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가뿐했다. 의외였다. 분명 어제 장거리 산행도 있었고, 모처럼 양주에다 소주와 맥주를 제법 마셨고, 숙소에 와서는 막걸리를 곁들인 덕에 샤워 후 내일 아침 숙취를 걱정한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산이 나에게 건강이란 선물을 준 걸까 아니면 일시적인 현상일 까는 일단 차치하고 컨디션이 좋으니 기분이 묘했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다보니 옆에 구겨진 채로 있는 열차표와 어제 산행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철도공사에서 발행한 열차승차권을 들었다. 2015년 9월 13익 광주행 무궁화 열차 1427호. 1호차 일반실 입석. 22:34 수원발 22:54 평택 도착. 운임요금 2,600원, 할인 400원, 현금 2,200원이란 내용이 적혀있는 열차표를 읽어 내려갔다. 왜 평소하지 않는 일을 할까하면서 구겨 던지는 순간 어제 일이 떠오르며 촉각이 세워졌다.
신갈에서 내려 ‘소슬바람’ 님의 차로 ‘천마’ 님과 수원시내로 들어온 기억이 사진기처럼 찍혀 나왔다. 동승했던 ‘천마’ 님이 성빈센트 병원을 지나 내리고 나는 수원역에서 내렸다. 왜 이런 기억이 되살아날까.
이런 궁금증에 비례하여 어제 기억이 필림 되돌리듯 거꾸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신탄진 휴게소에서 정상교 회장님에게 사정상 바로 평택으로 가야겠다고 했다. 그러면 신갈에서 내리는 게 어떠냐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답이다. 수원토박이가 이런 생각도 못하고 신도림까지 가서 평택까지는, 영등포역 무궁화냐 신도림 전철이냐 두 방안을 놓고 고민하던 차다. 고정관념은 이렇듯 사람을 고문관으로 만든다. 여유를 가지고 늦어도 11시 전후로 평택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게 정 회장이 훈수다. 이러면서 판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집에 바로 문자를 넣었다. 살펴서 잘 내려가라는 답이 왔다. 전화통화는 잔소리가 따를 것 같아 그랬다.
버스에 올라 평소 신갈에서 오르는 ‘소슬바람’ 님에게 다가갔다. 집은 안산이고 차를 가지고 왔단다. 수원역까지 부탁도 일각의 망설임 없이 좋다고 한다. 훈수가 묘수로 변했다. 편한 마음으로 자리에 돌아와 한 번 더 잠을 청하려고 늘어지기 무섭게 ‘너와나’ 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슬쩍 뜨고 보니 ‘귀철 대장’과 둘이서, 마치 스튜어디스처럼 음료 서비스를 하며 오고 있었다.
자유인 산악회 일원으로 다니다 귀가 길 버스 안에서 이러는 모습은 처음이다. 언젠가 한 번 뒷자리에게 몇몇이 잔을 나눈 적 기억은 있었다. 결국 내 차례가 되었다. 피할 수 없는 분위기라 망설임 없이 한 잔 받아 마셨다. 역시 소주답게 짜릿함을 선사한다. 살아오면서 긴 시간을 같이 했던 소주다. 몇 년 전 막걸리로 바꾸기 전에는 좋은 동행자였다.
이번에 마신 소주는 ‘좋은 데이’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소주가 있다. 경상남도는 ‘좋은 데이’였다. 그러면 좋은 날 좋은 사람들과 마시라는 뜻이다. 아니 ‘~한 데이’라는 지역의 구수한 사투리이기도 하다. 기가 막히는 작명이다. 언젠가 모든 소주병이 초록색으로 바뀌더니 이 소주 역시 초록 병이다. 초록이 시각을 자극하는 아무튼 지 내 기억으로는 제주도 한라산 소주만 투명 병이 아닌가 한다.
소주 한 잔에 슬슬 기가 돌기 시작했다. 기분 좋게 팔짱을 끼고 늘어질 자세를 취하는 데 급하게 브레이크가 밝히는 소리에 이어 차안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놀란 마음에 보니 ‘귀철 대장’이 몇 미터 뒤로 밀려있었다. 대단한 순발력이란 투의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무방비 상태에서 급작스런 멈춤에 의식 없이 뒤로 물러나면서 제자리를 잡은 건 올림픽 체조경기 금메달 급의 착지를 넘어서고, 뉴턴의 관성의 법칙을 무색하게 하는 순발력이다. 닉네임이 괜히 ‘신작로’가 아니었다. 도로 위에서는 만능이었다.
다시 늘어지고 있는데 이형도 팀장의 목소리가 제법 또렷이 들려왔다. 늘 맨 앞에서 일행의 안전을 도모하던 그가 왜 뒤에 있을까. 이미 차는 천안을 지나고 얼마 더 눈을 붙여봐야 그렇고, 목소리 내용도 확인하고 싶어 툭툭 털고 뒤로 가서 ‘대연’ 형 옆 자리에 양해도 없이 앉았다. 바로 옆자리엔 강명호 대장이 있고 맨 뒤 불고 님의 고정석 옆에 이 팀장이 있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나.“
“도봉역 얘기다.”
“도봉역”
“그렇다. 배낭지고 한 번 내려 봐라. 쭉쯕빵빵이 많다. 불고 님이 알려줬다”
“쭉쭉빵빵. 젊음이 부럽다.”
“나도 50이 넘었다.”
“지천명을 했다고. 나는 40 조금 넘은 줄 알았다. 쭉쭉이들하고 뭐하기에”
“백문 불여일견이다.”
“에라이. 고향이 대화라고 알고 있는데”
“일찍 서울로 왔다. 애들은 다 서울에서 키웠다.”
“애들하고 스킨십이 필요하다. 그거 하나면 과외도 필요 없다. 반듯하게 자란다.”
“지금도 매일 그렇게 하고 있다.”
“잘 하는 거다. 그런데도 도봉역이냐. 이 팀장은 이제 대한민국 산악인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가장이다. 취향이 그러면 다녀라. 그게 잦아지면 아버지께서 내려 와 내려와 하실 거다.”
모처럼 농담을 주고받다 보니 술이 좀 부족했다. 이놈의 술이 과연 무엇이기에 병도 주고 약도 주는지. 혹시나 하고 물었다.
“술 남은 거 있나.”
“냉장고에 막걸리 두 병 있을 거다.”
“안주는”
“김치가 있을 거다.”
지금 이 분위기에서는 독한 술 한 잔이 마시고 싶었다. 평소 그리 좋아하던 막걸리도 그리 반갑지 않았다. 그놈의 소변 때문이고 지금까지 마신 술과 뒤섞이면 뒤는 뻔한 숙취뿐이다. 찬밥 더운밥 가릴 겨를이 아니라 중얼거리면서 막걸리를 가지고 왔다. 젖은 멍석에 물 붇기다. 바로 앞자리에 애주가 ‘수색대’ 님이 잠결에 듣는 지 조용하다. 평소 행동을 봐선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두지 않을 텐데 너무 조용해 그를 깨워 잔을 권하니 사양한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니. 수색대는 박민기 님의 닉네임이다.
나는 김민기 선생의 기타 소리와 저음을 최고로 좋아한다. 지금도 그렇다. 가끔은 그의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추스르기도 한다. 박민기. 그와 한남금북 정맥에서 처음 만났다. 동 트기 전 쉬는 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소주와 순대를 권했다. 산에서 순대 맛보기는 아마 처음이 아니었던가 싶다. 순대도 인상 깊었지만 옆에서 누군가 ‘민기 야“라고 부를 때 그 이름이 반가웠다. 김민기를 떠올리며 기억했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일 년에 두어 차례 만나면서 그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낙천적이고 호탕한 사나이다. 산우들에 대한 배려도 우리를 즐겁게 한다. 이번엔 양재동에서 담배 한 대 나누다 삼겹살을 가지고 온 걸 알았으나 걸음이 달라 함께하지는 못했다. 삼겹살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는 걸 보면 양이 제법 된 모양이다. 그걸 지고 오른다는 생각은 내겐 이미 흘러간 옛 노래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강화 형‘하고 부르기에 가보니 이빨까지 시린 25도 원판 두꺼비를 병째로 들고 웃는다. 거절할 힘이 없기에 받아서 나발을 불었다. 시원하고 찌릿하게 몸 안을 타고 내려갔다. 이러다 야간산행에 대한 부담이 나도 모르게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내 바로 앞에는 김동조 님이 있었다. 그 역시 한남금북 정맥 시절에 봤으니 아주 오랜만이다. 시원하고 점잖은 외모에 말수가 적고 그저 눈빛과 웃음으로 산우들을 대한다. 양재에서 ‘너와나’ 님이 누군가를 만나 포옹하며 반가워하던 이가 바로 그였다. 그를 같은 생활권에 있는 귀철 대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안부를 묻고 들었었다. 나는 그에게 같은 이름의 김동조 장관이 떠올라 외무부장관이라 칭하고 있었다. 귀철 대장이 지나가면서 나에게 슬쩍 얘기 해준다.
“내무부 장관 왔다. 뒤에 있다.”
“귀철 씨 집사람이 왔다고.”
“아니 동조 씨가 왔다.”
반가움에 인사를 청하니 역시 미소뿐이다. 그런 그도 산행과 뒷풀이를 통해 말문이 조금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뒷자리의 분위기를 피하려는 듯 깊게 잠든 자세로 있었다. 깨우려다 그냥 두었다.
바로 뒷자리는 ‘함박웃음’ 님이다. 닉네임이 그대로 연상되는 외모다. 어제 밤 출발하면서 누군가와 통화에서 강화 길상면 얘기가 자주 나오기에 자연스레 귀를 기울였었다. 그러더니 마침 차 안에 강화를 잘 아는 사람이 있으니 물어보겠다며 길게 이어지던 전화가 끝났다.
“길상면에 한빛요양원을 아나.”
“아무리 강화를 잘 알아도 거기까지는 모른다. 내일 알려주겠다.”
귀가 길에 핸드폰을 켜니 문자가 와 있었다. 요양원은 길상면 선두리에 있었다. 나는 느낌으로 전등사 옆 종로학원 자리에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선두리라는 데 있다고 한다.”
“종교 기관인가.”
“잘 모르겠다. 왜 그러나.”
“선배 하나가 최근 교육감도 출마하고 국회의원도 출마하려고 한다.”
“집안 망하는 가장 지름길이 선출직 선거에 나가는 거다. 말려라.”
“이미 거기까지 간 거 같다. 후배들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이런 저런 시간이 흘러 신갈에 내린 모양이다. 비록 차 안이지만 ‘소슬바람’ 님과 처음으로 긴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나이가 같았다. 요즘에 와서 동갑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우리 애마 주인도 동갑임을 이번에 알았다. 이천 백사가 고향이라는 그 역시 넉넉함을 타고 난 사람이다. 석규 님이나 너와나 님이 또한 같은 해에 고고성을 울렸다. 만나면 모임부터 만드는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닭띠들도 모임 하나 만들어야겠다. 이러면 산행 중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웃자는 얘기다.
수원역에서 소슬바람 님과 헤어지면서 슬슬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정신은 멀쩡해 함께 들어가기로 약속한 동료에게 전화를 하니 서정리역으로 오란다. 전철을 기다리다 보니 30분이 넘어도 천안행이 없다. 요즘 서동탄으로 빠지는 전철이 생기면서 평택까지 전철이 자주 오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기차를 타기로 하고 다시 전화하니 평택으로 오란다. 송탄 사는 동료의 배려로 평택역에서 만나 일단 숙소까지는 무사 귀환이나 들어오면서 막걸리 두 병을 사가지고 왔다. 이 여운이 기차표를 보게 하고 오늘 서두를 길게 가게 만든 원인인 듯싶다.
# 지난 구간을 셋이나 결석했다. 오랜 만에 이 팀장의 문자에 참석을 알리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토요일 야간 산행에 대한 부담이 직접 몸에 와 닿기에 당분간은 쉬고 싶었다. 와중에 나 자신과의 약속도 있고 이 땅에 태어났기에 1대간 9정맥 완주는 꼭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늘 무거운 것도 사실이다. 몸을 만들어 경상남도라는 만만치 않은 거리를 혼자서 걷는다는 건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이다. 말 그대로 지금의 내 상태는 진퇴양난이다.
이러던 어느 날 산우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정 회장과는 두어 번의 통화를 통해 안부를 묻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블랙홀 대장의 문자도 받았다. 주말마다 배낭을 지고 남양주 축령산, 보령 장군봉, 괴산 칠보산 등을 다니며 지금 내 상태만큼을 걸으며 자위를 했다. 그러나 이러다보면 경로당 산행으로 주저앉을 것만 같은 초조함뿐이다.
이러는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산은 무엇인 가? 퇴계와 율곡의 문장으로부터 이광수와 최남선의 유산기(遊山記)에 이르기까지 전대의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에 뒤지지 않고 오히려 넓고도 정밀하고, 글맛 또한 억센 남성미와 세련된 시인의 아취가 섞여있다는 김장호 선생님은 산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중 일부만 옮겨본다.
「한민족에 있어서 산은 단지 그들이 거기서 태어나 거기 묻힌다는 생명의 근원이요, 회귀점이라는 의식으로서만 아니라, 역사가 이미 소상하게 일러주듯, 그것 때문에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생활신조로까지 뿌리내리고 있다. 이렇듯 한국의 산은 그냥 산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신앙과 같은 것으로 그만큼 한국인의 논리의 강정을 지배해 온 것이다.
사실 지금 이 자리, 산마루에 서서 내다보면 보이느니 멧줄기뿐이다. 산 많은 나라의 그 얼굴을 보는 느낌이다. 저 멧줄기와 멧줄기 사이,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 저 조붓한 골짜기 틈서리를 비집고 앉아 우리네 조상들은 반만년을 그렇게 생을 영위해 왔던 것이다.
그 가지가지 실상은 물론 여기서는 내다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골짜기 안의 사연들인들 바로 저 등성이, 저 멧줄기에 어려 있지 않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골짜기 안의 마을과 마을의 모습이 그냥 그 모습이 아닌 바에, 그것들 되비치고 앉은 저 멧줄기가 오히려 그 무수한 속내를 더 확연하게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에 올라 그 산자락 아래 인간의 일을 떠올려보는 재미를 제쳐두고서는 등산의 멋도 반드시 옹글다고는 말 못할 것이다. 아니 한국의 산처럼 그것이 인간적일 때, 산은 반드시 알피니즘의 대상으로서만 거기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니다. 산을 앎으로써 그 역사 그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한국산의 경우 지극히 타당한 것이 된다. 그래서 또 산을 아끼는 마음이 그대로 애국심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생명을 존중하는 사상, 또는 산을 깡그리 깔아뭉개는 전쟁을 미워하는 평화주의로까지 치닫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출발 전 버스 안은 먼저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참석하는 얼굴들이 바뀔 뿐 자연히 흘러가고 있었다. 소위 힐링 팀을 기준으로 볼 때 이번에는 내가 온 대신 석규 님과 판종 님이 그리고 막판에 집안일을 돌보게 된 강화 님이 보이지 않았다. 어김없이 출석을 확인하고 회비를 받고 지도를 나누어준다. 이번에 회비를 받는 블랙홀 대장은 고스톱과는 담을 쌓은 듯하다. 귀철 대장은 받는 즉시 만 원 권 오만 원 권을 자동으로 분리하고 야무지게 쥐고 다닌다. 블랙홀에게는 이런 날렵함이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받아든 지도다. 아침에 옆에 있던 열차표는 이미 앞에서 개론을 말했고 이번엔 또 옆에 있던 지도에 대해 풀어볼 차례다. 낙남정맥 제5회 차 구간은 계리재에서 돌장고개까지 9km, 돌장고개에서 부련이재까지 11km, 부련이재에서 배곡고개까지 5km로 도상거리로만 25km다. 여기에 상수 0.3을 곱합 거리 7.5km를 더하면 32.5km다. 물론 이건 이 지도를 놓고 볼 때는 그렇다는 얘기다.
내가 구간을 훑어보는 건 내 근수에 맞는 계산을 하기 위함이다. 지금 상태에서 이 거리를 소화하기는 무리다. 모처럼 왔어도 믿는 구석이 있기에 산의 높낮이나 구조보다는 진주시, 고성군, 사천읍 등 이런 지명을 보며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떠올리는 게 작금의 나다. 이래서 작전 모의처인 기흥휴게소에서도 소위 힐링팀이 모이지 않았다.
먼 거리 탓에 들머리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가 넘었다. 이번엔 출발 전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수색대 님의 25도 소주 덕분에 도착지에서 당황은 없었다. 배낭을 지고 나가는 데 정 회장이 9km 더 가고 내린다며 의사를 묻는다. 이런 걸 가뭄에 단비라고 할까. 몸에 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번 산행 출발 전 예감이 좋았다. 너와나 님 포함 셋이 더 가기로 하고 선행자들을 배웅했다. 불고 님을 찾아 물으니 돌아온 답이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선두에 서서 어둠의 들머리를 찾아들었다.
“더 가고 시작하자.”
“아니다. 오랜 만에 왔으니 충분히 걷고 싶다.”
이날 진주 지역 새벽은 안개가 점령했다. 정 회장이 기사 옆에서 열심히 독도를 하며 좁은 동네를 지나고 몇 번 S구간을 꺾고 내린 고개가 돌장고개다. 버스를 돌린 공간도 없는 산길에 포장은 깔끔하게 되어 있고, 바로 아래로는 통영~진주간 도로가 나 있었다. 이른 새벽임에도 고속도로를 막힘없이 달리는 차량들이 굉음을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돌장고개는 낙남정맥 구간임에도 어디 흔적하나 찾을 수 없는 구조다. 지도와 핸드폰 나침반을 한참이나 검토한 끝에 길을 찾았어도 몇 발 가기 전에 막혀있다. 초점이 안정되며 보니 그곳은 길이 아니라 소똥 모으는 곳이었다. 향기가 좋다는 너와나 님의 역설적인 표현이 바로 나왔다. 일단 오던 길 반대로 내리며 길을 찾아보기로 하다 20여 미터 후방 산속에서 이정표를 만났다. 이정표 방향대로 다시 지나온 길을 따라 내리니 고속도로 아래로 통하는 길이 나왔다. 이 거리를 오간 것도 알바에 속한다고 억지 표현을 한다면 오늘은 알바 하는 날의 암시를 받은 거다. 그러나 산꾼들은 이 정도를 알바라고 하지는 않을 거다.
고속도로를 지나도 낙남 흔적은 없었다. 그냥 어둠 속 산 아래에 던져진 기분이다. 산의 백전노장 정 회장도 선뜻 판단하지 못할 정도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는 우리는 그저 감각에 의존해 길을 찾고 있었다. 결국 도로 지나기 전 이정표 자리를 연결해 보는 방법을 택해 찾아나갔다. 가는 길은 콘크리트벽으로 중무장되어 가면서도 반신반의 했다. 마침내 벽 끝에서 날리는 반가운 리본과 만났다. 경험자의 후각은 이랬다.
이번 구간에서 최고봉은 409 미터의 봉대산이다. 대부분 200에서 300미터 대의 높이다. 비교적 평탄한 들머리로 들면서 문득 떠오른 의심은 출발 전 신도림에서 본 ‘임 팀장’ 님의 고도표에 대한 사이클이다. 옆 자리 ‘의규’ 형과 몇 번을 봤기에 비록 산은 낮아도 100미터를 오르내리고 심지어 부련이재는 바닥에서 300미터를 오른다. 산의 높이를 보고 쉽게 접근했다간 큰 코 다칠 구간이라는 긴장감을 풀지 않은 게 그간 산에 다니며 배운 지식이다. 어둠 속에서 정 회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뒤로 번호”
번호는 셋에서 끝났다. 단출한 산행이다. 산에만 들면 듣는 ‘처음 30분 산행이 그날 산행을 좌우한다.’는 정 회장의 말이 기억나 이번엔 내가 먼저 슬로우 스타트를 말하고 우리는 이견 없이 초반부를 걸었다. 이미 벌어 놓은 9km라는 팁이 있기에 마음도 걸음걸이도 편했다. 그간 지낸 일도 서로 나누며 산행을 이어갔다.
어느 봉우리를 앞두고 헤드랜턴을 배낭에 넣었다. 날이 밝으며 우리가 온 길을 뒤돌아보니 300미터 높이가 무척이나 깊고 넓었다. 요즘 회자되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여기에 대입한다면 정말이지 산의 높이는 숫자라는 걸 실감나게 한다. 이래서 정맥이라는 격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산에서 느끼는 게 많았던 초반부다. 거기다 자주 만나는 소나무 군락에선 산의 품격을 보았고, 맘껏 엉키며 자라는 잡목들에게서는 이 정도면 나도 괜찮지 하는 자존심도 봤다. 새하얀 취나물 꽃도 보랏빛의 이름 모를 가을철 야생화도 싱싱함 그 자체로 자신을 드러내는 길을 걷도 또 걸었다.
얼마 뒤 우리들의 입에서는 동시에 환성이 새어나왔다. 일출 직전이다. 우리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연봉이 담채를 이루는 끝 산자락 능선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좋은 전망을 위해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우리만의 전망대를 만들고 일출에 맞춘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그동안 수많은 일출을 만났다. 모두가 하나 같이 인간세계가 아님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번 역시 까무러치기 일보직전이다. 자연히 머무름도 길었다. 서로에게 감사했다.
“나는 5남매 중 막내다. 얼마 전에 부모 같은 큰 형이 제안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지난 산행 불참이유 같다.”
“내가 의견을 내서 해외여행을 국내로 돌렸다. 여수 오동도 근처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향일암, 순천, 지리산 일원을 돌았다. 가는 곳마다 고마워했다. 특히 지리산 성삼재에서 노고단 정상까지 산행은 백미였다. 나와 집사람과 누나만 경로 우대 제외니 나머지 분들은 연세를 알만하지 않나. 그들이 한 자리에서 하나가 되었다.”
“듣기만 해도 부럽고 아름답다. 물론 저녁에는 화기애애한 술자리가 이어졌겠다.”
“물론이다.”
“가정이 화목한 집을 보면 덩달아 기분이 좋다. 뼈대는 괜히 찾는 게 아니다. 요즘 세태가 역으로 가는 게 너무 안타깝다.”
“이구동성으로 이런 자리를 계속 이어가자는 말들이 이번 가족여행의 결론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최대한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집에서 이제는 산에 다니는 맛을 이해했겠다.”
“안 그래도 집사람은 산이면 다 같은 줄로 안다. 아직도 산에 대한 이해는 덜한 것 같다.”
“오늘 산행도 좋고 들은 얘기도 뭉클하다.”
여유를 가지고 산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 대다수가 그러고 싶어 한다. 허나 그러기엔 걸림돌이 여기저기 너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여유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름 없는 봉우리에서 배낭을 내리고 간식을 나눴다. 너와나 님의 담금주를 마시다보니 독한 술 생각이 났다. 정 회장에게 정상주 한 잔을 청하니 배낭 속 깊숙한 곳에서 꺼내 따라준다. 강한 돗수의 알콜은 이미 술이 아닌 정신세계로의 진입이다.
얼마를 더 걷고 다음 봉우리에 헬기장에서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약간의 속도를 줄이며 걸으니 누구에게도 피곤함이나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도착한 헬기장은 식사를 하기엔 풀이 너무 자라 있었다. 산정에서 자주 만나는 헬기장의 용도는 과연 무엇일까. 방치했다가도 필요시 보수해서 쓰는 것인 지 아니면 일회용으로 만든 것인지는 이 자리에서 따질 일은 아니나 이번처럼 내팽겨 놓은 헬기장을 의외로 많이 보고 있다.
헬기장을 지날 무렵 기계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가보니 벌초 중이다. 아버지로 보이는 듯한 이가 기계에 정신을 집중해 인사를 나누려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바로 옆 아들로 보이는 젊은이는 남의 일이라는 듯 핸드폰에 눈이 박혀 그 역시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이러다 조상 무덤의 벌초는 우리 세대까지인 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미쳤다. 물론 나 자신도 여기에는 딱히 대답할 입장이 못 된다.
버너에 물이 끓을 무렵 너와나 님이 왔다. 벌초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니 부련이재까지 가냐고 묻더란다. 동네 아저씨라 잘 아시네요 했더니 본인은 10년 전에 낙남정맥을 마쳤다며 앞으로 2km로 남짓이면 도착한다는 말도 했단다. 이 2km를 믿고 걷다가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긴 2km를 지나게 된다.
아침 상차림은 의외로 간단했다. 너와나 님이 규철 대장에게 짐을 건낸 것, 정 회장은 오기 전까지 모처에서 중국산 명주를 마시다 급조해서 컵라면 3개를 배낭에 넣어온 것, 나 또한 늘 얻어먹던 산중 비빔밥을 기다리다 혹시나 하고 밥에다 반찬 하나 달랑 가지고 온 것의 종합편이기에 그랬다.
그러나 우리의 밥상엔 초대된 이들이 있었다. 나무와 꽃과 산새가 그들이다. 시원하게 부는 바람도 중간 중간 다녀갔다. 치즈빵을 나누며 라면이 익기를 기다렸다, 어느덧 익은 컵라면을 하나씩 들었다. 파김치, 부추김치, 뱅어포, 매실, 열무김치가 제각기 미각을 깨워준다. 이러면 성찬이다. 또 반주가 있고 사과라는 후식이 있고 커피로 마무리까지 했다. 지금 쓰다 보니 할 건 다했다.
“컵라면도 세 개, 음료수도 세 개다. 기가 막히지 않나.”
“나는 떡을 두 개만 가지고 왔다.”
“말 안 해도 그 떡은 누구건 지 안다.”
다시 신발끈을 조였다. 배낭 무게는 반으로 줄었다. 다리는 가벼웠다. 앞에 버티고 있는 봉우리도 어렵지 않게 넘었다. 그러다 손으로 쓰고 손수 새겨 넣은 정겨운 이정표를 만났다. 거기엔 봉대산 3.2km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그 글씨가 유독 뚜렷하게 들어왔다. 고개를 갸웃거릴만한 그런 숫자다. 분명 벌초 아저씨에게 2km 남짓에 부련이재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고개는 봉대산에서도 2km가 넘는 데, 이러면 복잡해지는 것은 머릿속이다.
허나 이 깊은 산중에서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으니 우리는 그냥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갔다. 높낮이를 반복하며 나갔다. 그러다 제법 높은 봉우리를 만났다. 직감적으로 봉대산 임을 알았다. 처음으로 힘을 쓰고 경사진 길을 올랐다. 옷이 온통 땀으로 젖었다. 이쪽이라는 정 회장의 소리가 들려 방향을 돌리니 많은 리본이 날리는 봉대산 표석이 기다리고 있다. 손을 한 군데도 가하지 않은 부드러운 곡선의 자연석이다. 반듯한 해서체로 쓴 봉대산이란 글씨가 아쉬웠다. 예서체로 구도에 맞게 새겨 넣었으면 아마 무등산 입석대나 서석대 표석 다음 순서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돌이었기에 더 그랬다,
우리는 너와나 님을 기다리며 담배를 물었다. 발아래 나무 둥치를 세워 의자로 하다보니 아래 위가 관통되었다. 수석에서는 이런 걸 운이 통한다고 하면서 운통석이라 부른다. 정 회장이 잠시 기다리라며 사진기를 꺼내더니 들고 보란다. 제법 무거웠다. 초점을 잡느라 1분 이상 들고 벌을 섰다. 마침내 셔터가 터졌다. 정 회장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답은 사진란에 있을 거다. 물론 아직은 보지 못했다. 뒤이어 오른 너와나 님은 표석 위에 놓고 그 나무를 바라봤다. 조금은 쉬었을 거다. 그 역시 같은 그림을 얻었다. 아무튼 우리 정 회장은 사물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 여기서 우리는 한참을 쉬며 놀았다. 독도도 충분히 했다.
바로 아래 공터에선 오동나무 잎을 들고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나서 왼편으로 난 길을 향해 편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 길이 유일한 길이었다. 이번 구간에서 유독 눈에 많이 띈 건 멧돼지 흔적이었다. 이 봉우리도 그냥두지 않은 곳이 많았다. 한 두 마리가 뒤집어 놓은 땅이 아니었다. 배설물도 몇 번을 피해갈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진짜를 하나 건졌다. 앞서던 정 회장이 멧돼지 목욕탕을 찾았다.
동물들의 감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멧돼지란 놈도 겉모습만 그렇지 상당히 영리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었다. 눈으로 얼핏보니 사각형에 크기는 10여 평이다. 흙을 질척하게 잘 버무려져 있는 사이로 맑은 물이 고여 있었다. 주변 소나무는 1미터 아래로 모두 흙이 묻어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멧돼지들의 목욕탕이었던 것이다. 그때의 감흥은 지금도 남아있다.
10여 미터 진행하니 잘 조성된 무덤이 나왔다. 정 회장이 무덤 뒤로 이어진 부분이 코라며 무덤의 구조를 설명한다. 코가 생명체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다는 얘기도 하고, 이래서 선조들을 비조하고 한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석등도 오래되었고 상석도 제법 연조가 있어 보였다. 읽어보니 한성판윤을 지낸 이의 부부 합장묘였다. 고개를 아래로 내려가며 더 읽다 순간 나는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20대로 돌아가 거짓말 조금보태 제자리에서 2미터 정도를 뛰며 소리를 질렀다. 지뢰를 밟아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고 뒤를 보니 10여 미터 앞이다. 당연히 그들은 내게 물었다.
“왜”
“뱀이다.”
이 말을 들은 너와나 님이 덩달아 놀래 뛰었다. 정 회장만 유독 별일 아니라는 듯 뒤를 따라온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눈은 발아래로 고정이다. 그러다 세 번 무덤을 지났다. 무덤에는 뱀이 있다는 정 회장의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런 속도로 한참을 걸었다. 길도 아주 편하고 좋았다. 고도도 많이 낮아졌다. 뱀 덕분에 부련이재를 쉽게 내려왔다고 숨을 고르기도 전에 정 회장이 잠깐 서란다. 내 배낭 윗 가방에 지도가 있기 때문이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에 모르는 불안감이 다시 느껴지고 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한참을 핸드폰 화면을 늘렸다 줄였다 하던 정 회장이 알바란다. 알바라니.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 알바라는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지도를 더 들여다보기에 차선책으로 우회도로를 찾나 했다. 와서 보라기에 화면을 보니 파란색과 완전히 90도로 벗어난 빨간 줄이 보였다. 우회도로도 없었다. 완전히 산줄기가 바뀌었다. 봉대산은 이미 저 멀리 떨어진 높은 봉우리였다. 나도 나지만 너와나 님은 그냥 주저앉을 기세다. 몇 분이 지났을까 정 회장이 오던 길고 다시 걷는다. 따라 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갑자기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뱀이다”
너와나 님이 뱀을 다시 본 모양이다. 나는 그냥 뛰었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는지 나도 모른다. 발아래가 괜히 이상하고 찜찜했다. 걷는 게 아니라 뒤에서 누가 미는 거 같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솟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걸 심리학에서는 자극의 일반화라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자를 읽을 때 어느 글씨체를 봐도 ‘가’자라고 읽는 원리다. 내게 뱀이라는 자극에 일반화되어 나무막대기를 보면 뱀과 연상이 되는 심이 괴로운 시간이 알바에서 복귀 길까지다. 아니 하산까지다.
내가 뱀을 만난 묘소가 나왔다. 완전히 반대쪽으로 순식간에 지났다. 따라올까 봐 뒤도 돌아봤다. 그러다 다시 멧돼지 목욕탕까지 왔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목욕탕 입장료가 비싸도 너무 비쌌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정 회장의 모습이 어느새 보이지 않는 게 다시 고민거리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얼마 뒤에 능선을 오르는 모습을 봤기에 일단 안심은 했어도 다시 봉대산으로 복귀하는 구조가 다시 다리에 힘을 빼놨다. 너와나 님이 뒤로 쳐졌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심정도 나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결국은 다시 봉대산 정상이다. 목소리가 들림에 반가웠다. 올라온 이들은 우리 일행이 아니라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 둘이다. 목적지가 어디냐 물으니 우리와 같은 부련이재다. 알바를 얘기하면서 길을 물으니 그들도 역시 정상 주변을 돌며 길을 찾는다. 정 회장이 찾아낸 방향으로는 가시덤불이다. 헤치기는 쉽지 않아 유일한 길인 알바 길을 다시 내리면서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몇 미터 채 가지도 전에 왼쪽으로 리본이 달려있었다. 아무리 산길에 일가견이 있어도 거길 알고 방향을 잡는 이들은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쉽게 찾을 수 없는 구조다. 이러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젊은 친구들이 먼저 그 길을 헤쳐 나가고 우리는 일행들을 위해 나뭇가지로 길을 막고 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들어가는 길 나뭇가지도 다 잘라버렸다. 그리고 이 팀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고 만난 안내판에는 부련이재까지 2.7km가 넘게 그려져 있었다. 이런 걸 호랑이 피하면 곰을 만난다고 표현하면 맞을까. 이런 우여곡절 끝에도 우리는 부련이재에 배낭을 내려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일행이 셋이었다. 자동차에 물건을 싣고 셋이서 교대로 산길을 걷고 운전도 하면서 정맥길을 잇는 사람들이었다. 광주에서 왔다고 하면서 이번에 세 번째 낙남길이란다. 좌표도 정확히 찍고 다닌다면서 메모지도 보여준다. 그러면 봉대산에서 길을 찾지 못한다는 거와 말이 틀린다. 그렇다고 따질 일은 아니다. 이런 저런 말끝에 두 명이 산으로 오르고 남은 하나가 차를 태워준다기에 혹시나 하고 정 회장에 가니 단칼로 거부하고 배낭을 진다.
아쉬워하는 너와나 님에게 밤 따줄 테니 오라며 길을 재촉한다. 오기 전 신도림에서 들은 ‘대연’ 형이 말하던 임도로 방향을 잡았다. 백운산 봉우리를 언뜻 보니 높이보다는 가시덤불이 많이 보였다. 알바로 지치기도 했어도 못갈 길은 아니나 임도도 아름다운 산길이었다. 아닌게아니라 밤도 두어 차례 따서 맛을 보기도 했다. 햇밤 맛이 제법 들었다.
300미터 높이에 난 임도는 여느 산길 못지않게 경관이 수려했다. 당연한 말 같지만 이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색다른 모습이 산으로 들수록 계속되었다. 제철 모르는 노란나비와 흰나비가 어울어지기도 하고 쑥부쟁이며 취나물 꽃이며 역시 노란색 흰색이 마타리 꽃도 자주 만났다. 무엇보다도 임도 입구부터 끝까지 함께한 물봉선 군락은 두고두고 잊지못할 것이다.
물봉선은 숲길지도자 교육을 받을 때 알게 된 야생화다. 꿀주머니가 맨 끝으로 말려있는 게 특징이다. 꽃은 색서폰 같은 통 모양이고 보라색이다. 곤충이 꿀을 얻기 위해서는 침이 끝까지 말려들어가야 한다. 직경 40센티가 넘는 물봉선도 있다. 어느 학자가 결국은 이 긴속에 있는 꿀을 빠는 곤충을 발견하고는 진화론의 위대성을 말한 바 있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임도의 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산 위가 5km이니 임도는 최소 5km는 넘을 거다. 우린 이 길을 걸으며 알고 있는 가을 노래를 실컷 불렀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 남쪽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 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노라’가 산속에 은은히 퍼졌다. 가사 틀리기로 유명한 정 회장이 끝까지 기억하는 가사이기도 했다.
가곡과 동요에서 유행가로 옮겼다. 요즘 50 후반 아주머니들의 감상에 빠뜨린 노사연의 ‘바램’도 나왔다. ‘숨어오는 바람소리’도 ‘갈색 추억’도 같이 불렀다. 호남정맥에서 ‘봄이 오는 길목에 좋은 사람들과’라는 말을 만든 정 회장이 이번에는 ‘가을이 오는 계절에 아름다운 사람들과’로 바꿔 말했다. 이장희의 ‘그건 너’까지도 불렀고, 끝판에 부는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아 섰더니’를 합창하며 어느 날 새벽의 호남정맥 산속을 떠 올리기도 했다. 이 노래 제목인 ‘별’은 ‘가람 이병기’ 선생 시에 ‘이수인’ 선생이 곡을 붙인 노래다. 정 회장은 신영옥과 이수인이 부른 별이 좋다는 엉뚱한 기억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수인은 이 시에 곡을 붙인 작곡가다.
어느 자리에선가 정 회장의 누님과 사모님이 나눈 말 중에 선문답이 있어 결례를 무릅쓰고 써본다. 누님께서 이 말을 하지 말랬다고 하면서 들려준 말이란다. 결실의 계절 가을이 오고 있다. 이 계절에 하나 기억해도 좋은 말이다.
“남편이 어떤가.”
“있어도 못살 거 같고, 없어도 못살 거 같다.”
이러다 보면 너와나 님이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기다려야 나타나고 다시 떨어지고 하면서 우리는 임도를 걸었다. 끝무렵에 나타나면서는 손에 꽃다발을 들고 왔다. 무지개색이 다 들어있다. 그 꽃을 보면서 차를 타지 않을 것을 무지무지 후회하는 식으로 말한다. 모순이다.
발바닥까지 통증이 오는 걸 보면 어느 정도 목적지에 이르렀다고 판단되는 순간 3거리가 나왔다. 산도 아니고 임도를 독도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나 시멘트 길은 올라가는 길이고 하나 흙길은 내리는 길이다. 정 회장이 먼저 시멘트 길을 택하고 올랐다. 아직 모습이 보이지 않는 너와나 님을 기다리기 위해서다. 여기서 길이 엇갈리면 대책이 없다. 격차가 자주 발생해 우리는 소리로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며 왔다. 소리를 지르니 멀지 않은 거리에서 답이 온다. 모습이 보이기에 손짓으로 시멘트 길로 오라하니 더 이상 오지 못하겠다는 투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할 수 없이 시멘트 길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이 완전히 지쳐보인다. 그래도 손엔 꽃이 들려있다. 산행 중 마시기도 아까운 물을 그는 꽃병으로 쓰고 있었다. 임도 끝 부분엔 농장 비슷한 건물 전에서 산맥이 끊긴다. 정 회장이 앉아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또 알바라면 하는 불안한 생각이 먼저 든다.
가뜩이나 핸드폰 뱃터리가 소진되었다는 말을 하며 배낭을 내리며 앉는데 너와나 님이 왔다. 동체착륙 수준으로 앉으며 정상주를 하잔다. 사람이나 자동차는 알코홀 먹으면 일단 힘이 난다. 정상주가 참으로 여러 용도로 쓰인다. 오늘도 비록 정상은 아니라도 마무리 의미가 있으니 정상주 이름값을 하게 된다.
독주 두 세잔을 거푸 들이킨 너와나 님이 살 거 같다고 한다. 오면서 정 회장이 너와나 님에게 간식 좋아한다니 본인은 그리 즐기지 않는 다고 하면서 소맥 몇 잔이 간식이란 소릴 들었었다. 그러니 살 거 같다는 얘기는 나처럼 아는 사람이 들으면 어색하지는 않다. 지나가던 사람이 들으면 한 번 다시 쳐다볼 말이지만.
치즈, 포도, 방울토마토가 먼저처럼 안주로 나왔다. 셋이다 보니 술도 안주도 우리가 마시기엔 넉넉했다. 치즈도 두 개나 먹었다. 남은 사과도 하나 마저 깎아서 나눴다. 이제 나도 어디든 다시 갈 힘이 솟았다. 일어서며 보니 산 아래 마을이 편하게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 선조들은 삶이 산과 들과 물을 끼고 살아왔다. 외국인들이 가장 담고 싶어하는 게 이런 마을이란다. 오면서 이런 마을을 꼭대기에서 여러 번 보고 왔다.
다시 충전된 핸드폰을 늘였다 줄였다 하던 정 회장이 아까 흙길이 맞는 다고 한다. 이래서 작은 알바가 하나 추가 되었다. 버스 안에서 이 팀장이 목적지에 내리면 저수지까지 오라는 말이 생각나 능선을 중심으로 양쪽 마을을 살폈다. 우측에 저 멀리 있는 작은 마을이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목적지를 앞에 두고 내려다보는 마을이 감상에 젖었다. 마을 속으로 들어가 봐야 노인네들만 남았겠지만 일단은 이렇듯 감정이 일었었다. 급기야는 얼마 전에 읽은 공자 님 말씀이 생각났다.
후기를 정리하며 다시 읽어 보니 이랬다. “마을은 어질어야 아름다우니 마을을 고르면서 어진 마을에 처하지 아니하면 어찌 지혜로울 수 있겠는가”라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공자의 말씀을 이기동 선생은 이렇게 강설하고 있다.
「마을에는 부자 마을, 가난한 마을, 산마을, 시장 마을 등 여러 종류가 있으나 어진 마을이 가장 아름답다. 경치 좋은 산 밑에 있는, 공기 좋고 물 좋은 마을에 사는 살감들은 늘 유쾌하므로 인심이 좋다. 그런 마을이 어진 마을이다. 그런 마을은 대체로 교통이 나쁘고 경제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들 마을은 교통이 좋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시장도 형성된다. 그러한 곳에 살면 집값이 올라가고 돈을 벌게 되자만, 인심은 나빠진다.
어진 마을에 우선 수입이 적다 하더라도 자녀들이 건실하게 자라며 조용한 분위기에서 공부도 열심히 하게 되므로 장래가 밝지만, 번화한 마을에 살면 돈은 벌지 모르나 인심이 각박해진다. 불량한 환경 때문에 자녀들이 건실하게 자라지 못하며, 시끄러운 까닭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으므로, 장래를 염두에 둔다면 좋을 것이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진 마을을 택한다.」
시멘트 길을 따라 내리다 강명호 대장을 만났다. 아직도 원기가 남았는지 목소리가 힘차다. 뒤에서도 금방 누군지 알 정도다. 잡목과 가시나무를 헤치고 왔단다. 호남정맥도 그랬지만 낙남정맥 길도 가시와 잡목으로 역시 쉽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정맥 길은 남대문 시장에 가서 튼튼한 옷을 구해 다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둘은 먼저 트럭타고 가고, 몇 명은 임도타고 갔다.”
“그 중 하나는 불고일 거다. 그럴 줄 알았다.”
강 대장은 바로 앞 봉우리로 들면서 320고지 하나 넘으면 끝이라고 한다. 구조적으로 보면 따라 그의 말대로 지름길일 수도 있으나 이미 몸과 마음은 편한 길을 원하고 있었다. 그가 먼저 산을 들고 우리는 시멘트 길을 걸을 무렵 이 팀장의 목소리와 부뜰님 사모님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이번 대장정은 마무리되고 있었다. 어려운 길을 침착하게 안내해 준 정 회장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다 내려왔나 싶은 데 다시 삼거리다. 오른 쪽은 산에서 본 마을이고 왼쪽엔 저수지가 있다. 산골마을 치고는 도로 상태가 너무 좋고 넓었다. 마치 휴게소를 짓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공간이다. 앞서던 정 회장이 트럭을 잡고 묻더니 마을길이 아니 저수지 길을 택하고 오른다. 마지막까지 돌다리를 두드리는 식이다. 결국 그 선택이 맞아 우리는 얼마 뒤 파란색의 애마와 만날 수 있었다.
천마 님, 임 팀장 님, 의규 형이야 당연히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고, 불고 님과 대연 형은 의외다. 빈 막걸리 병이 하나 돌아다닌다. 남은 한 잔은 내 차지가 되었다. 마시고 보니 대연 형이 한 잔 해 핑 돈다며 얼굴을 만진다. 평소 술하고는 연결이 되지 않는 그 형이 한 잔 술을 쉽게 본 모양이다. 신도림역에서는 이런 말도 했었다.
“담배 못 끊겠네. 딱 한 대만 피려고 한 갑 사서 정말로 쓰레기통에 넣은 적도 있는 데 또 사게 되네. 스트레스 때문에 당분간은 끊지 못할 거 같애.”
경남 사천시 어느 작은 동네 식당에서 뒷풀이가 있었다. 냇가 보다 조금 넓은 천이 강이다. 무거운 다리를 끌고 대충 씻었다. 나머지는 산악인들답게 훌러덩 벗고 씩씩하게들 씻는다. 그들은 사회생활도 이런 마음으로 잘 해나가고들 있을 거다. 건배 후에 서로 나누는 모습에서도 건강한 몸과 마음이 늘 묻어 나온다. 늘 그들을 보고 배운다. 나는 언제나 철이 들까.
# 우리는 진주 지방을 걸었다. 전세계가 인정한 우리나라 양대 소설은 재미있게도 호남정맥에서 하나가 나왔고, 낙남정맥에서 하나가 나왔다. 잘 알고 있는 조정래 선생의 소설 태백산맥은 호남이 잉태했고, 박경리 선생의 토지는 낙남정맥에서 태어났다.
또한 진주지방은 가야 문명을 꽃 피우던 땅이다. 가야인들이 고구려에 패하고 일본으로 단체 이주하기 전까지는 일본이란 나라고 없었고 ‘왜’나라였다는 게 정설로 드러나고 있는 작금이다. 일본 즉 해가 뜨는 나라는 가야인들이 세운 나라임을 자신 있게 얘기하고 있는 이는 역사학자가 아닌 소설가 최인호 선생이다. 그가 4만 여 km를 추적하고 쓴 ‘제4의 제국’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역사책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역사학자들에게 먼저 일독을 권하고 싶다.
이 지역에서 진주 사람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마침 동료 중 하나가 진주 출신이라 물었다.
“진주 사람들이 고향에 대한 자긍심은 어느 정도냐.”
“진주성에서 결사항쟁으로 왜군과 싸워 나라를 지킨 땅의 후손이라는 자존심들이 엄청나다. 주변 도시에 비해 무게가 다른 것을 많이 보고 자랐다.”
“위치는.”
“대전과 같은 위도에 있고 진주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광주, 동쪽으로는 부산이 같은 거리에 있다.”
“살기는 어떤가.”
“지금이라도 여유만 있으면 내려가고 싶다.”
“내 주변에 있는 진주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점잖고 뭔가 느끼는 품이 다르다. 흡사 안동인들의 자존심 같은 그 뭐가 느껴진다.”
“남명 선생의 영향이 크고, 지리산의 정기도 한 몫을 했다고 본다. 교육도시에다 지금도 관공서 근무자가 대접을 많이 받고 있다”
“가야 문화권이다.”
“그렇다. 진주에 가면 반드시 박물관에 들러봐라. 철기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볼 거다. 고성 쪽에는 고분군이 있다.”
“당시 일본 문화와도 교류가 많았는데.”
“경상대학교에 전국에서 최초로 일본어학과가 개설되었다. 이것도 한 이유가 될 거다.”
“같은 가야문화권인 합천이나 밀양, 김해와도 같은 생활권인 가.”
“그쪽은 좀 다르다.”
“가야인으로 김유신이 삼국통일에 일조를 한건 잘 아는 얘기다.”
“그렇다. 가야인이다. 수로왕능과 해인사 창건도 어쩌면 보답차원의 배려다.”
“음식도 발달했겠다.”
“물론이다. 반가의 전통 있는 음식이 많다.”
“마산, 창원 등과는 어떠냐.”
“진주는 고려시대부터 관찰사가 거주하던 곳이다. 그쪽은 역사가 상대적으로 일천하다. 전후 발달된 도시로 보면 될 거다.”
“소설 토지를 읽어보면 하동과 진주가 한 문화권으로 보인다.”
“지금도 진주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출퇴근을 하고 있다.”
“청마 유치환 선생이 계시던 통영도 같은 생활권인 가.”
“그쪽은 바다다. 마산 쪽으로 보면 된다. 논문 쓰는가.”
“아니다. 낙남정맥을 걸으며 책에서는 느낄 수 없는 숨결을 보고 싶었다. 진주를 중심으로 한 지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번에 직접 걸으며 한 번 느껴볼 생각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토지는 박경리(朴景利) 선생이 지은 장편소설이다. 인터넷에서 발췌해 봤다. 이 소설은 1969년부터 집필에 들어가 1994년에 전 5부로 완성된 대하소설이다. 한말의 몰락으로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대에 이르는 과정을 경상남도 하동군 평사리 간도의 용정 그리고 진주와 서울 등 도시를 무대로 지주계층이었던 최씨 일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폭넓게 그려내고 있다.
내용은 만석꾼 최 씨 집안의 주인인 최치수가 마을 건달들에게 교살되면서 최 씨 집안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마침내는 일제의 눈을 피해 용정으로 야간도주하게 되며, 그곳에서 재기, 다시 옛 땅과 집을 사들여 귀향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난 시대 한민족 겪은 고난의 삶을 생생하게 형상화해 낸 점에서 토지는 역사소설의 규준에도 적응하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탐구로서 더 큰 성과를 얻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의 전 과정에 걸쳐 여러 계층의 인간들이 등장하는 까닭에 이야기의 중심에 존재하는 최서희라든 가 길상·월선·용이 등이 주인공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어울려 사는 역사와 사회가 주인공이라고 보아야 된다. 최 씨 집안의 몰락과 재기도 한민족의 몰락과 재건을 뜻할 수 있다.각계각층의 인물들이 저마다 개성 있게 등장하면서 시대사의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되는 점도 특색이다.
영어·불어·일어로도 번역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17권의 만화로도 재탄생되었다. 7권이 나오고 나머지가 나오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다. 생전에 박경리 선생도 이 만화만큼은 감명 깊게 읽었다는 이야기가 만화책에 전한다.
제 1 부 요약 (1, 2, 3, 4권)
1897년 한가위부터 1908년까지 약 10년간, 경남 하동의 평사리를 무대로 하여 5대째 대지주로 군림하고 있는 최 참판 댁과 그 소작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1860년대부터 시작된 동학운동·개항과 일본의 세력 강화·갑오개혁 등이 토지 전체의 구체적인 전사(前史)가 된다.
동학 장군 김개주와 윤 씨 부인에 얽힌 비밀이 차차 풀려나가면서, 신분 문제와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 귀녀와 평산 등이 최치수를 살해하며, 전염병의 창궐과 대흉년 그리고 조준구의 계략으로 결국 최 참판 댁이 몰락한다.
서희는 조준구의 세력에 맞섰던 마을사람들과 함께 간도로 이주한다. 이렇게 일제에 의한 국권상실, 봉건 가부장체제와 신분질서의 붕괴, 농업경제로부터 화폐경제로의 변환 등 한말 사회의 변화가 소설의 배경이 되면서, 최 참판 댁의 몰락과 조준구의 재산 탈취 과정을 주요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제 2 부 요약 (5, 6, 7, 8권)
1부의 마지막으로부터 약 2∼3년이 경과한 1911년 5월 간도 용정촌의 대화재로 시작되어 약 7∼8년간 간도에 정착한 서희 일행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경술국치이후 간도 이민현상과 독립운동의 여러 면모, 가치관의 변절 등 당시 간도 한인사회의 삶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된다.
서희는 공 노인의 도움으로 용정에서 대상(大商)으로 성장하나, 함께 온 농민들은 외지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다. 서희와 길상의 혼인, 구시대를 대표하는 김 훈장의 죽음, 이용과 월선의 애끓는 사랑과 월선의 감동적인 마지막 모습, 일본의 밀정이 된 김두수와 길상을 중심으로 한 독립 운동가들의 대립 등이 펼쳐진다. 간혹 지리산 동학 잔당의 모임을 제외하고는 국내 정세보다 간도를 둘러싼 중국과 러시아의 정세가 주요한 배경을 이루면서 최씨 일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독립운동의 양상을 폭넓게 나타내고 있다.
제 3 부 요약 (9, 10, 11, 12권)
최서희 일행이 간도에서 귀국한 다음 해인, 1919년 3.1 운동 이후인 가을부터 1929년 원산총파업과 광주학생운동까지 약 10년여의 세월을 다루고 있다. 주된 공간 배경은 1920년대 서울·진주·만주 등으로 점차 확대된다. 특히 일제에 의하여 추진된 자본주의화와 경제적 억압이 도시를 중심으로 포착되고, 여기에 이상현을 중심으로 3·1운동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지식인 집단의 갈등과 혼란이 엮어진다.
조준구에 대한 복수를 완결한 서희의 허무감, 김환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의 의병활동, 송관수를 중심으로 한 형평사 운동, 간도와 만주의 망명객들의 생활, 이상현과 기화의 불륜, 임명희와 조용하의 결혼이 그려지며, 임이네와 용이, 김환 등은 죽음을 맞이한다. 이 과정에서 김환의 죽음 이후 이야기의 중심이 송관수로 전형화 되어 민중적 삶이 조명되고 서울의 임명희를 둘러싼 지식인과 신여성들의 삶으로 이동하게 된다.
제 4 부 요약 (13, 14, 15, 16권)
1929년의 원산 노동자 파업에서부터 만주사변, 남경대학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상황이 서울-동경-만주-하동-진주-지리산까지 다양한 서사의 공간을 배경으로 주로 지식인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증언되고, 농촌붕괴와 도시유랑민들의 증가 등 1930년대 일제의 폭압과 혼란상이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전개된다.
특히 조선과 일본의 역사와 문화·예술·사상·민족성 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전편을 통해 폭넓게 제시된다. 서희의 아들 환국과 윤국의 성장, 길상의 출옥, 군자금 강탈사건 이후 만주로 도피하는 송관수의 갈등, 명희의 이혼과 새로운 삶, 유인실과 일본인 오가다의 사랑, 그리고 인실의 도피와 변신, 색소폰 주자로 떠도는 송관수의 아들 영광의 모습 등이 그려진다.
제 5 부 요약 (17, 18, 19, 20, 21권)
1940년경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억압을 견뎌내야 했던 민족의 삶이 확대된 공간을 오가며 다양하게 펼쳐진다. 서희는 박 의사의 죽음, 양현과 영광의 슬픈 사랑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으며, 인실과 오가다의 재회, 길상의 관음탱화 조성, 소목장이가 된 조병수와 아버지 조준구의 처절한 죽음, 후일담 형태로 채워지는 평사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로 주요 인물 간에 얽혔던 한이 한 겹씩 풀어진다.
또한 해도사와 소지감 등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 모임, 이홍의 딸 상의의 일본인 학교생활, 일본인의 앞잡이가 된 우개동의 행패 등을 통해 일제말의 현실이 적극적으로 그려진다. 1945년 8월 15일, 양현은 강가에 나갔다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이를 서희에게 전한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1897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달려온《토지》의 마지막 장면이다.
첫댓글 비암~~
ㅋ봉대산을 두번 올랐다니 그놈이
쎄긴 쎈가 보네요^^
수고하셨습니다 거사님~
*참고로
예전에 10년산 능사주를 먹었었는디
약발은 커녕 뒷맛만 구려... a 비려~
우리는 그렇게 하루를 함께 했지요
그렇게 많은 역사를 써가면서 말예요 함께여서 감사했습니다^^
봉대산의 편안함이 아쉬웠던게지요.하루에 두번씩이나 만남을 청하셨네요. 수고많으셨음다. 풍성한 추석되세요 ^^
영호동지
그날 알바두번
말없이 따라준 그 믿음들 감사드립니다.
아침 일출을 향해 외쳤던 포효와
팔벌려 가슴에 않았던 따뜻한 가을 햇살 기운은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소흘이 지나친 가야의 문화를 보고 느끼게될
낙남정맥 낮은 산들이지만 느낄게 많으리라는 설레임이 느껴집니다.
항상 역사와 뿌리를 캐보고 싶어하고 노력하는
영호동지에게 많은걸 배우고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전개될 경남 진주동쪽 위로 함안 창녕 진해 창원 마산 김해 낙동강....
함께 합시다
장편소설~~~ 잘 보고 갑니다.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