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고립무원 신외숙 어린 시절을 친부모의 무관심과 학대 속에 지낸 창식은 광폭하고 이기적인 성격으로 살아간다. 남편에 대한 분노를 아들에 대한 폭력으로 대신한 생모, 그런 아내와 함께 어린 아들을 개 패 듯하던 생부 때문에 그는 사랑을 철저하게 부인하며 살아간다. 그의 부모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눈엣가시처럼 철천지 원수 대하듯 할 때가 많았다. 칭찬 한 번 생일상 한 번 받아 본 기억이 없는 그였다. 모난 성격이 더욱 삐뚤어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생모가 죽자마자 아홉 살 무렵부터 친척집에 맡겨져 길러진 적이 있었다. 강원도 척박한 산골에서 농사를 짓는 生父의 사촌누이뻘 되는 집이었다.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6년 간을 기거했었는데 고모는 어린 창식에게 밤낮으로 들과 산을 다니게 하며 힘들고 거친 일을 시켰다. 매달 생활비와 학비 일체를 창식의 아버지에게서 꼬박꼬박 받으면서도 전혀 아닌 것처럼 딴청을 부렸다. 나중에 그 사실이 밝혀졌을 때도 고모는 창식을 핏덩이 때부터 기르고 가르친 것처럼 억지주장을 폈다. 그 표정과 말투가 너무나 당당하고 진실해 보였기에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을 정도였다. 고모는 그가 불평하거나 반항하면 어김없이 밥을 굶겼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을 먼 산골로 유배 보낸 生父를 더 증오했다. 그건 무서운 무관심이었다. 시야에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잊고자 노력하려는 직무유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고모는 자신이 등록금과 학비 일체를 대준다는 이유를 들어 더 가혹하게 일을 몰아 부쳤다. 그러면서도 늘 한다는 말이 ‘부모 복도 지지리도 없지…’ 였다. 창식은 자신의 외모(162cm 단신)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항상 키 큰 여자를 선호했다.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적어도 170cm 이상의 늘씬한 여자를 점찍어 놓고는 언제나 자신의 파트너가 되어 줄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기원했다. 어느날 그의 앞에 그가 그토록 꿈꾸고 바라던 이상형의 여자 미스홍이 나타난다. 미스 홍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창식에게 접근해 자신의 교회로 인도해 갔다. 신자다운 인내심으로 그에게 친절과 정성을 다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면박을 주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그것을 창식은 사랑으로 오인한다. 창식이 미스 홍을 따라 교회에 나갔을 때 목사는 유난히 사랑을 강조했다. 그는 목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설교할 때마다 부모의 사랑과 견주어 설명하는 대목에서 온갖 비윗장이 뒤틀렸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의 사랑과 비슷하다? 그것이 창식에게는 가장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의 사랑과 같다면 그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부모가 내게 했듯이 똑같이 학대하고 남에게 맡겨 버린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고 횡포이고 직무유기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관심사가 되지 않았다. 오직 미스 홍의 친절과 관심에만 그의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 미스 홍 자랑을 할 때면 그의 얼굴은 행복감으로 마냥 들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친구들의 얼굴에는 불신감이 역력했지만 창식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래 미스 홍한테 사랑한다고 고백은 한 거냐?” “고백하고 말고가 어딨어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거지” “그나저나 미스 홍은 언제쯤 소개시켜 줄 거냐?” “글쎄… ” “왜 보여줄려니까 자신이 안 서니?” “그게 아니라 너희 같은 놈들에게 소개시키기엔 미스 홍이 너무 미인이라서” 이튿날 미스 홍을 만난 창식은 어렵사리 친구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 녀석들이 하도 미스 홍을 소개시켜 달라고 그래서” “저를요 왜요?” “왜요라니…” 의외의 대답에 창식은 갑자기 입가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미스 홍은 나를 사랑하지 않나?” “사랑이라구요?” 미스 홍은 어이가 없는지 멍하니 기가 질린 표정으로 창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보름 후, 미스 홍은 경리과에서 퇴직금을 청산해 퇴사했다. 그리고 창식이 다시 교회에 나갔을 때 미스 홍과 성가대 지휘자와의 결혼설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그 후 미스홍의 결혼에 충격을 입은 창식은 심심하면 교회에 찾아가 어깃장을 놓으며 행패를 부린다. 그러다 경찰서 유치장 신세까지 지게 된다. 그 안에서 갖가지 헤프닝을 겪은 그는 고립무원의 처지인 자신을 돌아보고 비로소 현실에 눈뜨게 된다. 창식은 매일 아침 집을 나서 사회 봉사단체를 돌기 시작했다. 시립 아동 보호소에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기형아들의 사랑을 갈구하는 눈빛들로 가득 차 있었다. 뒤틀리고 이지러진 아이들은 신체적인 장애는 물론 정신장애까지 이중고를 당하고 있었다. 처음 그들을 대하는 순간 창식은 실내에서 풍기는 비릿한 냄새에 엄청난 토악질을 해댔다. 그곳은 기형아들의 집산소였다. 神의 외면과 방관으로 빚어진 영혼 불량품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쓰레기장과도 같았다. 지옥에서나 벌어질 만한 끔찍한 광경 앞에 창식의 영혼은 몇 번이나 까무러쳤다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괴물스런 모습으로 세상에 던져진 기구한 운명 앞에 생명의 끈을 이어가는 그것은, 어떠한 극예술에서도 표현되지 못할 카타르시스 바로 그것이었다. 조그만 창살 안에 갇힌 그들도 한 생명체로서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사랑 받기를 갈구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창식은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날마다 울면서 아동 보호소를 찾았고 누군가를 향하여 자꾸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그는 청량리 굴다리를 찾아가 무료급식을 받는 노숙자들을 보았다. 눈이 내리는 찬 겨울 길바닥에 식판을 앞에 놓고 식사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창식은 강원도 산골에서의 어린시절을 반추했다.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목구멍을 치받고 있었다. 창식은 그들과 함께 뒤섞여 허름한 담 모퉁이에서 식사를 했다. 창식은 계속해서 정신장애자 시설과 노인요양시설을 돌아보았다. 한번은 버스를 타고 수원 팔달구를 지나고 있는데 왼쪽으로 실버타운이 보였다. 노인들 역시 간절한 사랑과 관심을 눈빛으로부터 애원하고 있었다. 창식은 십만 원 권이 든 수표를 맡기고 나오면서 계속 미진한 느낌에 시달렸다. 그건, 핏줄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이었다. 강원도 산골에서 혼자 기거하고 있던 고모를 서울로 불러 올린 건 그 무렵이었다. 고모의 외아들은 소규모의 제조업을 하고 있었는데 IMF의 여파로 부도를 맞아 캐나다로 도주이민을 떠난 뒤였다. 고모에게는 20대 후반의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친정어머니 모시는 것을 끝끝내 거부하고 있었다. 창식이 고모를 모셔온 건 여러 가지 이유에서였다. 그는 여러 가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뒤바뀌게 된 처지에서 노인네가 보이게 될 여러 가지 행동적인 양상을 관찰하고 싶은 악취미도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불쌍한 노인네 하나 건사하게 됨으로써 누리게 될 정신적인 만족감도 있었다. 창식은 어린시절을 반추해가며 노인에게 가지가지 질문을 퍼붓고 싶었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노인에게는 예전과 같은 기개나 당당한 체모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비굴한 눈치를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 자신을 향해 퍼붓던 그 무수한 질책과 멸시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하게 창식의 뇌리에 되살아났다. 캐나다로 도주이민 간 고종사촌형 그러니까 노인의 아들에게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후의 일이다. 처음에는 안부전화려니 무관심했었는데 전화오는 횟수가 늘어 갈수록 노인의 얼굴에는 수심이 짙어갔다. 아들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으로 노인은 식사마저 하는 둥 마는 둥했다. 창식은 그런 노인을 보고서도 일체 모른 체 했다. 노인은 창식의 밥상 앞에서 일부러 한숨을 푹 쉬며 쓸데없는 아들 걱정을 내세우기도 했다. “그저 늙어가면서 필요한 것은 핏줄이려니 생각하면서 살아야 되는 건데…” 그래도 핏줄 밖에 없다는 노인의 기대에 찬 푸념이 창식의 부아를 돋구었지만 창식은 내색하지 않았다. “뭐니뭐니 해도 핏줄 밖에 없느니라” 처음에는 할 일 없는 노인네의 푸념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창식이 출판사에 취직해 한 달쯤 되어오던 날 노인은 드디어 속셈을 비치기 시작했다. 도주 이민간 아들에게 돈을 보내 주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제가 왜 동규형을 도와야 하죠” “다 핏줄 아니냐?” “핏줄이요 기가 막히는 군요 그래서 고모는 아버지에게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꼬박꼬박 챙기면서 제게 밥값 하라고 그 모진 고생 시켰나요, 전 고모의 그 거짓말 때문에 아버지를 얼마나 증오하면서 산지 아세요 자식을 시골로 유배 보내면서 고모 밑에서 뼈빠지게 고생이나 시켰다고… 그리고 핏줄 핏줄 하지 마세요 언제 고모가 내게 핏줄 대접해 준 적 있어요?”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언제 너를 그렇게 고생시켰다는 게냐 사람이 은혜를 알아야지 한갖 미물도 은혜는 안다더라. 고모가 너를 그만큼 먹이고 가르쳤으면 됐지 그리고 시골 살면서 그만한 일도 안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더냐 너 지금 보니 고모한테 맺힌 한이 많은 모양이로구나” 창식은 노인의 성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잠시 할 말을 잃는다. “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모 정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어요 그건 누구보다 고모가 더 잘 아실 거예요” “니가 어떻게 부모 마음을 알겠냐 너도 결혼해서 새끼 낳고 살아봐라 내 맘 알 거다” 의외의 대답에 허를 찔린 창식은 드디어 참고 참아왔던 말을 내 뱉고야 만다 “그렇게 궁금하시면 동규형더러 고모 모시러 오라고 하면 되잖아요” 노인은 약점을 찔린 듯 훔찔 하면서 표정이 새하얗게 변했다. 창식은 분노가 울컥울컥 치 솟을 때마다 노인과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던 어느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못 보던 여자 신발이 보였다. 동규형의 누이 동숙이였다. 노인네가 얼마나 푸념을 했는지 모시러 온 모양이었다. 마침 장사를 하게 되어 집안일 맡길 사람이 필요했는데 잘 되었다며 동숙이 노인의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녀의 등뒤에 서서 창식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런데 고모는 꼭 모시고 가야 하니?” “왜 그래 섭섭해서 그래? 별일이네 무슨 미련이 남았다구” “그래도 어쩐지 섭섭하네 그동안 잘 모시지도 못 하구 속만 썩혀서…” “그렇게 걱정되면 가끔씩 우리집으로 내려와서 보면 되잖아 그리고 오빠도 결혼해야 될텐데… 조금만 기다려 내 천안에 가면 오빠 색시감 구해 놀 테니까”
“말만 들어도 고맙다” “그게 다 핏줄이란 것 아녀” “너도 핏줄 타령이냐?” “그럼 또 누가?” “니네 어머니” 노인과 동숙이 집안에서 빠져나가자 창식은 고독감 속에서 또다시 허우적거린다. 차라리 노인네를 보내지 말 걸… 예기치 못한 감정에 창식은 허탈한 분노를 느끼며 맥없이 자리에 주저앉는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