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하나투어, 울산태화 1999년 5.13-5.24)
이번에는 동유럽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어느 나라라고 안 가보고 싶은 나라는 없지만 동유럽에 대한
환상은 항상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루어지게 되어 기뻤다.
이번의 같이한 여행 팀은 마산여고 출신 8명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팀인데, 그들은 최소 출발 인원에
2명이 모자라, 그들 속에 서울의 한 노부부와 부산의 치과의사부부 그리고 내가 포함되어 13명이다.
같이 간 TC까지 포함하면 14명으로 지금까지 여행한 것 중에 인간관계로 가장 힘든 팀이었으며,
나쁜 이미지는 가능한 쓰지 않으려고 했으나 몇 가지는 밝혀 두려고 한다.
이 팀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부유하였고, 또 해외 여행을 많이 한 것과 나이 많은 할머니라는 점으로
부산의사와 TC가 젊고 나는 중간에 해당하였으며, 남자는 TC(*조)까지 포함하여 4명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늙고 잘나가는 할머니가 많은 팀이라 여행기간 중에 시끄럽고 말이 많았으며, 이 잘난
부류의 사람들 때문에 여행을 마칠 때까지 참으로 힘들었다.
잘 난 사람들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 같다고 할까?
잘사는 한국여인 그것도 나이 많은 사람들의 생태를 잘 경험한 여행이었으며, 여행에서 느낀 것 중에
여행자들의 생각이 조금 잘못된 것이 총무에 대한 배려이다.
여행을 가면 여행사에서 파견하는 TC가 항상 동행하며 여행자들을 돕는데 이들은 여행사 직원임으로
그에 해당하는 급여를 받으나 여행자들이 주는 팀을 고려하여 급여가 적거나 없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여행이 끝나고 팀을 주는 것은 이해가 되는 부분이나 우리가 뽑은 총무는 수고를 하여도 팀을
주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도 자비로 여행을 온 사람이다.
자신도 여행하기에 피곤한 사람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호텔의 웨이터가 짐을 덜어주면 감사하다고 팀을
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같은 일행이 짐을 들어주고 차 밑 짐칸에 무거운 것을 넣어 주어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서글픈 일이다.
여행을 마치고 일행을 설득하여 수고한 총무에게도 선물을 한 적도 두 번 있었다.
(1)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1999년 5월 13일 김포 출발 베를린 도착
오후 2시에 김포를 출발하여 현지시간 오후 6시 10분 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여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데 내가 변소를 다녀오는 사이에 일행이 사라지고 없었다.
앞이 캄캄했으며, 헤어진 곳에서 걱정을 하고 있는데 TC가 뒤늦게 알고, 찾아와 짜증을 내었으나
나의 잘 못이 많아 아무소리 못했으나 이 번 여행은 시작부터 끝 날 때까지 즐겁지 못했다.
<베를린의 신도시 쿠담거리>
1999년 5월 14일 베를린 관광 후 프라하 이동
아침 일찍이 주위에 산책을 나가 작은 도랑을 따라 조깅을 하였는데 안개 낀 숲 속에 새들뿐이고
인가는 보이지 않았으며, 룸메이트인 TC가 나보고 총무를 맡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전에 짚시에게 돈을 쓰리 당한 경험과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했으나 자신이 돈을 관리하겠으니
맡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여 TC 때문에 맡기로 하였다.
아침 호텔 대기실에서 전부가 모여 총무 문제와 여러 가지 의논 중에 소파가 모자라 2분이 서서
있게 되었는데 가장 늦게 나온 것은 서울 노부부였다.
이 노부부의 부인이 부산서 온 젊은 치과 의사에게 젊은 사람이 앉아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언성을 높혔는데 듣는 우리도 몹시 거북하였고, 의사도 난처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 노파의 말은 너무 심하였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거들었는데 안 일어난 것은 잘 못이지만
그러하다고 아이들 나무라듯 되겠느냐고 말하여 조용하여 졌다.
이 노부부는 얼마나 힘든 상대인지 폴란드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며, 그 부부는 여행 중에
'왕따'라는 별명과 함께 일행에게 많은 비웃음을 당하였다.
우리가 투숙한 호텔은 베를린의 '쿠담'이라는 신도시에서 조금 외진 곳으로 베를린은 알래스카
최남단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하는 지역이다.
학생시절에 베를린이 봉쇄되었을 때에 일어난 일들이 생각났으며, 베를린에 대하여 5장 독일
편에 기록되었으므로 중복을 피하기로 한다.
(브란덴부르크, 베를린 장벽)
먼저 브란덴부르크로 향했으며, 우리와 같은 분단의 아픔이 있는 곳으로 그들은 통일되어 한창
새 도시를 만드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우리도 언제 독일처럼 될 것인지 부러웠다.
옛 베를린 장벽이 있었던 자리가 페인트로 표시하여 놓았고, 이사 중인 독일 의사당을 건물을
보았는데 지붕의 유리 돔이 특이하였고, 브란덴부르크와 의사당 사이에는 동독의 유물들을
팔고 있었으며 '장벽 딱따구리'들이 떼어온 장벽의 조각도 팔고 있었다.
200m 정도만 남은 장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을 구경하였고, 유그노(후버노텐)들이 만들었다는
교회와 엥겔스가 다녔다는 베를린 대학을 들어갔다가 갑자기 비가 내려 그치기를 기다렸다.
빌헬름 1세 기념교회는 차안에서 보고 쿠담으로 다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오후 3시쯤 체코의
출발하여 그렇게도 부풀었던 베를린의 관광은 허망함을 간직한채로 마치게 되었다.
베를린 도시에서 가장 부러운 점은 도시 안에 있는 거대한 공원과 공원 안의 숲이다.
<베를린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드레스덴과 프라하 이동)
프라하로 가는 길에는 유명한 도시 드레스덴이 있었는데 이곳은 제 2차 대전 때 융단폭격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도시로 이 폭격으로 성 마리아 성당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성당은 서구에서 바로크 양식으로 가장 뛰어났으며, 성당을 복원 할 때 현장에서 산산조각난
파편을 모조리 주워모아 퍼즐 맞추듯 재구성하였다고 한다.
이헣게 조각까지 주워 맞추어 원형보존하는 문화재 정신을 '드레스덴 정신'으로 호칭한다고 하며,
묵은 것이면 가차없이 부숴없애버리는 우리는 '드레스덴 정신' 앞엔 너무 무력하다.
또 이곳은 영화 '엘베강의 다리'가 있으며, 연합군과 러시아군이 만난 장소이기도 하며, 음악가
쇼팽이 '포토츠카'라는 매혹적인 부인을 만나게 되어 연인관계로 발전한 곳이다.
쇼팽이2번째로 방문으로 3번째 연인이며, 알토가수인 '마리아 보진스키'라는 여성은 얻은 곳으로
역사적 도시에 잠시 내려 둘러보고 싶었으나 무심하게도 그냥 통과 했다.
지나는 길가에도 유적들이 보였고, 이 도시를 카메라에 담고 싶어 기회를 노렸으나 실패하였으며,
헝가리와 독일 국경에서 잠시 내렸고, 이곳에서 태어난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자 알았다.
독일 사람과 체크에 사는 사람의 차이는 에르츠 산맥을 넘어 체코 지역에 이르면 이 험한 산중에
집들은 보이지 않지만 아름답고 젊은 아가씨가 보이기 시작한다.
마을이 가까워지자 더 많아지고 작은 마을을 지나 갈 때에는 길가의 집들은 온통 젊은 아가씨로
가득 차 있었으며, 차림새도 창녀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인적도 없는 산 속에 아가씨들은 누구를 기다리는 것인지 궁금하였는데 이 궁금증은 프라하에서
풀리었는데 그들은 독일 남성을 상대로 하는 창녀들이라고 한다.
독일 남성들이 시간도 안 걸리고 통행도 불편 없으며, 화폐가치가 낮은 체코를 찾기 때문이라고
하며, 선택하지도 않았지만 잘 못 태어나면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한다.
동구권의 여성은 우리 눈에는 너무나도 잘 생겼는데 헝가리와 폴란드에서도 그렇게 느꼈는데
프라하에 너무 늦게 도착하여 저녁을 먹는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호텔에 들어오니 여기에도 잘 생긴 여성들이 룸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아 그들이
삶이 고달프다는 것을 엿보게 하였다.
<드레스덴으로 가는 길에 핀 독일의 농촌과 유채꽃>
1999년 5월 15일 프라하 관광
체코라는 나라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보헤미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루테니아 지방이 합쳐져 단일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로
탄생하였다가 1993년 1월 1일 양측 당수는 74년 동안 이어져온 연방을 분리 해체하기로 합의하여
그해 5월 20일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각각 독립국으로서 새로 출발하여 체코라는 나라가 되었다.
프라하에 유학 온 남학생이 현지가이드로 나왔다.
(프라하성, 왕궁, 로레타 교회)
프라하 성은 ‘100m 미인’이라고 했다든가? 멀리서 볼 때 대단히 아름웠으나 가까이 갈수록 강도는
약해졌지만 아름다운 블타바 강 서안의 호라챤 언덕 위에 있는 프라하의 심벌이다.
거리는 옛 날 만들어진 좁은 도로에 높은 지역이라 비탈도 많았고, 전차와 차가 함께 다니고 있어
전차 길 위에서 전차와 차가 만나면 어떻하나 걱정도 되었으나 서로 잘도 피하며 다녔다.
포도밭 사이로 프라하 시내를 바라보면 붉은 지붕의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며, 귀족거리를 따라
성 안에 들어서면 동유럽 성 가운데 최대 규모를 지닌 성벽이 있다.
성 안에는 시대나 양식이 다른 다양한 건축물이 있으며, 이 중 왕궁은 16세기말까지 보헤미아
왕가의 거주지였던 곳으로 1618년 보헤미아를 통합했던 보헤미아 대법관정이 있다.
이곳에서 2명의 관리가 창 밖으로 내던져 30년 전쟁이 시작됐다는 역사의 장소이며, 또 이 왕궁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여 마리아 테레사를 비롯해 합스부르크가 사람들의 초상화가 있다.
10세기부터 짓기 시작하여 1929년에 완성되었다는 성 비타 성당은 프라하 최대의 고딕 양식
건물로 124m의 대 첨탑이 놀랍고, 프라하의 역사가 담겨진 건축물이라고 한다.
오른쪽 중앙의 성 바츨라프 예배당과 왼쪽 바로 앞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명하며, 1626년 이탈리아
산타 카사 수도원을 모델로 세워졌다는 로레타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세례의식에 사용되었던 6,222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성체대가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보지는 못했으며, 이 교회 입구에 있는 탑 중앙에 27개의 종을 가진 '로레타의 종’만 보았다.
황금 소로라는 좁은 길을 따라 내려오면 중세에 연금술사들이 주거하였다는 오래된 '난쟁이 마을'이
나오고 중간쯤에는 '프라하 성'을 쓴 작가 카프카의 작은 파란색의 집이 있다.
카프카는 장신이지만 '내게는 딱 알맞은 집이다.'라고 하였으며, 지금은 카프카의 집과 주위 집들은
선물가게 인데 이들 집 입구에는 바이올린 같은 가문의 문장이 달려 있는 것이 특이하였다.
귀족 주택이 있는 곳에 모차르트 박물관이 있으며, 그는 짧은 생애 중에서 4번 프라하를 방문하였고,
이곳에서 3대 오페라 중 하나인 '돈 조반니'를 에스타테 극장에서 공연했다고 한다.
지금 이곳을 '베르트람카'라 부르는 모차르트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는데 내부에는 그가
연주한 피아노와 악기, 명곡의 악보,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나 내부는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 점심은 이곳에서 유명한 흑맥주를 마시며, 추억에 남을 만한 식사를 했는데 유럽에서 식사를 할
때에 연주자들이 찾아오는 것을 가끔 보았고, 오늘도 그들이 왔다.
그들은 아코디언을 가진 노인과 스자폰을 맨 젊은이가 우리도 아는 '케세라 세라(Que Sers Sers)'를
연주했으며, 1절 가사는 알고 있는데 다가 경쾌한 노래이어서 몇 명이 같이 합창을 했다.
신이 난 악사들은 가지 않고 계속해서 연주하여 즐거운 시간이 됐으며, 입구가 넒은 스자폰 속에 많은
팀을 넣어주었는데 오늘은 점심만은 내 생애에 가장 즐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케세라 세라는 히치콕의 영화 ‘너무 많이 아는 사나이(The man who knew too much)’에서 도리스
데이(Doris Day)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불러주던 노래로 케세라세라는 스페인어이다.
흔히들 ‘될 대로 되라’라는 부정적인 뜻으로 많이 알고 있지만 본래 뜻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가질 수
있다(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긍정적인 의미이다.
(바츨라프 광장)
식사를 마치고 군대에서 있을 때에 일어난 프라하 사건의 현장으로 갔으며, 신문의 사진을 보고 궁금했던
바츨라프 광장은 1968년 당 제1서기가 된 알렉산데르 두프체크가 개혁을 단행하였다.
체코는 '프라하의 봄'을 맞았으나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략을 하였고, 이에 대항한 곳이 이 광장인데
광장이라기보다는 가늘고 긴 대로로 소련 탱크가 진주하기에는 좁아 보였다.
중앙엔 정원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벤치가 놓여 있으며, 대로 양쪽엔 호텔과 레스토랑, 은행, 백화점 등이
늘어서 있고, 광장 끝의 국립박물관 앞에 있는 체코 건국의 아버지 성 바츨라프의 동상이 있다.
광장 한 쪽 '공산당 묘지' 거리에는 '프라하의 봄’과 스탈린의 영령을 추모하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바츨라프 광장의 야경>
(요한 후스동상, 틴 교회, 천문시계)
다음은 구 시가지인 공화국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이곳에는 이 나라에서는 가장 보고 싶었던
요한 후스(안 후스, Huss, 1369-1415)의 동상이 있는 곳이다.
그는 보헤미아 프라그(첵코의 프라하) 대학의 학장이며, 요한 위클립의 제자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고
스승의 주장을 두려움 없이 전하는 선교사이었지만 화형 당하였으나 그를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17년간 독일황제와 교황에게 전쟁을 하다가 거의 전멸하였고, 종교개혁 때 그들이 모였다는
'틴 교회' 앞 그의 동상에는 '진실만을 말하고 진실만을 사랑하고 진실만을 지켜라'쓰여 있다.
광장에는 구 시청사가 있는데 이곳에는 정말로 특이한 '천문시계'가 있는데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시계 바늘이 여러 개 있으며, 바탕도 여러 층으로 되어있었고, 크기는 건물 3층 높이 이다.
3층 벽 일부를 다 차지하며, 천문학자 '하스주'교수가 1410년 아름답게 만들었는데 희소성의 가치로
똑 같은 시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하스주 교수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한다.
이 교수가 이 시계를 만지자 그의 원한을 아는지 그때부터 시계는 멈추었으나 아무도 수리를 하지
못하다가 400년이 지난 1860년에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이 시계는 12사도가 돌아가며 나온다.
또 시간은 죽음을 재촉한다는 상징으로 해골 뼈만 있는 조각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기 위해
시계가 동작하는 정각엔 많은 인파로 광장이 가득찬다.
광장에 있는 관광마차의 말들은 놀라지 마라고 눈은 아래만 보도록 가리워 놓았으며, 가까운 곳에서
쇼핑을 했는데 몇 년 전에는 물가가 대단히 쌌다고 했고, 유리제품이 싸고 품질이 좋다고 했다. .
<공화국 광장의 천문시계>
(카렐교, 유대인 묘지, 야경)
카렐교는 1357년에 만들어진 동유럽에서 최고로 오랜 다리로 체코의 성인과 성서를 주제로 한 30개의
동상이 서 있는 가장아름답다는 다리로 볼타바(몰다우) 강 위에 세워졌다.
이곳에서 본 숲과 작은 섬들이 있는 볼타바 강은 내가 본 여러 강 중에 가장 아름다운 강이었으며, 외국
여행을 많이 한 일행들도 같은 말을 하였는데 다리 위에는 풍물들이 많아 볼 것이 많았다.
유리컵에 물을 담아 연주하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으며, 음악의 '메트로놈' 모형을 탑으로 만들어 놓은
유대인 지역을 가보았는데 인상적인 것은 유럽 최대의 유태인 묘지이다.
15-17세기에 만들어진 공동묘지로서 용지 부족으로 묘지 위에 다시 흙을 쌓아 몇 층의 묘지로 되어 있고,
이것도 시신을 세워 용지를 최대한 줄이여서 묘지 중앙은 토지가 불룩하게 솟았다.
이곳에 많이 살던 유태인도 2차 대전 때 많이 희생되어 지금은 사는 사람이 많이 줄었고, 어제 늦게 도착한
것이 여행사에 알려져 빈에 있는 여행사에서 가이드를 이곳까지 보냈다.
프라하 야경을 못 보면 후회한다는 배낭여행자들의 여행기에서 보았기에 저녁 식사 TC, 빈 가이드, 치과
의사와 함께 4명이 프라하의 야경을 보러고 차 문을 닫다가 빈 가이드 손가락이 차 문에 끼었다.
그는 두 손가락을 다치었는데 다행히도 큰 부상이 아니라 야경은 최소 되지 않았는데 정말로 못 보았으면
후회 할 뻔하였고, 프라하 성과 바츨라프 광장을 돌아보았다.
가이드를 다치게 한 치과의사는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가 그의 제의로 술 한잔하기로 하고 술집을 찾았고,
동양인이 우리밖에 없었는데 잘 생긴 TC는 무대 위로 초청받아 함께 춘 춤은 많은 갈채를 받았다.
이 나라 결혼식에는 신부가 신랑에게 함부로 하지 마라는 의미로 족쇄를 채우는 습관이 있으며, 프라하는
로댕이 '북쪽의 로마'라는 찬사를 할만큼 아름다운 도시로 오늘은 빈 가이드와 3명이 잠을 자게 되었다.
1999년 5월 16일 짤쯔감머구트, 짤쯔부르크 관광
오늘은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장소들과 작곡가 아마데우스 볼프강 모차르트와 관련이 있는
할슈타트(Hallstatt)라는 호수가에 그림 같은 작은 마을을 관광하게 된다.
(짤쯔감머구트)
가이드는 짤쯔부르크(잘츠부르크-Salzburg)로 가기 전 시간도 남아 조금 비용을 내면 짤쯔감머구트를
볼 수 있다고 제안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는데 이곳은 '소금을 담고 있는 창고'의 뜻을 가졌다.
짤쯔감머구트(잘츠카머구트)는 옵션 비용이 하나도 아깝지 않는 아름다운 곳으로 빈에서 짤쯔부르크
사이에 있는 해발 500-800m의 구릉지로 2,000m가 넘는 산들과 76개 호수가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이곳 경관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를 통하여 잘 알려진 곳으로 영화는 실제 모델인 폰 트랩 대령은
47년에 죽었고, 마리아는 87년에 사망한 아름다운 추억은 영화이다.
40년을 홀로 산 마리아의 인생은 아름다움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는데
이곳 날씨는 비가 많이 내려 맑은 날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한다.
우리는 운 좋게도 맑은 날에 여행하게 되었고,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외가가 있는 장크트길갱
(St. Gilgen)의 외가집 앞에는 앉아 사진을 찍도록 의자가 있있고, 집 벽에는 화분이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는 달력에서 흔히 보는 산에는 눈이 있고 들에는 꽃이 피고, 수영복을 입은 아가씨가 있는
그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우리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없기에 참으로 신기한 풍경이다.
이런 것은 조금 높은 곳과 낮은 곳의 땅 속의 온도차가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며, 조금 높은 곳에는
땅 속의 온도가 낮아 눈이 녹지 않고, 낮은 곳에는 땅속의 온도가 높으리라는 추측을 해 보았다.
하여튼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한 쪽에서는 배를 타고 유람하고, 한 쪽에서는 스키를 타는 모습은
정말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현실이었는데 가이드는 이 호수가 '볼프강'라고 했다.
이 지명이 맞는 것인지 모르지만 호수에서 바라보는 산에는 눈이 있고 낮은 곳에는 노란 민들레가 피어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 같아 그 아름다움을 잊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배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내려 St. 볼프강 성당으로 가는 좁은 길목엔 음식점이 많았고, 집들은 꽃으로
단장되어 아름다웠으며, 다시 배를 타고 가다가 내렸다.
가이드는 조금 가면 이 나라에서는 나지 않는 고등어 구이를 파는 집은 아주 맛있고, 부부가 자상하며,
열심히 사는 모습이 좋다면서 거기서 점심을 먹자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고등어 구이 집은 집이 아니고 길가에 있는 포장마차와 비슷한 곳으로 대충 만들어 놓은 식탁에서 먹을
것을 가져가 고등어를 휴지로 싸서 아무데나 앉아서 먹었는데 장소가 추운데다가 지저분했다.
특히 변소가 간이로 아주 불편하여 가이드에게 속은 느낌을 받았고, 이것을 알았는지 가이드는 좋은
곳을 구경시켜 주고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점심을 먹은 장소는 꽃이 핀 넓은 초원에서 소가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에다 산에는 눈이
있고, 아래는 큰 호수가 있는 가장아름다운 곳임에는 틀림없었다.
가장 아름다운 곳에 소풍 와서 가장 맛없는 식사를 한 것도 좋은 추억이라고 생각하였다.
<장크트길갱의 볼프강 호수>
(고자우 호수, 폰 트랩 대령의 집)
이곳을 떠나 '고자우(Gosausee)' 호수로 이동하는 길은 험하였으나 아름답기가 끝이 없어 보였고, .
고자우 호수에 이르게 되자 감탄으로 입을 닫을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 LG그룹에서 만든 달력에서 본 그 호수였는데 달력에서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눈으로 확인하여 감격스러웠다.
가이드가 점심 때 우리의 불만에 미안하다며 커피를 대접하였으며, 눈 옆에 핀 민들레를 보는 감정은
신기하기만 하였는데 이 장면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했으나 위치가 멀어 꽃은 나오지 않았다.
짤쯔부르크로 가는 도중에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폰 트랩 대령의 집으로 사용되었던 레오폴츠크론
저택에 들렸으며, 영화에서처럼 넓은 호수가 있었으나 미국인의 사유지라 들어갈 수 없었다.
18세기 레오폴트 대주교의 집으로 건축된 저택을 밖에서 보기에도 상당히 웅장하였고, 검약하게
수도원에서 살아왔던 마리아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문화충격을 짐작할 수 있을 같았다.
폰 트랩 대령의 집을 떠나 리즐이 랄프와의 사랑에 마냥 들떠서 '이제 곧 열 일곱이 된다네' 노래를
부른 유리 정자는 있는 헬브룬 궁전으로 갔는데 12각형의 투명한 유리 정자이다.
영화 속에서 대령이 마리아에게 청혼한 장소로 영화 촬영 후 제작진이 헌납한 유리 정자는 91년
이곳에 복원했으며, 대령이 도망가던 산에 핀 에델바이스 꽃을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짤쯔부르크 성, 미라벨 정원)
멀리서 보이는 호헨짤쯔부르크 성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는데 영화제목은 잊어 지만 숀
코너리가 주연했고, 독일 군이 호헨짤쯔부르크 성안에 비밀무기를 제작한다.
이것을 숀 코너리가 성에 잠입하여 파괴하는 줄거리를 가진 영화인데 숀 코너리가 스릴 있게
성벽을 타고 오르든 그 모습의 성벽을 지금 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여행의 또다는 맛이라고 할까? 짤쯔부르크에 도착하여 먼저 케이블카를 타고 성안에
올라갔고, 이곳에서 도시전체를 볼 수가 있으며, 내려와 대성당으로 갔다.
돔 광장에 있는 대성당은 유럽 최대 파이프(6,000개)오르간이 있으며, 다음은 미라벨 정원으로
향했는데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게단을 내려 오면서 '도레미 송'의 노래는 부른 곳이다.
'도레미 송'은 처음은 산위에서 시작하지만 강가에 자전거를 타면서 또 마차를 타고 부르기도 하며,
여러 개의 배경화면이 나온데 그 중 마지막 나오는 곳이 미라벨 정원이다.
노래하던 계단도 몇 개가 안 되었지만 정원도 규모가 작은 것에 실망을 했으나 이곳에서 보는
호헨짤쯔부르크 성이 석양에 너무 아름다웠다.
미라벨 정원에 있는 미리벨 궁전은 17세기초에 디트리히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를 위하여
세웠으며, 이곳에서 대주교를 위하여 모차르트가 연주한 곳이라고 한다.
이곳을 떠나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고, 저녁메뉴는 닭 요리였는데 마산 팀은 닭 요리를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 TC와 가이드는 햄버거를 사러 다녀야 했다.
가이드가 유명한 카지노에 있는데 놀러 가자고 했으나 흥미 없는 일이라 포기하였다.
[짤쯔부르크(Salzburg)]
인구는 약 14만 4천(1994)이며, 서부 독일 국경 근처에 흐르는 짤쯔(잘차흐) 강 양안(兩岸)에 발달한
공업도시로 로마시대에 도시가 생겼고, 8세기 주교청이 설치되어 가톨릭 주교가 통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됐으나 아직도 교회와 궁전 등 바로크 건축의 작품이 많이 보존되어
있어 '북쪽의 로마'라고 부르며, 지명은 ‘소금(Salz)과 성읍 뜻인(burg)'의 합성어이다.
예로부터 소금 산지로서 유명하며, 지금도 소금이 전국에 공급된다고 하며, 이곳은 W.A.모차르트
(Mozart, Wolfgang Amadeus)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그를 기념하여 1920년부터 대성당에서 ‘잘츠부르크 음악제'가 해마다 여름철에 개최되며, 악기, 석재,
인쇄출판, 시멘트, 양조 등의 공업이 활발하고, 라듐 온천지로서 유명한 관광휴양지
스키와 스케이트도 성행하여 사시사철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미라벨정원과 뒤에 작게 보이는 호헨짤쯔부르크 성>
1999년 5월 17일 모차르트 생가, 쇤브룬궁전, 중앙묘지 관광
아침에호텔 주위를 돌아보면서 연못 안의 개구리가 울어 자세히 들어보았는데 이곳의 개구리도 울음
소리와 모습이 같았는데 오늘의 일정은 빈(비엔나)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늙은 마산 여자 팀이 꼭 모차르트의 생가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우리도 딸이 음악을 하는지라
가고 싶었지만 다음 일정에 차질을 주는 것이 싫었으나 그들 일행이 많아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모차르트 생가)
모차르트 생가의 개장이 늦어 개장까지 문 닫힌 게트라이데 거리를 방황했는데 가이드 이야기로는 올
때마다 진열되는 물품도 많아지고 층수도 많이 점유해 간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모차르트가 쓰던 물품이 아니고, 가짜라고 하였는데 개장이 되어 들어가 보니 볼거리가
없었고, 속으로는 화도 나지만 사진도 찍지 마라는 표시가 있다.
비엔나에 도착하여 한식 식당에서 오래간만에 맛있게 먹었으며, 외국에서 한식을 먹을 때마다 원기가
회복되고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쇤브룬 궁전)
쇤부른 궁전은 빈 외각에 있으며, 파리의 베르사유궁전을 모방하여 1696~1750년 건축했다고 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전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기거한 곳이다.
쇤브룬 이름은 마티아스가 1619년 사냥을 하다가 '아름다운 샘'을 발견한데서 유래한다고 하며,
총 1441개 방중에 45개의 방을 공개하고 있는데 6세 때 모차르트가 연주를 했다.
무대로 가던 그가 넘어지자 한 소녀가 일으켜 주었는데 그녀는 작은 요정으로 불리던 한 살 많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이었다.
모차르트는 '고마워. 어른이 되면 너와 결혼 할거야' 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는 '거울 방'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만찬 실인 '중국식 방'이 볼만하지만 볼려면 요금을 더 내야 한다.
일행보다 앞서 가던 나는 중국식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곳 관리인이 표를 보자고 하는 것 같아
뒤의 가이드가 표를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우리 일행을 가르켰다.
그 덕분에 우리 일행 중에 유일하게 중국식 방을 보게 되었는데 이 방은 비단과 자기, 조개껍질로
장식하여 우리에겐 익숙했으며, 그밖에 '백만금의 방'과 '대 무도회장'이 볼 만하다.
쇤브룬 궁전에서 기억 할만한 것은 약2km 달하는 장대한 정원으로 크기도 크지만 기하학적으로 깎은
나무 터널과 많은 아름다운 분수와 조각은 잘 어우러진 멋진 정원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은 유럽에서 본 것 중에는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 정원을 본 후로는 눈
높이가 너무 높아져 모든 정원이 이곳과 비교되는 바람에 다른 정원의 시시하게 보였다.
이것이 쇤브룬 궁전의 정원 때문에 생긴 손해인데 정원 끝에는 1747년 프러시아와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하여 세운 합스부르크의 상징인 거대한 독수리가 있는 건축물 글로리에테가 있다.
<쇤브룬 궁전의 장대한 정원>
거대한 오스트리아제국은 1차 대전의 패배로 각 나라가 독립함으로 국토는 1/7로 줄어 지금과 같은
작은 나라가 되었다가 2차 대전 때 독일에 합병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2차 대전 후 영세 중립국이었으나 이를 포기하고, 유럽연합에 가입하였으며, 1690-1918년까지
궁전에서 사용한 마차가 전시된 마차박물관이 있고, 동물원과 열대식물원은 구경하지 못했다.
유명한 음악가와 저명한 인사들이 잠들어 있는 중앙묘지는 대공원처럼 조각과 함께 아름답게 잘
가꾸어진 묘지라는 기분이 들지 않았으나 한국에서 배낭여행 온 용감한 여학생을 만났다.
그는 악성 베토벤 묘지 앞에서 혼자 무엇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이 학생도 한국을 떠날 때에는 혼자가
아니었으나 여행을 하다가 의견이 맞지 않아 혼자가 되었다고 한다.
베토벤 묘지 앞에는 항상 꽃이 놓여 있는데 이 꽃은 일본 여성이 가져다 놓는다고 했으며,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는 베토벤이 독일인이라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슈트라우스 묘지가 있고 모차르트는 묘지는 없고, 기념비만 있으며, 베토벤과
인연이 많은 빈 숲으로 가는 길에 그린칭을 들리게 되었다.
그린칭은 황제 요제프 2세가 농가에서도 포도주를 만들어 판매하도록 허가하여 지금과 같은 선술집이
생기게 되었다고 하며, 술값도 싸고 간단한 식사도 가능하다고 한다.
1800경 베토벤이 귀가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 찾아와 이곳에서 생활이 시작되고 완전히 청각을 잃은 후
합창교향곡을 완성했다는 하일겐슈타트가 이곳에 있다.
1817년 2개월 살았다는 베토벤하우스도 이곳에 있다고 했으나 가보지는 못하였는데 술을 좋아하는
베토벤은 그린칭에 외상이 많았으며, 술 때문에 한 집에 오래 살지 못하고, 쫓겨났다고 한다.
그는 술이 취하면 빈 숲에 들어가 낮잠도 자고, 숲을 걸었다는 산책로가 있으며, 이 숲 속에 영감을 얻어
땅에다 오선지를 긋고 작곡한 것이 유명한 제 6번 교향곡인 '전원'이라고 하며, 그곳에 흉상이 있다.
오스만투르크에 쫓겨 빈 숲까지 밀린 오스트리아를 구한 프린츠 오이겐(Eugene)장군의 유적지가 있고,
이곳에서 빈 시내와 도나우 강이 잘 보이며, 이곳을 내려 올 때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캄캄하였다.
1999년 5월 18일 빈 관광 후 헝가리 부다페스트 행
오늘 첫 관광은 시립공원인데 이곳에는 베토벤 상과 요한 스트라우스 상 그리고 슈베르트 상이 있으며,
빈은 요한 스트라우스를 가장 사랑하는 음악가이어서 그의 동상은 금빛으로 가장 화려하다.
(벨베데레 궁전)
시립공원을 떠나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빈을 구하였고, 한번도 전쟁에 패한 적이 없어 나폴레옹이
유일하게 연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극찬한 사람인 프린츠 오이겐 공이다.
그의 여름 별궁 벨베데레 궁전으로 갔는데 궁전은 상하로 나누어져 있고, 그 사이에는 아름다운 분수와
정원으로 되어 있으며, 두 궁전은 현재는 미술전시(갤러리) 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별난 마산 팀은 빈 커피 '멜랑쉐'를 꼭 먹어야 한다며, 가자고 하여 도착했으나 기사가 체크 사람이라
어디에 주차하고, 기다려야 하는지 모른다고 하여 결국 포기하고 돌아섰다.
(슈테반성당, 왕궁, 오페라 하우스, 카를성당)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는 콜 마르크트로 향했는데 이곳에는 페스트(흑사병)로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조각이 있으며, 이런 페스트 조각상은 유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이젠 12세기 건축됐다는 거대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슈테반(스데반) 성당으로 갔으며, 이 성당에서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을 거행는데 그는 1791년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2년 먼저 죽었다.
지하에는 묘지로 역대의 황제들의 심장과 장기가 전시하고 있다고 했으나 보지 못했고, 첨탑 높이는
136m 이며, 지붕은 황금색과 청색의 모자이크가 유명하고,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되어 있다.
광장엔 여러 가지 풍물을 즐길 수가 있고, 여기서 멀지 않는 곳에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게르만제국을 건설하자고, 연설한 호프부르크 왕궁이 있다.
이 왕궁은 16-18세기 건축된 구 왕국과 19-20세기 건축된 신 왕궁이 있으며, 구 왕궁에는 우리가 잘
아는 빈소년합창단의 성가로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왕궁예배당이 있다.
이곳에는 왕궁의 보물창고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스페인 승마학교가 있는데 스페인은 1516-1700년
사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으며, 조금 더 가면 오페라 하우스가 있다.
이곳은 2차 대전 때 파괴된 것을 국민투표로 78%의 지지를 받아 재건축했는데 국회의사당보다 먼저
재건축한 것은 음악 애호가들이 국회 일은 도나우 강가에 모여 앉자 의논 할 수 있다.
하지만 음악은 하우스 없이는 들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는 일화가 있으며, 이젠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아버지 카를 6세가 만들었다는 카를 성당으로 향하였다.
성당은 페스트가 세상에서 살아지기를 기원하여 만들었는데 중앙 돔은 성 베드로 성당을 모방하였고,
기념비는 로마 트라야누스 기념비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좌우의 원주에는 페스트 없애기 위한 헌신한 사람들의 행적이 조각되어있고, 뒤뜰 광장에서 군복 입은
사람들의 세례식을 볼 수 있었으며, 마지막 관광인 쇼핑을 마치고,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현관 2층 베란다에서 히틀러가 연설하였던 호프부르크 왕궁과 광장>
|
첫댓글 좋은데 다녀오셨네요 새록새록 기억납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