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삶과 당당한 삶의 자세로서의 수필
- 수필 부문 심사평
김승종(평론가, 전주대 교수)
진원종의 『그곳에 가고 싶다』, 소영자의 『설렘은 여전히』, 장정자의 『마음속 그대 있음에』, 김사은의 『뽕짝이 내게로 온 날』, 백봉기의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등 이상 다섯 권의 수필집이 이번 심사의 대상이었다.
다섯 권의 책을 읽으면서 심사위원이 아닌 독자로서 매우 행복한 주말을 보낼 수 있었다. 다섯 권의 수필집을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다섯 권의 책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저자들의 소중한 체험과 삶에 대한 통찰력, 지혜, 고통과 슬픔, 용기와 열정, 사랑과 의지로 점철된 전(全)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수필은 흔히 ‘체험의 문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체험을 담아냈다고 해서 모두 수필이 될 수는 없다. 당연히 가치 있는 체험을 담아내되 개성과 품격을 갖춘 훌륭한 문장으로 표현해 내야 비로소 한 편의 좋은 수필이 탄생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다섯 수필집 등은 모두 수필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어서 수상작을 선별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저자들이 이미 이순(耳順)의 나이를 넘기고 현직에서도 대부분 은퇴하신 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들은 인간과 삶을 여유 있는 눈으로 관조하는 가운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때로는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그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깊은 관심을 끝까지 유지하는 넉넉하면서도 든든한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운동화만 보면 선생님 생각이 난다. 폐가 좋지 않아 결혼도 못 해보고 돌아가신 스승님의 얼굴이 떠오르면 눈물이 낙엽처럼 팽그르르 흘러내리곤 한다. - (소영자, <운동화>에서)
해방 직후 추첨에 의해 다섯 켤레씩 운동화를 나누어 주던 시절, 위의 저자는 아깝게도 당첨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수업을 마친 후 담임 선생님께서는 제자를 불러 운동화 한 켤레를 따로 챙겨 주셨다. 너무 운동화를 갖고 싶어 하는 제자를 위하여 선생님께서는 당신 몫으로 배당된 운동화 한 켤레를 흔쾌히 제자에게 주신 것이다. 사제 간의 정이 메말라가고 교권마저 땅에 떨어진 이 시대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참으로 가슴 뭉클한 사연이 아닐 수 없다.
김사은의 『뽕짝이 내게로 온 날』은 아마도 지금껏 나온 수필집 중에서 가장 특이하면서도 개성 넘치는 책이 아닐까 싶다. 방송인과 문인으로서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대중가요의 가사와 연관된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삶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상처는 상처를 치유한다. 마음속 상처는 돌보지 않으면 무뎌지는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그렇게 한 번씩 노래를 통해 마음속 상처를 끄집어내고, 아프게 닦아서 그 상처를 다시 가슴에 품고 산다. 그 아픈 상처가 놀랍게도 삶의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 (김사은, <옛 상처도 힘이 된다>에서)
조용필의 대중가요 <상처>를 선곡한 공개 방송 노래 경연 참가자들이 예심에서 탈락한 경우가 드물다는 에피소드를 소개한 후 저자는 위와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노래를 통해 마음속 상처를 끄집어내고, 아프게 닦아서 그 상처를 다시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은 단지 저자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 살면서 모두 이런저런 상처를 입게 마련이고 그 상처를 통해 조금씩 성숙해지며 단단해진다. 따라서 “그 아픈 상처가 놀랍게도 삶의 에너지가 된다.”는 저자의 고백은 강한 파장을 지니면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김사은의 수필집은 이처럼 독특한 형식과 개성 넘치는 문체, 삶에 대한 날카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통찰과 유머 감각을 절대 놓치지 않는 여유로운 태도에 이르기까지 수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추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강력한 수상작 후보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최종 순간에 이 수필집은 아쉽게도 백봉기의 수필집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에게 수상을 양보하고 말았다.
책상과 서랍 속은 말끔해졌지만 버릴 것들을 바라보니 섭섭하다. 하지만 살다보면 버려야 얻는 이치도 있지 않는가. 손에 든 물건을 버려야 다른 물건을 다시 잡을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추억까지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물건 하나 명함 하나하나에 주어진 존재의 의미와 기억들은 결코 버리고 싶지 않았다. 반나절 내내 서랍과 책장은 청소했지만 결국 내 가슴속의 서랍은 정리할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난 뒤 다시 이런 날이 올 때는 저 빈 자리에 어떤 물건들이 자리를 잡고 있을까. 저 명함철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기억으로 다가와 자리를 잡을까. 아름다운 인연으로 내 가까운 곳으로 찾아올 손님은 누가될지 기대해 본다.
-(백봉기, <서랍을 정리하며>에서)
저자 백봉기는 어느 날 서랍을 정리하며 “살다보면 버려야 얻는 이치”를 깨닫는다. 수필의 최고 미덕이 빛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수필이란 이처럼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 모두가 영위하는 ‘일상적 삶’이라는 광산에서 ‘이치’, 혹은 ‘지혜’라는 금은보화를 캐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나 광맥을 발견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나 수필을 쓸 수도 없다. 사실 수필은 누구나 쓸 수 있는 쉬운 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선택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어려운 글이다. 수필은 부자나 지위, 학식이 높은 사람도 쓸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쓸 수 있지만 삶을 치열하다 하리만큼 성실하고 당당하게 살아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쓸 수 없는 글이기 때문이다.
백봉기는 결혼식 주례를 보기 전에 술에 취하는 바람에 하객을 피서객으로 잘못 말하는가 하면, 후배하고 이야기하다가 방송 시간을 놓치는 대형 방송 사고를 친 실수담부터 불과 0.001% 차이의 알코올 농도 때문에 음주 운전 단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아찔한 실수담까지 웃음을 자아내게 표현하는가 하면, 시집 못 간 노처녀 맏딸에 대한 깊은 사랑과 걱정, 끊임없이 사고치는 손주에 대한 고민, 신학대학 입학 문제로 부모 및 스승님과 심각하게 갈등하던 내력 등에 이르기까지 쉽게 밝힐 수 없는 사적인 영역의 일마저 매우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저자가 실수와 염려, 고민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저자가 인생을 떳떳하게 살아왔음을 반증한다.
저자는 병아리 교사 시절에 순수한 열정으로 선배 교사들이 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교육적 시도를 통하여 큰 보람을 느꼈던 일부터, 은퇴 후 진로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까지 항상 도전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몰려오는 시련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이하여 극복하면서 마침내 달관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고향 군산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자부심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각종 행사를 주도적으로 유치하여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가 하면 일체의 기구에 의한 인위적인 생명 연장을 단호히 거부하는 내용의 ‘사전의료지시서’를 미리 써 놓고 “화장을 하여 선유도 근처의 바다에 뿌려 달라”는 내용의 유언을 너무 이른 나이(?)에 하는 바람에 자녀들을 당황케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누구나 본받아야 할 죽음에 대한 당당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하필이면’을 삶의 긍정적인 지표로 삼으려 한다. 잘난 사람만 바라보고 산 삶에서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서 살고 싶다. 하필이면 이 차를 타게 해 줘서 고맙고, 하필이면 이 직장에서 이 사람들과 같이 일하게 돼서 고맙고, 하필이면 이 직장에서 이 사람들과 같이 일하게 돼서 고맙다는 마음으로 근무하겠다. 하필이면 당신을 만나 아들 딸 잘 키우고 예쁜 손자까지 보면서 사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고, 하필이면 그때 작은집에 갔다가 당신을 만나서, 눈에 콩깍지가 끼어 결혼했지만, 지금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 아닌가!
- ( 백봉기, <하필이면>에서)
‘하필이면’의 정신과 같은 낙관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백봉기의 인생관은 그러나 어린 시절의 가난과 방황, 진학과 진로를 두고 수없이 방황하고 고민했던 과거, 교사와 방송인으로서 일과 직업에 투철하고자 했던 치열한 프로 근성, 지역과 가정에 대한 무한히 사랑, 가족과 친구, 동료들의 기쁨은 물론 아픔과 슬픔까지 함께 껴안으려 했던 사랑과 배려의 정신, 그리고 목표했던 일은 온갖 난관을 무릅쓰고 해 내었던 추진력 등이 수필의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기에 허황되게 들리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유로 김사은의 『뽕짝이 내게로 온 날』은 훗날을 기약하게 되었고 백봉기의 수필집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가 영예의 수상작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이 상은 단지 한 권의 수필집에 대한 수상이 아니라 그가 살아낸 치열한 삶에 대한 응분의 대가이며 그가 가족 및 선후배․동료와 함께 나누었던 사랑의 보답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수상을 축하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