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여, 그 사랑의 고리
이순금
자동차로 얼마를 달려갔을까. 우리는 소양강에 도착했다. 곧이어 배에 올라 물길을 따라서 상류로 향했다. 청평사를 답사하기 위해서다. 배가 들어가는 방향의 오른쪽을 바라보니, 얕은 산줄기 하나가 목이 말라 기어 내려온 자라처럼 팔을 벌리고 엎드려 있다. 십여 분을 나아가 선착장에 내리니 청평사 가는 길이 시야에 들어온다. 초입의 그 길은 돌멩이와 자갈과 거친 흙으로 깔려 있다. 무엇인가 순탄치 않은 사연이 숨어있음을 말하려는 듯했다.
계곡의 물소리를 따라 절로 가는 길을 오르다 보니 구송 폭포 아래에 공주 굴이 있었다. 그리고 공주와 상사뱀의 전설을 형상화한 동상을 만났다. 찬바람 속에서 험한 계곡의 돌멩이 위에, 공주의 기품이라기보다는 세상 물정을 다 섭렵한 씩씩한 표정으로 여유롭게 앉아 있다. 중국 황제의 딸로서 부귀와 영화를 누려야 할 몸이 어쩌다 해동 땅의 거친 계곡에 숨어 살아야 했을까. 여기서 청평사는 조금 더 올라가야 했다.
황제의 딸로 태어난 평양 공주는 아름답기가 그지없어 주변에서 보는 사람들마다 칭송이 자자했다. 더구나 젊은 남자라면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신분의 차이 때문에 감히 드러내질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평민 출신의 한 젊은이가 공주를 사모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죽으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죽은 청년은 구렁이가 되어 공주의 몸에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고 공주는 이 일로 인해 황궁을 나와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곱게 자란 공주가 유랑을 하며 몸에 구렁이 한 마리를 매달고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형벌일 것이다. 떳떳하지 못한 처지에서 남의눈을 피해가며 수천리 길을 이동하기란 차라리 죽음보다 극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요즈음은 스토커라는 말이 있다. 원치 않는데 병적으로 쫓아다니는 사람을 이른다. 스토커는 법으로 제재할 수가 있는데 이 상사뱀은 그럴 수도 없었나 보다.
공주의 입장에서 보면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지 않았을까. 마음을 준 적도 없는 사람이 짝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뱀이 되어 달라붙는다면 너무 억울하고 슬픈 일이었을 것이다. 짝사랑이란 상대방 동의가 없이 이루어지는 일방통행이다. 그런데 왜 공주가 그 대가를 혼자 받아야 했는가. 생각할수록 가혹하기만 하다.
조선의 명기인 황진이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도, 그를 짝사랑하는 한 남자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 총각이 죽어서 상여가 나가는데 황진이의 집 앞에 이르자 꼼짝도 안 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황진이는 처녀의 몸으로 죽은 자를 위하여, 웃옷을 벗어 상여를 덮어주고 어루만져주자 상여가 움직였다고 한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황진이의 운명도 달라졌을까. 아마도 그가 평범한 아낙으로 살다 갔다면 그의 시조를 사랑하는 이들은 몹시 아쉬워할 것이다. 그렇다면 황진이의 운명도 필연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운명이란 단어 앞에선 마음이 약해진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보면 황진이는 그로 인해 더 큰 사랑의 의미를 후대에 던지고 간 것 아닌가.
짝사랑의 피해자 평양 공주도 전설에서 살펴보면, 상사뱀과의 동거에서 그를 핍박했다거나 인위적으로 떼어놓을 방법을 끝까지 동원하지 않은 듯했다. 어쩌면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점차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했던 건 아닐까. 함께 데리고 다니고 먹고 자며 상사뱀을 측은지심으로 대했을지도 모른다. 미움과 원망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모성의 자애로움으로 상사뱀을 돌보았을지 누가 아는가.
공주가 구송 폭포에서 목욕을 하고 청평사로 불공을 드리러 갈 때도 상사뱀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 했고, 이를 뱀이 승낙을 한 것은 둘 사이에 믿음이란 것이 존재했던 것일 게다. 공주는 오랜 고통과 시련을 통해 이미 상사뱀을 용서하고 나름대로의 높은 인욕의 세계를 터득하지 않았을까 싶다. 즉 경계에 걸림이 없는 경지를 말이다. 어쩌면 상사뱀을 불쌍히 여겨 그의 해탈을 부탁하러 청평사 부처님께 올라가지는 않았을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공주가 이미 회전문을 들어서서 대웅전으로 향할 때 그 마음속엔 모든 원망과 미움은 사라지고 없었으리라. 오직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사뱀을 위해 기도했으므로 그 마음을 뱀이 알았으리라. 하여 스스로 구렁이의 몸을 벗고자 했을 것이다. 공주가 원망을 자비로 승화시켜서 시련을 이겨내고 결국은 서로를 구원한 것이라고 헤아려본다.
공주와 상사뱀의 전설은 분명 짝사랑의 비극이지만 그 상황을 인내하고 승화시켜서 서로 원만히 풀어 내리는 데서 구원을 찾을 수가 있다. 서로 응징하고 힘의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고 함께 호흡하는 것이다. 서로가 미래의 밝은 쪽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다. 공주가 지긋지긋한 상사뱀을 극단적인 사고로 대하지 않고 순리로 기다리며 인내한 것은 구도자의 모습이다. 역경 속에서도 상생의 길을 찾으려 한 것이다.
구송 폭포 아래 평양 공주가 넓적한 돌 위에 앉아서 한 손에 뱀을 들고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좁디좁은 공주 굴에서 처음 자던 날의 암담했던 심정을 털어놓는 걸까. 아니면 구송 폭포의 물소리를 인연법의 깨달음으로 일러주고 있음인가. 그렇잖으면 지난 생의 해탈 이야기를 담담하게 주고받는 걸까. 한 생의 진한 인연으로 만나 전설의 주인공이 된 공주와 상사뱀은 청평사 올라가는 계곡에서 지금도 그렇게 끝없는 얘기를 나누고 있다.
폭포의 맑은 물줄기를 뒤로 하고 청평사 마당에 올라서니 오봉산에 둘러싸인 절 모습이 무척 포근하다. 상사뱀이 들어가려다 벼락을 맞았다는 회전문을 바라다본다. 구송 폭포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를 헤아려보니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구렁이의 몸으로 기어 오면서 어찌 애욕의 집착심만이 있었겠는가. 공주와 함께한 긴 시간에서 이제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기회를 찾아 때맞춰 그 문지방을 넘었을 것이다. 그렇게도 두껍고 질긴 애증의 고리를 스스로 풀어내려 함이었으리라.
전설 속의 상사뱀처럼 자신도 괴롭고 상대방도 괴롭게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무서운 집착이라고 볼 수 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은 불행을 불러오는 까닭에 시작도 아름답고 결과도 아름다운 관계를 꿈꾸어 본다. 일방통행이 아닌 서로가 합의하는 관계 말이다. 남과 여의 일이든, 가족관계이든, 이해가 얽힌 집단 간의 일이든 모두가 소통하고 배려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공주와 상사뱀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금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