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증언하는 디아스포라의 비극
『검은 꽃』, 김영하, 복복서가
멕시코 이민사의 팩트에 픽션을 결합한 ‘팩션 소설’인 김영하의 『검은 꽃』은 다큐멘터리 필터를 가지고 있다. 인물과 사건이 허구 같지 않고 그보다 더한 실화가 존재했으리라는 추측과 공감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당연히 문학성도 겸비한다. 힘 있는 문체로 몰입과 울림의 매력을 발산한다. 김영하는 “만약 내 소설 중 단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단연 『검은 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이 책은 초판본 발간 다음 해인 2004년에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2020년 개정판이 나올 때까지 17년간 50쇄 가까이 판매된 베스트셀러이다. 1995년에 등단하여 1996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며 중견 소설가로 넓은 스펙트럼을 펼쳐온 김영하는 ‘1905년에 제물포를 떠나 지구 반대편의 마야 유적지, 밀림에서 증발해버린 일군의 사람들’에 사로잡혀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한반도에서 멕시코 유카탄반도와 과테말라까지 한인 이주 경로를 답사하며 이 소설을 집필했다. 작가는 『검은 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조선 점령을 목표로 일본이 열강국들과 전쟁을 벌이고 조선 왕은 무력하여 대응하지 못하는 암울한 정세 속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1033명의 조선인들은 1905년 4월 4일 제물포항을 출발하는 영국기선 일포드호에 탑승하여 멕시코 이민길에 오른다. 멕시코 이민사는 불운한 역사다. 대규모 계약 노동 이민으로 공지되었으나 사실은 이민 브로커와 일본 이민회사가 결탁하여 벌인 사기극이었던 것이다. 한인 이민자들은 멕시코 에네켄(애니깽) 농장에서 비참한 농노 같은 4년 계약 기간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자유인이 되었으나 벌어놓은 돈이 없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영원한 떠돌이 이민자가 된다. 『검은 꽃』은 무력한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디아스포라 난민들의 이야기이다. 디아스포라는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이다. 김이정, 조장윤, 이종도, 이연수 등 주요 인물과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디아스포라의 비극을 보여준다.
체제는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며 개인은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는가?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이 될 수 있다. 국가가 자국민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불우한 시대를 산 민중의 생존기를 통해 공동체와 구성원이 취하는 몇 가지 전형을 찾아보자. 미천한 고아 출신 김이정은 일포드호에서 영리하게 살아남아 에네켄 농장 노동자들에게서도 주도적 역할을 하다가 멕시코 혁명군에 가담한다. 과테말라 밀림에서 한인 병사 34명과 멕시코 정부군에 대치하며 소국 ‘신대한(新大韓)’을 세운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어. 왜놈이나 되놈으로 죽고 싶은 사람 있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이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차라리 무국적은 어때? 돌석이 말했다. 이정은 고개를 저었다. 죽은 자는 무국적을 선택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죽는 거야. 그러니 우리만의 나라가 필요해. 우리가 만든 나라의 국민으로 죽을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죽지 않을 수는 있어.(『검은 꽃』, 347쪽)
생사의 순간에 그가 원한 것은 국적이다. 없으니 만들겠다고 한다. 1년여 만에 정부군에 의해 소국은 붕괴되고 김이정도 죽임을 당했으나 그는무국적 외국인으로 죽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건국 모티브를 실행한 소영웅이다. 그에게 국가는 ‘생명’이다.
조장윤은 러시아 신식 군대에서 군사 지식과 훈련을 받은 군인으로서 마야인을 지배하는 군부 정부를 구상한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군의 공격을 받자 한인 용병들을 두고 도망치는 비겁한 면모를 보인다. 원주민들에게 속았다고 변명하며 한인 지도자로 연명하는 기회주의자인 그에게 국가는 ‘수단’이다.
고종의 6촌인 이종도는 시대착오적 공리주의자이다. 봉건적 신분제는 일포드호에서부터 붕괴되어 일가는 비참히 살아간다. 몰락한 양반으로 에네켄 농장의 노동을 거부하고 어린 아들이 벌어오는 식량만 축내며 무력하게 지내다가 고종에게 보내는 편지를 헛되이 작성하나 전달될 리 없다. 그에게 국가는 ‘허상’이다.
이종도의 딸 이연수는 환난을 만나며 세속적인 인물로 변한다. 연인 김이정과 헤어지고 권용준의 첩이 되었다가 남편 박정훈의 사망 이후에 고리대금업을 시작하여 베라크루스에서 유흥가 거물이 된다. 자선, 종교 같은 정신적인 삶을 버리고 물질의 화신으로 사는 그에게 국가는 ‘무의미’하다.
민족 수난 시절에 먼 곳으로 떠나 종적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성공한 듯하다. 멸망한 대한제국에 기댈 것 없는 슬픈 현실을 드러내면서 무력한 나라로 인해 겪어야 했던 민중의 고초를 한 권의 사진첩으로 엮어 독자에게 보여준다. 국가와 국민은 불가분의 운명 공동체임을 느끼게 하는 포인트가 문장과 행간 곳곳에 들어있다. 작가는 다양한 인물과 이야기를 엮은 디아스포라 문학의 정수를 제시하면서 나라에 버림받은 불행한 백성들의 잊혀진 서사를 기억하는 일이 우리의 몫임을 증언한다. 지금도 지구촌 어딘가에서 ‘힘없는 민간인 김이정, 이종도, 조장윤, 이연수’가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을지 모른다. 아쉽게도 『검은 꽃』이 작가의 노력만큼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으나 애니깽의 후손인 우리는 자유와 존엄의 가치를 생각하며 읽음직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