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는 남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트레킹멤버에게는 공개해도 좋을것 같아 올립니다. 혹시 개인의 명예를 손상하는 내용이 있다면 삭제하겠으니 알려주세요.
2006년 7월 7일 금요일
어제 비 내리는 인천공항 길을 따라 오후3시에 출국장에 도착 일행과 합류했다. 아내는 캐나다로 출국하는 기위호씨부인과 만나려고 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전화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푸른여행사에서 백재호, 최열옥씨가 나왔다. 푸른여행사 매킨리 팀 중 전임 중앙기상대장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고로 배경미씨 대신 백재호씨가 인솔자로 교체되었다. 사망자가 50대이니 나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짐을 부치고 대한항공 마일리지를 등록한 후 출국수속을 했다. 면세점에 들렀으나 살만한 것이 없어 탑승게이트로 가니 한산하다. 오후 5시30분 이륙하여 흐린 구름을 한없이 뚫고 10km이상 상승하니 석양이 눈부시다. 4시간 30분간의 비행이다. 기내에서 가져간 책을 읽는다. 잔잔한 감동을 준다.
방콕공항에서 트랜짓트승객으로 2시간 정도 기다렸다. 한국과는 2시간 시차가 있다. 입국장에서 트랜짓트 데스크까지 1km이상 멀어 한없이 공항복도를 걸었다. 트랜짓트 데스크는 작년과 재작년에도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낯익은 곳이다. 방콕공항면세점은 24시간 문을 열고 엄청난 규모다. 발 맛사지 점까지 있다. 백재호씨가 표를 대신 수속해주니 우리는 할 일이 없다. 커피를 시켜 아내와 마시고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케냐항공기에는 손님이 만석이다. 9시간 이상 걸리는 장거리여행인데다가 항공기 내부시설 정비가 좋지 않아 좌석LCD와 개별조명도 먹통이다. 승무원이 아프리카 본토인이라 새롭다. 지도상의 현재 비행위치를 본다. 서울에서 대한항공 A300을 타고 목포, 동 중국해, 대만, 홍콩, 월남을 거쳐 방콕에 내렸다가 케냐항공기를 갈아타고 인도 칼커타를 가로질러 중동을 거쳐 동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항로다. 인도에서 아프리카까지의 거리는 가도가도 비행기가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엄청나게 먼 거리다.
말코폴로, 이븐바투타를 비롯해 최근 올리비에르의 기행문에서 그들은 내가 하루 만에 온 길을 수년을 생사고비를 넘겨가며 육로와 해로를 여행을 하였다. 나는 비행기로 하루 만에 동양, 그것도 극동 끝에서 아프리카 하늘을 날고 있다. 방콕발 나이로비행 비행기에서 지루했지만 내가 지상 10km상공에서 시속 1000km로 달리는 비행 중이라는 생각을 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2006년 7월 8일 토요일
나이로비는 서울과는 6시간 시차로 새벽 4시30분에 공항 착륙이다. 적도바로 밑인 나이로비지만 긴팔옷이 쾌적할 정도로 날씨가 선선하다. 오가는 이들의 피부색으로 내가 아주 먼 곳에 와있음을 실감한다. 비자를 입국 심사대에서 받느라 우리 팀이 제일 늦어 공항 밖으로 나오니 먼동이 트려고 한다.
예약된 마이크로버스에 일행15명이 탄자니아를 향했다. 솔로몬이라는 운전기사는 우리를 탄자니아까지 인도한다. 다운베스트를 입은 건장한 아프리카 인이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다. 차량은 많은데 도로가 협소해 위험하다. 나이로비 교외는 TV와 말로만 듣던 사바나평원이다. 우기가 끝난 누런 색 초원에 점점이 외딴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가지를 벌리고 있는 아프리카 평원 모습 그대로이다. 용설란인지 알로엔지 엄청나게 큰 식물들이 길옆에 있고 개미집 더미가 농촌집 진흙굴뚝처럼 여기저기 우뚝 서있다. 영국문화 탓인지 차량은 좌측통행이다. 대형트럭이 빈번히 오가지만 문명이 자연을 밀어내지 않은 과거로의 여행이다.
백재호씨가 오늘의 일정과 팀을 인사시켰다. 그는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한 젊은인데 산을 좋아해서 트레킹 인솔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킬리만자로 트레킹이 네번째라고 했다. 건강하고 마음에 우러나와 하는 그가 앞으로도 자신의 길을 잘 헤처가기를 바란다.
우리를 실은 마이크로버스는 나망가 근처 휴게소에 잠시 머물렀다. 기념품점이 있어 들어가니 수공예품 일색이다. 동물목각과 목제 무기와 각종우상과 탈, 각종 목기구와 원색의 천에 그린 그림들이다. 붉은 망토에 나무장대를 지닌 깡마르고 왜소한 마사이족이 많다. 기사 솔로몬처럼 우람한 반투족과 마사이족은 구분이 된다.
국경지대인 나망가에서 출국심사를 하는 동안 차에서 내려 거닐어본다. 국경을 오가는 많은 화물차량들이 긴 줄로 기다리고 있다. 대형 트레일러트럭과 중형트럭들인데 일본과 중국에서 중고트럭을 수입했는지 차량에 외국문자들이 그대로이다. 러시아에서는 우리나라 문자가 있는 버스들이 많았는데 이곳 아프리카는 중국이나 일본과 교역이 빈번한 것 같다.
마사이족 행상들이 수공예품을 들고 피곤한 모습으로 차창에 매달린다. 어느 노파의 귀는 주먹이 들어갈 만큼 큰 구멍을 뚫고 귀고리를 주렁주렁 달았다. 아프리카는 자연도 인간도 모두가 원색적이다. 흑백이나 회색이 어디에도 없다.
탄자니아의 아루샤에서 킬리만자로맥주를 곁들여 중국음식을 먹었다. 현지시간에 PC를 맞췄다. 아루샤는 킬리만자로 산록의 녹음이 우거진 소 도시다. 킬리만자로 산록의 탄자니아 지역에는 용수가 풍부해 농업이 성하다. 옥수수, 해바라기와 열대과일이 풍성하다. 나이로비에서 나망가까지는 사바나지역으로 기린이 갑자기 나타나는 전형적 대평원인데 탄자니아로 들어와 킬리만자로가 가까워지니 식물이 풍성하다.
아루샤에서 2시간 킬리만자로쪽으로 가까이 있는 소읍 ‘모쉬’의 ‘keys Hotel’에 오후 3시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은 2층의 아담한 흰색에 붉은 기와로 넓은 대지에 자리를 잡고 있다. 담장너머 구름을 뚫고 킬리만자로 흰 봉우리가 우리를 반긴다. 내일부터 저 산을 오를 것이다. 수영장물을 손에 담궈보니 견딜만 하다. 짐을 방에 옮긴 두 젊은이에게 5달러를 주고 나눠 가지라고 하니 너무 좋아한다. 여행사 백대리에게 미화 10불을 1달러잔돈으로 바꿨다. 김원규씨와 수영을 하였다. 그는 볼보코리아의 AS부서에 근무하는 55세의 중년인데 취미가 다양하다.
저녁은 함께 호텔에서 먹었다. 맥주, 소주로 트레킹 오프닝 세리머니를한다. 현지 트레킹여행사 Maully사의 젊은 여자가 아루샤에서 합류했다. 탄자니아의 여행사들은 부유하다고 한다. 호텔의 정문은 항상 닫혀있고 경비를 한다.
수영을 하니 담장밖에 현지젊은이들이 들여다 본다. 열대식물들로 된 호텔의 정원에서 수영을 하는 나는 원래와 나와는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호텔숙소는 2층 건물이 산재한 형태로 한 동 1,2층에 각각 4실이 배치되고 로비에 모임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벽에 선풍기와 난방이 안된 것으로 보아 이곳 기후가 일년 내내 쾌적한 날씨임을 짐작케 한다. 두 개의 좁은 싱글침대 위에는 모기장이 천장에 걸려있다. 욕실에는 순간 온수기가 있다.
이렇게 좋은 곳에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지낼 수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예부터 이곳은 먹을 것이 풍부하니 남과 다투지 않고 살아왔을 것이다. 사악한 서구인들은 순진한 이곳 사람들을 노예시장으로 팔았고 대륙전체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런 낙원을 이들이 지키기에는 과분했다. 뒤늦게나마 서구인들은 잘못을 뉘우쳤지만 지금도 경제적으로는 문명국의 예속의 위치이다. 이것이 생존의 이치이니 나는 어느 편도 아니다.
낯선 곳에 온 손인 나를 친절히 대해주는 그들은 주인이지만 자연환경인 자연말고는 문명인이 추구하는 경제적으로 가진 것이 없다. 조상대대로부터 서구의 식민지로 이어온 그들의 피 속에는 복종의 유전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를 지원하는 이곳 주민들은 우리가 푼돈으로 생각하는 일당 5달러 수입을 올리는데 대해 감사해 하고 있다. 킬리만자로가 있고 이를 찾아오는 산업사회 사람들이 그들의 생계를 유지시켜준다고 생각한다.
2006년 7월 9일 일요일
어제 아침 모쉬의 ‘keys Hotel’에서 아침을 먹고 트레킹사 사장집에으로 들렀다. 부인과 딸 셋이 ‘마울리’여행사를 경영한다고 한다. 카고백 중량을 달고 가이드 5명이 합류했다. 15명 트레킹을 지원하기 위해 가이드 5명에 포터 15명, 식음료 운반팀을 합하면 모두 45명 이상이 될듯하다.
Rongai 트레킹루트는 Nalemoru Gate에서 시작한다. 모쉬에서 트레킹 게이트까지 버스 이동이다. 킬리만자로 산록을 구불구불 비포장도로를 따라 오른다. 도로변은 온통 바나나밭이다. 여인들이 녹색 바나나다발을 머리에 이고 길을 걷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주변 인가들은 도로확장 계획에 따라 철거표시로 붉은 페인트로 X표를 했다.
이곳 여자들의 머리털은 길지 않고 곱슬거리며 두피에 붙어있어 성인 여자들은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다닌다. 스카프는 터번비슷한 것과 회교도 여자들의 스카프 형태가 눈에 띈다. 어느 마을에서 점심을 위해 멈췄는데 마침 그곳 장이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장에는 바나나와 옥수수, 사탕수수가 많은 것으로 보아 이곳 주산물임을 알 수 있다. 오랜지, 양배추, 감자 등 채소도 판다. 옷가지와 각종시장물건들이 노천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데 원색의 적도지역의 사람들의 모습은 아주 먼곳을 여행하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이곳 바나나는 손가락보다 약간 굵고 습기가 적고 당도가 높다. 노점가 건물밖에는 재봉틀을 놓고 옷수선을 하는 사람들이 10여곳 있고 신발 노점상은 거의가 고물운동화를 판다. 생선도 귀해 손가락만한 붕어 비슷한 건조한 것인데 이지방 물고기같다.
점심으로 나온 것은 행동식으로 바나나, 귤, 당근과 음료수, 식빵을 각자 하나씩 배급한다. 여행 중 과식은 금물이라 적은 양이 더 좋다. 우리가 오르는 차로 우측 아래 멀리 보이는 평원이 케냐의 암보셀리 국립공원이라고 한다. 날씨가 좋을 때면 마사이족 부락이 보인다고 한다. 킬리만자로 쪽에는 구름이 덮여 있고 저지대로는 가끔 파란 하늘이 보인다. 이곳 토양은 미세한 적색 먼지가 쌓여있어 차량이 지날 때마다 차창을 닫아야 한다. 2차선 차도 가의 바나나잎과 민가의 지붕은 흙먼지로 온통 붉은 빛이다. 흔히보던 행운목으로 울타리를 했고 피마자나무의 키가 5~6m나 하니 신기하다.
오후 3시경 트레킹 입구 ‘날레모루 게이트’에 도착했다. 길이 좁아 차에서 내리니 동네 아이들이 모여든다. 이곳 롱가이루트는 트레킹객이 적다고 한다. 죽데기로 얽어놓은 초라한 집들이 촘촘히 붙어있다. 우리팀 말고 서양팀이 두팀이 입산준비를 하고 있다. 포터의 짐무게를 20kg으로 제한하는데 아마도 더 많은 포터에게 노임을 주려는 의도같다. 포터들은 나이가 20대 전후로 젊은데 이들이 수련을 쌓으면 서브가이드가 되고 이들이 경험을 쌓아 메인 가이드가 된다고 한다.
오후 3시30분 트레킹은 앞뒤에 가이드가 인솔하에 아주 느리게 출발한다. 주변에는 침엽수림이 가는 머리칼 같은 솔가지를 느리고 빽빽히 있고 화전에 옥수수와 감자를 심은 길을 따라 완만한 길을 오른다. 붉은 화산먼지로 덮인 트레일이다. 밀림지대를 지난다. 트레일은 트레킹에 편리하게 풀이 없고 길가는 가는 나무로 경계를 만들었다. 1시간쯤 오르니 밀림이 사라지고 낮은 고산식물지대가 나타난다. 나는 이제껏 보지 못한 신기한 식물들 사이를 걷는다. 야생 그라디오러스가 해맑은 핑크빛을 내며 나그네를 반긴다.
우리가 야영할 시킴바캠프에 도착하니 6시가 넘어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다. 트레킹 첫날이라 지원팀과 싸인이 맞지 않아 저녁식사가 늦는다. 막영지에는 우리가 들어갈 오랜지색과 초록색이 섞인 고급 텐트가 10여곳 설치되고 그 주위에 지원팀의 연초록 아프리카색의 텐트로 일시에 텐트촌이 만들어진다. 식당용 텐트가 따로 설치되고 오랜만에 쌀밥에 미역국을 대하니 꿀맛이다. 여행사에서 특별히 가져온 곱창구이가 안주로 일품인데 이곳 높이가 해발 2,700m대이고 내일은 고산증이 발생할 수 있으니 플라스틱병에 든 소주를 마시는 사람이 한두명 뿐이다.
아내가 텐트에 잘 적응하니 다행이다. 킬리만자로의 첫날이다. 가이드가 조심스럽게 별도로 운반한 PC로 일기를 치는 나는 누구인가?
2006년 7월 10일 월요일
시킴바캠프에서 오전8시30분 키켈렐와캠프로 향했다. 구름이 잔뜩낀 날씨로 완만한 길을 따라 오른다. 트레일에는 동물발자욱이 고은 흙에 찍혀있는데 주로 버팔로와 들개였다. 이들의 배설물도 곳곳에 보인다.
두서너 시간 올라왔을 때 구름이 걷히면서 킬리만자로정상과 마웬지봉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셔터를 마구 눌렀다. 3,000m로 고도가 높아지니 나무들은 더욱 낮아지고 에델바이스 같은 솜다리 식물들이 흰꽃을 뽐내고 자연글라디오러스와 노랑국화꽃 비슷한 것들이 꽃밭을 이루고 새들이 지저귀니 봄이 한창인 것 같다. 실제로 이곳은 지금 한 겨울이다. 날씨가 완전히 개이고 우리가 올라온 곳을 뒤 돌아보니 구름이 멈춰서 있다. 우리가 구름을 뚫고 올라온 것이다. 기온은 30도를 넘는 것 같고 태양이 뜨겁게 내리 쬔다. 선블럭과 선글라스로 피부 노출된 곳을 보호한다. 이곳에 산불이 5년전에 나서 나무들이 검게 탄 옆에 새싹이 돋아나 푸른 벌판을 이룬다.
킬리만자로의 키보봉은 화산이 빚어낸 웅장한 모습으로 정상에는 구름을 얹고 조금 남아 있는 빙하가 가끔씩 구름 사이로 보인다. 키보봉은 물매가 완만한 초가집 지붕 같은 형상이다. 완만한 경사의 초원과 급경사를 이룬 거대한 화산봉우리를 만들고 수 Km떨어진 곳에 마웬지봉은 용암이 분출해서 식은 험상궂은 모습으로 주봉인 키보와 대조를 이룬다.
트레일 옆에 용암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20여평 가까운 사람이 서서 들어갈만한 동굴이 있어 들어가 본다. 수많은 동물발자욱이 있다. 아마도 폭우가 내릴 때 이곳이 동물들의 은신처인 것 같다. 킬리만자로는 사람이 아닌 동물들이 사는 곳이다. 사람들은 트레일만 다닐 뿐이다. 등산로에서 조그만 벗어나면 빽빽한 키 낮은 향나무류의 관목이 우거져 사람의 접근을 거부한다.
우리는 평평한 평지에서 내려 쬐는 태양빛 아래서 점심식사를 한다. 컵라면을 먹지 않고 아침에 지은 쌀밥을 물에 말아 김치와 먹었는데 급히 먹어 속이 거북하다. 오후의 트레킹은 용암이 흩어진 곳이 많아 전진 속도가 느리다.
나는 발가락 상처에 약간의 통증이 있어 보행이 자유롭지 않고 아내도 오래 걸으니 힘들어 한다. 가이드에게 아내의 배낭을 주고 맨 몸으로 물통하나만 차고 스틱으로 더듬더듬 걷는다. 나는 아침에 복용한 다이아먹스의 영향으로 손발이 저려오고 먹은 것이 체했는지 트림이 잦다. 백대리에게 소화제를 얻어 복용했다. 피로가 몰려와 보행속도가 늦어져 팀과 떨어져 가이드와 우리 둘, 그렇게 셋만 뒤쳐져 걷는다.
가이드 브라이언의 얘기를 들어보니 가이드생활의 고단한 것을 알겠다. 그는 45세로 가이드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 트레킹에서 치프 가이드를 맡지 못해 일당 25불로 보조 가이드를 한다. 딸만셋인데 수입이 없어 상급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한다. 인구에 비해 일자리가 없는 것이 큰 문제이고 양식이 없고 가난해서 외국원조로 근근히 나라가 지탱한다고 한다.
키켈렐와 캠프에 도착해서 텐트를 배정받았다. 어제 야영한 시킴바캠프는 풀밭이었는데 이곳은 완전히 먼지밭이다. 아내는 세수를 하다가 코피가 터졌는데 멈추지 않아 마침 일행인 정형의원 의사인 홍박사에게 조언을 구하니 막은 것을 빼지 말라고 한다. 이곳은 사소한 사고로도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어 응급환자는 하산만이 최선이다. 아내와 나는 걱정이 태산이다. 나도 속이 좋지 않아 닥도리탕 국물과 감자 몇 개만 먹고 텐트의 아내에게 과일 몇 가지와 감자탕을 가져다 주니 과일만 먹고 감자탕은 사절이다.
석양에 키케렐와 캠프는 주봉과 마웬지 봉 그리고 운해가 어울어진 장관이다. 나는 아내 걱정으로 경치감상을 뒤로한채 아내 곁을 지킨다. 아내의 과일 접시를 식당천막에 가져가니 우리가 먹다 남은 음식은 가이드와 식료팀 차지다. 이들은 별도의 음식이 없이 우리가 남긴 음식을 먹는다. 옛날 우리나라도 손님이 와서 남긴음식이 엄마와 애들 차지였다. 이들에게 자기 몫의 별도의 음식은 낯선 문화같다. 경제적 낙후가 이런 결과를 낳는다. 아내는 팀원이 조제해온 한약을 먹고, 정상에 오를 때 준비한 우황청심환 액도 먹었다.
밤에 자다가 아내를 보니 숨결이 고른 것이 코피가 멎어 휴지를 뺀것같다. 키켈렐와 캠프는 3,400m이다. 자다가 일어나니 피곤이 풀리고 두통도 사라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시다. 화장실에 다녀왔다. 야외 화장실로 새벽이 한산하다. 검은 판재로 만든 푸세식 화장실인데 캠프지마다 서너 군데씩 마련해 놓았다. 일단 아내와 함께 본대와 떨어져 하산하지 않는 것만해도 다행이다.
아내와 나는 매일 새로운 공동의 일대기를 만들고 있다. 이것은 분명 서로를 위한 값진 행위이다. 인생의 가치는 스스로 개척하여 그것으로 얻어진다. 남이 나를 도울 수는 있지만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스스로 나의 길을 만들고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영혼과의 대화는 소중하다. 날이 밝으면 나는 아내와 함께 새로운 하루를 헤쳐나갈 것이다.
2006년 7월 11일 화요일
키켈렐와캠프에서 일출을 맞았다. 키보봉이 태양을 받아 붉게 물들었다. 저 아래 세상은 운해에 가려있다. 캠프주변에 물이 흘러 풀이 많다. 아침식사로 쌀죽이 나와서 다행이다. 전날 점심먹은 것이 좋지 않았는데 죽으로 속을 달랠 수 있겠다. 캠프 여기저기 작은 바위섶에 고산식물들을 촬영했다. 캠프 주위에는 우리팀 외에 서너 팀이 더 있다.
우리 지원팀은 역할분담제로 효율성이 높다. 아프리카인들은 대개가 느리다고 하는데 인구가 많고 돈을 위한 것이니 속도가 난다. 오전 8시30분 마웬지탄을 향해 캠프를 출발했다.
아내의 코피는 멎었다. 전날 아내의 상태로 보아 하산도 생각할 정도였는데 완쾌되니 마음이 가볍다. 팀원들이 아내의 상태를 물으며 걱정하고 비상약을 주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너덜길로 이루어진 트레일에는 사진에서 익숙한 거목이 군락을 이루었다. 종려나무 비슷하고 높이가 3,4미터나 된다. 넘어진 고사목을 보니 완전히 고목뿌리가 튼튼하고 속이 비어있다 아마도 백년이상의 수명인것 같다. 키큰나무가 살수없는 환경에 있는 것이 신기했다. 이들은 능선이 아닌 약간 들어간 저지대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 고산식물들은 대기 중에서 습기를 받으려고 많은 털과 잎이 있다. 뿌리는 수분을 빨아들이기보다는 고정시키는 목적이 더 큰 것 같다. 사람을 비롯한 동물도 환경적응력은 이와 닮은 것 같다.
점심은 너덜지대에서 약간 평평한 곳에 식탁을 차렸다. 지나가는 서양팀이 ‘Perfect!’한다. 나는 컵라면대신 이곳의 표준식단을 먹었다. 바나나, 귤, 버터 없는 샐러드 샌드위치, 주스, 비스킷, 이다.
마웬지탄을 향하는 트레킹의 목적지는 키보봉인데도 우리는 키보봉을 오르기 전에 고소적응을 위해 우회하고 있다. 마웬지탄에 가까워질수록 키보가 더 솟아 키보산장이 산 중턱에 걸려 있다. 가끔씩 주위로 구름이 지나가다가 이내 살아진다. 고도가 구름의 접근을 거부한다. 더 높은 구름이 마웬지와 키보 정상에 잠깐 머물다가 사라진다. 맑은 하늘에 정상에만 구름이 걸려 있는 것이 신기하다.
한두명 두통을 호소하며 뒤쳐지기 시작한다. 이곳의 고도는 4,000미터이고 마웬지탄 캠프의 고도는 4,400미터이다. 마웬지와 키보는 아주 대조적 모습이다. 마웬지는 해발 5,000미터로 붉은 산화철색의 날카로운 능선을 이루고 전문 알피니스트가 오를 정도로 험악한 반면, 키보는 5,800미터의 거대하고 자갈빛 회색으로 사람이 오를 수 있다.
마웬지탄캠프 주위에는 작은 화산호수가 있다. 길이와 폭이 100여미터 크기인데 물이 흘러들어오는 곳도 나가는 곳도 없는 크레이터 중앙에 위치한다. 화산이 만든 호수다. 호수 주변이 캠프지이다. 우리팀 외에 서너팀이 텐트를 쳤는데 60명 이상의 우리팀 텐트가 캠프 중앙 호수변에 위치 한다.
오후 1시반경 캠프에 도착해 짐정리를 하고 두시간 휴식하였다. 우리는 고소적응을 위해 호수 주위 크레이터 능선을 1시간반 정도 트레킹을 했다. 두통을 호소하는 대원 서너명은 불참했다. 훈련을 마치고 캠프로 돌아와 텐트에서 누워 쉬는데 두통이 있어 텐트 밖으로 나가 여러 사람들 대화에 끼어든다.
홍박사는 인천에서 정형외과를 운영하는데 친구와 동업한다고 한다. 그는 남의 간섭을 싫어한다. 고혈압의 당뇨가 있어 열심히 운동을 한다. 머리를 감기에 두피로션을 주니 임무림씨도 달라고 한다. 몇일 사이 공동목표를 향해 함께 행동하며 서로의 마음이 열리고 있다. 트레킹은 사람의 사회성을 발견하는 훈련의 하나다. 서로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관념에서 멀어져 남을 무조건 도와주고 영혼과 교감하는 훈련이다.
오늘 새벽, 마웬지탄 캠프에서 화장실에 가려니 텐트가 얼었다. 밤새 영하로 기온이 떨어졌다. 털모자를 쓰고 실장갑을 끼니 한결 나아졌다. 오늘저녁 11시에 키보를 오른다. 트레킹 막받이에 왔다.
마웬지탄 캠프에서 키보산장까지는 너덜지대를 두시간 통과하니 사막이나 화성표면 같은 붉은 색의 모래와 잔돌이 흩어진 낮은 구릉지대와 키보가 연결된다. 구릉이 끝나는 지점에 키보가 있다. 구릉지대를 지나려니 들소발자욱보다 조금 작은 모양의 사슴발자욱이 간간이 나타나고 들개 배설물도 보인다. 도마뱀이 갑자기 작은 덤불 사이로 사라진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사막 같은 모래지대에 식탁을 펴고 점심식사를 한다. 포터들이 우리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남긴 음식을 먹는다. 가이드는 격이 높아 별도로 식사를 하는 듯 하지만 그들의 식사모습은 본적이 없다. 약소국에 태어났기에 받는 대우라고 할 것 이다.
2006년 7월 13일 목요일
그제 밤 11시부터 어제 하루는 이번 트레킹에서 가장 힘들고 중요한 과정이었다. 그제 밤 10시에 키보 등정 트레킹 준비를 시작했다. 키보캠프 천막식당에 간단한 식사가 준비되었다. 스프와 식빵에 쨈을 발라 한 조각 먹었다. 11에 집합 11시30분에 다데우스 치프 가이드의 인솔로 등정이 시작되었다.
키케렐와와 마웬지탄을 지나며 키보의 등정부분을 백대리로부터 익히 들어와서 전체 모습은 머리속에 그리고 있었는데 직접 트레킹을 하니 길이 무척험하고 경사가 급하다. 처음 1시간 정도는 그래도 자갈밭이라 지그재그로 오르기는 나았지만 고소 때문에 한 발짝을 뗄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만월 달빛이 대낯같다. 헤드랜턴을 꺼도 길이 잘 보인다.
한두시간 올랐을 때 팀에서 가장 나이 어린 16세 명선이가 발이 시렵다고 고통을 호소해와 아버지와 함께 하산해야 했다. 고소증이 점차 심해진다. 조금만 보행속도를 올려도 더 이상 진행이 어려워 멈춰야 한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급경사에서 중심을 잃는다면 참사를 당할 수도 있는 순간이 계속된다.
팀원 중 한 사람이 휴식과 트레킹 속도에 불만을 터뜨린다. 말수를 줄이고 오로지 올라야 한다는 생각만이 내 머리 속에 있어 간섭을 할 수 없다. 아내는 춥다고 우의까지 입는다. 나도 우모장갑이 있어 안전할줄 알았는데 손이 너무시려워 파일장갑을 끼고 그 위에 우모장갑을 꼈다. 다운자켓으로 따듯할 것 같았는데 고어텍스 자켓을 캠프에 두고 온 것을 후회했다.
길만스 포인트에 가까워 올수록 큰 바위 사이를 뚫고 지나야 하니 더욱 힘들어진다. 먼동이 등뒤에서 붉게 구름선을 물들이는 것을 힐끗 보았을 뿐 카메라를 들이댈 기력조차 없다. TV에서 연예인 진미령이 울고불며 올랐다고 한 곳이 이곳일 것이다.
아내는 가이드 브라이언이 밀착지원을 하는데도 고통 섞인 숨을 내쉬며 신음을 쏟는다. 그래도 본대에서 뒤쳐지지 않으니 다행이다. 이 상황은 평상시에 건강의 자신감과 무관하다. 고소에 걸리면 제아무리 힘센 장사라도 맥을 못 춘다. 우리 일행 중 그런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큰소리치던 이들이 맥을 못 추는 것이다. 오르기 전에 식욕이 왕성한 사람들은 고소증을 이겨낼 것 같았지만 반수 이상이 탈락한다.
네팔 트레킹에서는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고도 4,000미터 였지만 이곳은 5,900미터이니 1,900미터나 더 높은 것이 고소증이 심한 이유일 것이다. 박영석, 엄홍길 등 등반 전문가들은 타고난 사람들이다.
길만스포인트에 오르니 이미 햇살이 눈부시다. 우리보다 일찍 올라온 서양인들은 고소증통증을 가라 앉히느라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보인다. 길만스 포인트 표지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좁은 봉우리가 붐빈다. 고소증 때문에 하산하는 김원규씨에게 기념촬영을 해주었다.(나중에 하산해서 사진을 찾지 못했다)
아내의 콧물에 피가 번져 나온다고 부라이언이 즉시 하산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내게 의견을 묻는다. 아내에게 의견을 물으니 우후르봉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지만 브라이언과 다른 가이드가 하산을 서들러야 한다고 했다. 나는 길만스 표지판을 배경으로 아내의 사진을 찍은 후 가이드에 잘 부탁한다고 하고 아내와 헤어졌다.
고소증을 가라앉히며 정신을 가다듬고 길만스 포인트 주변을 바라본다. 엄청난 크레이터가 낭떠러지 아래로 보인다. 대규모 화산활동의 증거이다. 남쪽으로 작은 빙하가 계단을 이루고 있다.
우후루봉은 길만스포인트에서 1시간반 거리에 있고 그곳이 키보의 최고봉이다. 백재호 대리에게 배낭을 맡기고 가이드 매티유와 우후르로 향했다. 햇살이 퍼져 추위는 좀 덜했지만 한발짝을 오를 때 마다 두통과 호흡곤란이 계속되니 전진속도가 형편없다. 빤히 보이는 곳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된다. 트레일 좌측으로 우후루봉까지 엄청나게 거대한 빙하가 연속적으로 전개된다.
킬리만자로의 빙하가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매년 녹아 몇 년 후면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엄살이라는 생각을 했다. 드디어 우후루봉에 도착했다.
몇몇팀원은 돌아오다 마주치고 치프가이드 다데우스와 한두 명의 팀원에게 사진을 찍어 주었다. 치프가이드가 왜 내 기념사진을 찍지 않고 남의 사진만 찍느냐고 묻는다. 그는 여기서 오래 머물면 생명이 심각해 질 수 있고 긴급구조도 불가능하니 가급적 하산을 서들러달라고 해서 일행에게 그대로 전했다.
하산은 오를 때보다 고소증이 덜해서 속도가 빠르다. 도중에 김학중씨를 만났다. 그는 고소증에 시달려 트레킹 속도가 늦었다. 하산팀원은 가이드 두명에 우리 넷 모두 여섯 명이다. 길만스포인트에서 하산을 하는데 오를 때는 어두워 몰랐는데 그렇게 심한 길이 아니었다.
고소증 때문에 별것아닌 길을 고통 속에서 오른 것을 생각하니 고소증의 심각성을 알만했다. 나사식 트레일을 자갈밭을 가로질러 직선으로 내려오니 속도를 낸다. 한참을 자갈 스키를 타며 내려오다가 신을 보니 뒷목이 많이 닳았다.
키보 캠프에 도착하니 정오가 좀 지났는데도 저녁 같은 기분이다. 그만큼 고생을 한 때문에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먼저 내려온 아내는 나를 걱정하며 기다리다 나를 보고 반긴다. 아내는 눈이 붓고 몸상태가 좋지 않지만 길만스포인트를 오른 것이 대단하다. 나는 우황청심원 약액과 홍삼엑기스와 과일을 먹고 슬리핑백 속으로 들어갔다.
오후2시 50분 짐을 챙기고 텐트에서 나왔다. 일행은 이미 호롬보산장으로 떠나고 우리만 남았다. 가이드에게 배낭을 맡기고 맨몸으로 호롬보산장까지 걸었다. 국립공원이라 경관이 빼어나다. 김학중씨, 하성근씨는 미국 인디애나 대학원 17년 선후배 동창으로 김학중씨는 바이오회사를 하성근씨는 영화사를 운영하는 엘리트들이다. 이번트레킹에서 처음으로 텐트신세를 지지 않고 산장에 여장을 풀었다. 김학중씨 팀과 한방을 쓴다.
2006년 7월 14일 금요일
오랜만에 텐트가 아닌 호롬보 산장에서 푹 자고 나니 몸이 개운하다. 그동안 텐트잠은 토막잠이었다. 아침에 밖으로 나오니 얼음이 얼었다. 그제저녁에도 겨울차림으로 호롬보 산장 끝자락에 임시천막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어제 아침 역시 어제보다 기온이 더 내려갔다. 청명한 날씨에 저 아래 세상은 흰 구름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호롬보 산장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다. 저 아래의 구름 하늘에는 키보 그리고 호롬보 주변 구릉이 한데 어울려 호롬보가 예사로운 경치가 아니다. 청명한 날씨는 적도 아프리카 남위3도를 더욱 내 마음 속으로 새겨 놓는다.
내가 임시로 작명한 Giant Tree(나중에 킬리만자로 지도에서 식물의 이름이 Senecio Kilimanjari로 확인됨)가 산장 주위에서 아침 인사를 한다. 아침식사로 밥, 국 그리고 쨈바른 식빵을 먹고 오전 8시에 호롬보 산장을 떠났다. 호롬보에서 만다라산장까지는 키보산장에서 호롬보 산장까지보다 약간 멀다. 호롬보의 고도가 해발 3,700미터이므로 아직 고소가 온다. 아내와 나의 눈은 약간 부었다. 아내는 키보부터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어 걱정이다.
정오 경에 만다라 산장에 도착했다. 이곳의 고도는 2,750미터이다. 이제 거의 고소증은 살아졌지만 전진속도가 늦은 우리부부와 한명을 합친 3인과 가이드 두명은 마랑구 게이트로 가는 도중에 공원관리 차량을 편승하기로 했다. 이곳 트레일에는 원숭이들이 많다고 하는데 우리일행도 Blue Monkey가족이 트레일 주위 나무에서 이리저리 나무위를 다니며 나뭇잎을 뜯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곳 트레일은 고도가 낮아 활엽수림대가 시작되어 삼림이 울창하니 원숭이들이 서식할 수 있다. 킬리만자로 국립공원은 우리나라 제주도보다 약간 작은 넓이를 지닌 것 같은데 이곳에 사람이 전혀 살지 않으니 우리나라같이 좁은 땅을 가진 곳에 있는 내게는 꿈 같은 곳이다. 엄청나게 넓은 땅에 엄청나게 높은 산은 아프리카가 아닌 전 지구적 유산이다. 먼지가 풀석거리는 트레일은 밀림대에 오면서 젖어있어 걷기가 좋았으나 물이 흐르는 곳은 진창으로 미끌어질 염려가 있다.
공원관리차량에 우리 일행이 올라 타니 이곳 사람특유의 몸냄새가 풍긴다. 시원치 않은 내 후각에도 전해오는 체취이니 정상인에게는 상당히 강렬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곳 여성들의 머리칼은 대개가 곱슬거려 두피에 붙어있다. 특히 어린이들은 남녀 구별이 안된다. 그래서 여학생들은 바지 대신에 치마를 입는다. 성인은 신체구조상 남녀를 구별할 수 있으나 애들은 불가능하다. 이곳사람들도 이를 감안해 여학생 교복은 스커트를 선호하는 것 같았다.
만다라산장에서 키보에 오를 때 캠프를 몇일간 함께 했던 하와이에 왔다는 부부를 만났다. 부인이 반가와하며 키보까지 갔다 왔다며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영국청년 3인과도 만났다. 그 중 하나는 내가 작년에 다녀온 네팔트레킹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들은 내 카메라에 관심이 있었다. 이 카메라는 아주 험한 곳에 항상 지고 다니는데도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성능이 좋은 기계도 필요하지만 튼튼한 것이 우선이다.
마랑구게이트의 고도는 해발 1,800미터이니 이제 고소증에서 벗어났다. 이곳에서 하늘을 보니 구름이 머리위에 있어 어느새 내가 속세에 던져진 사실을 알 수 있다. 마랑구 게이트는 공원시설이 잘 정돈되어있다. 청결한 화장실, 친절한 매점직원과 활짝핀 살구꽃이 먼나라의 지친 여행자를 반긴다. 이곳에 우리를 태울 중형버스에서 날라온 도시락을 매점에서 구입한 맥주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를테면 환속 정찬이다.
이곳에서 현지지원그룹과 이별이다.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꿋꿋이 생명을 이어가려는 이곳 생존의 현장을 본다. 백재호 여행사 대행과 다데우스 현지 치프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두편으로 갈라서서 노래와 약간의 율동을 섞어 이별식을 거행한다. 현지인들이 노래와 춤을 우리는 춤으로 함께 어울린다. 노래가 끝나자 급료가 지급되었다.
지원그룹 대표와 일일히 악수하면서 나는 아내곁에서 밀착 보호한 Brian에게 70불을 건네니 의외인듯 기뻐하며 다른이들에게 자랑이다. 백대리는 너무 과한 사례였다고 하지만 모두에게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한사람에게만이라도 은혜를 베푸는 마음으로 그를 선택한 것 같다. 나의 생각이 옳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행위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나와 아내의 짐을 운반한 포터에게는 애들이 입던 티셔츠를 몇장씩 건네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모쉬’로 귀환해서 마울리 여행사에 맡긴 짐을 찾아 사파리차 두대에 짐을 나눠싣고 아루샤를 거쳐 ‘롱고롱고로’크레이터로 향했다. 모쉬에서 고개를 높이 드니 하늘높이 구름위에 키보가 솟아 있다. 이곳에 사는 주민이 경제적여유가 있다면 분명 낙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랜세월 영국식민지로 영양분을 앗아간 껍질뿐인 경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만일 영국이 이나라를 유린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지금보다는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약육강식이 세상의 이치다.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모두를 잃는다.
아루샤에는 5,000미터 가까운 ‘메루’산이 버티고 있어 아루샤에는 물이 풍부하다. 사바나 평원에 높은 산은 사막화를 막는 축복인 사실을 발견한다. 평원은 메마르지만 높은 산은 구름을 머물게해서 비와 눈을 받아 울창한 삼림이 물을 저장했다가 사시사철 생명의 물줄기를 세산으로 내려보낸다. 이것이 낙원이 아니고 무엇인가. 흙바닥에 구운 옥수수 몇 자루를 놓고 파는 원주민들 찌그러진 고물차들은 세계적 쓰레기 폐기장이 되고 있다. 오후 5시에 모쉬를 벗어나 아루샤 시내로 들어서니 차량이 많아 트래픽 잼에 걸린다. 2차산업이 전무한 탄자니아는 도시전체가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발생하는 산업화 이전 과정이다.
킬리만자로 산록 도로변에는 경작이 가능하여 바나나, 해바라기와 옥수수를 생산하고 주민들은 변속장치 없는 자전거를 운송수단으로, 일본과 중국에서 수입한 중고차량, 사파리에서 폐차한 차들이 먼지를 일으킨다. 도시 차도가에는 목조 의자와 침대를 제작하는 가구점이 눈에 많이 뜨인다. 자전거 수리점, 주유소 등도 보인다. 곳곳에 초등학교가 있는데 대개 교회에 부속된 것 같다.
만야라를 거쳐 밤 8시, ‘와일드라이프 롯지’에 도착했다. 아프리카 평원에 어울리는 넓직한 로비와 2층의 침실 날개로된 건물 2층 17호실 더불베드실에 여장을 풀었다. 1층부페식당에서 밤9시 늦은 저녁식사는 여행자를 가만두지 않았다. 우리는 오랜만에 화산재로 덮어쓴 몸을 여러 번 닦았다. 오랜만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흰수염에 검은 머리의 언밸런스 노인이다. 맥주와 와인이 여러 번 식탁에서 돌자 취기로 바로 장소를 옮긴다. 이제부터는 긴장이 풀린 속세의 대화다.
2006년 7월 15일 토요일
이번 킬리만자로트레킹에서 의외의 충격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제 응고롱고로 사파리투어에서 드디어 나타났다.
크레이터 안에 마사이전통춤과 노래즉석 공연에서 10여명의 남녀가 그들의 주거지를 행진하며 뿜어내는 원시적 소리는 충격적이었다. 친척인듯한 그들의 나이층은 청년에서 노인까지의 남녀로 구성되었는데 남녀의 배에서 나오는 소리를 입술로 간간히 끊어 ‘음 음’하며 바탕소리를 이루고 여성한두명의 여성소리를 섞어내는 축하용 행사인데 춤보다 그 소리가 너무나 마음을 때렸다. 우리의 창, 서양의 벨칸토 등 그 어느것도 이처럼 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크레이터는 16 x 19km의 엄청난 넓이로 600m낮은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크레이터 에서 내려올 때, 사파리 차량들의 먼지꼬리가 손가락 끝만치 작게보이고 동물들이 점들의 집합으로 작게 보이고 있다. 나무하나 없는 사바나 평원이다 나 어릴 때 동네 개울가 봄철 풀밭을 연상케 한다. 마사이 목동이 소떼를 몰고 가고 바로 가까이에서 얼룩말과 누우가 한가히 풀을 뜯는다. 목동이 모는 소는 50여 마리인데 구룹으로 풀을 뜯는 누우와 얼룩말은 수적으로 압도한다. 이런 맏지못할 광경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며 그 동안 내가 지니고 있었던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설정에 혼란이 온다.
가젤과 야생멧돼지도 있고 사자 가족도 나타났다. 이 분화구에 동물이 서식하는 것은 염수와 빗물이 항상 마르지 않는 까닭인 것 같다.
이 곳 먹이사슬의 최상위는 역시 인간 마사이지만 그들이 기르는 소를 양식으로 취하고 있는한 동물의 세계에서 먹이사슬의 최상위는 사자인것이다. 사자가 분화구의 모든 동물을 보호하며 키우고 있다. 사자가족과 야생멧돼지 두마라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멧돼지는 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사자가족들은 편안히 누워 휴식 중이지만 자신의 영역안에서 언젠가 그들이 취할 동물들을 감시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마사이 어린애들은 수많은 소떼를 혼자서 거느리고 앉아있는 모습은 사자가족과 동일선상에서 생각 할 수 있다. 이 아이가 부모의 지시로 그들의 소떼를 사자 옆에서 돌볼 때 그 아이는 방어와 균형본능이 생기고 이것이 그의 삶을 형성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마사이는 자연과 균형을 이루며 산다.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것들이 많다. 문명과 산업화는 자연과의 조화를 파괴하고 있다. 사파리를 끝내고 아루샤로 돌아오면서 사반나평원의 마사이부락을 보면서 탄자니아에서 땅부자가 마사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반투족이 80% 이상인 탄자니아는 소수의 마사이가 드넓은 땅의 주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땅에 대한 소유 개념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소에게 먹일 풀이 있는 곳이면 어디던지 갈 것이다.
현대인들은 풀은 보지 않고 땅만본다. 땅만 소유하면 언제고 풀을 키울 수 있고 그에 따라 소에게도 먹일 수 있다는 것이 문명과 산업화한 사람들의 생각이다. 마사이는 역발상이다. 땅은 모두를 살지 못한다. 사막이나 바위투성이의 땅은 많은 생명을 살지 못하게 하므로 땅은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풀은 모두를 살린다. 풀이 있으면 물이 있고 동물이 살 수 있는 터전을 이룬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본능을 지닌다. 마사이는 인간들을 대표로 문명인들에게 자연과의 균형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사이는 크레이터에서 마음놓고 소떼들을 돌볼 수 있지만 문명인들은 사파리 차안에 갇혀있어야 한다. 점심도시락도 차 안에 갇혀서 먹지 않으면 육식성 큰 새에게 빼앗긴다. 어느 아이가 밖에서 도시락을 먹다가 새에게 빼앗기자 새를 피해 부모곁으로 피한다.
아루샤 임팔라호텔에서 트레킹팀의 송별연겸 마지막 저녁식사를 했다. 이곳에는 각종 현지 동물의 바비큐와 맥주를 제공하는 메뉴가 있다. 나는 와인 3병을 냈다. 아프리카 일급호텔의 손님맞이 준비는 엉성하다. 산업의 낙후는 서비스의 낙후어 맥이 같은 모양이다. 호텔의 방음장치, 온수공급, 목욕용품 등에서 수준이하이다. 나는 이런 현상이 경제적 낙후의 영향이라고 본다.
저녁식사후 시내 관광을 하려고 했지만 가이드가 바람을 내는 바람에 도보로 시도했다. 호텔측에 도시안내도를 얻어 시내엘 나간다고 했더니 위험하다고 한다.
2006년 7월 16일 일요일
매주 토요일은 말라리아 예방약 복용일이다. 아내와 함께 4주째 복용했다. 아침에 임팔로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버스지붕위에 짐을 얹었다. 우리를 실은 마이크로버스는 처음 국경을 넘었던 그 차에 그 운전수 솔로몬이다. 그는 양국을 오가는 운전기사임과 동시에 국경을 무사통과 할 수 있는 브로커역할을 겸한다. 마낭가 국경 출입국 절차를 우리가 차에서 내리지 않은채 신속하게 처리하는 능력이 있다.
출입국 관리소는 여행객들로 붐비지만 우리는 차안에서 통관 모습을 구경했다. 케냐로 넘어오니 마사이 걸인과 잡상인들이 벌떼같이 차창으로 몰려든다. 나는 마사이를 마지막 자연보호주의자로 높여 생각하는데 이런 모습에서 또 갈등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모습은 어디를 봐도 늠늠하지 않았다. 초최한 빈민의 행색이다.
케냐 국경을 조금지난 기념품상가에 들렸다. 흥정할 시간이 없어 에보니로 만든 마사이 여인 조각상, 원주민 노래가 담긴 카세트 테이프, 아프리카 원주민에 관한 화보집과 아내가 애들에게 선물할 팔찌, 천에 그린 마사이 풍경 등을 구입했다. 신용카드 결제를 하는 데 너무 시간이 지체되어 현금 200불을 결재했다. 선진국이라는 것은 모든 행정의 효율화이다. 이들 나라의 행정력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다. 이들 나라에서 느림의 미학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이로비 공항을 30분쯤 남긴 곳에서 오후 2시에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닭고기 전골에 이곳 쌀밥을 얹은 것을 먹으니 다시 구운 닭고기에 감자튀김이 나온다. 흙맥주를 곁들였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나이로비 공항에 도착했다. 차에서 짐을 내리는데 백대리가 우리를 안내할 이승위씨와 만나 얘기하는 것을 보고 다가가 인사를 했다. 트레킹팀 일행과 이별이다. 김원규씨는 나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일일히 일행과 인사를 하고 그들은 짐을 가지고 공항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아내와 나 둘만 남았다. 이승위씨는 ‘All That Safari’를 3년째 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가족은 아내와 갖난애기 셋이다. 그의 얘기를 들으니 나이로비는 범죄의 천국같았다. 차문을 닫지 않으면 서 있을 때 문을 열고 권총강도가 탈 수 있어 반드시 차문을 잠근다고 하고 집 대문에 경비를 두고 비밀 신호로 경비와 연락해 문을 열고 다닌다고 한다.
우리가 여장을 푼 나이로비 교외 사파리 호텔은 엄청나게 넓은 대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워커힐과 같이 넓지만 산이 아니라 평지인 것이 워커힐보다 더 유리 해 보인다. 로비에서 우리가 체크인한 505호실은 300미터는 더 떨어지고 식당도 아침과 저녁 식당이 별개였고 곳곳에 공연장도 있다. 이제껏 보지 못한 엄청난 목조건축 규모다. 호텔 정문에는 무장경비 두사람이 있어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 사파리 비용을 건네는데 이승위씨가 커튼을 닫는다. 자기가 돈을 지닌 것을 알면 미행을 달할 위험이 있다고 한다. 그와 일정을 맞추었다. 그가 떠난 뒤 오랜만에 더운물로 목욕을 한다. 비데가 별도로 설치되고 창호철물과 목욕 철물이 중후한 놋쇠로 고급스럽고 고색창연하다.
오후 7시에 등이 은은하게 비치는 분위기 있는 정원을 지나 저녁식사를 겸한 공연장으로 갔다. 매뉴는 어제 임팔라호텔에서 먹은것과 같은 것으로 이번에는 타조, 악어, 염소등도 추가된다. 우리는 식당분위기로 인해 신혼여행기분이 든다.
아내는 우리가 돈이 없어 속리산으로 버스를 타고 신혼여행간 추억을 더듬었다. 당시는 신혼여행이 제주도로 비행기를 타고 가는 때였지만 우리는 돈이 없었다. 아프리카 나이로비 근사한 호텔식당에서 공연을 즐기는 30여년 전이었다면 우리는 분명 재벌가의 자식들이었으리라.
첫댓글 글 써서 밥 먹는 제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아기자기하고 자세한... 최고의 산행기를 올려 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좋은 일기 몇번 읽었읍니다. 같은 사물을 보아도 훌륭하신분이 보면 확실히 다릅니다. 일기에 제 이름이 3번이나 올라있어 기분이 좋으네요. 건강하시고 좋은 글 많이 남겨 주세요. 김 원규
안녕하세요?김병효선생님 최열옥입니다. 이번 킬리만자로 잘 다녀오셔서 제가 더 기뿝니다. 사진 찍으시랴, 일기 쓰시랴,,엄청 바쁘셨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께서 안부 전해주세요.. 그럼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