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환(幻)
김채원 지음
▣ 저 자 김채원(1946~ )
『겨울의 환』으로 89년 이상문학상 수상
여성의 일상과 내면에 대한 섬세한 묘사
김채원은 독서보다 영화와 옷에 더 관심이 많았다?
김채원씨는 「국경의 밤」으로 유명한 시인 김동환과 소설가 최정희 사이에서 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이런 집안 분위기를 반영하듯 그녀의 언니인 김지원 역시 소설가이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문학가 부모 밑에서 자란 김채원이 어릴 적부터 소설이나 시에 푹 빠져 사는 문학소녀였을 거라고 지레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글쓰기는 고사하고 대학 졸업 후 문학공부를 하는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몇 권의 만화를 보았고 중고등학교 때도 대학 때도 별로 책을 읽지 않았다. 유일하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영화와 그리고 옷이었다. ‘비망록’이라고 붙인 어린 시절 노트에 이다음 커서 입을 옷들을 세세히 적어 놓았던 기억이 난다. 이를테면 〈백조〉에 그레이스 켈리가 펜싱할 때 입던 옷, 또 〈애심〉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가정교사가 아이들과 풀밭에서 놀 때 입던 옷, 그리고 서양잡지에서 오린 그림들을 붙여 놓아두었다.
여고 3학년 때 서대문에 있는 화양극장에서 〈3월생〉이라는 영화를 마지막으로 대학생이 될 때까지 영화를 보지 말자고 결심 결심하던 것이 떠오른다. 대학생이 된 후 그 동안 본 영화의 제목을 노트 한 권이 거의 다 차도록 적어 놓을 때 좔좔 쉼 없이 흘러 넘쳐 나와서 팔이 아프도록 적어 내려갔다. 그것은 정말 스스로도 놀랄 만한 기억력이었는데 나의 문장수업이란 책이 아니라 영화에서 습득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지금 비로소 든다.1)
유명한 시인과 소설가의 딸이라는 선입견만 없다면 중․고등학교 시절에 영화와 옷에 관심이 많았다는 얘기는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평범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독서를 거의 하지 않고 청소년기를 보낸 김채원이 나중에 이상문학상을 탄 소설가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타고난 문학적 자질이 예사롭지 않음을 뒷받침해 준다. 또한 비디오 가게도 없었던 시절 김채원이 본 영화 제목이 노트 한 권을 채울 정도였다는 일화는 영화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매우 각별했음을 잘 보여준다.
김채원은 실제로 영화배우가 될 뻔한 적도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하교길에 영화촬영 장소를 물색하던 조감독 팀을 만났는데, 그들로부터 영화 출연 권유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일을 ‘자기 일생 중 몇 번 안 되는 가장 순수하게 기뻤던 일 중의 하나’로 꼽는다. 독서보다 영화와 옷에 더 관심이 많았던 김채원이 어떻게 문학가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세련된 언어감각과 모성적 상상력의 세계
김채원의 원래 이름은 월궁 항아에서 따온 항란인데, 이역만리 춤추며 떠돌아다닐 이름이라 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다고 한다. 실제로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후 결혼 전까지 동경, 뉴욕, 파리 등 주로 외국에서 거주했다. 1946년 12월 13일 경기도 덕소에서 태어난 김채원은 서사시 「국경의 밤」으로 잘 알려진 파인 김동환과 유명 여류소설가인 최정희 사이에서 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언니인 김지원 역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중견 소설가다.
1948년 경기도 덕소에서 서울 동숭동 집으로 이사한 김채원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950년 그녀는 언니와 월북 무용가인 장추화의 무용소에 다니던 중 6․25를 맞았다. 당시 김채원의 가족들은 피난하지 못했는데, 숨어 있던 아버지 김동환은 납북되었다. 1958년 창경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김채원은 숙명여중에 입학했으나 어머니의 병환 등 여러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1년을 쉰 뒤 1959년 이화여자대학교 부속중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를 가지 않던 1년 간 김채원은 영화를 굉장히 많이 보았고 이때를 인생의 황금기로 기억한다. 1964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한 그녀는 아무 것에도 몰두하지 못한 채 4년을 보냈다. 1968년 대학 졸업 후 몇 년간 절로 떠돌아다니다가 문학공부를 하는 친구 이재연을 만나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당시 셍텍쥐페리의 『야간비행』을 탐독했다. 1972년 일본 동경으로 간 그녀는 와세다대학 언어코스에 다녔고 1년 간 동경한국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했다.
1974년부터 김채원의 문학적 여정은 출발하는데, 같은 해 「먼바다〉로「현대문학」에 황순원의 초회추천을 받았다. 1975년 그녀는 언니 김지원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아트 스튜던트리그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단편 「얼음집」 「자건거를 타고」 「달의 손」을 발표했다. 1976년 프랑스 파리로 간 그녀는 같은 해 단편 「몽수리 공원에 내리는 가을」 「밀월」을 발표했다. 그리고 언니 김지원과 자매 작품집「먼 집 먼 바다」를 출간했다. 1979년 백동규와 결혼했다. 그 해 단편 「초록빛 모자」 「안개」 등을 발표했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작품발표가 더욱 활발해졌는데, 이 시기의 작품으로 「가을 햇빛」(1980), 「산중기」(1980), 「오월의 숨결」(1981), 「아이네 크라이네」(1981), 「공중에는 또 하나의 다른 방이」(1983), 「애천」(1984) 등이 있으며 그녀의 첫 번째 작품집인 『초록빛 모자』가 나남에서 출간됐다. 1988년 중편 「오후의 세계」, 중편 『겨울의 환』 등을 발표했으며, 1989년 『겨울의 환』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해서 문단에서 확고한 입지를 굳혔다. 1990년 어머니 최정희가 사망했고, 두 번째 작품집 『봄의 환』을 미학사에서 간행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단편 위주의 창작경향에 다소 변화를 보이는데, 그녀의 첫 번째 장편소설 『형자와 그 옆 사람』(도서출판 창, 1993), 대표 중단편선집 『달의 몰락』(청아출판사, 1995), 언니 김지원과의 두 번째 자매집 『집, 그 여자는 거기에 없다』(청아출판사, 1996), 장편 『달의 강』(해냄, 1997) 등이 출간됐다.
김채원의 소설은 여성적 삶의 정체성에 대한 의미를 묻되, 정치적 사회운동적 맥락에서가 아니라 한없이 깊고 따뜻한 모성적 지평 속으로 수렴해서 그 의미를 드러낸다는 평을 받는다. 초기작 「밤인사」로부터 최근작인 「달의 몰락」 「봄날에 찍은 사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여성의 실존의 의미에 대한 탐구의 열정이다. 그러한 작가의 존재론적 의식은, 특히 모성에 대해 자각함으로써 닫힌 삶을 열고 드넓은 지평으로 나아가는 인물들의 심리와 내면을 통해 잘 드러난다. 또한 여성적 삶에 대한 구체적 실감을 그녀의 소설들은 매우 세련된 언어감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그녀의 이러한 감각적 문체는 대표작 「겨울의 환」에서도 잘 나타난다. 소설 속 현실의 상황을 하나의 주관적 시선에 의해 묘사함으로써 서술자는 다양한 색채, 음영, 소리, 냄새 등의 감각을 포착한다. 그럼으로써 이 소설은 일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 덩어리가 된다.
김채원 소설의 일관된 주제였던 여성성 탐구는 1990년대 중반을 고비로 내면화하고 간접화해 삶과 생명에 대한 성찰로 나아간다(이를테면 「봄날에 찍은 사진」 「달의 몰락」). 「봄날에 찍은 사진」을 보면 자잘한 일상에서 혼미함과 외로움을 느끼는 주인공은 막 결혼한 친척의 인사를 받는 순간,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는 생명의 흐름을 깨닫고 무엇인지 회복되는 기미를 느낀다. 가장 최근작인 장편「달의 강」에서는 내면 심리묘사에 치중했던 그간의 작품 성향에서 탈피해서 남북분단이라는 사회문제를 다루었는데, 이 작품에는 납북당한 부친에 대한 작가의 개인사적 아픔이 짙게 깔려있다.
▣ Short Summary
친정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마흔세 살의 이혼녀 가혜는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남자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그는 그녀가 어릴 적 한 동네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두 사람은 3년째 사귀고 있다. 가혜의 편지는 그녀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비로소 여자임을 발견하게 된 자각의 과정과, 그녀가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고백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혜는 어머니와 딸의 운명이 한줄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모두 첩에게 남편을 빼앗겼고 그녀 역시 남편과 이혼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다리가 불편한 외할머니를 자신이 아프다는 핑계로 이모집에 보냈고, 외할머니는 얼마 안 있어서 세상을 떠났다. 이제 늙고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가혜는 부담스럽게 느끼고 있는데…….
겨울의 환(幻)
김채원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가 혜 서른 둘에 이혼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마흔세 살의 중년 여인. 지금껏 스스로를 여자로 자각하고 살지 못한 그녀는 자신이 어머니와 비슷한 운명에 처한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
당 신 가혜의 남자친구 겸 애인. 가혜와 3년째 사귀고 있다. 그녀의 편지에서 ‘당신’이라는 호칭 으로 불린다. 가혜와 어릴 적 한 동네에서 살았다.
어머니 교사출신으로 첩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화투로 소일하며 딸 둘을 키운다.
어머니의 불효를 문제삼는 큰 딸 가혜와 말다툼을 벌이다 쓰러지는 바람에 현재 거동이 불 편하다.
외할머니 함경도 실향민 출신으로 남편의 첩살이로 타지에서 혼자 고생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영 혜 가혜의 여동생. 간호원으로 서독에 파견되어 나갔다가 독일인과 결혼해서 그곳에 산다.
외삼촌 타향살이에 실패한 인물로 가혜의 외할머니에게 행패를 일삼다가 6․25 전쟁 때 월북한다.
남 편 결혼예물, 아이 문제 등으로 가혜와 갈등을 겪는다.
이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 재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산다.
순젱이 가혜의 친척 아주머니.
실향민 출신으로 망나니 아들을 따라 미국에 이민갔다가 혼자서 돌아와 쓸쓸히 눈을 감는 다.
아저씨 가혜의 친척 아저씨. 가혜와 함께 외할머니의 무덤에 성묘하러 갔다가 산불을 낸다.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
사람들 마음 속에는 왜 응어리가 있는 것일까요. 이제 와서 세상 이치를 어느 정도 깨닫고 보면 세상사가 모두 손바닥 안에 있다는 그 말에 수긍하고 공감하면서도 왜 마음은 이렇게 늘 괴로운 것일까요?
언젠가 당신은 제게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한번 써보라고 말하셨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지나쳐 들었습니다, 라기 보다 글이라고는 편지와 일기 정도밖에 써보지 못한 제가 어떻게 그런 것을 쓸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습니다. 저는 감정의 훈련도, 또한 그 감정을 끌어내어 표현하는 능력도 갖고 있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의 얘기를 들은 다음부터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말 자체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강한 매혹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저는 마흔 세 살이라는 나이가 되도록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여자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목욕을 하고 나서 새 속치마를 꺼내어 입을 때, 혹은 화장을 할 때, 혹은 생리 냅킨을 꺼낼 때 간혹 자신이 여자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느낌에 젖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 저는 언제나 자신의 용모나 성 따위를 전혀 잊고 살았고 언제나 자신 안에 있는 나일 뿐이었습니다. 당신이 그 말을 했을 때 저는 그 말 자체가 무언가 설레게 하는, 인생에서 어떤 신묘한 가능성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늙어가는 것은 단지 멸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늙어가는 여자의 떨림이 있을 수 있다는 확연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성을 찾아 여자가 되었다는 자각이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나아가 그러한 자각은 저로 하여금 자신뿐만 아니라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 선조의 여자들까지 거슬러 생각해 보게 했습니다. 자궁을 가진 여자로서의 숙명감, 어머니라는 의미, 동양의 여자, 이런 의미들이 물밀듯이 몰려왔습니다. 저는 한때 서구의 개인주의에 공감했고 그것을 따르려 했었습니다. 이제 저는 서구의 개인주의와 동양의 미덕은 다를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 시간, 동양권인 이 공간에서 태어난 것도 하나의 운명이고 당신과 만난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편지 쓸 당시 저는 몹시 흥분된 상태였고 내일 새벽까지 글을 마쳐 보겠다는 각오 하에 편지를 시작했습니다. TV 뉴스에서 산불 진화작업 현장이 보도되는 광경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산불은 오늘 제가 할머니 묘소에서 집안 아저씨와 함께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불이 나는 장관스런 풍경을 보고 불현듯 그런 대자연 앞에서 내가 없으면 산불도 무엇도 다 없다는 사실이 이상스러웠습니다.
뉴스를 본 아저씨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아저씨는 내일 아침 경찰서에 자진 출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함께 출두하려 했으나 노모를 돌봐드려야 한다는 아저씨의 만류에 그만두었습니다. 묘소에서 화재가 발생했던 건 사실이지만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불을 끄고 나서도 우리 두 사람은 오랫동안 앉아 있다 자리를 떴는데, 불씨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저는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가는 불길의 환영을 보았습니다. 다 타 버린 묘자리를 보고 그 일이 자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왠지 무덤 속의 망자들이 타오르는 불길에 가슴 속 맺힌 응어리들을 다 녹이는 후련함을 맛볼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왜 응어리가 있는 것일까요. 이제 와서 세상 이치를 어느 정도 깨닫고 보면 세상사가 모두 손바닥 안에 있다는 그 말에 수긍하고 공감하면서도 왜 마음은 이렇게 늘 괴로운 것일까요? 사람의 마음은 다양하게 변모하며 그러한 마음이 세상 속 자연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보았습니다. 즉 천둥과 번개, 바다와 시냇물, 들판․꽃밭․비․눈 등은 사람들의 감정이 형상화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을 닮아 사람들의 감정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산 하나를 다 태운 불길이 자신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람에 흰 연기만 날릴 소화 후의 빈 산 역시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미 불은 나버렸습니다. 저는 타들어 가는 불기운에 힘입어 글에 대한 지식이나 훈련이 없음에도 이 밤 자신이 무언인가 써낼 듯한 기(氣)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는 더이상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일로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밥상을 차리지 못하는 여인
내 나이 그 때 서른 둘, 여자로서 절정일 때일까요? 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 앞에 앉으면 가장 젊은 젊음이 은은히 울려퍼지는 때, 그런 나이에 저는 결혼생활 육 년만에 구겨진 버선처럼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와 저의 손은 똑같이 생겼습니다. 실지 두 손을 맞대어 본 적은 없지만, 마주하면 오른손과 왼손이 만난 듯 아마 꼭 맞을 것입니다. 갸름한 손톱 모양과 매듭, 어느 순간 꼭 닭다리로 착각되는 손가락,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손금일 것입니다.
어머니와 저의 손금이 다른 이유는 두 사람의 운명이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확실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와 딸의 운명은 한줄기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밥상에서 가장 자신이 어머니와 운명적임을 느꼈습니다.
어머니는 따뜻한 밥상을 차리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김장김치는 맛있기로 소문이 났었습니다. 식구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김장을 백 포기나 했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겨울을 지나 초여름까지 먹고 남한테도 한바께스씩 퍼주었습니다. 된장찌개 역시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추억거리로 얘기하던 음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김치뿐만 아니라 된장찌개도 맛있게 만들기 때문에 서민적인 음식을 만드는 데는 자신이 제일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저의 마음속에는 반감이 솟아올랐습니다. 김장김치 얘기의 경우 기억을 떠올려보면 수긍이 가지만 된장찌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에 어머니가 담은 김치와 동치미는 시원하고 맛있었습니다. 그러나 된장찌개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어머니의 된장찌개가 어린 시절 자라면서 늘 갈증을 느꼈던 부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교원생활을 오래 한 분이었지만, 잠시 방황하던 시절 화투로 날을 지새웠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집에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듣기로 아버지는 작은어머니를 얻어 생활하였고, 동생이 태어나던 해 객지에서 병사했습니다.
저희 집에는 화투 손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화투를 치다가 늦은 저녁 때가 되면 부엌에서 떨고 있는 저와 동생에게 소리쳤습니다. 아침에 먹던 된장찌개에다 된장 한 숟가락과 두부, 마늘 등을 좀더 집어넣고 끓여서, 상을 차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지시대로 된장을 한 숟가락 더 푸기 위해 저는 동생과 함께 장독대로 갔습니다. 그 때 저와 동생이 느낀 것은 손님 앞에서 큰 소리로 부엌에다 대고 소리치는, 교사까지 지낸 어머니의 교양에 대한 반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신비감도 없이 아침에 먹던 된장찌개에다 라고 서슴없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불을 땐 방은 화투치는 방뿐인데, 아이들이 있을 곳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도 반감을 느끼는 요인의 하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어린 시절 항상 음식에 대한 아쉬움을 품고 지냈습니다. 된장찌개의 가장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에 파를 썰어 넣는 일이 대개는 빠져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음식에서는 항상 그 파와 같은 부분이 빠졌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닌 것이 저희 집 음식은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을 때도 항상 그대로였습니다. 오히려 음식은 더 빛을 잃고 뭉뚱그려졌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저는 어머니의 자랑을 시큰둥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음식이 설혹 맛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따뜻한 밥상은 아니었습니다.
어린시절 기억을 떠올려 보면 제 할머니는 매일 매일 세끼의 밥을 따뜻이 먹게끔 차려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저는 그런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밥상을 깨부시는 힘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저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것이 앞서 얘기한 손금, 어머니와 자신의 운명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긴 겨울밤 동생과 광으로 동치미 뜨러 다니던 일을 기억합니다. 남폿불을 들고 방문 밖으로 나왔을 때 눈이 펄펄 내린 적도 있었고 마당과 장독대, 지붕, 나뭇가지 위에 소복이 눈이 쌓여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흰눈을 밟을 때마다 들리던 뽀드득 뽀드득 발자국 소리, 그 음향과 감촉이 지금도 전해져 옴을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저와 동생은 동치미를 먹으며 희미한 전등불 밑에서 방학숙제인 그림일기 속에 눈이 내리고 있는 풍경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 때 그림일기에 그린 것은 제가 실제로 본 눈의 풍경이 아니라 달력이나 어린이 책에서 본 풍경이었습니다. 그 시절 저는 달력이나 책에 있는 풍경에서 느껴지는 정서를 벅차하면서도 그것이 먼 곳에 있는 것으로 느껴져 그리워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저는 나이 들어가는 여자로서의 떨림, 여자의 성을 자신이 느끼지 않고 살아온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저는 방학숙제 속에 눈의 세계를 그려 넣던 어린 시절부터, 성숙한 여인의 세계를 그리워하며 커왔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얘기를 듣고 처음으로 여자라는 성을 감지하는 느낌을 맛보았던 것은, 제가 어린 시절 눈의 세계를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으로 그리워했듯 여자라는 성을 그저 그리워만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제게 여자의 성을 띄워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제 뒤늦게 마흔셋이라는 나이에 처음으로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감지하고 무언가 스스로 북받쳐오르는 어떤 격류에 휘말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운명인지도 모른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 운명을 얘기하기 위해 저는 좀더 지난날을 들추기로 했습니다.
내 나이 그 때 서른 둘, 여자로서 절정일 때일까요? 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 앞에 앉으면 가장 젊은 젊음이 은은히 울려퍼질 때, 그런 나이에 저는 결혼생활 육년 만에 구겨진 버선처럼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아이가 없는 것도 큰 이유였지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결혼예물이었습니다. 장롱은커녕 이불조차 변변히 해오지 않은 저를 두고 친척들은 따가운 눈총을 주었습니다. 제가 결혼생활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 다른 모든 여자들처럼 첫 출발에 꿈과 기대를 가졌습니다. 저는 자신이 밥짓고 반찬하는 일이 훈련되어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가져온 버선도 속치마도 입지 않고 오로지 살림과 싸우기에 분투했습니다. 친척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남편은 결혼 당시 친척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자존심이 상하는지 항상 눈을 샐쭉하게 뜨고 있었다. 그런 남편을 보며 저는 울음을 삼키는 시선을 창 밖으로 돌리곤 했다.
돌아올 용기를 제게 직접적으로 불어넣어 준 것은 눈이었습니다. 홀시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현관에서 문상객들의 구두를 정리하던 저는 하늘 가득히 내리는 눈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고무신이 벗겨지면서 버선발이 드러났습니다. 며칠 동안 갈아 신지 못한 버선은 부엌바닥의 찐득한 때가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자신의 인생이 바로 이 버선바닥처럼 더럽게 구겨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지로 가던 날도 눈이 왔는데, 버스 유리창에 달라붙은 눈은 어린 시절 제가 품었던 눈의 세계를 되살아나게 했습니다.
장례가 끝난 후 저는 남편을 원망하면서 짐을 쌌다. 저는 남편의 밑바닥에 깔린 감정을 볼 수 있도록 제 어머니가 다른 집 어머니처럼 잘 해보내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에게 이 말을 하자마자 저는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는 자유스러움을 느꼈습니다. 결국 저는 친정으로 들어갔고 남편은 회사에서 파견되어 사우디 아라비아로 떠났습니다. 겉으로는 남편의 파견이 구실이었으나 실은 아주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결혼예물이 파경의 원인이라고 여겼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결혼이 파경에 이른 것이 어머니 운명을 딸이 닮는다고 하는 것, 즉 운명의 손길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남편을 섬기며 사는 여자이지 못했듯 저 역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남편은 엽서 몇 통을 보내기도 했으나 사우디에서 임기를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재혼을 했습니다. 아이를 낳아 잘 살고 있다는 소식도 보내왔습니다. 시집가기 전 쓰던 방에 누워있으면 저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갓 삼십을 넘기고 친정에 돌아왔던 저는 어느덧 노모와 단둘이 사는 중년의 여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살고 있다는 기쁨을 누리고 있지만 왠지 모를 갈증을 느꼈습니다. 저는 이따금 어머니에게 울면서 달려들기도 했고 무언지 모를 불만을 한숨을 섞어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그 한숨의 뒤끝에는 칠순 노인인 어머니와 같을 순 없지 않느냐는 속말이 중얼거리듯 새어나왔습니다.
운명은 그 누군가의 염원이 뭉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신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이치라는 것을 그런 데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일까요.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이치, 무엇인지 극에 달해 더 나아갈 수 없을 듯할 때 새로운 어떤 일,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 무렵 저는 일이 진정으로 하기 싫고 몸이 움직여 주지 않아 짜증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어머니가 관절염으로 바깥출입을 전혀 못하고 있었으므로 외식을 하고 영화를 구경하는 작은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당신은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 왔었는데, 저는 쉽게 그 집을 찾아주었습니다. 당신으로부터 저는 이상한 끌림을 받았고 우리는 우연한 만남을 몇 번 가졌습니다. 당신이 제가 너무나 외로운 나머지 꾸며낸 상상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 당시 저는 희망이 없는 노년과 같았고 어머니의 검버섯과 같은 칙칙함, 무미건조함에 젖어 있었습니다.
당신이 전화하겠다고 했을 때 정말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 후 보름 간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다가 저는 시장거리로 나가 동동주를 마신 다음 기분 삼아 동그라미 던지기를 했습니다. 되는 대로 던진 링이 마을 젊은 장정들이 모두 실패한, 제일 뒤에 있는 대두 한 되들이 소주병에 가서 걸렸습니다. 저는 당신을 그리워하는 강한 힘이 작용했던 거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악마와 결탁할 수는 없는지, 악마와 어떤 흥정이 가능할 것인지도 상상해봤습니다. 당신과의 사랑이 가능해지도록 악마에게 내놓을 수 있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도 물어봤습니다.
며칠 후 당신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커피숍은 사람들로 몹시 붐볐고 당신은 그곳 2인용 조그만 테이블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의 모습을 보고 저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당신이 그 커피숍이 한적한 곳이어서 좋았다고 말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이 몽상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우리 두 사람은 플라타너스 가로수 밑을 산책했습니다. 우리 키 밑으로 나뭇가지가 내려올 때마다 두 사람은 허리를 굽혔고, 간간이 몸을 스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 벌써 3년째 접어들었습니다. 저는 누군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어디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제 생활은 달라졌습니다. 저녁에 시장에 나갈 때 저의 행동 하나만 보더라도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말한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 바로 그 떨림이 배어 있는 표정과 행동이었습니다.
쓰기를 멈추고 팔을 뻗고 담배를 찾습니다. 어느새인가 제게는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책상에서 잠시 내려와 담배연기를 후욱 내뱉습니다. 지금 이 순간 옛날 할머니들이 담배를 피우던 기분 그대로가 제 숨 속에 되살아나는 듯 합니다.
제 어머니 고향은 함경남도 단천입니다. 해방되기 몇 해 전 어머니의 식구들은 월남했습니다. 제 외삼촌, 즉 할머니의 외아들은 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리는 망나니였습니다. 외삼촌은 6․25 전쟁이 터지자 월북했습니다. 간간이 얻어들은 얘기로는 외삼촌은 실향민이 낳은 실패자였습니다.
오늘 제 실수로 묘자리가 타는 것을 보고 저는 비로소 실향민이라는 무리에 대해 눈을 떴습니다. 그 무리들 속에 저희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난 후 무엇인가를 잃었으며 끝없이 잃어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망나니였던 삼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형상도 실체도 거의 잡히지 않지만 더욱 뚜렷이 뭉쳐지는 실체감이었습니다. 삼촌에게서 느낀 아련한 실체감과 당신을 떠올릴 때 느끼는 실체감은 거의 비슷했습니다. 아무 것도 잡히지 않지만 없는 것이 아닌, 거기에 뚜렷이 있는, 바로 그것이 우리 모두의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할머니 사촌언니 딸인 순젱이는 남대문 시장에서 달러 장사를 했습니다. 쥐색 두루마기를 입은 머리를 반듯이 쪽진 그의 모습에는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그 역시 망나니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습니다. 순젱이는 그런 아들 하나를 너끈히 이기고 거리에 나와서 의연히 서 있는 산악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민간 아들을 뒤따라 이민을 갔는데 갑자기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순젱이의 모습은 생기를 잃은 처진 모습이었습니다. 얼마 후 순젱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산으로 난 오솔길 입구에는 어둔리라고 쓴 팻말이 보였습니다. 어둔리는 어둡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할머니가 묻힌 곳이 바로 이 어둔리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저는 늘 할머니에 대해 생각하기 싫었고 어떤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할머니는 저로 하여금 사람이 얼마나 외롭고 시련을 겪어야 하는 존재인가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플라타너스 밑을 걸었던 일을 상기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할머니의 어머니, 더 까마득한 너머의 어머니들이 무동을 태워 저를 그 자리에 세워놓았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름다운 순간을 맛볼 수 있도록, 훗날 어느 때인가 그들이 품었던 한을 꽃피울 수 있도록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운명은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 혹은 한들이 뭉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이 저를 저녁 어둠 속에서 부른 것도 누군가가 시켜서 그 누군가의 염원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들
할머니의 존재가 제 머리 속에 뚜렷이 남은 것은 피난을 떠나던 날 아침입니다. 할머니는 자루 밑에 조금 남아 있던 아끼던 쌀을 꺼내어 보리밥을 지어서 주먹밥을 싸주셨습니다. 할머니는 돌아앉아서 양손으로 밥을 뭉치셨어요. 주먹밥 속에는 소금을 조금 집어넣었습니다.
6․25 때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했던 저희 가족들은 뒤늦게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 때 할머니는 집에 그대로 남겠다고 했습니다. 공산당이라도 늙은이 혼자 남아 있는 것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깊이 감춰둔 귀한 쌀과 보리를 꺼내어 할머니는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주먹밥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온 동네가 다 피난을 떠나 텅빈 마을 속에서 할머니는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내리던 눈과 할머니가 만들어 준 주먹밥은 할머니에 대해 뚜렷한 저의 첫 기억이었다. 어머니가 주먹밥을 내밀었을 때 주먹밥은 꽁꽁 얼어 있었습니다. 저와 동생은 배고프면서도 안 먹겠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미 마을에 들어가 몇 번 사먹은 따뜻한 국밥에 맛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혼자서 언 주먹밥을 먹었습니다.
차가운 눈이 밤과 낮을 끊임없이 내렸습니다. 제가 눈 속에 빠졌을 때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제 손을 꼭 붙들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마을은 보이지 않고 나무는 눈 속에 허리를 박은 채 유령처럼 서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제 눈(眼)만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당신과 만났을 때 모든 것이 물러가고 저의 눈만이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인생에서 가장 최선의 것을 순간적으로 맛보게 해준 경험이었습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갖고자 하는 조건, 그런 것의 형상화였습니다. 혼돈스러운 경험이었지만 그것은 최선의 것이었고 전쟁과는 정반대 쪽에 서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피난지에서 돌아와 다시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몇 날이고 계속해서 그 기간 동안 지낸 일을 어머니에게 얘기했습니다. 할머니는 인민군들에게 밥을 지어주면서 지냈다고 했습니다. 여자 빨치산들은 할머니를 어마이라고 부르며 딸처럼 따랐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피난지에서 올 때까지 할머니는 김치를 담가 시장에 파는 일을 했습니다. 김치를 무겁게 이고 가던 할머니는 미군 지프차에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조금 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앉음새는 비슷합니다. 두 사람 모두 한쪽 무릎은 올리고 눈은 허공을 향합니다. 그 앉음새는 몇 년 뒤 어느 봄날로 이어졌습니다. 피난지에서 돌아왔을 때 얘기하던 자세로 할머니와 어머니는 싸우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살기 넉넉한 이모집에 가서 지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싫다는 할머니께 아픈 동안만 가 있으라고 마구 역정을 내었고 할머니는 노여움에 눈물지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이 없는 자신을 만만히 여겨서 할머니가 매일 와 있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딸에게 짐이 되기 싫어 피난도 가지 않은 일을 상기시켰습니다. 어머니는 외삼촌이 이북에서 내려올까봐 기다린 것이라고 응수했습니다. 저는 효녀라는 말을 듣던 어머니가 어째서 할머니를 괴롭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어머니는 결단을 내린 듯 제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모에게 가서 할머니를 모셔가라고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만난 듯 울면서 조그만 보퉁이를 하나 쌌습니다. 할머니는 진실로 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늘 있던 곳, 사위가 없는 그 집이 자신의 집 같았던 것입니다. 아들이 있다면 아들의 집이 할머니의 집이었겠지만 말입니다.
할머니가 울면서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어머니는 저더라 따라가 보라고 했습니다. 화창한 봄날이었습니다. 할머니의 흰옷이 햇빛에 눈처럼 반사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할머니는 울면서 아픈 다리를 어기적어기적 떼어놓았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끊임없이 일을 했었던 할머니가 이모집에서는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일하는 아줌마와 함께 방을 쓰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 집에서 할 일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일이 하고 싶어도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잡혀오지 않은 데다가 사돈이나 집안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숨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가 곰보였다는 사실에 놀란 손주들을 보고도 할머니는 그냥 웃고만 있었습니다. 그 웃음은 최고의 겸손을 간직한 그런 웃음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언제나 그런 자세로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할아버지가 타관에서 첩을 얻어 살자 할머니는 일찌감치 체념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여자가 딸 셋에 외아들을 데리고 그 어려운 시대를 산 것을 생각하면 그 고난의 세월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습니다.
이모집에 간 이후 저는 좀처럼 할머니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외삼촌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하러 갔던 날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때 할머니는 단정한 몸빼차림으로 문지방 높은 방 안에 오두마니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삼촌이 북한에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할머니는 주저하는 듯 살아 있느냐고 한 번 반문했습니다. 그것이 할머니와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할머니는 갑자기 쓰러졌고 며칠 의식 없이 누워 있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밥상을 차리는 여자
저는 굳건하게 여기에 섭니다. 그것은 여자로서 서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할머니와 순젱이, 그 이전의 선조들이 전해준 마지막 인간의 조건으로서이기도 하지요. 피난 갈 때 본 눈 속에 있는 나무와 같이 순간이 영원으로 변하는 그 가능성.
그때 할머니가 울면서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꾸리던 모습을 보았으므로 저는 이즈음 어머니에게 곧잘 그 일을 들추며 달려듭니다. 어머니와 저의 싸움이 봄철에서 여름철, 가을철로 접어들었다가 다시 겨울, 봄에 이르기를 몇 해인가 거듭했지요.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어머니가 드디어 쓰러졌습니다. 곧 의식은 회복되었으나 입이 삐뚤어지고 반신마비가 왔습니다. 어머니의 입은 비교적 쉽게 제자리로 돌아왔고 마비도 풀렸습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을 잃고 어머니는 침대에 드러눕게 되었습니다. 화장실 출입만 겨우겨우 했습니다. 예전에 할머니는 어머니를 간섭하지 않고 말없이 도와주기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할머니를 내쫓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들먹이며 저는 어머니가 자신의 생활을 전부 박탈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제가 가장 힘을 기울이는 부분을 어머니는 타락이라고 여겼습니다. 싸움이 고조될 때마다 어머니는 저를 보고 나가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항상 나가라는 말에 주춤했습니다. 그것은 결혼에 실패해 돌아온 여자의 약점을 가장 찌르는 말이었습니다. 실제로 나가보려고 근처 방을 얻으려 돌아다닌 적도 있었습니다. 예상외로 방값은 비싸고 제가 생각하던 방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가 나가면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사고할 여유도 없이 복덕방을 헤매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당신과의 만남을 처음 시작할 무렵 제가 악마에게 한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제게 중요한 것을 악마에게 내어주어서 당신과의 사랑을 가능하게 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악마가 저와 어머니를 이렇게 싸움으로 끌고 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어 저는 눈이 붓도록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금 얻은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어디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눈을 보면서 왠지 반가운 일이 앞날에 올 것 같다고 느끼던 것과 흡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앞날이 아직도 온 것 같지 않았고 아직도 앞날에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의문을 저는 당신에게 실토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를 위해 사는 거냐는 제 물음에 당신은 어차피 사는 일은 하나의 준비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는 일은 정말로 하나의 준비과정이고 어딘가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저는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저는 어머니와 화해를 하고 싶습니다. 화해를 하고 싶은 기분이란 당신과의 결별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당신에게 가졌던 저의 열정이 고조됐을 때 어머니와의 싸움 또한 극에 달했었습니다. 저는 매일매일 머리를 싸매고 어머니에게 울며 달려들었습니다. 여기서도 저는 악마의 짓일 가능성을 떠올렸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한 제게 중요한 것을 내놓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행복감은 어떤 희생도 치르지 않고 쉽게 맛볼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두 가지의 무게를 재어보지도 않을 것이며 후회 또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운명처럼 저는 힘껏 당신에게 달려간 것이고 당신은 기꺼이 저를 받아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우리 두 사람이 호텔 문을 나와서 걸을 때면, 저는 저만큼 멀어져 가는 당신의 그림자를 보며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당신은 진실한 사람입니다. 당신을 좋아하면서도 저는 허기를 느끼곤 했습니다. 그런 제 눈치를 챈 당신이 차를 마시자고 제안하면 저는 사양하고 돌아섰습니다. 카페에 들어가 당신과 차를 마시고 싶어하면서도 사양하는 이유를 저는 곰곰이 따져봤습니다. 자기 몫을 양보하는 태도는 아버지가 없는 데서 연유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와 동생은 크면서 어머니에게 무엇을 사달라고 조른 적이 없습니다.
언젠가 동치미를 땅 속에 묻어 두고 겨우내 먹고 싶다는 당신의 말에 저는 속으로 너무나 공감을 느꼈습니다. 당신은 저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을 좀더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문제가 우선이고 ‘나’는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저는 중얼거렸습니다.
당신은 제가 50이 될 때까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겠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말은 제 마음을 살펴주는 뜻에서 한 것이었지만 저의 자존심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는 당신과의 만남이 지속되는 나이가 50까지 라고 한정을 둔 적이 없었습니다. 일 년, 이 년, 혹은 삼 년까지는 하는 기대감 같은 것은 있었습니다. 저의 그런 심리를 파악한 당신은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한번 써보라고 말했습니다.
좀 전에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에서 집안 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경찰서에 가서 알아본 결과 불은 아저씨와 제가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베크 족의 담뱃불이 원인이었습니다.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첫눈이 오고 있다는 아저씨의 말에 어린 시절 눈의 느낌, 그 때의 순백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저는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다 타버린 잿더미 속으로 흰 연기만 날리고 있는 영상이 제게 들어왔습니다. 불이 붙고 있는 동안 그 기운에 힘입어 제 안에서 빠져 나오고 싶어했던 것들을 끌어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눈이 온 날의 환한 느낌이 들창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제 가족들, 주변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랐습니다. 저는 그들과 저를 연결하는 끈, 제 자신이 그들과 어떤 관계인지 생각해봤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은 제게 속박일 뿐입니다. 저는 소멸해 가는 어머니를 담당하는 것이 제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역시 점점 소멸해가는 할머니를 감당하기 벅찼기 때문에 이모댁으로 보낸 것입니다. 저는 자신이 몰랐던 어머니의 고통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영상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있었다면 제 성격, 운명이 훨씬 달라졌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에게도 무엇인가를 요구했을 것입니다.
문득 할머니의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할머니가 군불을 지피며 밥상을 차리는 장면이었습니다. 장면이 바뀌어 삼촌이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삼촌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었습니다. 모두가 피난을 떠난 빈집에서 할머니는 삼촌을 만났고 그 밤 다시 떠나는 삼촌을 문 앞에 서서 배웅했습니다. 그때 할머니는 문 앞에 붙박이듯 서 있었습니다.
이 두 개의 영상이 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제 안에서 끌어내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밥상을 차리는’과 ‘싸리문 부여잡고 기다리는’ 이 두 개의 영상을 끌어내기 위해 저는 지난 밤새 진통을 하며 많은 말들을 쏟아낸 것입니다. 저는 삶의 열쇠를 찾은 듯 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따뜻한 밥상에 대한 갈증과 앞날에 다가올 기다림에 대한 소망의 마음이 그 두 개의 영상임을 깨달았습니다.
옛 집을 찾아온 당신 역시 실향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와 같은 소망을 품고 지내왔다면 당신은 이제 그런 사람을 찾은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만남의 나이를 50까지 한정한 것에 더이상 연연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누군가가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끝까지 기다려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었지만 이제 저는 제 편에서 누군가에게 해주는 사람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굳건하게 여기에 섭니다. 그것은 여자로서 서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할머니와 순젱이, 그 이전의 선조들이 전해준 마지막 인간의 조건으로서이기도 하지요. 피난 갈 때 본 눈 속에 있는 나무와 같이 순간이 영원으로 변하는 그 가능성.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돌아올 곳이 있다고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찾는 집을 제가 알았던 이유를 고백합니다. 어린 시절 우리 두 사람은 한 동네에 살았습니다. 당신이 던진 야구공이 국민학생이었던 제 이마에 맞은 일이 있습니다. 중학생인 당신은 뛰어와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혹이 부풀어오는 이마를 쥐고 저는 그 집으로 들어가고 있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때 아팠던 야구공의 기억 때문에 당신을 기억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글자 한 자도 쓸 수 없을 만큼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이제 저는 한숨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들창을 열고 눈의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환(幻)인 남성성
‘나이 들어가는 여자라는 성과 그 성이 가지는 떨림’의 의미를 그려내고 있는 <겨울의 환>은 한 여자의 자의식과 삶의 정체성을 통해 여성 보편적 삶의 근저에 깔린 운명성을 탐구하고 있다. 이 소설의 여성화자(‘나’)는 그러한 여성의 정체성이 남성을 위하여 혹은 남성을 기다리며 밥상을 차리는 일, 싸리문 부여잡고 기다리는 일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닌지를 조심스럽게 고백하고 있다. 특히 이 소설에서 여자라는 성과 그 떨림의 정체성은 여성화자의 삶 너머에 존재하는 남성인 ‘당신’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당신’은 6년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친정으로 돌아가 홀로 된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는 사십대 중반에 이른 이혼녀가 동네에서 우연히 만난 인물이다. ‘당신’은 여성화자의 삶에 결핍된 어떤 요소들의 집합체, 혹은 결정(結晶)이며, 따라서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계속 찾아 헤매는 일종의 환(幻)이다. 그것은 결핍과 부재(不在)로써 여성화자의 자의식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남성성, 혹은 부성적 삶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겨울의 환>은 여성화자의 내면과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신산스런 삶의 궤적들을 조용히 되새기고 드러내는 그녀의 목소리만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움의 대상인 ‘당신’은 철저하게 부재로 일관되어 있고 그 부재 위로 ‘기억 속에 아무런 영상도 없이 오직 무(無)인 아버지’가 소리 없이 겹쳐진다. 여성화자의 가정은 부성이 부재하는 모계가족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가족 구조 속에서 부녀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의 말을 통해 아버지의 행위를 인식하는 만큼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녀가 가장으로서 권리를 도외시하고 있는 아버지의 행위를 비판할 정도의 연령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이 첫째 이유에 해당하지만 이것은 이야기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번째 이유 즉 어머니에 대한 그녀의 적대 관계가 부재하는 아버지를 환상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어머니와 딸 사이의 갈등관계는 부재하는 남성에 대한 그리움이란 역기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혼을 하고 친정집으로 돌아와 ‘소멸해가는 어머니를 담당하는 것만이 저의 운명’이라고 수락해버리는 사십대 중반의 여자가 감당해야 하는 고단한 일상의 삶은 어둠의 형식, 환멸의 형식의 삶이다. 그것은 여자에게 ‘안락함 속에서도 왠지 모를 갈증’으로 허덕거리게 하거나 ‘심한 갑갑증’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의미가 탕진되어 버린 일상적 삶에 수동적으로 함몰된 여자에게 다가온 ‘당신’이란 존재를 그녀는 인생에서 ‘우리가 뽑아낼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을 순간적으로 맛보게 해준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성화자인 ‘나’의 삶과 운명에서, 또한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의 삶과 운명에서 사라져버린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남편과 삼촌들, 그리고 애인들이란 무엇인가? 남성들이 부재하는 여성적 실존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 주제는 이 소설이 안고 있는 일종의 화두처럼 보인다.
<겨울의 환>은 그 화두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 ‘당신’은 어둠의 형식, 환멸의 형식의 삶에 허덕이고 있는 여자를 그 어둠과 환멸 속에서 불러내 순간을 영원으로 열어주고 그 가능성의 지평에 세우는 존재, 혹은 ‘무엇인가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열리고 열리며 아름다운 자유’에로 데려가 여자의 삶을 활짝 꽃피게 한다. ‘당신’은 실재하는 존재인 동시에 여자의 삶이 머금고 있는 환(幻)이다. 여자의 삶을 속박하고 있는 고립, 유폐의 사슬을 풀어주고, 보다 넓은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매개적 존재이다. 그래서 여자는 애타게 허공을 향해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환(幻)을 좇아 나아가는 것이다.
<겨울의 환>에 있어서 ‘불’과 ‘눈’의 의미
이 소설을 보면 어느날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게된 중년 여성인 ‘나’와 이전의 미성숙한 상태의 ‘나’의 심리상태가 노출됨으로써 긴장과 이완이라는 서사의 진행이 마련되고 있다. 이처럼 대립적인 두 개의 ‘나’는 ‘불’과 ‘눈’이라는 두 자연물과 연계되어 갈등에서 화해에 이르는 과정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성화자의 글 혹은 삶과 연계되는 자연물인 불과 눈은 열기/냉기, 적색/백색, 융합/차단의 대립성을 가지며 동시에 정화나 소멸 그리고 변형과 생성의 상징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소설에서 산불은 화자가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글을 쓰는 동안 계속 타다가 화자의 글쓰기가 끝날 무렵 걸려온 아저씨의 전화에 의해 꺼졌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산불은 인물의 내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상징적 배경이며 화자의 글쓰기를 유도하는 서술장치라고 할 수 있다. ‘망자들이 훨훨 타오르는 불길에 가슴이 맺힌 응어리를 다 녹이는 후련함을 맛보’듯 화자도 ‘불기운에 힘입어’ 자신의 한을 글쓰기로 풀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산불의 정기를 받아 글을 쓰는 그녀의 마음은 ‘무서운 불길’인 동시에 불이 꺼진 후의 ‘빈 산’이기도 한데, 이것은 불의 상징적인 두 기능 즉 창조와 정화에 의해 글쓰기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불은 아직도 타고 있을까요’라는 화자의 언어에는 현실의 불인 산불에 대한 염려와 내면의 불인 창조의 열정이 아직 소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두 마음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마음속에는 모든 것은 소멸을 통해 정화되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실향민의 한을 태우는 산불과 화자의 한을 연소하는 창조의 불은 별개의 것이 아닌 동일한 정화의 불이며 생성의 불인 것이다.
불과 대립되는 눈은 부성이나 애정이 결핍된 어린 시절을 설명하는 배경으로 ‘기쁨이나 행복감’이 자신과는 거리가 먼 비현실의 세계라는 부정적인 인식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화자는 당신에 의해 어두운 겨울밤과 대조되던 ‘눈의 세계’야 말로 화자가 갈망하면서도 감당하기 힘든 ‘성숙한 여인의 세계’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한다.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혼란의 와중에서 맞이한 눈은 추한 현실을 은폐하는 보호막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라는 상징으로 다가온다. 결혼이 결코 환상이 아니라 눈 밑의 흙과 동일한 현실이라는 자각에 이르게 하는 매개물이 되기 때문이다.
피난길에서 만난 눈을 회상하는 어린 화자의 시점에 비친 눈의 의미는 현재의 당신과 연계되어 배고픔, 추위 등의 결핍이나 가족과의 이별과 대립하는 충족과 화해를 암시한다. 또한 이 소설의 결말에서 눈에 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아저씨의 전화는 화자가 글쓰기가 끝나는 지점과 맞물리며 주변의 사물과 존재를 차단시키는 유년의 눈세계로 화자를 인도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화자는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눈(眼)’으로 인간관계를 인식하게 되므로 이 때의 눈(雪)은 환상과 비현실까지 포함하는, 불고 물의 대립을 극복하는 정화된 ‘눈의 세계’인 것이다. 그런 눈(雪)을 볼 수 있는 눈(眼)이란 모든 인간은 고통을 통해 성숙한다는 것, 그런 고통을 경험한 후에야 타인의 아픔까지 품어주는 어머니로서의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자각과 다름없다.
전통적 이야기를 거부하는 감각적 문체 :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병치
김채원의 소설 <겨울의 환>에는 핵심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나 행위가 뚜렷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다. 물론 이 작품에서 자질구레한 사건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대부분 과거의 기억과 뒤엉켜 재편성되고 있을 뿐, 그것이 일관된 이야기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다. 행동과 사건의 일관성이 깨지면서 이 작품에는 장면과 장면의 연결보다는 장면과 장면의 겹침으로 얻어지는 상황이 더욱 강조된다. 그리고 바로 이 상황성의 강조를 위해 문체의 다양한 변화가 유도되고 있다. 작가는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삶에 독자들을 밀어 넣는다. 그녀가 중요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가가 사물세계와 만나게 되는 감각적 의식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겨울의 환>에서 ‘나오는 대로’, ‘두서없이’라는 어휘는 즉각적인 기술방식을 나타내는 비의도성을 함유하고 있다.
또한 이 소설에서는 화자의 과거에 대한 회상과 현재에 대한 인식이 교차된다. 이를테면 담뱃불을 매개로 산불과 할머니 그리고 순젱이를 연상하며 이런 여인들의 산악과 같은 강인함과 의연함으로 화자가 존재한다는 인식에 존재한다. 여성화자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인 ‘당신’은 부재(不在)하는 부성(父性)의 대체물로서, 어머니와 ‘당신’을 동시에 수용할 수 없다는 데 화자의 갈등이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해석하는 글쓰기의 과정을 통해 화자는 그녀 주변의 모든 인간관계를 새롭게 정립한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불화를 거울로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며 그런 이해의 시선은 ‘당신’을 포함한 주변인물에 대한 이해로 확산되고, 결핍을 갈망하는 사람이 아닌 대립과 투쟁을 극복하는 어머니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이처럼 이야기 자체가 커다란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이 소설은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데, 그 분위기는 먼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심리적 상황을 수시로 병치시키는 구성에 의해 형성된다. 여성화자의 내면적인 상황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감각적인 분위기, 그리고 그 상황의 이미지만이 압도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또한 그 분위기는 대부분 그녀의 짙은 상실감과 담담한 절망감을 동반하고 있다. 여기서 상실감은 과거의 기억과 연관되어 있으며, 절망감은 현재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과거의 기억은 그것이 상처에 관한 것일지라도 유년의 순수함이나 추억의 음영을 가지고 있어 아름답게 회상된다.
그러므로 현재의 상황 역시 절망적일지라 할지라도, 그것은 숨막힐 듯한 답답함이 아니라 오히려 담담한 것일 수 있다. 과거의 추억들이 그 곁에 병치되고 있어 현재에 반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아 발견의 계기가 남성인 ‘당신’의 권유에 의해 마련되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재해석하는 글쓰기의 과정에서 획득된 여성 사이의 유대감이 ‘당신’을 비롯한 주변인물의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힘이 된다. 그 힘은 남성에게 의존하거나 남성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을 모래시계 속에 가두는’ 폐쇄적이고 소극적인 태도가 아닌 ‘내편에서 누군가에게 해주는’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의 전환이다. 이처럼 이전의 ’나‘와 현재의 나를 둘러싼 과정들이 투쟁에서 화해로, 이별에서 만남으로, 구속에서 자유로 변화하는 과정에 이 소설이 있다.
▣ 김채원의 생애와 작품
1946 12월 13일 경기도 덕소에서 서사시 「국경의 밤」으로 유명한 아버지 파인 김동환과 소설가 인 어머니 최정희 사이에서 2녀 중 차녀로 출생. 아버지가 지은 김채원의 원 이름은 ‘항란’ 으로 월궁 항아에서 따온 것이다. 김채원의 이름이 원래 ‘아란’이었는데 그녀가 언니인 ‘항 란’과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아란, 항란이 춤추며 이 역만리 떠돌아다닐 이름이라 하여 현재 쓰고 있는 김지원, 김채원으로 바꾸었으며 이 이름들은 소설가 김동리가 지어준 것이 다.
1948 덕소에서 동숭동으로 이사. 이후 여학교(숙명여중, 이화대학부속중․고등학교)에 들어갈 때 까지 여기서 살았다. 꽃과 나무가 많고 약수가 있는 낙산 밑의 집이었다.
1950 창경국민학교에 입학한 언니와 함께 6․25 때 월북한 무용가 ‘장추화 연구소’에 다님. 그 해 6․25 전쟁 발발. 김채원의 가족은 피난가지 못했고 아버지는 숨어 있었다. 아버지 파인 김동환은 결국 납북됨
1951 피난지 대구에서 달성국민학교에 입학. 칠판에 흠이 난 점과 무늬까지 글씨인 줄 알고 공책 에 베낌. 이를 본 어머니 최정희가 언니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라고 얘기함
1953 피난지에서 서울 동숭동으로 돌아와 창경국민학교에 입학. 4학년 때 깍쟁이라는 이유로 반 친구들에게 몰매를 맞음
1958 창경국민학교 졸업. 숙명여중에 입학했으나 어머니 병환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1년 쉰 뒤 당시 모델 케이스로 생긴 이화대학부속중학교에 입학. 1년 쉬는 동안 특히 영화를 많이 봄. 여학교시절에는 몇 명이 그룹을 지어 선교사부인에게 영어를 배우고 특별활동으로 무용반을 하였음. 여중 2학년 때 하교길에 영화촬영 장소를 물색나온 조감독 팀에게 영화출연을 권유 받음
1964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입학. 고등학교 3학년 때 알게 된 이제하, 김영태 작가 와 만나면서 세상의 새로운 것들을 접하게 됨.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 전혀 그림에 몰두하 지도, 그 외 아무 것에도 몰두하지 못한 아까운 4년을 보냄
1968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학과 졸업. 졸업 후 몇 년간 절에 가서 한 달씩 있다가 옴. 문학공부를 하는 친구 이재연을 만나 그녀의 방에서 슈베르트의 첼로 곡을 감상하고 책을 읽게 됨. 그전까지 독서는 거의 백지상태였다. 생텍쥐베리의 『야간비행』 탐독
1972 일본 동경으로 감. 와세다대학교 언어 코스에 다니다 1년간 동경 한국초중고등학교 미술교 사로 재직. 이때 잠시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클라식’이란 찻집과 찻집 주인인 무명화가 사 쿠 선생을 지금도 잊지 못함. 그 무렵 바이올린에 대한 동경으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 요코하마에 살던 박시정과의 교우가 시작됨. 북한국적인 이하자와 애틋한 우정을 나누었으 며 그녀와의 우정은 후에「달의 강」에 반영됨
1974 「먼바다」로「현대문학」에서 황순원의 초회 추천 받음
1975 언니 김지원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 있는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수업. 단편 「밤인사」로 추천 완료. 단편 「얼음집」 「자건거를 타고」 「달의 손」 발표
1976 프랑스 파리로 건너감. 단편 「몽수리 공원에 내리는 가을」을「밀월」에 발표. 언니 김지 원과 자매작품집으로 『먼 집 먼 바다』를 지식산업사에서 간행. 학생기학사 ‘씨떼’에서 수 녀들이 경영하는 기숙사로 옮김. 파리 체류시절 스승으로 모신 이응로 화백은 「달의 강」 에 나오는 운무선생의 모델이 됨.
1978 귀국. 단편 「밀월」 「봄의 끝」 발표
1979 백동규와 결혼. 수원에 있는 아주대학교 사택에서 생활. 단편 「초록빛 모자」 「안개」 「나이애가라」 발표
1980 아들 백수장 출생. 김동리 선생이 이름을 지어줌. 어머니 최정희의 제자들과 언니 김지원과 김채원의 친구들로 구성된 정릉 그룹이 형성됨. 단편 「가을 햇빛」 「냇물」 「산중기」 「묘약」 발표
1981 단편 「오월의 숨결」 「물위에 어린 그림자」, 「아이네 크라이네」 발표
1983 단편 「공중에는 또 하나의 방이」, 「가득찬 조용함」 발표
1984 단편 「여름의 환」 「애천」 발표. 작품집『초록빛 모자』를 나남에서 출간
1985 「저문 날 허공에」 「꿈과 재생」 발표
1988 중편 「오후의 세계」, 중편 「겨울의 환」 발표
1989 『겨울의 환』으로 이상문학상 수상. 중편 「봄의 환」 발표
1990 어머니 최정희 사망. 작품집 『봄의 환『을 미학사에서 간행
1991 소설가협회 작가들과 중국 여행. 중편「미친사랑의 노래」발표
1992 소설가협회 작가들과 러시아 여행. 콩트집 『장미빛 인생』을 작가정신에서 간행
1993 수필집『꿈꿀 시간 있으세요』를 도서출판 전원에서 간행. 장편『형자와 그 옆사람』을 도 서출판 창에서 간행
1994 이제하, 송영, 서영은과 이라크와 지중해 연안도시를 한 달간 여행. 이제하, 송영, 서영은 과 함께 여행산문집 『사막……그리고 지중해에 바친다』를 문학동네에서 출간. 중편 「달 의 몰락」 발표
1995 일본여행. 단편 「봄날에 찍은 사진」 발표. 대표 중단편선『달의 몰락』을 청아출판사에서 출간
1996 장편창작동화집「장미와 가위손」을 한양출판사에서 출간. 언니 김채원과 두 번째 자매소설 집으로『집. 그 여자는 거기에 없다』를 청아출판사에서 출간.「문학사상」8월호에 엽편소 설을 발표
1997 장편『달의 강』을 해냄출판사에서 출간
2000 창작에 몰두
▣ 참고문헌
강금숙, 「여성의 정체성의 획득과 상실- 김채원의 ‘겨울의 환’에 대한 여성비평적 독서」, 강금숙 외,「한국페미니즘의 시학」, 동화서적, 1996
「불과 눈으로 빚는 글쓰기- ‘겨울의 환’에 대한 여성적 독서」, 『여성의 글, 여성의 삶』, 국학자료원, 1999
권영민, 「소설과 자의식의 그림자」, 김채원,『초록빛 모자』에 실린 작품론, 나남, 1984
권택영, 「수채화 같은 내면소설」, 김채원,『달의 강』에 실린 작품론, 해냄, 1997
김윤식, 「동치미가 불러낸 허깨비- ‘겨울의 환’에 대하여」, 김채원,『봄의 환』에 실린 작품해설, 미학사, 1990
김채원, 『꿈꿀 시간 있으세요』, 전원, 1993
박동규, 「운명의 끈과 환영의 전각」, 김채원, 『오늘의 한국문학 33인선』 제28권에 실린 작품론,
박철화, 「의지의 떨림, 떨림의 미학」, 김채원,『봄의 환』에 실린 작품론, 미학사, 1990
원형갑, 「김채원 또는 미래의 아방가르드」, 김채원,『달의 몰락』에 실린 작가론, 청아출판사, 1995
장석주, 「김채원, 그 모성적 상상력의 세계」, 김채원,『달의 몰락』에 실린 작품론, 청아출판사, 1995
▣ 글쓴이 안지영
서강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송강 가사의 傳 양식적 성격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1920년대 시조론의 고시조관」(한국시조학회「시조학논총」제15집, 199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