나기전날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이개 등과 단종복위를 논의하였다. 명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사육신의 처형 소식을 듣고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현재 창계숭절사에는 후손들이 해마다 제사를 드리면서 박팽년과 더불어서 박심문의 충절을사모하고 있다. 또한 밀양 박씨 청재공파 대동보소에서는 『청재박선생충절록』을 간행하여 박심문의 충절을 찬양하고, 이를 번역하여 널리 읽도록 보급하고 있다.
유회당(有懷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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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사정동을 지나 언고개를 넘으면 왼쪽으로 굽어들어 바로 근래에 세운 유회당 입구비(入口碑)가 있다. 그 비에서 약 500m정도 떨어진 보문산 남쪽 기슭 구억말에 유회당이 보인다.
유회당은 1707년에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 1668∼1734)이 선친인 증(贈)찬성(贊成)권유(權惟)의 묘(墓)를 모신 후, 부모 묘소의 첨배소(瞻拜所)로 제사를 지내고 아울러 독서(讀書), 강마지소(講磨之所)로 쓰기 위해 세웠다. 그리고 시묘소(侍墓所)인 삼근정사(三近精舍)와 지금은 장판각으로 쓰이는 별묘(別廟)를 지으니 모두 선친을 생각하는 뜻, 즉 유회이인(有懷二人 ; 부모를 생각함)이라는 뜻으로 집을 짓고 스스로 호를 유화당이라 하였다.
권이진의 자는 자정(子定), 시호는 공민(恭敏)이다.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는 증조이고, 탄옹(炭翁) 권시가 조부이며, 권시의 둘째 아들인 권유의 셋째 아들이다. 송시열(宋詩烈)은 그의 외조부이다. 권이진은 22세까지는 외조부 송시열에게 사사하고, 명재(明齋) 윤증(尹拯)은 그의 부친 권유와 오랫동안 교분을 나누었고 권이진과는 사승(師承)관계로 연결된다.
당명(堂名)인 "有懷"는 명나라 말기 전목재(錢牧齋)의 "明發不寐 有懷二人"(二人은 부모를 지칭)이란 시에서 취해 쓴 것인데 이름 그대로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런 마음을 늘 품고자 하는 뜻이다. 현재 남아있는 현판의 글씨는 권이진의 도의지교(道義之交)인 주암(朱庵) 박순(朴恂)의 글로 밝혀졌다. 당(堂) 내부의 대청에는 우측에 구시재(求是齋)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권득기의 십자훈(十字訓)과 권시의 "사필구시(事必求是)" 훈계(訓戒)에서 따온 것이다. 좌측에도 "불사재"의 현판이 붙어 있다. 이외에 1720년 권이진이 지은 『명당실기(明堂實記)』 현판도 달려 있다.
기궁재(奇窮齋)는 선친 묘소의 재실(齋室)로 안동권씨가 아닌 관리인이 종토(宗土)를 경작하여 제사를 모실 준비를 하는 공간이었다. 예전에는 산(山)의 관리인이 따로 있었으나 근래에는 재실 관리인이 산의 관리도 함께 한다. 기궁재 상량문에 의하면 1920년에 중건한 기록이 있다.
장판각(藏板閣)은 원래 1734년에 별묘로 지어 1822년 중건되었는데, 현재는 유회당 권이진 문집 판목(板木) 246판이 보존된 유회당의 부속건물이다. 판목은 유회당의 증손인 좌옹(左翁) 권상서(權尙恕)가 왼손으로 써서 순조초(1807∼1827)에 판각한 전 12권으로 배나무와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이 문집에는 시(詩)·소(疏)·장계(狀啓)·의서(議書)등이 실려 있으며, 유회당이 재임하던 시기(1700∼1734)의 사료가 많이 실려 있다. 특히 대일본외교사료(對日本外交史料) 및 성리학 관계자료는 당시의 학문과 국제정세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삼근정사(三近精舍)는 유회당이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여 1715년(숙종 41) 부모의 묘소 가까이에 시묘소(侍墓所)를 세웠다. 『삼근정사(三近精舍)』, 『수만헌(收慢軒)』, 『하거원(何去園)』 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삼근(三近)'이란 물이 가깝고 산이 가깝다는 뜻이며, 수만헌(收慢軒)은 범석호(范石湖)시(詩)의 "송초영기고궁방방 천석종수만낭신(松椒永奇孤窮滂滂 泉石終收慢浪身)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고, 하거원(何去園)은 춘추전국시대에 타국으로 망명하려다가 선영(先塋)에 돌아오는 고사(故事)를 본 받아 선영을 지키라는 뜻에서 지은 명칭이라 한다. 전형적인 민가풍(民家風)의 가옥이다.
여경암(餘慶菴)·거업재(居業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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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산 남쪽에 위치한 무수동에 삼신산의 별명을 가진 산이 있는데, 그 이름은 첫째 무수동의 뒷산으로 운풍산(雲風山), 둘째 동남쪽에 봉래산(蓬萊山), 셋째 앞산으로 방장산(方丈山)이다. 그 중 동남쪽의 봉래산 속에 거업재와 여경암이 있으므로, 근방 사람들이 부르기를 여경암을 일컬어 봉래암이라 하였다. 그것이 와전된 말로 '동남절'이라고도 한다.
거업재와 여경암은 유회당(有懷堂)의 건립자인 권이진(權以鎭, 1668∼1734)이 1715년(숙종 41) 선묘(先墓)의 동쪽에 자질(子姪)과 제생(諸生)의 강학처로 세워졌다. 유회당에서 뒷산으로 잘 닦아 놓은 길을 올라 산의 동남쪽 건너편에 이르면 울창한 대나무숲을 배경으로 한 여경암이 나온다. 이 암자 명칭의 유래는 그가 자찬(自撰)한 『거업재기』에 적혀 있다. 즉 송나라 때 주자와 동시대인의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자제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강당을 지어 여경사(餘慶寺)라 지은 이름에서 취해 왔다고 한다.
이 암자 아래에 거업재가 자리잡고 있다. 재(齋) 앞에 연못을 파서 활수(活水)를 담아 독서한 후 이 못에서 마음을 맑게 하였다 하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이 재의 현판인 '居業齋' 3자는 그의 벗 박자임(朴子任)이 썼고 또한 박인경(朴麟卿)이 초서로도 써서 걸어 놓았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재명(齋名)인 거업(居業)의 뜻은 낱낱이 풀이되어 있다. 즉 지금의 사자(士子)들은 '居'자를 흔히 '거주지거(居住之居)'로 '業'자를 '과업의 업(業)'으로 오인해 거업(居業)을 과문(科文)을 위주로 한다는 뜻으로 잘못 해석하기 쉬울 것이지만 본래 '居'자는 성실지심(誠實之心)으로 공부를 하여 거경(居敬)한다 할 때의 글자이다. '業'자는 성인(聖人)·현인(賢人)·학자지업(學者之業)의 글자이니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올바른 도리(道理)란 뜻이다. 그러므로 '거업(居業)' 2자에는 이러한 성실지심(誠實之心)의 거경(居敬)과 성현지업(聖賢之業)의 득도(得道)를 통해 춘추정신(春秋精神)을 부축하고 삼강(三綱)을 바르게 하는 올바른 군자의 길을 걷게 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거업재는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중요한 유학의 도장이었던 유교유적이다.
귀후재(歸厚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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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의 최남단 어남동(느내미)에 위치한 귀후재는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의 묘소 아래에 1813년(순조 13)에 건립되었다. 후손은 물론 사림들이 이곳에 모여 도학을 강론하기도 하고, 또한 시제(時祭) 때면 제수(祭需)를 차리고 제향을 모시던 곳으로서 건물이 퇴락하여 1928년에 중수하였으며, 1985년 다시 보수하였다.
'귀후(歸厚)'의 뜻은 증자(曾子)의 가르침으로, 덕(德)이 후한 데로 돌아가게 한다는 뜻이다. 권이진의 현손 권감(權堪)이 지은 『귀후재기』가 있다.
봉소루(鳳巢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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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교동의 봉무산(鳳舞山) 언덕에 봉소재(鳳巢齋) 남분붕(南奮鵬, 1605∼1674)이 강학소를 지어 후학을 양성하던 유적이다.
남분붕의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숙우(叔雨), 호는 봉소재(鳳巢齋)로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학통을 이어 의리를 진작시키고 선비들의 슬기와 재능을 널리 열어주었다. 형조참의를 추증받았다.
봉소루의 명칭은 원래 남분붕의 호에서 취하여 봉소재라고도 불렀다. 봉소(鳳巢)는 봉황새의 보금자리라는 뜻으로 봉소재(鳳巢齋)는 후진을 양성하는 교육도장(敎育道場)이라는 말(교육도장을 가르킨다.)이다. 1714년(숙종 40)과 1758년(영조 34)에 2층 누각에 팔작지붕으로 중수한 기록이 보인다. 봉소루 2층 건물앞에 현판(懸板)이 걸려 있다. 그리고 봉소루팔경운(鳳巢樓八景韻)이라 하여 팔경(八景)에 대한 시(詩)가 전한다.
만취정지(晩翠亭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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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정은 현재 자취가 없으므로 건립시기와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송지경(宋之璟, 1634∼1709)이 관례(冠禮) 후 만취정을 지었다는 것으로 볼 때, 17세기 후반 건립된 것으로 추측 할 수 있다. 정(亭)이 흔적도 없이 허물어져 건립되었던 위치도 알 수 없으나, 후손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현재의 서대전 쪽에서 을지병원 쪽으로 가는 산 위의 꼬불꼬불한 길 어딘가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송지경이 지은 시(詩)에 "소옥(小屋)을 가파른 언덕의 숲에 새로 열었으니 언덕의 그림자에 숲의 그늘이 겹쳐져 그늘은 더욱 두텁도다."를 근거로, 언덕의 중간쯤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지경은 자가 경옥(景玉)이고, 본관은 은진이며 송석명(宋錫命)의 아들이다, 그는 관례 후 상경하여 과거에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드디어 고향인 용두동(龍頭洞)으로 돌아와 대관당(大觀堂, 부친의 정자)옆에 조그만 정자를 짓고 주위에 소나무 일곱 그루를 심어 만취정이란 편액을 걸고 이를 호(號)로 삼았다
그 뜻은 "더디고 더디도다. 시냇가의 솔이여! 빽빽하고 빽빽하네. 늦게까지 푸른 빛 머금고 있네."라는 고시(古詩)에서 따왔다. 이것은 평생푸른솔로 스스로비유한 뜻을 나타낸다. 그의 성품이 충후인화(忠厚仁和)하여 향리의 청소년들에게 항상 효제충신지도(孝悌忠信之道)를 가르치며 처심행기(處心行己)는 규구(規矩)에 어긋나지 않고 거동은 예(禮)에 맞았으니 세인(世人)이 용강군자(龍岡君子)라고 일컬었다.
후에 통훈대부 장악원정을 추증받았는데, 이것은 그의 증손 송유승(宋儒升, 참판공)으로 인하여 추사(推思)된것이다.
광영정(光影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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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회당 이정표에서 유회당으로 가는 중간에 광영정이 있다. 유회당을 건립한 권이진의 장자인 광영정(光影亭), 권형징(權泂徵, 1694~1755)이 세웠다. 정(亭)을 건립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생존시기로 보아서 대략 18세기 전반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광영정의 당명(堂名)은 고시(故詩)인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의 구절에서 땄고, 이것을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정(亭) 옆의 작은 연못도 마찬가지로 배회담(徘徊潭)이라 불렀다. 광영정 내의 사방에 현판이 걸려 있는데, 동쪽에는 수월란(受月欄), 남쪽에는 광영정(光影亭), 북쪽에는 인풍루(引風樓), 서쪽에는 관가헌(觀稼軒)이 있다. 그리고 `소루기(小樓記)`가 새겨진 현판도 있으나 심히 마멸되어 판독하기 어렵다.
광영정은 원래 현재의 위치에서 이정표 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현재는 논)에 있었으며, 당시의 규모도 현재와 비슷하였다고 한다. 그 후 불타서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는데 시기는 원래 정(亭)의 건립자 권형징 당대라고 후손이 전하고 있다.
대전영당(大田影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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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 ~ 1396)의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영정은 모두 3폭(幅)으로 한산이씨 대종회(韓山李氏大宗會)의 소유이다. 목은영당(牧隱影堂,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19번지 소재)과 영모영당(永慕影堂, 충남 서천군 가산면 영모리 463번지 소재)에 한폭씩 소장되어 있고, 또 하나가 대전영당에 소장되어 있다. 목은영당 소장본은 원래 예산의 누산영당(樓山影堂)에 소장되어 있었다. 이색의 영정은 조선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미수(眉搜)허목(許穆)의 '목은화상기(牧隱畵像記)' (眉搜記言 卷9)에 의하면, 원래 관복과 평상복의 초상화 2본이 있었는데, 원본은 전하지 않고 동형동규(同形洞規)의 초상화가 서천의 영모영당과 예산 누산영당에 모셔져 왔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기간 보관과정에서 비단이 떨어져 나가는등 훼손이 심해 1655년(효종 6)후손들이 2본을 모사(模寫)하여 영당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예산 누산영당 소장본은 사대부화가였던 허의(許懿)와 유명한 화사(畵士)김명국(金明國)이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사모(紗帽)를 쓴 우안구분면(右顔九分面)의 자세에 여말 선초의 공신도상형식(功臣圖像形式)을 보여준다. 이때 그려진 상(像)의 우측상단에 후대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양촌(陽村)권근(權近)의 찬문이 있다. 대전영당 소장의 대본(大本)은 화면에 쓰여진"숭정사갑진사월상한후손진사형부경서(崇禎四甲辰四月上瀚後孫進士馨簿敬書)"라는 화기(畵記)에 의해 1844년(현종10)이모(移模)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예산 누산영당 소장본과 동규동형(同規同形)의 본(本)으로 서대(犀帶) 및 족좌대(足座臺) 위의 문양표현이나 연폭(聯幅)을 사용하지 않은 점에서만 차이를 보일뿐 양식적으로 고식을 띠고 있으며 공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어 뛰어난 화사(畵士)에 의해 이모되었음을 시사해준다.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피사(被寫)인물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므로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동산문화재 지정 심의 소위원회에서 보물(寶物)로 지정 될것을 의결하여 동년(同年) 12월 4일에 보물 1215호로 지정되었다.
금무사(錦茂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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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네 사당이라고 하며, 금동리물(금동천) 상류 야이뜸 도로변에 있다.
숙인윤씨·통덕랑송공두원양세정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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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淑人尹氏·通德郞宋公斗源兩世旌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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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인 파평윤씨는 부호군(副護軍) 송기학(宋基學)의 처(妻)이다. 윤씨의 신모(新母)가 돌아가면서 윤씨가 식음을 전폐하여 죽자, 손자인 통덕랑공 송두원이 상제가 되어 집상(執喪)하여 주위 사람들이 칭송이 자자하니 드디어 조정에 알려져 영조(英祖)가 정려를 명하였다.
연제(淵劑) 송병선(宋秉璿)이 지은 중수기가 전해지고 있다. 1988년 11월에 재중수하였다.
출처/ http://www.junggu.daejeon.kr/korea/h04/h0401/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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