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가) 지역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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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위제가 도선의 비기를 공부한 후, 남경 천도를 청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도선기>에는 ‘고려 땅에 세 곳의 수도가 있으니, (가) 이/가 중경, 목멱양이 남경, 평양이 서경이다. 11월에서 2월까지는 중경에서, 3월에서 6월까지는 남경에서, 7월에서 10월까지는 서경에서 지내면 36개국이 와서 조공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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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견훤이 국도로 삼은 곳이다.
② 묘청이 반란을 일으킨 곳이다.
③ 망이.망소이의 난이 일어난 곳이다.
④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여 나성이 축조된 곳이다.
정답: ④
* 고려의 3경 중 개경의 역사
신라 말기에 도선과 같은 선종 승려들은 중국에서 유행한 풍수지리설을 들여왔다. 풍수지리설은 산세와 수세를 살펴 도읍, 주택, 묘지 등을 선정하는 인문 지리적 학설로서,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과 관련되어 있다. 이에 따라, 경주 중심의 지리 개념에서 벗어나 다른 지방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려 시대에 크게 유행하여 고려 초기에는 개경(개성)과 서경(평양)이 명당이라는 설이 유포되어 서경 천도와 북진 정책 추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한편, 이러한 길지설은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의 정치적 투쟁에 이용되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1135)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문종(1046~1083)을 전후한 시기에는 북진 정책의 퇴조와 함께 새로이 한양 명당설이 대두하여 이 곳을 남경으로 승격시키고, 숙종 때에는 김위제의 건의에 따라 남경개창도감(1101)을 설치하고 궁궐을 지어 왕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① 신라 말 상주의 군인 출신 견훤은 황해안의 해상 세력과 도적 떼 등을 자신의 군사 기반으로 흡수하여 자립하였다. 견훤은 나주를 거쳐 무진주(광주)를 점령한 후 북상하여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900).
③ 무신 집권기 초기 공주 명학소에서는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망이, 망소이 형제를 중심으로 봉기하였다(1176). 이들은 한때 충청도 일대를 점령했으며, 개경까지 공격하려고 하였다.
④ 거란의 3차 침입(1018~1019)을 막아낸 후 고려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현종 때에는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주위에 나성(성 외곽에 또 쌓은 성)을 쌓았고, 그 후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아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였다(1033~1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