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이천. 호는 월파(月坡). 아버지는 서화일(徐和日)이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다.
활동 사항
서민호(徐珉濠)[1903~1974]는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났다. 1919년 반도목탁지(半島木鐸誌) 사건으로 6개월간 투옥되었으며, 보성중학교 3학년 때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일본에서 1923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1925년에 미국 오하이오주 웰스리언대학을 거쳐, 1927년 컬럼비아대학 정치사회학부를 수료하였다. 하지만 서민호는 항일 사상의 소유자로서 컬럼비아대학 재학 시절부터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귀국 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서 남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며 1935년 송명학교(松明學校)를 설립해 교장을 지냈다. 1936년에는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사업을 촉진하기 위해 비밀 후원회를 조직하여 거액의 재정 지원을 전개하였는데, 이 일로 1942년 10월 구속되었다. 한국어를 말살하고 한글 운동자들을 탄압한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행한 한국 민족 말살 정책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서민호는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약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인 1946년 6월 관계(官界)에 진출하여 광주시장, 같은 해 10월 전라남도지사가 되었다. 1948년 조선전업 사장을 지냈으며 1950년 제2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 정계에 진출하였다. 1952년 4월 자신을 암살하려던 대위 서창선(徐昌善)을 살해해 복역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의 국회 조사단장으로 활동하던 때였다. 복역 8년째 되던 해인 1960년 4·19 혁명으로 출옥한 뒤, 1960년 제5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고 이어 민의원 부의장에 피선되었다.
1961년 제15차 UN 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동년 5월 남북 교류를 주장하다가 입건되었으나 혁명 검찰에서 기소 유예로 풀려났다. 1963년 제6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면서 자민당 최고 위원을 거쳐 민중당 최고 위원을 지냈다. 1965년 의원직을 사퇴하였는데 이는 한일 협정을 반대하는 정치 투쟁에 의한 것이었다. 1966년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민주사회당을 창당하여 대표 최고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으며, 민주사회당을 대중당으로 개칭하는 등의 활동을 하지만 서민호는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사퇴하였다. 같은 해 제7대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신민당과 공당으로서의 합당을 이루지 못해 개별 입당하였으며, 그 해 통일문제연구소를 개설하였다. 1973년 정계를 떠났으며, 이듬해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첫댓글 50년전인 1974년 신세계공원묘지에 처음 안장되었는데 , 이를 근거로 양주 인물로 분류해 넣었습니다. 대전 현충원으로 옮겨 간 상황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를 지적했는데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https://www.dnc.go.kr/web/portal/cemetry/view?nm=%EC%84%9C%EB%AF%BC%ED%98%B8&inp01=&inp02=&inp03=&inp04=&inp05=&inp06=&inp07=
대전 현충원으로 모신 것은 2004년 10월이었습니다. 월파기념사업회에서는 2023년에 참배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