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저희 어머니께서 1990년 저희 아버님께서 돌아가신후
칠순의 연세에 한글을 배우시고, 70평생을 살아오신 이야기를 틈틈히 적어두신 것을
아버님이 별세하신지 1년만에 돌아가신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해서,
저희형제들이 정리한 글입니다.
같은 시대에 사셨거나, 같은 시대에 사신 부모님이 있으신 분들이 읽어보시면
그시대에 사셨던 우리들의 부모님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더할수 있다고 생각되어
저희 가족홈피에 올려져 있는 글을 옮겨봅니다.
어머님께서 적어두신 원본의 맞춤법이 틀린 곳은 수정하고, 한글로 표현하기 힘드신 부분은
일본어로 적어두셨기에 형제들과 의논하여 번역하였습니다.
비록 제가 쓴 글은 아니지만 역자,편집의 역활을 하였기에 [自作房]에 감히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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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살아오신 삶을 정리하신 글의 일부입니다.
7월 25일 오후 4시반에 (1990) 서울에서 큰아들 내외가 자가용을 몰고 소고기와 수박을 사가지고 왔다.영감님은 기뻐 하신다.현우가 "아버지 많이 더 하신것 같다" 고 하니까 "날씨 탓이다. 너무 더워서"하시고 아무 이상이 없는것 같이 말씀하시고 저녘밥을 같이 드신다.
큰집,작은집에 인사간다고 하니까 "작은 아버지께 고맙게 해주어 고맙다"고 인사하라고 하시면서 "너희들이 와서이제 안심했다"고 말씀하신다. 평소때와 같이 저녘밥을 드신후에 목욕도 하시고 약도 드시고 항상 상의에 단추를 잠그지 않으시는데 그날밤에는 며느리에게 잠그라 하시고 '구심'하고 며느리에게 손짓을 하신다.두알을 입에 넣어 드린다.
아이들이 오기전에 나는 피로하여 잠이 든다. 영감님은 외출을 하려고 밖에 계신다. 어디 가시는냐고 물어 보니까 집에두고 온것이 있다고 가지고 오라고하신다. 영감님뒤에는 꽃가마가 있었다. 같이가게 가지고 오라고 하신다. 집에가서 가지고 오니까 영감님도 꽃가마도 보이지 않았다. 찿아 다니다가 꿈에서 깬다꿈 이다. 놀라 일어나 보니 라디오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항상 밤이나 낮이나 TV 가 꺼지고 나면 라디오를 듣고 계셨다. 물어보니 손이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신다. 라디오를 소리나게 하고 우유를 갖다 드리니까 일어나서 드신다. 몇번쉬면서 드신다. 아무래도 이상하여 아이들과 친척들에게 전화를 하라고 하고 평소때 입고 다니던 옷을 입히고나니 모두 모인다. 나는 정신없이 울기만 한다. 아무 정신도 없다. 큰집,작은집의 형님과 조카들이 모든것을 상의하고 장래준비를 한다. 7남매가 다 모였다.다 울기만 한다. 사람은 허무하다. 숨만 꺼지면 갔다.
별리준비때문에 바쁘기만 하다. 사람들도 많이 왔다. 큰아들 현우는 대학교수라 학교교수, 조교수 말 할것없이 서울에서도 많이 왔다. 인우는 대동기계고등학교이고, 며느리는 간호대학교수라, 지방이기 때문에 말할수도 없이 친구들도 오고 성당에서 신부님까지도 오셨다. 양우는 원주에(만도기계)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도 손님들이 많이 왔다. 철우는 거창여자고등학교, 며느리는 촉석국민학교에 나가고 있고 같이 있다보니 손님들도 많았다. 강우는 부산 럭키에 있어도 소님들이 많이 왔다. 딸 현선,사위 김종국은 곤양고등학교다. 그래도 손님이 많이왔다. 꽃다발도 3단, 2단 말할수도 없다. 다 자식들을 보아서 서울에 있는 사돈되는 사제까지 오셨다. 어떻게 슬프기만하고 사람들이 오시면 울기만 했다. 3일장을 했다. 장례식은 남 부럽지않게 잘했다. 차남 인우 내외는 지방이라 더 열심히 일을 잘한다. 철우내외는 같이 있다보니 수고도 더 했다. 조카들은 집에도 가지 못하고 일을 했다.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말도 못한다.
하루에 몇번이고 목욕도 하시고 선풍기를 틀고 있어도 덥다고 하시는데 입관을 해놓고 나니 덥지도 않으시는지 아무 말도 없다. 비가 오다가 해빛이 나니까 너무덥다. 그래도 손님들이 많이도 오셨다. 며느리,질부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상주들은 모두 땀띠가 나고 이마에도,겨드랑이에도 말 할수없이 고생을 한다. 그래도 영감님은 말도 없다. 낮이나 밤이나 선풍기를 틀어 놓고 있어도 덥다고 하시더만 말도 없다.
3일장을 하고 삼오날까지는 모두 있으니까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생각을 할수록 영감님은 자기는 알고 계신것 같았다. 3일전만해도 향교앞에 까지 이발을 하고 오시고 나더니 강우에게 이제는 이발도 갈수가 없다고 하신다. 강우가 제가 이발사를 데리고 오겠다고 말을 하자 "그래라"하시고 손톱,발톱도 깍아 달라 하시고 용우가 새로 치아를 갈아 끼우라고 해서 인우,강우가 같이 치과에 갔다왔다. 아이들이 가고나니 치아는 바꾸지 않는다. "내 숨이 가프다"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깨닫자 못했다.자기가 읽고 계시던 책을 강우에게 "가지고 가서 읽어 보아라.재미있다. 아버지는 다 읽었다"고 하면서 준다. 3일전 일이다. 그래도 나는 몰랐다. 라디오약을 꼭 사가지고 오라고 하시면서" 내동무고 낙이다"고 하셨다. 장례식날 오전 3시에 약이 떨어졌다. 양우가 갈아 끼운다.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다. 책을 읽어 보다가 누워계시다가 밖에 나가서 한바퀴 돌고 평상에서 쉬고. 집에 오시고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부터 드시고 목욕하시고 약드시고 하시드니, 25일 오전에도 밖에나가 한바퀴 돌고 오셨다. 더 이상도 없고 해서 걱정도 하지 않았다. 올해는 이상하게도 자기걱정을 하지 않으시고 은근히 "올해는 넘기겠다. 네가 내보다 먼저 죽겠다. 술도 담배도 피우지 말고 몸 조심해라. 네게 미안하다. 네가 오래 살아야 내가 편하다"고 하시던 영감님이 나를 안심시켜 놓고 돌아가셨는지 모르겠다.
한약을 드시다가 날씨가 덥고해서 병원에 같이 다녔다. 나는 귀가 아프고 해서 자기가 먼저 치료를 하고나면 내가 있는데 까지와서 기다리다가 같이오면서 약국에가서 약도 사가지고 오기도 한다.(사포날,구심,아스마애치,피고나이토징,영양제) "내가 조금 회복이 되면 계곡에 같이 있다 오자"고도 하시고 "우리는 행복이다.자식들이 용돈도 각각 한달에 5만원씩이나 주니까 안심하고 병원도 가고 약도 살수도 있다"하시면서 "돈은 써면 없다. 안 써면 있다 아껴써라. 내가 돈이 있으면 자식들에게 줄수는 있어도 자식들에게는 돈을 달라고 하지말라. 주면은 받고 아껴써라"고 하시더니"자식은 어릴때 엄하게 키우고 장성하면 부드럽게 대해라"고 하시고"나는 기분이 좋으면 말도 없다.기분이 나쁘면 웃는다"고 하셨다. 손자들을 좋아하시고 이야기도 해주고 돈도 주고 하면서 "자식들도 만날 돈만 써게 하면은 안되는데"하고 걱정도 하셨다.
강우가 "아버지,최신형 선풍기입니다"하고 선풍기를 가져오자 "여기도 있는데 너나 하지"하자 "아버지 나이가 되면 더 좋은것이 나옵니다"고 하자 "그놈,큰놈이 될놈이다 "하시면서 좋아하시고 만지고 조종도 하시곤 하셨다. 인우가 털잠바를 사가지고 왔을때도 "이발하러 가면 바람하나 들어오지 않겠다.서울가도 걱정없겠다"하시고 철우내외가 사다준 털실조끼,쉐터,남방셔츠등을 입고 계시면서 새것을 입고 ,인우가 여름옷을 사 가지고 왔을때도 "인우가 꼭 맞게 사 가지고 왔다"면서 병원에 갈때 입고 다니셨다. 철우가 라디오를 사 가지고 왔을때도 좋아하면서 껐다,켰다 하면서 하루종일 만지고 좋아 하시더니, 옷도 매일 갈아 입으시고 "내가 깨끗해야 사람들도 오고 냄새도 안난다"하면서 이발도 10일만에 한번씩 하시고 돈은 항상 지갑에 넣어 계시면서 "돈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다"고 하면서 세 보기도 하시고 천원짜리를 준비하여 기욱.기영이가 오면은 주기도 한다. "할아버지에게 가면 돈 준다고 자주온다"고 하셨다.
술을 하루에 한되씩 소주를 드실때에는 자식들이 어리고 술만 드시면 화를 내시곤 해서 나도 술만 드신다고 원망도 했다. 그때마다 " 네게 화를 내지,누구에게 화를 낼까?" 하면서 또 한잔 하시던 일도 생각난다. 아는 것도 많고 마음은 훤한데 마음대로 잘 되지도 않고 내가 장사를 하는 것도 보기 싫고 자식들은 점점 커지고 돈도 쓸곳이 많아 지니까 술을 드시고 집에서 화를 내신 것 같다. 그래도 밖에서는 화를 잘 내지 않고 농담도,웃기기도 하고 바둑을 좋아 하시고 놀기도 하셨다. 한번 이야기를 하고 놀아본 사람들은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도 하셨다.
7남매를 보니까 영감님 생각이 난다. 그렇게 하면서도 "밥을 굶어도자식들 공부는 시켜야 한다"고 하시던 말씀이 떠 오른다. 나는 장사를 한다고 자식들 돌볼 여가도 없었다. 아침에 나가면 밤 9시가 되어야 집에 오는데 영감님은 집에 있다가 시장에 왔다가 가면서 돌 보시고 잘 키우셨다. 영감님 덕분인 것 같다. 아플때도 병원에 데리고 가고 나는 몰랐다. 이렇게도 잘 보살피고 잘 키워 놓고 5남매만 결혼을 시키고 돌아 가셨는지 모르겠다. "3년만 더 계셨다면 강우.용우도 결혼 할 수 있는데" 생각을 하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겄 같고 더 살 수 있는 것을 내가 조리를 잘못하여 돌아 가신 것 같고 말을 해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
7남매가 있어도 항상 외롭게 지낸것 같다.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지 일하는 사람들의 수고가 많았다.다 자식들 덕분이다.돌아 가시고 나니 생각 나는 것도 많이있다.항상 하시는 말씀이 "정직은 일생의 보배다.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벼슬을 해도 한번의 실수로 집안 대대로 수치다. 공부는 잘 살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나 있어야 하는 것이다"고 하셨다. 그래도 자식들이 다 취직을 하고 밥이라도 먹고 지내니까 안심한다. 영감님 감사하다고 기도밖에 할 수 없다. "영감님 감사 합니다." 돌아 가실때도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않고 조용히 혼자 돌아 가셨을까?.이제는 영원히 만나 이야기 할수도 없다.
항상 아무일 없는것 같이 보이고 걱정을 시키지 않고 지낸것 같다. 현우가 차가 없어 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 "서울에는 차가 필수품인데 하고 걱정도 하셨다. 현우차에 타 보지도 못하였다. 인우내외가 차를 가지고 와서 타 본적은 있다. 조금만 더 살
수 있었다면 자식들이 다 차를 사가지고 같이 다닐 수가 있었는데 왜 바쁘게 돌아 가셨는지 모르겠다. 용우가 군에 있을때 상어에서 나오는약(스쿠알렌)을 한상자 부쳐 보냈을 때도 "군에서 무슨 돈이 있다고 약을 보내다니" 하면서 기뻐하면서 다 이렇게 걱정을 하니까 내가 오래 산다고 하쎴다. 부산에서 동생 영보가 개소주를 보낸것을 자시면서도 조금 났다고 하시기에 다 자시고 나면 더 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것도 다 자시지 못하고 돌아 가셨다. 장례식때 길을 지나다가 일본에서 와 가지고 현우를 업고 북창장에 가면서 옥수수를 두뿌리 가지고 걸어 가면서 먹고 국수 한 그릇 사먹지도 못한 배고픈 일도 생각이 났다. 여기가 북창장에 가는 길이요 하고 울기도 했다. 장례식을 마치고나니 돈이 많이 남았다. 모두 나에게 준다. "아들,며느리가 용돈을 많이 드리지 못하였는데 아버지께서 남겨 준것 같읍니다." 하고 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많은 돈을 받아 보니까 한집에 10만원식을 주고 손자들에게 1만원씩을 준다. 다 가고나서 생각을 하니까 저네들이 돈을 많이 써고, 고생도 하고 아직 기반도 잡지 못하고 있는데 갈라줄껄 하고 생각도 했다. 그래도 통장에 돈을 입금 해놓고 나니 미음은 든든하다. 양우는 집에 가서 또 80만원을 보내왔다. 이사도 가고 돈도 썰곳이 많은데 미안하다
모두 한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서울.원주.부산에 있기때문에 삼오날에 탈상을 했다. 내마음은 섭섭하고 서운했다. 날마다 모일수도 없고 죽은사람이 먹고 가는것도 아니고 해서 1월15일 산소에 가기로 했다. 차남 인우가 집을 돌보지 못해서 기영이가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다. 해영이도 고생을 했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현우집에 기르고 있던 개가 영감님 장례식날 죽었다고 한다. 영감님 길잡이를 할려고 갔는지 모르겠다. 현우집에는 개도 있어야 한다. 아들,며느리,딸,사위 모두 몸조심하고 건강하게 지내야 한다고 말을 하면서 더 영감님에게 미안하다.
47년동안 살면서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昭和 19년 10월 19일 ( 1944년 9월3일 )에 형부친구 중매로 결혼을 했다. 우리가 결혼을 할때는 전시라 신혼여행도 가지 못 하였다. 아버지는 그때 작은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한국에 왔다가 그길로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지 8일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잘못하여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7일을 아무것도 안드시고 그길로 병이들어 28일만에 우리 3남매를 두고 돌아 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실때는 눈물도 나고 슬프다는것도 아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아무것도 모르고 눈물도 나지 않았다. 동생 永甫는 어머니에게 피를 많이 헌혈하고 병이 들었다. 어머니 병간호에 돌아가신 슬픔때문에 간호도 해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이 행복했었다.
세상물정 모르고 자란 3남매를 언니.형부가 걱정하고 우리를 결혼시켰다. 영감님은 일본에서는 학도병에 강제로 보내기 때문에 만주에 가서 만철에 근무하고 계시다가 시모님이 병이들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왔다가 시모님이 살아 계실때 꼭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해서 선을 보러 온 모양이다. 영감님은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고 하셨다. 나는 양친을 한꺼번에 잃고 슬픔때문에 아무 즐거움도 없이 슬퍼기만 했다. 그래도 영감님은 나를 위로하고 동생들 하고 바둑을 두곤했다. 동생 영보.영무는 우리하고 같이 살고 있었다. 결혼후 영화구경을 갈 때도 서로 따로따로 헤어져서 가곤했다. 갔다 오는길에 사진을 찍고왔다. 그 사진이 지금도 있다.종종 사진을 보면서 47년전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영감님은 나는 일본인이 싫다고 하시면서 시대를 잘못타고 났다고 하시는 생각도 난다.
결혼후 영감님 공장 가까운곳에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간지 얼마후에 천황이 손을 들때,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터졌는데, 우리가 이사간 左世保(사세보)도 공습을 받았다. 6월29일 새벽,공습사이렌 소리에 문을 열고 나가보니 온 하늘은 낯과 같다. 조명탄을 터뜨리고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소이탄,오이탄 말할것 없이 한평에 15발 정도 터졌다고 한다. 평소에 훈련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도 생각도 나지 않았고 잠시 방공호에 갔다올 생각만 했다. 밖을 보다가 폭탄소리에 놀라 그냥 집을 나갔다. 비가 엇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연기 때문에 눈도 뜨지도 못했다. 우리 셋은 손을 잡고 가는데 어떤사람은 베개를 아이인줄 알고 안고,업고 가다가 억지로 던지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불이 붙고 있었다. 날이 새고 보니 아주버님 2집도 산에서 만났다. 부상을 당한 사람도 많았다. 그래도 우리집안은 모두 무사하다. 하느님 덕분인지,조상님들 덕분인지 모르겠다. 형님들은 모두 잠옷바람이고 아주버님은 장화를 신고,우산을 가지고 오시곤 했다. 집에와서 보니 온집은 타고있고 하도 기가 차서 죽고싶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하루밤 사이에 알몸이 됐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불꽃은 하늘 높이 타고 있었다. 전날밤에 영감님 친구분이 술을 드시고 갔다. 영감님과 비행기 부속공장을 같이하고 있는 사람이다. 꿈만 갔다. 영감님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항상 집에 손님을 모시고 오셨다. 언제나 말도없이 그렇기 때문에 항상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했다. 다행이 공장은 공습을 받지 않았다. 폭탄이 떨어진데만 이곳,저곳 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생각할 여가도 없다. 또 이곳에 공습을 하기 때문이다. 군함지대 이기 때문이다.
3집에서 다께오 라는 곳에 피난을 같이 가기로 하고 사세보역에 가보니 사람들이 줄을 서서 주먹밥을 받고 있었다. 우리도 배가 고파 받아서 서서 먹었다. 배가 고프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영감님 6촌형님댁에 갔다. 동생,영보.영무는 형부,언니가 와서 데리고 갔다. 2층집을 한채 빌어 가지고 3집에서 같이 살았다. 남자들은 강에가서 고기.게등을 잡아 오시고 우리들은 눈이 아파서 병원에도 가고 온천도하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중에 집에 가보니 소금만 한덩어리가 되어 남
아 있었다.
8월15일 해방이라고 방송이 났다. 일본에 있던 한국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좋아하고 아무 준비도 없이 서로 고향에 간다고 서둘고 있었다. 그당시에 아마도 죽은사람들이 나온사람들 보다 몇배나 많았다. 우리는 생각지도 않고있는데 제일 큰집은 공습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배를 한척 사 가지고 4집 같이 가자고 하셨다. 시모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눈물만 흘리신다. 지금 생각을 하니까 자식들이 모두 공습을 받아 아무 준비도 없이 큰집만 믿고 한국에 와서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고 마음아파 하시던 모양이다.
나는 7세때 일본에 와 있었기 때문에 한국물정도 모르고 시집온자도 얼마되지 않아서 집안어른들 하는대로만 했다. 대마도에서 하루밤을 쉬고 사천에 도착했다. 내가 제일 먼저 본것은 엿장수 가위소리였다. 그당시 큰아주버님께서는 한국에 기다리고 있던 아들을 키우고 계셨다. 일본형님은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일본에서 돈을 많이 가지고 오셨는데 그돈을 가지고 친형님댁에 가셨다. 그당시에 쌀한되 15전을 했다. 나머지돈은 각집에서 셋방을 구하고 돈을 바꾸다가 사기도 당하고 일본
서 가지고온 쌀.콩.미역등 여러가지를 먹고 있었다. 나는 시모님께서 같이 있자고 하시기 때문에 큰집에 같이 있었다. 그러다가 동지날이다. 그날 날씨가 몹시 차다. 세탁을 할때는 남강 뒤비리에 가서 했다. 형님은 내보다 몸이 약하시지만 나무통에 세탁물을 담고,나는 조그만 세수대야에 조금 머리에 이고 갔다. 강에 어름이 꽁꽁 얼어 있었다. 방망이로 얼음을 깨고 세탁을 했다. 대나무가 많이있었다. 나는 보기만해도 겁이 났다. 물에 손을 담그보니 차서 세탁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많
이 같이 세탁을 하고 있는데 부끄러움도 모르고 " 형님,조선에 있는 사람은 모질고 독 합니다."하고 손을 불면서 두손을 비비고 있었다. 형님은 부지런히 세탁을 하고 내 몫 까지 해준다.
집에 오니까 시모님께서 내것 부터 받아 주신다. "방에 가서 이불에 손을 넎어라" 하시면서 세탁물을 너신다. 나는 얼마나 춥고 고생을 했는지 눈물을 흘리고 소리내어 울었다. 이웃집에 형님 친구가 와서 "영남아,영남아(조카이름) 숙모가 왜 울고 있니?" 하고 묻자 "우리 조선사람이 모질고 독하다고 하면서 흉 본다야." 하면서 웃으면서 세탁물을 줄에 널기도 했다. 그당시에는 장갑도 없어서 따뜻한물을 세탁물에 조금 부어가지고 가서 손을 담그면서 했다. 그래도 자리가 없어서 벌벌 떨면서 기다리다가 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 생각을 하니 너무나 철도 없고 바보였었다. 일본에서는 수도가 있어 집에서 세탁도 했다. 친어머니는 언니를 일찍부터 일을 가르치고 결혼을 시킨것이 한이 되어 내게는 일을 시키지도 않으셨다.
그당시에 조선에서는 15세 이상의 처녀를 강제로 태이신따이(정신대)로 데리고 가기 때문에 16세때 결혼을 시키고 일본에 왔다고 하셨다. 그후 형부.언니를 일본에 초청을 해서 같이 살고 있었다. 시어머님게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철도 없는 나를 아껴 주시고 사랑 하셨다. 시어머님은 밤에 안경을 써시고 저고리 동전.버선볼 다리미질 까지 나를 위하여 하시고 형님에게 일본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가르쳐 주라고 말씀도 하셨다. 지금의 6학년 정도도 못 하였다. 24세 였다.(어머님.형님께 감사하며 살고 있읍니다.) 시어머님 하고 같은방에서 지내면서 많은것을 배웠다.
설날을 처음으로 한국에서 맞이한다. 형님들하고 하루를 재미있게 지내고 저녘밥을 드시고 여러가지 이야기도 하면서 12시가 지나서 가셨다. 큰집에는 영남.둘째형님집은 광자.명우 세째 형님집은 길영이다. 아이들이 어리다보니 아주버님께서는 동생들에게 제사 제물을 갈라주면서 이야기도 하셨다. 그래도 부끄러워서 고개도 들지 못 하엿다. 형님들이 다 가시고 나서 부터 진통이 시작 되었다. 시어머님께서는 몹시 걱정을 하시면서 아침 일찌기 영감님께 약을 지어 오라고 하셨다. 영감님은 손수 약을 끓여 주시기도 했다. 어쩔수가 없다. 큰아주버님께서는 손수 근거줄을 만드시고 온 집안이 분주하다. 10시 가까이 되자 해산을 했다. 지금 대학교수를 하고있는 큰아들 현우다. 한국에 온지 5개월하고 2일 만이다. 어머님.형님.아주버님께서 수고를 하셨다. 딴집에 계신 형님들이 오셔가지고 근거줄을 보고 깜작 놀라신다. 큰 아주버님께서는 "우리집에 경사났다. 어서 오너라." 하고 좋아하셨다. 형님들도 간난아기를 큰방에 데리고가서 종일보고 좋아 하셨다. 어머님께서는 방에 불
을 많이 때어 이불에 불이 날 정도였다. 어머님은 날 아끼시고 밖에 나오지도 못하게 하고 손수 모든것을 하셔서 1개월 이상 조리를 했다. 딴 아이들은 현우때만큼 조리를 못했다. 다 어머님 덕분이다. 항상 어머님께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 지내며 어머님 제삿날은 더 정신을 드립니다. 2월27일이 시부님 제삿날이다. 영감님은 순경시험을 치고 훈련을 받고 순경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방망이를 차고 다녔다. 영감님은 마음에 들지않는 모양이다.
언니.동생들 소식을 알고 싶어 어머님께 말씀을 드리고 창원군 동면 단계리에 있는 숙모집에 갔다. 그때 2째형님께서 명우를 기를때 덥고있던 명주 포대기를 주신다. 옷도 없고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새것을 하나 만들어 준다는 것이 지금까지 잘 되지 않았다. 형님께서는 광자.명우를 데리고 고생도 많이 하셨다. 가보고 뜻밖에 놀랐다. 언니가 한국에 나오다가 배에서 친구들하고 술을 드시다가 친구가 바다에 빠지는 바람에 친구를 구하고 형부는 아파서 마산병원에 와서 주사한대를 맞
고 말 한마디없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자상하시고 건강하시던 형부가.말도 못하고 정신을 차리고 언니 이야기를 들어본다. 언니는 약간의 돈을 가지고 왔지만 병원비.장례식을 치르고 나니 돈도 없다고 하셨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 모두 말 못할 정도로 빈곤했다. 전시 때문이다. 언니는 친정 아버지를 이장도 하시고 돈을 많이 썼다고 하셨다. 친정 아버지.어머님을 합장하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잘 하신 모양이다. 아버지앞으로 되어있는 논을 조금 팔아 가지고 진영에 집을 사서 동생 둘하고 춘선.흥갑.화자.두환을 데리고 장사를 하고 계셨다. 큰동생은 건설회사에 다니고 작은동생은 마산중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장사는 잘 되는데 장날이면 시댁식구.친정식구들이 먹고 돈도 주지않고 갔다. 그 당시에는 장사만 하면 돈을 마구 버는줄 알고 먹고만 갔다. 그래도 언니는 "얼마나 배가 고파서 그리 하겠는가?" 하면서 말도 하지 않으셨다.
제입 먹는것도 걱정을 하고 있을때 타국에서 고향이라고 온 사람들을 우왕동포라고 했다. 아무것도 가진것 없이 와서 놀고 친척집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들도 힘든 세상에 말도 못하고 있었다. 해방이라고 고향에 오면서 고생도 하고
일자리도 없고 가진것도 없고 말 할수 없이 우왕동포들도 고생을 했다. 숙모집에 있으니까 언니가 집에 같이 있자고 하셨다. 현우는 귀가 아파 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영감님께서 오셔가지고 천안에 있는 친구집에 간다고 하시면서 고추가 좋고 많이 싸다고 하셨다. 언니는 오는길에 사다 달라고 하시면서 돈을 주셨다. 영감님은 내일 기차가 지나가면 보라고 하셨다. 집이 비로 철길 앞에 있어서 아래채 뒷문을 열고 보면 다 보이기 때문이다. 진영역에서 얼마되지 않은곳이라 아침부터 기차소
리만 나면 내다 보았다. 오후 3시 차가 지나갈때 기차에서 자루를 던지고 손을 흔들면서 갔다.자루를 풀어보니 쪽지에 " 잘있어.미안해.갔다오리다."고 써 있었다. 나는 진주에 간줄만 알고 있었다. 몇달이 지나 3째 아주버님께서 오셨다. 일본에 같이 있다가 먼저 일이 있어 나왔다고 하면서 동생이 집을 사라고 돈을 주는데 작은집 2채보다 큰집 한채가 났다고 생각을 하고 같이 있을 생각을 하고 집을 샀다고 하셨다. 그리고 어머님께서 현우가 보고 싶다고 하신다고 진주에 같이 가자고 하셨다. 아주버님은 기차안에서 현우를 안아주시고 설명도 하시고 자상하셨다.
나는 결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시댁식구는 물론 영감님에게도 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고개도 잘 들지 못하였다. 너무나 우물안 개구리처럼 어리석고 바보였는지 모른다. 형님들이 말을 하면 시키는대로 했다. 큰집형님.둘째형님께서는 고생을 하고 계셨다. 세째형님은 새로산 집에 이사를 하고 계셨다. 집도 크고 방도 많고 아래채도 있었다. 벌써 다른 사람들에게 방을 세놓고 있었다. 나는 아무 영문도 몰랐다. 세째형님은 이제는 같이 있지말자고 하면서 같이 있으면 고생만 한다고 했다. 나는 시키는대로 했다. 알고보니 영김님 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생각을 하고 말한것도 모르고 한마디 말도 못 하였다. 내가 바보다. 지금 사람들 같으면 영감님 돈이 반이 들어 있다고 하면서 같이 있자고 했을거다. 나는 왜 바보였을까? 부모님도 다 잃고 고생도 하지않고 ,공습도 받고나니 아무것도 생각 나지 않는다. 세째형님께서는 한국에서 자랐고 봉래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결혼을 한 사람이라 한국 물정도 잘 알고 있기때문에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생각을 한것이다. 어머님은 나를 보고 눈물도 흘리신다. 나도 친정어머니를 만난것 같이 울기만 했다. 진영에 가서 짐을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진영에 와서보니 집도 없고해서 언니집에 있었다.
또 몇달이 지나고 나서 영감님께서 말도 없이 오셨다. 이야기로는 경찰관은 자기에게 맞지않고 친구집에 가 보니까 일본에 간다고 해서 돈도 없고 언니에게 고추를 미끼로 돈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형님을 만나 장사를 했다고 했다. 세째 아주버님이 한국에 오실때 돈을 주고나니 어머님.현우 다 보고싶어 정리를 하고 오다가 마산에서 아주버님을 만나 물건살 돈이 없다고 하시기에 돈을 주고 나머지돈도 고생을 하고 계시는 형님들에게 생활비를 조금씩 주고 집을 사 놓고 왔다고 했다. 진주에 가자고 하시기에 나는 아무걱정도 하지않고 영감님을 따라 진주에 왔다. 11월19일 큰집에 인사를 하고 어머님과 같이 집으로 왔다. 진주에서는 아주 변두리 이다. 옥봉북동 140번지이다.
대바구니.쌀 5되.수저 2벌을 가지고 갔다. 집에 와서보니 귀가 차고 눈물만 난다. 진영언니집에 있다가 보니 큰집도 많은데 어찌 이렇게도 비뚤고 작은집에다 서서 방에 들어 갈수도 없다. 마당에서 눈물만 흘리고 방에 들어갈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앞집에 종 시누이가 살고 있었다. 형님 중계로 6천원을 주고 샀다고 한다. 어머님께서 더 마음을 상하신것 같다. 할수없이 그집에 살기로 한다.
지금도 이집때문에 영감님에게 원망도하고 화가 난다. 그집 주인이 한국사람인데 그당시에 성을 갈고 金容道 를 金山容道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적산가옥이라 잘 되지않고 있다. 살때는 다 등기를 하고 매매계약도 했다고 하신다. 그런데 6.25사건때 시청이 탔다. 그당시에 새로 등기를 해야 하는데 우리집은 되어있다고 생각을 하고 아무일도 안하고 있다 팔 생각으로 정리를 하니까 김용도 앞으로 11평.국고지 8평.권재용앞으로 2평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소방도로가 우리집이 된다고 한다. 건물은 영감님 앞으로 되어 있지만 도시계획에 따라 팔지도 못하고 보상도 받기 힘들다. 매매계약서류를 분실했다. 어떻게 된건지 모르겠다. 이집에서 40년을 고생을 하면서 생활한 집인데 남의 일은 잘 보살펴 주면서 자기집은 무관심하게 그냥 있었는가? 원망도 한다. 아무리 잊고저 해도 그집에서 고생을 한것을 생각하니 잊지 못하고, 인우하고 같이 있기로 하고 인우집에 갈때 2백만원에 전세로 주고 온것이 걱정도 된다. 고생고생하고 남은것이 그집 뿐인데 자식들은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찌할수 없을까 하고 생각을 한다.
그집에서 40년을 살면서 고생한 것은 말할수 없다. 나무 한단에 150원을 해도 돈이 없어 마음대로 방에 불도 때지 못하였다. 언니집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가 막상 살림을 하다보니 어떻게 하면 될지 모르겠다. 쌀도없고 고추가루.간장도 없고 집은 금방이라도 넘어질것 같고 ,며칠을 울고 울어도 끝이 없다. 살까?죽을까? 죽을 생각이 든다. 할수없이 마음을 새로 정했다. 큰아들 현우때문이다. 아무 죄도 없는 새 생명을 생각하고 나는 고생을 하더라도 자식만은 잘 키워야 겠다고 마음을 먹고 시작을 한다. 쌀 한보시로 죽을 끓여가지고 아무반찬도 없이 놓아도 영감님은 자시면서 " 당신하고 현우만 있으면 행복이다."하시면서 나를 위로한다.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배가 고파 살 수가 없다. 현우를 업고 뒷산에 가서 나물을 캐어 죽에 넣어 먹곤했다. 하루는 어지럽고 천장이 보이지도 않고 뱅뱅 도는것 같다. 방에서 현우를 업고 쓰러진 모양이다. 영감님은 놀라서 앞집 종형님 집에 간 모양이다. 종형님이 오셔서 나를 보고 허기증이 났다고 하시면서 내가 아끼는 쌀을 가지고 밥을 하고 동김치를 자기집에서 가지고 와서 밥을 한그릇 먹고나니 눈이 번쩍하면서 천장도 보인다. 얼마나 죽을 먹었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란 나는 어떻게 하면 살 수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 지금 경상대학교 교수로 게시는 고종 시동생께서 대구 사범학교에 다니고 계실 때, 낮에는 종형님댁에 계시고 밤에는 우리집에 주무시러 오신다. 한방에서 같이 지내면서 아무것도 대접 할 것도 없고 밥도 해 주지 못했다. 나는 고개도 들지 못 한다. 내 얼굴은 웃음이라곤 없고 미안하고 부끄러워 말도 못한다. 전기도 없고 호롱불에 방은 희미하다. 다행이라고 생각도 했다. 내가 하도 말을 안 하니까 이야기를 하신다. 그 이야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손자들에게 한 일도 있다.
"삼천포 아가씨가 덕산 유덕골에 시집을 갔는데 하도 고기가 먹고싶어 하루는 동네에 갈치를 팔러온 고기상자에 손을 넣어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손에 고기비늘을 묻혀 그손을 씻은물에 양념을 넣고 밥솥에 쪄 가지고 자기 혼자 먹기가 안 되어서 시 부모님에게만 올리니 이고기가 어디서 나온것인데 국물뿐 이냐? 고 한다.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니까 시동생들이 물을 조금 더넣고 자기들도 주지 않았다고 하면서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 하도 귀가 차서 동네에서 동회때 그 사연을 이야기하니까 동네사람들이 그손을 샘물에다 싯었으면 온동네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는데 하면서 쫓아 내는 바람에 울고불면서 쫓겨 났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고기를 먹지 못할정도로 가난한 시대였다고 한다.나는 그 이야기가 하도 재미있어 미소를 처음 지었다.
방도 차고 물도 없고 날씨는 춥고 어떻게 살 수도 없다. 영감님은 밖에 나가도 아무일도 잘 되지 않아 술만 드시고 온다. 할수 없어서 생각 한것이 집에서 빵을 만들어 먹던 생각이 났다. 하루는 밀가루.설탕.팥.장작 한단을 사 가지고 현우를 업고 이고 왔다. 물동이에 물을 이는것도,물건을 사 온것도 그날이 처음이다. 그렇게 빵을 만들어 가지고 대바구니에 담아 시장에 갔다. 그날이 진주 장날인 모양이다. 쌀전에 갔다. 지금 작고한 이병구라고 번영회 회장 동생이 무엇이냐고 하면서 가지고 갔다. 팔것인냐고 묻기에 고개만 끄덕끄덕 했다. 다 갈라먹고 나서 돈을 모아 주면서 내일 또 가지고 오라고 한다. 재료를 다시 사고나니 돈이 많이 남는다. 집에 오니까 방도 따뜻하고 빵찌거기라도 먹고 나니까 배 고픈줄도 모르겠다. 기분도 말 할수 없다. 그날이 내가 장사를 시작 한 날이다.
영감님이 시아버님 제사라고 하신다. 1월27일이다. 영감님하고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시장에 가서 고기과일을 사 가지고 갔다. 어머님께서는 깜짝 놀라신다. 형님들도 놀라셨다. 그날 시작한 것이 40년을 했다. 빵장사,떡장사,찰밥장사,담배장사,생선장사. 물도 없어 밤에 물도 이고오고 현우를 업고 물건을 팔러 갈때도 한짐이고 올때도 재료때문에 한짐이다. 그래도 방도 따뜻하고 떠뜻한 물도 스고 밥도 해먹고 배가 고프지 않으니까 피곤한줄도 모르고 열심히 했다. 영감님은 자전거를 사서 외장에 다니면서 물건을 사 가지고 와서 진주장에 팔곤 했다. 비누도 사 가지고 세탁도 하고 장작도 한짐씩 살 수 있게 되었다. 무슨말을 해도 배 고픈것 보다 더 큰 슬픔은 없었다.
우리가 열심히 하는것을 보시고 어머님께서 아침에 오셔서,내가 장에 갔다 오면 가시곤 한다. 물어 보니까 우리집 밥을 먹으면 손해라고 하신다. 그래서 한방에서 불편하시더라도 우리집에 같이 계시라고 사정을 했다. 어머님께서 집에 계시니까 형우를 집에 두고 가면서 안심을 하고 장사를 했다. 어머님 자시는 고기도 사고 영감님 자시는 고기도 살수 있었다. 어머님은 돈이 든다고 걱정을 하셨다. 자시는 것은 해드려도 옷 한벌 해드리지 못하여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언제나 세탁
을 깨끗이 해가지고 깨끗하게 계셨다.
매일아침,밥을 질드시지 않기 때문에,생콩을 쌀하고 빻아가지고 놓고 어머닌에게 끓여 자시라고 하고 시장에 갔다. 장사를 하고 쌀.팥.여러가지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오면은 집에 오는 도중에 샘물이 있는데까지 어머님.친구할머니들이 마중을 오신다 "현우어멈 때문에 배가 뻘떡 일어났다."고 하면서 좋아 하셨다. 나중에 알고보니 어머님께서 죽을 끓여 가지고 동네 할머님들과 같이 드시고 아무것도 잘하지 못하는 나를 칭찬 하시기 때문이다.그당시에는 먹을것도 마음대로 잘 먹지도 못 하였다.지금이나 에전이나 나이드신분이 고생이 많았다. 어머님 은헤는 두고두고 잊을수 없다.
영감님은 장날은 진주장에서 물건도 팔고 닭점애서 달걀을 세고 계산도 해주고 수고비를 벌곤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답답하기만 하다. 돈이 돈을 버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만 해도 생각을 잘하고 장사를 했으면 고생도 많이 안할것을 돈이 없어 아무생각도 나지 않았다. 금년에 44세 되는 딸이 10월에 해산인데 8월13일.8월27일.8월30일 세번을 도둑 맞았다. 도둑이 들면 개도 안짖는다 라고 하는 말이 생각난다. 어머님은 천식이라 이불을 펴지도 안하시고 이불에 기대가지고 짐도 잘 자지
도 못하실뿐더러 뒷문에 자전거도 세워놓기 때문에 뒷방은 엎드려 가지고 가야하는 방이다. 어머님은 바시락 소리만 나도 일어 나는데 도둑을 맞는날은 아무도 모른다. 아침에야 안다.
그때 영감님은 외장에 가서 생고추를 사 가지고 와서 집에서 어머님께서 말려 가지고 차곡차곡 작은방에 모아 가지고 김장철에 팔면 목돈을 마련할 생각인데, 온집의 재산이고 특히 어머님께서 손수 말리면서 고생 하신것을 생각하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어머님께서는 더 걱정을 하신다. 아무것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해는 얼마나 추웠는지 집집마다 고드름이 주렁주렁했다. 눈도 많이 내리고 10월10일 6시반에 순산을 했다. 눈이 많이 내려서 임씨집 아주머니가 세탁을 남강에 가서 했다. 나도 미안하여 11일만에 일아났다. 남강에 가서 밀린 세탁을 하고 병이 났다. 하도 날씨가 찹고 순산뒤라 어머님께서 걱정을 하시고 치료도 해준다.
집에서 담배를 말아 가지고 팔라고 했다. 그때는 담배장사가 돈이 많이 된다고 했다. 아이들 두명을 데리고 했다. 엽초를 사 가지고 와서 작두로 짜르고 손기계로 말고 담배갑도 만들고 손으로 만 담배는 양모솔을 가위로 짜르고 갑에 넣어 마무리를 하고 새벽4시에 도때기 시장에 가서 도매로 넘긴다. 담배이름은 平和 라고 했다. 잘 팔리지만 밥을 먹을 여가도 없다. 끝도 없고 잠을 잘수도 없다. 눈이 많이 내려 온 세상이 은색이다. 그래도 열심히 했다. 현선은 순하다. 배가 고파도 울지 않고 손을 빨곤 했다. 그래도 도저히 할수가 없었다. 잠을 잘수가 없었다. 또 찰밥 장사를 했다. 영감님은 자전거를 타고 왜장에 다니고 열심히 한다.
그런가운데 또 6.25 사변이 일어난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왔다. 영감님은 마산에서 성냥을 사가지고 오다가 도내고개 라는 곳에서 만났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집 골목을 지나 모든사람들이 피난을 가고 있다. 영감님이 무사히 도착을 해서야 같이 금산면 중천리의 영감님 6촌 형님집을 가기로 했다.
앞.뒤 산에서 총소리가 나고 말할수도 없다. 영감님은 현우를 목말을 태우고 나는 현선이를 업고 짐을 이고 들고 어머님 손을 잡고 말띠고개를 넘어간다. 고개를 올라가는데 양쪽에서 군인들이 총을 들고 조사를 한다. 인민군에 가입한 사람들은 그자리에서 체포했다. 우리는 무사히 통과했다. 금산면까지 20리가 넘는다. 그래도 걸어서 간다. 사람들은 모두 바쁘게 걸어 간다. 그때 어머님은 아프신 몸인데도 같이 걸어 가셨다. 큰집.작은집도 같이 왔다. 금산다리가 없어서 강물을 건너 다녔다. 지금은 버스도 있고 다리도 있다. 6촌형님댁에서 3집식구가 같이 지내니까 미안하기만 했다. 집도 크고 잘 대하여 준다. 세째형님은 자기 친정식구하고 다른대로 갔다. 그래도 미안하여 또 집을 구하여 용심에 갔다. 그곳은 시이모님집 근처다. 피난을 왔기 때문에 모든 것이 없다. 쌀도 없고 말할수 없다. 내가 장사할때 사둔 찹살을 가지고 와서 보리밥에 조금만 쌀을 놓아 어머님과 아주버님.아이들은 쌀밥을 주고 여자들은 꽁보리밥을 먹고,밤에는 모기때문에 잠도 잘 잘수가 없다. 모기불을 피우고 온집안 사람들이 교대로 자기도 했다.
보리쌀도 잘 팔지를 않아서 영감님께서 사 가지고온 성냥으로 쌀.보리쌀과 교환해서 먹고 있었다. 반찬은 된장찌개.비린나물.촌의 밭에 있는것을 갈라먹고 있었다. 고기라곤 구경도 할수 없었고 어머님께서는 계곡에서 잡아 가지고온 새우.미꾸라지를 아이들에게 구어 준다. 반찬이 없어도 아무도 말이 없다. 호박잎.풋고추 말도못할 정도의 야채도 먹고 모두 사이좋게 지낸다. 세째 아주버님께서는 일본에 계셨다.
7월 초순에 큰 아주버님께서 집을 한번보고 오신다고 나가시고 나서는 아무 소식이 없다. 두째 아주버님하고 영감님께서 소식을 듣기위해 진주에 갔다가 왔다. 그당시에는 치안대원이라는 청년들이 아무 죄가 없어도 이사람이 나쁘다고 말만하면 잡아갔다.아무 죄도없이 인민군에게 끌려 갔다고 한다. 어머님은 아무 말도없이 앞산만 보시고 눈물만 흘리신다. 아주버님하고 영감님은 매일 진주에 와서 큰 아주버님 소식을 듣고 일을 보시곤 했다. 온집안이 불안해서 밥도 잘 먹지도 못했다. 큰형님은 영남.영복 두째형님은 광자.명우.만우 우리는 현우.현선.어머님 하고 있다. 날마다 갔다 오셔도 아주버님 일은 잘 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다가 하루는 8월15일에 나온다고 해서 옷을가지고 갔다오시더만 8월10일에 모두 데리고 갔다고 한다. 온집안 식구들과 친척들도 걱정만 하고 있다. 며칠이 지나서 인민군이 후퇴를 한 모양이다. 모두 집으로 왔다. 남강다리도 금산다리도 없어 물을 건너 다닌다. 집에온지 3일만에 청과시장에 진주에 있는 사람들을 모았다. 지금의 T.V 연속극(울밑
의 봉선화)에 나온것과 같이 전부 앉혀놓고 " 지금 U.N 군에 있는 사람들 모두나와." 아무라도 이사람이라고 하면 이유도 묻지않고 옷을 벗기고 손을 묶어 데리고 가서 총살을 했다. 그 자리에서 재판을 3일간 계속했다. 인민재판이라고 했다. 우리집안은 모두 무사했다. 집에 와서 보니 아무것도 없다. 영감님께서 성냥을 사서 조금 남겨 놓은것을 팔아가지고 장사를 시작한다. 마산의 성냥공장이 공습을 받아서 성냥값이 몇십배나 되고 성냥 구하기가 힘이 드는 모양이다.
9월15일에 아주버님들하고 같이 감옥에 있었던 사람이 살아왔다. 옥봉남동 동서기를 하던 유씨다. 경찰관.동서기.선생들도 데리고가서 널비 대암산에 가서 모두 총살을 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경찰서에 가서 진정서를 받아가지고 두째 아주버님하고 영감님은 큰아주버님을 찾아 나섰다. 거기에 가보니 벌써 1개월이나 지난후라 아무것도 알아볼수 없을정도로 부패되어 있고 고약한 냄새때문에 코로 숨을 쉴수도 없었다고 한다. 동네사람을 사서 산에 가보니 3군데 나누어 총살을 했다고 한다. 아주버님은 다행이도 입구에 있는 몇사람중에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세탁소에 맡기고 표시를 했던 서원(西原)이라고 적힌 Y 셔츠를 입고 가시고 삼베바지를 보고 또 아주버님 윗치아에 금니를 하긴 했다고 한다. 시체를 동네사람들과 같이 운반을 해서 자리 좋은곳에 매장을 하고 표시를 하곤 동네사람들에게 맡기고 왔다고 하신다. 이야기를 듣고 온집안은 울음바다가 며칠 계속되었다. 어머님께서는 먼산을 바라보시고 눈물만 흘리신다. 그때 마음 아파 하시던것이 원인이 되어 병을 얻으시고 더 악화되어 돌아가시게 된다. 이불을 개고 그위에 업드려서 눕지도 못하셨다. 아무리 말을 해도 말씀도 하시지 않으신다. 자시는것도 잘드시지 않으시고 마음아파 하셨다. 본시부터 기침을 하시면 기침이 계속해서 나온다. 사람으로 볼 수도 없다. 주사도 집에서 놓아드리고 약도 여러가지 해드려도 차도가 없다.닭 2마리(숫놈.암놈) 은행나무(암.수)한 묶음을 넣어 고아서 드리면 항상 국물만 드시고 고기는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만 있으면 자주 먹을 수도 없다. 어머님께서 계시니까 자주 먹을 수도 있다. 조상님덕에 이밥이라는 뜻이다.
그때는 미군들이 많이 있고 밤에는 나가지도 못하였다. 흑인이 온다고 하면 우는 아이도 그친다. 처음보는 사람이라 말을 걸 수도 없다. 여자들은 특히 잘 나갈수도 없다. 어느날밤에 영감님을 데리고 갔다. 징용을 보내기 위해 아무라도 밤에 동서기들이 와서 남자가 있는 사람은 데리고 갔다. 놀라서 따라가보니 경찰서에 갔다. 가서 보니까 수백명이 그곳에 있다. 내일 아침에 출발 한다고 한다. 집에 오는길에 언니에게 이야기 하고 어머님께도 이야기 했다. 아침 일찍 아무 준비도 없이 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언니집에 갔다. 언니는 먹을것을 여러가지 준비하고 오셨다. 어디로 가는 것도 모르고 연락도 없었다.
어머님께서는 더 아프시다.현우.현선을 데리고 인우를 임신을 하고있어 어머님을 돌보고 있다가 몇달이 지나 온다는 소식에 어머님께 말씀을 드리고 앞집에 있는 종형님께 어머님을 부탁드리고 현우손을 잡고 현선을 업고 진주역까지 걸어 갔다. 그때는 차도 없고 버스도 없었다. 말할수도 없이 바람이 불고 날씨가 많이 차다.
지금 같으면 5시경에 기차가 도착했다. 다른사람들은 모두 짐을 가지고 온다. 영감님은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어 "짐은?" 하니까 화를 내면서 "도둑질을 하고 올까?"하신다. 걸어서 집에 오니까 벌벌 떨린다. 저녘밥을 먹고 영감님은 피곤하여 어머님곁에 잔다. 앞집의 종형님이 오셔서 이야기를 하시면서 어머님께서 아무 이상도 없었다고 하신다. 형님께서 가시고나서 어머님께서 "현우야 나는 간다" 고 하시면서 손을 흔드신다. 어머님.어머님 하고 불러도 어머님은 손만 흔들흔들 하신다. 영감님께서 오신 것을 보고 안심하고 돌아가신 모양이다. 가난때문에 효도도 해보지 못하고 저 세상에 가시는가 생각을 하니까 말 할수 없이 눈물만 난다.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앞집 형님이 동네 사람을 시키고 준식이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현우를 업히고 아주버님들께 연락을 드렸다.날씨가 매우 추웠다. 그래도 장례식날은 푸근했다. 현우가 5세 이다. 11월19일 이다.
3일장을 하고 1년상을 지냈다. 1일.15일에는 꼭 산소에 갔다 왔다. 돌아가시기 3일전에 자기가 입던옷을 아무도 주지말고 네가 입으라고 하셨다. 어머님께서도 옷도 없다. 오래된옷 몇벌 뿐이다. 해방된지 5년이 되어도 옷 한벌 해드리지도 못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깨끗하게 하고 계셨다. 언제나 말도 잘 하지 않으시고 꾹 참고 자식들 걱정만 하시던 어머님을 생각 할수록 눈물만 난다.
다음해 1월 3일에 차남 인우가 태어났다. 아침 5시반이다. 이웃집에 사는 할머니가 와서 태를 갈아준다. 시청에서 배급으로 강목이 조금 나왔다. 그때는 우리뿐만 아니고 모두 가난했다. 이 주일 후에 또 장사를 시작했다. 인우를 업고 다니기가 너무 피로해서 이웃집에 맡기고 다닌다. 하루에 그때 돈으로 10원식을 주고 죽거리 쌀을 조금 주기도 했다. 젖도 얼마 먹지 못 하였다. 1년 6개월만에 걷기도 했다. 지금도 인우는 몸이 약하다. 그때 부산에서 동생이 결혼을 해도 가 보지도 못했다. 얼마나 가난했는지 모르겠다. 현우.현선은 집에두고 인우때문에 이웃집에 있는 아이를 집에 데리고 있었다. 그 아이가 온 집에 있는 물건은 다 도둑질을 한다. 젖이 많아도 먹이지를 못했다. 장사를 하기 때문이다. 영양 부족이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잘 되지 않는다. 또 도둑을 맞고나니 힘도 없다.
그때 언니가 진주로 이사를 왔다. 언니가 고기(생선)장사를 하는집에 방을 구해서 같이 장사를 하면서 같이 하자고 하셨다. 떡장사를 할때보다 일이 없다. 아침에 가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서 팔고 돈을 주고 집에 와서 집안일도 할 수 있었다. 길가에 고기 상자를 놓고 팔다가 차가 오면 이리저리 피해 가며서 했다. 그때는 인우를 업고 한다. 내가 아이를 업고 고생 하는것을 보고 점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판장에 자기 점포에서 같이 하자고 하셨다. 바깥주인은 강씨고 아내는 구씨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형님이라고 했다.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아이도 조금 내려 놓고 재울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 점포에서 장사를 했다. 그래도 그 사람이나 나도 너무 양심적이고 바보라서 돈도 잘 벌 수도 없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바보중에 바보다. 그러다가 시장에 불이 나서 그분들 하고 헤어지고 또 길가에서 하다가 판장에 빈자리에 놓고 팔기도 했다. 경매가 끝나면 거기에서 한다.
그때 또 영감님이 집에 안 계셨다. 양우가 태어났다. 1월7일이다. 나는 물건을 남에게 맡겨두고 일주일을 조리한다. 두째 아주버님께서 쌀 5되.나무장작 한단을 가지고 오셨다. 고맙게 생각한다. 양우가 태어 났던날도 눈이 내리고 일주일마다 눈이 내린다. 그때는 장사도 크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을 벌 수도 없다. 영감님은 몇개월 후에 집에 왔다. 자전거를 타고 외장에 가서 물건을 사가지고 와서 진주장에 팔기도 했다. 그래도 잘 되지 않았다. 쌀장사를 한다고 일수돈울 가지고 했다. 이익도
박한데다가 큰 아주버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에 쌀도 사주고 나무도 사주고 장날마다 본전에 이자를 붙이고 돈을 갚아 나가다 보니 장사 밑천도 없고 또 쌀도 도둑을 맞고 또 실패를 했다. 집도 해마다 엮지 못하여 비가 오면은 온방에 비가 새고 그릇마다 받치곤 했다. 그때 큰집에서 영복이를 우리집에 맡겨셨다. 영복이도 나이가 어리고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몰랐다. 그런데 영복 외할머니께서 영복이를 데리고 가셨다. 그대신 우리가 영복이 생활비를 주기로 했다. 영감님은 장날은 시장에서 조금씩 장사를 하시고 집에 계시곤 했다.
네째 철우는 8월4일에 태어났다. 일주일도 조리를 못하였다. 사람들이 아이를 업고가면 모두 웃기도 했다. 그때가 3주일 지냈다고 했다. 현우가 국민학교 입학할때 겨우 하루 데려다 주고 현선이는 현우하고 같이 보냈다. 아이들은 업고 귀저기를 갈때는 고기상자에 눕히기도 하고 재우기도 했다. 자리가 없기 때문에 판장에 경매를 하고나면 빈 자리에서 팔기도 했다. 강우.용우를 업고 장사를 하면 딸 현선이가 학교에 갔다 오는길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상자에 눕혀놓고 재우면 사람들이 멸치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우를 중학교에 보낼 생각도 못하였는데 남중학교에서 학술경연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다. 그래서 등록금 무료라고 해서 남중학교에 보냈다.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에 가도 가 보지도 못 하였다. 현우는 남중에서 진고에 입학을 했다. 옥봉북동에서 남중까지 매일 비가오나 눈이오나 걸어서 다녔다. 그때는 날씨도 추웠다. 그래도 지금 아이들 처럼 옷도 잘 입히지도 못하고 잘 먹이지도 못 하였다.
현선은 여중에 다닐때도 집안일을 하고 학교에 가는길에 내밥을 이고 갔다주고, 올때는 동생을 데리고 갔다. 나도 하루종일 아이를 업고 장사를 하기때문에 피곤하여집안일을 잘 해주지도 못 하였다. 지금 생각을 하면 미안한 생각 뿐이다. 현선이는 고등학교에 가게다고 하여도 못가게 했다. 집안일때문에 일주일이나 밥도 먹지않아 병이 났다. 그때 마침 부산에서 언니가 와서 약도 해주고 집안일도 돌보아주고 했다. 현우는 대학.인우는 중학.양우.철우 모두 학교에 가기때문에 현선이 앞일은 생각도 못하고 중학교를 마치고 말았다. 동생들은 다 대학을 마치고 현선이가 잘 살지도 못하고 있으면 내 가슴이 얼마나 아플지도 모른다. 지금도 현선이 에게 미안한 생각 뿐이다. 무엇을 할까 해도 학벌 때문에 못한다고 불평할때도 있다. 그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인우는 중학교에 갈때도 공부를 잘하는것을 중학교만 마치고 말거라고 했더니 그때부터 공부를 잘하지 않고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었다고 한다. 현우가 방학때 와서 보고 현선이를 고등학교 보내지 못한것도 가슴 아픈데 인우까지 안보내면 어찌 군대도 못 낸다고 하면서 나도 모르게 서울로 데리고 갔다. 그때는 용돈도 잘 주지 못 하였는데 어떨게 지내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부터 현우.인우는 더욱 고생도 많이 했다. 고등학교.대학까지 다 현우가 보냈다.
또 양우도 진고 다닐때 공부도 잘하고 회장(학생회 부회장)도 하였지만 집안일 때문에 자기 마음껏 노력도 하지 못했다. 또 대학은 현우에게 맡기고 만다. 그래도 아무 말이 없어서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중.고등학교 다닐때도 현우.현선은 공납금을 늦게 납부했기 때문에 벌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감님은 장사가 잘되지 않으니까 말도 하지 않고 술만 드시고 화를 내곤했다. 나는 술만 드시고 화를 낸다고 같이 화를 내곤했다. 돌아가시고 난 지금 생각을 하니까 마음대로 잘 되지는 않고 돈은 필요하고 하니까 꾹 참고 술을 드시고 화를 낸것 같다. 술은 진로만 드시고 말은 잘 하지도 않고 마음을 상하신 것을 나는 몰랐다.
지금 생각을 할수록 모범가장이고 모범 아버지다. 돈이 있어도 불행한 가정도 있다. 그래도 우리집은 돈만 없다뿐 다른걱정은 없었다. 영감님께서 자식들을 잘 키우셨기 때문이다.
현우가 대학을 마칠때까지 한번도 서울에 가보지도 못하였다. 어떨게하면 될까 열심히 장사를 해도 머리기 나빠 잘 돌아 가지도 않았다. 현우가 졸업을 할때 서울에 두째형님하고 같이갔다. 아무것도 안가지고 갔다. 서울역에 내리니 눈물만 난다. 낯선 서울에서 돈도 없이 동생들을 보실피고 자기 공부를 했을까 생각을 하니까 내가 고생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현우에게 고맙다. 장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저네들이 살고 있는데도 가보지 못하였고, 현우가 학교 다닐때도 양복한벌 해주지 못하였다. 군인복을 염색을 해서 입고 있었다. 그래도 한번도 옷에 대한 말을 하지않고 지냈다. 여학생들로부터 '한씨는 여름도 겨울'이라고 놀림도 받았다고 동생들에게 들었다. 아르바이트를하고, 동생들을 돌보고 옷도 가끔 받아서 동생들하고 같이 입곤 했다. 양복이라곤 졸업을 할때 한벌 해 주었다. 그래 가지고 학교에 근무만 하면 다 된줄로만 생각을 했다. 지금 보니까 옷도 잘 입어야 하고 일도 많은 것을 나는 몰랐다. 모든 것을 영감님이 자립을 시킨 것이다. 인우.양우를 대학에 보내면서 말이다. 철우.강우.용우.동생 5명을 다 데리고 있으면서 자기공부도 하고, 현우가 아니었더라면 대학을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현우가 하는 것을 보고 동생들도 다 잘한 것 같다. 현우.현선.인우.양우.철우 결혼을 해도 저네들이 생각을 하곤했다.
현선이가 25세때 까지 수도물도 전기도 없었다. 집안일만 시키고 자식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못난 부모 탓이다. 영감님은 항상 제비가 황새를 따라가면 안 된다. 자기 분수에 맞추어 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식들은 아무 탈없이 잘 자란것 같다. 큰집.작은집일도 돌봐주고 조카들 걱정도 한숨을 쉬면서 하신다. 질부들을 볼때도 가서 선을 보시고 다 성사를 시키신다. 우리집 며느리도 다 영감님께서 결정을 하셨다. 사람을 참 잘 보신것 같다. 모두 다 착하고 잘 지내고 다 효자다. 다 영감님 덕분이라고 생각을 한다. 강우.용우는 영감님도 안 계시는데 어떻게 할까 걱정도 된다.
집안일들은 아주버님들이 안 계시기 때문에 자기 혼자 할 수 밖에 없다. 몸이 건강 하실때는 큰집.작은집일 까지 맡아 촌에도 다니시고 때로는 조카들도 데리고 가실때가 많았다.아주버님들이 돌아가시고 나서 제사를 우리집에서 모셨다.조카들이 장성할때 까지 자기가 모신다고 하셨다. 2월7일.2월27일.3월11일.5월7일.5월13일.6월7일.6월20일.8월14일.8월15일.9월9일.(10월15일.10월18일 시사)11월18일. 그래서 아무리 술을 드셔도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정성껏 지방을 써놓고 자기가 장도 보셨다. 다른것은 크고 작게 할수없다. 그래도 제사는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잘살면 크게 많이 하고 못살면 찬물 한 그릇도 정신들여 모셔야 한다고 하시면서 제사때 집안사람도 만나고 요리연습도 하고 조상님 덕분에 맛있는것을 먹었다고 이야기도 하고 "산 사람 잔치다" 라고 하셨다. 지방에 있는 둘째 인우는영감님 하시는것을 보고 잘하고 있다. 며칠전에 고종 시동생(인찬아제)집에 초대를 받고 가보니까 영감님 칭찬을 하시면서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하셨다.
영감님은 항상 술이 깨고나면 후회도 하시고 정성껏 말씀도 하셨다. "말을 조심하고 내가 말을 할때는 상대방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절대로 아는체 하지말고 좋은 이야기만 하라"고 하시면서 "모르는 것이 약이다. 말을 조심하라"고 하셨다.내가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술만 드시면 힘이 없어서 잘 넘어지기도 하셨다. 한번은 남의 달걀 바구니에 넘어져서 한바구니를 깨드린다. 할 수 없이 배상을 했다. 그중에 조금이라도 성한것은 돈을 만들기 위해 음식점에 싸게 팔고 아이들에게 먹이지도 못 하였다. 영감님은 미안하다. 힘이 없다고 하셨다. 자식들은 영감님 마음도 속속들이 모른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해마다 좋은약을 해주지 못하여 힘이 없는 것 같다. 아파 계셔도 집안일을 이야기 하면 다 걱정 하시고 해결도 하셨는데 이제 나 혼자라고 생각을 하니까 더 영감님 생각에 눈물만 난다.
온 집안일도 자기 혼자 잘 하셨다. 큰집 아주버님묘 이장 걱정을 하시고 내가 없으면 조카들이묘를 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일본에 계시는 아주버님에게 돈을 부쳐달라고 편지를 하셨다. 이장하고 남은돈은 명우.영감에게 맡기면서 잘하라고 하셨다. 그때 이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주버님 묘는 찾을 수도 없었다. 둘째 아주버님께서 돌아가실때도 자기가 장사를 잘 지냈다. 아무도 안계시기 때문에 자기 혼자서 친구들 계군들에게 도움을 받아 생이(상여)도하여 지금 조카들도 고맙다고 말을 한다. 살아 계실때는 몰라도 돌아가시고 나니 잘하신 것이 생각도 난다. 일본에 계시는 큰 누님께서 조상들이 공동묘지에 계시는 것을 보시고 산을 사주셔서 이장을 했다. 금산면 중천리에 있다. 덕분에 영감님도 윗대(上代) 조상님들이 계시는 곳에 모셨다. 산을 산지는 10년전 이다.
현우.현선.인우.양우.철우.강우.용우 모두 잘먹이지도 못하고 옷도 한벌 사 주지도 못하였다. 인우는 지방에 살기 때문에 더욱 고생을 했다. 고기상자에 허리도 다치고 결혼후에도 아침 4시에 일어나서 하대동에서 진주시장까지 달려와 물도 길어놓고 진열도 하고 기다리다가 내가 나오면 갔다. 그래도 불평 한번 하는 것을 보지 못 하였다. 시장을 새로 짓고나서 장사들만 많이 생기고 길가에만 장사가 되고 점포는에서는 잘 되지도 않는다. 그런중에 또 걱정이 생겼다. 점포주인이 팔겠다고 한다. 돈도 없고 장사는 해야하고 어떻게 하면 될까 생각도 나지 않는다. 다섯째 아들이 우리가 걱정 하는 것을 보고 일본형님께 편지를 했다고 한다. 백만원을 부쳐 달라고 했다고 한다. 형님아들 다케지(竹二) 가 백만원을 가지고 왔다. 일본서 백만원.현우 50만원.방배동 동생이 20만원.1백75만원을 주고 점포는 샀다. 그래도 아직까지 그돈을 값지 못하고 있다.
현선이가 집에 있을때는 그래도 돈 걱정을 많이는 안했다. 현선이가 시집을 가고나서 1개월 동안은 집에오면 방도 캄캄하고 어머니 하는 현선 소리도 나지 않고 일도 많다. 집에 와서 손발만 씻고 차려주는 밥을 먹다가 내가 다하니까 더욱 생각도 났다. 언니가 종종 집에 와서 집을 돌보아주기도 했다. 언니가 가고나면 고3 양우가 밥도 짓고 설거지도 했다. 철우.강우.용우들도 집안일도 하고 모두 잘 지냈다. 아이들이 고생 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장사를 안 할 수 없다. 영감님은 술을 잡수셔도 하루에 몇번씩 집에 갔다가 오시기도 했다. 양우는 머리도 좋고 진고에서 회장(전교 부회장)까지 해도 집안일 때문에 서울대를 포기하고 고려대에 갔다. 그래도 말이 없다. 철우는 집안형편을 보고 2학년을 마치고 군에 갔다. 강우.용우는 철우가 군에 가고나서부터 점포에 와서 교대로 도와주고 밥도 짓기도 하고 설거지를 하고 학교에 가기도 했다. 현우가 결혼을 할 때는 인우는 알오티시 장교로 군에 있었다. 양우는 학교를 마치고 군에 갔다. 그때도 배도 고프다고 했다. 군에 가도 한 번도 면회도 가 보지 못하였다. 현우가 결혼을 할 때도 나는 장사를 한다고 혼수준비를 언니.영감님.방배동 동생에게 맡기곤 했다. 결혼준비도 현우가 수고를 했다. 집에서는 손님이 많아 큰집.작은집 형님.언니가 일을 많이 했다. 결혼을 하고나서 동생들을 데리고 부부교사를 하면서 고생을 했다. 며느리는 기형이(둘째)가 태어나서부터 집안에서 살림을 했다. 인우는 집에서 가까운 대동기계공고에 취직을 했다. 인우가 결혼을 할 때도 나는 서울에 가지 않고 혼수를 영감님.언니.방배동 동생에게 맡기고 장사를 했다. 결혼후에 방 1칸을 전세로 있다가 지금은 아파트에 있다. 며느리는 서
울에서 아무 세상 모르고 잘 지내다가 고생을 한다. 며느리가 간전에 있으면서도 퇴근길에 점포에 와서 도와주고,일요일에는 저네들도 바쁜데 집에 와서 저녘밥을 해주고 갔다. 지방에 있으니까 일도 많다. 제사때도 다 영감님.인우.며느리가 하고 나는 장사만 했다. 영감님은 큰집.작은집 걱정을 많이 하시면서,술도 많이 드시고 잠도 자지 않을 때도 있었다. 큰집.작은집 조카들이 결혼을 해도 걱정을 하시고 형님께서 물건값이 채여서 장사를 못하실때도 돈을 벌어 가지고 갚고 장살를 하게 하셨다. 강우는 진고에서 공부도 잘했다. 그러다가 친구하고 다투는 바람에 내가 생전 처음으로 진고에 가 보았다. 강우도 현우가 있으니까 서울 성균관 대학에 가서 마치고 군대에 갔다. 현우가 대학원을 마칠때도 양우.강우가 대학을 졸업할때도 가보지도 못했다. 철우는 지방에 있어 갔다 왔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돈때문에 하루도 걱정 안하는 날이 없다. 내가 머리가 나빠서 일수돈을 썼기 때문이다. 용우가 고등학교를 마칠때는 많이 피곤했다. 장사도 잘되지 않고 물건값 때문에 장사를 할수도 없게 되었다. 지금 생각을 해보니까 내가 너무 양심적이고 배짱이 없었다. 양우는 군대에 갔다 와서 현대건설에 있다가 사우디 아라비아에 갔다. 나는 장사를 하지 못하고 점포 문을 닫고 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 돈을 내가 썰때가 많은데 어떻게 할까 하고 울기도 많이 한다. 현우가 매월 40만원씩을 부쳐준다. 그것을 가지고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점포만 팔면 해결이 되는데 잘 매매가 되지 않는다. 물건값 받을 사람이 고소를 해서 재판을 했다. 온 식구들이 아무 경험도 없고 지금 보니까 변호사도 사지않아 재판에서 졌다. 현우.인우 월급에서 반을 갚아야 한다. 지금도 며느리에게 미안하다. 몇개월 지난후에 점포가 팔린다. 사위 김서방이 수고를 했다.
기욱이를 남의집에 맡겨 놓고 있는 것을 집에 데리고 와서 보고 유치원에 가는 것도 보고 세월을 보낸다. 그러다가 인우가 아파트에 같이 있자고 했다. 영감님은 갈 생각이 없어 돌아보고 돌아보곤 하셨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그래도 2층집이라 물 때문에 고생을 했다. 살림을 해보지도 못한 내가 집안일을 할 수가 없어 인우 내외가 고생을 했다. 일본 있을때는 전혀 할 생각도 않았고 한국에 와서는 장사하고 언니가 와서 종종 도와주고 딸 현선이가 잘 했기 때문에 돈에 맞춰 생활 한다는 것이 여간 힘이 든다. 내가 장사 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고생한 것 같기도 했다. 강우가 2월말에 마치고 와서(대학을) 있다. 나는 아무것이라도 하면서 용돈을 벌어 써라고 했다. 그래도 며느리는 지금 놀지 않으면 놀 수도 없다고 하면서 타자기를 배우고 자동차 면허증도 받았다. 10월에 군에 갔다. 타자를 배운 것이 군에서 많이 써였다고 했다. 며느리가 잘 해준 껏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장사를 못하고 인우집에 갈 때 큰집.작은집은 다 집도 짓고 조카들도 잘 살기 때문에 상대(上代) 제사를 큰집에 물려준다. 15년이나 모시던 제사를 물려주고 나니 영감님이나 나는 서운했다. 그래도 큰 조카 영남 내외는 제사를 정성껏 잘 모시고 있다. 고맙게 생각한다.
철우는 학교에 나가면서 방학때는 노가다 일을 하곤 했다. 그래도 졸업하자 거창여고에 갔다. 그때도 인우 내외는 옷장.담요등 여러 가지 필수품을 사주고 내가 할 일을 인우내외가 다 했다. 못난 부모 때문에 자식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강우는 10월에 군에 가고 양우가 외국에서 와서 결혼을 할때는 또 현우내외가 수고를 많이 했다.
양우가 결혼 한지 얼마 안되어서 또 이라크에 간다고 했다. 그때 서울에 와서 좀 집을 보라고 한다. 기욱이가 6세.기영이가 4세 이다. 다 아직까지 내가 돌 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하고 걱정을 하다가 철학관에 가서 물어 보니까 다 머리가 좋아 잘 할수 있고 내가 있는 것보다 났다고 했다. 그래서 안심을 하고 서울로 가기로 했다. 서울에 갈 때 인우내외는 어머니도 새 옷장에 옷을 넣고 살라고 하면서 새 옷장.이불장.텔레비젼등을 모두 서울에 부쳐준다. 기영이를 데리고 가서 방학때 인우내외가 데리고 가니 가슴이 아프다. 지금도 기욱.기영이를 보면 항상 가슴이 아프다. 내가 잘 돌보지도 못하고 간 것이 가슴 아프고, 보면은 눈물이 난다. 양우집에 셋째 며느리하고 용우하고 같이 있다가 8개월만에 양우가 왔다. 그래서 현우집에 갔다. 양우집에 있을때도 다리가 아파 고생을 했다. 현우가 한달에 10만원씩을 준다. 현우는 도봉산 약수터에 가서 100일동안 4되짜리 물통 2통씩을 갖다준다. 아침 3시.4시에 가도 사람이 많아 기다려야 하는데 눈이 오나 비가오나 매일 아침에 약수를 4되짜리 두통식을 갖다주고 출근을 한다. 기택.기형이도 같이 데리고 오곤했다. 일요일은 고기.과일도 사가지고 와서 놀다가 가기도 했다. 이웃 사람과 관리 사무소 사람은 천하에 없는 효자라고도 했다. 나는 감사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마시곤 했다. 아픈다리가 현우덕분에 나도 모르게 나았다. 현우에게 얼마나 고맙게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서울에 올 때 기영이를 데리고 왔는데 방학때 와서 데리고 가니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가슴이 아팠다. 아직까지 내가 조금더 돌봤어야 하는데 생각을 하면은 마음이 아파 성당에 가서 영세도 받고 수요일,일요일에는 가서 기도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영이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픈 것은 다름이 없다. 그때가 도봉구 미선 아파트11층 103호 양우집에 있을 때다. 선영이가 4월6일에 태어났다. 돈도 없어 잘 해주지도 못하였다. 양우가 8개월만에 휴가를 왔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몇 개월 고생을 했다. 용우는 졸업반이라 친구들하고 방을 빌어 가지고 마무리 공부를 했다. 용우가 졸업을 하는날도 영감님은 가시지도 못하였다. 양우가 오고나서 놀고있고 하니까 현우집에서 같이 있었다. 영감님은 진주에서는 소주만 드시다가 서울에 가서는 정종을 현우가 드시라고 해서 양우집에서는 2일만에 한되씩을 드신다. 그러다가 현우집에서는 3일만에 한되씩 드신다. 양우가 새로 취직을 하고 철우가 결혼을 한다고 해서 진주에 또 왔다. 철우가 거창에 있고 해서 인우집에서 결혼준비를 했다. 인우내외가 많은 고생을 했다. 철우 결혼식날은 참석을 하셨다. 인우집에 와보니까 내가 같이 있을때보다 더 잘해 놓고 집도 이사를 하고 있었다. 고맙게 생각을 했다. 내가 돈이 없어 형제간에 돈을 조금씩 내고 했다. 기욱母는 진주에 있기 때문에 학교에 나가면서도 내가 할 일을 며느리가 다 했다. 고맙게 생각을 한다. 인우가 같이 있자고 해도 서울에 갔다. 내가 같이 있을때보다 더 잘해놓고 아이들도 잘있고 해서 안심하고 갔다. 인우내외가 철우 때문에 부담을 많이 했다. 내가 알면서도 돈 때문에 잘하지 못하였다. 강우가 일월달에 제대를 하고 현우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6월
달에 취직을 했다. 영감님은 서울에 졸병이 났다고 하셨다. 부산으로 갔다. 그래도 가보지 못하였다.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을 많이 했다. 용우가 졸업을 하고 군에 가기위해 군복을 가지고 왔다. 영감님은 장교 모자를 써보시고 좋아 하셨다. 현우가 사진을 찍기도 했다. 지금도 그 사진이 있다. 용우가 입대를 하고나서 외출을 왔을때도 기뻐 하셨다. 6월1일에 남영이가 태어났을때도 선영이를 돌봐 주지 못하였다. 9월30일에는 철우집에 해영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영감님 걱정을 하면서 철우집에 와 보기로 했다.
해영 백일때다. 진주에 와서 해영이를 보니까 귀엽기도 하고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지냈다.며느리도 잘 해준다. 그래도 영감님 건강도 걱정이 되고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되어 밤에는 잠도 오지 않았다. 영감님.손자들 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내 일이다. 내가 서울에 가니까 고맙다고 하셨다. 현우가 큰집을 사 가지고 이사를 한다고 해서 서울로 갔다. 5월7일에 이사를 하고보니 조금 무리는 해도 집이 크다. 마음에 든다. 영감님도 기뻐하시면서 현우가 차만 사면 안심하는데 서울에는 차가 필수품인데 하면서 걱정도 하셨다. 집이 크면은 돈도 많이 들고 일도 많다. 며느리가 수고가 많다. 며느리가 바쁘기만 하다. 8월19일이 영감님 70제다(칠순제). 현우집에서 잔치를 하고 사진도 찍고 영감님은 기뻐하시고 웃기도 하셨다. 집이 크서 다 모여도 걱정이 안된다.이때가 영감님을 제일 기뻐게 해 들인 것 같다.
철우집 있는데가 공기도 맑고 해영이도 돌 보아줄 생각으로 진주에 가자고 했다. 현우는 집도 크고 하니까 가지 말라고 한다. 나는 또 서울에 올때는 펄펄 건강하게 오겠다고 했다. 현우가 열차 안에 업고 오고 진주에서는 철우가 업고 내린다. 인우내외와 철우 강우도 마중을 왔다. 인우집에 같이 있자고 했다. 그래도 5층이라 오르내리기가 불편하고 해서 철우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처음에는 한약도 드시고 병원에 다니기도 하셨다. 병원에 다니면서 차 타는것도 피곤하다고 하셨다. 그래도 날씨가 너무 많이 더워서 조금 시원 하면은 한약을 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감님께서 그리 속히 돌아 가실줄은 생각지도 못 하였다. 아직까지 강우.용우 결혼도 시키지 않고 나한테 맡겨 놓고. 며느리들은 다 자기가 결정을 하셨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데 이제는 나 혼자 어떻게 하면 될지 모르겠다. 아픈몸인데도 항상 자식들이 건강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데 하면서 걱정도 하셨다. 뼈.현광(?).가죽만 남아도 아무 불편없이 참고 지내면서 한 평생을 고독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영감님을 생각 하니까 더 가슴 아프다. 조카들도 삼촌은 좋은분입니다. 돌아 가시고 나서야 알게 된다고 한다. 젊을때는 용감 하시고 희망도 크고 철우가 영어 선생이라도 철우보다 말(회화)은 잘 하시고 중국말도 잘 하셨다. 여행을 자식들에게는 하라고 하셨다. 사람은 같이 만나도 죽을때는 같이 갈 수 없다. 의사도 한의사도 죽는데 하면서.마음을 먹어도 잊지 못하고 매일 아침에 하늘 나라에서는 좋은 세상 만나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기도 합니다. 강우가 서울에서 교육을 받고 영감님을 뵈옵고 용우가 6월30일에 제대를 하고 대우에 입사를 했다고 왔다가고 현우내외와 양우내외가 온다고 하니까 안심을 하던중 현우내외가 오니까 마음을 놓고 저 세상으로 가신 모양이다.
일본에서 대동아 전잰때의 고생.6.25사변때의 고생을 생각 하면서 자식들을 공부 시키느라 술 한잔을 안주도 없이 자시던일. 남강을 보면은 다리가 없어 큰집.작은집을 다니면서 물을 건너 다닐때의 생각.아무 잘못이 없어도 형님들 에게 야단을 맞고도 말 한마디더 안 하시던일. 내가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하면은 자식들이 본을 본다고 하면서 참고 또 술 한잔. 돌아가시고나서야 술을 자시던 이유도 알게 되었다. 원래 다른 사람에게는 말이 없고 참고 계시면서 술이라도 한잔 하시고 참고 계신 것 같다. 내가 말을 하면 참아라. 네는 옳다고 해도 듣는 사람에게는 잔소리다. 말을 좋게하라고 당부 하시던일 생각 할수록 존경 할뿐이다. 내가 영감님에게 많은것을 배워도 아직까지 미숙하다. 아파 계시더라도 강우 용우 결혼을 시키고 돌아 가셨더라면 내 가슴이 이렇게도 아프지는 안 할지 모르겠다. 내 혼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영감님 덕분에 자식들에게 대우를 받고 미안한 마음뿐 이다. 서을에 갈때도 비행기로 가고 가서는 용문사.용추계곡, 양우집에 갔을 때도, 지리산.인우내외는 지리산 콘도에 2박이나 하고 손광사에도 가보고 덧산 계곡에 가서도 회도 먹고 닭백숙도 먹어도 마음은 영감님 생각을 안 할 수없다. 철우가 내원사 계곡에 ,데리고 갔응때는 어찌나 영감님 생각 때문에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노래도 했다. 항상 나 아니면 안된다고 하지말고 모든 욕심을 버리라고 하시던 말씀 다시는 이 세상에서는 아무데 가도 만날 수 없는사람. 모든 것이 영감님 바라던대로 자식들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영감님에게 감사 할뿐이다.
3월10일에는 내 70순제라고 자식들이 뷔페집에 가서 잔치를 할 때는 마음은 영감님 생각이고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 뿐이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 몸도 조금 회복이되고 이제는 혼자라도 서울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4월5일에는 풀이 너무 많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겠다. 아직까지 자주 들리지 못하여 미안 하다고 생각한다.
영감님이 돌아 가시고 나서 잠이 오지 않을때면 조금씩 적고있다. 해영이를 데리고 학교에 간다고 하시더만 욕심대로 되지 않는다. 우리가 결혼 한 후 부터는 고생도 하시고 일도 많고 풍파도 많은 세상에서 자식들을 잘 키워 놓고 내에만 복을 받게 하고 저 세상에 가신것 같다. 서울에도 갈 생각을 하면서 선풍기 개수를 잘 보관 하라고 하시던 말 이제는 혼만 현우에게 가신 것 같다. 영감님에게 감사 할뿐이다. 내에게 자식들이 잘 해주니까 못난 부모 밑에서 고생만 하고 자립을 하고 아직까지 기반도 잡지 못하고 있는데 돈을 많이 써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 미안하다. 그래도 모두 대학을 마치고 직장을 가지고 밥이라도 먹고 있으니까 안심이다. 인생은 공부가 다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큰집.작은집 조카들은 지금은 잘 살고 있으니까 안심
도 된다. 만날(매일) 우리 아이들보다 잘 살아야 한다고 걱정을 하시면서 모든 것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고 하시더만 이제는 안 하셔도 잘 살고 있다. 부모가 할 일도 조심이 되고 자식노릇더 조심이 된다. 항상 모든 것을 만족하고 기쁜마음으로 살 생각을 하고 있지만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면은 잘 되지 않는다. 영감님 계실때에 지금정도로 몸이 회복 되었으도 잘 할수 있었는데 천금보다 일신이라 몸이 건강 해야된다. 해마다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 지금이라도 어머니 있을때가 좋았다고 할 정도로 해주고 싶다. 그래도 마음뿐이지 잘 되지 않는다. 현우집에서 매일 수영장에 가서 운동울 하면서 일본에서 수영할때를 생각했다. 내마음을 정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1월15일 영감님 산소에 가서 풀을 뽑고 무덤을 보면은 아파 계시면서도 10일만에 한 번씩 이발을 하시던 분인데 풀이 많이 자라나면 얼마나 갑갑할가 생각도 든다. 그래서 피곤하여도 해영이하고 같이 가곤한다. 강우가 와서 같이 가보기도 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돌아 가시고 나면 아무일도 할 수 없다. 날마다 하루도 영감님 생각을 안 할 수는 없다. 강우가 서울에 전근을 간다고 하니까 또 현우에게 짐이되고 며느리에게 미안하다. 내가 할 일을 현우에게 맡기고 보니 또 마음이 흔들흔들 한다. 어떻게 하면은 잘하는건지 모르겠다.아무래도 몸이 건강해야 되는데 잘 되지 않는다.
첫댓글 김광석 님의 "어느 60대노부부의 이야기" 가 생각나네요. 대단하신 분입니다. 동시대를 함께한 모든 부모님!!!파이팅...
어머니께서 글을 쓰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마무리가 없고, 순서도 없는 것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권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좋은부모님 부럽네요. 시간나는대로 다시 볼렵니다. 그 부모님 의 그자식 이었군요!!!
부모님같은 삶을 살아보고자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귀한글을 올려 주셨네요. 그시대의 진한 부부애,부모님상,끈끈한 형제애가 느껴집니다. 지금우리에게도 모두가 필요한 것이죠. 예로니모님의 가정에 주님 축복 가득히 내려지기를 빕니다.
부모님의 애틋한 사랑에 마음이 뭉클 해집니다.그시대에 아픔은 누가 보상해 주겠습니까 우리모두 열심히 살면서 지나온 세월에 겪으신 부모님 들의 아픔을 한번더 생각 하면서 우리자녀들에게 올바른 교육과 신앙심으로 다져나가는길이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이 듭니다 애틋한글 감사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시부모님으로 부터 그 시대에 고생스러워던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네요...부부애 참 좋으셨나 봅니다.
책갈피 끼웠다가 다시 읽어야 겠네요 ~~~ 대단하세요 ~~~
어머님께서 한글 조금만 일찍 배우셨으면 책 한권은 쓰셨을것 같네요. 참 대단하십니다. 우리 모두 부모님께 잘해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