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4
본서 불타관의 특징
남방 상좌부에 속하는 본 <대불전경>의 불타관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불타관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대승불교 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부처님의 탄생일을 음력 4월 초파일로 보는 데 반해 남방 상좌부는 웨사카 월 보름날(Wesak day : 음력 4월 15일)로 본다. 이런 차이에서 시작하여 부처님의 덕성, 깨달음 및 타방불의 존재 등과 같은 본질적인 차원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이 장에선느 우리나라의 불타관과 두드러지게 차이 나는 본서의 불타관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어느 문화권이든 부처님과 관련된 정보는 불타전을 기본으로 한다. 따라서 불타관에 대한 설명은 우선 불타전을 중심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불타전과 관련해서는 남방 상좌부의 자료와 대승불교권의 자료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없다고 본다. 또한 전통적 대승불교권의 관점과 남방 상좌부적 관점이 다르다 하더라도, 그 어느 쪽 입장에 대해서도 가치론적 평가를 배제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관점을 기본으로 한 채 본서의 상좌부적 소식을 덧보태는 방식으로 진행하려 한다. 그 이유는 물론 전통적인 대승불교권의 정보에 더 익숙한 이 책의 독자들을 위해서이다.
1. 불타전
불교는 부처님의 종교이다. 물론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 존재하므로 불교는 중생의 종교이기다 하다. 그러나 그 중생이 결국에는 부처님이 되어야 하므로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불교란 역시 부처님의 종교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부처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타마 부처님의 전기(傳記)이다. 왜냐면 부처님의 전기는 고타마 부처님에 대한 고타마 부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객체적 대상으로서 부처님이라는 주제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 자신이 부처님에 대해 말한 것이므로, 그 의미는 부처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단순한 교리적인 언급을 넘어선다.
1. 전생, 탄생, 출가
불타전을 보면 부처님의 전생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그와 같은 전생담은 매우 많아 <자타카>라는 이름으로 집성되어 있기도 하다. 그토록 많은 이야기 중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수기(授記)라는 사건이다. 경전은 다음처럼 밝히고 있다. 당시 인도인들은 모두 다 ‘과연 단 한 생의 6년 수행을 통해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수행본기경>)’라는 의문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의미 있는 의문이다. 부처님은 인간이 지닌 모든 궁극적, 형이상학적, 종교적 문제에 대해 완벽한 해답을 얻어 낸 존재이다. 그런데 그런 경지를 6년 정도의 수행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와 비슷한 세월 동안 수행에 전념한느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부처님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아님을 볼 때, 고타마 부처님의 성불에는 이생에서의 6년 수행 외에 다른 특별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고타마 부처님의 답변은 이렇다. ‘아득한 옛 겁에 연등불(연등불, 디팡카라 부처님)로부터 오늘날 이 사바세계에서 고타마 부처님을 이룰 것이라는 기별(기별)을 받고, 그 후부터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비로소 이 생에서 성불하였다.’ 여기서 ‘아득한 옛 겁’이라고 표현한 것은 한역 <수행본기경>에는 91겁 전이라 되어 있고, 팔리 <붓다왕사>에는 ‘4아승지 10만 겁 전’이라 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서는 팔리 문헌에 입각하므로 본문에서는 4아승지 10만 겁 전으로 기술될 것이다. 그렇다고 한역의 91겁 전이라는 정보를 오류하고 보기는 어렵다. 나중에도 언급하겠지만 북방불교권에 의하면, 원래 연등불은 고타마 부처님에게 100겁 뒤에 성불하리라 수기했지만 고타마 부처님의 용맹정진으로 9겁이 앞당겨져 91겁 만에 성불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북방의 대승불교권에서 91겁 전 수기설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관점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겁수의 차이는 있지만 성불과 관련된 기본적 구조는 일치한다. 즉 연등불의 수기와 아득한 겁 동안의 수행 그리고 이 생에서의 마지막 수행이 원인이 되어 성불이라는 결과를 얻었다는 것으로 요약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수기라는 사건을 시작으로 불타전을 살펴보아야 한다. 역자 주1
본서는 수기 이후의 수행에 대해 이렇게 요약해서 말한다. ‘보통 단계, 더 높은 단계, 궁극적인 단계 등 3단계의 10가지 바리밀, 5가지 큰 보시(maha pariccaga), 세상의 행복을 향한 수행, 친족의 행복을 향한 수행, 성불을 향한 수행 등 3가지 수행(cariya)이 있다. 보살은 이 모든 덕목들을 연등 부처님에게서 수기를 받고 부처님이 되기로 서원한 그날부터 빠짐없이 실행했다.’ 물론 한역 <수행본기경>은 6바라밀 중심의 수행을 언급하고 있는데, 바라밀을 전제한 수행이라는 차원에서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생에 부처님이 탄생할 때 여러 가지 신화와 같은 사건들이 많이 언급된다. 예를 들어 여러 마리의 용이 물을 뿌렸다든지,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 사자후를 외쳤다든지 하는 내용들이다. 물론 그때 출현한 용이 몇 마리였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일치하지 않지만, 그 어떤 경우에라도 그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그와 같은 내용을 단순히 성자의 탄생을 묘사하는 문학적인 표현으로 보아 넘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서는 부처님 탄생 시 발생한 다양한 사건의 의미를 상세히 해석하고 있다. 그 속에는 부처님의 탄생이 가지는 의미와 앞으로 전개될 생애에 대한 중요한 교리적인 암시가 신화론적인 입장에서 기술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용이라고 할 때 왜 하필이면 용인가 하는 문제와, 일곱 걸음이라고 할 때 왜 하필이면 일곱 걸음인가 하는 문제도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고타마 부처님이 숫자와 사용에 있어서 지극히 정밀했음을 상기하면 더욱 그렇다. 이처럼 탄생에 대한 신화론적인 언급은 모두 합리적인 의미를 지닌 교리로 환원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어린 시절에서는 특히 농경제에 참석했던 일에 주목해야 한다. 그곳에서 부처님은 약육강식의 생존에 환멸을 느껴 잠부 나무 그늘에서 명상에 잠기는데, 여기서 바로 색계초선(色界初禪)을 성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초선의 성취는 그의 성불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므로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출가 동기를 그의 염세적 성격이나 이웃 강대국과의 정치적 관계에서 찾는 경우도 있는데, 그보다는 죽음과 같은 한계상황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당시 인도 사상의 심각한 혼란성에서 그 동기를 찾는 것이 나을 것이다.
2. 수행, 성불, 전법
출가 후 고타마 부처님은 당시 인도인들이 널리 실천하고 있던 요가(yoga) 수행과 타파스(tapas) 수행을 최고의 수준에 이르도록 닦았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우선 요가 수행에서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최상의 경지를 체득한 것으로 부처님에 의해 직접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 정도로는 죽음과 같은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요가 수행을 버린다. 그런 뒤 타파스 수행을 하게 된다. 타파스 수행이란 바로 우리가 고행이라고 말하는 것으로지, 당시 인도의 고행법은 약 73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고타마 부처님은 그중에서도 가장 고난도인 숨 쉬지 않는 고행과 먹지 않는 고행을 극단적으로 밀고나간 것으로 나온다.
부처님은 그러한 모든 수행, 특히 고행을 끝내면서 이렇게 선언한다. “과거, 미래, 현재의 어떤 수행자가 고행을 했다고 하나 나의 고행보다 더 격렬하고 신랄하고 찢어지는 듯한 고통의 느낌을 느끼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도록 격렬하고 신랄하고 찢어지는 듯한 고행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범위를 넘어서는 성스럽고 거룩한 진리에 대해 짐작조차 얻지 못하였다. 깨달음을 향한 다른 길이 있음에 틀림없다.” <맛지마니카야> <보디라자쿠마라숫타>
이렇듯 부처님이 모든 수행을 극도의 수준까지 해보았으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굳이 강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본 역자는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의미 중 하나가 인류의 종교적 방황의 종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여러 가지 수행을 한다고 해도 부처님보다는 그 정도가 낮을 것이고, 그런 수행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요가 수행과 타파스 수행을 물리친 뒤 독자적인 명상에 들어가 드디어 대각을 성취한다. 여기서 우리는 독자적인 명상의 내용과 대각의 내용을 살펴야 할 것이다. 본서는 독자적인 명상의 내용에 대해 위파싸나의 수련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본 역자의 입장에서는, 초기불교 자료에 의할 때 색계초선으로부터 싲가되는 9차 제정(九次第定)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파싸나든 9차제정이든 그 근본에는 색계4선법이 깔려 있거니와, 이 색계4선 중 초선의 경지를 부처님은 어린 시절 농경제에서의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역자 주2 그리고 깨달음의 내용 역시 연기법(緣起法)으로 설하고 있다. 본서에서는 연기법을 4제법(四諦法)에 속하는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오히려 4제법이 연기법에 포함되는 교설로 보려는 입장도 있다. 그러니 오히려 4제법이 연기법에 포함되는 교설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초기불교의 자료, 즉 율장 <마하왁가>의 <보디숫타>와 <쿳다카니카야> <우다나>의 <보디숫타>에 입각하자면, 연기법의 외연을 볼 때 12연기라고 국한하지 않는 한 부처님 깨달음의 내용으로서 연기법을 제시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본다.
성불한 뒤 부처님은 전법(傳法)에 나선다. 부처님의 전법에는 첫째, 5비구에 대한 교화를 주목해야 하고, 둘째,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에 대한 전법, 셋째, 마하카싸파에 대한 전법을 주목해야 한다. 먼저 5비구에 대한 교화는 일종의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을 극복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5비구에 대한 전법을 성공함으로써 부처님의 깨달음이 비로소 보편성을 띤 깨달음으로서의 위상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에 대한 교화는 부처님의 지혜와 신통이 완전히 전달됨으로써, 특히 교리적 측면(解)에서의 완성체가 전달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하카싸파에 대한 교화는 부처님의 복덕과 청정행이 완전히 전달됨으로써, 수행적 측명(行)의 완성체가 전달된 것을 의미한다.
3. 열반
부처님의 열반에 있어서는 크게 2가지 측명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최후의 유훈이 불방일(不放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지의 멸진으로부터 게으름의 극복으로 전환한 것이라고 볼 만하다. 부처님은 성불 직후 중생의 괴로움이 진리에 대한 무지에 기원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열반에 즈음해서는 중생이 괴로운 가장 큰 원인이 게으름에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마지막 날 제자들에게 ‘게으르지 말고 정진할 것’을 당부하는 부처님의 부촉에서 우리는 불교의 진수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색계 제4선을 택하는 부분도 주의해야 한다. 그 이상의 무색계 선전도 많은데 부처님은 굳이 색계 4선에서 일어나 열반에 들었다. 이는 ‘부처님은 중생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우리를 향한 약속이 아닌가 한다.
이상과 같이 불타전은 아직도 충분히 파악되지 않은 부분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러니 부처님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신뢰할 만한 자료 중의 하나가 불타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매진해야 할 것이다.
2. 부처님의 덕성과 정체
우리는 흔히 막연하게 부처님을 떠올린다. 거기에는 유신론적인 절대자의 이미지도 있고 자주 다니던 사찰에 모셔진 불상의 모습도 담겨 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부처님의 고행상에서 받은 참혹한 느낌도 들어 있다. 이처럼 사람들 각자가 떠올리는 부처님은 일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왜곡된 정보로 채색된 경우도 많다. 하지만 우리 불자들이 떠올리는 부처님은 기본적인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 그 통일성에 바탕 하여 각자 신행의 이력이 더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래 10호
많은 교리적 편차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정체성에 대한 표현은 대소승 경전마다 일치한다. 즉 대소승의 경전 모두 부처님에 대해서 ‘그렇게 온(여래), 동등한(응공),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정변지), 밝힘에의 진행을 완성한(명행족), 잘 간(선서), 세간을 아는(세간해), 더 이상 없는(무상사), 사람을 길들이는(조어장부), 천신과 인간의 스승인(천인사), 깨달은 어른(불세존)’이라고 설하고 있다.
남방 상좌부는 이 부분을 니와구나(Nava-gana)라고 하여 모두 9가지 덕성으로 말했다. 즉 위의 10가지 중 ‘여래’라는 첫 번째 칭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팔리어 경전에는 실제 부처님의 정체성을 소개할 때 응공, 곧 아라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부처님을 단순히 소개할 때는 여래가 빠지는 경향이 있으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다(lokeuppajjati)’는 문장과 결합할 때는 반드시 여래가 들어간 10가지 칭호가 나온다.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정체성을 소개할 때도 남전 팔리어 경전에는 여래가 빠지지만 북전의 <아함경>에는 여래가 들어간다. 역자 주3
본 역자는 부처님에 관한 정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여래 10호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밍군 사야도의 불타관은 나와구나에 입각한 것이다.역자 주4 그러나 본 역자는 부처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 여래가 결코 빠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번역자의 견해가 저자의 그것과 어긋난다 하여 그 차이를 밝히는 것은 외람된 일이나,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차이를 드러내며 설명하고자 하니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그러면 여래 10호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이 부분은 대단히 전문적이고 의미심장하므로 설명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본 역자의 입장에서는 다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만한 면이 있음을 소개할 수 있을 뿐이다. 첫째는 여래, 응공, 정변지라는 부분이고, 두 번째는 명행족, 선서, 세간해라는 부분이며, 세 번째는 나머지 4가지 칭호이다. 이중 첫 번째는 여래(그렇게 온)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의 ‘옴’에 중점을 두고 있고, 두 번째는 명행족(밝힘에의 진행을 완성한) 또는 선서(잘 간)와 같이 ‘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세 번째는 본격적인 중생 교화자라는 측면에 중점을 둔 호칭들이다. 이러한 구분과 특징에 유의하여 이 호칭들을 잘 음미한다면 부처님의 정체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호칭들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요청대로 그 호칭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물론 이는 본 역자의 관점이지 본서의 입장은 아니다. 예를 들어 명행족을 설명할 때에도 본서는 명행족의 행을 수행이라는 입장에서 소개할 뿐 그것에 진행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본서의 자세한 설명은 제4부인 부록부의 해당 대목에서 살피기 바란다.
2. 18불공법
10가지 이름으로 규정되는 부처님은 다시 여러 가지 덕성을 갖춘 존재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 덕성에 대한 표현도 대소승 경전에 모두 나타나므로 불설(佛說)로서의 권위가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은 우선 ‘10가지 힘과 4가지 확신’을 갖춘 존재로 나타난다.역자 주5 그리고 ‘3가지 마음자세’와 ‘하나의 커다란 슬픔’을 갖춘 존재로 나온다. 이거싱 바로 불자들이 공유해야 할 부처님의 모습이다.
대승불교는 18불공법(十八不共法, avenika-buddha-dharma)을 다소 다르게 보고 있다. 그리고 이상의 법들로 18불공법을 확정한 것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가 중심인 듯 보인다. 설일체유부의 대표적인 논서 중 하나로 알려진 <아비다르마코샤바쉬야>는 18불공법을 10력, 4무소외, 3념주, 대비라고 설명하고 있다.
먼저 부처님의 10가지 힘, 즉 10력이란 ‘첫째, 바른 도리와 그렇기 않은 도리를 판별하는 지력, 둘째, 선하고 악한 업과 그 과보를 여실하게 아는 지력, 셋째, 4가지 선정과 8가지 해탈과 3가지 삼매와 8가지 등지(等至) 등을 여실히 아는 지력, 넷째, 중생이 지닌 진리에 대한 인지능력의 높고 낮고 열등하고 우수한 것을 여실히 아는 지력, 다섯째, 중생의 여러 가지 의욕과 경향을 여실히 아는 지력, 여섯째, 중생세계의 성질과 종류를 여실히 아는 지력, 일곱째, 무시(無始)의 전생을 여실히 아는 지력, 아홉째, 중생의 내생을 여실히 아는 지력, 열째, 모든 번뇌가 다하는 것을 여실히 아는 지력’이다.
그리고 4가지 확신(四無所畏)이란 ‘첫째, 모든 것을 아는 자로서의 확신, 둘째, 모든 번뇌를 극복했다는 확신, 셋째, 수행에 장애되는 길마저 설할 수 있다는 확신, 넷째,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설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그리고 3가지 마음자세(三念住)란 ‘첫째, 중생이 부처님을 신봉(信奉)해도 기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바른 마음가짐을 지님, 둘째, 중생이 부처님을 불신하여도 걱정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바른 마음가짐을 지님, 셋째, 중생이 부처님을 신봉하거나 비방해도 기쁜 마음 또는 걱정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바른 마음가짐을 지님’이다.
끝으로 부처님은 크나큰 슬픔(大悲)을 지니고 있다. 즉 ‘지자(知者)는 일체 중생이 생사의 고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사도(邪道)에서 헤매지만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오욕의 갈구함이 마치 목마른 자가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음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나(我)가 없는 데서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늙음과 병과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오히려 그 업을 짓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무명의 어둠 속에 있으면서 지혜의 등불을 밝힐 줄 모르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많은 재물을 지니고도 나누어줄 줄 모름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나쁜 벗을 믿어 선지식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음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역자 주6
이상의 18가지 덕성은 오직 부처님만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부처님의 18불공법이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묘사인 것이다.
흔히 불교는 소극적이고, 유신론적인 종교들은 적극적이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부처님에 대한 이상의 표현과 신에 대한 그 종교들의 주장을 비교해 보면 그런 말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교가 발생한 당시 인도에는 유신론에 속하는 바라문교가 있었다. 바라문교의 사상은 태초의 브라만(Braman) 신에 대해서 ‘아니다. 아니다(neti, neti)’라는 말로 표현한다. 말하자면 신이란 ‘복잡하지도, 유한하지도, 모자라지도, 변하지도, 끊어지지도 않고, 둘이 아닌 존재’라는 것이다. 세상은 복잡하고 유한하나 신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어딘가 결핍되어 있고 병들고 죽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 이를 자세히 보면 모든 표현이 부정(부정)의 형식 논리에 입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에 대한 부정으로 신의 위대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브라흐만 신은 이런 존재입니까?’ 하고 물으면 ‘아니다’라고 답하고, ‘그러면 저러한 존재입니까?’라고 물어도 ‘아니다’라고 답하는 식이다. 브라만 신의 본성은 결코 긍정적이거나 적극적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굳이 이러한 부정적 표현 말고 신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을 찾으라면 ‘모든 것을 알며, 오로지 선한 자’라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에 대해서도 다시 반문이 생긴다. 모든 것을 아는 것이란 어떤 것이며 오로지 선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 말들 역시 표현은 긍정적일지 몰라도 그 속은 물음표로 꽉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물음에 대한 서양 종교이 입장은 ‘피조물이 신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인 동시에 교만이다.’라고 경고하는 정도일 것이다. 이처럼 신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표현은 ‘아니다’라는 부정과 ‘왜냐’라는 의문, ‘안 된다’라는 불가능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에 반해 부처님만 소유하는 18불공법에 대한 표현은 매우 자세학 긍정적이며 적극적이고 신뢰감을 주는 내용들로 꽉 차 있다. 부처님은 10가지 힘에 의해 모든 것을 아는 자이며, 4가지 확신에 의해 누구든지 가르칠 수 있는 자이며, 3가지 마음자세에 의해 가장 안식하는 자이며, 큰 슬픔으로 인해 오로지 선한 자이다. 부처님이란 바로 그러한 존재이니, 이 모습을 불자들은 모두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이처럼 부처님의 여래 10호를 통하여 그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부처님의 18불공법을 통하여 부처님의 덕성을 잘 안다면, 그것이 불타관을 정립하는 정통적인 방법이 된다.
그런데 본서에서는 이상의 18불공법을 조금 다르게 소개한다. 본서에는 불공(不共, asadharana)이라는 표현을 받는 교설들이 소개되는데, 6불공지(六不共智), 18불공지(十八不共智) 등이 그것이다. 이 2가지와 더불어 4무외지(四無畏智), 10력지(十力智), 14지(十四智)가 덧붙어 부처님의 고유한 지혜를 구성한다. 이는 마치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18불공법에 대한 본서 특유의 입장을 드러낸다고 할 만하다. 이들에 대한 자세한 언급도 본서의 부록부를 참조하기 바란다.
3. 제불의 시간적, 공간적 이해
경전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부처님에 대해 설한다. 그중 시간적, 공간적 입장에서 분류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과거불과 미래불
시간적 측면에서 보자면 보처님은 과거불과 미래불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과거불의 경우 과거7불(過去七佛)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것과 그 외의 것이 있다. 먼저 과거7불에 관한 전형적인 소개는 <디가니카야> <마하파다나숫타>에서 볼 수 있다. 그곳에는 위파시, 시키, 웨싸부, 카쿠산다, 코나가마나, 카싸파, 고타마 등 일곱 분의 부처님이 출현한 시기와 출신, 성씨, 수명, 보리수, 최고 제자의 모임, 최고의 시자(侍子), 부모, 탄생지 등 10가지 측면을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위파씨 부처님은 지금으로부터 91겁 전에 출현했으며, 왕족 출신이었고, 성씨는 콘단냐였다. 수명은 8만 세였고, 파탈리라는 보리수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며, 최고의 제자는 칸다와 티싸였다. 그리고 제자들의 모임은 모두 세 번 있었는데, 한 번은 번뇌를 다한 제자가 680만 명으로, 또 한 번은 10만 명으로, 또 한 번은 8만 명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최고의 시자는 아소카였고, 아버지는 반두마 왕이었으며, 어머니는 반두마티 왕비, 탄생지는 반두마티 왕도였다.
이러한 조건에 맞추어 고타마 부처님을 살펴보면, 현재의 겁에 출현했으며, 왕족 출신이었고, 성씨는 고타마, 수명은 100세 안팎, 아싸타라 보리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최고의 제자는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였다. 제자들의 모임은 한 번 있었는데 번뇌를 다한 제자는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였다. 제자들의 모임은 한 번 있었는데 번뇌를 다한 제자가 1천 250명이었다. 최고의 시자는 아난다, 아버지는 숫도다나 왕, 어머니는 마야 왕비, 탄생지는 카필라왓투 왕도이다.
이러한 과거7불에 관한 기사를 살피면서 주위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고타마 부처님도 과거불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부처님의 제자들에 의해 부처님의 말씀이 결집(結集)되는 시가가 부처님의 열반 이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타마 부처님이 출현한 시대(劫)를 특히 현겁(賢劫)이라고 부른다. 현겁은 본래 ‘경사스러운 겁’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이 겁의 이름을 그렇게 불렀을까. 그것은 이 겁에 무려 네 분의 부처님이 출현하였고, 또 미래에 멧테야(彌勒) 부처님까지 출세할 것이므로 그렇게 이름 붙인 듯하다.
본서의 본문에서는 부처님이 출현한 회수에 따라 겁의 명칭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다. 한 부처님만 출현하는 겁을 ‘사라(sara, 진수)’라고 부르고, 2명이 출현하는 겁을 ‘만다(manda)’, 3명이 출현하는 겁을 ‘와라(vara, )’, 4명일 경우는 ‘사라만다(saramanda)’, 5명일 경우 ‘밧다카’라고 한다. 만일 한 명의 부처님도 출현하지 않으면 ‘순냐(dunna, 空劫)’라고 한다. 따라서 이 겁은 밧다카 겁, 곧 현겁이다.
그리고 과거7불을 소개하면서 항상 보리수의 이름을 명기하고 있음도 주의해야 한다. 이는 수행과 깨달음을 위해서는 적절한 ‘도량’이 있어야 됨을 상징적으로 전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미래불인 멧테야 부처님의 보리수는 용화(용화)인데, 그것을 용화 도량이라고 표현하는 데서도 그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여러 경전들은 그러한 과거7불 외에도 훨씬 많은 부처님이 과거에 출현했다고 설한다. 본서의 첫 번째 텍스트가 되는 <붓다왕사>에는 과거7불까지 포함하여 모두 스물여덟 분의 부처님이 출현했다고 하면서 그 자세한 내용을 게송으로 읊고 있다. 그곳에 보면 최초의 부처님이 지금으로부터 4아승지 10만겁 전에 출현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부처님의 이름은 탄항카(작애)이다. 그리고 같은 겁에 메당카라(작자), 사랑낭카라(작귀의) 부처님이 출현하고 다시 디팡카라(연등, 정광) 부처님이 출현한다고 설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중 매우 유명한 디팡카라 부처님은 북전의 <수행본기경>에 의하면 지금부터 91겁 전의 부처님으로 묘사되어 있어 주의를 요한다.
이외에도 과거불의 관념은 대승경전 속에서 더욱 활발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불설무량수경>에서는 정광(정광) 여래로부터 세자재왕(세자재왕) 여래에 이르기까지 54분의 부처님이 과거에 출현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과거불에 이어 미래불 사상도 초기의 불교 자료들에 나타난다. 멧테야 부처님은 이 현겁 중에 상카라는 전륜성왕이 출세하여 통치하고 수명 8만 4천 세를 누리는 세상에 출현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8만 4천 세가 되었을 때, 멧태야라는 그렇게 온, 동등한,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밝힘에의 진행을 완성한, 잘 간, 세간을 아는, 더 이상 없는, 사람을 길들이는, 천신과 인간의 스승인, 깨달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다. 그 부처님은 천신, 마신, 범신을 포함한 이 세계와 수행자, 사제를 포함한 사람 등 모든 천신과 사람을 포함한 세계를 스스로 잘 알고 똑똑히 보아 가르치신다. 그 부처님은 처음도 좋고 가운데도 좋고 끝도 좋으며 의미와 문구를 갖춘 법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온통 충족되고 순결하고 청정한 수행을 드러낸다.’ 역자 주7
이처럼 많은 과거불과 미래불을 이름까지 정확히 명기하여 설한 이유는 무엇보다 부처님의 상속이 무한한 과거로부터 계속되어 끊이지 않으며, 그것이 미래에까지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 할 것이다.
2. 공간적 배열
전통적인 대승불교권에 속한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일반화된 사실인데도 남방 상좌부의 본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주제가 있다. 바로 다른 방위에 부처님이 실재한다는 관념이다. 이는 초기불교 경전에 타방불(타방불) 관념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기에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시간적으로 과거불과 미래불을 설하는 것과 함께 지금 이 순간 공간적으로 다른 방위에 존재하는 부처님에 관해서도 설한다. 그 대표적인 부처님이 서방에 위치한 아미타 부처님과 동방에 위치한 아촉불이다. 역자 주8
이처럼 다른 우주에도 부처님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과연 소설적 발상이요, 후대에 창작된 것일 뿐일까? 본 역자는 이 문제의 진위 여부를 살피기 위해 ‘보살(bodhisattva)’이라는 말과 관련된 논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남방 상좌부에서는 보살이라는 말을 당연히 부처님이 사용한 표현으로 여긴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보살이라는 개념이 후대에 창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확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주장은 타방불 관념이 후대 창작이라는 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특히 이 논의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핵심적인 관점을 소개하므로, 우리나라 독자들이 본서의 불타관이 지닌 특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4. 보살과 타방불 사상
1. 보살 개념의 성립
보살이라는 개념이 후대에 창작되었다는 주장의 몇 가지 근거는 다음과 같다. 먼저 바라문교나 자아나교에는 보살이란 말이 없다. 부처님은 조어(조어)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기존에 없었던 말이라면 직접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증학적 자료가 있다. 바르후트(Bharhut) 대탑의 명문(명문, 기원전 2세기~기원전 1세기)에는 ‘보살 입태하다’가 아니고 ‘세존 입태하다’로 표기되어 있다.역자 주9 만일 보살이라는 말이 일반적이고 권위 있는 말이었다면 그 대탑에 보살이란 말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따라서 아마 그때까지는 보살이란 말이 불교 교단에서 사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직접 보살이라는 말을 썼다고도 추론할 수 없다. 나아가 팔리 <상윳타니카야>에서는 ‘내가 깨달음을 얻기 전 보살이었을 때(pubbe me sambodha anabhisambuddhassa bodhisattassa)’ 라고 표현되는 대목이 한역 <잡아함경>에서는 보살이라는 말이 빠진 채 ‘내가 정각을 얻기 전에(아의직명부성장등각)’라고만 나타난다. 이는 모든 부파의 경전이 보살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뜻이며, 아마도 팔리 경전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착될 때 비로소 보살이라는 말이 유행하여 경전 속에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근거가 된다.
만일 그처럼 보살이라는 표현이 후대 창작이라면 그 동기는 무엇이며, 그 과정은 어떠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우선 부처님이 스스로를 부를 때는 ‘나’라고 부르면 되었을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전이든 얻은 후든 자신을 1인칭으로 지칭하는 데 문제는 없다. 물론 대승의 <금강경> 같은 곳에서 부처님은 스스로를 항상 여래라는 3인칭으로 지칭하긴 하지만 초기경전에서는 1인칭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의 입장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전의 세존과 얻은 뒤의 세존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전을 보디밧트와라고 했고 이후를 붓다라고 했다는 견해가 있다. 따라서 이때의 보디삿트와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결정된 자(person destineg for enlightenment)’라는 개념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석가보살이라고 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1대 보살인 셈이다. 이를 바탕으로 미륵 부처님이 될 자가 도솔천에 있다고 했으니 그를 미륵보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작 부처는 아니나 그 또한 부처를 이룰 것이 결정된 자이므로 2대 보살인 것이다.
그런데 당시(기원전 2세기)의 불교인들이 볼 때, 1대 보살인 석가보살은 과거 보살이었으며 미륵보살은 미래 보살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 보살은 없는가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현재 보살로서 석가보살이나 미륵보살과 같은 대 보살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대안이 있었다. 깨달음에 삼먁삼보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벽지 보리, 성문 보리가 있으므로 그러한 보리를 얻는 것이 결정된 자 또한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성문 보리를 얻는 것이 결정된, 즉 성문이 되는 것이 결정된 자’가 성문 보살(성문보살, Savaka-Bodhisatta)이고, 벽지불 보살(연각보살, Pacceka-Bodhisatta)이며, ‘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 결정된, 즉 정등각자가 되는 것이 결정된 자’가 정등각보살(정등각보살, Samma-sambodhisatta) 또는 대 보살이다. 남방 상좌부 전통은 보살의 분류를 더 진행하여 수승한 덕목의 차이(지혜, 믿음, 정진 중 어느 것이 수승한가)에 의해 대 보살에 대한 구별까지 하였다. 하지만 팔리 경전에서는 벽지 보리와 삼먁삼보리는 언급하고 있어도 성문 보리라는 개념은 찾기 어렵다. 어쨌든 부파불교, 특히 남방 상좌부 불교는 성문 보리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파불교에서조차 정등각 보살로서의 대 보살은 몰라도 연각 보살이나 성문 보살은 현재에도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2. 깨달음의 보편성
그러자 일반 불자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성문 보살인 자는 앞으로 성문을 이루고, 지금 연각 보살인 자는 앞으로 연각을 이루며, 정등각 보살은 부처를 이룰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은 어디에 속하는 것인가?’ 최악의 경우에는 그 무엇에도 속할 수 없으므로 결국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같은 결론에 반문한다. 부처님은 우리 모두에게 깨달으라고 가르쳤지 성문 보살이나 부처 보살만을 선별해서 가르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이다.
이는 결국 종자(종자, bija) 문제로 비약된다. 깨달음을 얻을 종자와 그렇지 못할 종자의 구분, 또는 깨달음을 얻더라도 성문의 깨달음만 얻는 종자와 부처의 깨달음을 얻을 종자의 구분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연 그것이 부처님의 진심인가 하는 문제를 낳고 만다. 일반 불자들은 당연히 그런 구분이나 차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누구라도 발심하면 보살이고 이는 곧 부처를 이룰 수 있는 보살이니, 범부와 성문, 연각, 부처를 구분하는 씨앗의 존재를 원천적으로 부정했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가 부처를 이룰 씨앗이라는 여래장(여래장) 불종자(불종사) 사상을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반 불자들도 보살이라는 관점을 ‘범부 보살’이나 ‘누구라도 보살’ 또는 아무나 보살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이 ‘아무나 보살을 주창하는 자들이 대승불교를 주도한느 세력이라 볼 수 있는데, 말하자면 이들이 현재 보살의 주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재 보살 속에서 다시 이전과 ’다른 의미‘의 위계가 생겨난다. 왜냐면 모든 사람이 능력 등에서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른 의미란 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전에는 씨앗이 달랐지만, 지금은 여건이 달라서 다른 위계를 지닐 뿐 결국 종착점은 부처이다. 이때 과거 보살도 아니고 미래 보살도 아닌 현재 보살 중에 가장 위상이 놓은 대 보살이 설정된다. 이들이 바로 보살마하살이다. 이런 논의 속에는 일부 온당한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 전제인 보살 개념의 후대 창작설은 지나친 주장인 듯싶다.
3. 보살 개념의 후대 창작설에 대한 반론
바라문교나 자이나교에서 보살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부처님이 그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단정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부처님이 보살이라는 말을 만들어서 사용했다고 하면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조어를 꺼려한 것은 사실이나, 전혀 조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연기(연기, pratityasamutpada)는 부처님의 조어로 보인다. 진정 중요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말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보살이라는 말은 부처님 이전까지는 쓰이지 않다가 부처님에 의해 창작된 순수한 불교 고유의 술어로서의 위상을 지닌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문교 및 자이나교와 관련해서는 세존과 관련된 논의가 더 의미 있다. 바라문교에서는 세존의 원어 바가왓(bhagavat)이 위수누(Visnu), 크리쉬나(Krsna), 또는 쉬와(Siva)의 호칭이었고, 자아니교에서는 지나(Jina)의 호칭이었다. 곧 위대한 존재에 대한 일반적 호칭이었던 것이다. 그런 용법에 입각한다면 불교 안에서는 부처님이든 대 보살이든 그 또한 불교의 위대한 인물이므로, 대 보살을 세존이라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바르후트 명문에서 ‘보살 입태하다’가 인고 ‘세존 입태하다’라고 씌어있다고 해서 보살이라는 개념이 당시까지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보살이라는 말 대신 세존이라는 말을 쓴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잡아함>의 해당 경문이 보살이란는 말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성급하게 보살 개념의 후대 창작설을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면 초기불교 자료 안에서 부파의 차이가 주는 영향은 그 외에도 수없이 많다. 예를 들어 유부계의 <잡아함>에서 부처님은 4제에 관한 점현관(漸現觀)을 설하고 있지만, 팔리 자료에서는 4제 돈현간(頓現觀)을 설한다. 그렇다고 어떤 한 자료의 경문을 후대 창작이라고 볼 수는 없다. 본 역자가 볼 때는 모두가 부처님의 경설로 손색이 없다. 이처럼 어떤 자료에는 있는데 다른 부파의 자료에는 없다고 해서 함부로 그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 아울러 <잡아함>과 다른 전승을 보이긴 하나 <증일아함>이라는 한역 아함에는 보살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니 팔리 자료 외의 모든 한역 아함의 자료가 보살이라는 개념을 지니지 않는 것처럼 확대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보살 개념의 후대 창작설의 몇 가지 근거들은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무의미해질 수 있다.
본 역자는 오히려 보살이라는 개념을 부처님이 창작했다는 입장에서, 부처님이 왜 보살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했을까 묻고자 한다. 이에 대해 살피면서 보살의 개념이 초기불교의 사후관(死後觀)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과, 타방불 사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 누진 아라한의 사후
여기서 <상윳타니카야>의 칸다상윳타에 속한 <야마카숫타>를 소개한다고 한다. 사리풋타 장로가 사왓티 시의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핀디카 장자가 바친 승원에 머물 때의 일이었다. 그때 야먀카라는 비구가 다음처럼 사악한 견해(papakam ditthigatam)를 일으켰다고 한다.
‘세존께서 가르친 법을 이해한 바로는 누진(漏盡) 비구(아라한)는 몸이 부서진 뒤 단멸하고 소멸하여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tathaham bhagavata dhammam desitam ajanami yatha kayassa bheda ucchijjati na hotiparam marana).’
많은 비구들이 이러한 야마카의 사견을 듣고 그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했으나 야마카는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구들은 사리풋타 장로를 찾아가 그의 사견을 시정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하여 사리풋타 장로는 야마카의 견해를 시정하기 위해 가르침을 펴게 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색 또는 수 또는 상 또는 식을 여래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색 또는 수 또는 상 또는 행 또는 식에 여래가 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런데 색 또는 수 또는 상 또는 행 또는 식의 밖에서도(annatra) 여래를 볼 수 없다.
② 색과 수와 상과 행과 식을 여래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색과 수와 상과 행과 식이 아닌 것을 여래로 볼 수 없다.
③ 이 경우 현법에서는 여래에 대해 진실하고 확고하게 얻을 바가 없으나, 그렇다고 누진 비구가 몸이 부서진 뒤 단멸하고 소멸하여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리풋타 장로는 ①을 통해 5온의 하나하나를 전제로 여래를 설명하려 했고 ②를 통해 5온 전체를 가지고 여래를 설명할 했다. 그리고 누진 비구 대신 여래를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불교의 궁극적 경지에서 사후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에 대해 더 이상 재론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① ②의 내용도 이해하기 쉽게 않으며 결론에 해당하는 ③의 내용은 더욱 난해하다. 어떻든 불교의 궁극적 경지에 대한 표현이므로 구차한 설명은 삼가겠으나 그 결론이 여래의 사후에 대해 함부로 무(無)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따라서 누진 아라한 비구의 사후도 결코 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 여래의 사후
그 유명한 무기설(無記設)에서는 여래의 사후를 유(有)로도 무(無)로도 확답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위의 경문은 무가 아니라는 데 방점이 있다. 이상은 부처님의 직설이 아닌 사리풋타 장로의 답변이므로 권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곧이어 나오는 <아누라다숫타>에는 부처님이 직접 ① ②의 내용과 ③ 가운데 전반부에 해당되는 문장을 설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배경에서 여래 사후의 유무에 대해 결정적으로 답하지 않았다고 설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불설(佛說)의 권위를 지닌다. 이처럼 누진 아라한이나 여래의 사후에 대해서 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어떤 경우라도 사후의 사건을 염두에 두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앞서 초기불교가 설하는 부처님의 열반이 색계 제4선을 중심으로 함을 살핀 바 있거니와, 그 또한 같은 맥락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주제와 관련하여 대승의 입장은 매우 적극적이다. 즉 부처님은 영원히 존재하니, 사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머문다는 것이다. <법화경> 여래수량품에는 ‘아성불이래(我成佛以來) 심대구원(甚大久遠) 수명무량아승지겁(壽命無量阿僧祗劫) 상주불멸(常住不滅)’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화엄경> 10회향품에 나오는 제4 지일체회향(至一切回向)에 보면 ‘일체제불(一切諸佛) 현재(現在) 실개주수(悉皆住壽)’라고 설하고 있다. 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계신 부처님의 존재를 그리게 한다. 그리고 결국 공간적으로 타방에 부처님들이 현존한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심지어 고타마 부처님도 수량에 있어 무한하므로 지금 어디에선가 부처님의 교화 사업에 열중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건전하다면 이는 앞서 제기한 2가지 주제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만일 부처님이 사후에 중생 교화를 위해 다시 원생(願生)한다면, 원생한 곳의 상황에 따라 2가지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 하나는 원생한 곳에 이미 부처님이 계시는 유불(有佛) 세계일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부처님의 교화 흔적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무불(無佛) 세계일 경우이다.
우선 무불 세계에서라면 사후의 부처님은 다시 그곳에서 부처임을 선언하며 교화를 계속할 것이 예상된다. 그렇다면 먼저 한 가지를 정리할 수 있다. 온 세상이 다 유불 세계가 아니고, 모든 부처님이 사후에 유불 세계로만 원생하지 않는 한, 지금 이 순간 어딘가 다른 세상에 다른 부처님들이 실재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곧 타방불 사상으로 연결되고 만다.
4. 벽지 보리와 삼먁삼보리
그런데 유불 세계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미 그 세계에 부처님이 계신 한 스스로를 부처라고 선언할 수는 없다. 한 하늘에 한 개의 태양이 있듯이 한 세상에는 한 부처님만 존재한다는 일세일불주의(一世一佛主意)는 대소승이 공유하는 중요한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다시 범부의 삶을 살아야 할까? 보살이라는 개념이 필요한 대표적인 부분이 이 대목이 아닌가 한다. 그는 보살로서 부처님의 교화를 보좌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처럼 이미 부처를 이룬 존재가 교화를 계속하기 위해 원생하는 과정에서 짐짓 취하는 위상이 보살이라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보살이라는 말이 깨달음을 얻도록 결정된 자(person destined for enlightenment)라는 취지를 웅변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되고 만다.
부처님의 교화 목적은 우리 범부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바로 그런 보살임을 먼저 자각하게 하려는데 있지 않을까? 굳이 대승의 경설을 들지 않더라도 앞서도 언급했던 <증일아함> 제15권에 나오는 부처님의 5사(오사)를 보면, ‘넷째, 보살의 뜻을 내지 않은 자에게 보살의 뜻을 일으키게 한다. 다섯째, 미래에 붓다가 되리라는 기별을 준다.’ 라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그 보살은 다름 아닌 무상정등각자를 이루도록 결정된 보살이다. 결국 불교는 우리들이 무상정등각을 이루어 부처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는데서 출발한다고 정리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대승불교의 일반적인 인간관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런 무상정등각자가 되는 과정은 어떠할까?
우리가 지금까지 살핀 부처님은 당연히 무상정등각자(무상정등각자)였고, 그 무상정등각자의 덕성에 중점을 두어 살폈다. 그런데 바로 이와 함께 경전에서는 벽지불(벽지불)이라는 부처님을 설하고 있다. ‘2가지 부처님이 있다. 하나는 여래 응공 정등각자이고, 다른 하나는 벽지불이다.’역자 주10 여기서 ‘프라티예카 붓다(pratyekabuddha)’의 음차인 벽지불은 일찍부터 연각이나 독각(獨覺)이라고 번역되었다. 그런데 그 교리적 위상을 정확히 이해하기란 꽤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벽지불은 고타마 부처님처럼 일반적인 부처님을 언급하는 명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시 부처님이라는 말을 끝에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벽지불이란 어떤 부처님인가? ‘벽지불은 중생들 가운데 고갱이며, 떨림 없는 분들이며, 하나에 대한 깨달음(벽지 보리)에 도달한 분들이다. 화살을 뽑았고, 재생으로 이끄는 번뇌를 다하셨다. 괴로움의 뿌리를 잘랐고, 죽음의 힘에 정복되지 않고 승리하신 분들이다. 교만을 도려내었고, 얼룩을 벗었고, 지고의 용기를 지녔고, 최후의 몸을 지니신 분이다.’역자 주11
여기서 ‘하나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한 자라는 규정이 주목된다. 벽지불은 깨달음 중에서도 벽지 보리를 얻은 자라고 명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경전 속에서 벽지불에 대한 언급이 벽지 보리와의 관계 속에서 누누이 언급되고 있음을 볼 때, 삼먁삼보리에 대한 하위의 깨달음이 분명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삼먁삼보리를 단번에 성취한다라기보다 벽지 보리를 경유하며 삼먁삼보리를 성취한다고 봐야 할 것이며, 이 2가지 깨달음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부처님에 대한 이해도 보다 확실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서의 남방 상좌부는 입장이 다르다. 깨달음의 구분은 인정하나 경유해야 하는 과정으로는 보지 않는다. 곧 성문의 깨달음, 벽지불의 깨달음, 삼먁삼보리를 구분하긴 해도, 한 개인의 깨달음이 성문의 깨달음→벽지불의 깨달음→삼먁삼보리의 전개를 보이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한다.
이 주제에 있어 초기불교의 입장은 결정적이지 않다. 하지만 대승불교의 관점에서는 성문의 깨달음→벽지불의 깨달음→삼먁삼보리의 전개를 보인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이런 입장에서 불교를 보아왔기 때문에, 본 역자는 그 차이점이 이와 같이 존재함을 밝히는 바이다.
그 외에도 우리나라와 같은 북방불교권에서는 고타마 부처님이 정진력에서 뛰어나고 미래불인 멧테야 부처님은 지혜가 뛰어난 부처님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모두 똑같이 연등 부처님으로부터 미래 100겁 뒤에 부처를 이루리라 수기를 받았지만, 고타마 부처님은 용맹정진으로 인해 9겁을 앞당겨 91겁이 지난 현겁에 성불했고, 멧태야 부처님은 지금부터 아직 9겁(경우에 따라서는 30겁)을 더 기다려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역자 주12 이에 비해 남방 상좌부에서는 그런 기사를 접할 수 없다. 오히려 고타마 부처님은 지혜가 수승한 보살이었기 때문에 4아승지 10만 겁의 수행기간을 지나 성불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미륵불이 정진의 측면에서 더욱 수승하다.
상좌부 전통에서는 대 보살에 3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 지혜가 수승한 보살, 둘째, 믿음이 수승한 보살, 셋째, 정진이 수승한 보살이다. 이중 두 번째는 8아승지 10만 겁 동안 수행해야 성불하고, 세 번째는 16아승지 10만 겁을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오직 지혜가 수승한 보살만 4아승지 10만 겁의 수행으로 성불한다고 되어 있다. 알다시피 고타마 부처님은 4아승지 10만 겁 동안의 수행으로 성불했으므로 지혜가 가장 수승한 보살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타마 부처님의 개성에 관해서도 북방의 대승불교권과 남방의 상좌부불교권의 정보가 다소 다르다.
역자 주
수기가 <법화경>이라는 대승경전의 주요 사상이 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주의해야 한다.
<맛지마니카야>, <보디라자쿠마라숫타>
성제자염여래사(성제자염여래사), 여래, 응공, 정각,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오장부, 천인사, 불세존(<잡아함> 제33권 <수습주경>)
저자의 나와구나에 대한 설명은 부록부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독자들은 그곳에서 남방 상좌부의 불타관을 다시 한 번 살피기 바란다.
<맛지마니카야> <마하시하나타숫타>
<대방등대집경>, 그리고 이상의 내용은 고익진 박사가 주로 집필한 동국대의 <불교학개론>(1981년 발행)에서 일부 발췌했다.
<디가니카야> <착카왓티숫타>; <증일아함경> 제45권
<대보적경> 무량수여래회(무량수여래회), 부동여래회(부동여래회).
바르후트는 마우리야 왕조를 정복한 슝가 왕조 시대(기원전 185년 ~ : 푸쉬야 미트라가 세움)의 대탑으로 유명하다.
<앙굿타라니카야> 2법 부.
<맛지마니카야> <이시길리숫타>
<증일아함> 제37권. ‘彌勒菩薩應三十劫當成無上正眞等正覺 我以精進之力 超越成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