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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심사평 & 최우수작
논술 논제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할 때 카카오톡 문자로 해도 된다는 주장에 대해 찬반 의견을 밝히고 그 이유를 논하라.(1500자 안팎)
최우수작_ 류현준
철학자 오구라 기조는 저서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한국인의 일거수 일투족이 주자학”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도덕과 무관한 영역에서조차 ‘올바르다ㆍ제대로ㆍ바람직하다’와 같은 질서를 지향하는 말들이 난무한다는 지적이다.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방식에 관한 통념에서도 일본의 한 학자가 던진 일갈은 유효하다. 사회적 분위기상 헤어짐을 말할 때는 연인과 대면한 상태여야하며 카카오톡 문자로 통보한다면 부도덕하다는 지탄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철학자 밀은 『자유론』에서 도덕적 비난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대상에게만 쏟아져야 한다고 했다. 과잉된 도덕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위협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카카오톡 문자로 이별하는 선택은 상대에게 해를 가하는 행동이 아니다. ‘비대면 이별’을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여 내심의 판단을 향한 지나친 도덕적 개입을 막아야 한다.
대면한 상태에서 이별을 고하는 행동이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이유로 ‘지켜야 하는’ 도덕적 기준이 돼선 안 된다. 물론 연인과 대면한 상태에서 그동안의 만남을 정리하는 것은 상대를 위한 결정이란 측면이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약속을 잡는 수고를 들이는 것 자체가 상대에게 최소한의 위로를 건네겠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면 이별’을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로 상정한 나머지 카카오톡 문자로 통보하는 ‘비대면 이별’을 결정한 연인을 비난하는 사회적 압력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만남을 시작하는 경로가 다양하듯 헤어지기까지의 사연은 각양각색이다. 다양한 사연의 결과로서 내린 개별적 판단이 “이별은 만나서 해야한다”라는 도덕에 의해 제약받고 있는 상황이다.
카카오톡 문자로 이별을 통보하는 행위는 상대에게 해를 가하는 행동이 아니다. 상대에게 슬픔을 주는 것은 ‘카카오톡 문자’라는 수단이 아닌 일방적 이별이란 특성에 기인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특정 통보 방식에 의해 상대가 해를 입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한 개인이 어떤 수단을 활용해 헤어짐을 고하는가는 내심의 판단으로서 존중돼야 한다. 누군가는 만나서 마음을 전달하는 대신 글로써 생각을 적었을 때 보다 잘 표현할 수 있겠다는 이유로 ‘카카오톡 이별’을 선택할 수 있다. 또한 ‘데이트 폭력’과 관련된 뉴스를 접하며 ‘안전 이별’을 위해 직접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통보하고 싶어하는 누군가를 두고 부도덕하다고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덕적 기준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행동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별을 통보하는 수단을 둘러싸고 도덕적 기준을 세우는 것은 의도와 달리 내심에 대한 지나친 개입을 초래한다. 카카오톡 문자로 이별할 권리를 인정하여 옳고 그름으로 환원될 수 없는 내심의 판단을 보호해야 한다.
우수작1_ 김가현
인간은 누구나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고 받는 존재들이다. 가령 친근하게 부르려는 의도로 ‘장애우’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상대 장애인은 오히려 기분이 상한다. 반대로, 누가 자신의 콤플렉스를 지적하면, 상대에게 악의가 없더라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타인의 상처와 자신의 상처에 대응하려 노력한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공감 능력'을 기른다거나, 자신의 마음 상태를 다스리는 '방어 기제'를 작동시키는 식이다.
상처는 개인적 맥락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지만, 보편적으로 공감되는 상처도 있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엔 '공통 감각(Common Sense)'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외모에 대한 지적을 받거나, 인종 차별을 당하면 누구나 상처를 받는다. 이렇게 모두가 상처를 쉽게 공감하는 상황에서는 공통 감각을 거스르며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 상처를 받는 사람이 '방어 기제'를 작동하기보다, 주는 사람이 '공감 능력'을 더 길러야 하는 이유다. 외모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는 것, '칭챙총', '깜둥이', '코쟁이'와 같은 인종차별적 단어를 쓰지 않는 것은 사회적 불문율에 가깝다. 불문율은 다른 말로 '매너'라고도 한다.
카톡이나 문자로 하는 이별 통보는 큰 상처를 준다. 이별 통보는 어떻게 해도 상처 되기 마련이나, 만나서 하는 이별과 휴대전화로 하는 이별에는 차이가 있다. 만나서 대화를 하면,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터놓고, 표정과 말투로 감정을 파악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 따라서 대화를 마친 뒤에는 오해와 미련이 남지 않고, 상처도 천천히 치유된다. 반면 휴대전화를 통한 이별 대화에는 매개체가 '텍스트'라는 특성 때문에 큰 제약이 따른다. 하고 싶은 말을 온전히 할 수 없고, 상대의 생각과 감정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더구나 상대가 대화를 거부하면 대화는 끝이 난다. 때문에 그 뒤에는 오해와 미련, 상처와 배신감이 한 가득 남는다. 찝찝하게 남아 있는 불행한 생각은 상처를 더 곪게 한다.
카톡이나 문자로 이별을 통보 받았을 때 받는 상처는 '공통 감각'이다. 일리노이 주립대 연구진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설문조사 참여자들이 꼽은 최악의 이별은 문자 통보와 잠수 이별이었다. 국적과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나 휴대전화로 이별 통보 받으면 상처를 받는다. 따라서 사랑하는 마음이 식었더라도 만나서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매너’이며, 카톡 통보는 하지 말아야 할 불문율이다. 카톡 통보자에게 더 많은 역지사지의 자세, ‘공감 능력’이 요구되는 이유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는 있다. 데이트 폭력을 당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는 대체로 우발적이다. 한국여성의전화의 데이트 폭력 분석 결과, 범행동기로 ‘우발적인 범행’이 가장 많았다. 만나서 이별을 통보할 경우 자칫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카톡 통보가 오히려 권장된다. 사이버 연애를 해서 실제로 만난 적이 없는 경우, 만난 기간이 너무 짧은 경우 등은 카톡 통보가 용인되는 사례다. 통보를 받을 상대의 상처가 크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뚜렷한 이유 없는 ‘단순 회피식’ 카톡 통보는 지양하는 것이 옳다.
우수작2_ 박혜원
카카오톡 문자를 통한 고백은 금기시되지 않는다. 유독 이별할 때만 금기시된다. 일방적이고 갑작스럽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카카오톡 문자로 이뤄지건 대면해서 이뤄지건 이별 통보는 어차피 일방적이고 갑작스러운 일이다. 고백은 상대방에게 승낙하거나 거절할 권리가 있지만 이별은 그렇지 않다. 통보하는 주체에 의해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통보 방식은 부차적인 문제다. 연애의 핵심요소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연애는 상호 간의 ‘합의’가 있어야만 성립되며 각종 ‘불문율’로 유지되는 약속이다. 어느 한쪽이 당초의 합의를 파기하고 싶어질 때, 평생 함께 한다거나 당신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불문율을 따르고 싶지 않아질 때 이미 연인관계는 끝난 것이다. 연애와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는 우리사회의 다른 약속들도 마찬가지다.
연애는 국가연합과 닮았다. 국가연합은 서로 다른 국가들이 공동의 기능을 수행하는 상호합의 조약이다. 연애 역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공동의 기능을 수행하는 상호합의 관계다. 유럽연합의 공고함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겠다는 서한을 보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체결할 당시엔 각국 정상들이 직접 만나 서명을 했다. 탈퇴 통보는 서한으로 충분했다. 카카오톡 문자 이별 통보와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당연히 유럽연합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통보 방식에 문제를 제기할 순 없었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본질이 중요했다. 이별도 그렇다. 상대방을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게 본질이다.
연애는 스포츠와 닮았다. 스포츠의 묘미는 불문율에 있다. 누구도 강요하진 않지만 선수와 관중의 암묵적 합의로 지켜진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어떻게 연애를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인들은 과거의 무수한 연인들이 쌓아온 불문율을 따른다. 하지만 불문율은 시대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가급적 야구 선수들의 트레이드 소식을 미리 보도하지 않았다. 트레이드되는 선수는 팀에서 버려진다는 인식이 강했다. 지금은 선수가 원한다면 먼저 구단에 트레이드 요구까지 하는 시대다. 트레이드 소식도 활발하게 보도된다. 과거에는 카카오톡 문자 이별 통보가 무례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SNS 소통이 활발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연인들은 결혼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언택트와 비혼이 대세다. 연애라는 단어의 무게감이 과거와는 다르다. 간단하고 빠른 이별 통보는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합리적이다.
연애는 ‘무조건’을 조건으로 하는 약속이다. 국가연합처럼 실질적인 이익이 보장되지도, 스포츠처럼 실력에 따라 명예가 보장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연애는 다른 어떤 약속들보다 더욱 자발성이 중요하다. 무엇을 위해 합의하고 규칙을 따르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연애는 수단이 아니다. 그 자체로 이미 목적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는 물음이 연애에서 무의미한 이유다. 대답은 간단하다. “그러고 싶어서”다. 연애는 그러고 싶어서 시작되며 그러고 싶어서 끝난다. 이별 통보 방식도 자유다. 이별 통보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조건은 없다. 조건 없이 시작했기에 조건 없이 끝나는 게 연애다.
우수작3_ 박동주
형식은 내용을 지배하지 않는다. 다나카 마키코는 친미 성향이 강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의 외상, 즉 장관이었다. 2001년 부시 대통령이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을 일본에 특사로 보냈다. 아미티지는 21세기 미일 관계는 20세기 미영 관계보다 중시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일본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다나카 마키코는 아미티지의 면담 요구를 ‘격이 맞지 않다’며 거절했다. 그가 부장관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외무성은 발칵 뒤집혔다. 형식적 의전을 내세우다가 일본 외교의 기둥인 미일 관계를 망쳤다고 개탄했다. 형식으로 내용까지 판단한 결과다.
연인과의 관계는 카카오톡이라는 형식을 통해 정리해도 된다. 카카오톡이라는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전하는 이별을 왜 고했는지에 관한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할 때 카카오톡으로 하는 건 예의없다”라고 하는 사회분위기가 대세가 된 이유는 보통 카카오톡으로 이별을 말할 때, 상대방이 납득할 수 없는 내용으로 이별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리노이 주립대 연구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최악의 이별 방식은 메시지 몇 줄로 ‘통보’하는 경우였다. 헤어지자는 텍스트 몇 글자는 상대방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으로 충분치 않은 것이다. 카카오톡이란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문제인 셈이다.
형식에 매몰되면,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게 돼 문제다. 이별을 왜 결심하게 됐는지와 이별을 카카오톡으로 할 수밖에 없는 사정 같은 건 상관없게 돼버린다. 그저 카카오톡으로 이별을 고했다는 이유로 개념 없는 사람이 돼버리는 것이다. 형식에 내용이 가려지면 차별로 나타나기도 한다. 차별은 특정 행동을 하거나 특정 조건을 갖췄다는 이유로 특정인을 배제하거나 특혜를 주는 직접차별만 있는 게 아니다. 형식적으로는 공정하게 바라본다 하더라도, 정당한 사유 없이 특정 집단을 고려하지 않은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그들을 불리하게 만드는 간접차별 또한 있다. 예컨대 채용시 일정정도 이상의 시력을 요구하거나 특정 성별이나 나이를 제시하는 건 장애인, 여성, 노인이 가진 구체적인 상황이나 맥락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아 차별하는 것이다.
형식이 아닌 내용에 집중해야 한다. 다나카 마키코는 국민에게 인기가 좋았다. 자신의 방식으로 솔직하고도 시원하게 이야기하는 모습 덕분이었다. 그러나 시원한 촌철살인의 언변 뒤에는 자신의 신념에 근거한 이념이나 정책이 결여되어 있었다. 일각에서 ‘정치만담가’라고 칭한 이유다. 정치가에게 필요한 확고한 이념이나 정책, 지도력, 설득력 등이 모자란 그녀는 결국 1년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아미티지 면담 요구를 거절했듯, 다른 정책적 사안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대응한 탓이다. 카카오톡으로 이별한다해서 상대방이 말하는 이별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같은 방식으로 다시 이별을 받게 되거나, 이별을 고할 수 있다. 카카오톡과 이별의 관계와 함께 형식과 내용의 관계도 생각해봐야 한다.
카카오톡으로 관계를 쉽게 맺고 쉽게 끊으려는 행위는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려는 본능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감정을 쏟을 정도로 자신의 삶이 여유롭지 않다는 현실에서도 비롯된다. 한 결혼정보회사가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선호하는 이별 통보 방식으로 1위에 카카오톡이 오른 건 그 때문이다. 카카오톡은 이별을 약속잡아 에너지를 쏟을 필요없이 명확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연인처럼 내밀한 관계에서조차 대화 실종을 가속화하는 사회 요인도 은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인과의 이별은 상대방과의 관계가 폭력, 방치, 착취 등으로 이뤄져 있지 않은 이상 누구에게나 슬프다. 전화, 대면, 문자 등 어떤 방식을 통하더라도 이별은 슬픈 감정을 유발하는 것이다.
제16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심사평 & 최우수작
논술 논제
21대 국회가 가장 우선해 추구해야 할 가치를 3개의 키워드를 사용해 논하라. (1500자 안팎)
최우수작_ 김정록
21대 국회는 공동체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코로나19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공동체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공동체 의식이 무너지는 순간 사회경제적 약자부터 붕괴한다. 이는 상위층까지 영향을 미쳐 결국 사회 전체의 위기로 이어진다. 세계 선진국들이 코로나19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게 그 예다. 비단 재난때만이 아니다. 공동체가 빈약하면 모든 위기에서 약자부터 무너져 내린다. 사회에 공동체 가치를 심어두는 것이 백신보다 든든한 예방책인 이유다. 공동체는 ‘너, 나, 우리’로 구성된다. 공동체의 축소판인 국회는 ‘너, 나, 우리’를 염두에 둬야한다.
국회가 ‘너’를 존중해야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국회의원은 시민의 대표다. 뜻이 맞지 않는 상대 의원도 시민의 대표 자격이 있다. 의견이 다른 의원들끼리 서로 존중해야하는 이유다. 20대 국회에서는 ‘너’, 즉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찾기 힘들었다. 한쪽에서는 “적폐” “친일”이라며 상대를 비난했다. 반대쪽은 “친북 ”친중“으로 되받아쳤다. 서로 존중하지 않으니 갈등만 심해졌다. 선거법개정 국면에서는 물리적 충돌까지 벌어졌다. 더 좋은 공동체를 위한 합의들 역시 이뤄지지 못했다. 20대 국회 법안 처리율은 37% 수준으로 2000년 이후 최악이었다. 상대 의원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그를 국회로 보낸 시민을 무시하는 행위다. 무시되는 시민이 있는 한 건강한 공동체가 유지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나’가 없는 국회는 내가 빠진 공동체처럼 의미가 없다. 내 의견을 말할 수 없는 곳은 공동체라 보기 어렵다. 폭력적 전체주의에 가깝다. 오히려 남과 다를수록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견은 사안의 다양한 관점을 제공해 공동체가 보다 유익한 결과를 낳도록 돕기 때문이다. 시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도 마찬가지다. 20대 국회에서 개인의 신념과 소속 정당의 의견이 달랐을 때, 신념을 피력했던 국회의원들이 있었다. 이들이 있어 정당이 극단적으로 쏠리는 상황을 견제할 수 있었다. 여당 소속 금태섭・김해영 의원은 조국 사태 국면에서 정부 여당에 비판적 목소리를 냈다. 이로써 정부 여당이 다른 목소리를 듣고 사태를 진정시키도록 도왔다. 하지만 이렇게 ‘나’의 목소리를 내던 의원들이 대부분 21대 국회에 들어서지 못했다. 이번 국회에서도 ‘나’의 목소리를 내 공동체가 어느 한쪽으로 극단적으로 쏠리지 않도록 해야한다.
‘너’와 ‘나’에서 그치지 않고 잘 들리지 않는 ‘우리’의 목소리까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금껏 ‘너와 나’에는 주로 큰 목소리가 실렸다. 거대 양당이다. 하지만 공동체에는 작은 목소리의 제3자들이 있다. 사회경제적 약자에 속하는 노인, 장애인, 청년, 여성들이다. 이들이 배제된다면 건강한 공동체라고 보기 어렵다. 21대 국회에서는 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져야 한다. 이번 국회에는 장애・여성・청년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지난번보다는 늘었다. 예컨대 장애인 동생을 둔 여성이자 청년인 정의당 장혜영 의원 등이다. 더 중요한 점은 이들이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줄 줄 아는 ‘너와 나’들이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를 위한 국회가 될 수 있다.
코로나19 국면에서 공동체를 바이러스로부터 물리적으로 보호하는 정부와 방역당국의 ‘하드웨어’는 입증됐다. 이제 21대 국회가 ‘소프트웨어’를 보여줄 차례다. ‘너, 나, 우리’를 기억해 공동체 가치를 지킨다면, 무수히 마주칠 ‘사회적 바이러스’들까지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우수작1_ 박준형
국회를 신뢰하냐는 물음에 단 2.4%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선거를 거쳐 만들어진 국회가 지속적으로 국민에게 실망을 준 것이다. 국회에 대한 저신뢰는 대의민주주의 혐오를 유발하고, 나아가 그 기틀마저 위협한다. 21대 국회가 우선으로 살펴야 할 건 ‘신뢰성’이며, 이는 국민 설득에 소홀했던 지난 오만함의 발로다. 국회가 신뢰를 되찾을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설득에 필요한 3가지 요소를 설파했다. 논리적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 공감과 감정의 ‘파토스’ 그리고 화자의 품격을 의미하는 ‘에토스’가 그것이다.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낮은 건 3가지 요소가 빈약했단 방증이다. 국회가 다시 신망받는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를 충족하는 방식으로 입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법리를 다루는 국회는 로고스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국회는 주장만 되뇌는 공간이 되었다. 논리를 개발하며 의견을 개진하는 노력 대신, 진영 논리에 입각해 지지세력의 결집을 읍소하는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지난 여름부터 거리로 뛰쳐나온 정치인을 목도했다. ‘광화문과 서초동 중 어디에 더 많은 군중이 모였냐’는 숫자놀음 또한 등장했다. 이슈를 점유해 지지를 유인하는 ‘편승 효과’를 노린 편의주의적 방식이었다. 총선 결과, 수차례 보이콧을 주도하며 로고스를 등한했던 통합당은 지역 정당으로 전락했다.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나태한 모습을 국민이 외면한 것이다. 이제 국회는 ‘장외 투쟁’을 접고 장내에서 로고스가 대결하는 정치 형태로 탈바꿈해야 한다.
정치인은 로고스가 제외된 이 같은 감정적 접근법을 ‘파토스’라 착각한 모양이다. 감정에 의존한 ‘쇼’는 설득력이 없는 ‘감성팔이’에 그친다. ‘정책 파토스’를 좇아야 한다. 국민의 요구,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 이를 토대로 법안을 발의하는 노력이 진정한 의미의 파토스다. 최근 국회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서 ‘개인의 호기심’, ‘자기만족 영상’이라 운운하며 국민의 법감정에 어긋난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이는 국회가 얼마나 국민감정과 동떨어진 사고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시대정신을 파악하지 못한 국회를 불신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국민감정과 발맞춰 법을 연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3요소 중 가장 중요하다 여긴 건 에토스, 화자의 품격이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현재 국회는 미성숙의 온상이다. 회의장은 토론이 아닌 비난, 폭력이 벌어진다. 아직도 구태를 정치 도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국회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 국민을 선도해야 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품격이 필수조건이란 점을 생각한다면, 미성숙한 행태가 난무하는 국회가 국민에게 신뢰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 동물국회를 만든 의원에 대해 ‘제 식구 봐주기식’ 태도로 일관한다면 설득력은 더욱 떨어진다. 저급한 언행을 한 의원에겐 경고로 그칠 게 아닌, 합당한 수준의 페널티를 부여하는 게 품격을 획득하는 길이자 신뢰성 회복의 첫걸음이다.
재난 기본소득, 일자리 창출, 소득 불평등 등 국회엔 중히 처리해야 할 민생 사안이 산적해 있다. 그러나 신뢰하지 못할 지휘관을 따를 병사는 없다. ‘국회 신뢰성’에 대한 의문은 작금의 일이 아니다. 21대 국회가 구태 정치를 끊어낼 주체로 인정받기 위해선 그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이젠 국회가 변해야 할 시점이다.
우수작2_ 이하은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 슈나이더는 갈등을 ‘민주주의의 엔진’이라 보았다. 갈등은 다른 말로 다양성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갈등을 다루는 방법에 따라 산출되는 결과값은 다르다. 어떨 때는 ‘반목의 장’이 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생산적 논의의 장’이 연출되기도 한다. 20대 국회는 동물 국회, 잦은 국회 파행 등으로 봤을 때 전자에 가까운 결과값이었다. 21대 국회는 갈등이 생산적 논의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 처음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양성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며 권력의 독주를 막아주는 기본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가치는 항상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21대 국회에서는 특히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다름의 소리를 내는 주요 정치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공수처 설치에 이견을 냈던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 자신의 당을 ‘좀비 정당’이라 일컬으며 반성할 것을 주장했던 자유한국당 김세원 의원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논의의 기초이다. 이 과정에서 당내 자정작용도 가능케 한다.
갈등에는 그 중추가 되는 ‘균형’이 필요하다. 한쪽에 과도하게 쏠린 정치지형은 갈등 자체를 생략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특히 지금처럼 180석을 가진 ‘슈퍼 여당’의 경우는 기울어진 운동장 구조이다. 여당 단독으로 고위공직자 임명과 패스트트랙의 단독 처리가 가능하다. 18개 상임위 가운데 11~12개 상임위원장 확보도 가능하다. 권력의 균형추가 필요하다. 국회 요직인 법사위원장·예결위원장의 몫이 야당에 돌아가야 한다. 여당의 독주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견제라 할 수 있다.
다양성과 정치적 균형을 전제한 갈등은 ‘협치’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협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보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 형태다. 문제를 쟁점화하고 최소한의 합의를 보는 것은 중요하다. 국회가 합의를 보지 못하면 이것이 사회적 분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조국사태는 국회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다시금 광화문으로, 서초동으로 튕겨 나갔다. 의원들은 오히려 ‘시위 참가자 수’ 대결을 벌이며 거치 정치를 유도하는 실정을 저지르기도 했다. 제도 정치의 상실은 국론분열을 조장했다. 국회는 사회 갈등을 조절하고 해결하는 대의기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주주의란 갈등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제도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대의기구, 국회가 있다. 지금껏 국회가 보여준 갈등의 양상은 과거 퇴행적이었으며 서로 간의 발목잡기에 가까웠다. 논의와 타협을 통한 건전한 갈등은 미래를 제시한다. 21대 국회에는 미래지향적 갈등 해결을 기대해 본다.
우수작3_ 장예슬
살찐 고양이의 살을 제도적으로 빼야 한다. 살찐 고양이법은 기업과 공공기관 임원의 급여를 제한하는 법령이나 조례를 말한다. 2018년 10대 그룹 상장사 등기임원의 평균 연봉은 일반 직원의 13.6배에 달했다. 기업과 공공기관 임원이 엄청난 고임금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다. 하지만 일견 정당성을 얻는 지점이 있다. 임원들의 엄청난 고임금에는 책임비용이 포함돼 있다. 직위가 오를수록 책임도 함께 커진다.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물론 사고가 발생하면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국회의원은 대표적인 고임금 직종이다. 입법부의 구성원들이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법을 만들고 정부를 감시, 견제하는 본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국민들이 위임한 권력을 갖고 책임 있게 업무를 수행하라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막스 베버는 ‘책임윤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정치인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의 선택과 결정은 시민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 무게를 생각했을 때 말과 행동, 선택과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당연하다. 21대 국회가 가장 우선해 추구해야 할 가치는 책임윤리다.
현재 우리 국회는 책임윤리가 결여돼 있다. 국민들의 선택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듯 내세웠던 선한 공약들은 사라지고 후안무치한 모습만 남는다. 20대 국회는 법안 통과율이 29%로 역대 최저다. 국회선진화법으로 식물국회 비판이 나왔고, 막판에는 동물 국회로 치달았다. 대의기관이자 입법기관인 국회 특성상 책임윤리는 국회 운영을 가로막는 것처럼 비춰지곤 한다. 불법 논란에 휩싸인 국회의원들은 헌법상의 특권인 불체포 특권과 면책 특권을 들어 책임윤리를 회피하려 한다. 하지만 두 특권 모두 국회의 기능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지 국회의원 개인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국회의 책임윤리 결여는 ‘대통령 만능주의’로 이어져 위험하다. 책임윤리가 결여된 국회는 국민들에게 실망감과 좌절감을 안긴다. 국민들은 대통령이라는 대안을 택한다. 입법부와 달리 행정부는 책임 소재가 명확하다. 입법은 토론과 합의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행정부는 정해진 가이드라인에 따라 업무를 수행한다. 하향식 의사결정 구조 때문에 비교적 결론도 빠르게 도출된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대한 열띤 관심은 대통령 만능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대통령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인식이 자연스레 형성된다.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뒀던 주된 원인 중 하나로도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이 꼽힌다. 결과적으로 삼권 분립의 균형은 무너지고,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국민들은 소외·배제된다.
21대 국회는 책임윤리를 추구해야 한다. 21대 총선 결과에 책임을 진다는 건 일하는 국회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일하는 국회법’ 통과가 책임윤리 실천의 시작이다. 일하는 국회법은 여야 5선 이상 중진 의원들이 20대 국회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토대로 내놓은 국회 개혁안이다. 조속한 국회의장 선출, 회의 의무 개최, 윤리특별위원회 상설화 등이 주된 내용이다. 국회의 존재 이유는 국민이다. 국민에,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회가 필요하다. 국회의원의 고임금에는 국민에 대한 책임비용이 포함돼 있다. 국회는 받은 만큼 일하면 된다.
제17회 한터 온라인 백일장 논술 부문 심사평 & 최우수작
논술 논제
부동산 문제와 교육 문제는 진보정부와 보수정부를 막론하고 역대 어느 정부도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근본원인과 해법에 대해 논하라.
최우수작_ 강태현
한국 사회에서 ‘명문대 졸업장’, ‘안정적이고 좋은 일자리’, ‘비싼 주택’은 생애주기별로 추구해야 할 최우선 과제들로 여겨져 왔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노동시장에서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고,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산 집은 든든한 노후 보장 수단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는 한 번의 실패만으로도 패자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동반된다. 삶 전체에 걸친 주거, 교육 문제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가 되는 사회, 패자부활전이 몇 번이고 가능한 사회라면 낙오될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들에겐 각자의 살길만을 도모하는 것만이 답이다.
만약 사람들이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국가의 충분한 보호를 받고, 안정적인 삶을 꾸릴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면 이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부동산 문제와 교육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근본원인은 우리 사회의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는 데 있다. 사회가 안정적인 노동시장과 편안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끊임없는 각자도생에 내몰린다는 것이다. 집을 장만하기 전까지는 주거불안에 시달려야 하고, 부동산을 활용하지 않고서는 노후에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작금의 현실이다. 또 가격이 오를 것으로 기대되는 서울 지역에 집을 사는 것만이 상위 계급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라고 여겨지고 있다. 이렇게 마련된 주거공간은 다음 세대의 복지를 위한 그들만의 안전망이 되는데, 이를 통해 부는 세습되고 가난은 대물림된다.
이 같은 사회안전망의 부재는 불평등을 더욱 고착화시킴으로서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특히 부동산, 교육은 특정 지역에서 부유한 사람에게 계층의 재생산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변모했다. 실제 수도권의 주택보급률은 이미 100%를 넘어섰지만, 집을 소유한 사람의 비율은 정작 절반정도에 그친다. 부동산조차 가진 사람들에게 편중되어 있다는 반증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재력에 따라 학군이 결정되고, 그렇게 입시경쟁에서의 출발선도 달라진다.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지가 삶을 결정하는 구조가 공고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안전망 확충과 고착화된 불평등 구조의 개선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 없이 부동산 공급 물량을 늘리거나 사교육을 억제하기만 하는 방식으로는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 역대 어느 정부도 부동산, 교육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이유는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문제 해결보다 단기적인 성과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 교육, 주거 등 삶의 기본적인 영역에서 탄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려는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는 공적인 영역의 복지 확대가 뒤따라야 하고, 사회구성원들의 활발한 논의와 재정적 지원, 세밀한 정책 마련이 함께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우수작1_ 변은샘
욕망에는 죄가 없다. 안정적 삶을 모두가 원한다. 문제는 모두의 욕망이 단 하나의 모양을 하고 있을 때다. ‘1등 시민’ 중상위층이 물적, 인적 자본을 대물림할수록 나머지 ‘2등 시민’은 격차를 따라잡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진입장벽은 두터워졌다. 사람들은 유일한 성공의 사다리에 더 매달린다.
한국사회의 욕망은 단 하나의 모양을 하고 있다. 강남-스카이라는 획일적인 형태다. 이 질서 안에서 욕구가 분출되는 방법도 단 하나다. 사람들은 부동산 투자와 교육열에 열광한다. 2017년 서울시에 따르면 초등학교 학령인구 18%가 강남, 노원, 양천구에 살았다. 학생 수 상위 20개 초등학교는 모두 서울대 진학률이 높은 고등학교와 대형 학원가 근처였다. 명문학군은 학벌 세습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강남’은 명문대-대기업-동종결혼-주택 취득까지 생애주기별로 이어진다. 한 번 맺어진 ‘끼리끼리’ 리그는 평생을 간다. 유일한 성공의 사다리로 보이는 교육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금껏 한국정치는 다양한 욕망의 상품을 내놓지 못했다. 사람들의 욕망을 막기에 급급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도입했던 양도세 중과세, 종합부동산세, 분양가 상한제 확대를 10년 뒤 문재인 정부는 다시 꺼내들었다. 사교육을 줄이겠다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시, 수시 비율을 뒤집었다. 강남-스카이 질서를 바꿀 정치적 상상력은 없었다. 그러나 정치는 욕망의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 유권자의 분산된 욕망을 읽고 정책으로 실현가능한 방법을 내놓아야 할 의무가 있다. 2012년 ‘저녁 있는 삶’ 슬로건이 처음 등장하자 사람들은 환호했다. 저녁 있는 ‘일터’가 익숙하던 사람들은 개인의 ‘삶’을 상상할 수 있게 됐다. 정치가 내놓은 욕망의 상품이었다. 유권자의 욕망을 다수에게 유익한 상품으로 내놓을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정치의 일이다.
욕망을 디자인하는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정치에서 강남-스카이 사다리가 아니라도 안정적 삶이 가능하다는 모델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 가령 김경수 경남지사는 수도권 집중에 맞서는 힘으로 동남권 메가시티를 주장한다. 수도권으로 몰리는 사람들의 욕망을 막기 위해 공공기관을 강제로 내려 보내는 과거 방법은 성공하지 못했다. 공공기관이 지속가능한 교육-아파트를 보장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 지사가 말하는 메가시티는 그보다 큰 ‘대항 플랫폼’이다. 일자리, 인재, 대기업으로 이어지는 선두 플랫폼을 만들어 사람들이 믿고 내려올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유권자는 이러한 정치적 상상력을 통해 ‘지방에서의 삶’을 새로운 삶의 형태로 상상해볼 수 있다. 공고한 강남-스카이 질서에 대한 균열이 될 수 있다.
욕망하는 시민을 사회에 기여하는 시민으로 만드는 것은 정치의 역할이다. 불안한 미래에 강남 아파트를 사재기하는 ‘투기세력’은 정부가 필요로 하는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투자자이기도 하다. 유권자는 정책의 소비자다. 구미가 당길만한 정책을 내놓아 소비자의 욕망을 ‘소비’로 환원하는 것. 한국 사회에는 욕망의 정치가 필요하다.
우수작2_ 고재민
월마트는 인건비를 아껴 상품의 가성비를 높인다. 시민들은 월마트의 노동환경이 착취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소비자로서의 시민은 월마트의 낮은 가격에 매력을 느껴 그곳에서 쇼핑한다.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가 말한 ‘우리 안의 두 마음’이다. 시민으로서 부동산 투자 혹은 사교육비 지출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부동산 자산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자녀의 과외를 늘린다. 한국의 부동산과 교육 문제 기저에는 ‘손해 보고 싶지 않은 욕구’가 있는 것이다. 즉, 자녀세대가 사회에서 비교우위를 누릴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부동산과 교육이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 한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과 교육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한국사회에서 부동산과 교육은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정한다. 부동산은 자산증식의 수단임과 동시에 사회안전망의 기능을 한다. 현재 국민연금은 수급 시점과 은퇴 시점의 간극이 있고, 소득 대체율도 40%에 불과하다. 하지만 주택이 있다면 임대 소득 혹은 주택 연금을 통해 소득 대체율을 높일 수 있다. 또한 부동산을 통한 자산 증가율이 임금 소득 증가율보다 월등히 높다. 부동산을 통해 계층 상승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교육의 경우 사회의 첫발을 결정한다. 20대 대졸자를 비교해보면 소위 ‘명문대’ 졸업자일수록 평균 초임이 높다. 한국의 노동시장 내 이동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고려할 때 첫 일자리의 수준을 좌우하는 교육이 사실상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 셈이다.
문제는 부동산과 교육 모두 세습돼 양극화를 심화한다는 데 있다. 부동산의 경우 부모가 주택을 소유했을 때 자녀가 주택을 소유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 지금 부모의 도움이 있을 때 주택 보유 가능성이 더욱 커지는 셈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소득이 오르면 사교육비 지출이 늘어나는 ‘사교육비 소득탄력성’이 높아 부유할수록 자녀 교육에 투자도 더 많이 한다. 이에 가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층일 때 ‘인서울’ 대학을 졸업하는 비율이 하층보다 두 배 이상 높다. 현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후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좌우하는 셈이다. 이는 세대가 지날수록 불평등이 누적되고, 대물림되는 악순환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불평등 담론이 88만 원 세대 등 한 세대에 국한됐던 데 비해 현재는 부모의 계층과 연관된 ‘수저론’으로 변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시민은 이러한 악순환에서 탈피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부동산과 교육에 더욱 집착할 수밖에 없다.
부동산과 교육 수준이 사회경제적 지위를 좌우하지 않을 때 비로소 ‘손해 보고 싶지 않은 욕구’를 꺾을 수 있다. 영국 복지국가에 가장 큰 사상적 영향을 미친 리처드 티트머스 교수는 ‘긍정적 차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이, 성별, 장애, 거주 지역, 부모의 경제 수준' 등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조건으로 발생하는 격차를 좁히기 위해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세습적인 부동산과 교육이 사회경제적 지위를 좌우하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 ‘긍정적 차별’이 필요한 시점이다. 현재 채용과 대입에서의 적극적 조치들을 강화하고, 부동산의 경우 증여와 상속세율을 높이는 게 방법이 될 수 있다. 부동산과 교육이 응축하고 있는 우리 사회 문제가 해결될 때 대책도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다.
우수작3_ 강은
미국의 정치철학자 조지프 피시킨은 저서 <병목사회>에서 ‘전사사회’라는 개념을 이용해 기회의 불평등 구조를 설명한다. 좋은 직업이 ‘전사’ 하나뿐인 사회에서 전사 시험은 공정하게 치러지지만, 기회구조가 협소해 문제가 발생한다고 얘기한다. 많은 이들이 유일한 통로 앞에 몰리는 병목현상을 완화하지 않는 이상, 통로를 지나는 과정을 아무리 엄격히 관리해도 전체 사회가 정의로워질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부동산 문제나 교육 문제에서도 이러한 병목현상의 딜레마를 발견할 수 있다. 명문대 합격과 서울 ‘입성’만이 유일한 기회의 통로가 되는 상황에서, 통로 자체를 다양화하려는 노력 없이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
한국은 극심한 병목 사회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흐름을 받아들이면서 불평등이 심화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었다고 하지만, 한국 지니계수 개선율 순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7개 회원국 중 26위에 그칠 정도로 소득 불평등 정도가 크다. 이런 가운데 명문대 합격, 수도권 부동산 투자는 불평등 고리의 핵심부에 위치한다. 격차는 심한데 성공의 기준이 획일화돼 있으니 많은 사람이 좁은 통로로 몰리면서 극단적인 경쟁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하다. 기를 쓰고 자녀에게 계급을 세습하려는 욕망도 커지는 것도 그래서다. 부모의 재력이 정보력과 결합해 자녀의 능력으로 치환되고, 그 능력이 명문대 졸업으로 추인되는 합법적 세습의 과정이 만들어진다.
문제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정부가 병목현상을 외면하거나 심화시켜왔다는 점이다. 보수 정부에서는 무작정 부동산 규제를 완화해 버렸고, 진보 정부는 수도권 쏠림을 완화하려는 근본 대책 없이 투지 억제책만 펴서 부작용을 겪었다. 획일화된 통로를 다양화하려는 노력 없이 입구만 틀어쥐다 보니 병목현상이 심화할 수밖에 없었다. 교육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학 서열화-고교서열화’로 이어지는 학벌 문제를 끊지 않고 자사고·특목고만 확대했다. 2017년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에서도 병목현상을 방치하는 정책은 계속되고 있다. 부동산 정책으로는 수도권 3기 신도시를 건설과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를 놓겠다고 하고, 교육 분야에서는 ‘공정성’의 외피를 쓴 채로 정시 확대 정책을 폈다.
병목현상을 그대로 둔 채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지프 피시킨은 그 방법으로 ‘기회 다원주의’를 언급했다. 기회구조를 다양하게 만들고 통로 간의 격차를 완화해야 한다는 의미다. 부동산 문제의 경우, 수도권 부동산 가격을 억제하느라고 ‘핀셋 규제’만 할 게 아니다. 강력한 균형발전 정책을 취해 수도권으로 쏠린 병목현상을 완화해야 한다. 교육 문제에서는 지역거점국립대, 지역국립대, 공영형 사립대 등이 참여하는 대학통합네트워크 정책을 고민해볼 수 있다. 소위 ‘SKY’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학벌사회의 자원을 확대·분산하는 것이다. 이처럼 통로를 다양화함으로써 병목현상을 해소할 때 불평등 문제의 핵심축인 교육과 부동산 문제 해결의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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