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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 현대 100년사 스크랩 해방과 건국준비위원회
남운서숙 추천 0 조회 43 07.09.09 17: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해방과 건국준비위원회 (자료)




자료1)


카이로 선언

각 군사 사절단은 일본국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 3대 동맹국(주미국·영국·중국의 세 나라)은 일본국의 침략을 정지시키며 이를 벌하기 위하여 이번 전쟁을 속행하고 있는 것이다. 위 동맹국은 자국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또 영토를 확장할 의도도 없다.


위 동맹국의 목적은 일본국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대만 및 팽호도(澎湖島)와 같이 일본국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국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구축될 것이다. 앞의 3대국은 조선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맹세코 조선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3대 동맹국은 일본국과 교전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국의 무조건 항복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중대하고도 장기적인 행동을 속행한다.




자료2)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부 포고(布告) 제1호

조선인민에게 고함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다음과 같이 포고함.


일본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은 여러 나라 군대 사이에 오랜 동안 속행되어 온 무력 투쟁을 끝마쳤다. 일본 천황의 명령에 의하여 그를 대표하여 일본국 정부와 일본 대본영이 조인한 항복문서 내용에 의하여 나의 지휘하게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 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리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 인민은 점령 목적이 항복 문서를 이행하고 자기들의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 것을 새로이 확신하여야 한다.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태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 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조건을 발표한다.


제1조.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 권한은 당분간 나의 권한하에서 시행한다.


제2조. 정부의 전 공공(公共)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의 유급(有給) 혹은 무급(無給) 직원 및 사용인과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새로운 명령이 있을 때까지 그의 정당한 기능과 의무를 실행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하여야 한다.


제3조.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안녕을 문란케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제4조. 제군(諸君)의 재산소유 권리는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라.


제5조. 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목적을 위하여서 영어가 공식 언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 간에 해석 혹은 정의에 관하여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不同)한 점이 있을 때에는 영어 원문이 적용된다.


제6조. 새로운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혹은 나의 권한하에서 발출(發出)될 것으로 제군에 대하여 요구하는 바를 지정할 것이다.


1945년 9월 9일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 다그라스 막카사




자료3)


미국 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부 포고문 제2호

본관은 본관의 지휘하에 있는 점령군의 안전을 도모하고 점령 지역의 공중 치안, 질서에 안전을 기하기 위해 태평양 미국 육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다음과 같이 포고한다.


항복 문서의 조항 또는 태평양 미국 최고 지휘관의 권한을 가지고 발한 포고, 명령, 지령에 위반하는 자, 미국인 및 다른 연합국인의 인명 및 소유권 또는 안전을 해치는 자, 공중의 치안, 질서를 교란하는 자, 정당한 행정을 방해하는 자 또는 연합군에 대해서 고의로 적대행위로 나오는 자는 점령군 군법회의에서 유죄의 결정을 내린 다음, 동 회의가 정하는 바에 의해 이를 사형 또는 다른 형벌에 처한다.




자료4)


소련군 사령과 치쓰짜꼬브 대장의 포고문

조선 인민들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과 고려(顧慮-다시 돌이켜 생각함)의 결과이다. 이와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 인민이 영웅적으로 투쟁하며 꾸준히 노력하여야만 달성할 수 있다. 일제의 통치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라! 담위에 놓인 돌맹이까지도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일하였는가? 왜놈들이 고대광실1)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 사람들을 멸시하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모욕한 것을 당신들은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저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원히 없어져 버렸다. 조선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고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조선 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또는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들을 회복시켜라! 새 생산 기업체를 개시하라! 붉은 군대 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 보호를 담보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함에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


조선 노동자들이여! 노력에서의 영웅심과 창작적 노력을 발휘하라! 조선 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의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써 조선의 경제적 및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母國)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 사람이 된다. …




자료5)


여운형론

… 여운형! 이 이름은 오늘 우리 민족의 운명과 결부되어 있다. 그의 일구수 일투족이 우리 민족 재건에 있어 지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부인할 자 없으리라! … 여운형씨는 경기 양평 출신으로 부유한 양반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호방한 성격이 있어 항상 승마와 운동 경기를 즐겼으며, 양반으로의 예절보다 평민적인 활동을 즐겼다. 그리고 남다른 의협심과 뜨거운 동정심을 소유하고 있어 그가 집을 떠날 때는 자기집에 예속된 종과 머슴을 일체 재산을 주어 해방시킨 일이 있다. 여운형씨는 1913년 일제의 합박 밑에서는 그의 호방 불패(不覇)의 생애를 가질 수가 없어 고국을 탈출하여 만주로 나아갔다. 이 땅에서 그는 조국 광복을 획책하자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있어 만주의 온갖 사정은 그의 장지(壯志)를 이해하고 협력할만한 조건이 성숙되어 있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자기의 실력을 길러야 하겠다는 결의 밑에서 남경으로 가서 금릉대학을 졸업한 것이었다. 그후 그는 상해에 가서 모 서양인이 경영하는 서점에서 고용 생활을 계속하면서 시기의 도래를 고대하고 있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의 종소리가 높아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개최되자, 여운형씨는 온갖 탈을 벗어버리고 민족 해방의 전면에 나섰다. 1919년에는 김규식씨와 더부렁 파리 평화회의에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도록 계획하여 김규식씨를 파리에 파견하였다. 이것이 조선민족 해방을 위한 씨의 거대한 구상의 첫 시험이었다. 그 뒤 여운형씨는 곧 시베리아로 갔다. 연해주 해삼위에서 영문으로 조선독립선언문을 만들어 각국에 산포하였다. 그리고 일크스크에 가서 이동휘씨 등의 고려공산당에 참가하였으며 그리하여 이동휘씨 등 선배 및 혁명 동지들을 이끌고 상해로 돌아와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 1921년 여운형씨는 모스코바에서 개최된 원동(遠東) 피압박민족대회에 신한청년당의 대표로서 출석하여 조선의 실정과 조선민족의 자주 독립에의 욕구를 토파(吐破)하였다. 이때 러시아 혁명의 최고 지도자요, 세계 혁명의 모범자인 레닌을 회견하였는데 씨에게 있어서는 이 회견이 생애를 두고 망각할 수 없는 감격적인 장면이었다고 씨는 늘 술회하고 있는 것이다. 씨는 모스코바에서 과세하고 1922년 봄에 상해로 돌아왔다. … 1925년부터 씨는 중국 혁명에 참가하였다. … 1929년 봄에 여운형씨는 남양군도(南洋群島)의 민족들의 요청으로 방문 여행을 떠났다. 그리하여 싱가폴, 마닐라, 자바, 수마트라 등 각 중요 도시를 역방(歷訪)하면서 영어로 약소 민족의 해방에 대한 강연을 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씨의 영웅적인 활동은 일본 경찰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게 되었다. 1929년 7월에 상해로 돌아오자, 일본 영사관 경찰은 그의 행방을 추적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7월 11일 상해 운동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다가 드디어 체포되었다. 씨는 경성을고 압송되어 1930년에 3년간의 징역을 선고받고 대전 감옥으로 이감되어 형기를 마쳤다. 옥중의 씨의 일상 생활을 독서삼매(讀書三昧)이었으며, 모범수이었다 한다. 1932년 출옥하자, 씨는 당시 중외일보의 사장으로 추대되어 언론계에 종사하는 한편, 씨가 좋아하는 체육 방면에 큰 공로를 끼쳤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표면적인 일이요, 씨는 조금도 쉬지 않고 청년 학생들을 규합하여 반일 사상의 고취와 조선민족 해방에 대한 이념의 선전에 분망하였다. 1937년 일본이 중국 침략을 개시한 이래 일본 정부의 씨에 대한 유혹과 위협은 날이 갈수록 심하였다. 근위(近衛)와 동조(東條)는 두차례나 여운형씨를 초청하여 장개석씨와의 교섭을 청하였으나, 씨는 시종일관하게 거절하였으며, 투옥과 학살로서의 위협에도 불굴의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1940년 동경서 돌아오던 길에 씨는 헌병대에 체포되어 7개월간을 무서운 취조와 고문을 받다가 석방되었다. 1943년 봄부터 여운형씨는 동지를 규합하여 건국동맹을 지하공작적으로 결성해가지고 동지들을 전국 각처에 파견하여 동지 획득과 대중 조직에 착수하였다. 이러는 동안 징병 학병 등이 있어 총독 당국의 유혹과 권고와 위협이 있었으나, 그리하여 모든 지사들이 절개를 폐리(弊履)처럼 버리고 대일 협력을 감행하고 있을 때에도 여운형씨는 끝끝내 고절(高節)을 지키고 불응하였을 뿐아니라 건국동맹을 적극 추진시켜 한편으로 건국방략을 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외 혁명 단체와 연락하여 내외 호응으로 일대 반일 투쟁을 일으킬 계획을 진행시켰으며, 그리하여 사건의 단서가 발각되어 동지들이 속속 검거되는 등 그 화가 씨 자신에게 미칠 위험의 전야에 8월 15일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도 악랄하고, 오만하던 일본제국주의자도, 패전 민족의 신세가 됨에 참으로 못나고 비겁한 자들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8월 15일 정무총감 원등(遠藤)은 어제까지 얼르고 달래고 마음대로 모욕하던 여운형씨를 초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등이 일본인의 생명 보호를 애걸함에 여운형씨는 (1) 감옥에 있는 정치범 직시 해방, (2) 청년 학생의 자치대 결성, (3) 정치적 활동의 자유, (4) 3개월간의 식량의 확보 등 4개조를 조건부로 응락하고 돌아오는 길로 동지들로 하여금 자치대를 조직 활동케 하는 한편, 감옥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혁명가들을 맞아 지하에서 조직되었던 건국동맹, 공산주의 제 그룹 등을 기반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탄생시켰다.


해방의 감격에 휩쓸린 인민 대중의 앞에 나타난 여운형씨는 그야말로 민족의 거상(巨像)이었다. 인민의 환호는 이 노투사를 최고의 민족 지도자로서 아낌없이 환영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씨는 인민의 거화(炬火)로서 그의 족적에는 인민 대중이 따라, 불과 한달여에 전국의 각군 지부를 완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건준이 인민공화국을 탄생시키고,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자, 씨는 겸허하게도 그 최고의 지위를 해외의 망명가에게 돌리고 자기는 부주석에 나아갔다. …



(金午星,『指導者群像』, 大成출판사, 1946)



자료6)


건국동맹2) 강령

(1) 조직


… 마침내 민족 전선 결성에 의견이 일치되어 1944년 8월 10일에 결사적으로 비밀 결사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몽양, 조동호, 현우현, 황운, 이석구, 김진우 여러 사람이 경운정에 있는 현우현의 집에 모였었는데 … 맹서는 굳게 하자 하고 실행은 비밀히 하자 하고 불문, 불언, 불명의 3대 철칙으로 나아가자 하였다. 일부의 희생이 생겨도 연루의 해가 없게 제재를 갖추도록 하고 친일 분자 민족 반역자를 엄격히 제외하고 민족적 양심이 있는 인사를 망라하여 공장, 회사, 학교, 대중 단체에 세포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2) 부서와 강령


… 10월경에 부서와 강령을 작정하여 부서는 … 강령은


① 각인 각파를 대동 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 제 세력을 구축하고 조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② 반추축(反樞軸) 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 세력을 박멸할 것


③ 건설부 면에 있어서 일체 시위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 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3) 조직과 연락


… 조직과 연락에 나선 투사 중에는 건국동맹에 가맹하지 않은 이가 많다. 그네들은 맹원은 아니로되 몽양의 혁명 운동에 동지적 협력을 하려고 모험하고 싸우기를 맹서한 이요, 몽양은 건맹 중심으로 개별적 동지를 규합한 것이므로 이 건국동맹 기사 중에 기입하며 몽양의 고심과 활동을 참고하려 한다.


(이만규, {여운형선생투쟁사}, 1947 163∼179쪽)



자료7)


건국준비위원회 선언

인류는 평화를 갈망하고 역사는 발전을 지향한다. 인류사상 전에 없었던 참사인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우리 조선에도 해방의 날이 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로서 제국주의적 착취와 억압하에 모든 방면에 있어서 자유의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36년간 우리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을 계속하여 왔다. 이 자유 발전의 길을 열려는 모든 운동과 투쟁은 제국주의 및 그와 결탁한 반동적 반민주주의적 세력에 의하여 완강히 거부되어 왔다.


전후(戰後) 문제의 국제적 해결에 따라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기반(羈絆)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민족의 해방은 다난한 운동사상에 있어 겨우 새로운 일보를 내어디디었음에 불과하나니 완전한 독립을 위한 허다한 투쟁은 아직 남아 있으며 새 국가의 건설을 위한 중대한 과업은 우리의 전도에 놓여 있다. 그러면 차제에 우리의 당면 임무는 완전한 독립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하여 노력하는 데 있다. 일시적으로 국제세력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나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도와줄지언정 방해치는 않을 것이다.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고 자유 발전의 길을 열기 위한 모든 진보적 투쟁은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고 국내의 진보적 민주주의적 여러 세력은 통일전선의 결성을 갈망하고 있나니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의하여 우리의 건국준비위원회는 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 준비위원회는 우리 민족을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권에로 재조직하기 위한 새국가 건설의 준비기관인 동시에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적 제 세력을 집결하기 위하여 각층 각계에 완전히 개방된 통일전선이요 결코 혼잡된 협동기관은 아니다. 왜 그런고 하면 여기에는 모든 반민주주의적 반동세력에 대한 대중적 투쟁이 요청되는 까닭이다. 과거에 있어서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민족적 죄악을 범하였고, 금후에도 그들은 해방 조선을 그 건설 도중에서 방해할 가능성이 있나니 이러한 반동세력 즉 반민주주의적 세력과 싸워 이것을 극복 배제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강력한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이 정권은 전국적 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된 인민위원으로서 구성될 것이며 그동안 해외에서 조선 해방운동에 헌신하여 온 혁명전사와 그 집결체에 대하여서는 적당한 방법에 의하여 전심적(全心的)으로 맞이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조선 전민족의 총의를 대표하며 이익을 보호할만한 완전한 새 정권이 나와야 하며 이러한 새 정권이 수립되기까지의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본 위원회는 조선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


(『朝鮮의 將來를 決定하는 各政黨 各團體 解說』,여론사, 1945)



자료8)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의 선언

1945년 9월 6일은 8월 15일과 함께 우리 조선민족 해방사상에 있어서 획기적인 날이다. 이날 조선민족 해방을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투쟁을 계속하여 온 해내(海內) 해외(海外)의 각계 각층을 망라한 혁명적 투사 천여 명의 회합하에 전국인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은 비로소 발생하였으며 정부를 조직하고 이를 운영할 인민위원은 선출되었다. … 우리는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는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우리들이 선출한 혁명동지와 인민대중의 기본적 요구에 응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구축하는 동시에 우리의 자주 독립을 방해하는 외래세력과 반민주주의적 반동적 모든 세력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통하여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의 실현을 기한다. 그리고 우리는 안으로는 조선 인민대중 생활의 급진적 향상과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고 밖으로는 소련, 미국, 중국, 영국을 비롯하여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민주주의적 제 국가와 제휴하여 세계평화의 확보에 노력하려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의도하에서 아래와 같은 정강과 시정방침을 발표한다.




자료9)


아놀드 군정장관의 인민공화국 부인 성명

…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다. 이 정부는 맥아더 원수의 포고와 하지 중장의 정령과 아놀드 소장의 행정령에 의하여 정당히 수립된 것이다. 아놀드 군정장관과 군정관들이 엄선하고 감독하는 조선인으로 조직된 정부로서 행정 각 방면에서 절대의 지배력과 권위를 가졌다. 자천자임(自薦自任)한 관리라든가 경찰이라든가 국민 전체를 대표하였노라는 대소의 회합이라든가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이든가 자칭 조선공화국 내각은 권위와 세력과 실재가 전연 없는 것이다. … 이제는 해체하고 각기 직장으로 돌아가 겨울나기에 필요한 식량과 의복과 주택을 확보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


최근 모 신문에 조선민중을 기만하는 기사가 있었다. 즉 1946년 3월 1일에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허위 선거를 하겠다고 발표한 것으로 … 이 선거권은 조선정부가 지도한 방법과 시기에만 행사랄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비합법적 선거를 제안한 개인이나 단체는 군정부에 대한 가장 중대한 방해물이요 아울러 군정부와 또는 군정하 또는 조선정부의 합법적 권위에 대한 공공연한 반항적 행동이나 만일 조선민중이 새로 얻은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및 다년간 받은 모든 구속에서 해방된 자유를 귀중히 여긴다면 민중의 도의적 지도력을 일층 분발하여 이러한 어리석고 악질의 인물들이 더 이상의 자유를 유린치 못하게 할 때가 왔다. 조선인민은 이런 무책임한 인물들이 국가의 안녕 질서를 위협하는 일이 없도록 단연코 엄금하여야 할 것이다.




자료10)


존 R. 하지 중장이 동경 주재 더글라스 맥아더 육군대장에게


[서울], 1945. 11. 25 Tfgcg 159.

최근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인민공화국의 대회는 그 명칭에 현재 운용되고 있는 정부라는 의미를 주는 '공화국'이란 한자 용어의 사용을 중지해달라는 본관의 요청을 묵살해버렸습니다. 이 정치당파는 한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적 그룹이며, 소비에트 정치 운동과도 모종의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상당수에 이르는 골수 공산주의자는 아닌 좌익분자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우리가 현지에 진주하기 직전에 새로이 결성된 것입니다. 과거에 그들이 최고 지도자의 명칭에 정부를 지칭하는 용어를 사용했던 일은 민중들간에 상당한 혼란을 야기시켰고, 교육받지 못한 노동계급들 가운데로부터 많은 지지자를 얻게 해 주었으며, 지방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의 명령을 가장하여 과격한 행동을 촉진시켜 왔습니다. 본관은 최근의 집회에서 그 지도자들로 하여금 명칭과 명칭에서 유래되는 오해를 제거시키게 하는 데 거의 실패하였습니다. 비록 그 집회에 참석했던 본관의 대리인이 보고한 것처럼, 그들은 한국내에서 미국의 노력에 대해 전적인 지지와 지원을 할 것이라는 합의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들의 태도 변화의 결과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전까지는 본관은 그러한 지지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만일 앞으로 그들의 태도가 결과적으로 볼 때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정치당파가 정부라는 용어적 지위에 있지 않음을 선언하고, 국민들에 대하여 동 당파에 반대한다는 공공연한 언질을 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조치는 실제로 한국내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가 될 것이며, 일시적인 소요를 야기시킬지도 모릅니다. 또한 지역내의 빨갱이 및 빨갱이 신문들 양측으로부터 '자유' 국가에서의 정치적 차별이라는 비난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만일 조선인민공화국의 활동이 과거와 같이 계속된다면 이는 다만 한국이 독립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시기를 훨씬 지연시키게 될 따름입니다. 논평을 요청합니다.



[하지]

(미국무성(김국태 역),{해방 3년과 미국}, 1984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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