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포동과 고래
이유환
아버지 직장이 울산으로 옮기면서 우리 집은 울산으로 이사를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부산 작은 고모님 댁에서 3여 년을 생활하던 나는, 울산의 집에 다니러 갔다. 1979년 5월 하순 저녁이었다.
우연히 반상회보를 보다가 공무원 시험이 있다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하고자 하는 일도 나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 뜻대로 되지 않았고, 마냥 하릴없이 노는 것도 부모님에게 면목 없는 일이라 막연히 ‘공무원 시험이나 한 번 쳐 보자’고 생각했다.
그 무렵, 친구 서 정섭이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진주역 논산행 입영열차에서 정섭을 전송(餞送)하고 울산으로 갔다. 시험일은 1979년 6월 10일, 며칠 남지 않은 시험일을 앞두고 시험공부를 했다. 럭키사택에서 가까운 학성 고등학교가 고사장이었다. 막상 시험을 치르고 나오면서 ‘이 시험마저도 안 된다면 죽어버리리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런 뒤 부산 작은 고모님 댁으로 가서 시간을 보냈다. 8월 발표일 어느 날, ‘그래도 결과는 봐야 살든지, 죽든지 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울산시청에 갔다. 시청 게시판에 다행인지, 요행인지, ‘아직 때가 안 되었으니, 죽지 말라’는 것인지, 제2회 지방 5급 을류 행정직 시험 합격자 발표 명단에 들어 있었다. 이왕에 합격한 것이니, 합격자 서류를 준비해 제출하고는 부산으로 갔다. 그해 12월 초까지 임용발령을 받지 못했다. 12월말 무렵, 부산으로 전보가 왔다. 12월 31일 10시까지 울산시청으로 임용장을 받으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여덟 명의 동기들이 임용발령을 받았다. 우리들은 우정동 어느 식당에서 통성명을 하면서 점심을 먹었고, 우의를 다져나가자고 의기투합 했다. 나는 장생포동, 이 귀호 염포동, 이 명석 우정동 사무소에 발령을 받았다. 이 귀호 씨는 할아버지뻘이 되어 여태껏 “할배”로 지낸다. 그때 동기들이 모두 기억나지 않는다. 몇몇은 고향인 강원도, 강화도로 전출을 가고, 이제 울산시에 남은 사람은 나와 오 광희, 이 귀호, 이 명석 씨만 남아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지금은 모두가 사무관이 되었다.
나의 첫 발령지 장생포동.
임용장을 받아 들고 고래잡이로 유명한, 거제도 장승포와 지명이 유사한 장생포 동사무소로 가서 인사를 드렸다. 나는 신출내기에 머지않아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나의 업무는 산업이었다. 동 관내 농수축산업을 파악하고 통계관리를 했다.
농사도 제대로 지어보지 않은 내가 산업을 맡아 하니 애로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때 시청 축산당자였던 방동걸 님의 전화가 왔다. 관내 소와 송아지의 나이를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경험이 전혀 없던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동사무소 앞 선착장에서 나룻배로, 바다 건너 맞은 편 동해조선이 있었던 용잠마을로 건너가 축사에서 본 그대로 설명을 했다. 충분히 짐작하거나 파악할 수 있었던지, “알겠다.”하고는 그것으로 보고를 끝낸 기억이 난다.
퇴근 무렵이면 동사무소 길 건너 맞은 편 ‘할매집’에서 고래고기 육회와 막걸리를 주문해서 직원들과 하루 일과를 마무리 했다. 지금 너도나도 얘기하기 전의 원조(元祖)였다. 그야말로 싱싱한 고래고기를 맛볼 수 있었다. 지금은 비싼 값을 주어도 그 맛을 느낄 수는 없다.
나를 늘 “이 군”이라 부르시던 그때 동장님과 불콰해져,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 공업탑에서 내려 걸어서 산업은행 뒤였던 동장님 댁에 모셔다 드리고 집으로 가곤 했다. 시나브로 시간이 흘러 내가 그 나이가 되었다니....... 공무원의 첫 걸음인 장생포동 역사와 고래 이야기로 기억에 남긴다.
남구 야음1 장생포동(也音1 長生浦洞)이 된 장생포동은, 조선시대 장생포리(長生浦里)에서 정조연간 창승/구정리(昌承/龜井里)로, 1894년 장승/구미동(長丞/九尾洞)으로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 1911년 구미동(九亭洞), 1914년 장생포리(長生浦里)로 되었다가 1965년 장생포동(長生浦洞)이 되었다.
장생포(長生浦)라는 지명이 생긴 것은 조선 태종 7년(1407년) 수군만호영이 생기면서부터이다. 숙종 46년(1720년) 대현면 장생포리였으며, 정조 때(1777년∼1800년) 창승·구정리로 나누어졌다가, 고종 31년(1894년) 장승리와 구미동이 되었다. 1911년 현남면 구정동이 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 대현면 장생포리로 개편되었다. 1962년 6월 1일에는 울산시에 편입되어 장생포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72년 10월 1일 울산시의 31개 행정동 개편에 따라 장생포동을 설치하였고, 1976년 4월 20일 장생포출장소를 폐지하였으며, 1977년 11월 1일 용잠동을 통합하였다. 1985년 7월 15일 울산시 구제(區制) 실시로 남구 장생포동이 되고, 1995년 5월 1일 환경오염지역 이주대책에 따라 매암동을 통합하였다.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동이 되었다.
이정표로 세운 푯말이나 절의 경계를 표시하는 푯말을 뜻하는 장승의 한자가 長生, 長栍, 長承 등으로 표기하는 데, 長生浦라는 지명은 장승과 같은 細長한 포구라는 데서 나왔거나, 長承이 있었던 포구라는 데서 생긴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용잠동(龍岑洞)은 정조 때(1777년∼1800년) 용잠리(龍岑里)였으며, 고종 31년(1894년) 외현면 용잠동(用岑洞)이 되었다. 1911년 현남면 용잠동(龍岑洞)이 되었고, 1914년 4월 1일 대현면 용잠리로 개편되었다. 1962년 6월 1일에는 울산시에 편입되어 장생포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72년 10월 1일 울산시의 31개 행정동 개편에 따라 용잠동을 설치하였다가, 1977년 11월 1일 용잠동을 폐지하여 장생포동에 통합하였다. 조선시대 용잠리(龍岑里)에서 1894년 용잠동(用岑洞), 일제 강점기 1911년 용잠동(龍岑洞), 1914년 용잠리(龍岑里)로 되었다가, 1965년 용잠동(龍岑洞)으로 되었다. 용잠(龍岑)이라는 지명은 바다의 용(龍)이 여기에 잠겼다 하여 유래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포경어업은 1899년 소련 포경업자들이 우리 정부로부터 울산의 장생포와 강원도의 장전포, 함경북도의 진포도 등 3곳을 포경기지로 사용할 것을 허가받아 고래를 잡기 시작한 이래 1백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는 우리나라는 계절에 따라 동·서해안에 고래가 회유하고 있어 포경업이 크게 성업을 이루었다.
울산의 포경업은 일제시대 때부터 주로 일본 포경회사들이 고래를 잡아왔다. 8·15 광복과 더불어 장생포항을 중심으로 1946년 우리나라 포경업체인 조선포경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우리의 손으로 고래를 잡기 시작하였다. 장생포항을 기지로 다시 시작된 울산의 포경수산업은 크게 발전하여 1947년에는 대동포경(주)의 설립을 비롯하여 1948년에는 동양포경(주)이 설립되는 등 여러 회사가 서로 등장하여 1985년도까지 장생포를 포경기지로 하여 포경업자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조직된 근해포경수산업협동조합 산하에는 12개 업체가 16척의 포경선을 보유하고 연평균 900마리를 포획하였다고 한다.
고래잡이는 5~12월까지는 강원도 동해·죽변 근해를, 12월~4월까지는 서해의 어청도 근해를 주어장으로 하였으나, 지난 1982년 7월 국제포경위원회 제34차 총회에서 세계 고래자원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상업적인 포경을 전면 금지한다는 의안을 가결시킴으로써 수산청고시 제 85-17호(1985년 12월 31일)에 의거하여 1986년 1월 1일부터 포경업이 금지됨에 따라 우리나라의 유일한 장생포의 포경업체들도 고래잡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상업적 포경금지 조치가 내려져 실제적인 포경어업은 울산 장생포를 중심으로 전면 중단되게 되었다.
이렇게 잡은 고래고기는 국내 수요에 충당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등지로 수출하여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던 울산의 특산품이다. 최근에는 자원증가로 인한 상업포경 재추진을 검토하기 위한 자료조사와 더불어 고래를 주제로 고래바다 여행선 운항, 고래박물관, 고래 생태 체험관, 고래축제 등 지역 특화 사업으로 주민참여와 더불어 관광객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는 관광지가 되고 있다.
고래고기를 처음 먹는 사람은 그 맛을 알기 어렵다. 역한 냄새가 나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신선한 고래고기에서는 12가지 맛이 난다고 한다. 고래고기를 자주 쇠고기에 비유하는 이유는 선도가 좋은 고급 고래고기는 쇠고기 등심에 비할 정도로 맛이 좋기 때문이다.
스키야키와 불고기, 두루치기는 고기의 질에 따라 요리법이 각기 다르다.
갈비같이 싱싱하고 좋은 고기로는 갈비 스키야키(すきやき 불고기와 비슷한 볶음요리를 가리키는 일본식 용어)를 해서 먹는다. 고기 자체에 기름기가 있기 때문에 쇠고기 생 갈비와 아주 비슷하다. 갈비를 잘라서 칼집을 넣은 다음 숙성을 시켜 놓았다가 김치를 썰어 넣고 프라이팬에 구워 먹는다. 고기의 질이 좋기 때문에 아무 것도 추가하지 않고 소금구이를 해도 맛이 좋다. 갈비살만 가지고 만들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다.
두루치기 역시 대개 갈비살로 만든다. 돼지고기나 쇠고기 두루치기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야채를 다 넣는다. 국물은 없이 고기와 야채만으로 볶는 음식이다.
고래찌개는 쇠고기 국처럼 끓이되, 국물을 조금 적은 듯이 조리하는 것이 고래찌개이다. 장생포에서 가장 흔한 음식이었다. 양념이 잘 되어 있어서 밥을 말거나 비벼 먹을 수 있으며, 덕분에 다른 반찬이 별로 필요 없다. 살코기 중에서도 연한 살을 사용하고 또 반드시 껍질을 넣어야 제대로 맛을 낼 수 있다. 기름기가 약간 들어가니 국물이 잘 우러나는 것이다. 고래찌개를 흔히 끓여 먹던 시절에는 시래기를 많이 넣었고, 콩나물과 무도 썰어 넣어서 맛을 냈다.
오베기는 고래 꼬리나 우네를 소금에 절여서 만든 것으로, 주로 등 위로 올라와 있는 지느러미와 꼬리로 만든다. 워낙 단단해서 쥐도 파먹을 수 없을 정도여서 어지간한 힘으로는 썰 수도 없고, 얇게 썰기는 더욱 어렵다. 고래고기를 처음 접한 사람도 아무런 느낌 없이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오베기의 특징이다. 야채 같은 것을 넣고 회무침으로 해서 먹기도 한다.
수육은 쇠고기나 돼지고기 수육과 마찬가지로 삶아서 먹는 것으로, 모든 부위를 다 수육으로 쓸 수 있다. 내장도 부위마다 맛이 다르다. 내장은 주로 수육으로 삶아 먹었다.
고래 눈 자체를 그대로 삶는데 한 마리에 두 개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크기는 주먹만 하다고 한다.
장생포에서는 밍크고래 간을 먹으면 머리가 벗겨진다는 말이 있었다. 밍크고래의 간의 아예 쓰지 않고 다 버렸다. 반면에 곱시기(돌고래)의 간은 썼다. 곱시기의 싱싱한 염통은 날것으로 먹었는데 살코기보다 맛이 더 있었다고 한다. 멸치가 많이 나서 멸치 젓갈을 담았는데, 고래고기를 젓갈에 찍어서 먹기도 한다.
막집기는 싱싱한 생고기를 고추장이나 고추냉이에 찍어 먹는 것을 가리킨다. 등심 같은 살코기나 우네 같은 부위는 선도만 좋으면 모두 날 것으로 먹을 수 있다. 날 것으로 제공되는 요리를 일반적으로 막집기라고 하지만, 우네에 대해서는 막집기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고래고기회는 신선한 고래고기를 두 치 가량의 폭으로 썰어서 뜨거운 물에 슬쩍 담갔다가 다시 냉수에 얼음쪽과 함께 넣어서 차갑게 식힌 다음, 물기를 빼고 보통 회집으로 회를 만든 뒤에 후추를 조금 많이 넣어야 한다고 한다.
참고래 배 껍질은, 장생포 사람들은 참고래의 배 껍질만 벗겨서 데쳐 먹기도 했다고 한다. 참고래가 많이 들어 왔을 때는 배 껍질, 우네 아래쪽의 얇고 흰 부위를 살짝 떠가지고 채를 썰 듯이 잘게 썰어서 생으로 먹기도 했다. 별도로 간을 하지 않고 회초장이나 고추냉이에만 찍어 먹어도 아주 고소하고 맛이 있었다 한다.
고래과자는, 기름을 짜기 위해서 10~15센티미터 정도로 잘게 자른 고래 껍질에 기름이 잘 빠지도록 하기 위해 다시 1센티미터 정도로 칼집을 넣어, 솥에 넣고 삶으면 기름이 부글부글 올라왔다. 그것을 퍼내서 따로 보관하고, 남은 기름 찌꺼기를 건져내서 먹었는데 이것을 일명‘고래과자’라 했다고 한다.
나도 가끔씩 고래고기를 먹지만, 고래고기의 12가지 맛을 다 느끼지 못한다. 다만 자료를 보고 읽으면서 상상해 볼 따름이다. 나를 찾아온 손님들을 맛집을 찾아서 맛보인, 고래고기를 처음 먹어 본 사람들의 품평은 제각각 달랐다. 울산 남구에서 고래 특구를 만들고, 지역특화사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장생포가 그 옛날의 명성을 되찾기를 바란다.
그때 같이 근무했었던 김 임도 동장, 권 의언 사무장, 차 두환 총무계장, 박 영길, 정 덕모 님이 생각난다.
첫댓글 ㅎㅎ. 공무원 시험 안되었드라면 지금 이선생님을 못 볼뻔했군요.
다양한 고래 고기 지식 감사합니다.
아~ 밍크 간은 안먹었군요. 이렇게 타인의 글을 읽어야 지식이 쌓여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