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방송(야은 선조에 대한 인터뷰자료)
(본자료는 2022년 6월 28일에 유림방송에서 인터뷰한 자료임)
문1 : 코로나 시국에 멀리 방송국까지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해평 길씨 문중의 야은선생사상연구회 회장님으로 계신 길 병완님의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저는 야은 길재 선조의 17대 후손으로 금산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성장과정에는 집주변에 청풍서원이 있어서 늘 유림들의 모두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통해 야은선조의 행적에 대해서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흠모의 대상이었으며, 또 유림들이 하시는 제례의식들을 보고서 전통사상에 관한 것들이 자연히 학습이 되었다고 봅니다. 특히 야은 선조에 관한 것은 대학교 재학 시절 (1970년대)에 군산교육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계셨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길기열교수님을 통해서 많은 부분 알게 되었으며, 이 영향으로 이후 연구에 몰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연유로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야은 선조에 관한 내용으로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는데, 석사 논문주제는 야은의 윤리사상이였으며, 박사논문주제는 길재와 정도전의 유교 윤리관 비교 연구였습니다. 길기열교수님은 박사학위논문를 야은의 교육사상을 쓰셨으며, 저는 포괄적 접근으로 윤리, 철학적인 접근을 했다고 봅니다. 이후 서원대학교 교수 논총과 교원대 교수논총, 전국 윤리학회지에 야은에 관한 논문을 게제하였으며, 야은 선생 사상연구회에서 편찬한 야은 논총 집필시 감수를 하였습니다. 경력은 국립 한국교원대학교 종합연수원에서 전문직으로 근무하며, 전국초,중등 교장연수 담당을 하였고, 청주교대, 서원대 등에서 윤리학을 가르쳤으며, 이후 2000초에 교장으로 발령을 받아 경기도에서 근무하다 2015년에 정년으로 공직생활 36년을 마감했습니다. 퇴직 이후 현재는 경기도 안성시 시사 편찬위원과 야은선생사상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문2 : 高麗末 三隱으로 목은 이색 선생, 포은 정몽주 선생, 야은 길재 선생의 고려를 향한 충절은 6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큰 교훈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리학의 실천이야말로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져 큰 사회문제로 대두 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우리 유림방송에서 지향해야할 지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회장님께서는 시청자를 위해 야은 길재 선생의 유명한 시조 懷古歌를 읆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회고가는 야은 선조께서 고려가 멸망하고 난 후 개경을 둘러보시며 산천은 옛날 그대로 인데 그 당시 인심은 간 데가 없는 것을 한탄하시고 인생의 무상함을 읆으 신 것입니다, 그럼 낭독을 해보겠습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문3 : 海平吉氏의 유래와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우리 해평길씨는 당나라에서 팔학사의 한분으로 고구려에 오신 吉寧선조가 始祖이시고, 고려 문종 때 吉瑭선조께서 海平伯을 受封하셨으나 병란으로 이후기록이 없어 야은 선생의 曾祖父되시는 生員公 時字遇字를 始祖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국 각처에 길문 후손들이 약21,000여명 살고 있습니다.
문4 : 야은 길재 선생의 생애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不事二君의 忠節을 지키시며 사셨기 때문에 波瀾萬丈하신 일생을 사셨으리라 생각되는데, 그에 대하여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야은선조의 생애는 편의상 수학 사관기와 수절 수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수학 사관기는 출생에서부터 (고려 공민왕 2년,1353년) 37세가 되던 (고려 공양왕 2년, 1390년)해 까지이고, 수절 수도기는 38세( 공양왕 3년, 1391년)부터 운명하신 (조선 세종 원년, 1419년) 시점 까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전기인 수학 사관기는 출생해서 등과해 문하주서로 관직에 있을 때 까지이고, 후기인 수절 수도기는 폐망해가는 고려를 보고 낙향하여 수절을 지키며,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몰두하시다 운명하신 때 까지로 구분지은 것입니다.
우선 출생에서 성장하신 과정을 보면 경북 선산군 봉계리에서 부친 중정대부지 금주사 元進과 모친 토산김씨 김희적의 따님 사이에서 출생하였습니다.당시 부친은 한직 벼슬살이로 외지에서 근무를 하였으며, 생활이 궁핍하여 부모님과 같이 살지못하고 외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야은 선조께서 8세때에 마을 갯가에서 가재를 잡이놓고 지은 석별가“가재야 가재야 너도 엄마를 잃었구나! 나도 엄마를 잃었다. 내가 너를 삶아 먹을 줄안다마는 네가 엄마를 잃은 것이 나와 같아 너를 놓아 주노라”를 보면 부모님에 대한 애뜻한 정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잘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야은 선조께서는 11세가 되어서야 정식으로 학문에 입문하게 됩니다. 이후 18세에 스승 박분을 만나 논어, 맹자를 읽고 성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박분이 한양으로 전보되자 같이 올라가서 비로소 포은, 목은, 양촌 등에게 성리학에 대한 강론을 듣고서 이론을 정립하는 기초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야은 선조께서 32세 되던 해에 지 금주사로 있던 부친의 상을 당해 주자가례로 장례를 모시고, 3년 복상에 시묘살이를 했습니다. 이후 우왕 12년인 1386년에 등과하여 청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수구파의 정치노선에 항거한 나타냄이었다고 봅니다. 수구파가 몰락할 당시 야은 선조께서 35세가 되던해 성균관 학정에 제수되었고, 다음해는 형수박사, 뒤이어 성균박사로 승진을 하였습니다. 37세에 문하주서로 승진이 되어 지내다가 38세 되던 해에 위화도 회군으로 급진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노모를 봉양한다는 핑계로 사직하고 낙향을 하였습니다. 결국 관직에 몸담은 기간은 3년 정도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고향인 경북 선산으로 낙향하여 은둔을 하며 학문연구에 전념하시며 지내는데, 주변의 많은 유생들과 여러 지역민이 배움을 청해와 후학의 가르침과 교화에 힘쓰시게 되었습니다. 야은 선조께서는 은둔기간 대부분을 후진양성에 전념을 하시었으며, 1426년 67세로 세상을 뜨셔서 금오산 동쪽 낙동강 서쪽 오포에 모셔졌습니다. 이후 충절공이라는 시호와 금오서원, 성곡서원, 오산서원에 제향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문5 : 야은 선생의 총체적인 사상 즉 세계관 우주론 심성론 실천론 등을 말씀해주시지요.
답: 네가지로 집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자연적 천명관입니다. 야은 선조께서 성장기에 지은 시문을 보면 자연을 하나의 원리로 보고있습니다. 자연속에서 이치를 깨닫고, 경학에 나타난 인,의를 터득하여 치세하려는 모습들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자연과 합치될 때, 이치를 안다는 원리는 은둔사상이 이미 있었다고 봅니다.
둘째는 낙천적 운명관입니다. 불우했던 야은선조의 성장기에 주변 환경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실의에 빠지지않고, 이를 수용하면서, 개척하려는 의지들이 야은 선조의 시문인 후산가서에서 나타나있습니다. 지워진 운명은 수용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개인 스스로에 기인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유교 교풍에의 강직성입니다. 야은 선조께서는 성리학을 의리지학으로 보고, 이에 대하여 실천을 게을리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급진파의 실권 장악으로 고려가 몰락하자 의리를 내세워 관직을 버렸으며, 이후 조선조 정종 때, 이방원이 출사를 권유했지만 목숨을 내걸고 의리를 지킴이 이의 나타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넷째는 유연한 은둔관입니다. 은둔에 대하여 흔히 세상을 등지고 자신만의 생을 영위한다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가 몰락하고 조선조가 개국을 했을 당시는 도학이 지고하고 정조있는 선비들은 은둔이 불합리함에 대한 항거이며, 저항하여 세상 사람들을 깨우치려는 무언의 호소였다고 봅니다. 이를 통해서 소멸되어가는 사회의 윤리를 보존하려는 역할이 은둔이었다고 봅니다.
야은선조께서는 고려조의 폐망이 왕의 악업도 있지만 유자들이 도학의 이치대로 치정에 관여를 하지 않아서 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삼대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후학을 양성하여 이루어 보고자 하는 꿈이 유연한 은둔관을 가지게한 것 같습니다.
문6 : 야은 선생께서는 3년간의 관직생활을 빼면 대다수 후진양성에 전생애를 바치신 교육자이십니다. 야은 선생께서 후학을 가르치신 특이한 점이 있습니까?
답 : 사실 야은 선조께서 벼슬했던 관직생활보다는 많은 세월을 교육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38세에 낙향을 하셔서 67세 까지 후진양성으로 생을 마감하셨기 때문이지요. 30여년동안 교육자로서 지내시며 생활하신 것에 대해 문헌을 통해서 보면 특이한 것이 몇 가지 있지요. 우선 소학중심의 교육였으며, 반상을 가리지 않고 가르쳤고, 노소남여를 불문하여 교육한 것이인데, 교육이라기 보다는 교화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같습니다. 이유는 소학을 중심 내용으로 가르쳐, 이를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소학을 중요시하여 교육의 중심으로 삼은 이유는 다름아니라,
소학은 이학으로 철학적인 면보다는 실천적인 측면의 학이지요. 즉 일상생활의 규범, 규칙, 삶의 방법등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것 즉, 인사법, 청소법, 사람관계에서 예절 등을 다루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소학이 중심이라서 반상의 차별이 없이 누구나 수학을 할 수 있었으며, 더불어 노소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런 연유로 후일에 열녀로 칭송받은 채가, 낙가가 야은 선조의 가르침 아래서 나왔다고 구전으로 내려오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고 봅니다. 야은 선조께서는 실천중시의 교화로 사람됨을 알게했던 것으로 봅니다.
문7 : 앞선 질문의 연장선 상에서 그러면 인간중심교육, 또는 교화라고 했는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어떤 것들입니까?
답 : 야은 선조께서 가르치신 것은 특별히 이학사상보다는 교화를 통해서 실천을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육 내용은 사람이 지킬 도리로 윤리사상인데, 이를 세분하면 인간교육과 강상부식이 라고 봅니다.
우선 인간교육은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평등주의에 입각해서 이루어진 교화입니다. 설명하자면 노소남녀, 귀천을 따지지않고 인간의 기본이 되는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둘째는 전인교육을 목적으로 행했습니다. 아는 바를 실천하여 지행합일의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거둡나도록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셋째는 감화를 통해서 자율적으로 실천하도록 하는 교육이었습니다. 교육자 즉 지도자가 수범을 보여서 이를 보고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교육이었습니다.
다음은 강상부식입니다. 유교의 본질은 인의 실천이며, 이에 의하여 도를 얻고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세간적이기 때문에 형식주의적인면이 강합니다. 따라서 최상의 높은 가치를 외면하고 저속한 향락을 추구한다면 인의를 벗어나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혼란한 사회가 되지 않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차원의 교육내용이 강상부식입니다. 현대의 윤리적 측면에서 강상을 보면 다소 이해되기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내용구성이라고 봅니다. 강상은 세가지로 충忠,효孝,열烈입니다. 충은 군신의 예이며, 더 나아가 군사부일체로 보았습니다. 효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로 모든 윤리의 시작이 라고 보았습니다. 효가 없으면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열은 여자의 도리입니다. 남존여비, 가부장적 가족 구조에서 여자의 도리가 아니라, 어머니, 또는 아내로서 가정의 중심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가정의 중심 자리가 흔들리면 집안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여자의 도리를 강조한 대목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8 : 야은 선생께서 실천중심 교육, 교화를 목적으로 후학들을 이끌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의 교육방법은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지요.
답 : 야은 선조께서 후학들을 가르치셨던 조선조 시대는 보편적으로 서당이나 서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별학습 차원의 수준별, 능력별로 지도가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야은 선조께서도 이러한 방법을 택하셨다고 봅니다. 다만 지도를 하는 방법면에서는 앞서 언급된 것처럼 실천위주의 교육이었기 때문에 조금 차이가 있었다고 봅니다. 야은 선조께서 후학들을 지도하신 방법을 크게 3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수(授)-수(受)-행(行)의 방법으로 지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설명드리자면 먼저 수의 의미는 스승이 제자에게 도리를 가르쳐 물려 받게하며, 다음 수의 의미는 스승으로부터 물려 받은 도리를 제자는 일상생활에 실천하며, 다음 행의 의미는 실천하는 가운데 스승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재정립하여 다음대에 전하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순환 논리로 진화하며, 계속 이어지게 한다는 방법입니다.
둘째는 바른 것만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 존심으로 수기를 하며, 이로써 본심을 확립한다는 논리입니다. 여기서 존심은 본심을 세우는 것으로 본심에 대한 설명을 야은 선조께서는 다음과 같이 했습니다. 학(배움)을 하는 이유는 실천의 객관성을 찾기 위해서며, 이 객관성은 순수선으로 이것이 기본이 되어 마음의 중심이 되는 것을 본심이라고 했습니다. 즉 순수선인 객관성의 유지는 수기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것의 지속이 존심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을 본심이고 했습니다. 다시 설명하면 존심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이를 터득하기 위서는 스스로 많은 수련을 쌓아야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서 얻어지는 결과가 본심이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주경적 수양방법의 교육입니다. 이는 정신즉 마음을 통일하여 도의 경지인 도심을 얻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경이라는 의미는 마음을 한곳에 집중시켜 외물에 이끌리지 않는 수련 방법입니다.” 야은 선조께서 마음은 한몸의 주제이면서 동시에 변화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선과 악을 만드는 것도 스스로에 의해서 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결국 주경적 수양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덕이 바탕 되게 행하면 선하지 않는 것이 없고, 그러므로 행위가 어그러지지 않으므로 도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도는 사람의 바른 행위를 일러 말하는 것입니다.
문9 : 동학사 삼은각의 유래를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조선 건국 직후, 그러니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했던 야은 선조께서 동학사로 내려와 제단을 짓고 고려 태조인 왕건과 자신의 스승인 정몽주의 영혼을 위로하는 초혼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정몽주의 수제자로서 고려의 젊은 충신 야은 선조께서는 이것이 인연이 되어 뒤에 목은 이색의 제사도 지내게 되고 사당도 짓게 되었습니다. 야은 선조께서 세상을 떠난 후에는 세종의 명에 의해 야은 선조도 배향을 하여 포은, 목은, 야은 세 사람의 제를 지내게 됨으로써 '삼은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문10 : 길씨 문중에 전해오는 야사가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 태종은 야은 선조가 자신이 천거한 벼슬을 거절한 걸 괘씸하게 여기고 낙향한 야은 선조에게 새 왕조를 섬기지 않은 죄를 묻고 싶었으며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떠보려고 관리를 보내 그의 목을 베어 오라고 지시했습니다
“길재가 순순히 목을 내밀면 귀 한쪽만 자르고 목을 움츠리면 목을 베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야은 선조께서는 목을 길게 늘이고 “어서 내목을 베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태종은 야은 선조의 흔들리지 않는 충절에 감탄하여 한쪽귀가 없는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는 野史가 있습니다.
문11 : 조선중기 이후 야은 선생께서는 사림의 정신적 지주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였고, 다양한 방식으로 추모되고 書院이 다수 건립되었는데 간략히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 錦山郡 富利面 不二里 있는 淸風書院과 龜尾市 善山邑에 있는 金烏書院, 龜尾市 金烏山 入口에 있는 採薇亭과 冶隱歷史體驗館이 있으며 公州市에 三隱閣이 있습니다. 吳山書院과 星谷書院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하고 지금은 유허지만 남아 있습니다. 행적에 관한 기록과 시문을 수록한 冶隱先生行錄이 宣祖 이후 수차례 간행되어 세간에 널리 읽혔습니다.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충신의 대명사로 인식되며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회자되었습니다. 앞서 서술한 많은 사례들은 한국사에서 야은 선조께서 갖는 정치적·사상적 위상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고 했습니다.
조선시대 철학과 사상의 근간을 이루었던 성리학은 야은 선조로부터 비롯되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큰 스승이었지요. 야은 선조께서는 태종 이방원의 회유를 뿌리치고 고향인 금오산으로 돌아와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습니다. 야은선조로 부터 시작된 영남 사림의 학맥은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신당 정붕, 송당 박영, 송암 노수함, 여헌 장현광으로 이어졌습니다.
51세때 경상감사 구암 남재 선생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 야은 선조에게 집과
家廟를 지어주고 전답을 기증했으나 최소한의 필요한 만큼만 두고 돌려보냈습니다. 그 후 몇 차례 나라에서 전답을 하사 했으나 구미시 도량동에 있는 야은선조의 향사(享祀)인 야은사(冶隱祠)에 절의의 상징인 대나무를 심었는데, 이는 야은 선조 자신이 대나무 같다는 의미의 “冶隱竹”이 되었습니다
1418년에 태종 이방원이 야은 선조의 절의를 존중하고 권장하기 위해 차남 길사순을 등용하고자 했습니다.
야은선조께서는 아들에게 "내가 고려를 잊지 못하는 마음을 본받아 너의 조선 임금을 섬긴다면 네 아비의 마음은 더 바랄 것이 없다"며 출사를 허락했습니다.
영조 15년(1739년)에 忠節公의 시호를 제수했으며 정조는 1799년에 文節公의 시호를 내렸습니다.
문12 : 길재 선생은 고려말 충신이라서 그런지 많은 이야기가 야사에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에서 수덕사에 있는 거문고 이야기를 해주십시요
답: 고려 공민왕(1330~1374)이 신령한 오동나무를 얻자 악공을 시켜 거문고를
만들게 하였는데 신품(神品)이었 다고 합니다. 공민왕은 생전에 아끼던 거문고를 충신 야은 선조에게 하사하였습니다.
고려가 망하자 야은 선조는 고향 선산에 내려가 후학을 양성하며 달 밝은 밤
이면 거문고를 타면서 망국의 한을 달랬습니다
야은 선조께서 세상을 떠나면서 거문고는 조선왕조의 가보로 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대원군은 운현궁에 머무를 때 악사를 시켜 거문고를 타게 하며 주흥을 즐겼는
데 명성황후가 시해당할 때 명성황후의 시신 옆에 피에 흥건히 젖은 거문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후 거문고는 운현궁으로 되돌아와 의친왕이 즐기게됩니다.
(수덕사에 있는 거문고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2호로 지정됨)
최인호 저서 [길 없는 길]
문13 : 오늘의 관점에서 야은선생을 평가 하신다면, 말씀해주시지요.
답: 야은 선조께서는 훌륭한 교육자로 한생을 사시다 가신분이 라고 봅니다.
교육자로서 살아가신 삶을 보면 2가지로 언급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리학이 지향하는 의리지학을 실천하신 삶을 사셨지요. 이 부분이 사실 역사적인 야은 선조의 평가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요 . 지행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어럽지요, 왜냐면 조선조가 개국한 마당에 고려의 신하임을 자처하는 것은 권력에 대한 항거로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상황으로 봐야지요. 그런데 야은 선조께서는 죽음을 각오하는 선택으로 배운바를 실천하셨으니 훌륭하시며, 후대의 사표가 되신 것 이라고 봅니다.
둘째는 폭넓은 인간애를 가지신 분이라고 봅니다. 이는 후학들을 가르친 교육방법에서 연유됩니다. 야은 선조가 인류애를 실천하신 것은 특이한 지도의 방법과 내용 때문이라고 봅니다. 왜냐면 교육 대상자는 반상의 구별이 없었으며, 또 연령과 노소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교육내용은 일상생활의 내용을 중심으로 소학 중에서 실천위주의 교화였습니다. 교화의 전수 방법은 수-수-행으로 오늘날 피드백(환류)에 해당한더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실천이 바탕되어 존심을 확립하고 궁극적으로는 도심즉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에 의해 교육이 이루어져서 당시 천민였던 시골 아낙인 채가, 낙가 같은 열녀가 나와서 세상의 귀감으로 오늘 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14문 : 교화와 관련해서 낙가, 채가 등 여인의 행실 즉 열녀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언급해주시지요.
답 : 현재 구미 금오산에 있는 야은 선조 묘옆에 백세청풍(百世靑風)과 팔년고등(八年孤燈)이라는 비가 나란히 세워져있습니다. 이 팔년고등의 비석에 얽힌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야은 선조께서 사시는 이웃에 조을생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병졸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변방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남편이 군역을 위해 떠난 후에 부인인 낙가는 몸이 더렵혀질까 염려하여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하여 수절하기를 10여년이나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밤마다 등불을 밝혀 한결같이 남편의 건겅과 무사귀환을 빌며 나날을 보냈는데, 주변 사람들은 낙가에게 남편이 돌아 오지 않으니 개가를 하라고 권유하며, 또 많은 유혹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낙가는“ 길선생님(야은)은 충신은 불사이군이고, 열여는 불경이부”라고 가르쳤는데, 어찌 짐승처럼 이부를 하겠는가 하면서 단호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에 남편이 돌아와서 문을 열라고 하자 낙가는 이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비록 남편인 것을 믿으나 밤중에 몰래 들어오면 어찌 지금까지 수절한 뜻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문을 따주지 않아 남편은 문밖에서 지새우고 다음날 낮에서야 아내와 만났다고 합니다.
이는 교화에 의한 지역민들의 실천을 나타낸 결과의 이야기이지요. 팔년고등의 의미는 8년동안 외롭게 등불을 밝혔다는 것인데, 여자의 바른 행실에 관한 당시의 가르침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5문 : 성리학을 의리지학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단적으로 표현 한다면 강상 즉 충,효,열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학자나 관직에 있었던 사람들은 야은선생을 어떻게 투영했을 까요?
답 : 퇴계 이황 선생께서 예조판서로 계실 때, 중국에서 사신으로 온 허국이 조선이 개국하고서 지금까지 효자5명, 충신5명, 열녀5명, 심학자16명을 물었다고 합니다. 이에 퇴계선생은 야은선조를 충신과 심학자에 각각 포함시켰으며, 열녀에는 야은 선조에게 배운 천민 채가가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채가는 야은선조의 이웃에 사는 천민 아낙으로 항상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는 말을 외우면서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위로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너는 천한 여자인데, 어찌 이말을 아는가? ” 물었습니다. 이에 채가는 “ 우리 고을 길주서는 일찍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받들지 않는다” 말했다고 합니다. 야은 선조께서는 스스로 실천을 본보기로 하였기 때문에 천한 신분의 시골 아낙네까지 이를 본받아 실천 했다고 보며, 이는 폭넓은 인간애를 실천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16 : 태종 이방원과의 장기한판승으로 지금의 여의도가 길재 선생의 소유라는 재미있는 야사를 소개해 주시지요
답: 이방원과 야은 선조의 내기 장기는 삼판 양승제가 아니라 단판승부로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수를 잘 알고 있던 터였고, 승률은 늘 반반이었던 관계로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거의 두어 시간을 진검승부를하고 나온 결과는? 야은 선조께서 가까스로 이겼습니다. 내기는 내기니까 이방원은 야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고,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야은 선조께서는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실은 나도 임금이 되고 싶다오."이방원이 놀라는 모습을 보며 야은 선조께서는 껄껄 웃었다."이제 곧 궁궐을 한양으로 옮기신 다는데 한양 남쪽에 한강이 흐르고 있는데 강
한복판에 여의도라는 섬이 있으니 그 섬을 날 주시게.
“나도 거기 가서 임금노릇하며 살고 싶다오." 하고 야은 선조께서 말하니이방원은 스스럼없이 승낙을 하여 여의도를 선물로 받았다고 하는 야사가 있습
니다. 이병렬 저서 [강의실 밖 문학수업]
문17 : 우리나라 이학의 도통을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한힌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로 이어져 내려온 것을 정설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인데, 이분들이 지향하는 중심 사상을 말씀 하신다면 ?
답 : 이학을 형이상학의 궁극적인 학문으로만 보지않고 의리지학으로 보았으며, 이는 지행 즉 실천을 통해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할 때, 비로소 바른 유자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를 방증하는 것은 포은을 비롯해서 도통을 이어온 유자들의 삶을 보면 명예를 중시하지 않고, 학(배움)이 지향하는 바를 실천하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며 한생을 마쳤기 때문입니다.
문18 : 끝으로 유림이 하여야 할 과업과 나가야할 방향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 3가지를 말씀드리고자합니다.
첫째는 문묘배향에 관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인물들에 대하여 정치적, 사회적인면이 개입 되어 평가가 이루어진다면,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는 소지가 많다고 봅니다. 이를 비추어 만약 어떤 특정 정파나 이해관계에 의해서 문묘에 배향이 이루어졌다면 이는 역사를 거스른 행위이며, 조상을 욕되게 하는 부끄러운 일로 봅니다. 사실 왜곡이 될 수 있다는 이유는 조선조 성리학의 거유들이 하나같이 야은 선조의 학문과 절의에 대해 높이 평가를 하였으며, 또 철인군주라고 일컫는 정조대왕께서는 야은선조에게 내린 치제문에서 충절과 학문의 경지에 대해 높이 치하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문묘배향에 제외 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서서 조선조 거유들이라고 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분은 퇴계 이황선생입니다.그분의 언행론에서 야은선조의 충절에 대하여 높이 치하하며, 이에 대하여 당시 어린 임금인 선조에게 보낸 상소 “무진육조소“에서 야은의 충절을 기리고 장려해야 국가의 기강이 바르게 서며, 유자치국의 치정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을 나타냈습니다. 퇴계의 인물됨에 대하여는 오늘날까지도 국내,외에서 거유임에 이견이 없으며, 특히 유학의 본향인 중국에서 조차 매년 퇴계선생 시제 때에 공자 후손들이 참여해왔다고 하는 것은 이의 방증이라고 봅니다. 또한 조선조에서 이루어진 경연은 학문과 덕을 겸비한 신하가 임금에게 문치의 도와 덕행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정조대왕은 당대에 그를 가르칠만한 학자가 없어 반대로 신하들을 제자로 놓고 임금인 정조가 가르쳤다고 합니다. 당시 가르친 것을 책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홍제전서라고 하며, 184권 100책으로 그중 64권에서 134권은 유학경전으로 철학서입니다. 즉 퇴계선생이나 정조대왕 같은 분들이 야은 선조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치제한 것을 볼 때, 이는 야은 선조께서 문묘에 배향이 되어도 부끄럽지 않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쉽게 문묘배향에 제외된 것에 대하여는 누가보아도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로 보며, 재 조정이 요구되는 사안이라 봅니다.
둘째는 고려 삼은에 대한 소수 이견에 관한 것입니다.
그간 삼은에 대한 소수의 이견이 제기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인식의 문제라고 봅니다. 삼은이라는 말의 연원을 보면, 1394(조선태조3년)에 야은선조께서 동학사의 승려 운선과 함께 단을 쌓아서 고려태조와 고려임금들의 초혼제와 정몽주선생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후 1399(정종1년) 류방택이 이곳에 와서 정몽주, 이색, 길재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다음해 이정한이 공주목사로 와서 단의 이름을 삼은단이라 하고, 전각을 지어 삼은각이라 하여 오늘날 까지 이어져왔습니다. 현재 삼은각의 위치는 동학사 내에 있는 숙모전의 동쪽에 위치하며, 당초에 포은,목은,야은의 위패가 차례로 모시게 된 곳으로서 세분 선생의 호가 다같이 “은”자를 가지고 있으므로 세상사람들이 이르기를 삼은이라 한 데서 그 명칭이 유래한 것이라 합니다, 이러한 유래와 연원을 뒤로하고 삼은에 대한 이견을 제기 하는 것은 바른 역사인식이 아니라 봅니다. 삼은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절의와 학문의 경지를 나타냈다고 보며, 이에 합당했던 포은, 목은, 야은이 삼은임은 역사적인 사실로 세인들이 인정하였으며, 이를 입증하는 것은 이분들이 실천했던 절의정신과 덕행을 백성들이 배우고, 몸소 실천한 것이라 봅니다. 그러므로 삼은인 포,목,야은에 대한 이견은 바르지 않다고 봅니다.
셋째는 21세기를 사는 유림으로 탈바꿈했으면 합니다.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거울이며, 미래를 설계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비단 우리 것만이 아닌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정신적인 유산이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조의 유교 문화속에서 삶의 꽃이 피어 전승되어 이어져온 것들이 지금이며, 또 이에 바탕이 되어 앞으로의 미래를 만든다고 봅니다. 그런데 안타카운 것은 다름이아니라 오늘날 우리나라 각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유림과 관련된 행사에 대한 것입니다. 행사장에는 젊은 세대의 참석은 실종이 되었으며, 두건과 도포를 입고 계신 분들과 평상복을 입고 참석하신분들 대다수는 연로하신 분들입니다. 또한 확성기를 통해서 흘러 나오는 소리는 행사장이 중국 본토라는 착각을 하게 하는게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기존의 유림에게 책임이 다분히 있다고 봅니다. 이유는 지금 젊은 세대들은 한자에 대하여 공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으며, 지금도 제도권 교육인 학교에서 역시 한자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하에서 행사제반에 관한 것을 한자로 전달을 하니 참석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제례식을 보면 다양한 세대들이 참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무슨 차이일까 하고 분석해 볼 때, 종묘제례의식은 홀기즉 행사 진행순서와 안내를 두사람이 동시에 하고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한자어로 말을 하면, 뒤 이어서 쉬운 우리 말로 풀어서 전달을 합니다. 즉 통역이 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이에 반해서 오늘날 전국각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규모가 작은 시제일지라도 홀기를 포함한 행사 전반에 대해 한자어로만 읽으니, 한자를 배우지 못한 세대들은 참석할 명분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석을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여지며, 그렇기 때문에 참석자 대다수가 연노하신 분들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세대간의 단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자가 중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자를 아는 세대들의 단편적인 문화이지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모든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문화를 이입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될 때 세대간의 격차를 없애고 다양한 세대가 공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유림을 구성하고 있는 인적자원도 이제는 젊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미래가 있으며, 경쟁력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존 유림의 자세를 탈바꿈해야 한다고 봅니다. 의식의 전환입니다, 세대를 초월해서 자신 것만을 고집 할게 아니라 현세대와 융합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젊은 세대들이 이를 이해하고 과거를 소중히 여기며, 더불어 참여의 폭이 넓어지며, 세대교체가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이는 결국 21세기를 지향하는 유림으로 거듭나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발표자 : 야은 17대손 길 병 완 상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