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사호를 아십니까? 많이들 아시고 계시지요?
윗 사진의 팔괘문속죽단호(八掛紋束竹段壺)와 아랫 사진의 어화용호(漁化龍壺) 처음 만든 자사호 대가는 누구일까요?


위의 자사호들은 현대 혹은 근대의 유명한 자사대가들도 모방을 하였을뿐만 아니라,
아주 이름없는 무명의 작가들도 수없는 짝퉁을 만들어 내었고 현재에도 만들어 내고 있답니다.
작가들의 수준이나 명성,니료의 소재에 따라 한국돈 몇천원에서 몇백만원까지의 모방품들이 나오고 있답니다.
청나라 가칭년간(1796~1861)의 자사호 대가 소대형은 소년시절부터 벌써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던,
진명원이후의 일대의 대가 입니다.
그는 또한 명대의 자사대가 시대빈의 입실제자였던 소문금(邵文金)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명대의 시대빈은 자사호의 예술화 기초를 닦아놓았다고 볼수 있는데,
시대빈의 입실제자 였던 소문금,소문은등은 시대빈의 조상으로 당시의 자사호 고수였읍니다.
그 중에서 소문은의 "원주호圓珠壺"는 현재 홍콩의 차도구문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소문은의 금테두리 자사호
청대에 이르러 소씨 집안에서만 몇십명의 자사호 인재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비교적 유명하였던 고수에는 소옥정, 소덕향,소무림,소무삼,소무조,소원상,소원화,소원린,소원발,소원형,소원무,
소원림...등 입니다. 이러한 소씨 집안의 고수들은 표면에 유약을 채유 궁정호와 민간호를 많이 제작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자사호들은 매우 화려하고 색채감이 선명하며 시원시원한 풍격을 가졌읍니다.
이것은 당시 청초 귀족들의 심미관을 반영하였다고 볼수 있으며, 소씨 집안 고수들의 상등품 작품은 궁정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밖에도 청대 초기의 일부 소씨 집안의 고수들은 주니로 된 소형 자사호를 만들기로 하였는데,
용량이 적으며 주니의 밝은 홍색을 좋아했던 남방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 아래의 사진들은 소씨 집안 자사호 고수들의 작품들 입니다.


소씨집안에서 배출해낸 자사호 대가로서 후대에까지 제일 명성을 떨친 인물은 바로 소대형입니다.
소대형의 작품들은 질박함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나 심플한 모양의 철구,방고등은 소박하면서 장중한 느낌이지만
비범한 분위기를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자사예술은 소박,우아,대범한 기상을 가지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청대의 차 애호가와 소장가들 사이에서 보배로 여겨져서 천금을 줘도 얻지 못하는 호라 여겨졌습니다.
소문형은 호탕한 성격으로 매우 유명했는데요,
본인이 만든 자사호는 뜻이 맞는 사람이라면 돈을 받지않고 그냥 선물로 주기도 한 반면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천금을 주어도 팔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대형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관리 하나가 갖은방법을 다 생각해서 소대형의 자사호를 하나 구했다고 합니다.
어느해 가을 뱃놀이하면서 달구경을 하는데 시녀가 차를 가져오면서 아차 순간 실수로 소대형의 자사호를 깨뜨렸다고 합니다.
이에 관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시녀을 거꾸로 매달아 채찍질을 가하는 형벌을 내렸다는데,....
때 마침 그 부근에서 뱃놀이 중이던 소대형이 그런 연고를 듣고서는 관리를 자기가 타고있던 배로 불렀다고 합니다.
관리가 가보니 소대형이 타고있던 배에는 16개의 그야말로 명품중의 명품들인 소대형 자사호가 테이블위에 놓여있었더랍니다.
소대형이 관리에게 말하길 그 시녀를 용서해주고 그중의 자사호 한개를 마음대로 골라가시라고 하였답니다. 관리는 당연히 그렇게 하였구요.
관리가 자사호 한개를 골라가고나자 소대형은 나머지 15개의 자사호를 모두 와장창 깨뜨려 버리며 성을 불끈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합니다.
" 내 자사호 하나를 위해서 감히 사람 목숨을 가지고 놀다니...다시는 자사호를 안 만들겠어!!!" 라고 말입니다.
대단한 품성과 인권주의자 였지요?
더군다나 당시 봉건시대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놀라울정도의 인권주의자 였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존경스런 마음이 듭니다.
그의 작품에서 그러한 그의 품성이 묻어나는지 한번 같이 보시겠습니다.
다음 아래 사진들이 소대형 대사의 작품 들 입니다.^^












첫댓글 잘보았습니다
눈 호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