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장단의 진동면 동파리에는 찬성공파의 좌찬성이신 18대(煥자 기준)
諱 敬修조부 산소(남방한계선 안쪽)와 12대조 되시는 諱 瀷字 祖父( 黙齊公)산소
그리고 매계선생의 당숙이시며 영의정을 지낸 諱 錫文조부의 산소등이 모셔져 있는데
이곳은 민통선 안으로 정확하게는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산 60번지와 그 일대 선영이다.
장파리에서 임진강 리비교를 건너 신원확인 후 선영에 가서 참배할 수 있는곳으로,
6.25전쟁후 접근할수도 없었고,후손들의 무관심으로 위치도 파악 못하다가
2007.10.28 종친들과 처음 어렵게 참배후, 2008.10.18(토) 두번째로 참배했다.
민통선 안은 문의할곳도,이정표도 없는데 리비교를 건너 3키로미터 정도 되며
중간에 충간공 산소(미군부대입구)를 지나서 풍천임씨 묘소안내 표지판 있는 곳에서
좌회전하여 1키로미터 정도 가다가 다시 좌회전하여 작은 고개를 넘어간다.
또 서울 고척동(고척고등학교 뒷편)에는 매계선생의 아들과 손자되시는
諱 士虞(別提公,14대조부)와 諱 胤禧(寧越公,13대조부)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성묘는 짝수의해 10월 세번째 목요일이다.
1.장단
12대조 휘 瀷(묵제공) 산소(2008.10.18) - 진동면 동파리 을좌
2007.10.28 처음 참배 당시 현장으로 6.25전쟁이후 계속 참배를 못해 숲으로 우거져 있었다
첮해는 벌초를 하고, 전기톱이 없어서 적은나무 일부만 베어내고 굵은 나무는 남겨 두었었다
흙속에 뭍혀있던 문인석을 일으켜 세우는 작업을 하는중이다
2008년에 다시 찾아 전년도 다 베어내지 못한 나머지 나무를 모두 베어냈다
장비가 없어서 둘래석도 흙을 조금 파내는데 그쳤는데 오랜세월이 지나도 뚜렷이 남아있다
정리후 종친들과 같이 참배를 올리는 장면
2012.10.25 다시 찾은 선영
2012년은 서울 등지에서도 참여하여 모두 22명이 참배했다.
통일되어 자유로이 참배할 날을 그려본다
黙齊公諱瀷行狀
先府君의 諱는 瀷, 字는 仲澤, 號는 黙齋이다. 小學으로써 一身을 단속하였고, 또 孝友의 行이 있어 祖考 郡守府君이 喪에 죽(粥)만을 마시고 삼년동안 侍墓하였으며, 매번 기일을 만나면 초상 때처럼 애통해하였고, 사당에 들어서면 정숙과 공경을 다하여 마치 神明을 대하듯 하였으니, 날마다 冠帶차림으로 사당을 참배하였고, 몸에 질병이 있지 않으면 이를 폐지한 적이 없었다. 郡守公의 상을 마친 뒤에 형제와 제매(娣妹)가 한 집에 함께 주거하였으며, 伯父公이 응당 先君의 手上이지만 어려서부터 폐질이 있으므로 선군이 선대의 제사를 받들었고, 또 백부공이 室家가 없으므로 선군의 집에 모셨는데, 선군이 영아(嬰兒)처럼 보호하는가 하면 그 마음을 즐겁게 하였고 그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가산을 분배할 적에는 기름진 田地 건전한 노복을 모두 백부공에게 주었는데 응부라는 하인이 선군에게 돌아오게 되자 선군이 “이 하인은 부지런하고 사리를 아는데 만약 형에게 이 하인이 없으면 생계를 어떻게 유지 하겠는가?” 하고는 노약한 하인으로 바꿔서 차지하였다. 그 뒤에 백부공이 요첩(妖妾)을 두었다가 그 유혹에 빠져 노복을 모두 팔아버리고 자력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려 하므로 선군이 이를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하루는 백부공이 응부를 팔기 위하여 상대자와 이미 약정되었으므로 선군이 도저히 해약시킬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應夫의 몸값을 준비하여 원만히 매상해주자 백부공도 매우 기뻐하였으며, 상대자와 문권을 작성할 때 선군이 ‘제가 이 하인을 도로 산 것은 타인에게 넘겨주지 않아서입니다. 만약 이 하인을 제가 차지한다면 형이 앞으로 어디에 의뢰하겠습니까? 이전대로 형이 부리도록 하시오“ 하므로 백부공이 매우 감격해 하면서 다른 하인과 바꿔 주기를 굳이 청하였다. 또한 선군이 백부공을 위하여 오래 전에 도망친 婢女의 문권을 만들어 두었는데 그 뒤 季父公이 그 비녀를 우연히 여관에서 만나 잡아 왔으며, 우리 집의 한 비녀가 이미 늙었고 또 자녀를 두었는데 백부공이 그 중의 한 딸을 비녀로 삼기를 청하므로 先君이 즉석에서 승낙 하였으며, 그 뒤 백부의 생계가 날로 실패하여 그 婢女마져 팔려고 하므로 선군이 문권(文券)을 만들어 주었으니,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高祖考 매계선생이 戊午士禍때에 원사(冤死)하였다가 중종때 신원(伸寃)된 뒤에 자손들이 녹용되어 祖考郡守公의 세 곤제(昆弟)가 다 早年에 入住하였는데 선군도 당연히 녹용(錄用)서열에 들어 있으므로 요로에 있는 집안 친족들이 모두 出仕를 권유하였으나, 선군은 이를 불응하고 布衣로 일생을 마치면서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평소 譜牒에 유심(留心)하여 家譜의 착오된 부분을 수정하였고, 또 諸家의 보첩을 널리 수집하여 八高祖의 系牒을 만들려다가 마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先君은 천성이 순수하여 남들과의 불화가 없었으며, 淸素함을 좋아하여 榮華를 생각지 않고 오직 근검을 道로 삼았으며, 學과 行에 전력하여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고, 또 擧業(거업-과거시험에 의한 공부)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誠信으로 대하고 돈목이 더욱 지극하였으므로 우리 집에서 寄食하는 遠近의 친족과 빈객이 항상 안팎에 가득하여 하루도 한산한 적이 없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金山 舊家에 주거하여 문을 닫고 擧業을 폐지하였으므로 친족들이 草野에서의 은둔(隱遯)을 민망하게 여긴 나머지 매계의 奉祀孫이라는 單子를 禮曹에 내고 홍문관의 懸保(보증인의 이름을 기록한 명부)를 시켜 初仕의 계제를 만든 뒤에 이 사실을 선군에게 알리자 선군이 怒하여 주관자에게 글을 보내 나무라고 그 단자를 속히 빼 버리도록 하였다. 子弟를 가르치는 데는 으레 孝悌를 근본으로 맨 먼저 小學을 읽혀 쇄소(灑掃)하는 절차를 익히게 하였고 일과를 정하여 글을 가르치되 簡單이 없도록 하였으며 선현들의 격언을 베껴서 壁上에 부쳐 놓았고, 밤에는 으레 書史를 강독하여 그 定數를 채우되 하루도 빠뜨리지 않도록 하였으며, 평소의 훈계는 조상을 받들고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고 벗과는 신의로써 立心, 입각(立脚)하는 기본을 삼았다. 不肖가 비록 그대로 행하지는 못하나 다행히 本性을 상실하여 큰 허물에 빠지지 않게 된 것은 사실 가정의 훈계 때문이다. 先妣 평산신씨는 장절공 諱 崇謙의 후예요, 大司成 贈判書 諱 敏一의 따님이다. 판서공의 成滄浪(창랑은 成文濬의 호)의 따님을 맞이한바 바로 牛溪선생(우계는 成渾의 호)의 손녀인데 지극한 덕과 아름다운 行이 名門들 사이에 알려지므로 세상에서 ”성씨 가문의 都統은 부인에게 전해졌다“ 고 칭하였다. 成부인의 소생이 바로 先妣로 그 덕행이 일체 成부인을 본받아 어렸을 적부터 아름다운 소문이 이미 드러났고, 선군과 定婚하여 納采禮가 있은 뒤에 成부인이 별세하므로 先君의 집에서 다른 뜻이 없이 삼년을 기다리다가 선군이 이어 외간(外艱-아버지이 상)을 당하였다. 이에 신씨의 문중에서 先妣의 혼기가 늦어질 것을 민망하게 여기고 장차 이의가 생기게 되므로 판서공이 ”그 아이는 의리를 알고 있으므로 그 의사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사람을 시켜 사실을 말하였다. 先妣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삼강행실도 중에서 死生間에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몇 사람의 사적을 써서 드리므로 판서공이 매우 어질게 여겼고, 문중에서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이의가 그만 저지 되었으며, 그때 이 사실을 나라에 알리자는 이도 있었으나, 문중에서 적극 만류하였다. 先妣가 막 于歸(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가는 것)하였을 때 先君의 弟妹와 病兄이 모두 있었는가 하면, 제사가 매우 빈번하고 人口가 매우 많았는데, 모두가 先君만을 기대이게 되었다. 우리 집이 이전에는 풍요한 편이었으나 喪亂을 격은 이후로 집안에 살림을 주간할 부인이 없고 억센 비복들이 날마다 훔쳐내기만 하므로 살림이 탕진되어 창고에 비축된 것이 없었다. 이에 先妣는 家事를 獨當하여 제사를 받들고 사람을 대하는데 정과 예를 다하였고, 弟妹를 가취(嫁娶)시키는데 婚期를 놓지지 않았는가 하면 온갖 준비가 다 先妣의 勤苦에서 나왔으니, 그 難甚했던 정상은 말할 나위도 없다. 혹은 자신의 장구(粧具)와 의류를 몰래 팔아 준비하고 나서, 심지어 기한(飢寒)까지 극심하였으나, 괴로워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걱정해하는 표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外人들은 생계가 무던한 편이다 하였고 집안에서는 神明의 도움이 있는 가 의아하였다. 병자호란 때에 우리가족이 마침 內浦 保寧縣에 寓居해 있었는데 그 지역이 海隅에 위치하여 난을 피하는데 매우 적합하였다. 그곳 太守와 水使가 先君에게 우리 家屬들이 海島로 들어가 난을 피하려하니 京中의 士大夫들 중에 우리와 함께 떠날 대상은 오직 그대의 집뿐이다. 우리가 그대를 위하여 식량 등을 많이 준비하겠으니, 그대도 가속을 거느리고 함께 떠나는 것이 어떠한가? 하므로 선군도 괜찮다고 여기고는 즉시 승낙하고 돌아와서 先妣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다. 이보다 먼저 우리 家廟의 神主를 모두 金山 舊家에 모시고 季父가 그곳에서 받들고 있으므로 기회를 보아 다시 서울 家廟에 모시려 하였으나 시국이 어수선하여 미처 옮기지 못하였는데 이때 先妣가 ”임금은 아무리 난을 당하더라도 宗廟를 타인에게 맡기는 법이 없는데 府君이 이 家門의 宗子로써 혹 평소 같으면 다른 아우에게 가묘의 보호를 맡기더라도 그다지 불가하지 않겠지만, 지금 난리를 만나 妻子의 안전만을 위하고 조상을 생각지 않으시니 대의에 어긋납니다. 아예 소량(小諒)을 버릴지언정 大義를 버릴 수 없습니다. 하므로 先君이 듣고 표정이 달라졌다. 드디어 도보로 출발하여 갖은 고생을 다 격어가면서 金山으로 달려갔다. 그때 이 사실을 아는 이는 모두 탄복하였다. 선비는 천성이 매우 인자하고 의리를 훤히 알았는가 하면 婦道와 온갖 일을 모두 다 익혔으며, 평생에 문자를 보지 않으면서도 小學, 內訓, 內則, 三綱行實圖등의 글만은 성부인 에게 대충 배워 모두 통하였다. 평소에 신중을 기하여 일동, 일정에 법도가 되었고, 말은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무거웠으며, 자신의 行能을 남에게 과시하는 적이 없었고, 宗族을 대하는데 성실을 다하였으니, 빈궁한 사람을 보면 힘을 다해 구호하였고 혹 훼담하는 자가 있어도 듣지 못한 척 할 뿐 절대로 맞서서 따지지 않으므로 나중에는 그 훼담이 저절로 잠잠해졌다. 또한 평소에 늘 말하기를, “나에게 잘못이 없으면 아무리 橫逆이 가해와도 걱정할 나위가 없다, 만약 맞서서 따지다가는 분쟁만 더할 뿐이니, 이는 善導가 아니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내외와 원근이 모두 다 敬愛하였다. 가족이 매우 많은데다가 事務 또한 繁多하고 종족과 빈객이 항상 안팎으로 가득 찼으나 先妣가 의연한 표정으로 물과 밥을 마련하였으며, 아무리 끼니가 어렵게 되더라도 음식이 으레 豊潔 하였으므로 빈객들이 모두 만족해하는 마음으로 돌아갔다. 子婦가 혹 이를 싫어하거나 괴로워할 적에는 선비가 항상 타이르기를, “조상을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人道의 당연한 일이다. 만약 이를 외면한다면 어찌 禽獸처럼 높이 날아가고 멀리 달아나서 인간에 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타인이 우리 門前을 지나면서 들어오지 않게 된다면 그 주인의 賢不肖가 과연 어떠하겠는가.” 고 하였다. 자제를 가르치는 데는 義方(도의에 맞는 교훈)을 근본으로 하여 만약 부잡(浮雜)하거나 방탕한 일을 보면 반드시 꾸짖어 제지시켰다. 不肖가 어려서부터 가까이 모셔 많은 사람을 받았으나, 엄외(嚴畏)하는 마음은 조금도 해이해진적이 없었다. 不肖가 13세때 한 長老의 집에 갔는데 마침 장마가 여러날 계속되고 있었다. 장노가 “나는 넓은 집에 살면서도 장마가 괴로운데 너는 草堂에 살면서 어떻게 지내느냐?” 고 하기에 불초가 나이 어리고 사리를 알지 못하는 터이라 경솔히 대답하기를, “띠집은 寒士의 본래 거처이므로 괴로운 생각이 없습니다.“ 하였더니, 좌우에서 듣고 자뭇 기이하게 여기는이가 있었고, 이어 집으로 돌아가 이 전말을 이야기 하였더니, 집안사람들도 다 잘한 대답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先妣가 가만히 앉아서 언잖아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네가 진정 安食, 樂道하여 띠집을 싫어하지 않느냐? 그 실제는 없고 다만 말로써 남을 상대하려는 습관은 기르지 말아야한다. “너는 어찌 장노의 말씀대로 ”띠집이 괴롭습니다. 고 대답하지 않았느냐?” 하였다. 불초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실언했음을 깨닫고는 그만 喪氣되어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였으니, 그 교훈하는 도가 다 이같은 類였다. 일찍이 불초등에게 훈계하기를, “丈夫의 行事는 마치 靑天白日과 같아서 혐의받을 만한데 끼어들지 말아야한다. '古人의 오이밭에서는 신을 고쳐신지 말고 오얏나무아래서는 冠을 바루어 쓰지말라.' 는 말은 마땅히 일생동안 외워두어야한다,” 하였는데, 不肖가 이를 가슴속에 간직하지 못하고 前後로 범한적이 너무많다, 이제와서 비탄하며 손가락을 깨물어도 아무 소용이 없고 다만 통곡할 뿐이다. 불초등이 매번 과오를 범할적에는 대뜸 가책(呵責)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앞에 불러 놓고 義理를 들어 타이르되 그 말이 마치 부술(斧銊)과 같으므로 땅 구멍을 뚫고 들어가고 싶었으나, 되지 않았으며, 매번 科試에 낙제한 뒤에 자신의 실력이 미진한 것을 생각지 않고 항상 억울해하는 뜻을 품을 적에는 으레 科第란 운명에 메인 것이니, 그 得失을 介意할 필요가 없다, 고 위로해 주곤 하였다. 아! 지극한 德이 있다 해서 후한 복을 받는이가 더문가보다. 先妣같이 純儉하고 특이한 行으로도 일생동안 勤苦만 다하였을뿐 원만한 榮樂을 누리지 못하였으며, 불초가 當家한 뒤 역시 빈궁하여 봉양하는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 또 美德을 闡揚하여 후세에 전하지도 못하였으니 어찌 그 後嗣가 있다고 하겠는가? 아1 마음이 아플뿐이다. 不肖子 孝昌이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쓰다.
민통선내 동파리의 묵제공산소 가는 길목에 있는 충간공 산소(매계선생의 당숙인 錫文 조부)
2012.10.25 석문 조부 산소(역시 철망안에는 못들어가고 밖에서 참배)
忠簡公諱錫文墓誌
公의 諱는 錫文이요, 字는 順保로 昌寧縣人이다. 諱 瑞는 高麗太祖의 둘째따님 德宮公主의 소생이고 瑞의 아들 諱自奇는 벼슬이 平章事에 이르렀다. 自奇의 九世孫은 諱 元桂이고 원계의 아들 諱遇禧는 벼슬이 判威儀寺事에 이르렀다. 遇禧의 아들 諱敬修는 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에 追贈되고 敬修의 아들은 諱 沆이다. 沆은 젊어서부터 淸廉과 謹愼으로 알려져 있었고, 居昌, 陽智, 務安, 天安등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여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고, 두 차례 사헌부에 들어가 掌令, 執義가 되었으므로, 세종이 유능한 인재로 여기고 知刑曹事로 특채, 通政大夫 품계로 승진시켜 兵曹事를 겸임하게 하였고, 만년에는 全羅道 觀察使로 계시다가 별세하였으며, 아들 忠簡公의 勳功으로 인해 純忠積德補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昌盛府院君으로 追贈되었고, 母親 驪興閔氏는 知司諫院事 渫의 따님으로 貞敬夫人에 봉해졌으며 永樂(명조연호) 癸酉(1413) 九月 甲申日에 忠簡公을 낳았다. 公은 어려서부터 총명 민첩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世宗 壬子년(1432)에 司馬試에 합격되고 同 甲寅년(1434) 봄 成均館發策試士(임금이 성균관에 거동하여 책문으로 시험을 보이는 것)에 公을 제2위로 선발하였다. 그해 삼월에 世子左正字로 채용되고 六月에 宣務郞品階에 右司經으로 승진되었다. 구월에 左司經으로 옮겨지고 同 乙卯년(1435)에 集賢殿副修撰知製敎에 除授되었다. 同 丙辰년(1436)에 奉常寺主簿兼 春秋館記事官에 제수되었다가 바로 司諫院左正言 知製敎에 옮겨지고 同 丁巳년(1437)에 刑曹佐郞에 제수되었다. 同 庚申년(1440)에 校理로 승진되었다가 여러 차례 옮겨져 吏曹正郞에 이르렀고, 同 癸亥년(1443)에 親喪을 당하였고 동 乙丑년(1445)에 禮曹正郞에 제수되었다가 바로 조그만 사건에 의해 파직되자, 이후부터 벼슬에 뜻이 없어 모친을 모시고 長湍으로 돌아와 봉양하였고, 同 丙寅년(1446)에 다시 刑曹正郞에 제수되었다가 또 사건에 의해 파직되었다. 同 丁卯년(1447)에 禮曹正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景泰(명조연호) 庚午년(1450)에 通善郞品階에 安山郡事로 제수되자 끝내 사양하려 하였으나 公의 丈人인 參贊公 安崇善의 단호한 책망을 받고 하는 수 없이 任地에 나아가 道內에서 최고의 치적을 남겼다. 世祖가 大君으로 있을 때 공의 재능을 인정하였고, 국정을 총리하게 되어서는 공을 크게 등용하여 하였는데, 단종2년(1454)에 洪州守令이 결원이 되어 적임자가 없자, 安山郡事 曺某는 치적이 대단하니 이 직책에 적합하다고 말하고 奉列大夫(文官으로 正四品의 벼슬)품계에 특진 洪州牧使로 부임시켰고, 그해 朝廷에서 각도 監司에게 우수한 수령을 추천함에 監司 朴彭年이 특별히 공을 추천하자, 同 乙亥년(1455) 4월에 이르러 특명으로 知刑曹事를 겸임하게 하였다. 閏六月에 通政大夫品階에 承政院同副承旨經筵參贊官 知製敎 春秋館編修官 知工曹事로 툭채되고 병자년(1456)에 우부승지에 승진, 知禮曹事로 옮겨지고 推忠佐翼功臣이란 勳號가 내려졌으며, 이어 도승지에 이르렀다. 공은 오래동안 王命의 出納과 중대한 언론을 맡아 그 陳述이 詳明하고 응대가 적절하였으므로 임금의 대우가 더욱 돈독하여 여러 차례 침전으로 불러 중대한 국정을 은밀히 의논하곤 하였다. 天順(明朝 연호) 己卯년(1459) 봄에 明나라가 皇帝가 우리나라에서 建州衛의 都督 納哈董山등과 몰래 내통하고 관직을 주었다하여 給事中 陳嘉猷에게 勅書를 보내어 문책하자,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어 이 사건을 해결하려 하였으나 적임자가 없었다. 이에 임금이 특명을 내려 공을 사신으로 삼고 嘉靖大夫品階에 吏曹判書 寶文閣提學으로 승진, 昌寧君에 봉하였는데, 그해 4월에 公이 陳嘉猷를 따라 明나라에 들어가 사실을 推撻하여 사건을 잘 해결하였고, 8월에 戶曹로 옮겨 判書로 승진 資憲大夫품계에 올랐다가 바로 正憲大夫品階에 올라 中外度支事를 총괄하였다. 甲申년(1464) 정월에 부친의 상을 당하였고, 병술년(1466)에 상을 마치자 崇政大夫로 승진 昌寧君에 受封되어 戶曹判書를 겸임하였다가 4월에 議政府 左贊成으로 승진, 判義禁五衛都摠管을 겸임하였고, 겨울에 屛帶한 벌과 小篆體(소전체)로 浮塵軒(부진헌)이라 쓴 額字를 下賜받았다. 정해년(1467) 정월에 경기, 충청, 경상 三道의 提堰都體察使가 되었고 여름에 左贊成으로 승진 되었다. 이해 4월에 咸吉道 吉州사람 李施愛가 節度使 康孝文과 牧使 薛丁新을 殺害, 軍士를 일으켜 叛旗를 들고 永興以北지방에 檄書를 날려 監司와 守令들을 마구 살해시키므로 임금이 公과 綾城君 具致寬을 불러서 公에게 咸吉, 平安, 黃海, 江原, 四道의 兵馬副總使에 임명하고 활, 화살, 갑옷, 투구, 신, 비단, 雨備 등을 下賜한 뒤에 中官을 보내어 전송하였다. 이해 6월에 公이 咸興에 도착 장병들을 배치하여 要害處를 막고 여러 차례 싸움에 모두 승리, 李施愛의 머리를 베어 서울로 보내고 구월에 凱旋하자, 임금이 茂松君 尹子雲을 미리 보내어 法酒를 내려 위로하고 大內(임금이 거처하는 곳)에 불러 크게 칭찬하고 위로한 뒤에 큰 잔치를 베풀고 손수 술잔을 들어 권하였다. 이어 大匡輔國崇祿大夫品階에 議政府左議政으로 승진, 春秋館事 世子侍講院師傅를 겸임하고 精忠出氣布義敵滊功臣이란 勳號를 받았으며, 바로 領議政으로 승진, 藝文館 弘文館 觀象監事를 겸임하였다. 戊子년(1468) 九月에 임금이 昇遐하고 睿宗이 즉위하였을 때 逆臣 南怡 등이 叛逆을 꾀함으로 公이 조용히 계략을 세워 그들을 베고 靖難翊戴功臣이란 勳號를 받았으며, 今上(성종을 일컬음)이 즉위할 때에는 定策(임금이 옹립을 도모 하는 것)에 앞장섰다가 庚寅년(1470)에 창녕부원군에 受封, 經筵事가 되고 그 이듬해 辛卯년에 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이란 爵號를 받았다. 을미년(1475) 봄에 임금이 視學(임금이 太學에 거동하여 釋奠, 養老의 의식을 행하는 것) 할 때에 공이 독권관(임금이 직접 참석하는 과거장의 시험관)이 되어 朴文衡등 20명을 뽑았고, 丙申년(1476)에도 독권관이 되어 尹喜孫등 13명을 뽑았다. 여름에 다시 좌의정에 제수되었다가 8월에 지병으로 벼슬을 사양 창녕부원군은 그대로였고, 同丁酉년(1477) 봄에 領中樞府事에 除授되었다. 이월에 임금이 經筵官에 대한 잔치를 내렸을 때 公에게 織錦緞 十匹이 下賜되었고, 3월 殿試(문무과의 初試, 覆試를 거친자가 치르는 최종의 시험) 때에도 독권관이 되어 辛秀裾(신수거)등 33명을 뽑았다. 공이 평소에 疝症(배, 허리, 근육통)을 앓아오다가 만년에 이르러 증세가 악화되자 임금이 太醫를 보내어 진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公은 藥을 사절 子姪들에게 후사를 당부하고 邵康節(중국의 유명한 학자)의 말에 “내가 백년동안의 태평성대를 만났으니 다행이라 아니힐 수 없고 나이 70이 되도록 건강이 좋았으니 장수라 아니할 수 없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나는 지위가 최고에 이르렀고 나이가 60이 넘었으니 지금 죽은들 무엇이 한이 있겠느냐? 다만 장성한 자식이 없어 가사를 맡기지 못하는 것이 유감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지병이 악화되어도 정신은 감소되지 않아 자질들과 함께 中國魏나라, 진나라 시대으 인물에 대해 자상히 애기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병상에 누워 시끄러움을 피하다가 병세가 크게 악화되어서는 급히 正寢으로 옮기게 한 뒤에 말씀하시기를, “이는 선인께서 지으신 집이니 내가 당연히 여기서 죽어야 한다.” 고 말하고 나서 장례를 소박하게 치러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8월에 별세 하였다. 公의 訃音에 임금이 매우 哀悼하여 朝會와 市場을 중단시키고, 후한 부의에 품계를 더해주는 承旨를 보내 弔問하였다. 公은 天性이 精明하고 志槪가 高潔하며 어버이를 지극한 孝로 섬기고 친족들에게는 은혜와 믿음으로 대하고 비록 緦麻(五服가운데 가장 가벼운 석달복)와 祖免(袒은 왼쪽 소매를 것고, 免은 冠을 벗고 머리를 묶는 것으로 五服이외의 친척에 대한 애도의 표시)免服인 친척의 사이라도 가까운 친족과 똑같이 대하여 궁색한 형편을 도와주고 다정한 사정에 앞장서기를 혹시라도 뒤질까 걱정하였으며, 평소에 朱文公(文公은 朱熹의 謚號)의 小學을 좋아하여 자제들을 가르칠 때 으레 소학부터 읽히면서 이 글대로만 다 실천한다면 아무리 다른 글을 읽지 않았더라도 일생동안을 사업이 저절로 충분하게 될 것이다. 하였고, 忌祭가 돌아오면 제물을 매우 풍성하고 정결하게 장만하였으며 일생동안의 처사는 세밀하고 민첩하여 반드시 그 사실대로를 밝혀내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신중히 처리하고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公은 戶曹를 맡아본지 18-9년 동안에 경지를 정리하고 賦稅를 공평히 다루며 倉廩(곡물 창고)을 수축하고 府庫(문서나 재물을 넣어두는 창고)를 꽉 채웠으니 나라가 부유하게 되고 백성이 편안하게 된 정책을 다 公의 建白이었고 낭비를 줄이고 절약을 힘써 太倉(곡물창고)이 꽉 찬 예는 근세에 없었던 바이다. 世祖도 평소 公에게 卿의 處事는 하나하나가 다 시의에 적절하므로 나는 경의 서명만 보면 서류의 내용을 펴 보지도 않고 모두 재가하곤 했다. 고 하였으니 임금의 신임이 이와 같았다. 공은 청렴 검소한 것을 좋아하고 세속의 사치를 미워하여 언제나 굵은 베옷을 입었고 화샇ㄴ 것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사는 집터가 낮고 비좁았으나 벽조차도 제대로 바르지 않았고 일생동안 한번도 남에게 청탁을 넣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다 맑은 志節을 탄복하였으며 공무를 집행할 적에는 일체 誠으로 하였고, 君國의 일을 의논할 적에는 반드시 그 사실대로를 밝혀내어 간결하면서도 요긴한 것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임금이 많이 그 논의를 채택하였다. 公의 先墓가 長湍에 있었으므로 병이 났을 적에는 의례 하늘이 나에게 일년의 수명만 더하여 고향에 돌아가 쉬도록 해준다면 다행이겠다. 고 하였으니 이는 만년에 고향을 그리는 순수한 심정이었다. 이 모두가 어찌 공의 학문과 操行에서 나온 바가 아니겠는가? 공의 淸德과 雅量으로 다섯 朝廷을 내리 섬기고 君臣간의 禮遇가 育成하여 이름은 네 차례 忠勳府에 오르고 벼슬은 두 차례 정승에 이르러 功名이 始終 한결 같았으니, 아무런 유감이 없다 하겠다. 公의 처음 부인은 正憲大夫 議政府左參贊 大提學 兼判兵曹事 謚文甫 安崇善의 따님으로 後嗣가 없었고, 다음부인은 副司正 蔡河禎의 따님으로 한 아들을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이해 10월 26에 長湍 臨津 東村 子坐에 公을 禮葬하게 되었는데 공의 族姪인 檢閱 偉가 나에게 公의 銘을 부탁하였다. 내가 마침 忠勳府에 있고 또 일찍이 戶曹를 맡아본 적이 있었으므로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銘한다. 당당한 昌寧君이여 나라의 忠臣으로 벼슬이 두 차례 政丞에 오르고 이름이 네 차례 忠勳府에 올랐으니, 덕과 재주를 있는대로 다 폈네. 밤낮없이 나라일 위하다가 병까지 얻었으나 약 안 써도 낳으리라 여겼더니, 어찌 갑자기 먼 길을 떠나셨나. 임금의 거울 없어지고 하늘의 台星 떨어졌으나. 나라의 원로에게는 그 典刑(고래의 법)그대로 남는 법, 저 瑞谷에는 소나무
푸르르고 長湍에는 물 끊임없이 흐르네. 나의 이 銘 괜한 아첨이 아니야.
바로 忠簡公의 무덤인 때문일세.
純誠明亮佐理功臣 崇政大夫 達成君 兼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 知經筵事
徐居正이 삼가 銘하다.
장단(長湍)
장단(長湍)은 곧 내가 서울에 살고 있을 때, 조상의 산소를 모신 고향이었다.
생각건대 나의 13대조(代祖) 휘(諱 ) 경수(敬修) 밀직부사(密直副使) 증 좌찬성(贈 左贊成)의 묘소가
본부(本府,고을) 서곡(瑞谷) 구봉산(九峰山) 을향(乙向)의 평원에 있고,
부인 증 정경부인(贈 貞敬夫人) 평산김씨(平山金氏)의 묘소는 이와 광혈(壙穴)을 함께 하였다.
아들은 감사(監司)로 휘(諱)가 항(沆)인데 묘소는 부친의 묘소와 함께 있다(考墓同).
좌랑(佐郞) 휘(諱) 효창(孝昌)의 묘소는 국지(局地,局內,영역)내의 병좌(丙坐) 평원에 있다.
충간공(忠簡公) 휘(諱) 석문(錫文)의 묘소는 임진(臨陳) 동촌(東村)인 서하구곡(西河邱谷)의
자좌(子坐)에 있고(는데), 동쪽언덕의 신좌(辛坐)를 향한 평원(東坡向辛之原)은
곧 나의 7대조 휘(諱) 익(瀷)으로 숭정(崇禎) 때의 처사이신 증 이조참의(贈 吏曹參議)부군의 무덤이다. 숙부인 평산신씨와 합장하였고, 묘 앞의 사대석(沙坮石)에 성(姓)과 휘(諱)를 특별히 기록하였다.
오호라! 밀직공(密直公)의 자손들이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지내어 세상을 빛내고 이어 온 것은,
마땅히 위전(位田)의 풍후(豊厚)함이 있었을 것인데, 전래(傳來)한 것은 겨우 수일지경(數日之耕,
작은농토)만이 있어서, 옛일은 진실로 알 수 가없다.
처사공(處士公)의 위전(位田)은 우리 부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일지경(數日之耕)인
두 처사(處士)의 위토(位土)를 마련하여 한해에 한번 제수(祭需)를 올리게 되었으나,
자손들은 멀리살고 있어 한번도 가서 참배하지 않고 묘직배(墓直輩, 墓道輩?, 묘소를 관리 하는 사람)에게 미루고 맡기었으니, 제대로 제사하는지 안 하는지를, 또한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위전(位田)을 추가로 마련하여 유사(有司)애게 보내어 성대한 제사를 베풀어,
우리의 조상님 묘소에 자손들이 있음을 알게 할 수 있겠는가?
공자(孔子)가 말씀하시기를. “부모의 상(喪)을 신중히 모시고 선조를 추모하면 백성의 덕성이
돈후하게 되리라.” 하였고,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아! 우리 후손들이 어찌 이를 유념하지 않을 손가? 휘(諱) 서규(瑞奎)가 쓰다(쓰셨다).
2,서울 고척동
고척동 산소는 고척고등학교 바로 뒷편에 있으며
이 고척고등학교가 세워질때 토지 보상금 수령문제로 오랜기간
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바로 그곳이다.
별제공 산소(2012.10.25)
-바로 뒤의 산소는 별제공의 장인, 장모 산소이며 시민들의 휴식공간화 되면서 정자가 세워졌다)
선영을 찾아 성묘(2012.10.25)
別提公諱士虞墓碣銘
公의 諱는 士虞, 字는 중개(仲凱), 本貫은 昌寧이다. 曾祖 諱 深은 兵曹參議에 追贈되고, 祖 諱 繼門은 울진현령으로 吏曹參判에 追贈되고 考 諱 偉는 호조참판이고 妣 平山申氏는 縣監 允範의 따님이다. 그런데 參判公의 堂弟인 高陽郡守 諱 倜이 延日鄭氏의 따님을 맞이하여 弘治(明나라 효종의 연호) 癸酉년(1503) 十六日에 慶尙道 咸昌縣에서 公을 낳고 그해 十一月에 參判公이 별세하므로 申夫人이 襁褓中에 있는 公을 後嗣로 삼았으니 참판공의 遺命에 따른 것이다. 참판공의 號는 梅溪인데 文章과 行誼로 成宗의 知遇를 받아 요직을 역임하고 顧問을 맡아 그 風道가 온 세상을 진동시키다가 燕山主 4년(1498)에 善類를 몰살하는 史話를 만나 陰凶한 小人들의 誣陷으로 처음에는 義州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순천에 移配된지 6년만에 謫所에서 별세하니, 온 사림이 모두 억울하게 여겼고 明宗때에 이르러 신원(伸寃)과 아울러 자손을 채용하라는 恩命이 내리므로 公이 전함사(典艦司) 別提에 蔭補(조상의 덕으로 얻어지는 벼슬)되었다가 바로 典設司 別提로 전임되었으나 家門에서 겪은 禍難을 마음 아프게 여기어 끝내 취임하지 않고는 壬寅년(1542) 6월 27일에 身病으로 京第(서울에 있는 집)에서 별세하니 연세가 겨우 40세이었다. 公의 前配 居昌愼氏는 正(이조때 奉常寺, 內醫院, 內資寺, 禮賓寺등 여러 官衛의 으뜸벼슬로 正三品의 품계) 居易의 따님이고, 後配 平山申氏는 南陽府使 孝孫의 따님으로 3남 1여를 두었는데 장남 胤禧는 司導寺 첨정(僉正)이었다가 壽職으로 通情大夫에 오르고 차남 胤申은 高城郡守이고, 3남 胤祉는 楊口縣監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側室의 所生 胤祺는 前 司譯院 僉正으로 永川君 眉壽의 따님을 맞이하여 一女를 두었는데 僉知 李勸에게 출가하고, 다시 司果 李應瑞의 따님을 맞이하여 三男 二女를 두었는데 장남은 오(澳)로 持病이 있고, 차남은 瀷, 삼남은 沃이고, 정녀는 蔡宗濂에게, 차녀는 현령 李尙達에게 출가 하였다. 高城郡守는 同知 沈逢源의 따님을 맞이하여 二男 三女를 두었는데 장남 형(泂)은 參軍이고 차남 흡(潝)은 縣令이고 장녀는 大司諫 任蒙正에게, 차녀는 華山君 영(楹)에게, 삼녀는 현령 愼守武에게 출가하였다. 楊口縣監은 府使 宋嵂의 따님을 맞이하여 三男 二女를 두었는데 장남 浩中은 武科로 通政品階에 郡守이고 차남 泳中은 기록할 수 없다. 아! 참판공이 연세 五十에 後嗣가 없어 늘 公의 출생을 기다렸으나 끝내 먼 지방에 메어있다가 公이 얼굴을 보지 못하고 별세하므로 申夫人이 임종시까지 못잊어 하던 참판공의 뜻을 더욱 슬퍼하여 公을 자신의 소생처럼 길렀고 公 또한 先君을 직접 봉양하지 못한것을 슬퍼하여 申부인을 정성으로 모시는 한편 先君을 추모해 마지 않았다. 公은 평소에 “내가 죽거든 반드시 金陵에 있는 先塋곁에 묻어달라” 고 하였는데, 불행히 한참 나이에 신병을 얻었으나, 伯氏는 멀리 金陵에 있고 아들들은 다 어리어 의지할 수 없었으므로 고향에 歸葬치 못할 것을 서글퍼하였고 끝내 별세한 뒤에는 부인이 홀몸으로 喪을 당하여 힘이 모자라고 길이 멀어서 공의 뜻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우선 富平 동쪽 水呑面 德義里에 安葬하였다. 公은 性行이 자연스러워 修養에 힘드리는 바가 없었으나 喪事와 祭祀에는 반드시 哀와 敬을 다하여 병이 위중할 즈음에 先人의 忌日을 당해서도 깨끗이 목욕하고 손수 제사를 모시므로 좌우에서 힘써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고는 “이제는 내가 다시 제사를 모시려 한들 어찌 모실수 있겠는가?” 고 하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끝내 별세하였으니 그 天性을 이루 짐작할 수 있다. 부인 申씨는 젊은 미망인으로 家事를 담당하여 閨範을 지키고 子弟를 교훈하고 제사를 받들고 禮,嚴,誠,謹으로 가정을 다스려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다 원만한 부도라 하였으며, 乙亥년(1575) 二月에 별세히므로 공의 묘 좌측에 附葬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銘한다. 首丘(여우가 죽을때에는 자기의 소굴(巢窟)이 있는 쪽으로 머리를 향한다는 것으로 사람이 죽게되면 고향에 귀향되기를 그리워 한다는 뜻)의 仁은 知性에서 나온 바일세, 魂이란 어디든지 간다고 한것은 季子의 말인데 (춘추시대 吳의 公子 李札을 말하는데 그는 객지에서 長子를 잃고 나서 육체는 흙으로 돌아갔으나 魂氣는 가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公은 首丘의 仁으로, 魂 또한 어디든지 갈 수 있으니 거의 지하에서의 마음 위로되리.
後孫 世鵬 謹書
서쪽 하늘엔 해가 뉘엿뉘엿)
영월공 산소(2012.10.25)
영월공 산소의 부러진 석물들
영월공 산소
오랜세월이 흐르면서 비바람에 비문도 모두 허물어져 보이지 않는다
寧越公諱胤禧墓誌銘
高祖考의 諱는 胤禧, 字는 덕수(德綏), 姓은 曺氏이고 창녕은 그 본관이다. 우리 曺氏는 東方의 大姓으로 始祖 諱 繼龍은 新羅王의 駙馬가 되었고 그 뒤에 諱 謙은 高麗太祖 第二妣의 所生 德宮公主를 맞아, 벼슬은 大樂署 丞으로 諱 瑞를 낳았고, 그 아드님 諱 子奇는 門下侍郞 平章事이고 아드님 諱 允恭은 大府卿이고 아드님 諱 碩은 殿中給事이고 아드님 誼는 戶長이고, 아드님 挺은 文科 典書이고 아드님 瑀는 令同正이고 아드님 松茂는 少監이고 아드님 俊도 少監이고, 아드님 仁取도 少監이고, 아드님 元桂는 中門祗侯이고, 아드님 遇禧는 正順大夫 判威儀寺事로 左侍中 府院君에 追贈되고, 아드님 敬修는 密直司事 上護軍으로 左贊成에 追贈되고 아드님 諱 深은 兵曹參議에 追贈되고, 아드님 諱 繼門은 縣令으로 吏曹參判에 追贈되고, 아드님 諱 偉는 戶曹參判으로 吏曹判書에 追贈, 謚號는 文莊이니, 곧 梅溪先生이다. 매계선생은 史禍에 관련되어 謫所에서 별세하였다가 마침내 泉壤의 變(부관참시)을 만났고 불행히 後嗣까지 없었으므로 從弟인 郡守 倜의 아드님 士虞를 後嗣로 삼았으니, 그 遺命에 따른 것이다. 士虞는 두 차례나 別提에 제수되었으나 家門에서 겪은 禍難을 마음 아프게 여기어 나아가지 않았으니 곧 公의 先考이다. 前妣 巨昌愼氏는 正 巨易의 따님이고 後妣 평산신씨는 南陽府使 孝孫의 따님으로 嘉靖(明 세종의 연호) 甲子년(1534) 2월 17일에 공을 낳았다. 公은 젊은 나이로 벼슬길에 올라 네 고을의 수령과 諸士의 判官, 僉正과 禮賓寺의 正을 역임하였고, 공의 3형제가 다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부친을 일찍 여의게 된 것을 일생의 아픔으로 여기어 돈독한 우애가 年老할수록 더욱 더하였으며, 官에 임해서는 크고 작은 일을 서로 질의해서 단행하므로 임지를 떠날 적마다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고 그리워하여 아무 원망이 없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공이 殿講(성균관의 유생중에서 학식이 먾은 사람을 대궐안에 모아놓고 임금이 친히 행하던 시험)에 응시하여 講이 막 끝날을 때 殿庭에서 雷震(천둥)의 變이 발생하므로 이내 罷榜(과거에 급제된 사람의 발효를 취소하는 것)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萬曆(明 神宗의 연호) 丙辰(1616) 11월 29일에 83세를 일기로 正寢에서 별세, 壽職으로 通政 品階에 올랐으며, 前配는 宗室인 永川君 眉壽의 따님으로 1女를 두고 後配는 효령대군의 6세손인 司果 應瑞의 따님이다. 두 분 妣는 다 현숙한 德이 있었는데, 前妣는 아무해 9월 7일에 별세, 富平 陵洞에 있는 府君의 묘 우측에서 수십보 거리가 되는 子坐에 안장되고, 後妣는 아무해 3월 22일에 별세, 府君과 雙墳으로 모셔졌으니, 곧 別提 祖考의 묘 동쪽 亥坐이다. 아! 公이 별세한지 벌써 80여념이 넘었는데 일찍이 공의 사적이 후세에 傳記되지 않았으니 후세의 자손이 어찌 감히 경솔히 믿어 수록할 수 있겠는가? 다만 公은 詩에 능하여 혹 兄弟나 朋友와 어울릴 적에는 으례 風雲月露의 詩句로써 서로 酬唱하기를 마지 않았다고 하는데, 지금 보존되어 있는 것은 鳳村稿 몇편이 전해질뿐이니 후손들이 어디서 그 덕을 상고 할 수 있겠는가? 感慕하는 아픔이 이에 이르러 더욱 간절하다. 公의 소생은 3남 3녀로 장남 澳는 폐질이 있어 成婚하지 못하고 차남 瀷은 은거하여 출사하지 않고, 3남은 沃이며, 장녀는 參議 李勤에게, 차녀는 채배국(蔡荖國)에게, 3녀는 현감 李尙達에게 출가하였다. 瀷의 소생은 2남 3녀로 장남 孝昌은 文科에 員外(정한 사람의 수효 밖)로 壯元하고 차남 悌昌은 孝行이 있었는데 일찍 별세하였으며, 3녀는 洪玹, 鄭震萬, 임형(任瀅)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蔡荖國의 소생은 2남 3녀로 雲望, 雲會는 아들이고, 박윤세, 권계, 이강은 사위이다.
沃의 소생은 2남 4녀로 碩昌 夏昌은 아들이고, 현감 조용숙(趙甭䎘), 朴之淵, 柳曼世, 朴斗正은 사위이다. 이상달의 소생은 3남 2녀로 부사 집, 숙, 강은 아들이고, 김세장, 오상규는 사위이다. 이권의 소생은 3남 2녀로 문과 참의 성신, 경신, 치신은 아들이고 심현, 백이성은 사위이다. 이승신의 소생은 3남 1녀로 3남은 문과 보덕, 재, 문과 장령, 항, 환이다. 재의 소생은 2남 1녀로 2남은 시하, 형하이고, 1녀는 문과 참판 이정명에게 출가하였다. 항의 소생은 1남 4녀로 아들은 정하이고, 세딸은 부사 한두유, 윤광, 문과 참판 김만채에게 출가하였다. 김만채의 아들 진상은 문과 부학이고 부사(벼슬을 시켜도 하지 않는 것)이경신의 아들 추는 좌랑이고 추의 아들은 필하이고 필하의 아들은 유이며 딸은 문과 지평 조권에게 출가하였다. 조권의 아들은 영세문과 승지이다.
孝昌의 所生은 4남 1녀로 장남 建은 生員 參奉이고, 임(혈), 逴, 遇는 文才가 뛰어났으나 小成(소시 가운데 초시나 종시에 합격한 것)에 그치고 말았으므로 士友들이 애석하게 여겼으며, 1녀는 金聲遠에게 출가하였다. 悌昌의 소생은 2남으로 장남은 곧 나의 先考 諱 逾인데 學行薦으로 持平에 추증되고 차남 述은 文行이 있었는데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였다. 建의 소생은 2남 3녀로 세彬, 世亮은 아들이고, 直長 박심(朴鐔), 趙行雲, 宋徵龜는 사위이다. 임(혈)의 소생은 2남으로 世비?(艹+此+), 世稷이다. 逴의 소생은 2남 3녀로 2남은 世顔, 世孟이고, 3녀는 李언(广+言), 郭鎭國, 이담석(李聃錫)에게 출가하였다. 遇는 소생이 없어서 世孟을 後嗣로 삼았다. 逾의 소생은 4남 1녀로 장남은 世虎이고, 차남 世龍은 學行이 있고, 삼남은 世鳳이고, 4남 世鵬은 生員이며 1녀는 蔡昌徵에게 출가하였다. 述의 소생은 3남 4녀로 3남은 世奇, 世祐, 世溥이고, 4녀는 鄭佶, 李東標, 李萬普, 朴胤昌에게 출가하였다. 碩昌의 아들은 選?, 逸이고 딸은 朴斗三에게 출가하였다. 선(?)의 아들은 世龜이고 딸은 柳時茂, 都命海에게 출가하였다. 이외에도 玄, 曾孫이 매우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不肖 玄孫 世鵬이 지난 乙巳년(1725)에 科名(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에 참여하고 나서 掃墳(경사로운 일이 있을 때 조상의 무덤에 가서 제사 지내는 것)하는 의식을 거행할 때 삼가 살펴보니 前妣는 따로 안장되었고, 考, 妣 두 분의 묘에 모두 表石이 없었다. 이 미약한 후손이 碣石을 세워드리고 싶으나 그 힘이 미치지 못하므로 이제 감히 졸렬함을 불구하고 이 글을 대충 기록하여 이다음 표석을 세우는데 참고 자료로 삼는 바이다. 아! 마음만 아플 뿐이다.
崇禎紀元이후 두 번째 丁卯년 (1747) 四月 二十五日에 不肖 世鵬이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