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 음
양 승 본
날개! 그것은 자유였다. 이상(李箱)은 자유를 위해 몸부림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날개는 이상의 자유였다. 시인은 시가, 소설가는 소설이, 수필가는 수필이 그의 자유이다. 마젤란은 세계일주가, 나폴레옹은 정복이,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미소가, 베토벤은 교향곡이 그의 자유였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 피 한 방울 뼈마디까지 다 하다가 죽었다. 경근은 그 자유가 그리웠다. 그의 자유는 ‘웃음’이었다. 그는 그 웃음을 하회탈에서 찾았다. 탈은 그의 날개였다. 그의 희망이요, 종교였다. 동시에 그의 철학이며 생명이 되었으므로 그 인생 자체였다.
경근은 언제나 하회탈 앞에 서면 황홀했다. 그는 하회탈을 보고 하회탈처럼 웃는 것이 그의 생활이었다.
40대가 된 경근의 집은 마을에서 약 300여 미터 떨어져 있었다. 그의 마을은 산골과 들녘의 중간쯤에 있어서 대개 밭농사를 주로 하고 논농사는 곁들여 하는 곳이었다. 양지편이란 이름의 마을은 아름답게 남향을 향한 집들로 우거진 숲을 뒷산으로 한 채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500여 년이 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그 느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었다. 그 느티나무를 왼쪽으로 돌면 50여 가구의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10여 미터를 걸어가면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반대로 느티나무에서 왼쪽으로 200여 미터를 가면 경근의 외딴집이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꽤 넓은 길이지만 외딴 집 쪽은 오솔길이었다. 마을에서 외딴집으로 가는 길은 산길이었다. 경근의 집은 원래 여자 무당이 살던 집이었다. 그녀는 무당이란 점 때문에 혼자 살고 있었다. 그 집 앞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샘터가 있었는데 그 곳에서부터 맑은 산골짜기 물이 흐르고 있었다. 여름이면 무녀는 그 산골 물에 멱을 감은 후 굿판을 벌일 때가 있었다. 마을의 마름 일을 하던 사내가 여름밤에 멱 감는 무녀를 덮쳤다. 그러자 무녀는 말했다.
“난 지금 신이 내렸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
사내는 기다렸다. 무녀는 혼자서 한판의 굿을 벌였다. 그 굿이 끝나자 사내를 불렀다. 사내가 무녀의 방에 들어섰을 때 무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말했다.
“삼신할미가 말했소. 오늘밤 당신을 갖는다고요.”
사내는 뜻도 모르고 좋아서 입이 벌어졌다. 무녀가 눕자 그 위에 사내의 몸이 이층을 만들었다. 무더위와 육체적 열기 때문에 두 남녀는 땀으로 멱을 감은 것처럼 절었다. 그러나 그 관능적 열정이 끝났을 때 무녀만 움직였다. 사내는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장사가 끝나자 무녀는 그 집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임신이 된 몸을 외딴섬의 고아원에 의탁했다. 아기를 낳자 무녀는 죽었다. 하혈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근은 그래서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에게는 늘 우울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로 인해 외로움에 젖어 있었다.
외딴집은 방, 마루, 부엌 하나로 되어 있었다. 작은 구릉을 등지고 자리 잡은 그 집은 울타리가 없었다. 집안은 온통 하회탈로만 매달려 있었다. 방, 마루, 부엌의 벽에는 물론 탈은 천정에도 매달려 있었다.
탈은 모두가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경근은 집안에서 주로 세 가지 행동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의 첫 번째 버릇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집안의 탈을 가부좌한 자세로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는 탈을 바라보는 동안 무표정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일체의 바람이 없는 호수의 수면과 같았다. 마치 곁에서 보면 모든 신경조직이 죽어 있는 것처럼 모든 동(動)은 사라지고 정(靜) 만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호흡마저 정지된 모습이었다. 그 때마다 아내는 남편이 죽어버린 것이나 아닌가 하고 착각에 빠질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한번 ‘씨익’ 웃은 다음 일어서면서 집안이 떠나갈 듯 크게 웃어젖히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그의 습관은 시간만 나면 탈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탈을 만들 때는 거의 미친 사람 같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만들어지는 탈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거나 반대로 화를 내는 것이었다. 또 조각칼을 가지고 파기도 하고 깎아 내기도 하는 손끝은 조각칼과 함께 일심동체가 되었다. 눈에는 늘 강한 빛을 발하고 모든 신경조직이 그의 손에 있는 칼끝처럼 예민하게 눈을 뜨는 것이었다.
경근이가 탈을 바라보거나 조각할 때는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절연(絶緣)된 상태 하에 있었다. 그가 조각을 하거나 조각된 탈을 바라볼 때는 시간의 관념을 잊었다. 처음도 끝도 없는 듯 제4차원의 세계에 빠져든 형상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밥상을 차려와도 몰랐다. 그 때마다 그의 식사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아내가 어떤 말을 해도 대답하거나 쳐다보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과는 상관없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 그의 행동 때문에 그의 아내는 처음 그 집에 들어온 이후 며칠간은 식사를 날라 오거나 말을 걸었지만 그의 습성을 알게 된 이후에는 그녀도 그런 시간 동안 그를 잃어버린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그는 그런 시간 동안 밖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져도 모른 상태였다. 설사 그가 탈을 쳐다보거나 그 탈을 조각할 때 그의 집이 무너져서 그를 덮친다 해도, 산이 무너져 내려 그의 몸을 짓누른다 해도 그는 그 속에서 탈을 보는 눈을 깜박거리거나 조각하는 손놀림을 멈추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신경이나 정신은 하부구조를 떠나 상부구조 속에서만 머물러 있는 시선이기도 했다.
그의 세 번째 특징은 그가 만든 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탈을 거리나 시장에 나가 파는 행위였다. 그가 자신의 탈이 만족스러울 때는 한참을 바라본 끝에 일어서면서 크게 웃는 것이었다. 반대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치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것처럼 슬피 울어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가 식사 때면 걸신(乞神)들린 사람처럼 밥을 먹어 치우는 것이었다. 언젠가 그런 그의 행위에 대해 그의 아내가 물었다.
“여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탈을 버리지 왜 그대로 매달아 놓으세요? 마음에 든 탈만 보관하시면 되잖아요?”
“뭐라고? 자식을 죽이라고? 자식은 못났든, 잘났든, 똑똑하든, 바보든, 멀쩡하든, 불구자이든 어느 놈이나 다 귀한 거여.”
집안이 떠나갈 듯한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냈으므로 그 이후부터 그의 아내는 그런 일에 입을 열지 않았다. 경근은 가끔 탈을 팔러 나갔다. 그가 탈을 파는 것은 돈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경제적으로 무력했다. 그의 아내가 읍내의 공장에 다니는 것으로 집안 경제는 꾸려 나가고 있었다. 따라서 경근은 탈을 바라보고, 만들고 파는 일이 전부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탈 중에서 가장 자신이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만 골라서 팔러가는 것이었다. 재수가 좋은 날에는 시장이나 거리에 나가자마자 즉시 팔고 들어왔다. 그러나 재수가 나쁜 날은 한 달이 지나가도 팔지 못하거나 1년 내내 팔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는 탈을 들고 읍내의 시장거리를 헤매는 것이 판매방법이었다. 그는 탈을 그대로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두 손으로 받쳐서 가슴 앞으로 비스듬하게 기댄 채 상대편이 볼 수 있도록 모시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가 팔기 위한 탈의 흥정은 특이했다. 탈을 사려는 사람이
“그 탈 팔거요?”
하고 물으면 경근의 대답은 언제나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께서는 탈을 아십니까?”
라고 되레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아니 탈에 대하여 아는 바 없지만 그냥 매달아 놓고 보려는 것이지요.”
하면 그와의 흥정은
“선생님에게는 탈을 팔지 않겠습니다. 천만금을 주어도 저는 탈을 팔지 않을 거요.”
하고는 돌아서 버렸다.
그러나 요행히 탈에 대하여 이해를 하거나 탈을 중심으로 한 예술부문에 대하여 감상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진지하게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매매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어느 해 여름이었다.
“이 탈 팔 겁니까?”
“선생님은 탈에 대하여 아십니까?”
“탈을 사랑하지요.”
“아, 그래요?”
“저는 탈만 보면 우울했던 맘이 밝아집니다.”
“아, 그래요? 그건 저와 똑같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탈이란 얼굴이나 때로는 머리 전체와 몸 전체를 가려 변장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달했다고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러나 저러나 우리 주막에 가서 막걸리라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눕시다.”
“그러죠.”
그들은 주막집에 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여 가며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나는 탈을 만들고 팔지만 항상 내가 만든 탈이 살아 있는 느낌을 받지요.”
“네, 그렇군요.”
“탈은 살아 있어요. 제 느낌은 맞아요. 탈은 영혼불멸설에 의한 인간의 재생이나 사자(死者)의 보호를 기원으로 시작했거든요. 죽은 인간이 다시 한 번 살아난다고 믿는 관념과 영혼에 있어서 영원한 보호자, 또는 피난처가 된다는 생각에서 죽은 사람의 면상(面上)에나 무덤의 내벽에 거는 것인데 결국 영원불멸의 사상을 형상화 시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석기시대의 신앙과 관습에 의한 장례용 가면에서부터 출발하는가 봐요.”
“그래요. BC 14세기 시대의 이집트 왕 투탄카멘의 황금탈을 비롯하여 페루인 미이라에 씌어진 목각탈, 마야문명을 계승한 아즈텍족 사이에서 행해졌던 장례용 목각탈은 영혼불멸설에 의한 인간재생설을 실증한 것이라 봅니다.”
“오랜만에 동심(同心)의 친구를 만났군요. 자, 쭉 한잔 듭시다.”
“네, 그러죠.”
“아프리카는 서유럽 사람들에게 있어서 탈의 일대 보물창고로 일컬어지더군요.”
“여행을 많이 해 보셨나요?”
“네.”
“그렇군요.”
“나제르강 북쪽에 사는 고곤족의 탈은 독특하여 영양(泠羊)의 무용(舞踊)탈 등 여성상이 붙은 탈은 모두가 기하학적 묘선(妙選)의 웅혼(雄渾)인 필치이며, 비비(狒狒)의 탈은 특히 걸작으로 꼽죠.”
“멕시코 쪽은 어때요?”
“멕시코에는 석조탈이 많지요. BC 3000년대의 그들 국왕의 시체에 씌운 탈을 터키석(石)이나 빨간 조개껍데기로 모자이크한 것인데 역사적, 예술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죠.”
“탈의 종류도 그 용도에 따라 다르잖아요?”
“그렇죠, 먼저 호신용, 위협용으로 쓰이는 탈인데 이런 것에는 전투용투구가 제일 유명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탈을 만든 원인은 초인적, 초자연적인 영력(靈力)이 깃들고 있어서 그 위력으로 악령이나 병마를 물리친다는 사상이 들어 있죠. 아메리카 인디언의 카치나 탈, 보르네오의 카얀족이 모를 낼 때 쓰는 탈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쓰는 수확과 관계가 있지요. 이외에도 수렵용의 탈, 액막이용의 탈, 성인식이나 비밀결사와 입단식의 탈 등도 세계적으로 많아요.”
“저는 아직 한 번도 외국에는 가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하회탈의 경우는 고려 중엽 이후로 보지만 한국의 일반적인 탈은 유물로 봐서 6세기경 신라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나무에 옻칠을 한 탈이 보이지요. 그 탈은 1946년 경주 노서리 호우총 고분에서 출토된 한국 최고(最古)의 탈이지요. 이 탈의 구조를 보면 눈알은 유리로 되어 있고, 눈은 황금의 환(瑍)으로 돌려져 있으며, 두 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라시대의 제작인 이 탈은 당시의 황후, 귀족들의 장례 때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역시 탈은 영혼불멸의 사상, 죽음 등과 관련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문헌상으로 보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탈놀음인데 최치원의 ‘향약 잡영시 5수(首)중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狻猊)의 4가지죠. 특히 신라시대의 탈놀음으로는 9세기 말엽 검무, 처용무는 아시는 바와 같이 유명한 것이지요. 하지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탈의 놀음을 보면 양반에 대한 풍자, 파계승에 대한 조소 등으로 이루어진 내용이 꽤 많습니다.”
“그만큼 그 시대에는 서민들의 애환과 억눌린 감정이 많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한국의 탈은 상식적인 선을 벗어나지 못하거든요. 우리나라 탈의 종류나 구조, 또는 특질은 어떻습니까?”
“저도 문외한이지만 탈을 만들다 보니 역사적인 면을 슬쩍슬쩍 본 것뿐이죠. 우리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신앙가면인데 일정한 장소에 보관해 두었다 고사(告祀)를 지낸다거나 악귀를 몰아낼 때 쓰고 다른 하나는 예능가면인데 연극이나 무용을 할 때 사용하는 것이죠. 사용되는 재료를 보면 나무, 가죽, 종이, 대(竹), 헝겊, 짐승털, 쇠붙이, 바가지, 등 여러 가지로 가공하고 채색한 것이죠.”
“어때요? 한국의 가면에 대한 특징 같은 것?”
“한마디로 한국적인 표정을 가진 게 아니겠어요? 또 하나 색채가 아주 짙은 것이죠. 개성 덕물산의 신앙가면, 강릉이나 하회의 가면은 색채는 짙지 않으나 대신 용모가 험상궂고 표정이 매우 딱딱한 것도 있죠. 대부분의 가면이 대개 상징적인 것도 특색의 하나로 볼 수 있죠.”
“참 오늘 형씨를 만나 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흐뭇합니다.”
“저도 그래요.”
“그런데 형씨! 그 많은 탈 중에서 어느 것이 제일 맘에 드십니까?”
“그건 마치 제 손의 손가락과 같지요. 손가락은 제 몸의 중요한 부분이어서 다 아끼는 것이죠. 그래서 탈은 저에게 어느 것이나 다 좋습니다. 하지만 손가락도 각기 크기가 다르듯이 탈 중에서 저의 마음에 제일 드는 것은 하회탈이죠.”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웃음의 모양이 크고 마음에 들어서요.”
“웃음 때문이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오늘은 제가 형씨의 하회탈을 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형씨라면 제가 만든 탈을 끔찍이 사랑해 주실 것으로 믿어요.”
“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날 경근은 탈을 팔았다. 그것도 평상 가격보다 배나 비싸게 팔았다. 경근이 한사코 평시 가격을 달라고 했으나 사내는 부른 값보다 배를 주고 갔다. 탈을 손수 만든 손길에 대한 값이라는 것이다. 경근은 그와 헤어져 콧노래를 부르며 집에 들어섰다.
그가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내를 쓰러뜨렸다. 그때 어둠이 두 사람을 덮어주면서 키들키들 웃고 있었다. 어둠은 응큼했다. 아내는 부엌에서 밥을 짓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는데 덤벼드는 경근이로 인하여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벌렁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무작정 공격해 오는 경근을 뜨겁게 받아들였다.
아내는 무척 행복한 표정이었다. 경근이가 일어나 옷을 주워 입고 부엌을 나가자 그녀도 옷매무새를 바로 한 후 조금 전처럼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는 것이었다. 아내는 경근이가 장터에 나가 탈을 팔았으며 그것도 마음이 흡족한 값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경근이가 아내를 원할 때는 시(侍)나 장소에 대한 구별이 없었다.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내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느닷없이 공격해 들어왔는데 공교롭게도 우물가였다. 빨래를 하기 위해 퍼놓은 물이 쏟아져 두 사람을 다 적셨다.
평상시에 경근은 그의 아내를 소가 닭 보듯이 여겼다. 그는 오직 탈을 보거나, 만들거나, 우울해 하거나, 웃거나 했고, 아내는 공장에 다녀온 후 빨래를 하거나, 집안을 청소한다거나 하는 일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탈이 경근의 뜻대로 팔리면 그 날만은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내를 쓰러뜨렸다.
어느 해는 1년 내내 탈 한 개도 팔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그들 부부는 사랑이 없었다. 본능적인 삶만이 존재할 뿐 인정마저 없었다. 막연한 생리적 활동만이 그들 부부 사이에 끈처럼 이어져 있을 뿐이었고 그의 아내는 그의 아내대로 여자가 통상적으로 해야 할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탈이 팔리는 날은 집안의 분위기가 전혀 달라졌다. 아내를 공격하고 난 경근은 입가에 웃음을 띠면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었다. 생기가 돌고 온몸에 숨어 있던 힘들이 봄의 새싹처럼 신나게 돋아나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일을 해도 가뭄에 죽어가는 배추 잎처럼 시들시들하던 아내가 갑자기 단비를 맞은 배추 잎처럼 생기가 도는 것이었다.
경근은 그런 날에 엉뚱하게도 탈을 만드는 작업 중에 아내를 불러들여 그녀를 품 안에 껴안고 눈을 감은 채 어린 시절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 때문에 굶주리고 그래서 서럽게 고생스런 생활이었지만 추억의 이름에서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했다.
고아원에 있을 때 경근은 늘 혼자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외로움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 외로움 때문에 그는 가끔 혼자서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았다.
고아원에서 그가 몸서리쳐지도록 그리워한 것은 마음 속 깊이에서 피어나는 웃음이었다. 고아원 안에는 늘 우울이 안개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런 안개는 외로움과 함께 어울려 있었다. 경근은 웃음을 찾기 위해 늘 고아원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섰다. 바닷가에 서면 고아원의 벼룩이, 이와 빈대가 없어서 좋았다. 빨래가 안 된 때 묻은 누더기 옷과 배고픔의 우울도 벗어나는 기분이어서 자유로웠다.
하얀 등대에 몸을 기대면 하얀 파도 위에서 하얀 갈매기가 공간에서 날개짓 하며 노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는 웃고 싶어 하늘을 보았지만 한 번도 웃을 수가 없었다. 하늘에도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걸어가고 있었다. ‘난 섬에 있는 이 고아원을 떠나고 싶다. 그래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는 목에서 피가 나도록 외치고 있었다.
그는 날개가 그리워 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수평선 위의 하늘이 파랗다. 그 파란 하늘 위의 공간에 거지같은 누더기 옷이 흔들거리더니 커다란 날개가 되었다. 그는 날아가고 있었다. 무한한 공간 속을 나르던 경근은 날개를 접었다. 그리고 바다 안의 섬에 내려앉은 것이다.
그 섬에는 선생님이 서서 웃고 있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
하얀 저고리에 벨벳(velvet:비로드, 우단) 치마를 입고 하얀 이를 드러내 웃고 있었다. 경근은 이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는 항상 거칠고 잔인한 행동만을 했다.
“밥 좀 주세요. 네-.”
깡통을 들고 식사 때가 되어 대문에서 외치면 빼꼼하게 열린 대문 밖으로 내밀여친 찬 밥덩이! 그 찬밥마저 몰인정으로 거절하면 돌멩이를 던져 유리창을 깨곤 했다.
동급생들의 도시락을 뺐어먹다가 불평을 한 동료에게는 날카로운 칼을 대고
“죽고 싶어?”
했다. 경근의 칼끝에 그들은 기가 죽고 몸을 떨었다. 멋있는 옷을 입고 살결고운 몸매를 자랑하면 주먹을 날려 코피를 흘리게 했다. 학교에 가면 그의 동료들은 징그러운 뱀이나 송충이를 보듯 피했다. 그러면
“야! 너 왜 날보고 피하니?”
로 트집을 잡아 두들겨 패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동료들은 경근에게 가까이 갈 수도 반대로 피할 수도 없었다.
그가 나타난 교실에는 항상 불안이란 놈이 바람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경근에게도 운수 나쁜 날이 있었다. 학교에서 고아원을 향해 가고 있을 때였다. 늘 지름길로 다니던 골목을 향해 무심코 돌아 섰을 때였다. 싸락눈을 싣고 온 회오리바람이 경근의 얼굴을 때렸다. 그 뒤를 이어 6명의 동료들이 경근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이 짜식아! 뒈져라 깡패 새끼!”
“이 X같은 놈, 거지새끼야. 넌 죽어도 괜찮아.”
그들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마디씩 내뱉으며 경근을 몰매주었다. 코에서 나온 피가 목까지 흘러내려 그의 낡아서 나불거리는 옷을 적셨다.
“죽일 거야, 한 놈씩 죽여 버릴 거야.”
그는 골목의 땅 바닥에 쓰러진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찬바람이 쓰러진 그의 옷자락을 잡고 비웃음으로 희롱거리다가 사라져 가곤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경근은 몰매를 준 동료들의 집을 찾아 나섰다.
제일 먼저 찾아간 집이 창우네였다.
창우네 집은 이층 양옥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밀수로 많은 돈을 벌었다. 가끔 감옥에 까지 갔으나 금방 나왔다.
이번에도 주위에서 아낙네들이 떠들고 있었다.
“아, 돈 놓고 돈 먹기인데 돈으로 안 되는 일 있어요?”
“그럼요. 이번에도 돈 쓰고 처리했나 봐요.”
그때 창우가 학교를 가기 위해 나왔다.
창우는 몸만 국산이지 모든 게 외제였다. 경근의 주먹이 날았다. 창우는 그대로 넘어지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뒤에서 어느 아낙이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
“애새끼도 꼴 보기 싫은데 잘 때려주는군.”
경근은 창우의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걸었다. 어깨를 쫙 펴고 입가에는 웃음을 띠고 걸으려했지만 자꾸만 어깨가 좁아지고 얼굴에는 분노가 검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경근은 웃음을 잃은 채 두 번째로 석철이네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은 고급돌을 부친 집인데 정원에는 갖가지 나무와 화초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석철의 아버지는 의사로서 젊었을 때는 마약에 손을 대더니 그 자신도 마약중독자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마약을 주사 맞기 위해 환자의 등을 처먹었다. 1500원 짜리 주사약을 3000원에 받는가 하면 아프지도 않은 환자를 장기간 입원실에 있게 하는 등 갖가지 수법을 썼다. 그는 마약에 제법 맛을 들이고 있었는데 그 맛의 비례만큼 환자들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었다. 커다란 눈, 툭 튀어나온 광대뼈, 뼈가 드러난 팔다리의 모습이 그의 죽음을 가까이 부르고 있었다. 그는 석철이가 학교에 가도록 대문을 열어주었다.
경근은 그가 대문을 닫자마자 석철의 뒤를 따랐다. 뒤에서 발길질로 쓰러뜨린 후 발로 냅다 배를 밟았다. 석철이가 두려움에 떨며 엉엉 울었다. 경근은 승리의 미소를 짓고 싶었으나 이번에도 웃음이 나타나지 않았다. 경근은 세 번째로 상민에게 갔다. 상민네 대문은 술집답게 아침인데도 아가씨들의 신발이 질서 없이 뒹굴고 있었다. 그 신발들은 간밤에 술꾼들이 아가씨들의 몸을 떡 주무르듯 주물렀거나 위에서 누르던 무게만큼 찌그러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술집 옆에는 여인숙이란 간판이 빨간 글씨로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문이 열리며 한 아가씨가 덜렁거리는 유방을 내놓은 채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야, 꼬마야! 누굴 찾니?”
“상민이요.”
“응, 너 상민이 친구구나 제법 똘똘하게 보이는데.”
그녀가 경근의 머리를 쓰다듬자 파인 블라우스 안에서 덜렁거리는 유방이 경근의 어깨를 스쳤다. ‘아이 X팔’ 경근은 기분이 나빠 마음속으로만 투덜대었다.
상민의 아버지는 술집을 경영하면서 깡패나 기둥서방들이 갖다 주는 색시들을 사서 영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술을 팔다가 기회가 있으면 아가씨들을 여인숙으로 보냈다. 그곳에는 그녀들을 원하는 사내들이 담배를 피면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민이가 나오려고 술집과 이어진 뒤쪽에서 나왔다. 경근은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리고 한 10여 미터 뒤를 따라가다가
“너 어제 날 몰매줬지?”
하고 말했다. 상민이가 돌아서서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경근의 주먹이 날랐다. 쓰러지자 냅다 엉덩이 부분을 서너 번 걷어찼다. 그런데 경근은 뒤끝이 시원치 않아 우울해졌다.
“다음에 또 한 번 까불다가 죽일 거야.”
한 마디 하고 난 경근은 빠른 속도로 걸어 네 번째로 기주에게 갔다. 기주는 벌써 집을 나와 학교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부동산을 사고팔아서 돈을 번 사람이었다. 세무서의 조사를 받았고 두 번이나 구속됐지만 여전히 법망을 피해서 부동산을 사고팔아 돈을 번 사기꾼이었다. 소문은 학교에까지 퍼져 기주란 이름 대신 ‘사기꾼아들’ 하고 놀려대는 것이었다.
경근은 뛰어가서 허리께를 주먹으로 사정없이 때렸다. 기주가 쓰러지자 ‘사기꾼새꺄.’하고 한 번 더 걷어찬 후 걸었다. 기주가 넘어진 채 울었다. 다섯 번째로 성준에게 갔으나 이미 학교에 가고 없었다. 경근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자꾸 마음이 뒤숭숭했다. 바닷가의 등대로 갔다.
바람이 잠을 자고 있었다. 그에 따라 바다도 거울의 표면처럼 매끄러운 느낌으로 누워있었다. 크고 작은 선박들이 역시 눈을 감은 듯 움직임이 없었다.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선생님의 매력은 하얀 이를 드러내놓고 웃는 것이었다. 경근이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바로 선생님이었다. 6학년이 된 이후 한 번도 담임인 그녀에게 꾸중을 듣지 않았다. 만약 꾸중 듣는 일이 생기면 학교고 뭐고 바다에 풍덩 빠져 죽어버리리라고 생각했다.
잠을 잤다. 꿈을 꾸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그런데 영 얼굴 모습을 알 수가 없었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가 여자로 보이다가 남자로 보이고 어머니도 남자로 보이다가 여자로 보였다.
둘은 발가벗은 채 가시 돋친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머리에 쓴 가시관 같은 쇠사슬이었다. 둘이 한꺼번에 제창하듯 말했다.
“우릴 살려다오. 쇠사슬을 풀어다오. 아버지는 북한사람의 말에 따랐고 어머니는 남한 사람의 말을 따라서 너를 버릴 수밖에 없었단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 지금 이런 지옥에 와 있단다.”
경근은 침을 뱉었다. 눈을 뜨니 진짜 침이 등대 옆에 떨어져 있었다. 학교가 끝날 때 쯤 일어나서 다시 성준네 집의 골목에 갔다. 마침 성준이가 왔다. 성준의 아버지는 군대에서 높은 직에 있었다가 예편해서 세무서계통의 직장에 있었다. 그 동안 돈을 많이 벌었다. 그 돈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경근은 교실에서 동료들에게 행패를 부릴 때마다 말했다.
“선생님에게 일러바치면 그 날이 너희들 죽는 날이여.”
그래서 선생님은 경근의 행패를 모르고 있었다.
성준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그의 집골목에 들어섰다. 말이 골목이지 자동차가 두 대나 다닐 수 있는 모퉁이 집이었다. 성준은 경근을 보자 도망을 가려했다. 그런데 경근의 발길이 더 빨랐다. 두 대를 갈기며 말했다.
“이건 어제 몰매 값이고, 이건 앞으로 까불지 말라는 값이야.”
성준이가 ‘으앙’하고 울었다. 그가 울자 경근은 웃으려고 했다. 왠지 불안이 더 하면서 웃을 수가 없었다.
여섯 번째로 아버지가 깡패두목인 덕근네로 갔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떠들 때가 있었다. ‘덕근이 아버지는 정치 깡패래.’ ‘경찰도 꼼짝 못한데.’ ‘10여 개의 유흥업소와 행복호텔의 주인이래.’ 덕근이가 그의 아버지 승용차에 타려는 순간이었다. 지나가면서 힘껏 얼굴을 갈겼다. 막 운전석에 오르던 그의 아버지가
“아니? 저 녀석이……”
차에서 나오며 붙들려는 순간 경근은 번개처럼 좁은 골목으로 달아나다가 길옆의 변소 안으로 숨었다. 구린내가 나고 메스꺼웠지만 참았다. 늘 그 여섯 명의 친구들에 대하여 교실에서든 교실 밖에서든 아니꼽게 생각해 온 경근은 그제야 마음이 후련했다. 그 길로 그는 학교도, 미련 없이 버렸다.
경근이가 동네의 외딴집을 찾은 것은 그의 습관성 우울 때문이었다. 그가 그 우울을 헤어나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노력이 웃음이었다. 그는 그 많은 웃음 속에서 탈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가 탈에서 최고의 가치를 인정한 것은 하회탈이었다. 그 하회탈을 팔고 난 날에는 그는 아내와 부부의 정을 즐긴 습관처럼 그는 입가에 꽃처럼 번져오는 웃음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탈을 만들기 시작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원래 하회별신 굿놀이 때 쓰는 하회탈은 고려 중엽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꿈에 신(神)으로부터 탈을 만들라는 명을 받은 허도령이 있었다. 그는 그가 탈을 만드는 작업장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금줄(禁崒)을 치고 목욕재계 후 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도령을 사랑하는 여인이 몰래 숨어서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피를 토하고 죽게 되는 것이다. 그때 허도령은 마지막 10번째의 이매탈을 만드는 중이었는데 턱만 완성되면 되는 것이었지만 그의 죽음으로 이매탈은 턱없는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 그런 연유로 하회탈을 만들 때는 금욕을 해야 하거늘 경근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볼 수 있었다. 하회탈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턱을 분리시키고 그 턱에 조정구멍을 뚫어 조정 끈을 입으로 조정하여 턱의 각도에 변화를 주므로 그에 따라 표정의 생생한 모습을 가능케 하는 것인데 바로 이 점이 경근을 미치게 했다. 그만큼 웃음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하회탈은 원래 오리나무, 바가지, 종이 등으로 만들어 왔지만 경근이가 만든 탈은 반드시 오리나무에 국한되어 있었다. 탈을 만들기 위해 조각하는 그의 눈동자는 불이 이었고 손끝은 그의 모든 힘점이 모여 있었다.
어느 해 가뭄이 들었다. 농부들이 피와 땀을 흘려 지어놓은 논이 거미줄모양으로 짝짝 갈라지고 모든 타 죽어 가고 있었다. 밭작물도 노오랗게 타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도 바싹바싹 타고 있었다. 비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하늘을 원망하고 있었다. 샘도 말라서 과학적인 농기구도 가치가 없었다. 기우제를 지내자고 야단들이었다. 그런 동네에 갑자기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외딴집의 경근이 부부 때문에 재앙이 내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탈을 만들기 전에 부부관계를 하므로 신이 노했다는 유언비어였다. 가뭄으로 몸은 물론 마음까지 타버린 사람들이 밤중에 외딴집인 경근네로 몰려갔다. 그들의 손에는 작대기나 몽둥이 등이 들려져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갔을 때 모두 경근의 부부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동네의 공동우물까지 말라버린 때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산 밑의 그 샘에서는 변함없이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경근네 부부가 그 샘의 줄기를 동네 쪽으로 돌리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물이 귀해서 경근네 샘터까지 가고 싶었지만 이방인이란 느낌과 외딴집이란 거리감, 하회탈이 곳곳에 매달린 생활의 거부감 때문에 주저하고 있던 사람들은 가슴이 찡함을 느꼈다. 소외된 계층의 정은 때로는 그 반대의 계층을 향해 반항의 몸짓을 나타내지만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사람들을 향해 끈끈한 정이 물처럼 흐르는 순간이 목격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막대기나 몽둥이를 버리고 경근이 부부와 함께 물줄기를 계속 돌려 파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 그렇게도 바라던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근은 재빨리 그의 집으로 들어가더니 아내와 함께 탈을 모두 꺼내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탈을 쓰고 춤을 춥시다.”
경근의 말을 따라 사람들은 탈을 쓰고 서로들 얼싸안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경근이 부부도 웃으며 춤을 추었다. 숨이 헐덕거리는 경근이가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저 사람들을 보라고. 똑같은 모양의 하회탈을 쓰고 있으니 신분계층의 구별이 안 돼잖아?”
“그래요. 여보!”
“탈로 신분을 가리듯 인정으로 인간사회의 신분계층이 없어진다면 세상은 온통 웃음꽃이 필거야.”
“그럼요.”
경근은 미칠 듯 춤을 추었다. 기운이 쇠잔하여 쓰러질 때까지 춤을 추었다. 그가 쓴 하회탈의 웃음이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 웃음은 경근이가 소원하던 인간의 날개였다. 가장 아름다운 자유였다.
* 경기대 교육대학원 졸, 전)용인 서원고등학교 교장, 경기문학인협회 회장 역임, 장편소설 햇살 만들기(전 3권)로 경기도 문학상 수상, 중편소설 다리로 호국문예 국방부장관상 수상, 단편소설 웃음으로 경기문학인상 대상 수상, 수필 고향을 위하여로 농촌문학상 대상(농림식품부장관상) 수상, 한국농촌문학상 심사위원장, 제2회 홍재문학상 수상, 저서 : 시집, 동화집, 수필집, 장편소설『햇살 만들기』등 20여 권, 현재 <한국영농신문> 논설위원‧문화부장.
금강은 바다로 흐르지 않는다 ⑧
이 대 영
▣ 망우초 피어나다
투명한 불꽃이다. 사마산을 넘어 장터 들판을 가로질러 타오르는 폭염은 강 씨네 논에도 양 씨네 밭에서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논에는 품앗이를 통해 심어 놓은 벼들의 성장통으로 요란하다. 아이들은 개구리를 잡느라 논에서 살다시피 하고, 어른들은 양 씨와 강 씨 댁을 오가며 일손을 돕기에 바쁘다.
강 씨 어른 뒷산에서부터 피어 오른 망우초는 고 씨 할머니, 옥희네, 부길네집 뒤란에 이르기까지 득달같이 번져나가고 있다. 하나같이 노랑, 붉은색으로 단장을 하고 까치발로 서성이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멀리 떠나간, 아니면 영원히 떠나간 사람들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들의 자태로 역력히 묻어난다. 전쟁과 가난으로 인한 근심과 걱정을 없애주려는 듯 이리 저리 몸을 흔들며 나팔을 불어대는 모양새는 그동안 죽어간 이들을 위무하는 듯해 짠한 마음까지 든다.
이 행수가 서른아홉에 맞이한 전쟁은 불혹의 나이를 넘어 어느새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정전이 임박해서인지 7월 중순에 이르자 세찬 바람과 함께 비가 일주일 내내 내렸다. 대부분 소작농인 마을 사람들은 논에 나가 물 떼기에 신경을 쓰거나 무너진 논둑을 보수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아낙들은 밭둑이나 공터에 있는 밭에 나가 게딱지처럼 달라붙어 호박이며, 가지, 오이 등을 가꾸며 목숨 줄을 동여맸다.
공주에서 1일과 6일에 서는 오일장이 살아난 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전황파악의 지연, 빨치산 잔당들의 활동으로 시장은 간간히 명맥만 이어갔다. 무엇보다 제민천 사이에 놓인 대통교 주변에 형성되었던 채소전, 생선전, 잡화전의 상인들이 나타나지 않아 더 한산했다. 더욱이 제민천 둑을 따라 형성되었던 가축시장이 서지 않는 것은 시장경제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시골에서 나온 사람들이 가축을 팔아 그 돈으로 장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구입하고 막걸리집이라도 들러야 시장이 활기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간간히 공주 인근부락에서 나온 병아리, 강아지, 토끼, 고양이와 같은 동물들이 거래되었고, 우시장은 여전히 서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한 넉 달 후, 연합군이 공주를 탈환하고, 9월 말에 논산을 수복하자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북진하던 미 제25사단이 공주를 점령하지 않고 논산을 경유하여 바로 대전으로 향했던 까닭에 읍내 사람들은 전황을 체감할 수 없었다. 더욱이 지리산에서 덕유산, 대둔산, 계룡산, 무성산으로 이어지는 빨치산들의 유격활동으로 주민들은 여전히 몸을 사려야 했다.
읍내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부락민들은 전황에는 민감했으나 정확한 소식을 듣기는 어려웠다. 공주 장날, 이 행수가 산성시장을 두리번거리다 우연히 구입한 트랜지스터라디오는 난리 통에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진 지 오래였다. 대부분의 소식은 읍내에나 나가야 들을 수 있었다. 몸이 아파 불가피하게 침을 맞거나, 약을 지으러 읍내에 다녀 온 사람들은 제사당한약방이나 식당에서 들은 이야기를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양 만나는 사람마다 들려주었다. 전황 소식은 대부분 해외방송에 의존해야 했다. 라디오를 소지한 사람들은 미국이 운영한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한국어방송과 미군이 운영한 유엔군총사령부방송(Voice of United Nations Command), 그리고 일본의 NHK 한국어방송을 들었다. 서울중앙방송조차 북한군에 점령 되자, 부산·대구에서의 피난방송이 가동되기 전까지는 지방 소재의 군청이나 읍면 소재지 관청의 공보지나 피난민들의 입소문에 의존해야 했다.
읍내에서 소문난 제사당한약방은 무면허 업소였지만 다행히 라디오 수신기가 있었다. 늙은 약사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얻은 정보는 다음날이면 이웃을 통해 면 소재지까지 전해졌다. 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시작되고, 국군이 평양을 거쳐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격했다는 소문이 돌 때만 해도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이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투가 2년이 더 지속되는 동안 전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느 전선 할 것 없이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전투지에서는 군종 사제 주도로 종교행사가 진행되었고, 탄피는 물론 포탄 껍질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능선 아래에서 위문공연도 열렸다.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시위와 폭동으로 난장판이 되는 날에도, 부산 동아극장에서는 상이군인 합동결혼식이 열렸으며, 국회에서는 개헌안을 놓고 쌈박질이 계속되고 있었다. 살아 있는 자들은 여전히 이권 다툼과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용봉리 육동 마을 주민들은 흥남부두에서 미 해병 1사단, 미 육군 7사단과 한국 육군 1군단 휘하의 수도사단과 3사단의 병력 10만 5천명, 1만 7천5백대의 차량, 35만 톤의 전쟁 물자를 철수하는 작전이 있었는지, 서울이 중국인민지원군에게 재점령되었는지도 모르게 살았다. 그럼에도 국민방위군 주요 간부들이 수억 원의 예산과 물자를 부정 착복하여 방위군 수 만여 명의 아사자와 병자를 발생시켜 사형 당했다는 흉흉한 소식은 전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이 끝났다는 믿지 못할 소문이 들렸다. 그 소문은 현실이 되었다. 38선이 사라지고 휴전선이 생긴 것이다. 3년간의 전쟁으로 수많은 목숨들이 이름 모를 풀숲이나 흙속으로 사라졌다. 국군 62만 명, 유엔군 16만 명, 북한군 93만 명, 중공군 100만 명, 민간인 250만 명, 이재민 370만 명, 전쟁고아 10만 명이라는 엄청난 희생자를 낳았다.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참으로 지루하고 곤혹스런 나날이었다. 게다가 이 행수를 비롯한 부락민들은 하루도 끼니 걱정을 안 한 날이 없었다. 봄이 되면 푸르게 돋아나는 나물은 큰 도움이 되었다. 아이들은 산에 올라 도라지와 잔대도 캐어 먹고 묘지에서 씨름이나 칼싸움을 하다 싫증이 나면 달짝지근하게 배동 오른 삘기도 뽑아 먹었다. 비록 도장골이나 갓바위 밭둑에까지 가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으나 찔레나무 순은 달착지근하고 부드러워 인기가 있었다. 여름에는 감자를 주식으로 하고 비만 오면 얼기미를 들고 냇가에 나가 고기를 잡았다. 아이들은 감꽃이 피기 시작하면서 과일 나무 아래 붙어살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뽕나무 오디는 최고의 간식이었으며, 덜 익은 보리와 생밀, 옥수수 등을 먹고 다녔다. 가을에는 무, 배추, 고구마, 각종 열매를 먹으며 견뎠다. 다행히 추수철에는 통통한 개구리나 뱀, 메뚜기가 풍성해서 가장 풍요로운 계절이었다. 수박과 참외가 먹고 싶으면 그룹을 지어 보흥리나 송암리까지 원정을 가 서리를 하며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겨울에는 고구마와 시래기가 주식이었다. 아니 주식이라기보다는 유일한 먹거리였다. 가장 큰 횡재는 눈 덮인 산에 놓은 올무에 토끼나 노루 등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이웃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마을잔치가 이루어지는 날이었다. 전란으로 궁핍한 생활의 이어짐에도 마을 사람들은 가족이 무탈하게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공수원 육동과는 다르게 인근 지역에서는 인명피해가 속출했고 그 후유증 또한 심각했다. 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 점령기인 7월과 11월 사이에 논산·서천·아산·공주·당진·청양지역에서 지역주민 35명이 인민군, 내무서원, 지방좌익 등에게 희생되었다. 또한, 5명이 인민군, 내무서원, 지방좌익 등에 의해 강제연행 되기도 했다. 논산지역에서는 4명이 지방좌익 등에 의해 구타 및 고문 등의 상해를 입었다. 이들을 가해한 주체는 인민군, 내무서원, 지방좌익 등으로 희생자들은 이장활동을 하였거나, 우익단체 활동 및 그 가족, 그리고 부농, 공무원 경력자 등이었다. 강제연행사건의 피해자들은 의용군 징집(徵集)이 목적이었으며, 상해사건의 경우 우익집안 사람이라는 이유로 구타 및 고문 등의 상해를 입었다. 공수원 사람들도 인명 피해를 비켜갈 수는 없었다. 이 행수와 남 서방은 묵방산으로 부역을 나간 행위로 공주 경찰서까지 끌려가 초죽음을 당했다. 다행히 피난길에서 돌아 온 윤 교도소장의 뒷배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윤 소장의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던 강 씨 어른이 노구를 이끌고 읍내에 나가 구명운동을 한 끝에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이 행수의 세 아들 역할도 컸다. 경찰을 실은 트럭이 마을 입구로 다가서자 발 빠른 광재와 오 씨는 마을 뒷산으로 줄행랑을 쳤다. 마을 초입에 있는 미나리 논에서 일을 하던 이 행수와 남 서방은 그들을 보고 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리고 숨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이 행수가 남 서방과 함께 트럭에 끌려가다시피 옮겨지자 울며불며 차에 매달린 것은 근처에서 놀고 있던 이 행수의 아들 삼형제였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들고, 아이들이 난리를 치자 경찰들도 당황했는지 아이들까지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 면소재지 부역자들 몇몇과 동행한 이 행수는 다른 사람들보다 제일 먼저 치도곤을 당했다. 부역자들을 끌고 왔던 순경들은 과장에게 구둣발로 정강이뼈를 걷어차이는 수모를 당했다. 이 행수의 아들들이 경찰서 출입문까지 따라와 대성통곡하는 소리로 그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과장실을 나온 순경들은 다리를 절면서도 곧장 유치장 문을 열고 이 행수를 개잡듯이 구타했다. 옆에 있던 남 서방이 온몸을 던져 막아보려 했지만 그들의 화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한바탕 소동이 인 후 유치장 안은 그야말로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공포가 지속되었다. 이 행수의 세 아들은 경찰서 밖으로 쫓겨났지만 아버지를 부르며 우는 소리는 밤새 끊이지 않았다. 이 행수 역시, 밤새도록 거친 신음을 토해내어 주변 사람을 짜증나게 했다.
이튿날 아침, 옥분이는 아껴두었던 밀가루를 꺼내 쑥을 버무려 찐 후, 검정색 보자기에 담았다. 어제 낳은 달걀도 다섯 개 삶아 소금과 함께 챙겼다. 아침 일찍부터 황 씨와 오 씨도 집으로 찾아와 마루에 앉아 기다리다 동행했다. 집을 나서기 전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언쟁은 버스 안에서도 이어졌다. 이들의 싸움은 ‘금년에 품삯이 오를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일 것인가, 또 오르면 얼마나 오를 것이며, 남녀의 품삯은 어느 정도면 적당한 가’로부터 시작되었다. 신작로를 달리는 버스가 덜컹대면서 이들의 목소리도 절로 커졌다. 얼마나 시끄러운지 버스 안내양이 다가가 귀를 후비는 시늉까지 하고 갔다. 참다못한 버스기사가 차를 세우고 ‘어느 동네서 왔느냐’고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잠잠해졌다.
옥분이가 아버지를 따라 몇 번 읍내에 가본 적은 있지만, 오늘처럼 경찰서를 찾아가기는 처음이었다. 황 씨와 오 씨의 동행이 없었다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전란으로 절반 이상이 파괴되었던 금강철교도 지난 해 복구되어 장기나루에서 나룻배를 탈 일은 없었다. 산성동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반죽동까지는 제민천을 따라 30여 분을 걸어야 했다. 경찰서는 우체국을 지나 봉황산 아래 자리하고 있었다. 높이가 147m인 이 산은 봉우리가 수려하여 마치 봉황새가 알을 품은 형국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했다. 사람들은 능선의 뒤쪽은 봉산, 앞쪽은 황산이라 부르고 있었다. 옥분이는 아버지를 따라 장에 나왔을 때 봉우리가 너무 예뻐 산의 이름을 물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날 장에서 산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아버지와 동생들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다.
경찰서 근처에 이르자 담 밑에서 쪼그리고 있는 세 동생이 눈에 들어왔다. 옥분이 동생들을 부르자 그들은 일제히 일어나 멀뚱히 바라보다 달려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세 명 모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경찰서는 아침이라 그런지, 정문 양 옆에 두 명의 경비병만 보였다. 옥분은 경찰서 담장 밑에 보따리를 풀고 동생들에게 아침밥을 먹였다. 옥분은 꾸역꾸역 음식을 삼키는 동생들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물도 챙겨오지 못했음을 뒤늦게 발견하고 자책했다.
황 씨와 오 씨는 보초를 서는 경찰에게 아침 일찍 온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으나, 단칼에 출입을 저지당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불쌍하니 당장 데려가라는 말만 반복했다. 오 씨가 경찰서에 근무하고 있는 육촌 조카의 이름을 댔으나 그런 사람은 모른다는 핀잔만 들었다. 결국 아이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야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세 아들은 막무가내로 돌아 갈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다. 아예 멀리 골목으로 달아나 찾을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일행은 이들을 남기고 돌아서야 했다. 경찰서 담장 끝자락에 이르자 갑자기 황 씨가 돌아서서 경찰서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 행수님! 공수원 새말 황 서방이 왔다 가유! 힘내시고 꼭 돌아와야 해유!, 그리구 남 서방! 너 나보다 먼저 죽으면 디질 줄 알아! 알았냐!”
앞서가던 오 서방이 놀라 뒤돌아보았을 때, 이미 황 서방은 앞서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옥분이도 돌아보았을 때, 멀리 골목에서 빼꼼히 머리를 내민 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옥분이가 손짓으로 오라는 시늉을 하자 그들은 모두 손을 내저었다. 동생들을 두고 떠나는 옥분의 눈에는 달기똥만한 눈물이 연신 흘러내렸다.
옥분이 공주경찰서에 다녀온 지 이틀이 지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새벽에 이 행수가 돌아온 것이었다. 그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영락없이 거지같은 몰골이었지만 아들들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돌아왔다. 전날 강 씨 어른이 노구를 이끌고 남 서방 부인을 대동하고 공주에 다녀 온 후였다. 강 씨가 윤 교도소장을 직접 대동하고 경찰서에 다녀온 것이 곧 결과로 이어졌다. 시시때때로 울어 젖히는 아이들의 괴이한 울음이 유치장은 물론 서장실까지 들려 모두가 난감한 상황이기도 했다. 교도소장의 방면 요청을 받아 들여 서장이 행수 하나쯤 눈감아주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더욱이 국회의원에 야심이 있는 그로서는 지역구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은근슬쩍 풀어주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강 씨 어른은 서장이 만족할 만큼 충분한 사례도 한 후였다. 그런 노력이 있어서인지 이 행수가 방면된 다음 날, 공포에 질려있던 남 서방도 자정 무렵 풀려났다. 그와 함께 유치장에 수감되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교도소로 이감되기 직전이었다.
경찰서에 잡혀갔던 사람들이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 모두 강 씨 어른 댁으로 달려가 그 덕을 입이 마르도록 칭송했다. 그리고 다시 이 행수 집으로 내려와 그를 위로하고 집에 오는 사람마다 아이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살아 돌아왔다고는 하나 이 행수와 남 서방은 얼마나 모질게 맞았는지 안방에 자리를 깔고 누워버렸다. 남 서방은 이 행수에 비해 더 맞았는지 전혀 운신을 못했다. 이 행수는 독한 소주도 내려 마시고, 옥분이가 독안이골까지 가서 지어 온 탕제도 달여 마신 덕에 며칠이 지나자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남 서방댁이 제일 먼저 처방한 것은 똥물이었다. 옥분이가 이 행수를 위해 마련한 독한 소주와 탕약도 조금 보내왔지만 양이 충분하지 않았던지 별 효험이 없었다. 그래서 예전 친정어머니에게 들었던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친정어머니의 친척 중에 해미읍성 밖에 살며 매품팔이를 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읍성에서 곤장을 맞고 돌아 온 날에는 아내가 준비해 놓은 똥물을 마시고 늘 원기를 회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공수원에서도 오래전부터 사람 똥과 쌀겨, 감초가루 등을 넣어 만든 탕약을 ‘금즙’이라 하며 감기와 만성기침 등의 치료에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법을 몰라 고민하던 중에 마침 인삼을 팔러 마을에 온 노파의 도움으로 실행에 옮겼다. 노파와 남 서방댁은 톱을 들고 허 대장 집으로 내려갔다.
장독대 주변에는 대나무들이 굵고 실하게 자라고 있었다. 남 서방 댁은 가장 굵은 대나무를 베어 집 마당으로 끌고 와 그것을 마디마디 잘랐다. 위아래 마디가 막히게 잘라야하기에 마침 이 행수 집으로 가던 광재를 불러 도움을 청했다. 광재는 자기만 산으로 도망쳐 무사한 것이 미안했던지 이 행수와 남 서방 집을 하루에도 서너 번 씩 드나들며 안부를 물었다. 그러면서도 언제 부름을 당할지 몰라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광재는 노파가 주문하는 대로 대나무의 바깥쪽 푸른 껍질을 벗겨냈다. 노파는 똥즙을 만들어 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 번째 방법은 대나무 두 마디 가운데 윗마디에 감초를 넣어 봉하고, 아랫마디만 똥통에 꽂아 두었다가 한 달 뒤 감초만 꺼내어 바짝 말려 쓰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감초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남 서방이 먼저 죽을 판이었다. 그래서 똥통에 넣어 대나무통 안에 ‘즙’이 스며드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노파의 말대로 긴 새끼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대나무를 매달고 중간 중간에 길고 작은 돌도 매달았다. 그리고 이것을 깊은 똥통에 사흘간 넣었다가 똥물이 대나무에 스며들면 건져내어 쪼갠 다음 물을 받아 마시면 되는 것이었다. 노파는 자기 할 일은 다했다는 표정으로 수삼 한 채를 마루 위에 올려놓고는 떠났다. 돈이야 다음에 와서 받으면 그만이었다. 그가 떠난 후, 문제는 어느 똥통에 넣어야 약효가 큰가 하는 것이었다. 마을 어디에도 깊고 큰 똥통은 없었다. 대개가 간장독 크기의 항아리들을 땅 속에 박아 사용하고 있었다. 결국, 광재가 대나무통을 어깨에 짊어지고 장터로 향했다. 차부집 아니면 주막집 중 한 곳에 넣고 오겠다며 남 서방에게는 며칠만 더 견디라고 소리쳤다.
이틀이 지난 후, 광재가 아침 일찍 장터주막으로 내려가 대나무통을 걷어 왔다. 도랑을 건너오다 두어 번 물에 헹구었다고는 하나 새끼줄에서 똥즙이 흘러 나왔다. 광재는 대나무통을 마른걸레로 한 번 더 닦은 후, 남 서방 댁에게 조금 큰 양재기와 끌과 망치를 달라고 주문했다. 그리고는 양재기 안에 대나무를 세워 어렵게 쪼갰다. 그러자 안에서 누르스름한 액즙이 흘러 나왔다. 이를 모아 다시 모시에 거르는 일을 반복하여 겨우 두 종자기 정도의 물을 받아냈다. 남 서방은 똥즙은 나중에 더 받아도 된다며 한 종지기는 이 행수 집으로 가져갔다. 어렵게 이부자리에서 일어 난 남 서방은 냄새가 나서 죽어도 못 먹는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이내 자리에 누워 아내를 외면했다. 남 서방댁은 “아예 아프다는 소릴 말든가, 죽어버리든가 해!”라며 아픈 속내를 드러냈다. 벽으로 얼굴을 돌린 남 서방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소주병을 들고 다시 나타난 광재였다. 그는 행수 형님은 맛있게 드셨다며 남 서방을 억지로 일으키며 웃어댔다. 그리고는 소주를 대접에 따르고 그 위에 똥즙을 부은 뒤 손으로 휘휘 저었다. 그리고는 남 서방댁에게 마늘을 갖다 달라고 한 뒤, 남 서방의 손에 대접을 쥐어 주었다. 남 서방도 거절할 수 없었는지 눈을 질끈 감고 똥즙을 마셨다.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기도 전에 남 서방댁은 마늘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제야 광재와 남 서방 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행수는 이미 흰 개똥을 말려 불에 태운 것을 술에 조금씩 넣어 복용하고 있었다. 이 행수는 개똥이 어혈을 풀어주고 해독작용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예전에 의학서에서 확인한 적이 있었다. 똥즙의 약효 또한 모르던 바는 아니었다. 이는 성질이 차가워 열 때문에 생기는 모든 독과 부스럼, 균독 등을 치료하고, 어혈을 풀어 피를 맑게 하는 효능이 있어 민간요법으로 가끔 쓰이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똥즙을 음용할 수 없었던 차에, 광재가 특별히 형님을 위해 남 서방에게서 뺏어 온 것이라는 말에 가져온 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더욱이 그냥 똥물을 걸러낸 것이 아니라 대나무 통즙이라는 말에 마지못해 소주를 섞어 마셨던 것이다. 정말, 똥즙의 효험이 있었는지, 사흘이 지나자 남 서방도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을 걸을 수 있었다. 이 행수 또한 멍 자국이 흐려지고 상처에 딱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치료를 하려해도 치유되지 않는 전쟁의 상처는 마을 곳곳에 남아 있었다.
우선, 폐병쟁이 고 씨 할머니집이 폐가가 되었다. 산막에 있던 아들이 전쟁 통에 시름시름 앓다 죽은 후에 고 씨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또한 피난을 떠났던 양 씨 가족은 돌아왔지만 양 씨 부인과 그의 막내딸은 추풍령 인근에서 인민군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양 씨 일가가 돌아 온 후 가장 바쁜 것은 허 대장이었다. 허 대장은 조석으로 물지게를 지고 드나들었고, 마을 사람들 또한 전소된 양 씨 기와집을 짓는 일에 참여했다. 집터 깊숙이 화수분을 숨겨두었는지 양 씨 가족들은 여전히 집을 짓고 밥을 지어 먹었다. 쌀과 부식은 주로 부길이 아버지를 시켜 공주에서 사오게 했다. 부길이 아버지가 공주 장터에서 돌아 온 날이면 이웃집 허 대장과 오 씨, 황 씨 등이 그 집에 헛기침을 하고 드나들기 일쑤였다. 부길이 아버지는 공주 장까지 걸어서 왕복하며 양 씨로부터 받은 차비를 아껴 소주를 사오는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양 씨가 나누어 주는 부식은 덤이었다.
자기들 세상이 오면 우성면장은 떼어 논 당상이라며 입을 실룩이던 오양실 째보는 산청과 함양에서 올라 온 빨치산 일행에 합류하여 마을을 떠났다. 상황이 급박했는지 기르던 돼지도 몇 마리 남기고 떠나 뒤늦게 그를 잡으러 온 경찰들의 몫이 되었다고 한다. 이웃집 오식이 또한 행방이 묘연했다. 지게를 지고 논에 나간 후 경찰들이 들이 닥쳤고, 낌새를 챈 그가 어디론가 달아난 것이라고들 했다. 토굴이나 산 속에서 움막을 짓고 생활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마을로 내려와 다시 명줄을 이어갔으나 살림은 더욱 핍박해져 갔다.
공주 우체국장과 교도소장도 목숨을 부지했다. 다만, 우체국장의 노모는 전쟁 이듬 해 겨울, 폐렴으로 앓던 중 깊은 잠에 빠져 가래 끓는 소리를 여러 번 하다가 숨졌다고 했다. 사진관, 양복점, 정육점 식구들도 각자의 사연을 안고 읍내로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했다. 죽미령전투에서 시작하여 금강 방어선과 대전의 용운동 일대 방어선에서 사력을 다했던 24사단 병사들은 낙동강까지 후퇴하는 수모를 당했다. 끝까지 살아남은 병사들은 중공군 참전과 함께 전선에 투입되기도 했지만, 1952년 1월 23일이 되어 40사단과 임무를 교대했다. 딘 소장은 36일 동안 산야를 헤매며 진안까지 내려가 주민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의 신고로 상전면 운산리 마을에서 북한군 포로가 되었다. 그 후, 북한에서 수용되었다가 1953년 9월 4일에 이르러서야 포로교환으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낯선 땅을 지나가며 남긴 전쟁의 상흔은 이제야 망우초의 피어남으로 위무 받고 있었다.
▣ 정 보살
쇠와 가죽의 어울림이다. 높고 날카로운 소리와 낮고 부드러운 소리의 조화, 짧게 마디지는 소리와 긴 여음이 어우러져 어둠을 뚫고 나간다. 구름이 몰려오는 소리를 내다가 바로 바람이 일어 ‘우웅∼’ 하는 소리를 낸다. 쇳소리는 하늘, 가죽소리는 땅을 상징한다고 했던가? 하늘과 땅 사이에 정산댁이 자리를 잡고 앉아 하늘과 땅을 부르고 있다. 그는 정산댁이 아니라 정 보살이었다. 보살은 징과 북을 두드리며 천지인의 조화를 부르고 있었다. 부드럽고 낮은 북 장단에 경이 얹혀 마을사람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며 장단을 탄다. 그러다가는 세상의 온갖 잡것들을 일깨우는 징소리 장단에 놀라 사람들을 한 발짝 물러서게도 한다. 어느덧 정 보살도 신을 어르고 달래며 으름장을 놓는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정 보살의 강한 신력이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 보살은 대박리가 고향이었다. 공수원에서 송암리를 지나 여우고개를 넘으면 목면 안심리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모퉁이 하나를 돌면 바로 정산이다. 정산에서 대박천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대박리가 나오는데 그가 태어 난 곳이다. 대박리는 한박산 아래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한박골, 대박골 또는 대박실이라 불렸다. 한박산은 ‘이 지역의 흥망이 산 가운데 있다’ 하여 마을에서 신성시하던 산이었다. 또한, 한박실의 지형이 마을 입구만 빼놓고는 산으로 꽉 막혀 큰바가지 형국과 같다 해서 사람들은 한박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박산 아래에는 두물, 부엉골, 신골, 골뜸, 큰 고랑, 비골, 가막재 등의 마을이 있었는데, 정 보살은 마을의 우측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법당골에서 태어났다. 대박리 주민들은 마을의 맨 위쪽에 있는 대박저수지와 법당골 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이용해 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었다. 또한 이백여 미터의 구릉지를 개간하여 고추농사를 짓고 있었다. 대박천의 수량이 풍부하고 마을 초입과 큰골에는 넓은 논이 자리하고 있어 이곳 사람들이 끼니를 굶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법당골에 있는 두어 채 농가는 구릉 밑에 달라붙어 밭을 일구며 살았기에 늘 생활이 곤궁했다. 그러기에 주로 큰골에 나가 일한 품삯을 쌀로 받아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외부와 차단되어 부락공동체 의식이 강한 이곳 사람들은 샤머니즘은 물론, 불교신앙이 강했다.
대박리 주민들은 매년 정월 열흘이면 산신제와 장승제를 지냈다. 산신제는 신골, 골뜸, 큰골마을에서 동답으로 거둔 곡물로 지냈다. 장승제는 산신제를 지낸 후 마을 입구에 있는 선돌로 자리를 옮겨 지내곤 했다. 한박산에도 산신당이 있어 부엉골과 가막재에서 제를 지냈다. 법당골에는 심심사라는 작은 절이 있었는데, 그곳은 정 보살의 어린 시절 놀이터였다. 심심사에는 60대의 승려가 홀로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마을의 대소사에 관여하며 주민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정 보살이 성인이 되기까지 이곳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조실부모한 그는 부여에서 외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굿에 호기심을 갖고 흉내 내기를 좋아해 할머니에게 근심을 안겼다. 잠시나마 절밥을 얻어먹으며 학습한 행동이었다. 딸과 사위, 그리고 남편을 자기보다 먼저 하늘로 올려 보낸 노인은 밤낮으로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천지신명에게 치성을 드리며 망자의 명복을 빌었다. 이런 모습에 익숙해진 정 보살은 여섯 살부터 외할머니 옆에 붙어 두 손 모아 치성을 드렸다. 그리고 마을 안택굿을 구경한 후에는 법사나 보살이 했던 행위들을 기억했다가 집에 돌아와 그들을 흉내 내곤 했다. 바가지와 양은그릇을 수저로 두드리며 흥얼거리다 할머니에게 매를 맞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의 외할머니가 정 보살에게 심한 매질을 한 것은 그의 죽은 어머니와 연관된 것이기도 했다.
정산 읍내에 살던 사돈댁은 기독교 신앙을 가져 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며느리에게 다가 온 신병은 사탄이 집 안에 든 거나 다름없었다. 결혼을 한 지 일 년이 지나도 부부에게 아이가 없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오후가 되면 두통이 시작되어 날이 어둑해지면 신열로 몸살을 앓는 날이 반복되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다가도 다리에 힘이 풀리고 헛것이 보이며 넋이 나가곤 했다. 아이가 없는 것도 근심을 더했다. 더욱이 남편이 하는 사업도 번번이 실패했다. 여인은 이미 자기가 신병을 앓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댁식구들의 독실한 기독신앙과 침체된 집안의 분위기로 내색을 못하고 있었다. 남편은 아내의 건강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병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근래에 들어 여인은 반복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저녁에 신병으로 통증이 오면 어느덧 그의 앞에 굿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 앞에는 무당이 서 있고 그 무당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무악기가 놓여 있었다. 무당의 정면에는 북과 징이 놓여 있고, 그 좌우로 각각 꽹과리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무당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리고 이미 준비가 된 사람처럼 그는 무구 앞에 정좌를 하고 북을 두드리며 경을 읽고 있었다. 그러자 대잡이도 없는 신장대가 스스로 허공으로 솟구쳐 이리 띠고 저리 띠며 요동을 쳤다. 그리고는 갑자기 산신령의 얼굴을 한 호랑이가 그녀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그를 혼절시키곤 했다. 그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일어나면 온 가족이 그의 곁에 붙어 질린 얼굴들을 하는 일이 늘어났다.
그녀는 보살들이 모여 사는 보릿고개나 부여에 살고 있는 김 법사에게 한 번만 데려다 달라고 가족들에게 청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곳에 가면 내림굿을 받을 것을 알기에 시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남편이 그를 업고 간 곳은 읍내 교회였다. 성경을 들려주고, 찬송가를 부르고, 악귀를 몰아내려고 늙은 목사가 무진 애를 썼지만 그녀는 교회에서 또 혼절하고 말았다. 그 날 집에 돌아 온 후, 여인은 자정 무렵이 되자 남편에게 어디선가 방울소리가 들린다는 말을 하더니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아내에게 지칠 대로 지친 남편은 더 이상 아내를 따라나설 힘도 없었다.
남편은 아내의 가출과 이어지는 사업실패로 시름시름 앓는 날이 잦아졌다. 그러더니 몇 달 후, 화장실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아지랑이가 아침햇살을 받아 피어오를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뇌경색으로 죽었을 거라고도 했고 심장마비였을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여인이 살던 집을 나가 방울소리를 따라 도착한 곳은 법당골의 심심사였다. 자정 무렵 잠자리에 들려던 스님을 깨운 것은 법당문 여는 소리였다. 헛소리까지 들린다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불심을 자탄하던 그에게 다시 들려온 것은 여인의 불공 소리였다. ‘누가 이 밤중에 절에 찾아 왔을까’ 하는 궁금 중에 그는 법당으로 향했다. 만삭의 보름달이 마당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석탑을 흔들고 있는 중야였다. 열린 법당문 사이로 한 여인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 왔다. 그녀는 쉼 없이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스님은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어느 사연 있는 여인이 절에 찾아와 속내를 실컷 풀어 놓은 후에 스스로 돌아가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스님이 아침 불공을 드리려고 법당문을 열었을 때, 여인은 그때까지 몸을 허문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마당을 쓸고 공양 준비를 마친 후에야 법당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은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모아 공손히 합장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해우소에 들린 후 이미 스님이 차려 놓은 조찬상 자리에 다소곳이 마주 앉았다. 여인에게는 속세의 질긴 인연들을 걷어내는 아침 밥상이었다.
정 보살이 태어난 것은 그의 어머니가 심심사에 들어 온 지 일곱 달 열흘이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부처님께 조석으로 공양을 드린 덕분인지 머리가 맑아지며 건강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시댁의 불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이곳 절에 온 후로는 신기마져 사라지고 있었다. 밤잠을 못 이루게 했던 악몽이나 가슴을 파고들던 호랑이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굳이 신 내림을 하지 않아도 몸이 회복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은 이 모든 것이 산신각에 모셔둔 산신령의 음덕이라 했다. 절 뒤에 지은 산신각은 묘하게도 그의 시댁이 있는 읍내를 굽어보는 위치에 있었다. 거기에 모신 산신은 백발에 수염이 있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모습으로 호랑이와 함께 있었다. 산신각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옷에 땀이 흥건하도록 절을 올리고나면 온 몸이 날아갈 듯한 개운함을 느꼈다. 그러면서 산 아래를 굽어보면 온 누리가 자신의 발밑에서 꼼지락거리며 자신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내 없이 찬송가를 들으며 요단강을 먼저 건넜을 남편에 대한 미안함에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두 사람이 걸어가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정 보살이 태어난 것은 법당 옆에 딸린 작은 방에서였다. 정 보살의 어머니는 절에서 스님의 시중을 들며 생활한 지 석 달이 지나면서 자신의 몸에 변화가 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생리가 끊기고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것이다. 신병으로 허약한 중에도 입덧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워낙 경황이 없었던지라 임신한 사실도 모르고 절에 들어 온 것이었다.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 또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도 없이 절에 들어와 있는 몸으로, 그의 임신 사실이 밖에 알려지게 되면 자칫 스님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고 마냥 숨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스님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그녀 스스로 말할 때 까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산달이 다가오자 그녀는 스님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절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고 시댁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친정어머니에 의탁하는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도로 신병이 재발하지 않을까 하는 근심이 앞섰다. 그녀에게는 하산하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그의 고민을 알고 있던 스님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절 아래에 민가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 부탁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아이 셋을 양육하여 분가시키고 홀로 살고 있는 노파가 살고 있었다. 그 노파는 간간히 절에 공양을 드리러 왔었기에 그녀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스님은 당장 알아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절 아래로 내려갔다.
산통이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산모는 몇 번이나 혼절을 했다가 깨어났다. 노인은 비록 사생아를 둘이나 낳았지만, 자녀 다섯을 무사히 낳아 모두 출가시킨 자궁이 튼튼한 여인이었다. 그는 밭에서 일을 하다가 산통을 느껴 방으로 기어와 여섯째 아이를 낳은 적도 있었다. 노인은 가위로 아이의 탯줄을 끊고, 목화솜으로 피를 훔치고, 솥에 물을 끓여 아기 목욕을 시키는 일까지 스스로 했었다. 그러기에 스님의 부탁을 받고 자신 있게 산파 역할을 수락했지만 일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았다. 우선 초산인데다가 산모의 건강상태가 허약했고, 산통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걱정이 더해갔다. 드디어 일곱 시간의 긴 산통 끝에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자주 짧은 울음이었다. 여자 아이였다. 산모는 해산 후 깨어나 아이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어린 아이를 챙긴 것은 결국 청양의 망월산 아래에 살고 있던 그의 외할머니였다. 몇 달간 산파의 손에 자라던 정 보살은 스님의 노력으로 외할머니 품에 안기게 되었다. 친가에 가서 스님이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지만, 그들은 아들이 죽은 마당에 아이의 친자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양육을 거절했다. 결국 스님이 외가를 수소문하여 아이가 망월산 아래로 오게 된 것이었다. 그의 나이 세 살이었다.
외할머니는 손녀를 데려오긴 했어도 ‘딸이 거부한 신 내림을 손녀가 받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무탈하게 잘 자라주고 있었다. 읍내에 있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활달한 성격으로 늘 친구들을 몰고 다녔다.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하지 못한 정 보살은 대처로 나아가 돈을 벌어볼까도 생각했으나, 외할머니가 노환으로 몸져눕자 병시중을 들며 집안일을 도왔다. 집에 있는 동안에도 평소 외할머니가 하던 대로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조석으로 조상신께 치성을 드리는 일은 거르지 않았다. 특별히 신병이 있다거나 몸이 아픈 곳도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몸은 가을이 되자 점점 단풍잎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병상에서 일으키게 한 뒤, 손녀에게 분향리 마을로 내려가 새로 지은 집에서 굿을 하고 있는 박 보살을 모셔오라고 했다. 그녀는 부여군 마정리에서 전 법사의 안택굿 대잡이로 초대되어 굿을 돕고 있었다. 박 보살과 외할머니와의 인연이 어느 때부터 이어지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는 이따금씩 외할머니가 정성들여 제수상과 시루떡을 마련하여 집으로 초대하면 장독대에서 태을보신경이나 지신경, 안택경 등을 읽었다. 그런 후에는 산신소지와 당산소지를 하늘 높이 올렸다. 외할머니와 정 보살에게도 각각 소지를 올리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오십이 넘어 어깨가 아프고 밥을 못 먹는 신병을 앓다가 내림굿을 받았다고 했다. 전문적으로 법당을 차리기보다는 점을 보아주고, 이따금씩 청양이나 정산에 사는 법사들이 부르면 그들과 호흡을 맞춰 안택굿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정 보살이 분향리 마을로 내려가기도 전에 전 법사가 두드리는 북과 징소리가 온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그가 소리 나는 집으로 다가가자 바깥굿이 이미 끝나고 안굿으로 성주신을 모시기 위해 성주풀이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고저장단의 무악과 경의 어우러짐에 혼을 빼앗기고 있었다. 박 보살은 성주대를 잡고 공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 법사의 북채에 힘이 들어가자 박 보살의 성주대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는 공수를 받지 못하고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전 법사의 경 읽는 소리가 두어 번 더 높아졌음에도 성주대는 조금 떨리다가 이내 수그러들곤 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처하자 박 보살은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주변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둠을 뚫고 달려드는 그의 서슬 퍼런 눈빛에 사람들은 오금을 저렸다. 사람들마다 영육을 훑어 내리는가 싶던 그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바로 사람들 틈에 끼여 있는 정 보살을 향한 것이었다. 그 강열함에 이끌려 정 보살은 굿판 한 가운데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마치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손을 내미는 박 보살에 이끌려 그는 성주대를 움켜잡았다. 그러자 성주대가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그 흔들림의 세기에 정 보살의 다리가 공중으로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성주대를 잡고 가까이에 있는 집주인에게 다가가 다리에서 머리끝까지 잡신을 물리치려는 듯 털어 내렸다. 그리고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있는 주인의 가족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는 집밖으로 달려 나가 동티가 날만한 장소를 털고 다녔다. 마지막으로 부엌과 장독대를 다녀 온 뒤 대청마루에 올라가 대들보를 턴 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신기가 발동했다며 놀라워했다. 전 법사나 박 보살 역시 신기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간혹 내림굿을 하는 장소에 구경을 왔다가 무악과 경이 어우러지는 순간 신기가 발동하는 경우는 보았어도 성주대를 보살 대신 물려받아 접신하는 경우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박 보살은 마루에 털썩 주저앉은 정 보살에게 다가가 정화수를 마시게 한 뒤 그를 안정시켰다.
굿이 파하자 박 보살과 정 보살은 나란히 마을을 벗어나 망월산 아래 외진 집으로 향했다. 주인댁이 애썼다며 이것저것 제수음식을 싸주었지만 정 보살은 한 입도 먹지 않았다. 자꾸 목이 말라왔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한 정 보살은 외할머니에게 얻어 온 곶감을 끓여 드리기 위해 부엌으로 나왔다. 굿 집에서 있었던 일은 이내 박 보살에 의해 외할머니에게 전해졌다. 그는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아마도 지어미에게 갈 신 내림이 딸년에게 왔다고 한탄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날, 정 보살은 박 보살의 얼굴에서 어머니의 눈빛을 봤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안했다.
정 보살은 외할머니가 죽은 3년 후 박 보살로부터 신 내림을 받았다.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내림굿을 할 때 접신을 한 박 보살이 어머니의 목소리와 몸짓을 하며 “불쌍한 것! 불쌍한 것!” 소리를 반복하며 흐느끼던 소리를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신 내림이 끝날 무렵 망월산 산신령의 영험을 얻게 된 딸을 축하한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내뱉던 어머니의 방언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인연이 지속되었다면 그는 박 보살을 신어머니로 모시고 충청도 일대를 주름잡는 유명한 보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의 인연도 일 년을 가지 못했다. 바로 박 보살의 남편 때문이었다. 그는 집을 나갔다가 돈이 떨어져 들어와서는 굿당을 뒤집어 놓기 일쑤였다. 자신이 집을 나가는 것은 무당 일을 하는 박 보살 때문이라며 행패를 부리다가 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정 보살이 그 집을 나온 결정적인 계기는 박 보살의 남편이 그의 몸을 덮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안방을 쓰는 그들 부부가 시도 때도 없이 내는 성행위 소리로 미칠 지경이었는데, 새벽녘에 옆방에까지 들어 와 그녀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선잠을 자고 있는 그의 방에 누군가가 들어오자 그녀는 박 보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의 우직한 손이 그의 가슴을 만지더니 갑자기 손이 다리 사이를 훑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야릇한 감정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그가 벌떡 일어나 남자를 밀치자 욕정을 못 채운 그가 다시 큰 손으로 입을 막고 바지를 벗겼다. 그리고는 자신의 바지도 벗는 듯 씩씩거리더니 정 보살의 가랑이를 벌리고 엉덩이를 힘차게 들이 밀었다. 정 보살의 세찬 몸부림에 정액만 뿌리는 사이 소동이 일고 있는 방으로 달려 온 이는 박 보살이었다. 순간 사내의 몸이 썩은 고목처럼 허물어졌다. 이어서 나무토막이 살 속 깊이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박 보살이 남편을 목침으로 가격한 후 또 한 번 집어 던진 것이었다. 지독한 대가였다. 그리고 가혹한 형벌이었다.
사건 이후 정 보살이 찾아 간 곳은 결국 심심사였다. 노스님이 입적한 이후 심심사에도 식구가 늘어 보살할미와 젊은 스님, 그리고 동자승이 기거하고 있었다. 새로운 스님은 보살할미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정 보살에 대해 노스님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예전부터 알고 있어 며칠 동안은 편히 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산신각은 그의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기도 했다.
사건이 있은 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심심사를 찾아 온 것은 박 보살이었다. 박 보살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그는 남편에 대한 욕을 바가지로 쏟아 내며 정 보살을 위로했다. 사건이 있던 날, 방 안은 온통 핏물로 난장판이 되었다고 했다. 그가 내리친 침목이 남편의 머리에 맞아 두상이 걸레가 되었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내던진 침목이 남편의 머리를 또 강타했다며 그는 깔깔거리고 웃어댔다. 그래도 남편이 죽지 않은 것은 모두 신령님의 덕이라고도 했다. 이웃에게는 남편이 술 먹고 주정을 하다 뭐라고 하는 자신을 패려고 달려들다 그리되었노라고 설명을 했다고 했다. 머리통이 엉망진창이 되었노라며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그의 이웃들은 박 보살의 말에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병원을 들락거리는 사내에게 신령이 노하신거라며 위협을 주기까지 했다. 의사는 약간의 뇌출혈 증상이 보인다며 죽지 않은 것이 행운이라는 말을 서너 번이나 했다고 했다. 뇌에 강한 충격을 입어서인지, 그의 남편은 말과 행동이 어눌하게 되었다고도 했다. 이제는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순한 양이 되었으니 어찌 신령님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즐거워했다.
그 후로 정 보살은 박 보살과 동행하며 부여와 정산, 청양 등지에서 오는 안택굿을 하며 적잖이 돈을 모았다. 법사와 보살이 한 조를 이루어 굿을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굿을 청한 여인들의 입장에서는 두 보살이 이어나가는 굿이 훨씬 임의롭다고들 했다. 또한 이들이 하는 굿은 최고의 여성조합이라고 할 만큼 좋은 평을 얻었다.
정 보살은 어느 정도 살림 형편이 나아졌음에도 굿당을 차려 자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는 흰 고깔모자를 쓰고 어려운 경문을 암송하는 무당보다는 평범한 한 남자의 아내가 되기를 원했다. 화려한 무녀의 의상보다는 정갈한 모시적삼을 입고 여러 가솔을 거느리는 주인마님이 되고 싶었다. 고저장단에 무구를 휘두르며 접신하는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왔다. 굿을 할 때 사용하는 도궁, 살대, 신칼, 지전 등도 어떤 때는 그녀에게 낯설었다. 특히, 언월도, 삼지창, 작두 같은 무구들은 선뜻 다가가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은 신의 영역을 벗어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용신동에 굿을 하러 온 것은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 처음에는 조상풀이, 우환경, 병경 등에 능했던 청양의 손 법사가 굿을 주재하기로 되어 있었다. 손 없는 날을 받아 굿을 하기로 한 날, 손 법사가 가족상을 당하여 정 보살이 오게 된 것이었다.
그가 할 일은 오래된 폐가에서 영혼결혼식을 올려주는 일이었다. 이 폐가에는 노모를 모시고 나이 든 총각이 살았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다름 아닌 대잡이었다. 전문인은 아니고 가끔씩 법사나 보살의 일터에 나가 제수 상차림을 돕곤 했는데, 평소 집 앞에 있는 느티나무에 치성을 드리곤 했다. 그런데 이러한 무속행위를 그의 아들은 무척이나 싫어했다. 심지어 장독대에 짚을 깔고 정화수를 올리는 일까지도 화를 냈다. 그는 술만 먹으면 “신이 어디에 있으며, 이렇게 치성을 드려서 우리 집이 지금 잘 살고 있느냐!”며 악다구니만 해댔다. 노모가 노환으로 죽자 그는 안방의 상기둥에 모셨던 반구형의 성주신 신체도 떼버렸고, 부뚜막에 있는 조왕의 신체인 조왕중발도 없앴다. 또한 느티나무도 가지를 모두 처 버려 흉한 나체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노총각에게 별난 일이 일어나곤 했다. 장터나 삼거리 주막에서 술을 먹고 늦은 밤 귀가하다보면 수염을 배꼽까지 기르고 코가 시뻘건 영감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아이들에게 씨름을 시키곤 했다. 아이들의 씨름 장면이 하도 재미있어 구경을 하다 보면 새벽이 되고, 나무 아래에서 잠이 들곤 했다. 때로는 영감이 아이들에게 기술을 보여준다며 총각에게 씨름을 걸어왔다. 씨름을 할 때마다 총각은 내팽개쳐지고 아이들의 웃음은 밤새 이어지곤 했다. 그런 날이면 이튿날 총각의 몸은 온통 멍 자국이었다. 그런 다음 날이면 머리를 풀어 헤친 처녀가 나타나 영감의 딸이라며 총각의 멍 자국을 정성껏 치료해 주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도깨비장난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에 화를 참지 못한 총각이 고주망태가 되어 느티나무를 베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나무 밑동에 석유까지 부어 불까지 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도깨비 귀신이 붙었다고 혀를 끌끌 찼다. 그 일이 있은 1년 후, 정말 도깨비들의 보복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집 앞에 도로가 확장되고 차량이 늘어나면서 교통사고로 죽는 마을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고의 첫 번째 희생자는 노총각이었다. 사람들은 도깨비 귀신을 달래야한다며 느티나무가 있던 자리에 돌탑을 쌓고 제를 올렸다. 그리고 총각과 도깨비 처녀귀신과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야 재앙이 마무리된다며 법사까지 불러드렸던 것이었다.
정 보살은 지금도 처음 주재한 영혼결혼식에서 했던 “청실홍실 엮어서 그동안 정 들었던 집에서 놀다들 가시구려!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은 저승에서 마음껏 누리소서.”라고 외쳤던 주문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내친김에 총각이 살던 집터를 마을에서 얻어 주고 일 년에 알곡 한 가마씩 줄 터이니 이곳에서 살아달라는 주민들의 청까지 받아들였다. 거기에 마을의 터주신을 모실 수 있는 사당을 지어 주시면 더없이 고맙겠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흔쾌히 허락을 하여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었다.
정 보살의 징채가 봉뎅이를 연이어 두드리자 나이테 모양의 상사가 파장을 일으키며 은은한 음향으로 바람을 부른다. 거기에 더해져 북채가 온각자리, 반각자리, 매화점자리를 번갈아 칠 때마다 구름이 모아졌다가 흩어지기도 하며 멀리 달아나기도 한다. 하늘과 땅,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조화를 이루고 있는 중이다. 정 보살은 천지 사이 하나의 움직이는 점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