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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김씨 (義城 金氏)
시조(始祖)는 김 석(金 錫)으로 신라(新羅) 56代 경순왕(敬順王)의 아들이며 고려 태조 왕 건(王 建)의 장녀 신란공주 (一名 낙랑공주)가 어머니이다. 신란공주(神鸞公主)는 왕건 태조의 셋째부인 신명태후(神明太后) 충주유씨(忠州劉氏)의 소생이다.
이로써 고려 왕건 태조의 외손이며 2代 혜종(惠宗), 3代 정종(定宗), 4代 광종(光宗)의 생질(甥姪)이다. 고려 초 무신(武臣)정치시대에서 벗어나 널리 인재를 등용하는 文治시대로의 전환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국방(國防)과 백성들의 구휼(救恤)에 공을 세워 경종 임금 때 식읍 300호를 하사 받고 의성군(義城君)에 수봉 되었으며 제 8대 현종 때 덕유후(德儒侯)의 시호(諡號)를 받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의성(義城)으로 삼았으며 그 뒤 여섯 분의 선조(先祖)들이 의성군(義城君)으로 봉군(封君) 되었다.
[義城君 新羅 敬順王 第 5子 高麗太祖 外孫受封 義城子孫 因以爲貫]
김알지의 28대손으로 고려 태조의 외손, 의성군에 책봉되어,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8세손 김공우(公瑀)의 아들 대에서 크게 번창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졌는데 장자 김용비(龍庇, 태자첨사), 차자 김용필(龍弼, 수사공), 막내 김용주(龍珠, 평장사) 형제 대에 이르러 파가 갈리고 명성을 날렸다.
[ 대표적 인물(代表的人物) ]
김훤(暄) :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김광부(光富) : 무관, 우왕(禑王) 때 도순문사(都巡問使), 1362년 홍건적을 격퇴, 2등 공신
김거두(居斗) :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발문(跋文)을 적었다
김거익(居翼) : 정당문학(政堂文學
김춘(椿) :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
김옥(玉) :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김연(衍) : 평장사(平章事)
김현주(玄柱) : 김옥의 아들, 조선에서 (贊成事)와 (大司諫)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
김영렬(英烈) : 태종(太宗) 때 추충분의좌명공신(推忠奮義佐命功臣)에 올랐다.
김안국(安國) : 대제학, 학자이다.
김정국(正國) : 참판, 학자이다.
김성일(誠一) : 부제학(副提學)·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였다.
김우옹 : (明宗) 때 (文科)에 올라 (宣祖) 때 (大司憲)· (兵曹參判) 등을 지냈다
김우굉(宇宏) :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올랐다.
김흥락(興洛) : 영남유림(嶺南儒林)의 거두(巨頭), (學問)에만 진력하여 "(西山集)"을 집필.
김하락(河洛) : 의병대장
김창숙(昌淑) : 독립운동가, 유학자이다.
김동삼(東三) : 독립운동가
[ 본관지 연혁(本貫地沿革) ] 경북 의성(義城)
[ 인구(人口) ] 219,947명. (1985년) 253,309명. (2000년 통계청)
의성김씨(義城金氏)의 분파
개성김씨(開城金氏)
시조 김용주(金龍珠)는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5자로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시조인 석(錫)의 8세손 공우(云瑀)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1054년(문종8) 문과에 급제, 문종·선종·헌종·숙종 등 4조에 걸쳐 벼슬하면서 여진(女眞)의 침입을 방어한 공으로 추충공신(推忠功臣)이 되고 평장사에 올랐으며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의성김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 1세로 하고 본관을 개성으로 하였다. 묘소는 개성 용수산(龍峀山) 중봉에 있었으나 실전되었다. 시조 김용주의 손자 정신공(貞愼公) 김 준(金 晙)은 1107년(예종2) 윤 관(尹 瓘)이 여진을 정벌할 때 좌군판관(左軍判官)으로 종군하였고, 뒤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예부사(判禮部事)에 이르렀다.
조선조에서는 문과 급제자 9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 김자양(金自陽)이 중종 때 문과에 급제, 경원부사 (慶源府使)를 지냈다. 그의 아들 어촌(漁村) 김 황(金 滉)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 군수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아우 유(濡)·지(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했으며 문하에서 조헌(趙憲)과 같은 우수한 제자가 배출되었다,
김응환(金應煥)·김득신(金得臣)· 김석신(金碩臣)은 숙질간으로 정조∼순조 때의 유명한 화가들이다. 복헌(復軒) 김응환은 도화서(圖畵暑) 화원(畵員)으로 정조의 명을 받아 금강산을 주유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왕명으로 일본 지도를 그리러 일본으로 가다가 부산에서 병사했다.
긍재(兢齋) 김득신은 인물화를 잘 그려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겸재(謙齋)·정선(鄭 선)과 함께 영조 때의 삼재(三齋)로 불렸고, 초원(蕉園) 김석신은 화원을 거쳐 부사용(副司勇)을 지냈으며 풍속화를 잘 그렸다. 이 밖에 조헌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스승과 함께 금산(錦山) 싸움에서 순절한 월곡(月 谷) 김 절(金 節)·오자옹(五者翁) 김 약(金 약)·삼송당(三松堂) 김로(金 로) 3형제가 유명하다.[人口(1985년 현재)] 18,777명이 있다.
광주김씨(廣州金氏)
의성군(義城君) 6세손(世孫) 언미(金彦美)의 셋째아들 녹광(金祿光)은 광주군(廣州君)에 봉(封)하여 광주(廣州) 김씨로 분관 (分貫)하였으며 [人口(1985년 현재)] 20,815명이 있다. 광주 김씨(廣州金氏)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인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 錫)의 7세손 김녹광(金綠光)을 시조(始祖)로 한다. 그는 1236년(고려 고종 23) 몽고군이 침입해 왔을 때 상장군(上將軍)으로 출정하여 이를 격퇴시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始祖)가 봉군(封君)된 광주(廣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문호(門戶)를 열었으며, 녹광(綠光)의 아들 굉(굉)이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내고, 손자 훤(훤 : 호는 둔촌, 감찰어사 굉의 아들)은 당대의 명신(名臣)으로 명성을 떨쳐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혔다.
원종(元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훤(훤)은 1269년(원종 10) 사신(使臣)으로 원(元)나라에 가서 원제(元帝)의 힘을 빌어 권신(權臣) 임 연(林 衍) 일당의 역모를 저지시켰고, 이듬해 금주(金州 : 지금의 김해) 방어사(防禦使)로 나가 삼별초(三別抄 : 고려 무신 정권 때의 특수군대)의 난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功)을 세워 예부 낭중(禮部郎中)·도호부사(都護府使) 등을 거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 내사문하성에 속했던 정2품의 관직)에 이르렀으며, 문장(文章)과 글씨로 명망이 높았다.
훤(훤)의 두 아들 중 맏아들 남물(南物)은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지냈으며, 개물(開物)은 충숙왕(忠肅王)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역이하고 시(時)·글씨·그림에 모두 능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한 차문(次文)과 경연관의 참찬관(參贊官)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된 차문(次武) 형제가 유명했고, 상주 목사(尙州牧使) 경보(敬寶)와 강릉부사(江陵府使) 대근(大根),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희증(希曾)이 명문의 대(代)를 이었다. 특히 조선조에서 가문(家門)을 크게 일으킨 인물(人物)은 임진왜란 때의 명장(名將) 태허(太虛)를 들 수 있다.
그는 희증(希曾)의 아들로 태어나 1580년(선조 13) 무과(武科)에 급제, 옥포 만호(玉浦 萬戶)로 있다가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울산 군수(蔚山郡守)로서 역전의 무공을 세웠고, 난이 평정된 후 선무1등 공신으로 도총관(都摠管)·호위대장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수겸(水兼)도 아버지를 따라 전공을 세워 2등공신에 책록되고 안동영장(安東營將)·중추부사(中樞府使) 등을 역임했다.
공조 참의 차문(次文)의 증손(曾孫) 기(琦)는 임진왜란 때 판관(判官)으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동래성(東萊城) 전투에서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훈련원정(訓鍊院正)에 추증되었다.
한편 양무공(襄武公) 태허(太虛)의 사촌(四寸)인 태을(太乙)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임하고 돌아와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그의 아들 수인(守 )도 광해군(光海君)의 패륜을 개탄하여 향리로 돌아와 영남유학(嶺南儒學)의 중진으로 일컬어진 아버지 태을(太乙)의 학문(學問)을 이었다.
한말(韓末)에와서는 광주 김씨는 진성(振聲)·석창(錫昌)·상윤(相潤)을 비롯한 많은 항일 투사를 배출하여 충절의 전통을 이어 가문을 더욱 빛냈다.
설성김씨(雪城金氏)
설성 김씨(雪城金氏)의 시조 김지선(金之宣)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인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錫)의 후손이며, 개성 김씨(開城金氏)로 분적한 김용주(金龍珠)의 증손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고려 때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 경연과 장서를 맡아보던 관청의 종2품 벼슬)을 지내고 설성(雪城)에 세거하면서 가세가 크게 번창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개성김씨에서 분적하고 지선(之宣)을 일세조(一世祖)로 삼아 관향을 설성(雪城)으로 하게 되었다.
시조 지선(之宣)의 아들 원(源)이 고려조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상장군으로 무훈을 세우고 문원(文元)이란 시호를 하사 받았으며, 그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신주(臣株)는 사재감정을 역임하여 부자가 함께 명성을 떨쳤다. 판서(判書) 남보(南寶)의 후손에서는 학문으로 유명했던 수항(壽抗)과 판서(判書) 훈(壎)이 대표적이며, 교관(敎官) 치홍(致洪)은 의관(議官)을 지낸 영배(永配)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人口(1985년 현재)] 2,262명이 있다.
고령김씨(高靈金氏)
일찍이 고려(高麗)시대에서부터 뿌리를 내린 고령 김씨(高靈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11세손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 錫)의 장손(長孫)으로 고려에서 전리 좌랑(典理佐郞)을 역임한 김 의(金 宜)의 맏아들 김남득(金南得)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본명(本名)이 기지(麒芝)로 서기 1340년(고려 충혜왕 복위 1) 진사(進士)가 되어 감찰 집의(監察執義 : 사헌부에 소속된 정3품 벼슬)를 지내고, 공민왕(恭愍王) 때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그후 사은사(謝恩使)로 원(元)나라에 가서 예부상서(禮部尙書)를 명(命)받고 환국하자, 왕(王)이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하고〈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라고 사명(賜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름을 김남득(金南得)으로 하였고,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고령(高靈)으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간관(諫官)을 지낸 무(畝 : 시조 남득의 아들)의 아들 4형제가 뛰어났다.
맏아들 사행(士行)은 조선 세종(世宗) 때 여산(礪山)·홍산(鴻山) 등지의 부사(府使)를 역임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으며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올랐고, 차남 사문(士文)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사충(士忠)은 승지(承旨)를, 막내 사신(士信)은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지냈다.
한편 세종(世宗) 때 학행(學行)으로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천거된 자숙(自肅)은 사행(士行)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이며, 그의 장남 형생(荊生)은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감찰(監察)을 역임하여, 하양 군수(河陽郡守)를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오른 차남 장생(莊生) 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서기 1510년(중종 5)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수(銖)는 고성 군수(固城郡守)·진주 목사(晋州牧使)·순천 부사(順天府使) 등을 역임한 후 정3품 당상관직인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올랐으며, 아우 구(鉤)는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하동(河東)·순천(順天)·수원(水原) 등지의 부사(府使)와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명종(明宗) 때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왜구를 대파하여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특진한 양촌(陽村)은 1559년(명종 14)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수차에 걸친 호인(胡人)의 침략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여 뒤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리고 경원 부사(慶源府使) 세문(世文)의 아들 문절공(文節公) 면(沔)은 이 황(李 滉)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마하고 많은 후진을 양성했으며, 뒤에 효렴(孝廉)으로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居昌)·고령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규합, 진주 목사(晋州牧使)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격퇴시켜 그 공(功)으로 합천 군수(陜川郡守)가 되었다. 그 외 인물로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천장(千章), 현감(縣監) 충립(忠立), 동지중추부사 춘명(春明), 감찰(監察) 응수(應洙) 등이 유명했고, 현종(顯宗) 때 토산 현감(兎山縣監)을 지낸 초중(楚重)은 어영별장(御營別將) 자(梓), 칠곡 군수(漆谷郡守) 한주(翰周)와 함께 무신(武臣)으로 가문을 빛냈다. [人口(1985년 현재)] 15,564명이 있다.
적성김씨(積城金氏)
시조 김상환(金尙煥 : 자 文遠)은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시조인 의성군(義城君) 석(錫)의 후손으로 몽립(夢立)의 아들이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의하면 그는 1636년(인조14)생으로 거주지는 평양이다. 1669년(현종10) 식년(式年)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감찰을 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적성(積城 : 連川郡의 속면)으로 한 연유는 상고할 수 없으나 급제 당시의 본관이 적성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선대부터 적성에 살았기 때문에 세거지명을 본관으로 삼은 듯하다.
또 어떤 문헌에는 김적(金積 : 鷄林君)의 증손 김광(金광)을 시조로 하는 적성김씨도 보인다. 1930년 국세조사 자료에 의하면 평남 평원군 공덕면 송매리에 21가구가 살고 있었다. [人口(1985년 현재)] 801명이 있다.
학봉 김성일(金誠一) 선생이 살았던 집으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56번지에 있다.
경상북도 기념물1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교적 평탄한 대지에 서남향으로 자리잡은 이 종택은
근년에 지은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좌측에 정침과 그 뒤쪽에 사당이 있고, 마당 건너편에는 근년에 지은 운장각과 정자가 서북향으로 나란히 앉아있다.
종 목 보물 제450호 명 칭 안동의성김씨종택(安東義城金氏宗宅)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면적 1동
지 정 일 1967.06.23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80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김시우 관 리 자 김시우
의성 김씨의 종가로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던 것을 김성일(1538∼1593) 선생이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건물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로 구분되는데,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고 형태는 一자 형이다.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맡았던 안채는 ㅁ자형이고 다른 주택과 달리 안방이 바깥쪽으로 높게 자리를 잡고 있다.
행랑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 가옥 구성이 巳자 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행랑채에서 안뜰로 통하는 중문이 없어 외부사람이 드나들 수 없었는데 이것은 당시 유교 사상의 남녀유별, 내외사상을 건물구성에 반영하였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사랑채 출입은 행랑채의 대문을 거치지 않고 사랑채로 직접 갈 수 있는 별도의 문이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를 이어주는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위층은 서재로, 아래층은 헛간으로 쓰인다. 이와 같은 2층 구조는 다른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양식이다.
훗날 추가로 연결한 서쪽 끝의 대청문은 지붕이 커, 집 전체 겉모습에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건물은 간략한 양식으로 지었지만 보기드문 주택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민가 건축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소재지: 경북 의성군 사곡면 토현리 (오토산 중턱)
오토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묘는 높은 자리에 걸맞은 국세를 확보를 하고 있습니다.
오토산의 중심 용맥은 좌청룡이 감싸돌면서 중간에 크게 혈이 맺히게 되고 바로 그 곳에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내수가 역수로 빠져나갈 뿐만 아니라 득수국입니다.
주산의 기운과 중심용맥의 기운, 기운에 상응하는 국의 크기와 사격의 조응까지
좋은 자리라 여겨져 참명당에 올려 봅니다.
시조는 김 석(金 錫), 신라56대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이며(일설에는 넷째 아들)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자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짐으로써 자손들이 본관을 의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가문들이 그러하듯이, 의성 김씨의 세계(世系)도 상고하기가 힘들다. 의성 김씨가 실질적인 시조로 받드는 인물은 고려 말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낸 9세손 김용비(金龍庇)이다. 김용비의 묘비를 지은 후손 동강(東岡) 김우옹(金宇)1540~1603)은 비문의 첫머리에 “우리 시조는 고려 태자 첨사 용비”라고 적었다.
비봉산성(義城)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중앙부(中央部)에 위치한 고장으로 삼한(三韓)시대에 소문국(召文國)이었다. 그후 신라에 병합되어 757년(경덕왕 16년) 문소(聞韶)로 개칭되었다가 고려초에 지금의 의성(義城)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고려 개국과 함께 문호(門戶)를 개방한 의성 김씨는 8세손(世孫) 공우(公瑀)의 아들 대에서 크게 번창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졌는데, 장자(長子)인 용비(龍庇)가 태자첨사(太子詹事 ; 동궁에 속한 종2,3품 벼슬)를 지냈고, 차자(次子) 용필(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막내 용주(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명성을 날렷다.
그 외 고려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훤(暄)과 우왕(禑王)때 도순문사(都巡問使) 광부(光富)가 유명했고,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발문(跋文)을 적은 거두(居斗)와 정당문학(政堂文學) 거익(居翼),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 춘(椿),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옥(玉), 평장사(平章事) 연(衍) 등이 명문의 대를 이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옥(玉)의 아들 현주(玄珠)가 찬성사(贊成事)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고, 영렬(英烈)은 태종(太宗)때 추충분의좌명공신(推忠奮義佐命功臣)에 올랐다.
존성(存誠)의 아들 효손(孝孫)은 세종(世宗)때 병조 참의를 거쳐, 형조(刑曹) 및 예조의 참판을 지내고 대사헌을 역임했으며, 을방(乙邦)은 고려 문신으로 국운(國運)이 다하자 통곡하며 예안(禮安)의 요성산(邀聖山)으로 내려가 초당(草堂)을 짓고 은거하였는데 조선조에서 수 차례에 걸쳐 벼슬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기리며 불취하자 그가 살던 마을을 둔번리(遁燔里)라 불렀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때 문과에 급제한 흠조(欽祖)는 중종반정 후에 검열(檢閱)을 거쳐 단양(丹陽) 제주(濟州) 등지의 목사(牧使)를 역임한 후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으며, 윤석(潤石)은 중종때 등과 하여 청송 부사로 나갔다가 홍문관 교리를 고쳐 대사성(유학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정 3품 벼슬)에 올라 군수(郡守) 세우(世瑀)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조선 중기에서 명문 의성 김씨를 더욱 빛낸 인물은 모재(慕齋)안국(安國)과 사재(思齋) 정국(正國)의 형제를 들 수 있다.
안국(安國)은 1478년(성종 9) 참봉 연(璉)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당내에 이름난 석학(碩學)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연산군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어 부수찬과 부교리 예조참의를 거쳐 경상도와 전라도의 관찰사(觀察使)로 각 향교(鄕校)에[소학(小學)]을 권장하고 [벽온방] [창진방]등을 간인(刊印)하여 보급하였다.
특히 그는 천문(天文) 주역(周易) 농사(農事) 국문학(國文學)을 비롯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당시 유명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쌍벽을 이루었고,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예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쳐 대사헌 대제학 좌찬성(:의정부에 있던 종 1품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동몽선습(童蒙先習)] [모재가훈(慕齋家訓)]을 비롯한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안국의 아우인 사재(思齎) 정국(正國)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1509년(중종4년)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當 : 젊고 재주 있는 문신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 하던 곳)에 뽑혔으며, 이조 정량을 거쳐 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고, 병조 예조 형조의 참판을 지낸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문(詩文)이 당대에 뛰어났고 의서(醫書)에 조예가 깊어[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를 비롯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겨 형과 함께 후계에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右側의 白虎는 청룡에 비해 기세 좋게 屈曲을 하며 힘차게 내려왔으며 청룡의 끝자락이 두툼하게 힘 있게 형성되어 혈을 잘 감싸 안고 있으며 또한 내수구(內水口)를 용호(龍虎)가 잘 관쇄하고 있다.
한편 생원(生員) 진(璡)의 아들 5형제는 모두 당대에 이름난 거유(巨儒)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문명(文名)을 날렸는데, 맏아들 극일(克一)은 내자(內資)시정을, 둘째 수일(守一)은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셋째 명일(明一)은 효행이 지극한 학자로 유명했다.
넷째 성일(誠一)은 1568년(선조1) 증광(增廣)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에 뽑혀 사가(賜暇)독서를 한 뒤 정언(正言)을 거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將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부제학 나주목사를 역임하고 사성(司成)으로 통신(通信)부사(府使)가 되어 일본을 다녀왔다.
그 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초유사(招諭使)로 참전하여 죽산 함양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모아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진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성리학에 능통했으며 사후(死後)에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으로 이조(吏曹)판서에 추증되었다. 막내인 복일(復一)은 명종(明宗)때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70년(선조3년) 식년(式年)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 낭관(郎官) 전라도어사를 거쳐 울산군수 창원부사 등을 역임하고, 성균관의 사예(司藝)와 풍기군수를 지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삼척 부사 희삼(希參)의 아들 우옹이 명종 때 문과에 올라 선조(宣祖)때 대사헌(大司憲) 병조(兵曹)참판 등을 역임했고, 우굉(宇宏)은 대사성을 거쳐 부제학에 올라 숙종(肅宗)때의 수찬(修撰) 여건(汝鍵), 대사헌 방걸(邦杰)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영수(永銖)가 장기 군수겸 경주병마절제사(慶州兵馬節制使)에 재임시 선정을 배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고, 철종(哲宗)때 [북천가(北遷歌)]를 지어 국문학 사상 중요한 업적을 남긴 진형(鎭衡)과 예조 참판 굉이 명문의 대를 이었다.
영남 유림의 거두(巨頭) 흥락(興洛)은 수차에 걸쳐 벼슬에 등용되었으나 나가지 았고 학문에만 진력하여 [서산집(西山集)]을 집필하였으며, 하락(河洛)은 의병(義兵)대장으로 무공을 세워,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원식(元植) 동삼(東三) 창숙(昌淑) 붕준(鵬濬) 황(榥) 등과 함께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성 김씨는 남한에 총 53,633가구, 219,9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을 사람들이 公의 공덕(功德)에 보답하고자 세운 사당(祠堂)으로 관급(官給)의 제수(祭需)로써 향사(享祀)가 이어졌다. 후손인 김안국(1478~1543)이 조선 중종12년(1517)에 경상도관찰사로 의성에 들려 민정을 살피는 중에 한 사당을 발견, 이에 진민사(鎭民祠)라는 편액을 내렸다. 처음에는 義城官衙에 있었으나 1868년 이곳으로 옮겨지고 옛터엔 遺址碑가 세워졌다.
오토제 입구 양족에 두 개가 있으며 이 塋城과 후손(後孫)들의 앞날을 길이 밝힌다는 뜻으로 세워진 석등(石燈)이다. 장명등은 고려시대 말부터 왕릉에 설치되기 시작한 구조물로서 영혼을 인도하는 불빛이라는 상징적 의미와 동물로부터 무덤을 보호한다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고려 명종때 김용비(金龍庇)가 이곳에서 날뛴 홍건적의 방자한 무리들을 소탕하고, 동요된 읍민의 마음을 가라 앉힌 공을 기리기 위하여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향사해 오다가 읍세(邑勢) 확장으로 서기 1871년에 오토산(五土山) 공(公)의 묘소 아래로 사당을 옮기고 이 자리에 비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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