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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동목사 스크랩 신사참배와 교단분열
한아름 추천 0 조회 167 12.09.01 20: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Ⅳ부. 신사참배와 교단분열

 

 

제1장. 신도와 신사참배의 역사

 

 

1. 신도(神道)

 

1930년 중국 全土를 차지할 목적으로 일본 자국의 자성에 단합과 그 목적에 모든 힘을 집약하기 위해서 神道를 부흥 장려하기 시작하였다.

이 神道란 일본 국민이 아마테라스라는 海神의 자손임을 믿는 것이다.

그들은 이 신사에서 자기들의 천왕들 혼에게 사정을 호소하며, 또한 소원하는 바를 기원하고 예배를 드렸다.

 

1935년 가을 숭실 전문학교장인 George S. McCune박사(윤산온)와 숭의 여자고등학교장인 Miss.V.L. Snook에게 60일 기한 내에 신사에 경의할 것을 총독부에서 명령하였다.

이 신도의식에 두가지가 기독교와 완전히 다르고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첫째로 역대 천왕에게 (魂)경배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일본이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애국적인 의식이다.

이것을 양해하고 참석하기를 종용한 사람은 일본 외사부, 서울지부에 근무하는 기독교인 太田(오다)가 교회 지도자를 강요하였다.

평양의 27명의 한국인 목사들 중 한 사람을 빼놓고 신사참배를 반대하기로 결의하였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 예배당에 모인 27노회 목사86인, 장로 85인, 선교사 22인 도합 193명이니라고 서기가 보고하였다.

총회장 홍택기목사 사회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국가의식이다’고 하여 성경을 모독하고 진리를 배반하는 불법가결을 단행하였다.

총회장이 ‘가’만 묻고 회원의 이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도 묻지 않고 가결하며 솔선하며 신사에 참배하였다.

회장이 경찰의 지시에 따라 신사 참배를 의결할 때 선교사단에서 협의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방위량목사의 대표 발언이 있기도 전에 경관의 저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율법과 교회의 헌법에 반대되는 행위를 하는 것에 반대했다고 의사록에 기록하시오」라고 반대하였다.

이때는 참으로 비참한 시기였었다.

실로 한국 교회의 수난기였다.

감옥에 수감당하며, 순교하는 교역자가 성도들과 같이 많아졌다.

200여개의 교회가 폐쇄 당하였으며, 2천여명의 성도와 50여명의 교역자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1936년 Mission학교를 폐쇄하고 1938년에는 평양, 연희전문, 정신학교까지 폐쇄하였다.

 

□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一死覺悟 설교 時

「 옥중 명상 」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을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랴

순교 기념관 거울에 새겨진 <당신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를 간직하자.

 

2. 신사참배 반대 역사적 뿌리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려고 온 총독을 살해하려고 시도했다는 일본총독부의 거짓으로 꾸민 음모다.

배일사상이 강한 선천, 정주, 평양의 기독교와 학교, 교회와 성도 말살 정책이며 신민회를 해체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당시 정부 신안학교 교무 주임의 반대로 천황 어진영 앞에 절문거절하여 7년형 언도 받은 것 처음 뿌리.

신성학교 교장 매퀸 박사가 권총을 주어 선천역에서 살해 하려 하였다는 음모로 선천 기독교 인사와 학생 600명 검거함.

신민회 간부인 장로교인(97명), 감리교인 중 105인을 기소, 감옥에 가뒀다.

그러나 선교사들 - 윤산온, 나부엘, 마팻, 언더우드, 해리스-의 거센 항의와 출옥운동으로 석방되었다.

 

1905년 동아일보 9.25일 사설에 일본의 3중 神器를 우상 숭배라 규정하여

1924년 10월 충남 강경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의 반대, 학생들 정학시킴.

1932년 9월 일을 계기로 강요시작, 만주사변 권몰장병 위령제 학생참배. 기독교 학 교가 거부-국민의례만 참석키로 함

1932년 9월 제21회 장로회 총회는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기로 가결.

1935년 11월 14일 평남 도지사가 평양 신사참배를 기독학교들에 요구하자 안식교 순안 의명중학교장 H.M.Lee가 허락하여 첫 번째 신사참배 학교가 되었다.

두선교사 매퀸과 Snook는 파면, 귀국 조치 하였다.

1940년 안동시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기본 방침을 결의함

 

제2장. 조선 혁신교단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1. 조선혁신교단

 

1930년 9월 3일 감리교의 양주삼총리와 1938년 9월 9일 27차 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신사 참배를 결의하였다.

천주교는 1936년, 장로교는 1938년 총독부의 탄압에 굴복하고 말았다.

일본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감리교측 김인영, 이동욱, 심웅섭목사와 장로교측의 전필순, 윤인구목사와 같은 친일파, 자유주의자들이 뿌리가 되어 1942년 3월 조선혁신교단(이후 조선감리교단)을 세웠다.

이에 1대 총리로 채필근, 2대 김응순, 3대 정춘수였다.

1945년 7월 19일에는 27장로교 대표, 21감리교 대표, 구세군, 소교파 5곳 대표들로 하나의 통합교단을 만들었다.

 

조선 혁신교단은 4복음서만 보게 하였다.

구약성경 중 출애굽기와 메시야의 언약이 분명한 이사야서 뿐 아니라 바울 서신과 계시록 성경모두를 설교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사도신경도 찬송가도 삭제한 곳이 많았고 예배 시작 전 천황의 사진, 전몰용사 영혼에게 묵념, 황국시민서를 제창하였다.

성직자는 강단에 오를 때는 일본 군복을 입고 설교와 찬송가를 일본말로 하라고 명령 받았다.

힘없는 민족의 비극적인 모습이었다.

혁신 교단은 변홍규목사의 반발로 「조선감리교단」으로 환원하였고, 김재준은 조선신학원을 혁신교단신학교로 개편한 것이었다고 한다.

 

2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1943년 5월 5일에는 ‘일본 기독교 조선장로교단’ 변경 1945년 7월 29일(8월 1일)에는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등 교단 대표들을 모아 ‘한국교회’를 빼앗고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이라 하여 일제 탄압의 극치를 보였다.

또한 2주일 후 1945년 8월 17일 전국 교회 지도자 살해 계획을 세웠으나 하나님의 심판은 저들의 망동을 8월13일 원자폭탄 투하로 파멸시켜 버렸던 것이다.

 

제3장. 신사참배와 한국장로교 최초의 분열

 

1. 대한 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교단)

 

1943년 5월 7일 제31회 총회에서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를 해산하고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으로 변경시켜 버렸다.

또한 1945년 8월 1일 종교 단체법에 의해 세워진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이라 하여서 모든 교파를 단합해 버렸다.

해방의 기쁨을 맞자 1945년9월4일 평양노회가 산정현교회에서 개회하여 신사참배의 죄악과 우상숭배를 철저히 회개하였다.

3일간 금식하며 부흥사경회를 갖고 순교하신 주기철목사와 50여명의 순교의 신앙을 본받고, 한상동목사를 중심하여 옥에 갇혔다가 출옥한 목사들은 계속 기도와 논의하여 9월20일 한국교회 재건기본원칙을 발표하였다.

 

첫째. 교회 지도자들은(목사,장로) 모두 신사참배에 참여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 여 통회, 정화한 후 교역에 나아갈 것.

둘째.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할 것.

셋째.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넷째. 교회 재건에 기본원칙을 전한(全韓), 전국 각 노회 또는 지 교회에 전달하 여 일제히 이것을 실행케 할 것.

다섯째.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이 원칙이 발표되자 11월14일 평북 6개 노회, 200여명은 출옥한 이기선 목사와 신사참배를 피해 만주 봉천신학교의 박형용박사를 강사로 선천 월곡동교회에서 해방감사 및 부흥사경회, 교역자 퇴수회를 가졌다.

이때 박형용 박사가 교회 재건원칙을 발표하자 신사참배를 불법으로 통과시킨 증경 총회장 홍택기목사와 친일파 목사들은 “ 신사참배의 죄의 벌칙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라고 파렴치하게 소란을 벌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극단파인 북쪽의 김인희, 남한의 최덕지 여전도사와 월남한 한부선선교사, 한상동목의 고신파, 또한 혁신복구파인 이기선 목사의 세 분파로 나뉘었다.

최덕지전도사는 신사참배하고도 지도자들이 회개하지 않는다고 견책하며 양떼들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재건운동의 방법으로 ‘밖에서 개혁하자’하는 방법과 한상동목사의 ‘안에 들어가 개혁하자’라는 차이로 분열된 것이다.

 

경남지역에서 최덕지전도사의 주도하에 1948년 2월 18일 부산 동래군 기장면 대변리에서 임시 중앙위원회를 소집하고 21교회 대표 72인으로 ‘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를 세웠으나, 1952년 5월 13일 부산시 소정동의 재건부산교회에서 ‘남한 지방회’로 발전하고, 1958년11월10일과 12월 2일 월남한 재건교회와 연합하여 부산 영주동교회에서 ‘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 대회’라는 명칭과 신학교까지 세우기로 정하였으니 첫 번째 장로교회의 분열이었다.

이 발기회의 「우리의 선언」내용은

가. 신념 : 진리는 종국적 승리다

나. 주장 : 무너진 재단을 다시 세우자

다. 실천 :

ㄱ. 철두철미 회개하자

ㄴ. 깨끗한 성전을 지어 바치자

ㄷ. 불의와 위선을 절교하자

 

이들의 총회 조직목표와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님께 범죄하여 신앙과 도리에서 파괴되었으므로 오직 남아계시는 과거 현재의 신앙 선배들의 순교하시기까지의 충성된 신앙생활을 계승하여 재건운동에 힘쓰는 중략.....

사도시대 교회 신앙으로부터 계승하여 받은 그 신경과 과거 은혜시대 한국 초대교회의 신조와 주후 1930년 평양신학교 교수들에 의하여 성명한 신앙고백과 같이 현재 재건교회의 12신조 신앙고백과 아울러 신앙생활 실천강령을 성명한다고 기록하였다.

재건교단의 정화와 순교적 신앙은 한국교회가 계승해야만 한다.

그러나 일제 하의 신사참배를 철저히 회개하고 고백하는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고 정죄하며 배격하는 것은 잘못된 점이다.

베드로가 회개하고 순교하였던 모습을 기리며 도량 큰 용서의 복음을 실천하여야 한다.

더구나 사분오열로 분열하는 추한 모습은 씻을 수 없는 과오였다.

 

2. 재건 단독교회(혁신복구파)

 

신사참배파 목사들의 완악한 태도에 이기선목사는 도저히 저들과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평북, 황해도 지방의 30여 교회와 1949년5월에 “혁신복구파”라는 독립노회를 만들어 신사참배를 회개하지 않은 교회는 구원이 없다고 강경하였다.

이들은 끝까지 순교의 신앙을 지키고 김일성 공산당에 핍박을 당하면서 월남하지 않았다.

 

3.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신학파(고신교단)

 

신사참배 문제로 투옥되었던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목사 등은 옥중에서 출옥한 후 건전한 신학의 재건과 한국교회의 정화를 목표로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모인 경남노회 제48회 정기노회에서 한상동목사는 신사참배의 철저히 회개하는“불순한 태도를 고침이 없이 그대로 나아가는 경남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탈퇴 한다”는 선언을 하고 퇴장하는 사태가 생겼다.

또한 6월에서 8월까지 만주 동북신학교 교수 박윤선박사를 초청하여 진해에서 하기 신학강좌를 개최하고, 9월 20일에 부산 진 일신여학교 교사에서 설립자에 주남선, 한상동목사와 교장에 박윤선목사로 고신신학교 창립개교를 하였다.

 

1947년 4월에 송상석목사가 2차 왕복 끝에 봉천에 있던 박형룡박사를 모시고 왔으며 그해 10월 14일 고려 신학교는 신사참배를 철저히 회개하고 건전한 신학을 그 배경으로 한다는 조건에 합의를 보고서 교장직에 취임하였다.

그 해 12월 49회 경남노회에서 한상동목사는 진주에서의 탈퇴선언을 취소하였다.

한편 박형용박사는 신학교가 총회 승인을 받고자 한다는 뜻을 밟혀 노회의 지지를 받았다.

 

한국장로교회의 분열 시작은 송도 앞 바다에서 신사참배를 강행한 김길창목사가 1949년 3월8일 그가 시무하던 항서교회에서, 또한 권남선목사가 또 다른 경남노회를 문창교회에서 개최하여 신사참배 문제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러나 박형룡박사는 한상동목사와 신학교 운영면에서의 충돌로 1948년 4월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되며, 1949년 4월 19일 조선 신학교를 이탈한 학생들과 함께 장로회 신학교를 개교하였다.

문제된 신학교 운영면이란 박형룡박사는 Machen파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을 가장 건전한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신학교 재건에 있어서는 4개 장로교회 선교부(미국 남북, 호주, 카나다 장로회 선교부)와의 협력을 구할 때에 Machen파 한부선교사는 비협력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 때문에 총회와 Machen파 선교사와의 사이는 점점 멀어져 1949년 제35회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 교회는 한부선교사 일파와 상관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신사참배 거부로 출옥한 목사들과 함께 총회를 떠나는 조건이 된 것이다.

제36회 총회에서 실제적으로 절연 당한 경남 법통노회는 1년이 지나도록 총회의 태도가 변함이 없자 1952년 9월 11일 진주 성남교회에서 모인 제 57회 진주노회 때 <총노회 조직>을 결의하고 그날 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조직하였으니 그 취지는 다음과 같다.

 

현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설립한 총회는 본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 교파적으로 흐름 에 이를 바로 잡아 참된 예수교장로회를 계승하기 위하여 총노회를 조직함이었다.

그 목적은 ‘전통적인 예수교장로회를 지지하는 전국교회를 규합 통괄하며 개혁주의 신앙운 동을 위하여 법통총회를 장차 계승키로 함’이었다.

신사참배로 야기된 한국장로교회의 첫 번째 분열은 재건교단과 고신교단 뿐 아니라 법통총회라는 교단을 만들어 일본 군국주의로 인한 한국장로교회의 비극이요, 통탄할 시대적 상황이었고, 신앙의 포용성 문제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제4장. 감리교단의 분열

 

감리교단에서도 신사참배 문제는 심각하였다.

1945년 이규갑, 변홍규, 이윤영목사 등을 중심한 일제에 항거하고 투옥되었던 “재건감리파”들은 3부 연회를 조직하고 1946년1월 서울동대문교회에서 다시 모였다.

참석한 교회가 70여개의 적은 수였으므로 미약하였으나 서울의 큰 교회들 대부분은 친일파들로서 교권을 잡고 있었으며 “부흥파”인 강태희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여 서로 분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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