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동(四洞)
-사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 사동, 사이동, 해양동이 속해있다-
조선시대에는 광주군(廣州郡) 성곶면(聲串面) 삼리(三里)와 사리(四里)였다가, 칙령 제98호에 따라 1906년 9월 24일 안산군(安山郡)에 편입되었다. 1912년 2월 5일 사리와 삼리를 통합해 사리로 변경하였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거 1914년 3월 1일 사리가 속한 성곶면이 수원군(水原郡)으로 이관되었고, 곧이어 4월 1일 성곶면이 북방면ㆍ월곡면과 함께 반월면(半月面)으로 통합ㆍ개칭되어 수원군 반월면 사리가 되었다. 그 후 1949년 8월 14일 대통령령 제161호에 따라 화성군(華城郡) 반월면 사리가 되었다.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安山市) 사동(四洞)이 되었다.
사동은 신도시개발 전에는 화성군 양감면 면장보다 사리 이장을 한다고 할 만큼 화성군 관내에서는 이(里) 면적이 제일 컸다고 한다. 사동은 조선시대에는 남양과 안산 지방에서 ‘주다리[珠橋里]’라 칭했고, 사동의 집성 성씨인 양주최씨를 ‘주다리 최씨’라고 불렀다. 사동은 구라와 승지골[承旨谷] 외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주택단지·아파트단지·학교(대학교)부지로 조성되었다.
∙달봉재
‘달보는 산’이라는 뜻이며 예전의 삼리(三里) 지역으로 현재 석호초등학교, 석호중학교 뒷산의 이름이다. 산정상에 봉화터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하고 연안봉수(沿岸烽燧)나 수루(戍樓)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현재 출토되는 기와조각, 그릇조각 등으로 보아 마을의 제당(祭堂)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자문)
∙봉재산(鳳在山)
봉황이 산다고 하여 봉재산이라고 하였는데, 현 상록구청 자리이다. 조선 고종 때 효자정문을 받은 김세철(金世哲) : 1816(순조 16)~1878(고종 15) 과 그의 어머니로 열녀정문을 받은 김창근(金昌根)의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 : 1795(정조 19)~1872(고종 9)의 묘가 있었다가 1995년 11월 고잔뜰 토취장이 되어 없어졌다.
∙상산(象山)
산모양이 코끼리와 닮았다고 하여 상산(象山)이라고 한다. 현 초당초등학교 뒷산이다.
∙ 부엉재산, 휴암산(鵂巖山)
산모양이 부엉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부엉재산이라고 한다. 산 정상부근에 부엉이바위가 있다. 현 상록수 월드아파트 뒷산이다.
∙ 괴머루
귀신머리가 괴머루로 변음되었다.
∙ 엄나무 샘
괴머루 산기슭에 있는 샘으로 일명 옻우물이라고도 했으며 엄나무 옆에 있다.
∙ 벼락바위
괴머루산 도로변에 있는 가파른 바위절벽이다
∙ 아낙골
골짜기가 아늑하여 아늑골인데 아낙골로 변음되었다.
∙벼리골
골짜기가 별모양이라고 하여 별골인데 벼리골로 불린다. 현 한양대학교 기숙사 뒤편이다.
∙ 엉골ㆍ어은골[漁隱谷]
고기가 숨어 있는 골짜기라고 하여 어은골[漁隱谷]인데 줄여서 엉골이라고 부른다. 한양대학교 내 고슬봉에 있는 골짜기이다.
∙ 뱀이골[蛇谷]
뱀이 많다고 해서 뱀이골로 불린다.
∙ 사자골
범바위가 있는 골짜기이다.
∙가래재
감자골 서남쪽에 있던 마을로 가래나무가 많았던 곳이라는 설이 있으나 가래나무는 안산 지역에 자생하지 않으므로 ‘추(楸)’자를 같이 쓰는 개오동나무, 호두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본다. 한편 마을의 가장자리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갈래길이 있는 재라는 설도 있다.
본오동 출신 양주영(염전업) 씨가 일제강점기 말엽에 처음 세거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폐동 때(1979년)는 3집이 있었으나 신도시개발로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고슬봉[高樓峯, 高理峯]
현재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와 한국해양연구원의 뒷산으로, 고루봉(高樓峯) 또는 고리봉(高理峯)으로 쓰기도 한다. 산정상에 향나무가 있었으나 서해안으로 침투하는 간첩들의 목표물이 되었다고 해서 자유당시절 방첩대에 의해 베어졌다. 음력 10월 중순에 고슬봉 산신제를 지낼 때 조라술을 담아 바위 아래 묻어두었다가 썼는데 그 바위는 아직 남아 있다.
∙감자골[柿竹谷]
감나무와 대나무가 많아 감대골[柿竹谷]이라고 불렀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감자골로 변음되었다. 이곳의 세거 성씨인 양주최씨 구족보에 보면 조상들의 묘를 시죽동(柿竹洞)에 썼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현재 감골[柿谷]이라고 불리는 것은 잘못된 전해진 것이다. 양주최씨 집성촌이었던 곳으로 1979년 폐동 때 22호가 있었으나 현재는 고층아파트단지로 조성되었다. 최혼 선생을 비롯한 양주최씨 묘역은 안산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구라. 사리포구(救羅 四里浦口)
광복 이전만 해도 칡덩굴과 잡목 등이 우거진 곳이었으나 방조제 축조 후 인부들의 사택을 위한 민가가 신축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그 후 사회부(현 보건복지부)에 의해 난민 정착을 위한 50세대의 민가를 지으면서 호수가 늘기 시작하였고, 신도시개발로 횟집이 들어서자 더욱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의 포구는 1950년 9·28수복 후 대림산업에 의해 방조제 축조가 시작되어 성포동 성머리포구가 이곳으로 옮겨지고 성머리 어민 일부가 이곳에서 어업활동을 계속하자 점차 어업의 전진기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구라는 수문(水門)을 경계로 동쪽지역은 사동 234번지, 서쪽지역은 사동 242번지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구리가 많이 매장되어 있어 ‘구라’라 했다는 설과, 이곳 바위에서 굴이 많이 나므로 “남양원님 굴 마시듯 한다.”는 속담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 신라 말 풍수지리학자인 ‘도선’이 이곳을 지나다가 지금의 성포동 예술인아파트 부근 산에서 사리 쪽을 보고 “천 명의 거지가 모여 살 자리구나.” 하여 ‘구라(救羅)’라 했다는 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사리포구로 유명했던 이 곳은 1993년부터 2009년까지 안산신도시건설 2단계 1~6차지역(일명 고잔뜰 개발사업) 준공으로 인해 현재 호수공원과 도로로 변모하였다.
∙긴곶[長華]
항가울과 감자골 사이 곶(바다로 뾰죽하게 내민 땅)이 길게 생긴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긴곶[長華]’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최혼의 3남 최홍주의 후손들이 세거한 마을로, 폐동 때(1988년)에는 27호가 있었다. 신도시계획에 따라 현재는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폐동 전만 해도 마을에서는 삼밭 뒷산(고슬봉)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6일에 산신제를 지냈다.
∙느진구지[晩花串]
샘골 서쪽으로, 현 고가도로 남쪽에 위치해 있던 마을이다. 이곳은 바다가 뾰죽나온 곶[串]으로, 지대가 높을 뿐 아니라 골[谷]이 좁아 배가 늦게 들어오므로 ‘느진구지[晩花串]’라 불렀는데, 일제 때는 양주최씨의 묘막이 있었다. 폐동 때(1979년) 13호가 있었으나 신도시개발로 택지로 조성되었다. 조선시대 무관 으로 내금위장(內禁衛將) 지낸 최선태(崔先泰) 장군의 묘역이 있다,
∙뒷골[後谷]
조선 연산군 때 낙향한 최혼(崔渾)의 셋째아들 최홍주(崔弘澍)의 후손(양주최씨)들이 분가하면서 세거한 마을이다. 그 후 임(任)씨, 수성최씨, 김해김씨, 안동김씨, 밀양박씨, 수원백씨, 평산신씨, 신안주씨 등 12성씨가 살았다. 사동에서 제일 높은 지대에 속했던 이 마을은 삼리 뒤에 위치해 있는 취락이라 하여 ‘뒷골[後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폐동 때(1979년) 20여 호 남짓한 마을이었는데 신도시개발로 택지로 조성되었다. 폐동 전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16일에 삼밭 뒷산 고슬봉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분대(粉垈)
흙이 부드럽고 고와서 분대(粉垈)라고 불렸다고 한다. 최혼의 3남인 최홍주(崔弘澍)와 4남인 최홍개(崔弘漑)가 이곳으로 분가하여 마을을 이루었는데, 특히 승지공파인 최홍개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삼밭과 항가울 사이에 있던 분대는 폐동 때(1979년) 19호가 있었으나 신도시개발에 따라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마을에서는 삼밭 뒤에 있는 고슬봉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6일에 산신제를 지냈다.
∙분대고개[粉垈峴]
분대와 항가울 사이에 있는 고개로 현재 항가울산과 고슬봉이 연결되는 구름다리가 놓여져있다.
∙마전사골[麻田寺谷]
절골이라고도 하며, 옛날 마전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무관으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를 역임했던 최극태(崔克泰) 장군의 묘가 있었으나 신도시개발로 1989년 화성시 봉담면으로 이장하였다.
∙삼리(三里)
뒷골 북쪽에 있던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광주(廣州)에 속했던 이 마을은 1906년 광주군 성곶면 삼리에서 안산군 성곶면 삼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안산군 동리(洞里)명칭 변경 때 사리에 통합되었다. 밀양박씨가 배판한 이래 양주최씨ㆍ김해김씨 등이 세거했다. 마을 북쪽지역은 아랫말, 남쪽지역은 웃말, 동쪽지역은 한우물이라 불렀다. 폐동 때(1979)의 마을 호수는 22호였다. 현재는 택지로 조성되어 1988년부터 민가가 들어섰고, 현재는 석호초등학교, 석호중학교 등이 들어섰다. 상록구청 앞을 지나는 도로도 석호로로 명명되었는데, 원래의 석호는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가 들어선 곳의 지명이다.
∙삼밭[麻田], 삼밭질
삼밭이 많아 삼밭[麻田]이라 불리게 되었다. 분대와 석호 사이에 위치해 있던 이곳은 분대에 정착한 최혼의 4남인 최홍개(崔弘漑 : 증좌승지)의 후손들이 분가하여 마을을 이루면서 세거하였다. 신도시개발로 1979년 폐동된 후 15호 남짓하던 원주민들 대부분이 석호(일명 대학동)로 이주하였다. 현재는 한양대학교 기숙사가 들어서 있다.
폐동 전만 해도 마을에서는 뒷산인 고슬봉 정상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6일에 산신제를 지냈다.
∙석바탱이[석호(石湖), 대학동]
뒷골 서쪽으로, 현재 한양대학교가 들어선 곳이다. 이 마을은 한양대 초입에서 구라 사이에 있는 산에 흰 차돌(쉰돌박이라 칭함)이 많이 박혀 있는데다가,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다고 하여 차돌에서 석(石)자를 취하고, 바다에서 호(湖)자를 취해 ‘석호(石湖)’라 불렀다고 한다.
석호마을은 양주최씨, 김해김씨 등의 세거지로 폐동 때(1979년) 27호가 있었다. 석호초등학교도 이곳에 있었으나 신도시개발로 삼리로 이전하였다. 현재는 한양대학교 에리카 캠버스가 들어섰다
∙승지골[承旨谷]
삼밭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중기 증좌승지(贈左承旨)인 최홍개(崔弘漑)의 묘가 있던 곳이라 하여 ‘승지골[承旨谷]’이라 하였다. 이 마을에 최초로 산 사람은 수원시 율전동 출신인 염석주(廉錫柱)로 알려졌는데, 그는 일제 중엽에 이곳에서 염소를 비롯하여 닭·거위·돼지·소 등을 기르며 살았다고 한다.
∙초당(草堂)
감자골과 긴곶 사이에 있던 마을이다. 최혼의 3남 최홍주가 휴암산(부엉재산) 중턱에 초당(草堂)을 지어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한 이후 마을 이름도 초당이 되었다. 현재 초당초등학교가 들어섰다.
∙항가울[杭湖]
이곳에 처음으로 취락이 형성되었을 때에는 바닷가에 위치해 있어 이웃 마을과 왕래를 하려면 배를 이용했다고 하여 ‘항가울(杭湖)' 또는 '항갈’이라 불렀다고 한다. 최혼의 3남 최홍주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서북쪽지역을 웃말, 남쪽지역을 아랫말이라 칭했으며, 폐동 때(1979년)에는 24호가 살았으나 신도시개발로 해안도로가 조성되었다. 폐동 전만 해도 마을에서는 삼밭 뒤에 있는 고슬봉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6일 산신제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