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태후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자겸이라는 인물을 먼저 거론해야 한다. 고려 숙종(1054-1105 ; 재위 10년)의 뒤를 이은 16대 예종(1079-1122 ; 재위 16년) 당시 이자겸(李資謙 ; ?~1126)은 예종의 중립정치로 정치적 영향력이 크지 못했다. 1108년(예종 3)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자 소성군 개국백(邵城郡 開國伯)에 봉해지면서 이자겸은 권부의 태풍으로 떠오른다. 외손자 태자 구가 태어나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자겸은 1122년 예종이 죽자 왕위를 탐내던 왕제(王弟)들을 물리치고 연소한 태자(太子: 후에 仁宗)를 즉위하게 한다. 어린 인종(1109-1146 ; 고려 17대 왕, 재위는 23년)이 즉위하면서 외조부 이자겸에게 권력이 독점되었다. 이자겸은 인주(仁州) 이씨(지금의 仁川 李氏)로 고려 초기 이래 막강한 외척세력으로 이때 그 세력이 절정을 이룬다.
권력을 한손에 쥔 이자겸은 인종에게 강요하여 셋째와 넷째 딸을 비(妃)로 삼게 하고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한다. 게다가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척준경(拓俊京 ; ?-1144)과도 사돈관계를 맺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다. 이자겸의 셋째와 넷째딸은 인종의 친이모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혼인이 성립될 수 없었으니 정략적인 혼례였던 셈이다.
이자겸의 독단적 권력욕은 1126년(인종 4)에 군국지사(軍國知事)의 직위를 탐내면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상장군 최탁(崔卓)·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등이 거사하여 그를 잡으려 하자 그들을 모두 처단하였다. 이듬해 반역을 도모하여 왕비(王妃)를 시켜 수차 왕을 독살하려 하였으나 왕비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인종은 내의원 최사전(崔思全 ; 1077-1139)을 움직여 척준경과 이자겸을 이간시키고 척준경을 회유하여 이자겸을 체포케 하였다. 1126년 이왕의 밀명을 받은 척준경(拓俊京)과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의 거사로, 이자겸의 난은 평정되고 그는 영광(靈光)에 유배된 후 거기서 죽었다.
인종은 왕실의 권위가 회복되자 왕권을 강화하면서 급기야 개경 천도계획을 세우게 된다.
인종은 이자겸의 딸인 두 왕비도 폐출하고 새로운 왕비를 간택한다. 신임하던 탐진(현재의 강진 남부에 있던 고을) 출신의 내의원 최사전이 궁녀로 천거한 장흥 관산 출신의 임원후(任元厚 ; 1089-1156)의 맏딸을 왕비로 맞이하게 된다. 장흥 임씨의 중시조는 임원후의 아버지인 임의(任懿 ; 1041-1117)로 그의 차자 임원후의 맏딸이 인종 왕비가 되었기에 시조로 세워진 것이다.
공예태후는 고려 무신정권이라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무신집권자들과 때로는 타협하고 대립하면서 왕실의 안위와 권위를 위해 헌신한 고려 3왕의 모후였다. 왕실은 물론 무신집권자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면 태후가 가진 정치적 역량과 왕에 대한 모정의 남다름을 알 수 있다. 원후의 아들들은 하나같이 덕성과 효성과 문장을 자랑했고, 딸들은 딸들대로 현숙한 왕가의 지성과 미모를 뽐냈다.
19대 왕 명종은 효성이 지극하여 모후였던 공예태후가 병이 들자 친히 약을 달이고, 여러 달 동안 옷을 벗지 않았으며 눈이 짓무를 정도로 울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명종은 수많은 민란과 반란의 와중에서도 ‘그들도 내 백성이니 참혹하게 죽이기 보다는 은혜로 감복시키라!’ 당부하였고, 원기가 허약해 백자인(柏自仁)이란 술을 장복하였는데 계림의 백자인이 좋다는 말을 듣고도 농사철에 바쁜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라며 이후 그 술을 먹지 않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공예태후의 자애롭고 강인한 면목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증거이다.
순박한 장흥 관산의 한 처녀였던 태후는 고려 왕실에 들어가 사직을 잇게 하고, 이자겸의 난과 무신정권의 와중에서 왕업의 계승과 권위를 위해 일평생을 바쳐 헌신하다가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다(명종 13년 1184년). 이에 순능(純陵)에 장사하고 시호를 공예태후(恭睿太后)라 하였다.
후에 왕이 될 왕자와 시녀를 이끌고 ‘공예태후 친정 나들이’ 행렬은 군민회관에서 군청을 향한다. 이 행렬은 왕후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장흥 관산의 처녀가 왕후가 되도록 후원해준 고향 사람들의 후덕(厚德)을 감하(感賀)하는 행렬이다. 어가행렬을 바라보는 장흥군민들의 시선에 사뭇 자랑스러움이 담긴다. 화려한 고려시대 왕궁 복장을 한 공예태후·왕자·시녀들의 어가 행렬이 농악대의 길닦음 뒤를 따른다. 옛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헌걸찬 걸음이다.
발걸음은 다시 장흥 관산(冠山)으로 이어진다. 장흥 관산 옥당리(당동마을) 정안사(定安祠)로 황후 일행이 오후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떠난다. 황후의 길을 되짚어 500여 명 이상의 하객들을 태운 버스와 승용차가 따른다. 버스 안에서는 공예태후에 대한 이야기꽃이 핀다.
공예태후는 1109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성은 임(任)씨이고 문하시중 임원후의 딸이며 중서령 임의의 손녀였다. 임의는 장흥 임씨의 중시조로 장차 그의 차자인 원후가 낳은 맏딸이 인종의 비가 되었기에 만들어진 시조라고 할 수 있다. 태후가 탄생하던 날 저녁에 임위의 꿈에 황색의 큰 깃발이 집의 중문에 세워져 깃발의 끝이 궁궐의 용머리에 걸쳐 나부끼므로 외조부는 태후가 태어난 후 몹시 사랑했다.
1126(인종 4)년 이자겸(李資謙)이 물러나고 그의 딸이 폐비가 되자 태후가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추천되었다. 태후가 추천된 것은 폐비 이씨가 친정으로 가던 날 인종왕이 꿈을 꾸니 폐비가 참깨(壬子) 5되와 노란 해바라기씨(黃葵) 3되를 주고 가더라는 것이다. 이에 척준경(拓俊京)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후비(后妃)로 임씨를 들일 징조요, 다섯이란 아들을 말하고 누런 해바라기씨는 그 중 세 아들이 왕이 될 것”이라는 상서로운 꿈이라고 말했다. 인종은 태후를 맞았다.
1127년 태후가 의종(毅宗)을 낳으니 왕이 기뻐하며 1129년 왕비로 책봉하였다. 태후의 탄생지도 ‘길이 흥할 고장’이라는 뜻에서 ‘長興’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 때까지 보성과 영암에 속해있던 고을이 부(府)로 승격된 것이다. 태후는 의종(毅宗 ; 1127-1173, 고려 18대왕 재위는 24년)·경(暻)·명종(明宗 ; 1131-1202, 고려 19대왕으로 재위는 27년)·충희(沖曦)·신종(神宗 ; 1144-1204, 고려 20대 왕으로 재위는 6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