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부천이라는 명칭은 '주부토', '장제', '수주', '안남', '계양', '길주', '부평'에 이어 8번째로 쓰인 우리 지방의 행정 명칭으로, 1994년 탄생 80주년이 되었다. 우리는 쉽게 부천은 1973년 부천시 탄생과 역사를 같이하여 30년이 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사실이 그렇지 않음은 여러 지면을 통해 알 수 있다. 비록 행정명으로서 부천의 탄생이 우리 뜻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8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흔히들 한일합방이라고 부르나 적절한 역사적 용어가 아니므로 경술국치라 함)를 당한지 4년후인 1914년 일제에 의해 인위적으로 전국에 걸쳐 부, 군, 면(府, 郡,面) 통폐합이 단행되면서 부천이란 행정명이 탄생했다.
일제는 그들의 효율적인 식민지정책 수행을 목적으로 동족마을화 되어 있던 우리나라 사람의 유대관계와 연계관계를 분산·약화시키기 위해 이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기준을 군에 대해서는 '면적 약 40 방리(160km. 그전에는 최대 503방리에 서 최소 3방리) 호수 약 1천호 (그전에는 최대 2만 8천호에서 최소 1전 8백호)를 한도로 해서 여기에 미달한 곳은 인접 군에 병합하는 한편, 면에 대해서는 '면적 약 4방 리, 호수 약 800호'를 최저 기준으로 하여 여기에 미달한 곳은 이를 병합 정리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전까지 독자적으로 발전해 오던 부평(富平, 조선시대는 부평도호부로 불리다가 대한 제국시기에는 부평군으로 불림, 현재 계수동과 옥길동을 제외한 부천시 지역은 부평의 1/3에 해당됨)과 인천부 관할이던 제물포를 제외한 인천, 경기도 남양군의 영흥면·대부면과 강화도의 시도·모도·신도·장봉도 등 광활한 지역을 하나의 군으로 묶어 한 울타리에 넣으면서 명칭도 전지역이 포함된 부평에서 '부(富)'를 따고, 그 다음으로 인천에서 '천(川)'을 따서 '부천군(富川郡)'이라 하였다. 1924년 발행된 <48호>에는 이를 '좋은 부천군'이라 하여 부천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하여 부천군의 행정조직은 이전의 31개 면 160동리에서15개면 84개동리로 축소 조정되어 여러 해동안 지속해 왔으며, 출발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이를 토대로 현재의 행정조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부천은 단군할아버지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을까? 부천은 단군할아버지가 나라를 다스리던 고조선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는 시대 구분상 청동기 시대라 부른다.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0세기부터 시작하여 기원전 4세기에 끝을 맺고 철기시대로 넘어간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부천 청동기 시대의 출발은 유물의 편년확인결과 기원전 7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기의 청동기문화는 송화강과 요하 유역으로부터 한반도에 걸쳐서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비파형 동검과 다뉴저문 거울 및 무늬없는 토기의 출토를 특징으로 하는 청동기의 유적은 주로 강을 따라 벌어진 평야를 앞에 둔 언덕진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즉 이들은 구릉지대에서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천에서 발견된 오정구 고강동의 유적과 중동 장말 돌팡구지가 있는 곳도 얕으막한 산인 구릉지대이다. 이러한 입지조건은 청동기인의 식생활이 농경에 힘쓰고 있었음을 나타내며, 청동으로 만든 농구는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청동제의 도끼나 칼같은 공구는 그들이 나무로 각종 농구를 만들었음을 알려준다. 이 시기에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은 반달돌칼이나 흠돌자귀를 사용한 것으로 알수 있다. 이 반달돌칼은 벼를 추수할 때에 손에 쥐고 이삭을 자르는데 사용했던 것이며, 흠돌자귀는 땅을 가는 쟁기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농구이다. 이 시기에는 벼 외에도 조·수수·보리가 재배되었으며, 청동기로는 무기를 만들었고, 생활은 장방형 모양의 움집에서 주로 살았다.
이 시대의 무덤으로는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지배적이다. 고강동에서 출토된 유물은 집단 주거지인 움집을 비롯하여 간 돌창, 반달돌칼, 돌도끼, 숫돌로 사용된 지석, 돌 끝, 석검 파편 등이다. 특히 집단 주거지는 경기도 서부지역(기서지방)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이는 우리 부천이 기서지방의 중심지였음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고강동 이외에도 중동 장말에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남방식 고인돌 1기가 전하고 있기 때문에 부천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이 청동기 시대부터 임을 알 수 있다. 또 청동기 시대는 우리 지방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은 부천시 계수동과 인접하고 있는 - 실은 계수동과 한동네로 계속 발전해 왔던- 시흥시 계수동에 2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어 전하고 있음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인들이 현재 우리의 선조가 아님은 청동기인들의 생활이 정착생활이 아닌 이동생활을 한데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천에 청동기 시대인들이 집단적으로 주거지를 형성하고 살았음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청동기시대가 지나고 철기시대에 들어서면서 구체적으로 부족연맹체틀 기반으로 한 소국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삼한의 78개 소국이다. 삼한 중에서 우리 지방은 마한에 속해 발전해 왔다. 마한에는 54개 국이 있었다. 그 중에서 부천은 어디에 속했을지가 관심사이다.
30여년 전인 1959년 사학계의 태두이던 이병도 박사가 부천을 '우휴 모탁국 지역이다'라고 하여 관심을 모은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학설은 1979년 천관우 선생이 이 박사가 적용한 근거에 의해 '우휴모탁국은 부천이 아니고 춘천이다'라고 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하나의 소국이 두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사실 여부에 의심이 가기 마련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런 점 때문에 삼한 78개의 소국 중 위치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몇몇을 제외하고 소국들의 위치를 정하는 소모전은 지양하고 있다. 부천이 우휴모탁국은 아닐지라도 부천이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요건으로 보아 마한 54개국 중의 1국에 속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삼한을 지나 삼국이 정립하는 삼국시대에 접어들어 처음 백제땅이었던 우리 지방은 427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의해 고구려의 주부토군(主夫吐郡)이 되었다. 주부토군이 역사서에 나오는 우리 지방 최초의 행정명칭이다. 이 때 계수동은 백제시대 미추홀에 속했다가 매소홀현으로 바뀌었다. 고구려가 신라에 패망함에 따라 신라 영토에 속하여 경덕왕 때인 757년 장제군(長堤郡)이 되었으며, 계수등은 소성현(인천)에 속했다. 고려시대에 우리 지방의 행정명칭은 가장 많은 변화를 겪었다. 계수동도 함께 처음 관내도에 속한 수주(시인 변영로는 여기에서 착안해 자기의 호를 수주라 하였다)가 되었다가 양광도에 속한 지주사로 승격하였고, 계수동은 숙종 때 경원군에 속했다가 인종 때 인주로 고치고 지주사를 두었다. 계수동을 제외한 지역은 1150년 안남도호부가 되었다가 계양도호부로 고치고, 1308년 길주목으로 승격하였다가 2년 후 좋지 않은 일로 인해 부평부로 강등되었다. 이 때 최초로 부평이란 명칭을 쓰게 되었다. 고려 말 때 경기우도에 속한 부평이 되었고, 계수동은 경원부에 속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부평도호부로 원상복귀 하였고, 계수동은 인주에 속했다가 인천군 및 인천도호부 황등천면에 속하게 되었다.
부평도호부 때 우리 부천지역(계수동과 옥길동은 인천군의 황등천면 일부였다가 부천군 때는 소래면에 속함)은 부천군이 탄생되기 전까지는 부평군의 15개면 중 석천면, 옥산면, 상오정면, 하오정면, 주화곶면 등 5개면으로 발전해 오다가 부천군이 탄생되면서 계남면(석천면, 옥산면과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된 오류, 개봉, 고척, 궁, 항, 천왕, 온수동 등 7개 마을이 속한 수탄면이 합쳐짐)과 오정면(상오정면, 하오정면, 주화곶면이 합쳐짐) 등 2개면으로 축소되었다.
이후 계남면은 1931년 4월 1일 소사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41년 10월 1일 소사면이 소사읍이 되었다가 인구의 수도권 집중으로 사회적 변화가 급격하였던 1973년 65,080명으로 증가하자 소사읍 일원만을 가지고 부천시로 승격되었다. 이때까지 행정명칭에 변동이 없던 오정면은 김포군에 잠시 편입되었다가 2년만인 1575년 10월 부천시에 복귀하였고, 계수동, 옥길동이 속했던 소래면은 시흥군에 속하였다가 1983년 계수동과 옥길동 일부만이 본래대로 부천에 되돌아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9년 인구 50만명 이상이면 실시되는 구제가 도입됨에 따라 시청사를 중심으로는 중구가 되고, 대체로 경인철도를 경계로 하여 이남은 남구가 되었다. 1993년 중동신시가지 개발에 따른 인구증가로 인해 중구를 원미구 (심곡1동, 심곡2 동, 심곡3동, 원미1동, 원미3동, 소사동, 역곡1동, 역곡2동, 춘의동, 도당동, 약대 동, 중동, 중1동, 중2동, 중3동, 중4동, 상동, 상1동)와 오정구(성곡동, 원종1동, 원종2동, 고강본동, 고강1동, 오정동, 신흥동)로 나누고 역곡1·2동과 중동·상동을 제외한 남구는 소사구(심곡본1동, 심곡본동, 소사본1동, 소사본2동, 소사본3동 범박동, 괴안동, 역곡3동, 송내1동, 송내2동)로 명칭이 바뀌었다. 1996년 10월 31일 현재 부천에는 53.45㎢ 면적에 793,312명 (253,453가구. 남자 401,943명 여자 391,369명)이 35개 행정동(법정 동은 24개)에 분산되어 살고 있다.
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전의 소지명을 우선 드러내고 괄호 안에 옛 지번과 명칭에 대한 간략한 유래 설명을 한 뒤 새로이 바뀐 번지와 오늘의 위치를 밝혔다. (1) 새우지논 (심곡동 2, 300번 일대의 논을 이르던 말로, 이 곳에 새우지방(새우 난초(?), 잡초의 일종)이 많이 돋아났다는데서 이명칭이 유래함) <現> 중동 1140번지, LG백화점 부근에 해당됨. (2) 모래논 (심곡동 55번지 일대의 논을 이르던 말) <現> 중동 1120-2 부근
(3) 배락논 (상동 74-2번지의 논을 이르던 말) <現> 상동 391번지, 부천정보산업고 부근 (4) 동네방죽(상동 71번지 혹은 74번지 일대의 논을 이르던 말로, 이곳에 큰 웅덩이가 있었다고 함) <現> 상동 391번지, 부천정보산업고 앞 삼거리 부근 (5) 물문개논(상동 157-1번지의 논을 이르는 말로, 큰 배수문 아래 위치함)<現> 상동 393번지, 동성 아파트 1530동 부근
(6) 쇠밭이 논(상동 154번지의 논을 이르던 맡로, 전에 이곳은 소를 매어놓고 하던 갈대밭이었는데 일제때 수리조합 설치후 논으로 만듦 <現> 상동 393번지 동성아파트 1523동 부근 (7) 밭뜬논 (상동 174번지의 논은 이르던 말)<現> 상동 394번지, 한국 아파트 1543동 부근 (8) 새벽구덩이는(상동 163-1의 논을 이르던 말로, 이곳에서 벽을 바르는 데 쓰는고운 모래가 많이 났다고 함 (現) 상동 394-1, 동원아파트 1534 부근
(9) 세귀밭논(상동 192-2의 논을 이르던 말로 생김이 세모형이었기 때문에 이같은 명칭이 붙게됨) <現> 상동 415번지, 그린타운 1609동 부근 (10) 벽제논(상동 263, 266-1, 2번지의 논을 이르던 말) (現) 상동 415·417번지, 그린타운 일대
(11) 성머리(상동 216-1 일대의 논을 이르던 말로, 이곳은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았음) <現> 상동 416번지, 공원 일대 (12) 장승백이 논 (상동 223-5의 논을 이르던 말로, 도당굿을 할 때 이곳에 장승을 세 웠다는 데서 유래된 명칭. 예전에 도당굿을 할 때 마을 두 곳에 장승을 세웠다고 함) <現> 상동 418번지, 상도초등학교 부근
(13) 봉추논(상동 252, 253번지 일대의 논을 일컫던 말) <現> 상동 418번지 상도초등학교 앞 도로에 해당됨. (14) 들마당(상동 252-4의 밭이름으로, 이 곳에서 농장의 공동 타작을 하였다고 함) <現> 상동 420번지 앞도로에 해당됨.
(15) 한배미(중동 830번지의 논을 이르던 말로, 이 논은 여느 곳보다 논배미가 컸음) <現> 중동 1183번지, 한신아파트 1317동·1316동·1315동 일대 (16) 덕배미(상동 210-1 일대의 논을 이르던 말로 '덕배미'란 땅이 기름진 논이란 뜻. 예로부터 농민들의 입을 통해서 "소래산 명기(明氣)를 타야 덕배미골에 가 농사 를 지어본다"는 말이 전해졌다고 함.) <現> 상도 416번지, 그린공원 중앙에 해당됨.
(17) 개건너논(송내 160번지 일대의 논을 이르던 말) <現> 상동 393번지, 동성아파트 1533동 부근. (18) 방아다리논(송내동 8번지 일대의 논을 이르던 말로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방아로 놓았다는데서 이같은 명칭이 유래됨) <現> 상동 395번지, 반달마을 삼익아파트 1831동 부근 (19) 수렁배미논(송내동 101번지 논을 이르던 말로, 이곳은 소가 들어가 논을 갈지 못할 정도의 깊은 수렁이었다 함) <現> 상동 439-7 부근 (20) 밭뜬논(송내동 53-8의 논을 이르던 말로, 전에 밭이었던 곳을 수리조합 설치 후 논으로 만들었음) <現> 상동 411-3 부근 (21) 연자방앗간(송내동 84번지의 대지 이름으로, 예전에 연자방아가 이곳에 있었다고 함) <現> 상동 464-2. 송내역 광장 유원빌딩 앞에 해당. (22) 뱀논골(송내동 211-22번지의 논을 이르는 말로, 이곳의 논배미가 뱀처럼 길게 생겼다는데서 그 명칭이 유래함) <現> 상동 381-44와 상동 398번지 부인 중학교로 일부 들어감.
(23) 소나무박이 논(송내동 148-9번지의 논을 이르던 말로, 전에 이곳 논 가운데 소나무가 서 있었다는 데서 이같은 명칭이 붙게 됨) <現> 상동 399번지, 산라아파트 1833동 부근. (24) 밤곶이논(송내동 157-4번지 일대의 논을 이르는 말) <現> 상동 397번지, 반달마을 건영아파트 1808동 부근. (25) 잉어논(중동 433-7 일대의 논을 이르는 말로, 이곳에 한강수로를 타고 올라온 잉어가 많았다는 데서 이같은 명칭이 붙게 됨) <現> 중동 1170번지 포도마을 829동 앞.
(26) 수수군논(중동 431-1 일대의 논을 이르던 말로 '수수'라 는 말이 붙게 된 것은 살림형편이 몹시 어려웠던 예전에 이 논을 수수쌀 몇 뒷박을 받고 넘겨주었다는데서 연유했다고함) <現> 중동 1170번지, 포도마을 상아유치원 부근 (27) 장승백이논(중동 417-2 논을 이르던 말로 가을걷이를 끝낸 뒤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도당굿을 할 때 이곳에 장승을 박았다는 데서 그 명칭이 유래함) <現> 중동 1172-1, 신도초등학교 앞 도로 부근
(28) 군논(중동 359-5번지 일대의 논으로 이곳은 자리가 매우 깊었다고 함) <現> 중동 1170-1, 영남·삼보아파트 809동 앞 도로 (29) 재논(중동 258-3의 논을 이르던 말) <現> 중동 258-3 (예전과 같음) (30) 쇠밭이논(중동 150, 160번지 일대의 논으로, 예전에 이곳은 소를 매어놓곤 하던 갈대밭이었는데 일제 때 논으로 만들었다고 함) <現> 중동 1024번지, 체육공원 앞 로터리 부근 (31) 거멀논(중동 89번지 일대의 논을 이르던 말로, 이 논에 거머리가 유독 많았다)
(32) 된벌(중동 78, 79번지 일대의 논을 이르던 말) <現> 중동 1073번지, 대우·동부 아파트 단지 일대 (33) 장구논(중동 440번지의 논을 이르던 말로, 논의 형태가 마치 장구처럼 생겼다는데서 그 명칭이 유래됨) <現> 중동 1167-1 일대 (34) 방죽안(중동 525-1의 논을 이르던 말로, 개울방죽 안쪽에 위치한데서 그 명칭이 비롯됨 <現> 중동 1151-4 일대 (35) 큰도리논(중동 450-3의 논을 이르던 말) <現> 중동 1158번지 일대
(36) 갈막부리(일명 갈망아리, 중동 656-3의 논을 이르던 말) <現> 중동 1174번지, 종합병원 일대 (37) 김묵벌(심곡동 22, 40번지 일대의 논을 이르던 말로, 특히 이곳에서 뿌리를 삶아 먹는 풀의 일종인 김묵이 많이 돋아났다는데서 이같은 명칭이 붙게 됨) <現> 중동 1090,1099번지 일원
앞에서 예전에 논밭이었던 곳이 오늘날 어떻게 바뀌었는가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본 조사를 진행하면서 느낀 바가 매우 많다. 앞으로 대단위 공사를 할 때는 신·구지번에 대한 정확한 대조표는 물론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덧붙여 본 조사에서 나타난 내용 중 중요사항은 아래와 같이 푯돌을 새겨 그 지점에 기념으로 남기기를 제안한다. ※'덕배미' 지리-이곳은 예전에 '덕배미'라 불리던 논자리입니다. 농민들은 '소래산 명기 (明氣)를 타야 덕배미골에 가농사를 지본다'고 말할 정도로 매우 비옥한 땅이었다고 합니다. (집필, 부천전문대교수 민충환)
雜志(文學同人志)로 본 富川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행된 잡지는 서재필이 만든 獨立會報로 1896년 創刊되어 雜志의 歷史는 시작되었다. 부천에서의 첫번째 잡지는 1939.1.15 현 부천시 역곡동, 당시 부천군 소사읍 벌응절리에 있던 京畿道 農事 試驗場내의 桂南會에서 발간한 '京畿農報'로 발행한 곳은 桂南會이고 편집은 泉有平으로 日語版 月刊으로 발행되었다가 몇 호까지 나왔는지는 확인할 수 없고 문헌으로만 전하는 희귀본이다. *출저:[韓國雜誌目錄]196.10.20. 이화여대도서관학과. 目錄에는 京畿農報의 소장처로 연세대학교 도서관, 국립 중앙도서관가 있다.
전매청 소사 연초 시험장에서는 '業程報告'라는 보고서를 프린트하여 연간 약 120면 내외로 전쟁중인 1952년 1호를 시작으로 1956년 6호부터는 '시험보고'로 제호를 변경하였고 1958년 7호까지의 발간을 확인할 수 있다. 1호에는 연초시험장 沿革과 地勢, 面積 등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고 7호에는 소사煙草 試驗場인 유해억의 서문이 실려있는 부천에서는 몇 안되는 귀중한 간행물이다. 부천을 행정구역상 체계적으로 다룬 1924년 6월호[開闢]잡지에는 "이름이 좋은 富川郡"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약 4면에 걸쳐 소개되어 있다. 이 소개된 글을 보면 부천군의 面積과 곡식의 생산량 日本人의 경영하는 農園,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田畓 그리고 農民會 등을 소개하고 있다.
文學 同人誌 및 기타 간행물
[富川文學]:부천 예총지가 발간된 6년 후 1983년 6월 10일 부천에 거주하고 있는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탄생한 기념비적인 文學 同人誌이다. 창간호에는 발행인 최은휴, 서양화가 이상덕의 그림으로 표지를 장식하였고 "그리운 금강간"의 시인 한상억의 초대시가 실려있어 눈길을 끈다. 창간 동인으로는 최은휴, 부천 초기음악의 선구자였던 고 이동순, 동양화가 염조원, 현 시흥시 문협 지부장 김연식, 소명여고 교사인 유영자, 구자룡 및 김광묵, 김철기, 정득복, 윤영미, 정희숙, 조선호, 정종숙, 김선옥, 김명배, 김재숙, 전순용, 이정홍, 윤은숙, 하상길, 박춘강, 임미령, 김경주, 배광옥 등 24명이 참여하였다.
현재 26집이 나왔지만 15집 이후 바로 17집으로 넘어온 것이 편집인의 실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흥미있는 자료가 아닌가 싶어진다. [부천문단]:소명여중 교사 구자룡씨가 주축이 되어 7명의 교사들이 복사골 문학회를 조직하고 문학회 동인지로 1990년 5월 15일 창간되었다. 초대 복사골 문학회장 문제술이 발행인으로, 구자룡을 편집주간으로 창간호를 낸 이래 현재 9집까지 발행되어 150여명의 동호인이 참여하는 발전을 보였다. 아울러 "복사골 문학상"을 제정하여 6회에 걸쳐 시상하는 등 문학 인구의 저변 확대와 부천의 문학정신의 고취에 공헌하고 있다. [富川 女流文學]:부천 문인협회와 복사골 문학회에서 활동하는 여류 시인들로 초대회장 김가배 외 열세 명의 동인으로 1994년 4월 12일 창간호를 발행하여 부천에서도 문학 동인지가 3종류가 발행되는 경사를 맞이했다. 현재 3집까지 간행되었다. [글마을 사람들]:부천 노동자 문학회 회보로서 1992년 10월 창간, 회원들의 글로서 만들어진 회지이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1992년 3월 15일 민주부천 자치연구회에서 박종훈의 발행으로 잡지다운 잡지를 창간했으나 2호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商議소식]:부천에 소개하고 있는 상공인들의 소식지로서 1978년 5월 당시 부천 상공 회의소 회장인 홍병희 발행으로 創刊된 月刊誌로서 현재까지 우리 부천에서 간행되는 최장수 잡지이며 아울러 年刊으로 1977년부터 "부천상공연감"이 발행되고 있다. [富川藝總]:부천에서 처음으로 문화 예술인들이 발표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 이 잡지는 1977년 7일 1일 부천 예총 지구회에서 年刊으로 발행하고 있는 현재까지 발행되는 예총 기관지이다.
[복사골 문화]:부천문화원에서 1985년 11월 20일 창간한 문화원 교양지이며 1987년 12월 2호를 간행하고 休刊하다가 1989년 8월 5일 40면 내외 월간으로 재창간하여 42호까지 간행하고 43호부터는 격월간으로 발간하여 현재 지령 64호를 자랑하고 있다. 내용은 주로 부천에서 활동하는 문화 예술인과 市民들의 글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천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모색'과 같은 좋은 내용의 글도 실려있다. [복사골 부천]:부천시청에서 나오는 市政소식지로 1990년 10월 "부천"으로 창간했으나 제호를 복사골 부천으로 변경해 두달에 한 번씩 간행해 오다 최근 월간으로 발행하고 있다.
[부천 경실련]부천 경제정의실천연합회 기관지로 1996년 3월 1일 창간하여 부정기적으로 현재 2호를 내고 있다. [부천 문학인물의 연보] 변영만,영태, 영로 삼형제 및 목일신의 著書와 발표된 글을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특히 변명로 및 목일신은 우리 文學史的으로도 기념비적인 인물이기에 작품 중심으로 年譜를 실었다. 卞榮魯, 1889년 6월 23일 부천에서 출생. 1954년 12얼 19일 사망. 호는 穀(曲)명 自 民居士, 三淸, 山康齊 等을 사용. 著書로는 변명만 번역본인 [世界 三怪物] "斯密哥德 文" 著를 1908년 3월 5일 廣學書鋪에서 발행하였으나 1910년 11월 16일 韓日合邦後 조선총독부에 의해 治安法으로 販禁되어 오늘날 희귀본으로 남아 문헌으로나 볼 수 있 다. [二十世紀 大慘劇 帝國主義]를 1908. 9.20 廣學書鋪에서 발행하였으나 첫 번째 저서와 똑같은 전철을 밟아 총독부에 의해 1910.11.16 판금되어 [世界 三怪物]과 함께 희귀본으로 전한다. *출처:日政下의 금서 33권 1977.1 新東亞 별책부록 [山康齊文抄〕1957.11.1 경남 창원에 있는 용계서당에서 순한문 漢籍本으로 死後 3년만에 후학 金鍾河 편집으로 발행하였으나 순 한문본이기에 쉽게 읽을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변영만은 살아서 [世界三怪物]과 [二十世紀 大慘劇 帝國主義] 2권의 著書와 사후〔山康齊文抄〕를 발행했으나 2권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판금되어 다시 발행치 못하고 1권은 순 한문본이기에 쉽게 접할 수 없어 후학들에 의해 시대에 맞게 번역 발행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변영만을 잡지에 발표된 글을 年代順으로 나열하여 보면 [機湖與學會月報] 1980.8.25에는 "大呼敎育" 이라는 글을 변영만으로 발표. [開闢〕39號. 1923.9.1. 임시호에는 或問(壬子李冬)을 [開闢〕40호. 1924.10.1. 東章炳麟(癸丑李冬再入中國時)를 穀明으로 발표 [明]1호 1925.7."文學五講"을 문학연구의 취지, 문학의 본질, 고급문학이 상이점, 문학의 기조적 배경, 개성의 표현 등 다섯 가지로 쉽게 풀이해서 문학도들과 독자들의 이해를 도운 글을 "계황"이라는 새로 운 筆名을 사용해 발표하였다. *문예사전, 인명사전 등에도 나와있지 않으므로 연구가들의 참고를 요한다.(본문참조)
[文藝月刊]1호 1931.11에는 "文藝拉雜談"이라는 짧은 글을 卞光昊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주목할 점은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를 첨부하였다.(본문참조) [東光] 1932년 9월호에는 '施賽傳'을 한문 단편소설로 발표. 내용을 요약하면 '시시덕 은 등을 타고 새침덕은 골로 빠진다'란 말에서 시시덕, 새침덕을 소재로 두 인간형 을 규명함으로써 한 시대를 풍자한 소설인데 이 글은 [山康齊文抄]에 다시 실려있다.
[朝光]1936.6 단편실화 "쥐 무서워하는 사람"을 卞自旻으로 발표. 1936.8 수필 "어비턱띠타 偶草八種"을 변자민으로 발표. 1937.7 詩 "孫乭의 昇天"을 변영만으로 발표. 1937.10 詩 "동키호테"를 변영만으로 발표. 1938.4 "法醫學大家 롬부로소의 天才論"을 自旻生으로 발표. 전쟁후 최고의 지성파 잡지인 [思想界]70호 1959.5월호에는 변영만 死後 "丹齎傳"이 번역되어 실려있는데 "이 글은 고 변 선생이 23세때 집필한 유고이며 필자는 변영태씨의 백씨로 법률가이나 한문학, 영문학 등에도 특출 1955.12.22 별세하기까지 70 평생을 布衣. 寒士로 고절을 지키면서 동서고금의 명저를 섭렵했다."는 필자에 대한 찬사를 실어 후학들의 아쉬움과 사모의 정을 표현하고 있다. 一石 卞榮泰 (1982-1969) 변영태의 著書들[song's from Korea] 1936.6.10 조선 시조집을 英文으로 번역 自家本으로 발행하였고 1948.12.30 국제문화사에서 [song's from Korea]가 다시 발행되었다. [tales from Korea]를 해방직후 1946.10.25 국제문화사에서 우리외 전래 동화를 영문으로 발행하였다. [나의 祖國] 1956.2.15 자유출판사 발행. 공직시절 논문 및 연설집으로 원래는 英文 으로 발표한 글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外交餘錄] 片想抄 1959.2.25 한국일보사 발행. 해방후 우리나라 판시설의 활동-을 담담한 필체로 고쳐 회포 형식의 글로 때운후 우리나라 外交史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저서이며, 부록 편상초는 해방후 우리나라의 여러 문제점들을 예리한 시각으로 지적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雜誌에 발표된 글 [晋中親睦會報] 1호 이 회보는 현 보성중고등학교 전신인 보성학교에서 1910.6.10 발행한 회보 創刊號로서 '警世寄談'old and his son. '老人與其子' 등 3편의 글이 실려있다. [新東亞] 1935. 5. "論語註譯의 誤謬를 指摘함" 발표 [펜〕1호 1955.2.20 아우인 수주 변영로가 초대 펜클럽 회장을 하면서 간행한 펜클럽 기관지에 수주의 글과 함께 英文詩 'open', 'to the candle' 두편의 시를 발표하여 펜클럽 기관지 創刊을 축하했다. [國際評論] 1호 1959.3.1 '제네바회의 통일안의 정체' 발표. [思想界] 1963.4월 '3.16 성명을 무조건 철회하라' 5.16 혁명후 4년간 군정 연장의 성명을 발표하자 군정연장을 강력히 비판하는 글을 발표해 정치 원로로서의 면모를 발휘하는 모습을 보였다. [思想界] 1963.4. '政治性 낭비가 심하다'를 양호민씨와 대담한 글이 실려 있다. [新東亞] 1965.4. 韓日會談에 앞서 일본은 먼저 반성해야 한다는 '반성할 자는 누구냐'라는 글이 약 1면에 실려있다. [新東亞] 1965.8. '제네바 정치 회담을 회고한다' [新東亞] 1968.10 '民族'이라는 서문을 발표.*청백리 일대기라는 저서가 있으나 찾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문예 사전 등에는 변영태 저서로 [한국시조선] [한국이야기〕가 있다 하는데 1936년 [영문시조집]과 1946년 [영문전래동화집]의 착오인 듯 하다. 樹州 卞榮魯(1989-1961) 변영로의 著書들 [朝鮮의 마음] 1924.8.22. 평문관에서 발행한 문고본으로 위당 정인보의 서문이 실려 있고 저자의 '序 대신에'를 비롯 詩 28편 부록으로 감상잡기 8편으로 구성된 시집이다. [序 대신에]를 실어 그의 나라잃은 슬름의 노래를 다시 한번 감상해본다. <朝鮮의 마음> 을 어대가 찾을까?/<朝鮮의 마음>을 어대가 찾을까?/바다밑을 뒤져볼까?/ 빽빽한 버들가지 틈을 엿볼까?/아득한 하늘가나 바라다볼까?/아, <朝鮮마음> 을 어대가서 찾어볼까?/ <朝鮮마음>은 지향할수 없는 마음, 설흔 마음!/ 詩集 [朝鮮의 마음]은 우리나라 최초의 시집인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로 시작해서 개인 창작시집 여섯 번째에 해당되는 기념비적인 시집이며 文學史에 영원히 기억될 애 송시 '논개'가 실려 전한다. [gave of azalea]1947.8.5. 국제출판사에서 발행한 변영로의 번역시집. [樹州詩選] 1959.10.30. 경문사 발행 한글시 13편. 영문시 9편. 산문(우리글, 영문)으로 구분되어 대부분의 시와 산문은 첫 시집인 [朝鮮의 마음]에 실린 것을 재수록하였으며 영문으로 된 시와 수록하였다. 산문은 새로운 것을 수록하였다. 표지장정은 畵家 朴栖甫가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하였고 同鄕 후배인素鄕 이상로가 편집을 하였고 題字는 수주 자신이 직접 써 의미를 더했다.
[樹州 隨想錄] 1954.11.30. 서울신문사 발행. 동향인 후배 소향 이상로가 편집을 맡고 내용은 저자 자신의 서문 대신에라는 자서 일언 등, 자화상, 고인신정, 夢 김포기행 등으로 엮어져 있다. [酩酊四十年(無類失態記)] 6.25 전쟁이 휴전되기 전 1953.3.30. 서울신문사 발행. 월탄 박종화의 서문으로 시작되는 이 저서는 40여년간 술을 마시면서 웃지못할 실수담을 사실 그대로 재미있게 그려낸 회고형식의 저서로 그의 기인다운 풍모가 유감없이 드러난 작품으로 앞으로도 이런 소재와 이런 名著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다.
[樹州 卞榮魯選集] 이책은 수주가 작고한지 20년만인 1981.3.10. 그의 유족이 20주기 를 追慕하면서 시인 이용상, 이진섭 양씨가 편집한 것으로 수주 死後 처음으로 작품이 모아진 결정체다. 특이한 것은 수주의 후손인 4남 2녀의 사뢰는 말씀이라는 짧은 글이 실려 눈길을 끈다. 작품 선정은 대표적인 시, 수필 등으로 367면으로 꾸며 한진 출판사에서 비매품으로 발간하였다. [변영로全作詩集] '차라리 달없는 밤이드면'의 부재를 달고 1983.4.30. 김영민에 의해서 엮어지고 정음사에서 출판했다. 이 전작시집은 [조선의 마음] [수주시문선] [수주 변영로 문선집] 등 3권의 저서중 詩 부분만 골라 싣고 3권의 시집에 없는 시들을 편자가 추가로 넣어 엮은 詩全集이다. 특이한 점은 수주 사후 처음으로 作品年譜를 실어 연구가들의 작품연구를 쉽게 하였다. 수주 변영로 연보 1989 (1세) 서울 맹현(지금의 종로구 가회동)에서 父 변정상과 母 진주강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1904 (7세) 서울 제동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그 뒤 계동보통학교로 전학 1907 (10세) 사립중학교(중앙학교-중앙고보의 전신)에 입학하여 체육교사와 마찰로 자퇴하고 안주로 떠나 안동현을 유랑 1910 (13세) 사립 계산학교 졸업 1912 (15세) 중앙기독교 청년회 학교 영어반의 3년과정을 6개월만에 마침. 평창 이씨 흥순과 결혼 1916 (19세) 중앙기독교 청년회 학교 영어반 교사로 부임. 1918 (21세) 중앙고보의 영어교사 부임 [靑春]에 英詩 cosmos를 발표 1912 (22세) YMCA에서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 장남 철수 출생 1920 (23세)〔廢虛] 동인으로 참가 〔학지광) 20호에 '主我的 生活'을 발표 1921 (24세)〔廢虛] 2호에 論評 '메텔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을 발표. [新天地] 1호에 '꿈많은 나에게', '나의 꿈은', '횃불', '영의 비애', '도취', '꿈종교의 총의' 발표 1921 (24세) [장미촌]1호에 '장미촌'이라는 서문을 발표 1922 (25세) 차남 성수 출생 [新生活] 3월호에 '추억만이', '봄비' 4월호에 대표작 '논개', '달밤' 9월호에 '날이 샙니다' 10월호에 '님이시여', '기분전환', '가을 하늘밑에서', '하늘만 보아라' 11월호 '방랑의 노래' [개벽]25호에 '결혼행진곡'을 번역 발표 [개벽] 26,27호 '사막안에 정열' 번역. 연재발표. [개벽] 29호 '토막생각' [개벽] 30호 '상징적으로 살자', '고 남궁벽형에게' [동명] 5호에 '정신적 혁명 투사 쉘리'를 동지 11호에 '로동로국의 예술' 18호에 소설 '어떤 중학교사의 사기'를 37호 여시관하편 번역소설 '정처'를 발표
1923 (26세) [개벽]31호에 '설상소요'를 발표 1924 (27세) [廢虛以後]1호에 '子 몇 알', '생시에 못뵈올 님', '눈' [개벽]44호에 주는것보다 받는 편이 많은 영국 문단 발표. 시집 [朝鮮의 마음] 평문관에서 발행 1935(28세) 장녀 진수 출생 [新知識]1호에 '버러지도 실타하올 이 몸이' [개벽] 62호에 '국수주의 항성', '단재 신채호 선생' [明]1 호에 '가련한 두 로국 소녀' 발표 1926 (29세) [朝鮮詩人全集]에 '하일정취' "어느날" 수록. 12.18. 동아일보에 최남선 시집 "백팔번뇌"를 읽고나서 [文藝時代]1호에 '베른의 고대에서'를 번역. [靑年]10월호에 'to'를 발표
1927 (30세) [現代評論]1호에 '오마카이양의 류비앗'을 번역. 4호에 '셰익스피어의 생애' 발표 1928 (31세) [朝鮮之光]75호 '지고지순한 정신적 문예' [청년] 11월호에 '긴 강물이 부러워' 발표 1929 (32세) [朝鮮日報] '저녁 놀빛' 발표 1930 (33세) [詩文學]2호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위에' [新生] 5월호 '무제' 발표 1931 (34세) 3남 공수 출생 중등학교 조선어 교재에 '백두산 갔던 길에' 외 12편 수록. [선생]1월호 하석소옹 회갑생조 발표 1933 (36세) "영문시집을 읽고"(모윤숙 시집) 동아일보 11.8[新東 亞]8월 '별가튼 생각', '방울가튼 소리', '하이네 산문 집', '군데군데서' [신동아]12월호 '육화율릉' 발표 1934 (37세) 부인과 死別 1935 (38세) 양창희와 재혼. [신동아]1월호 '새해를 맞이하여', '정지용군의 시' [三千里]11월호 '이성만가' 발표 1937 (40세) 5남 문수 출생[조광]5월호 '백두산 가는길', '천지가에 누워' 발표 1938 (41세) 6남 천수 출생 1939 (42세) [文章]2월 '휘상' 9월 '땅거미 질 때' 10월 '실제' 발표 1941 (44세) [文章]4월 '곤충 9제' [春秋]4월 '프란체스카' [조 광] 12월 '박모' 발표 1943 (46세) [춘추] 7월 '사벽송' 발표 1946 (49세) 차녀 인숙 출생. [新文學]8월 '어둠에서 어둠으로' 발표 1947 (50세) 英詩集 [진달래] 간행 [新天地] '유선과 의의선' 발표 1948 (51세) [명정사십년] 서울신문사 발행. [신천지]6월 '삼일이야기' 11월 '나의 자평' 발표 1948 (51세) 영문시집 [GROVE OF AZALEA]간행.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49 (52세) [民聲]3월 '자탄' [民族文化]1호 '나의 교우록' 발표 1550 (53세) [白衣]21호 '잠 놓인 밤' 발표 1953 (56세) [명정사십년] 서을신문사 발행 [신천지]6월 '삼일 이야기' 11월 '나의 자평' 발표 1954 (57세) [수주수상록] 서울신문사 발행. [신천지] 6월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 신채호' 8월 '유리', '몽미인' 발표 1955 (58세) 펜클럽 회장 취임.〔펜]1호 영문시 'a night in taching', 'one vocie' [高校英語]1호 '어학도에게 한 마디' 발표 1956 (59세) [自由文學]1호 '효도' [새벽]9월 '鋪道를 걸으며' [思想界〕34호 'w의 생활 태도' 〔펜〕3호 영문시 'AZALEA', 'HEARING INTO RAIN' 발표 1957 (60세) [새벽] 3월 '단상' [사상계] 8월 '중얼거림' 11월 '조그마한 제의' 1959 (62세) [수주시문선] 경문사 발행 (사상계) 8월 '아이티어래시' [자유문학]1월 '장미촌(40년간의 문예지)' 발표 1960 (63세) [사상계]1월 '장미촌(40년간의 문예지)' 발표 1961 (64세) 3월 14일 別世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선영에 변영만, 변영태와 함께 안장. 대한민국 文人葬으로 거행 1565 [사상계〕3월 '암흑속에 못다 부른 노래(조지훈)'와 함께 '논개' 재수록 1969 [樹州回想記]간행 1981 [樹州 卞榮魯 文選集] 遺族들에 의해 한진출판사에서 간행 1983 [변영로全作詩集] 김영민 편저 정음사 발행 *이 年譜 작성하는데 김영민씨의 수고함에 감사를 드린다.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선영에는 변영로의 문단 후배들이 그의 뜻을 기린 詩碑가 세워져 있고 주논개의 출생지인 전북 장수읍 논개 사당에는 그의 작품인 '논개'의 시비가 있으며, 1996년 12월 30일 부천시 중앙공원에 시비를 건립해 문화도시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다. *1927년 4월[現代評論]에는 '베토벤소전 몰후 백년기를 당하여'를 樹生抄라는 필명의 글이 발표되었는데 변영로의 글이 아닌가 추측된다. 위에 기록한 변씨 삼형제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그들의 존재와 그들이 이루어 놓은 학문적인 위업에 새삼 존경과 감탄과 감사의 념을 금할 수 없다. 그들 자신의 개안과 높은 이상의 실천이 개인적으로는 그들 자신의 영혼을 구원했음은 물론이요, 거친 왜압과 시대적인 무지의 광포한 바람에 이 나라 어디에서도 국민의 영혼을 밝혀줄 촛불하나 보기 어려웠던 그 암흑의 시대에 스스로 민족의 등불이 되고자 했다. 이제 이들은 우리나라의 정신적, 문화적인 교각의 산 인물들이 되어 역사의 장에 빛나는 이름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거니와 부천의 이름 속에 영원히 흐르는 정신의 수액이라 할 것이다. 隨星 陸一信(1913.1.18~1986.10.12) 목일신은 동요의 고전인 '따르릉 따르릉'으로 시작되는 자전거를 비롯하여 '누가 누가 잠자나', '자장가' 등의 동요를 작사하였으며 우리 민요인 '뱃노래', '신농부가', '명사십리' 등 우리들 귀에 익은 동요 및 민요 400여편의 작품을 작사한 분으로 부천의 자랑이다. 목일신의 年譜를 실어 그의 작품을 만나보자. 이年譜는 부천 역사연구소 최현수 소장 이 작성한 것에 약간의 수정을 하였음을 밝혀둔다. 목일신 연보 1913 (1세) 1.18 전남 고흥군 출생 1926 (13세) 국교 5년생으로 동아일보에 동요 '산시내'를 발표. 동요 '자전거'를 작사 1928 (15세) 3월 고흥공립보통학교 (현 고흥동 초등학교) 졸업. 동요 '누가 누가 잠자나' 작사, 발표는 1931년과 1935 년. 전주 신흥중학교 입학(5년제) 1929 (16세) 동아일보에 동요 '나무꾼' 발표. 조선일보에 동요 '잠자는 뽀트', '반쪽달' (반쪽달은 金富岩 필명으로 밭표) [아이생활]에 동요 '시냇물', '가마귀' 발표. [아이생활]에 동요 '느티나무' 발표. 12월 12일 광주학생의거시 신흥중 2년생으로 교내 시위에 참여 하여 1개월 형을 받고 수감됨. 1930 (17세) [學生〕7월호에 '여름' 발표. 동아일보 신춘현상문에 동요 '참새' 당시 조선일보에 동요 '강변에서', '점으름', '너름맘', '새떼', '보슬비', '반쪽달', '너믐비', '너름 숩풀', '어린새', '꼬부랑 시내', '나의 동생', '물새', '잠 자는아기', '눈오는 날', '바닷가', '달밤', '물오리', '쓰 러젓네', '무지개', '비', '비오는 밤', '산시내', '가을 길', '눈꽃', '느티나무', '심부름', '비석', '소낙비' 시 '鍾이 운다.' 발표 [아이생활]에 동요 '보름달' 수필 '서늘한 가을아 어서온' 미담 '씩씩한 소년' 발표. 동아일보에 '고향의 한올', '갈닙배', '꿈나라' 발표. [어린이]에 '첫가을' 발표. [동요시인]에 '그리운 언니' 발표. [신소년]에 동요 '봄버들' 발표. 1931 (18세) 조선일보 신춘현상문예에 동요 '시골' 당선. 동요 '한 올', '긔차', '가을 1', '가을 2', '가을 4', '가을 完' 발표. 동아일보에 '산새', '봄노래' 발표. 〔아이생활] 3월에 동요 '휘파람', '청춘행진곡', '봄비' 발표 [아이생활] 5월에 '시골의 가을'과 동요 '자전거', '아롱다롱 나비야', '가을', '고향하늘' 발표. [동광]에 '봄이 왔다고', '느진봄' 발표. 1932 (19세) 1월 조선일보 신춘현상문예에 동요 '물레방아' 가요 '새 날의 청춘' 당선. 내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迎春曲'당선. 신흥중학교 졸업. 조선일보 신춘현상문예에 당선작 '새 날의 청춘'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취입. 조선일보에 동요 '신문장수', '아츰이 오면' 金富岩이란 필명으로 동요 '자동차' 발표. 동아일보에 동요 '보름달' 발표. [아이생활]에 '눈송이' 발표 1933 (20세) [아동문학사] 근무. 일본 관서대학 문과입학. 7월 월간지 〔영화시대] 현상모집에서 시 '낙화' 1등 당선 (김소영이란 필명으로 발표). 오케레코드사 현상모집에 가요 '명사십리' 당선. '신농부가', '저 달이 지면', '달빛이 지면' 등 3편 취입. 콜롬비아레코드사 현상모집에 민요 '뱃노래', '청춘가' 당선 취입. [아이생활]에 '봄이 온다' 발표. 동아일보에 '가을' 발표 [북성]에 동요 '바람' 발표 1934 (21세)〔목마]에 동요 '팔려가는 송아지' 발표. 7월〔아이생활]에 동요 '우체통', '반짝 반짝', '가을달' 발표. 동아일보에 陸玉順이란 필명으로 동요 '눈오는 밤' 발표. 1935 (22세) [신가정]에 '은구슬 금구슬' 발표. 조선일보에 '나의 청춘' 발표. [아이생활]에 '갈바람 솔-솔-', '해지는 강변', '기쁘든 설', '외로운 등불' 발표. 매일신보에 동요 '조희배', '구름' 발표. 동아일보에 동요 '노래(1)', '노래 (2)', '비누방울', '서울가는 기차', '시내물', '물레방아' 발표 [아동문예]에 동요 '자장가', '봄나비', '새의 노래', '종이 비행기', '우리아기' 발표. [the music book by eun song mok children's song] 발표 (보름달, 눈, 산새, 달과 별, 새떼, 봄비, 고향하늘, 외로운 방아, 보실비, 피리, 물새, 보름달, 낙화, 비오는 밤, 참새, 그리운 언니, 기차, 우체통, 물레방아 등 19 곡 수록) 1936 (23세) 매일신보에 동요 '해지는 강변', '봄버들', '병아리' 발표. [아이생활]에 동요 '눈', '달', '물오리', '우리아기', '비누방울', '밤노래', '소야! 소야!', '자장노래' 잡문 '희생적 정신' 발표. 동아일보에 '달과 별', '봄나비', '하늘', '비행기', '구름배', '봄노래', '물결', '가마귀학교', '가랑닢' 발표. [신가정]에 '누가 누가 잠자나?', '아롱다롱 나비야' 발표 1937 (24세) 일본관서대학 문과 졸업. K.B.S 전신인 J.O.D.K 근 무(동화방송) 1월 '비누방울' 발표. 매일신보에 동요 '봄비', '초생달' 발표. 춘추시인 1호에 '별' 발표. 이화여고 교지에 시 '5월과 연꽃', '서리온 아츰', '가을이 오면' 발표. 4월 [아이생활]에 '흰구름', '달밤의 뱃노리', '아롱다롱 나비야' 발표. 동아일보에 '구루마', '산비둘기' 발표 1938 (25세)〔아이생활〕에 동요 '바다', '반듸불' 발표. 1939 (26세) [草原]에 '靑春頌歌'발표. [詩建設]7호 시 '여명의 찬가' 8월 '자장가' 발표. 1940 (27세) 동아일보에 동요 '시냇물' 7월 '애기네판 봄소식' 매일신보에 '아침햇님' 발표. 1941 (28세) 매일신보에 동요 '햇님', '별' 5월 19일 '서로 도읍자' 6월 23일 '노력' 10월 12일 '좁은 생각을 버리고 넓은 마음을 갖자.' 1943 (30세) 순천 매산고 국어교사 부임. 12월〔소년세계〕에 '전봇대' 발표. 1945 (32세) '새동무' 발표. 1948 (35세) 순천 매산고 사직. 목포 여중고교 교사로 전근. 1952 (39세) [새벗]4월에 '기차' 발표. 1953 (40세) [소녀세계]에 '별' 발표. 1954 (41세) 이화여고 교사로 전근. [새벗]에 동요 '시냇뭍' 1955 (42세) '해병대 노래' 작사. 대한일보사 현상모집에 국빈가요 '대한의 노래' 수석 당선. 동아일보에 '새해가 떴다' 발표. [아이생활]에 동요 '빗방울' 발표.〔갈매기] 창간호에 '갈매기' 발표 1956 (43세)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에 '비누방울' 수록. 동 음악교과서에 '자전거', '누가 누가 잠자나', '자장가', '아롱다롱 나비야', '산비둘기', '참새', '시냇물', '물결은 출렁출렁' 등 수록. [향악]에 '틀리기 쉬운 낱말 사전' 연재. 1957 (44세) 光州 국학도서출판관에서 동요집 [물레방아] 발간. *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음. [아이생활]에 동요 '달이 떴다' 발표. [새벗]에 수필 '여름방학과 누나' 발표. [거울](이화여고 주보)에 수필 '올바른 사람' 국어강좌 '바른글을 쓰자' 발표. 1958 (45세) [신문예] 1호에 수필 'k 교사' 발표. [자유문학] 2월호 '친절주간' 발표. 배화여중 고교교사로 전근. 1960 (47세) 서울 배화여고 교가 작사. [학원]에 '운동정신' 발표. 부천군 소사읍 범박리(현 부천시 소사구 범박동)로 이주. 1963 (50세) 3월 [학원]에 수필 '참된 운동 정신' 발표. 1966 (53세) 6월 [자유문학]에 수필 '청렴' 발표. 1967 (54세) 정경자와 결혼 1968 (55세) [여원]에 '진선과 위선' 발표. [무용한국] 창간호에 시 '별' 발표. 1972 (59세) 장남 태상 출생 1976 (63세) '고흥군민가' 작사 1977 (64세) 8월 19일 고흥 동초등학교 도서관앞에 노래비 제막. 1978 (65세) [아이생활]에 '전보대' 발표. 배화여중고교 정년 퇴임. 3월 '범박동가' 발표 1982 (69세) 오류여중 졸업가 작사 1986 (73세) 10월 12일 부천시 범박동 자택에서 별세 시흥시 군자 신앙촌 묘지에 안장 *연도미상 작품* 동시 '참새들 이야기' 동화 '용감한 메리' 국어강좌 '바른말 바른글', '나의 습작시 대 회고담' 배화여고 교지에 발표. 민요 '농부의 노래' 시 '젊은이의 노래', '경성찬가' 수필 '영원히 영원히', '학원단상' 동요 '아츰', '길가의 뎐등', '참새', '새날이 밝어 오네', '가마귀 병정', '어린별', '살랑살랑', '눈', '자유의 종', '산', '봄비', '밤길', '봄 노래', '잠자는 시계', '발아발아', '물레방아', '꿈나무', '무지개', '물결은 출렁출렁', '굴 뚝', '봄소식', (순천여고 재직시) '산고개', '시골길', '푸른숲을', '보슬비', '물새', '매아미', '편지', '나가자 해병대', '장하다 해병대', '도솔산의 노래', '파리의 노래', '사공의 노래', '이별곡' 배화찬가 '배화여선교회노래' *목일신이 작사했다는 자전거의 문제점 목일신은 동요 자전거를 13세이던 1926년에 작사했다고 했으나 방정환이 발행한 잡지 [어린이] 1925년 11월호 59면에는 '자전거'라는 동명의 동요가 (인천, 배종환)으로 발표되어 있다. 그 노래말을 보면 목일신의 자전가와 유사하다. 배종환의 자전거는 지금도 많이 불리는 '오빠생각'(최순애 작)과 함께 [어린이] 잡지의 동요 입선작이다. 발표된 연도로 보면 배종환 보다 한해 뒤인 것도 그렇고 목일신의 '자전거'가 어느 지면에 발표되었는지 발표 또한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었다. 이에 아쉬움이 남는다. 연구하는 분들을 위해 당시의 [어린이]에 실린 원문을 싣는다. 자전거 쌔릉 쌔릉 쌔릉쌩 자전거 감니다. 압헤가는 어른들 빗켜주시요 쌔릉 쌔릉 쌔릉쌩 자전거 감니다 압헤가는 인력거 비켜스시오 쌔릉 쌔릉 쌔릉쌩 자전거 갑니다 압헤노헌 구루마 치워노시요 쌔릉 쌔릉 쌔릉쌩 자전거감니다 속히갈이 모도다 따러오시요 일제강점시대와 황폐한 전쟁 전후의 척박한 환경에서 "조국의 미래"라는 어린이들에 대해 한점의 사회적인 배려와 관심이 없다시피했다. 이런 시대에 목일신의 주옥같은 노래들은 밤하늘의 별과 같고 솜사탕 같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한평생을 어린이의 마음으로 살았던 그의 생애를 자녀들에게 자랑스럽게 들려주며 우리 또한 위안을 얻고 거기에서 부천의 희망을 본다. 오늘날 이런 순수하고 자연 회귀적인 노래들이 점점 어린이의 입에서 사라져가는 현실이 자못 아쉽기만 하다. 덧붙이자면 아쉬움만 말할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포용하는 어린이들의 마음을 담은 노래들을 우리 지역 문인들이 만들어서 목일신 선생의 유업을 계승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朴齊煥 1905-1995 부천에서 태어나 부천지역 2대, 5대 국회의원 및 농림부장관을 역임한 후 회고록으로 [芝峰閑談]을 1992.3.13 학민사 발행으로 한국전쟁 후의 정치상황을 볼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과 저서들
白波 崔恩休: 1960년대 문화의 불모지인 부천에 최초의 詩畵展(1966년)을 열어 문화의 향기를 불어넣은 그는 첫 詩集 [맹탕헛탕]을 시작으로 [흙과 꽃과의 노래], [복사를 戀歌] 長詩集 [임따라 강따라] 수필집 [왜 이렇게 처방되었나], [五十年의 思索], [思索과 愛鄕의 合唱] 소설 〔갈잎의 憤怒], [굼벵이의 뒷걸음질], [零軍番의 兵士] 등의 많은 저서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부천문인협회 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李秋林:1962년 첫시집 [歷史의 敵意]로 시작하여 [彈皮속의 旗], [불의弔辭], [富川日記], [印度詩篇], [불의의자], [頭甫씨네 다 큰 애들의 後 日譯], [通過驛 驅步하는 語彙들], [꽃은 씨안에 있습니다] 詩畵集으로 [流動하는 生의 原形質] 등이 있다. 주로 長詩, 聯作詩들로 발표하였고, 두 번째 시집인 [탄피속의 기]는 著者가 직접 체험한 越南戰의 從軍手帖이다.
그는 부천문학 4집(1984.10)부터 참여하기 시작하여〔부천문단]에도 참여함으로써 지역의 문학활성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詩 이외의 글은 거의 보기가 힘들지만〔자유문학(1963.5)에 발표한 '言語의 零細性과 窮相群'과 복사골 문화 63호에 '부천문화 예술방안' 등의 글을 게재함으로써 그의 문학에 대한 진지함을 엿볼수 있다. 제9회 [한국문학상] 수상. 제10회 [한국문학 평론가협회 創作부문]의 본상 수상. [현대시인상〕본상을 수상하였다. 具玆龍:소명여중 국어교사이며, 부천전문대 강사이기도 한 그는 [부천문단]의 편집주간을 역임하는 등 누구보다 부지런한 열정의 시인으로 그 열정의 소산물인 多數의 저작가이다. 첫시집으로 [겨울비 내리다]를 시작으로 [복사골 우리동네], [원미동 닭집], [눈 내리는 날은 역곡동으로 가자] 등이 있고 동화 [아빠의 훈장] 등을 포함 약 30여권의 저서를 가진 작가이면서 잡지를 모으는 藏書家이기도 하다. 閔忠煥:부천전문대학 교수. '상허 이태준 연구'에 일가를 이루어 우리나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명성이 있다. 저서로는 [이태준 연구], [이태준 소설의 이해], [이태준 문학연구] 등이 있고 수필집 [우리는 그간 얼마나 더 행복해졌는가], [백두산 질경이]가 있고 복사골 문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金光默:부천에서 태어나 부촌을 떠나본 적이 없는 진정한 부천토박이로 시와 함께 부천을 지키고 있다. 저서로는 첫시집 [오작교]를 시작으로 [이별연습],〔그래도 아름다운 삶의 일기], [행복 이삭줍기, 행복 우물파기], [미움도 크면 사랑이 꽃피는 것을] 등이 있으며 [부천문학]과 [상의 소식] 편집을 담당하고 있다. 崔鉉洙:현 부천역사연구소 소장. 사학을 전공하고 인하대 강사로 재직중 [富川市史] 상임위원으로 부천과의 인연을 맺은 그는 처음으로 부천사를 學術的으로 정립하여 부천 바로 알리기에 공이 크다. 저서로는 [富川史硏究], [富川人物 人名辭典], [돌팡구지에서 부천까지], [재미있는 부천이야기] 등이 있다. 매월 "부천역사특강"과 "부천기행"을 통해 새로운 부천을 알리고 향토사랑을 일깨우기에 열심이다. 李尙昊 [歷史의 主役] 1991. 2. 2. 계림사 발행. 부천출생으로 鄕土史學者. '기서 지방과 초기 신라 박혁거세 집단에 대한 고찰' '비류 백제의 요서 경략' 등 두 편의 논문과 몇 편의 작품이 있다. [鄕土의 얼굴] 1975년 6월 15일 당시 부천 寫協지부장이던 고 김수열씨의 사진집. 부천을 이끈 인물 약 50인을 작품화한 것으로 예술적 가치와 더불어 당시 부천의 역사적인 인물과 문화예술인들을 기록한 귀중한 사진집이다. [映像의 跡] 1968년 4월 고 김수열, 장경내, 김수군, 김선규의 4인이 모여 읍단위에 서는 드물게 "렌즈클럽"을 창립하였는데 "렌즈클럽" 창립10주년을 기념한 작품집이다. (1978. 11) 1976년터는 "映像의 跡 사진 콘테스트 전국 공모전" 을 주최하여 매년 수상 작품집 [映像의 跡]도 발간하고 있다. [富川市史] 1988년 2월 25일 발간. 부천시로 승격된지 15년만에 발행된 이 책은 1986년 4월에 착수하여 약 2년에 걸쳐 완간된 것으로 1300면 가량의 방대한 분량에 부천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있다.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부천으로서는 그동안 富川郡誌나 素砂邑誌가 발행된적이 없어 歷史의 부실함을 면할 수 없었으나 市史의 발간으로 확실한 역사적 의의와 더불어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소사본당 반세기] 1991. 12. 27. 소사천주교 발행. 내용적으로는 천주교사를 다루고 있으나 이는 곧 부천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진을 수록해서 부천 초기의 천주교와 신도들의 모습 전쟁후의 폐허의 흔적 등 그 당시의 부천사람들의 생활과 역사의 현장을 증언하고 있다. ※부천에서 시인 이상로, 정지용, 펄-벅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이상로는 살던 곳(궁동)이 서울로 편입되었기에 다루질 않았고, 정지용, 펄-벅 등은 지나가는 길손들이기에 부천에서는 거론할 가치가 없다고 思料된다.
부천에서 간행되는 신문
우리나라에서 신문의 역사는 1883. 10. [漢城旬報]로 시작된다. 부천에서의 신문은 1950年代 [소사읍공보]로 추정된다. ※구자룡씨가 1950年代에 나온 1부를 소장하고 있는 것을 필자는 확인했다. [소사읍 공보]는 일중의 관보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신문이었고 몇 호까지 나왔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부천에서 신문다운 신문이 나오기 시작한 때는 [한성순보]가 나온후 1세기가 지난후 1989년이 시작되면서 [부천정론 시민신문]은 11호가 나오고 休刊하였다가 1991년 12월 2일 재청간하였고 현재는 [부천 시민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여 발간하고 있다. [부천라이프], [중동신문], [부천포커스], [부천자치신문], [경기도민신문], [부천뉴스] 등 주간 신문시대 홍수를 이루고 있다. [부전뉴스]는 市政 소식지로 비매품이다. [부천라이프], [경기도민신문]은 終刊하였다. [부천 환경신문] 1994. 12. 20. 창간. 부천 시민 환경회의에서 부정기적으로 발간했으나 몇호까지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1991년에 들어와서 日刊新聞 時代를 열어준 [韓國 首都圈日報] 후에 [首都圈日報]로 제호를 변경하였고 부천에 있던 본사를 경기도 안양시로 이전하여 현재까지 나오고 있다. [京畿道民新聞] 1991. 10월 창간하여 후에 [京畿道民日報]로 제호를 변경하여 현재까지 나오고 있다. "新聞號外" 1995. 6. 24. 부천에서 號外가 [京畿道民日報] 등에서 처음 나와 기록으로 남긴다. ※부천이 본사인 [벼룩시장]은 지역 정보지이므로 다루질 않았고 정치인들이 낸 철새신문 등이 있으나 論外로 한다.
부천문학의 요람 '남상(濫觴)'이란 고사가 있다. 양자강같은 큰 강도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술잔을 겨우 띄울만한 세류(細流)라는, 즉 사물 발생의 첫출발, 기원(起源)을 뜻하는 말이다. 오늘의 부천문학이 있게 된 남상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일찍이 우리의 선조들이 이 땅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면서 학문을 닦고 시문(詩文)을 읊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하겠는데 그 정확한 시기를 상고(詳考)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 편의상 현대문학의 출발부터 보기로 한다. 이 경우 단연 첫 손가락으로 꼽을수 있는 사람은 수주 변영로(1898~1961)이다. 거룩한 분노는 / 종교보다도 깊고 / 불붙은 정열은 /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로 잘 알려진 수주는 1898년 5월 9일 아버지 변정상과 어머니 강재경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기본교육을 마친 후 1920년「폐허」동인으로 문단에 데뷰한 이래 시집 「조선의 마음과」 수필집 「명정 40년」등을 남긴 문인으로, 두주불사(斗 酒不辭) 호방한 기품을 지녔던 풍류인다. 그러면서도 그는 또한 절망적인 시대상황속에서도 대쪽과 같은 절개와 지조를 지녔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약전(略傳) 첫머리를 보면, "…서울재동·계동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사립 중앙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2년 체육교사와의 마찰로 자퇴하고 만주 안동현을 유람하다가 같은 해 평창이씨 흥순과 결혼하였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 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과정을 6개월만에 마쳤다. 그 뒤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로 되어 있다.
한편 부천 오정구청의 호적기록을 보면 수주의 부친이 1915년 1월 경기도 부천시 오정면 고강리 313번지로 와서 살기 시작하였으며, 3 남인 수주(그의 본 이름은 영복(榮福)임는 1958년 6월 10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51번 지의 2로 분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상기한 두 기록의 내용으로 보아 수주는 부천에서 낳아 교육받고 활동한 엄밀한 의미의 '부천 사람'으로 단정지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수주를 굳이 우리고장 사람으로 칭송하는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그의 아호를 부천의 옛이름인 수주(樹州)로 삼고 있다는 점, 두번째는 부모님이 계신 이곳을 고향으로 생각하며 살았다는 점, 그의 한 수필을 보면, "…때는 이러 구려 십유사오년이 흘러갔다. 내가 부평(富平-현 부천) 향제(鄕第 고향에 있는 집-필 자 주)에 있을 때였다." 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이곳에서 조부모, 부모, 형제들과 함께 잠들어 있으며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문학과 호방한 기질, 그리고 절개와 지조를 고수하려는 선비적 삶의 자세를 지닌 큰 사람의 일깨움으로 영원한 우리 마음의 고향이 되고 있다 는 사실이다. 부천시 고강본동산 63번지에 변(卞)씨 문중 소유의 산이 있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작은 민가의 마당을 가로질러 나 있다. 여기에는 조선 시대의 무신인 변종인의 묘 와 신도비, 그리고 유적지 정석이 있다. 이 유적지정석 뒷면에 수주의 '논개'가 새겨 져 있다. 또한 신도비의 비문은 '용재총화(용齋叢話)'를 지은 성종 때의 문신 성현(成 俔 1439∼1504)이 찬했다. 변종인의 신도비는 비좌가 옥갑문으로 장식되어 있고 옥개는 투구형인데 글씨는 거의 지워져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 바로 옆에 변영로 일가 -변영로, 변영태, 변영만 등 유명한 3형제와 그의 부모 그리고 조부모의 묘가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 둘레에는 외부인의 출입 을 통제하기 위해서 철망이 쳐져 있고 그 철망 안쪽에 수주의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 전면에는 '생시에 못뵈올님'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변영로 시인의 약력과 비문을 세운 동기가 쓰여 있다. 한편 1996년 12월 부천 중당공원에 문인협회 부천지부가 주관하여 또다른 그의 시비를 세웠는데 비의 전면에는 '논개'가 새겨져 있다.
다음으로 지적할 인물은 시인 정지용(1903∼?)이다.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 '현대시사에 남을 천재시인'으로 극찬되는 정지용의 고향은 충북 옥천이다. 그가 우리고장과 특별한 연(緣)을 맺게 된 것은 2차대전 중 일제가 미국과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서울 사람들은 소개(疏開)시켰을 때 지용은 복사꽃 아름 다운 '소사'를 선택하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 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참하 꿈엔들 잊힐 수 없는 그리운 고향 이곳 산하에서 보았던 것이다. 지용은 '소사'에 내려와서 우리말로 우리글을 짓는 일조차 범죄시되는 암울한 시대라 시심(詩心)은 가슴에 깊이 묻어둔 채 신앙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천주교도로 이곳에 교당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고 인천교구를 찾아다니며 물질직인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손수 벽돌을 쌓아 오늘의 소사성당을 있게 하였다. 1930년대 우리 소설을 대표했던 상허 이태준(1904∼?)의 단편소설 「무연(無緣)」에 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다음으로 가본 데가 소래 저수지다. 경인선으로 가 소새(素砂)서 내려 마침 버스가있 으면 대야리(大也里)까지 타고 없으면 장찬 십리길을 걸어야 하는 데다, 얕은 줄밭이 많고 깊은 데는 돌로 쌓은 둔덕에 앉게됨으로 바닥도 좋지 못하고 사람도 너무 뜨거워진다. 그러나 가끔 손아귀가 번 붕어를 낚을 수 있는 맛에 공일날 같은 때는 무려 삼사 십명은 모이는 데다. 평소 낚시질을 즐겨했던 상허에게 있어 이곳 부천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했고 단지 소래저수지를 가기 위해 거쳤던 한미한 시골 마을로 간단히 표현되었다. 여기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지용의 집이 '대야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었다는 것이다. 두루 아는바와 같이 지용과 상허는 휘문학교 선후배이자 가람선생의 애제자 들이고 문학활동에서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각별한 사이이다. 시와 소설부문에서 당대를 대표했던 두 사람은 이곳에서 함께 만나 우울한 시대를 한탄했던 것이다.
부천 남부역에서 서울 방향으로 가다보면 소사 삼거리 못미쳐 길가로 화공약품을 파는 상점들이 나온다. 소사본 2동 89-14소재 지금 '세건 윤활유'가 들어선 곳이 바로 정지용이 1943~46년간에 살았던 옛집 자리이다. 지난 1993년 5월 복사골문학회에서는 이 사실을 오래동안 기리기 위해서 그 집 벽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푯돌을 붙였다. 여기는 한국 현대시의 큰 별인 정지용 선생이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약 3년동안 은거하면서 詩心을 키우던 곳입니다.
세번째로 소향(素鄕) 이상로(李相魯:1916~1973)를 들 수 있다. 그는 일본 메이지학원 고등문학부를 중퇴하고 귀국 후 언론계에 종사했던 문인으로, 『귀로』 『불온서정』 등의 시집과 수필집으로 『옥석혼화』『어느 나비가 주는 기억 만치도』등을 남겼다. 예전에 부천군이라 하면 지금의 부천시와 서울 온수동에서 고척동까지 서울 편입전 구 소사읍 지역, 현재 시흥시의 구 소래읍지역, 그리고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양면 지역과 용유면 등 6개면이 포함된 방대한 지역이었다. 그런 관계로 '부천군'에 근거하여 여러 사람들을 부천 문인(『한국문학지도』(계몽 사,1996)를 보면 소설가 정구창, 시인 이흥우, 평론가 백승철 등을 부천출신의 문인으로 적고 있다.)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잘못이다. 소향도 여기에 예외일 수는 없다. 그는 온수동 사람이고『한국문예사전』(어문 각,1991)에서도 서울 출생으로 적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새삼 그를 거 론하는 이유는 아호를 '소사가 고향이다'는 뜻을 담고 있고 평소 부천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 박두진이 소향에게 띄운 글의 일부를 보자. 소향 형! 그간 어떠하십니까? 형은 무엇을 생각하며 지내십니까? 흰구름 둥둥 구름은 가고… 이제 다시 저는 잠자는 시혼, 나의 잠자는 시혼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또는 멀리 나들이간 시혼! 복사골 피는 마을을 찾아 혼자 나들이간 나의 시혼을 나는 어서 불러야겠습니다. 이 벌을 지나면 저기 /남향받이 산기슭 / 그 다소곳한 마을에 / 복사골 오오 화안한 그 / 복사꽃 피리니형! 나는 이제 복사꽃, 복사를 피는 마을을 향하여 가오리까? 수주와 지용 그리고 소향은 지금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들의 그윽한 문향(文香)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오늘의 부천문학을 싹틔운 한알의 밀알이 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부천에서 살다간 문인들 부전문학의 궤적(軌跡)을 더듬어 가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일찍이 이곳에 살면서 부천을 노래하다 지금은 떠난 이들이다. 이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한다. ① 목일신(睦一信:1913∼1986) 그는 우리 귀에 익은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로 시작되는 「자전거」 외에 「눈송이」「누가 누가 잠자나」「자장가」「비누방울」「아롱다롱 나비야」 등 수백편의 동요와 「명사십리」「신농부가」등의 민요를 작사한 문인이다. 이화·배화여고 등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78년 정년퇴직, 그후 신앙촌에서 만년을 보냈다. 최현수(부천역사연구소장)에 의해 그에 대한 생애와 작품세계가 소상히 정리된 바 있다. ② 황명(黃命:1931∼ ) 1955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분수」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뷰한 그는 「날아라 아침새들이여」라는 시집을 냈으며 현재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소사동에서 60년대 초까지 이곳에서 살았으며 본적지가 이곳으로 되어 있다. ③ 정득복(1937∼ ) 1960년 「자유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뷰, 시집으로 「뿌리 내리는 땅」 「나의 밤을 아침에 깨우나니」등이 있다. 부천시청 산업과장을 역임했다. ④ 김국태(1938∼ ) 1969년「현대문학」에 소설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뷰, 작품집으로는 「황홀한 침몰」 「각서풍년」「우리교실의 전설」등이 있다. ⑤ 김정오(1938∼ ) 1975년 「현대수필」에 생각에 잠긴 얼굴을 발표함으로써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수필집으로 「빈 가슴을 적시는 단비처럼」「그 깊은 한의 강물이여 」등이 있다. ⑤ 김연식(1938∼ ) 「현대문학」과「시문학」을 통해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꽃으로 서서」 「새로운 탄생의 아침」등이 있다. ⑦ 박건웅(1939∼ ) 시집으로 「자목련질매」「쓸쓸한 에덴」「어머니 뻐꾸기가 울어요」등이 있음. 평북 강계에서 출생했으나 월남하여 어린 시절을 부천에서 보냈다. ⑧ 안정효(安正孝:1941∼ ) 그의 대표적 장편소설의 하나인「하얀 전쟁」을 보면 어렸을때 이곳에서의 추억담이 잘 표현되어 있다. ● 인해전술로 기세를 올리던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리라는 소문에 우리식구는 모두 소사(부천)로 내려갔고 마지막까지 집을 지켜보겠다는 생각에 아버지는 혼자 서울에 남았다. 심곡리 외할머니집에서 며칠 못 있었는데 미군과 국방군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공산군이 곧 쳐들어 오니까 피난을 가라고 했다. ● 우리들도 어렸을 때 소사에서 지나가는 미군을 보면 '씨비씨비' 라고 소리를 질렀었다. ● …봇물이 흐르는 둑을 보니 어릴 때 그물을 들고 고기를 잡으러 다니던 소사의 개울이 생각난다.(p72) ● …마른 땅에서 탄피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을 멀거니 쳐다보며 6.25 때 소사의 소래산 기슭에서 탄피와 화약을 가지고 놀던 나와 내 동무들을 생각했다.(p84) ● 집집마다 부엌에는 바깥으로 빠져나갈 개구멍이 뚫렸고 뒷마당에 포탄을 피하려고 방공호를 파놓았다. 부천군 것저리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우리집에도 뒷마당에 저런 방공호가 있었다.(p86) ● 국민아교 2학년으로 전쟁을 맞은 나는 철뚝 너머 소사 남국민학교 분교에서 내 지능지수를 계속 발달시켜가며 담배장사와 구두닦이를 해서 집안살림에 보탰다.(p144) ● …것저리의 방공호에서는 서울을 향해 날아가는 함포사격 소리를 들으며 어린 마음이 전율했다.(p315) 윗글을 통해서 안정효는 한국전쟁 때 이곳('것저리' 라는 소지명과 연관해 볼 때 오늘날 춘의동으로 추측됨) 외갓집에서 어렵게 피난살이를 하면서 부천남초등학교에 다녔음을 알 수 있다. ⑨ 이석인(1943∼1997) 1970년 시집「산우가」를 출간하면서 문단에 오른 뒤「나무 생가」「고치 속의 잠」 「치통」「둥지 위를 때나는 새」등의 작품집을 낸 그는 한때 심곡동에 살았다. ⑩ 이재인(李在仁:1945∼ ) 소설집 「악어새」, 수필집 「황야의 아침」등을 펴낸 그는 한때 심곡동에 살았다. ⑪양귀자(梁貴子:1955∼ ) 1978년 「문학사상」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뷰한 그녀는 특히 80년대 우리 소설의 한 성과로 평가되는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들」을 통해서 부천의 한 단면을 사실적으로 잘 묘사한 바 있다.내용 중 일부를 보자. ● […] 원미동 23통의 모양새를 알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흡사 장터 객주집의 국자와 같은 꼴이었다. 국자의 손잡이 부분에 원미지물포, 그의 행복사진관, 써니전자, 강남부동산, 우리정육점, 서울미용실 등이 한켠으로 촘촘히 박혀 있고 맞은편에는 강노인이 푸성귀를 일궈 먹는 밭과 무궁화 연립, 그리고 김반장의 형제수퍼가 자리 잡고 있었다. 손잡이가 끝나고 종구라기 모양의 몸통이 시작되는 부분은 노상 이것저것 잡다한 종류의 가게가 문을 열었다가는 슬그머니 또 누군가 새로운 가게를 열었다가는 이내 문을 닫곤 하는 말하자면 원미동 23통의 사각지대였다.<찻집여자>
부천시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원미구청 앞에서 하차하여 '원미등 사람들'의 작품배경이 된 원미동 23통 5반을 찾아가면, 소설속의 소시민적인 풍경과 간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소망수퍼' '행복머리방' '여주 쌀집'등 소시민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갈구하는 관념어들을 가게의 간판으로 삼은 이곳 원미동 사랑들의 심리에는 그만큼 변두리로 밀려난 소시민들의 '삶에 대한 애정'이 깊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이 거둔 작품적 성과는 바로 이러한 소시민들의 은밀한 욕구와 충동의 현장을 사실감 있게 그려 낸 점에 있다.
실제로 작품의 배경이 된 원미동 23통과 작가가 살던 11통의 길목은 바로 한 골목을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으며 '원미동 시인'에 나오는 청년이 살던 2층 연립주택도 '행복머리방' 건너편에 그대로 있다. 그 당시 작가가 살던 집은 '행복머리방' 2층 (원미구 원미1동 64-7)이고 그 골목에 '여주쌀집'이 있다. 23통 골목에 있는 '소망수퍼'에서부터 11통 골목까지 불과 100미터가 되지 않는 길이와 폭이 채 4미터가 못되는 공간에서 홍정선 교수의 지적대로 '원미동-작고도 큰 세계'를 그렸던 것이다. ⑫부천을 거쳐간 문인을 얘기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한 외국인은 세계적인 문호 펄벅 여사이다. 『대지(大地)』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그녀는 특히 한국을 위해 『펄벅재단』을 세우고 혼혈아를 위한 사업을 전개했는데 이 재단 사무실이 서울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바 있다. 부천 남부역에서 남쪽으로 요셉병원과 축협을 끼고 약 2백여m 길을 따라 올라가면 태 경·극동아파트가 나온다. 그 자리가 바로 재단이 있던 1969년 겨울 장왕록 교수가 여사를 만나고 쓴 글의 일부를 보자. "경기도 소사의 큰 거리에서 …과수원을 끼고 올라 가노라면 소나무가 듬성듬성한 산 아래 유한양행이 경영하던 자리에 펄벅재단과 함께 한·미 혼혈아 학교인 「기회센터」가 보인다. 눈이 소복히 쌓인 그 산 밑의 아담한 벽돌집 응접실에서 필자는 여사를 만났다. 여사는 한국의 아름다운 설경을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커피를 권했다. 펄벅은 한국을 배경으로 한 두 편의 작품 -「살아있는 갈대」와 「새해」를 썼는데 특히 「새해」는 혼혈아 구제사업을 다룬 내용이다. 「새해」에 나오는 아름다운 한국의 정경이 부천을 그린 내용이라면 지나친 억측일까. 이제 펄벅도 가고 그의 재단도 없어졌지만 그곳 어디쯤에 펄벅의 이름이라도 적어 기렸으면 하는 마음이 못내 아쉽다. ⑬그밖에 이곳 학교에 재직하며 활동하다가 타지역으로 전출하여 떠난이로는, 시부문에 구자승, 이충웅, 권효남, 김기열, 이정균, 평론부문에 양운신 등 많은 사람들이 있다.
부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 인구 6만 안팎의 소읍(小邑)에 불과하던 이곳이 지난 1973년 시로 승격한 이래 날로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은 80여만을 헤아리는 대도시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문학인들이 이곳에 와서 살게 되면서 점차 문화도시 부천으로서 든든한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부천에는 한국문인협회 부천지부 회원들과 자생단체로 복사골문학회를 비롯한 10여개의 문학동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① 문인협회 회원들 1982년 10월 「부천문학동인회」가 결성되어 회지를 발간하는 등 각종 문학행사를 통해 이 고장에 문학의 씨앗을 뿌렸다. 1984년 10월 정식으로 한국문인협회 부천지부가 발족하고 초대지부장에 최은휴를 선출 하였다. 그 후 『부천문학』발간(1996년 제26집), 복사골 백일장(14회), 시 낭송회(17회), 문 학강연(19회), 시화전(5회)의 개최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 문학의 저변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회원은 다음과 같다. <시>이추림, 민경남, 김가배, 김기수, 김철기, 진현주, 김영철, 이서림, 김재숙, 차영숙, 황연옥, 홍옥희, 정명자, 조남숙, 박정자, 박영봉,서 원, 김미숙 <소설> 최은휴 <수필> 소진섭, 이정홍, 한돈희, 임현기 <시조 및 시> 김광묵 ② 복사골문학회 1989년 11월 부천에 근무하는 초·중등학교 교사 8명 (구자룡·권효남·정명현·문제술 ·김기열·이정균·최동심·박수호)이 시작하였다. 그간 회지 「부천문단」발간 (1990년 창간호 이후 제9집), 복사골 백일장, 복사골문학상 시상, 시낭송회, 시화전, 문학의 밤, 합평회 (매월 1회 이상)등을 하였다. 회원들은 영역별, 경향별로 나뉘어 지용·수주·소향· 도원·소새(시동인), 주부토(소설· 동화동인), 흰모래·멀뫼·하우고개, 도향(수필동인), 영상, 평론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구자룡 시인의 노고와 믿음기업의 전연욱, 청옥문예진흥회의 강태엽, 하청옥의 심적 재정적 지원은 복사골 문학회 활동을 더욱 왕성하게 계기가 되었다. 회원은 다음과 같다. <시> 강영백 강예숙 구자룡 구정혜 금미자 김경애 김도형 김영달 김성자 김승동 김원준 김인수 김정숙 김효길 동미경 박수호 박용우 송영심 신옥란 송하용 안금자 염순자 오영석 유경환 유부식 영자 이건선 이창원 이천명 이훈희 장재룡 장종태 정창배 조정 숙 최종만 <소설> 구효서 김윤희 신말수 유덕희 이명인 이수태 이현숙 임남택 장현호 <동화> 강정규 최동심 문제술 <수필>고정임 정임숙 권영미 김종성 문영숙 문현경 박성순 사광주 심정자 안명숙 안 효인 오미옥 유정미 이선희 이영희 최정애 황정순 이우숙 안성일 이은재 <평론> 김봉군 이병기 최운선 민충환 ③ 부천여류문인회 대부분 문협회원 중 여류들만이 별도의 모임을 갖고 시를 공부하고 발표하는 시동인으로 그간 「여류문학」3집(1996.12)을 발간하였다. 회원들은 나음과 같다. 진현주 박정자 김가배 김재숙 김철기 송영심 이서림 조남숙 차영숙 황연옥 고우련 김혜자 박미랑 유미애 이은순 이서인 정명자 김미소 등. ④ 부천시민문학회 1996년 4월, 생활 속의 진솔한 이야기를 드러내 쓰고자 하는 일반직장인들의 문학 동아리로, 회원은 박일환 김형식 이은래 등이 있다. ⑤ 글벗문학회 1994년 6월 문학을 사랑하는 주부들이 결성한 모임으로, 그간 동인지(2집), 시화전, 시낭송회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회원으로는 김경옥 이옥래 김정숙 이강언 이현숙 박자원 김종숙 정보숙 허현아 김은희 김현주 등이 있다. ⑥ 글방아간 문학회 1994년 1월 결성된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만의 동아리로, 회원은 김형은 강명옥 임은경 등이 있다. ⑦ 부천노동자문학회 안기현 문동만 윤경상 ⑧ 글사랑 문학회 1995년 11얼 부천문화원에서 실시한 주부문예교실을 통해 문학을 공부했던 이들이 만든 문학동인으로, 회원은 김혜자 이은순 유미애 박진숙 고선희 이화자 등이다. ⑨ 부천좋은동화연구회 1994년 5월 어린이들에게 좋은 책을 선별해서 읽혀야겠다는 취지에서 출발한 이 모임은 「좋은 동화 찾는 어머니」라는 자료집을 격월간으로 간행하는데 지금까지 21호를 내었다. 회원으로는 임정자 박귀영 이진우 송은주 유현선 윤종희 정혜윤 김순남 이향림 윤은경 허난영 등이 있다. 이밖에 시인 최종천 등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부천시 소재 도(道) 보호수
산림법 제67,68조의 규정에 의하여 천연 보호림 및 보호수의 보호관리의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천혜자원의 보호와 건전한 생활환경을 조성, 유지하기 위해 천연보호 림 및 보호수의 보호관리 요강을 제정하여 보호수를 보호하고 있다. 그리하여 수령 500년이상 수목으로 전국적으로 희소가치가 있는 시·도 상징적인 수목은 '시·도나무'로 수령 300년 이상으로 전국적으로 희소가치가 있거나 전국적으로 알려진 고사나 전설이 있는 수목은 '시·군나무'로 수령 200년 이상으로 시·도적으로 희소가치가 있거나 시·도적으로 알려진 고사나 전설이 있는 수목은 '읍·면나 무'로, 수령 100년 이상 수목으로 전 시·군적으로 희소가치가 있거나 전 시·군적으 로 알려진 고사나 전설이 있는 수목 및 특별히 보호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수목은 '마을나무'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이렇게 지정하여 건전한 육성과 보존에 지장이 없도록 성실한 관리를 하여야 하며 특 히 병해충, 기상피해, 인위적 피해 등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방제 및 예방조치를 강구 하여야 한다. 현재 우리 시에는 지정·보호할 가치가 있는 수목이 여럿 있다. 수령으로 보아 500 년 이상된 수목만도 이미 도나무로 지정된 쌍느티나무, 은행나무, 측백나무 이외에도 오정구 고강동에 500년 된 향나무가 있고 오정구 여월동과 소사구 심곡본 1동에 300년 이상된 느티나무가 있다. 수목별로 보호수의 선정기준이 다르지만 우리 시에 있는 나무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느티나무는 300년 이상 나무로 높이 25m, 나무둘레 2.0m 이상인 수목을, 은행나무는400 년 이상 나무로 높이 20m, 나무둘레 2.6m 이상인 수목을, 향나무는 200년 이상 나무 로 높이 lOm 나무둘레 0.7m 이상인 수목을, 측백나무는 200년 이상 나무로 높이10m, 나무둘레 0.8m이상인 수목을 기준으로 한다. ①도 보호수 (도-5-2), 1000년 된 은행나무 세종병원 앞 소사본동 100-1번지에는 1000년된 은행나무 (높이 30m, 둘레 5.0m, 면적 182㎡)가 있다. 직경은 25m, 지름은 2.6m 이며 은행나무가 있는 곳의 지목은 잡종지이다. 소유자는 국가(재무부) 이고 관리자는 황우동이다. 이 나무는 폭이 넓으며 잔가지 가 형성되지 않고 굵은 가지로 수목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노출된 뿌리에 복토를 하면 질병과 화가 미친다고 전해진다. 1982년 10월 15일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②도 보호수 (도-5-3), 800년 된 쌍느티나무 소사본2동 115-1번지에는 신천리로 넘어가던 차도변에 800여년 된 두 그루의 느티나무(높이 30m 둘레 4.30m 면적 48㎡)가 있었으나 서남쪽의 나무가 원인 모르게 죽어 현재는 한 그루만이 남아있다. 직경 24m, 지름 2.0m이며, 느티나무가 있는 곳의 지목은 대지다. 이 수목은 나무 밑 부분께서 가지 사이가 마치 동물이 앉아 있는 모양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마을 주민의 화평을 기원하는 제사를 매년 올리고 있다. 1982년 10월 15일 경기도보호수로 지정되었다. ③도 보호수(도-5-4), 500년 된 은행 나무 여월동 239-2번지에 있는 은행나무로, 높이 30m, 둘레 4.9m, 면적 230㎡이다. 수관직경 25m, 수세가 왕성하고 폭이 넓어 부채모양을 형서하고 있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부평 도호부사가 심은 것으로 매년 마을 주민들은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기 위한 대동제를 지내고 있다. 1982년 10월 15일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은행나무가 있는곳의 지목은 대지이고 소유자는 김준식,관리자는 김태호다.
④도 보호수 (도-5-5), 500년 된 측백나무 여월동 80번지에 있는 측백나무로, 높이 11.2m, 둘레 3.40m, 면적 100㎡이다. 수관직경 10.8m 수세가 왕성하고 수목이 군상으로 형성되어 특이하게 자라고 있다. 1982년 10월 15일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특백나무가 있는 곳의 지목은 밭이며, 소유자와 관리자는 남기홍이다.
기타 유물자료
1.교지 敎旨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 관작, 시호, 토지, 노비 등을 내려주던 문서이다. 관료에게 관직, 관직을 내려주는 교지는 고신(告身:사령장), 과거에 합격한 문화급제자에 내리는 교지는 홍패,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자에게 내리는 교지는 백패, 죽은사람에게 관작을 높여주는 교지는 추증교지, 토지와 노비를 내려주는 교지는 노비토전사패, 향리에게 면역을 인정하는 교지는 향리면역사패라 하며 죽은 신하에게 시호를 내려줄 때도 교지를 썼다. 이와같이 교지는 매우 다양하게 쓰였다. 교지에 대한 용어도 조선 개국초에는 왕지, 대한제국시대에는 칙명이라고 하였다. 교지는 국왕의 신하에 대한 권위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며, 봉건적 관료정치의 유산 이기도 하다. 한 개인에게 내려진 일련의 교지는 그 시의 관료정치 및 양반사회의 성격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지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임금의 도장 이, 흥패와 백패에는 ' 거지보(科擧之寶)'라는 도장이 사용되었다. 교지는 고문서 가운데 비교적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그 가문의 영예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우리 지역에 있는 토박이 가문에서도 소중히 보관해 오고 있다. 약대동의 이하보, 이중해가 받은 경우와 고강동의 오정 변삼근은 무려 44개의 교지가 전해지고 있다. 우리 부천에 살았던 사람들이 받아서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는 교지를 받은 사람, 연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지를 받은 사람 연대 소장처 내용 李重海 조선영조 연구소 이중해가 문과에 합격되었음을 알 수 있는 홍패. 李夏保 정조 연구소 이학보가 무과에 합격되었음을 알 수 있는 홍패. 淑人朴氏 정조 연구소 이하보의 부인 숙인 박씨를 숙인에서 법전에 의거 남편의 직위에 따라 정3품 숙부인으로 승격함. 李夏保 순조 연구소 이하보가 정3품 통정대부에 제수됨. 朴鐘永 고종 박규식 박종영을 정3품 통정부대로 올림. 李建九 고종 연구소 이건구를 강진현감에 제수함. 李建九 고종 연구소 전라도 관찰사에게 보내는 서신. 李建九 고종 연구소 이건구가 정3품 통정대부가 됨. 卞三近 선조 35년 변창순 변삼근이 진사에 오른 백패. 卞三近 광해군 3년 변창순 변삼근이 별시문관에 급제함. 卞三近 광해군 4년 변창순 2월 변삼근이 종사랑이 됨. 卞三近 광해군 4년 변창순 5월 변삼근이 통사랑이 됨. 卞三近 광해군 4년 변창순 7월 변삼근이 면공랑이 됨. 卞三近 광해군 4년 변창순 7월 변삼근이 선무랑이 됨. 卞三近 광해군 5년 변창순 7월 변삼근이 승훈랑이 됨. 卞三近 광해군 5년 변창순 9월 16일 변삼근이 승문원 부정자가 됨. 卞三近 광해군 5년 변창순 9월 22일 변삼근이 정자가 됨. 卞三近 광해군 5년 변창순 9월 25일 변삼근이 저작이 됨. 卞三近 광해군 5년 변창순 10월 7일 변삼근이 사직장 겸 승문원 부사정이 됨. 卞三近 광해군 5년 변창순 12월 변삼근이 현신교위행 충무위 부사정이 됨. 卞三近 광해군 5년 변창순 12월 변삼근이 승정원 주저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됨. 卞三近 광해군 5년 변창순 12월 22일 변삼근이 창신교위 행호각위 부사장이 됨. 卞三近 광해군 6년 변창순 1월 13일 변삼근이 승정원 주서겸 춘추관 기사관 세자 시강원 설서가 됨. 卞三近 광해군 6년 변창순 2월 3일 변삼근이 봉직랑행 승정원 주서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됨. 卞三近 광해군 6년 변창순 7월 4일 변삼근이 현신교위 행충무위 부사정이 됨. 卞三近 광해군 6년 변창순 10월 변삼근이 현신교위행 충무위 사정이 됨. 卞三近 광해군 6년 변창순 12월 2일 변삼근이 현신교위 행 충무위 부사과가 됨. 卞 三近 광해군 7년 변창순 정월 변삼근이 현신교위행 충무 . 위 부사과가 됨 卞三近 광해군 7년 변창순 2월 변삼근이 통선랑 행 사헌부 감찰이 됨. 卞三近 광해군 7년 변창순 4월 17일 변삼근이 조봉대부행 사헌부 감찰이 됨. 卞三近 광해군 7년 변창순 6월 2일 변삼근이 조산대부 행 강원도사가 됨. 卞三近 광해군 10년 변창순 4월 13일 변삼근이 통훈대부 공조좌랑이 됨. 卞三近 광해군 10년 변창순 6월 8일 변삼근이 통훈대부 경기도사가 됨. 卞三近 광해군 10년 변창순 7월 8일 변삼근이 통훈대부 겸 춘추관 기주관이 됨. 卞三近 광해군 11년 변창순 7월 16일 변삼근이 어모장군행 충무위 사과가 됨. 卞三近 광해군 11년 변창순 10월 19일 변삼근이 어모장군행 충무위 사과가 됨. 卞三近 광해군 12년 변창순 2월 2일 변삼근이 통훈대부 성균관 전적이 됨. 卞三近 광해군 12년 변창순 6월 6일 변삼근이 통훈대부 성균관 전적겸 춘추관 기사관이 됨. 卞三近 광해군 12년 변창순 7월 6일 변삼근이 형조좌랑 겸 지평이 됨. 卞三近 광해군 14년 변창순 6월 3일 변삼근이 통훈대부 사도시 첨정이 됨. 卞三近 광해군 14년 변창순 7월 14일 변삼근이 통훈대부 종부시정이 됨. 卞三近 광해군 14년 변창순 8월 18일 변삼근이 통훈대부 종부시정 겸 춘추관 편수관이 됨. 卞三近 인조 원년 변창순 3월 17일 변삼근이 통훈대부 제용감정이 됨. 卞三近 인조 3년 변창순 2월 8일 변삼근이 어모장군행의흥위 사정, 승문원 판교, 형조참의가 됨. 卞三近 인조 14년 변창순 5월 20일 변삼근이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가 됨. 卞三近 인조 15년 변창순 4월 5일 변삼근이 가선대부행 춘추도호부사가 됨. 卞三近 인조 18년 변창순 10월 21일 변삼근이 가선대부 충자위 부사직, 중추부사로서 한성좌우윤을 지내고 형조참판 동지의금부사를 겸함. 卞三近 인조 19년 변창순 7월 20일 변삼근이 가선대부 한성부 우윤 겸 동지의금부사가 됨. 卞三近 인조 21년 변창순 변삼근이 가선대부 해주도호부사가 됨 卞三近 인조 25년 변창순 12월 3일 변삼근이 가선대부용야위 부호군이 됨. 卞三近 인조 26년 변창순 2월 변삼근이 의정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됨 孫在雲 1809년 손재운이 무과 병과에 합격됨. 2. 책자 1)文集 山康文抄 1957년 연구소 卞榮晩이 지은 210편의 詩賦 논설, 잡록, 편지 등 수록 窮集(朴奎文) 숙종 박노송 삼정동 출신 박규문이 혜릉 참봉때부터의 행장이 기록된 문집. 나의 祖國 1956년 외무장관이던 卞榮泰가 지은 해방 후 우리겨레의 주장을 반영한 책 외교여록 1959년 卞榮泰가 지은 외교관 시절의 회교록 樹州隨想錄 1954년 민경남 卞榮魯가 지은 수필집 조선의 마음 1924년 卞榮魯의 첫 작품집 3. 호패 현재 주민등록증과 같은 기능을 가진 신분증이다. 조선시대때 16세 이상 남자가 차고 다녔는데 호패의 착용은 호적법의 보조역할로 시행되었다. 그 목적은 호구를 명백히 하여 민정의 수를 파악하고, 직업, 계급을 분명히 하여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가장 중점을 둔것은 유민방지, 군역과 요역의 기준을 밝혀 백성의 유동과 호적편성상의 누락, 허위를 방지하고, 향촌의 안정유지 등을 통한 중앙집권을 강화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조선왕조는 태종 13년(1413) 9월에 처음으로 시행을 보게 되었는데 전기간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여러번 존폐의 역사를 거듭하여 그 중요한 시기만도 다섯차례나 실시되었다. 이와같이 호패제 실시가 때때로 중단되었던 것은 이의 실시에도 볼구하고 유민이 감소하지 않았고, 양인들은 호패를 받으면 과중한 각종 국역을 부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백방으로 호패받기를 기피, 심지어는 세력가에 위탁함으로써 양인의 수가 오히려 감소되는 현상을 보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위조패 무패 불개패 불각패 실패 환패등 호패법을 위반하는 자에 대한 치죄로 형옥이 번거롭고 이에 따라 민심이 소란한 점등을 들어 국가에 무익하다는 호패폐지론이 제기되었던 때문이었다. 이와는 달리 도적 및 백성의 유리를 방지할 수 있고 모든 백성의 신분과 직업을 밝힐 수 있으며 호구를 장악하여 군정을 확보할 수 있어 국가에 유익하므로 복구하여야 한다는 호폐실시론자들의 강력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다시 실시되기도 하였다. 호패는 왕족, 관인으로부터 양인, 노비에 이르기까지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패용하였는데 그 재료 기재내용, 각인의 위치, 주관관서, 발급순서 등은 신분이나 실시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이를 도식하면 <표>와 같다. ◎조선시대 호패일람◎
시기 제분류
전 기
후 기
1413년(태종13)
1419(세조5)
1685년(숙종11)이후
형 태
위근 둥글고 아래는 모남
上圓下方, 上下方
크 기
길이-3촌7푼, 너 비 -1촌3푼, 두께-2푼
길이-3촌5푼∼4 촌 너비-1촌1푼∼1 촌5푼
재 료
상아-2품이상 녹각-4품이상 황양목-5∼6품 자작목-7품이하 관원 잡목-서인이하
상아-당상관 목-당상관이하∼ 천인
상아-동서반 및 내관2품이상 각-3품이하, 잡 과 등제자 황양목-생원, 진 사 소목-잡직, 사서 인, 서리, 향리
현재 부천에 전하고 있는 호패는 제5차 숙종 1년(1675)11월 이후의 것으로 삼정동 밀양 박씨 가문과 약대동 전주 이씨 가문의 것으로 6개가 전하고 있다. 4. 탁본 탁본은 금석이나 기타 물체에 조각된 문자나 문양 등을 종이에 모인(8체의 하나로 옥 새 글자에 쓰는 고전)하는 일 또는 모인하는 것 자제를 이르는 말이다. 당대에는 타본 또는 탑본이라 하였고 송대부터 탁본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탁본이 시작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기록으로 보아 세종조 이전으로 보인다. 탁본은 습탁과 건탁의 두 종류로 구별되는데 습탁은 탁본하고자 하는 대상물체에 물로 종이를 밀착시킨 다음 먹물을 솜방망이에 묻혀서 그 위를 가볍게 두드리면 패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먹이 묻어서 패인 부분의 문자나 문양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고, 건탁은 대상물체에 물을 쓰지 않고 일정하게 굳은 먹을 종이 위에 문질러서 파이지 않은 부분에 먹이 묻게 하는 방법이다. 이 중 탁본의 주류는 습탁에 있고 습탁은 다시 오금탁, 선익탁, 격마탁으로 구분된다. 현재 우리 지역에서 탁본의 가치가 있는 비석은 다음과 같다. 오정구 고강동 소재 변종인 신도비문(卞宗仁 神道碑文), 소사구 계수동 소재 청편군 한언 신도비문(淸平君 韓堰 神道碑文), 청원군 한준 신도비문(淸川君 韓準 神道碑 文), 오정구 작동 여천위 민자방 묘비방문(閔子芳 墓碑銘文), 고강동 오정 변삼근사제 문(卞三近 賜祭文),작동 박처륜 묘비명문(朴處綸 墓碑銘文), 오정구 여월동 (李漢珪 墓碑銘文),고강동 수주 변영로 시비(卞榮魯 詩碑)등이 있다. 5. 기타유물 ① 증서 李昌鎬 고종 토목직인 이창호에게 준 대한제국 건국 기념 증서. 李昌鎬 일제시대 이창호가 받은 일제침략의 증서. ② 임명장朴濟煥 제2공화국 박제환이 받은 농림부장관 임명장. ③ 지정서 金章煥 1971년 김장환이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명인으로 지정된 지정서. 김장환이 전수하여 김박영과 김기흥이 제작한 활. ④ 족보 密陽卞氏 大同譜 淸州韓氏 大同譜 全州李氏(효령대군파) 大同譜 全州李氏(임영대군파) 大同譜 全州李氏(밀성군파) 大同譜 驪興閔氏 大同譜 竹山朴氏 大同譜 宜寧南氏 大同譜 德水張氏 大同譜 密陽朴氏 大同譜 (집필:부천역사연구소 최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