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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와 함께 산책하며 대화하며
풍수(風水) 하면 ‘산소자리 잘 잡아서 후손들의 발복을 기원하는 일’쯤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고정관념을 불식시키고 풍수지리학 고유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는 뜻에서 이번 연재가 기획된 것으로 안다. 하지만 민중들 가슴 속에 따스하게 자리잡고 있는 역사․문화 속에서의 풍수, 효도와 인정․사랑을 강조한 풍수, 환경보호의 안목까지 갖춘 지혜로운 우리네 풍수사상을 제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기존의 풍수가 다소 고답적이고 딱딱한 학문으로 인식된 점에 감안해 먼저 독자들의 흥미와 관심을 통해 이해를 돕는 방식으로 연재를 이어갈 계획이다. 충북 도내를 답사하면서 정치인과 풍수, 문학과 예술의 풍수, 역사․문화 속의 풍수, 환경과 풍수 등 우리 지역적 특성을 풍수적 관점에서 풀어가 보기로 했다.
나의 작은 풍수지식을 밑천으로 연재라는 커다란 지면을 제대로 채울 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독자 여러분과 함께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는 심정으로 엮어 볼 생각이다.
▶ 한국의 풍수 ① 괴산군 청천면
포크레인 발굽 아래 명당이 그 어딘가
‘사람이 살만한 장소는 첫째 지리가 좋아야 하고, 둘째 생리가 좋아야 하고, 셋째 인심이 좋아야 하고, 넷째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 지리가 비록 좋더라도 생리가 모자라면 오래 살 곳이 못되며, 생리가 비록 좋더라도 지리가 나쁘면 오래 살 곳이 못된다. 지리와 생리가 모두 좋으나 인심이 후해 착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기게 되고 가까운 곳에 산책할 만한 산수가 없으면 정서를 화창하게 하지 못한다’고 《택리지》에서 청수산인 이중환은 이야기했다. 이 네 가지가 모두 구비된 곳이 사람이 주거할 수 있는 조건인 것이다. 주거의 생활환경의 선택적 조건은 자연과 떨어져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자연의 기와 태양의 기를 받아들여 인간과 인간과의 정(기)을 접목시킬 때 자연의 기와 태양의 기를 제대로 자기의 것으로 취득할 수 있는 것이고 주택을 짓거나 건물을 지을 때의 주거 공간에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명당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살아서건 죽어서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바로 명당이다. 괴산군 청천면 한 지역에서 5명의 국회의원을 배출 했다기에 풍수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청천으로 향했다. 흰 소맷자락 늘어뜨리는 안개 그루터기에 앉아 쉬어 가는 바람, 한 줌 햇살이 겨울을 희롱하고 산새들 짧게 울고 가는 전형적인 사골 풍경이다. 향토사학자 김사진 선생과 함께 길을 떠났다. 구수한 입담과 박식하고 풍부한 청천의 역사상식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현직국회의원인 김종호(신한국당․괴산)․김영환(국민회의․안산을), 이승만 정권 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기붕, 4․19 직후의 김사만, 유정희 때의 박형규까지 한 면에서 5명의 국회의원을 탄생시킨 풍수적 논리로 찾아보고자 함인 것이다. 얼마 전 MBC 다큐프로에서 전북 임실의 박사 마을을 취재한 바 있다. 한 마을에 박사가 수없이 많이 배출된 이유를 다각적인 방법으로 찾았다. 풍수적인 부분, 각 마을의 성씨집성촌의 경쟁, 부모의 헌신적인 교육열 등으로 나누어 제작하였다. 어느 한 부분만 가지고는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는 데에는 분명히 동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풍수적인 관점에서만 다루기로 하였다.
자연이 무너진 곳 명당도 없어라
청천면은 선유동 구곡, 화양 계곡, 우암 송시열 신도비 등의 많은 관광명소와 유적지가 존재하고 있다. 그 만큼 사람 살기가 편했다고 생각된다. 김종호 의원의 생가로 향하였다. 겨울의 중턱에 서 있는 관계로 화양동 국립공원 일대는 인적이 끊긴지 오래다. 입구에서부터 펼쳐지는 경치를 감상하며 우암 송시열 선생이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만들어 놓았다는 만동묘를 찾아 걸음을 재촉했다. 화양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은 겨울 추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얀 거품을 물고 흐르고 있었다. 여름의 번잡함을 훌훌 털어 버리고 주변이 잘 정돈되어 깨끗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만동묘를 가려면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도록 하기 위해 만든 수문장은 하마소를 지나 만동묘로 향했다.
화양 서원과 만동묘 앞에 자그마한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다는데 지금은 모두 떠나 버리고 민박집 한두 채와 식당, 매점만이 덩그러니 있지만 그것마저도 겨울철의 한가람이 쓸쓸함을 가중시키고 있다. 풍수에서의 기본은 물과 바람과 산이다. 물이 맑으니 좋고 바람이 깨끗하니 좋으나 산세가 너무 강하다. 높고 힘이 있고 웅장한 산자락에서는 한 두명의 영웅 호걸을 탄생시키지만 사람의 거주지로써는 타당치 않다. 한 예로 김유신 생가터도 강력한 산세로 명장을 탄생시켰지만 지금은 모두 떠나고 빈터만 남아있다. 설악산, 치악산과 같은 험한 산세에는 관광명소로 적당하지만 명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풍수계의 지론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처럼 기개가 왕성한 사람이나 김종호 의원처럼 걸출한 인물 한두 명은 배출될 수 있지만 일반인이 살 수 있는 주거지의 자리로는 불가하다.
김종호 의원의 선산이 만동묘 뒤편에 있어 무해 무덕한 터이지만 풍수적으로 명당이라고 할 자리는 아니었다. 효종이 북벌론을 주창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자 이를 슬퍼한 우암 선생이 매일 새벽마다 바위 뒤에 꿇어앉아 통곡했다는 읍궁암을 뒤로하고 이기붕의 생가 후평리로 향했다.
도명산과 대산, 낙영산의 산줄기를 따라 영성된 청천면 후평리 뒤뜰에 논과 밭이 많이 있다고 후평리라 명명되었다는 후평리는 노서하전형의 형국이다. 늙은 쥐가 먹이를 찾아 밭으로 내려오는 듯한 산세라 하여 붙여진 것인데 늙은 쥐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산이 후평리의 전답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풍수상의 명당의 터이다.
이기붕의 공과 죄악을 따지기 이전에 인물을 배출할 수 있는 터전임은 확실하다 하겠다. 그러나 용화 온천이 개발되면 동네 앞으로 흐르는 달천강으로 폐수가 흘러들 것이고 여관이나 호텔처럼 유락 시설이 자연을 파괴할 것이 뻔한 이치이고 자연이 훼손된 물과 공기가 오염된 풍수란 존재치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풍수란 물과 공기가 깨끗해야 함인데 개발이란 미명하에 자연을 파괴하고서야 제 아무리 좋은 자리에 묻히고 좋은 터에서 살아간들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아무리 명당자리라고 해도 물이 썩고 공기가 오염된 땅은 명당이라 할 수 없는 것이 진리인 것이다. 동네 오른쪽에 개발중인 수련장도 자연파괴로 나빠 보였다. 포크레인이 산 위에 산자락을 파헤치고 있으니 풍수의 기본인 우백하고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개발을 방치할 때 우리의 후손들에게 엄청난 재앙이 미치게 될 미래가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병졸이 필요해 시장이 생겨나고
아픈 마음을 안고 청천시장으로 향하였다. 김영환 국민회의 현의원의 생가의 터가 있는 곳이다. 청천시장은 배가 떠가는 형상의 행주형(行舟形)의 명당의 터다. 행주형에는 우물을 파면 안된다는 것이 예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이다.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나 망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 배를 물에 띄우기 위해서는 선체가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가라앉지 않도록 하여 키와 노로 진로를 잡아야 한다. 키와 노의 노릇을 하는 것이 솟대이다. 솟대를 세움으로써 배의 형상을 균형을 잡게 해 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풍수적 용어로는 비보(裨補:허한 것을 채워준다)라고 한다.
비보 관념초기의 상징적 의미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공간과 기능의 탄생이었다. 그래서 솟대(솟대란 장대나 돌기둥 위에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앉힌 신앙의 대상물을 가리킨다.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한반도 전지역에 널리 퍼져 있다)를 세워 돛대로 삼는다. 배의 안정과 순항을 위해서는 키, 돛대, 닻, 배머리, 배말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솟대를 비보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솟대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새마을 운동에 밀려 모두 사라진 지 오랜 시간이 흘렀고 김사진 선생이 가르쳐준 솟대의 위치에는 상가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김영환 의원의 생가터에는 솟대에서 50m내에 위치하여 배의 중심에 있어 혈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혈은 곧 명당이요 명당의 중심은 곧 혈이니 그 자리에서 태어난 기로 인하여 형은 국회의원, 동생은 박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청천시장의 안산에는 우암 송시열의 묘가 있다. 전원적인 시골 풍경과 아름다운 경관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괴산군 청천면, 청천면을 표시하는 입구 오른쪽에 마을을 관통하는 구룡천이 잔잔히 흐르며 중턱을 넘어서 주춤대는 겨울의 운치를 한껏 더해준다.
2천 2백여 가구 6천 7백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 살고 있는 청천면, 대부분은 농사를 짓고 살고 있지만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청천면의 모든 행정을 관장하고 있는 면사무소 왼쪽으로 10m정도 떨어진 곳에 우암 송시열의 묘소를 알리는 팻말이 보인다. 팻말을 따라 백미터를 들어서면 지방 기념물 10호로 지정된 우암 송시열 선생의 신도비(神道碑)가 서있다.
신도비를 뒤로하여 청천면을 보듬고 지켜보고 서 있는 매봉산이 장중하게 버티고 있다. 이곳이 우암 송시열 선생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지금부터 210년 전인 조선왕조 정조 3년(1779) 화양동에 살고 있던 송종수(宋宗洙)가 그의 7대조인 송시열(1607~1679)의 묘를 경기도 수원에서 청천리로 이장하였다. 매봉산 정산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깨끗하게 정돈된 계단이 송시열 선생의 묘소까지 이어져 있다. 계단 위에는 겨울의 추위에 지친 낙엽들이 수북히 쌓여 죽음을 찾아 나서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정상에 다다르니 단정하게 정돈된 묘소가 청천면을 부드럽게 감싸며 지켜보고 있다. 묘소에서 바라보이는 곳이 바로 행주형국의 청천시장이요. 그 정가운데가 김영환 국회의원의 생가지터이다. 빈 가지에 걸린 한 줌의 햇살과 오후 들어 구룡천 둑 위로 나는 새떼는 햇살 쏟아지는 하늘을 거슬러 오른다. 못자리 주변은 소나무로 가득하다. 대체로 소나무가 잘 자라는 곳이 명당이다. 우암 선생의 묘는 장군대 좌형국의 명당이다. 이런 장군의 이미지가 담긴 형국에는 그에 상응하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여자의 성기 모양의 여근형에는 시장(市場)이 남성들이 많이 모인다는 의미로 여근형과 음과 조화시키기 위해 양으로 해석하지만 장군형국에서는 졸병으로 해석한다.
“우암 선생을 모신 이 산 매봉산의 봉우리를 장군봉이라 하지요. 장군이 있으면 장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장군봉이 마주 보이는 평지에 청천강을 세웠다는 말이 전해 옵니다.” 향토사학자 김사진 선생의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역사적 상식이다.
당연히 장군은 졸병이 있어야 하고 젊은 졸병들이 없으면 장군의 위엄이 없게 마련이다. 따라서 장군형국의 무덤 또한 발복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그래서 묘 앞에 졸병에 해당하는 많은 사람이 우글거리는 시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암 선생의 묘를 이장한 송종수씨는 청천리 사람들과 시장을 세우기로 하고 그 시설 자금으로 300냥(상평통보)을 기부했다. 시장은 월 6회 즉 5일장이 서게 됐다. 청천시장이 생기게 된 유래다. 결국 시장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고 송시열 묘의 졸병역할을 함으로써 장군대좌형의 지세에 부합하여 자손들이 번창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이 담긴 청천면 사람들의 상징인 장군봉을 바라보고 자란, 또한 그 시장의 혈처에서 태어난 인물 김영환이 오랜 고생 끝에 국회의원이 되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것도 예로부터 내려오던 풍수 영향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인심까지 좋으니 더 바랄 것 없어라
청천을 지켜주는 매봉산 장군봉을 뒤로하고 귀만리로 향하였다. 어느덧 저녁을 짧게 남긴 햇살은 빈가지 위에 맥없이 서성인다. 박씨 마을 집성촌 귀만리. 우암 선생이 이곳에 정착하려고 왔다고 죽산 박씨의 집성촌임을 알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우암 선생마저도 탐을 낸 명당의 터이며 화제의 마을이다. 이웃 신월리의 6가구를 합쳐 30여 가구가 7대째 농사만 짓고 살고 있지만 2명의 대학교수(충북대 농경제학과 박종섭 교수와 경기대 방승식 교수)를 배출하고 청주에 공부방도 만들어 교육에 남다를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
이곳의 지형은 갈마읍천형국의 명당터이다. 목이 마른 말이 물을 마시고 있는 형국이란 뜻으로 갈마음수형국이라고도 부른다. 달천강을 끼고 마을 앞산이 달천강의 물을 마시는 모양을 지니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동네 어귀에 돌장승이 세워져 있다. 원형이 그대로 인 것이 아니고 하나는 반도막이 사라지고 또 하나도 밑 부분은 사라진 채였다. 김사진 선생의 말로는 현재의 위치가 아니고 길가에 서 있던 것이 논두렁쪽으로 밀려나 있다고 했다. 돌장승은 귀만리를 지키는 마을 비보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다.
촌락의 위치로 보았을 때 세 방향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물이 흘러가는 수구로 되어 있는 것이 흔히 있는 지형의 형국이다. 수구가 터져 보여 허한 곳은 나무를 많이 심어 보호하거나 산을 만들거나 하여 마을을 보호하였다. 길 양쪽에는 수구막이로써 벅수나 장승을 세웠다. 한마디로 마을의 단점을 지켜주는 일종의 수호신의 역할인 것이다. 지금은 개발에 밀려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동네의 허한 한 부분을 장승이나 벅수로 장식함으로써 균형을 맞추려 한 조상의 슬기를 감탄할 만하다 하겠다.
200m를 걸어 들어가니 마을이 나왔다. 산태극, 수태극의 전형적인 명당의 터였다. 산이 태극의 형상으로 감싸고 물이 태극의 모양으로 흘러 들어와 흘러나가니 풍수에서는 가장 길한 것으로 치고 있다. 물과 산과 바람을 얻었으니 사람 살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더불어 인심마저 후하니 동네 어귀에서 막걸리 한잔하라고 동네 어른들의 성화를 뿌리치고 간신히 벗어났다.
겨울 벌판에 떠도는 농부들의 기침 소리
새삼 강조하는 것은 풍수란 물 맑고 바람 고요하고 인심 좋은 곳이 명당인 것이다. 이것에 가장 부합한 마을이 곧 귀만리인 것이다. 이 죽산 박씨의 하나가 11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형규란 인물이다. 땅이 좋을 때 인물이 난다는 것이 풍수의 작용이요, 원리인 것이다. 4․19 혁명 직후 잠시 국회의원에 당선된 김사만과 박사학위 기네스북까지 오른 박학다식한 김사달 박사를 탄생시킨 어룡리를 찾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분들의 흔적을 찾지 못하여 풍수적인 부분을 만나지 못하고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바람은 지친 듯 가벼이 날개짓을 하고 하얀 들판에도 어둠은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다. 청천면을 떠나면서 아직은 살아 있는 인심, 물 맑고 공기 깨끗한 고장이지만, 그래서 풍수적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었지만, 개발이란 미명하에 파헤쳐져 가는 산천과 용화온천 개발로 인한 어수선한 분위기가 겨울의 쓸쓸함이 매운 벌판에 떠도는 농부들의 기침소리에 뒤섞이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 한국의 풍수 ② 보은․옥천
풍수는 양기(陽氣)풍수, 음택(陰宅)풍수, 양택(陽宅)풍수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양기풍수란 한 나라의 도읍지나 리․동․면․읍․군처럼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기 위한 넓은 터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써의 풍수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 건국초기 한양천도 과정에서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지를 찾기 위해 계룡산 일대와 한양을 왕래하며 힘든 강행군을 한 과정과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좌향논쟁이 양기 풍수의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누구나 쉽게 대할 수 있는 것이 죽은 사람이 편안하게 안장될 수 있는 자리를 찾는 음택풍수이며 현대에 와서는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살아있는 개인이나 가족구성원이 편안하게 주거하기 위한 주택을 짓기 위한 명당의 터를 찾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것이 곧 양택풍수라 말한다.
지난달에는 양기풍수를 위주로 하여 괴산군 청천면을 산책하였다. 이번 호에는 보은군과 옥천군의 양택풍수로 테마를 정했다. 보은․옥천이야 양기풍수로도 출중하여 의병장이었던 중봉 조헌과 주자학의 대가 우암 송시열 같은 인물과 근현대사에 와서는 정지용, 오장환과 같은 걸출한 문학가도 배출하였고, 지금부터 1백여 년 전의 보은군내 ‘장내리’에서 있었던 동학교도들의 ‘보은 취회’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사회개혁을 부르짖었던 민중집회였다. 동학교도들이 장내에 모여 신분차별의 철폐, 지방색 타파, 공평한 인재등용, 노비문서의 폐기 등과 척양(斥洋)과 척왜(斥倭)를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3만여 명이란 대규모의 인원이 모여든 것도 보은군의 올바를 역사의식과 투철한 정의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고장이 곧 보은과 옥천인 것이다.
우리나라 땅 어딘들 명당이 아닌 곳이 있겠는가마는 현대에 들어와서 개발이란 미명하에 명당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땅들도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아직도 명당의 터로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속리산이다. 속리산 하면 아무래도 보은이 떠오르고 보은하면 곧바로 속리산이 생각되어지는 것은 속리산과 보은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단단한 어떤 연결고리가 있어서인가 보다. 속리산 자락인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에 있는 ‘선병국’ 고가를 찾아 떠났다. 하늘은 눈부시게 맑다. 겨울의 잔재는 아직도 소맷 사이에 남아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은 제법 맵지만 햇살은 겨울을 밀어내기에 여념이 없다.
넓은 명당의 기는 많은 사람을 모으리니
풍수를 연구하는 사람이 명당을 찾아 떠날 만큼 기분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나의 마음은 설렘과 동시에 착잡함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커다랗고 넓은 집에서는 그에 합당한 수의 사람들이 기거해야 하는 것이 양택풍수의 기본인 것이다. 수 없이 많은 곳을 다녀보았지만 성병욱의 고가는 초행길이다. 그러나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던 터이고 지난 해부터 방영되는 문화방송 미니 시리즈<미망>의 촬영 현장인지라 TV를 통하여 눈여겨 보아왔었다. 머슴과 같은 식솔들이 많았던 초기에는 가세가 부흥했겠지만 현재는 분명 적은 식구가 기거하고 있고, 그에 따른 건강 악화나 사업의 실패도 예상될 수 있기 때문에 현장 답사 이전부터 가슴이 무거웠다. 넓은 터에서 적은 수의 사람이 기거하게 되면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자주 꿈을 꾸고 몸의 컨디션이 나빠져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게 마련인 것이다.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직은 저만큼 남아있는 봄을 맞이할 준비에 바쁘게 움직이는 늙은 농부들의 모습이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 속 한편에서 경건함과 쓸쓸함으로 커다랗게 묻어나고 있었다. 어머니의 치마폭과 같은 속리산 자락에 10세기말 보선 선씨인 선정훈 선생이 당대 제일의 대목수들을 초청해 지은 1만여 평의 대지 위에 99칸 한옥의 고래 등의 위세를 자랑하는 고가에 도착했다. 아름드리 소나무 1백여 그루가 장엄한 한옥의 외각을 감싸고 있는 담장 안에는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중요 민속자료 134호인 이 고가는 안채와 사랑채는 공(工)자형으로 넓은 대청마루와 각각 작은 10여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 다포(多包)집의 일종이다. 머슴과 그 외의 식솔들이 기거하던 행랑채는 ㄷ자형태로 30여개의 작은 방들과 곳간으로 이루어졌다. 선정훈, 선병욱 선생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집안의 부를 짐작하고 남음직하였다. 지금은 가세가 많이 줄었지만 선씨의 두 손자인 민혁, 사혁 씨 형제가 안채와 사랑채에 각각 살고 있다.
안채를 둘러보고 난 후 사랑채에 들어섰다. 안방마님의 인자함과 고운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해 준 분은 바로 둘째 며느님이었다. 말씀을 무척 아끼시고 고가의 유래와 가족의 구성에 대한 이런 저런 질문에 다소곳이 미소로만 대답을 대신하시는 모습이 현대의 문명에 휩쓸려 각박해져 가는 나의 모습을 뒤돌아보고 반성해 보는 기회를 가지게 하였다. 머슴들이 쓰던 행랑채는 고시생들의 공부방으로 쓰이고 있었다.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명당의 기를 받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고 이런 좋은 명당의 기운을 가지고 국가 공무원이 되어 바람직한 공무원상을 정립하고 국민에게 봉사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가족들끼리 살던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가족들의 건강이 매우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적당한 크기에서는 적당한 사람이 살아야 된다는 풍수의 진리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사랑채에는 선다헌(宣茶軒)이라 하여 차도 마시고 대화도 나누는 쉼터를 구상하고 계신다기에 적극 권장하였다. 넓은 터에 명당의 기를 많은 사람이 공유하지 않고서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이니 사람의 왕래가 좋은 일이라 생각되었고 더불어 가족의 건강과 행복도 과거의 조부 때의 부를 따르지 못할 지라도 향상될 수 있다고 보았기에 흐뭇하게 생각되었다. 누구든 보은 땅에 가시거든 선병욱 고가의 선다헌에 들러 명당의 기와 마음씨 좋은 분을 만나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고 오기를 바란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리라.
이곳 ‘선병욱 고가’는 풍수에서는 연꽃이 물에 떠다니는 형상이라고 하여 ‘연화부수형’의 명당의 터이다. 연화부수형국에는 반드시 물이 필요하다. 시냇물이나 호수, 강을 만날 때 명당의 골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선병욱 고가’의 안채에서 보았을 때는 앞에서 흘러 뒤편을 감싸고 사랑채는 앞으로 돌아나가는 형상으로 수태극을 그리며 시내가 구비하고 있었다. 지금은 물이 말라서 흰 자갈만 시냇가에 하얀 배를 뒤집고 누워 있다. 풍수에서는 물은 아버지요, 재물이요, 정보요, 부를 상징하고 있는데 물이 말라 전혀 흐르지 않으니 재물이 사라지고 정신만 남게 되어 고시 생들의 집합소가 된 연유도 되었을 법하다. 이 고가는 개량식 한옥으로써 건축사적 가치도 높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집 곳곳에 배어있는 유려한 멋과 웅장한 규모는 당대의 건축문화를 들여다 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풍수와 건축 공부를 함께 하는 맛이 새로웠다. 아직도 감나무에 까치 밥을 남길 정도의 여유가 살아 숨쉬는 ‘선병욱 고가’를 등지고 보은을 떠나면서 白湖林悌(백호임제)가 지었다고 하는 ‘속리산’이란 짧은 시가 떠올랐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건만 사람은 도를 멀리 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는데 속세는 산을 떠났네’
물과 공기가 맑아야 인심도 명당도 살건만
옥천 인터체인지에서 왼쪽으로 구옥천읍이 있고 읍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교동이 있는데 이곳에 육영수 여사 생가가 있다. 육여사 생가는 풍수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한번쯤 꼭 들르는 장소이다. 특히 교동에 오면 향교와 정지용 생가를 도보로도 가능한 거리에 밀접해 있어 알찬 구경거리가 된다. 조헌이나 송시열처럼 걸출한 인물이 나올 정도로 이름나고 아름다운 고을이고 신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어져 있다. 육영수 여사의 생가 터는 충청도의 소문난 부자였던 육영수의 부친 육종관 씨가 재산의 절반을 주고 살 정도의 명당으로 예로부터 내려오기를 3정승의 터라고 했었다.
이 터는 회룡고조형국의 마성산에서 내려온 한줄기가 목형산(木形山)을 만들고 이 산가지가 길게 내려와 남향으로 임좌오향(壬坐午向)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이 곳이 단장한 여인이 옥비녀를 지르고 다소곳이 앉아 있다는 옥녀단좌형국의 명당이다. 좋은 명당이라 좋은 인물을 배출했다지만 어떻게 여성이 발복할 수 있었는가? 이 문제를 양택의 풍수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해결이 된다. ‘뒤뜰이 넓으면 여성이 발복한다’는 게 양택이론 중의 하나이다. 남녀평등도 풍수를 제대로 인식하면 곧바로 풀려나갈 수 있다고 본다. 허허하고 웃어 넘겨 버리겠지만 명성황후생가, 유관순 생가를 직접 가서 확인해 보면 실감이 날 것이다. 모두들 뒤뜰이 넓다는 것이 특색으로 드러날 것이다.
다시 육영수 여사의 생가로 돌아가 보자. 이곳도 터가 너무 넓다. 과거에 머슴들이 많았던 시절에는 어울릴 수 있었지만 육영수 여사가 성장한 뒤에는 몇 명되지 않는 사람이 넓은 집에서 기거함으로써 명당의 기인 지기에 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생가의 풍수적 문제점을 몇 가지 짚어봄으로써 집을 짓거나 사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첫째, 생가 터에 나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커다란 고목들이 집안 가득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지기를 뺏고 더불어 나무들이 지붕을 가려 태양의 기인 천기를 차단시키니 이런 집에서는 정신병자나 중풍환자 마약중독자가 생기게 마련이고 종종 교도소에 가는 경우도 생기는 풍수적 불길함이 존재한다. 둘째, 적당한 크기에 적당한 사람이 살아야 한다. 호화 주택에서 한 두 명이 거주하게 되면 반드시 말년이 어렵게 된다. 셋째, 육여사 생가터 왼쪽에 있는 일자문성(一字文星)에 문제가 있다. 일자문성이 있으면 산짐승이 나고 영부인이 배출될 수 있지만 생김새에 문제가 있다. 반듯하게 일자로 흘러 임금이 쓰는 왕관의 모습이 되어서 토(土)성의 형태를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오른쪽 부분이 돌출된 형태가 되어 버렸다. 이 뾰족한 부분이 집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단점이다. 이 글을 읽으신 후 한번 일자문성이 자신의 집 주변에 있나 살펴보시길 바라며 청주의 용암동 뒷산도 일자문성의 하나임을 밝혀둔다.
육영수 여사 생가터에서 200m내에 있는 정지용 시인의 생가 터가 있어 풍수적으로 살펴보았지만 다음 기회의 문학과 풍수에서 김기진, 이무영, 홍명희와 함께 다루기로 한다.
보은과 옥천을 돌아다니면서 아쉬운 것은 여관과 가든이 수없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산은 어머니요 물은 아버지다. 산이 개발이란 미명하에 잘려 나가면 어머니가 제대로 서질 못하니 후손들이 포악해질 것이고, 물이 온천개발, 골프장의 건설 등으로 오염되어지면 아버지가 오염이 된 것이니 여관과 같은 시설을 드나들게 되는 것이다. 집이 없어서도 아니고 잠시 쉬어 가는 곳도 아닌 대낮에도 수많은 차들이 들어차 있는 여관. 물이 오염될 때 더욱 심화되어 갈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무거워진다.
물과 공기가 오염되고 산이 잘려 났을 때 후손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풍수적으로도 상당히 크다. 물과 공기를 맑게 하여 인심과 가정화목도 함께 하는 풍수의 명당터를 찾고 싶은 것이 필자의 간절한 소망인 것이다.
▶ 한국의 풍수 ③ 음택
산 자들의 아우성 죽은 이들의 침묵
풍수지리학이란 죽은 자를 통해 산자의 발복을 기원하는 학문으로 치부된 감이 없지 않다. 풍수연재를 하면서 몇 통의 전화를 받았었다. 묘터를 왜 이야기하지 않는가 하는 항의성의 전화였다. 풍수에는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양기풍수요, 둘째는 양택풍수요, 셋째는 음택풍수다. 음택풍수만이 풍수의 전부인양 붐을 이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백화점 문화센터, 신문사 문화센터 등 수 많은 곳에서 음택풍수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많은 수강생들이 몰려 드는데 자칫 잘못하면 발목만 꿈꾸는 돌팔이 지관만 탄생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풍수의 처음 출발은 사람이 살기 좋은 터, 사람이 환경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터를 찾기 위해서 출발했다. 그 후 돌아가신 조상들이 편안하게 묻힐 수 있었으면 하는 효도로서의 바람으로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어찌된 일인지 부모나 조상에 대해 베푸는 효나 덕으로는 풍수가 아닌 개인의 발복, 후손의 발복에 초점을 맞추어 지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풍수가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하다보니 미신이라 천대받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까지 처하게 되었다. 이번 호에는 음택풍수를 찾아 떠날까 한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쓸고 간 시골어귀엔 나무들이 초록빛으로 튀어 오르고, 황토빛으로 물든 논밭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농부들의 모습에서 봄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려운 경제적인 여건에서도 해맑은 미소, 살가운 손길이 느껴지는 시골인심이 아직은 사람 살맛 나는 곳이 살아있구나 하는 기쁨에 들뜨게 하고 있었다.
한 곡 길게 임그리는 마음 읊으니
몸은 비록 늙어도 마음은 새로워
다음 해 창 앞의 매화가 피면
강남의 멋진 봄을 꺾어서 보내리
송강(松江) 정철의 《송강원집》 권 2에 나오는 한구절이다. 내용을 읽어보지는 않았더라도 성산별곡, 속미인곡 등을 다 들어보았을 것이며 송강 정철을 모르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인간의 욕심에 명당이 사라지고
이번 호에는 송강 정철이 모셔져 있는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로 발길을 옮겼다. ‘봄은 고양이’처럼 부드러운 계절이란 말이 실감나게 봄 햇살은 따뜻했다. 겨울과 여름 사이에 잠시 슬쩍 얼굴만 들이밀고 사라진다는 아쉬움만 뺀다면 봄처럼 기분 좋은 계절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희망의 봄과 시신이 묻혀 있는 죽음의 묘터라! 아주 이색적인 만남을 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어 파격을 시도해 보았다. 송강의 묘는 원래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있었으나 우암 송시열 선생이 묘가 송강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의 자리를 잡아주고 후손들에게 이장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이에 후손인 정양(鄭恙)이 현종 때 현 위치로 이장하였으나 그 규모가 작아 1970년대 사적화 작업을 통해 시비와 기념관을 건립 신축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송강이 사긴 지도 어언 4백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송강은 조선 14대 선조 때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정치가로 그의 일생을 정치와 당쟁의 소용돌이 속의 관계 생활과 유배생활이 있었고 은둔 생활의 또 다른 삶이 존재하는 바쁜 인생을 보냈다. 송강 정철은 율곡 이이 선생과 성혼(成渾) 등과 교류하여 시문을 익혔으며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써 시조의 고산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구운몽의 작가 서포 김만중은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가리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오로지 이 세 편이라고 한 바 있을 정도로 문장에 뛰어났다. 함경도 암행어사를 시작으로 강원도, 함경도, 전라도의 감찰사를 지냈으며 동인의 이산해(李山海)의 꾐에 빠져 진주와 강계로 유배되기도 했다.
청주에서 진천읍으로 들어가자면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 오른쪽 산꼭대기의 부채꼴을 한 큰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곳이 봉화산이다. 봉화산은 풍수적으로 문필봉이라 한다. 왼쪽은 요순봉이다. 요임금, 순임금이 치세(治世)를 하던 때처럼 태평성대를 이루게 한다는 뜻의 산이다. 차령산맥이 동북쪽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서운산의 무제봉, 만뢰산과 옥녀봉을 이루어 놓았고 남쪽과 동쪽도 구릉성 지형을 이루고 있는 진천.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生居鎭天 死去龍仁)이라는 사람 살만한 땅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이 태어난 곳, 풍수적으로 최고의 명당의 터가 곧 진천인 것이다. 이런 명당의 터에 송강의 묘터가 있다. 봉죽리에 들어서면 사당이 들어서 있다. 시를 읊느라 시상(詩想)에 빠져 도포가 휘날리는 것도 모르고 유유자적하던 모습의 형국이다. 지방기념물 9호로 지정돼 송강사에는 송강의 대표적 가사를 적은 시비와 공적을 적은 사적비, 위패를 모신 사당과 유물 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사당은 목조 건축물로 맞배지붕의 형태로 지어졌고 유물 전시관은 시멘트 팔각지붕의 형태로 지어졌다. 전시관 내에는 선조의 하사품인 옥배(玉杯)와 은배(銀杯), 그리고 연행기행 65일분과 친필 편지 등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송강사 왼쪽으로 우거진 오솔길을 300여m 타고 오르다 보면 송강의 묘소가 나온다. 포근한 대지를 핥으며 어슬렁거리는 바람소리에 송강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의 뛰어난 문장은 세인의 입에 회자되는데 그의 무덤은 봄나들이 나온 방문객이 버리고 간 휴지 조각과 빈깡통 한두 개만 덩그러니 굴러다니고 있었다. 산 자만이 아우성일 뿐 죽은 자는 언제나 말이 없는 것이다.
잠시 풍수 공부를 하고 묘터를 살펴보자. 풍수의 기본은 장풍(藏風)과 득수(得水)이다. 장풍은 곧 바람을 막아주고 득수는 물을 얻는 것이다.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람과 물일 것이다. 바람이 오염되지 않고 고요하면 좋을 것이다. 곧 풍수가 좋은 것이요 명당인 것이다. 물도 사먹는 세상은 과학이 발달되고 편리한 생활일지라도 명당의 조건은 아닌 것이다. 장풍을 하려면 좌청룡과 우백호의 산들이 포근하게 감싸주어야 한다. 또한 주산(혈장의 뒤에 서 있는 산)은 묵직하게 서 있어야 하며 안산(혈의 바로 앞에서 위압적이라도 너무 작지도 않은 산)이 있어야 한다.
송강 정철의 묘터에는 안산이 책을 펴놓은 듯한 서대(書坮)같은 모양을 하고 있고 이 서대를 바라보고 묘터가 건좌손향(乾坐巽向)으로 자리하고 있으니 귀인독서형(貴人讀書刑)의 형국이 된다. 오른쪽 환희산 정상에서 남으로 꿈틀꿈틀 용이 내려와 문필 3봉(환희산, 국사봉, 은골)의 능선위에서 멈추니 묘가 바로 앞에 있고 송강의 묘가 이 묘터에서 명당의 혈지(穴地)를 차지하고 있다. 송강의 묘는 풍수적으로 명당의 터임은 틀림없다. 좌․우청룡과 용과 입수, 혈을 모두 얻었으니 분명 명당이다. 다만 한가지 안산이 위엄이 있고 역사(逆砂)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쉽기는 하다.
사람이 살만한 땅 진천을 벗어나면서 명당의 참뜻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명당은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설을 하나 소개한다. 청주시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우암산은 해발 312m의 산이다. 이 산에 얽힌 전설이 있다. 현재에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고 국민의 67%가 일년에 한번씩은 본다는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이 보은으로 가는 길에 연기(조치원)에서 부모산에 올라 지형을 살펴보니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산세가 황소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형국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세히 살펴보니 서쪽을 향해서 겸혈(甘穴)의 소쿠리 모양의 혈장이 있는 게 아닌가. 토정은 그 자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높은 봉우리로 올라갔다. 멀리서 보이는 산은 마치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국(臥牛形局)’ 이었다. 혈장에 바위로 표시해 놓고 ‘이곳은 장수에게만 적합한 혈장이니 보통사람은 건드리지 말아라’하고 써 놓았다. 그런데 진천에 사는 조풍수라는 사람이 묘자리를 찾아 다니다가 이 곳을 발견하고 기뻐 어쩔 바를 몰랐다. 토정이 한 푯말과 바위를 치우고 그곳에 급히 가묘를 만들었다. 일을 마치고 안심하고 하산을 하려는데 갑자기 산이 흔들리면서 황소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뿌연 안개가 휩싸였다. 깜짝 놀란 조풍수가 황급히 오던 길을 돌아보니 눈에 강한 불빛을 한 소머리 형상의 장군이 입에서 피를 흘리며 칼을 허공에 휘두르며 자신이 방금 가묘해 놓은 자리로 가라 앉고 있었다. 불식간에 놀란 조풍수는 잠시 넋을 읽고 있다가 묘자리로 다시 돌아가더니 가묘는 불에 타서 어느새 화석으로 변해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날벼락인가? 눈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조풍수는 보이지 않는 눈을 비비면서 분수 없었던 욕심을 후회했으나 이미 모든 것을 잃고 끝난 뒤였다. 이 이야기는 명당도 욕심이 과하면 사라진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일화다.
후손들의 정성이 발복의 원천
다시 풍수를 찾아 기행을 떠나보자. 청주에서 보은과 문의 방면으로 가다보면 공군사관학교가 있고 곧바로 삼거리가 나온다. 이 곳에서 문의쪽으로 방향을 틀면 가산리(駕山리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속칭 머미(말이나 소에게 멍에를 씌운다는 뜻)라고 부른다. 머미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우리나라 시골 어디서나 마주할 수 있는 작은 산들이 두세 겹으로 둘러싸여 있다.
여기저기 묘소들이 눈에 뜨이는데 말 잔등처럼 미끈하게 동산을 이룬 언덕에 청주 한씨의 중시조로 꼽히는 한란(韓蘭)의 묘가 있다. 이곳에서는 ‘태위공의 묘소’로 불리우고 있다. 《청주 한씨 世蹟年譜》에 그에 대한 역사가 실려 있다. 그는 청주의 방정리(속칭 대머리) 무능평을 개척하고 지방의 호족으로 군림하다가 고려 태조 11년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나가자 군량을 풀어 도움을 주었고 그의 일족과 함께 참전하였다고 전한다. 그 공으로 훗날 삼한 통합공신의 반열에 올라 삼중대광 문하태위 개국벽상공신에 서훈됐다.
속리산에서 뻗어온 산맥이 국사봉으로 극기를 한번 크게 응축시켰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크게 낙하했다가 다시 솟아나 꽃잎처럼 산봉우리를 맞대고 쳐다보며 일자형의 정상을 만들었따. 이곳에 서남족(坤方)에서 맥이 들어오고 혈맥은 건입수(乾入首), 향(向)은 동남향, 곧 건좌다. 묘역을 감싸주는 습기를 살펴보면 서남방에서 물이 흘러와 동남방으로 빠져나간다(坤得辰破). 물이 빠져 나가는 곳에는 용과 뱀의 형상을 띤 언덕들이 서로 머리를 들이 밀고 가로막아 물의 흐름을 적절히 조절하니 크게 도움이 된다. 더불어 문필봉(둥근 붓끝 모양의 산)의 국사봉이 있으니 이 또한 명당의 국세를 갖추었고 그 옆의(未方) 아미산은 아름다운 여성을 뜻한다. 신선이 붓글씨에 심취하고 있고 그 옆에서 자태가 고운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는 형국이며 준마에 안장을 얹은 ‘화류승등’의 형국이다. 좌청룡의 첫마디가 부러져 있으니 장손이 가계를 잇기는 어려우나 우백호의 발달로 수많은 왕비의 배출을 볼 수 있었다. 이 묘소가 지닌 화복을 해석해 본다면 고려조의 인물 14명과 조선의 상신(相臣) 13명, 왕비 7명, 임금의 사위 4명 등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현세에 들어와서의 한왕상이나 한승수 같은 인물을 포함한다면 더욱 늘어나게 될 것이다.
풍수에서 보았을 때는 그 한란의 묘의 발복이 상당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발복도 정성이 깃들여져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불면의 진리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며 조상에게 효와 덕을 다 한다는 마음가짐이 우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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