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안동·상주·진주를 잇는 선까지 진출한 인민군과 맞선 국군과 유엔군은, 8월 3일까지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한 뒤에 8월 4일 새벽 낙동강선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 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를 사수하기로 한것이다.
이 방어선은 연합군의 보급기지인 부산에서 마산·대구·영천·포항 등의 전방 지역에 이르는 방사형(放射形)의 병참선이 발달되어 보급과 병력 이동에 유리했고, 기동예비대를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자유자재로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역습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왜관 북쪽 작오산(303고지) 북단에 협조점을 설치하여, 그 남쪽 진해까지(X선)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주로 미군 3개 사단(제 24, 25사단, 제 1기병사단)이 담당하고, 왜관에서 포항까지(Y선) 중동부 산악 지대에는 국군 5개 사단(제 1, 3, 6, 8, 수도사단)이 배치되었다. 이때 남한은 영토의 90%가 이미 북한군 수중으로 넘어가 있었던 위기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낙동강 방어선에는 대한민국의 존망과 국민의 생사가 달려 있었다.
- 최후의 낙동강 방어선 -
한편, 인민군은 수안보(水安堡)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1개 전차사단과 9개 보병사단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으며, 미군 정면에 제 1군단(김웅), 국군 정면에 제 2군단(김무정)을 배치하여, 이른바 8월 공세(1950.8.4-8.25)와 9월 공세(1950.9.1-9.15)로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왔는데, 국군과 유엔군은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목숨을 건 처절한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9월 초부터 2주간 전개된 북한군의 공격은 너무 치열하여, 당시 발생한 인명 손실은 6·25전쟁 전 기간을 통해 단위시간에 발생한 손실 중 최고를 기록할 정도였다.
(1) 다부동 전투
다부동은 대구 북방 22㎞,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5번과 25번 도로가 합쳐지고 왜관에 이르는 908번 지방도로의 시발점이 되는 지점이다.
국군은 임진강을 넘고 한강을 넘어 이제 마지막으로 낙동강을 넘었다. 더 이상 넘을 강은 없었고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인 부산(釜山)만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방어선을 구축하여 대구를 방어하는 것은 부산을 방어하는 것과 같았다. 만일 그곳마저 잃어버렸다면 대한민국은 끝내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지형상 아군은 10㎞ 남쪽으로의 철수가 불가피해지고 대구는 북한군 공격의 사정권 내에 들어가게 되므로, 그야말로 다부동 방어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에 증강된 3개 사단(제 3, 13, 15사단)을 투입, 약 21,500명의 병력과 T-34전차 약 20대(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해 왔다.
국군 제 1사단은 보충받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한 7,600여 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가 전부였으니, 군사력에 있어서 절대 열세로 북한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병력 수에 있어서는 북과 남이 21,500 대 7,600(3:1)으로, 화기(火器) 면에서는 670문 대 172문이었으므로, 국군의 전력은 인민군에 비해 절대 열세였던것이다.
8월 13일 적군 제 3사단 일부병력이 328고지를 공격하고, 적군 제 15사단이 국군 제 12연대 보다 한 발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였으며, 적군 제 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의 제 11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미처 아군이 점령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하였다.
국군 제 15연대가 328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을 전개했고, 국군 12연대와 11연대는 유학산 837고지와 674고지의 탈환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제15연대의 328고지 전투에서, 북괴군은 남한에서 강제로 징집한 의용군을 제일 앞장세워 내 몰았다. 북괴군은 이들에게 강제로 술을 먹여 소총도 없이 수류탄만 주고 공격케하였는데, 이들이 죽을줄 알고 공격한것은 술을 먹은탓도 있었지만 다발총으로 무장한 독전대가 뒤에서 총을 겨누며 위협하였기 때문이다.
15연대 1대대 전방에는 1,000여구의 북괴군 시체가 널려있었는데, 이들의 수첩에 기록된 주소에 의하면 대부분이 남한에서 강제로 동원된 의용군임이 밝혀졌던 것이다.
특히 8월 15일 북한군 제 15사단에게 점령된 숲데미산(수암산) 탈환을 위해, 박기병 대령이 연대지휘소까지 부연대장 김점곤 중령에게 맡기고 대대지역에 나가 직접 전투지휘를 하였으나, 12연대 2대대는 무려 349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낼 만큼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유학산 일대의 싸움은 사격전보다도 휑한 돌산의 정상을 두고 수류탄이 모자랄 정도로 서로에게 수류탄을 던져대는 근접전투가 계속되어, 양 측은 3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대구 정면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미 제 8군 사령부는 낙동강 대안(對岸)의 적의 주력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8월 16일 오전 11시 58분, B-29 폭격기 5개 편대 98대가 26분 동안 무려 3,234발, 총 960톤의 폭탄을 쏟아부었다. 이것이 바로 북한군의 병력과 장비에 큰 피해를 준 B-29 융단폭격(Carpet Bombing)이다.
- 북한군의 독전대 -
그 후로 이 지역에서는 10년 동안 풀이 제대로 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 대구 공격은 신주막-다부동 축선으로 집중되어, 8월 16일 다부동 바로 서측을 공격함으로써 국군이 큰 위기에 놓였다. 8월 18일 새벽에는 대구역 부근에 박격포 사격을 가함으로써 대구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 충격으로 이날 정부는 부산으로 이동하라는 피난령을 하달했다.
국군 1사단은 위기 상황 타개를 위해 17일에 지원된 미 제 27연대와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와 관련해 이선교 著, 「6·25전쟁 막을 수 있었다」73-74쪽에 소개된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국군 11연대 1대대 김재명 소령 부대가 인민군의 공격으로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448고지도 빼앗기고 장병들은 고지에서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들은 아예 능선을 타고 다부동까지 도망쳤다. 인민군은 11연대 1대대의 뒤를 추격하여 다부동 능선까지 내려와 미 27연대 후방을 차단할 작전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미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은 공격하다가 순식간에 퇴로가 차단될 위험에 빠졌다. 그는 즉시 워커 장군에게 "한국 부대는 전의가 있는 것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좌측의 부대가 무단으로 퇴각하여 우리 연대의 좌측 배후에 약 1,000여 명의 북한군이 침입했다. 연대는 바로 퇴로가 차단되려 하고 있으며, 이대로는 이 이상의 방어는 불가능하다."라고 보고하였다.
백 사단장은 미 27연대가 다부동을 철수하면 인민군 13사단은 즉시 대구를 점령할 것인데 국군 1사단이 위기에 처할 거라고 판단했다. 그는 후퇴하는 장병들을 모아놓고 "장병 여러분, 여기서 물러나면 대구가 점령되고, 대구가 점령되면 부산이 점령되고, 그러면 우리는 죽든지 포로가 된다. 부산에서 죽을 바에는 여기에서 죽는 것이 낫다. 지금부터 사단장이 선두에 서서 저 산을 돌격할 것이다. 귀관들은 내 뒤를 따르라! 내가 선두에서 물러나면 나를 쏘아라! 그러나 귀관들이 후퇴하면 나는 가차 없이 귀관들을 쏠 것이다. 가자!"라고 하며 백선엽 장군이 앞장을 서자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들이 뒤를 따랐다. 장병들은 차마 사단장의 뒤를 따를 수 없어 앞을 다투어 448고지를 향해 돌격하였다.」
448고지를 점령하고 방심해 있던 북한군은 국군의 공격을 받고 전투 시작 30분 만에 도망치고 말았다.
12연대는 결사대를 편성하여 항공과 포병의 지원을 받아 공격을 계속한 결과, 마침내 23일 새벽 2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유학산 837고지를 탈환했다.
이렇듯 국군 1사단은 장교·부사관·병사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투혼을 발휘해 방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사단에서는 매일 평균 600-700명의 인명손실이 발생해 신병과 학도병을 보충했고, 1개 대대에 평균 50-60명의 노무자들이 배치되어 전투원의 식사를 준비하고 탄약과 기타 보급품을 지게로 최전방까지 운반하고 부상자를 후송했다.
(2) 기계-포항지구 전투
북한군 제 2군단은 제 12사단을 청송-안강-경주로, 그리고 제 5사단을 계속 포항 방면으로 투입시켜, 대구의 동부를 위협하고 부산으로 진출할 계획이었으며, 이때 국군 제 1군단은 수도사단을 기계 일대에 배치하고 제 3사단을 영덕 일대에 배치하고 있었다.
국군 수도사단과 제 3사단은 8월 5일부터 적의 대규모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수도사단 제 1연대, 제 18연대, 독립기갑연대가 의성 일대로 철수함에 따라 청송-기계 축선이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 공백을 이용하여 적군 제 12사단은 8월 9일 기계로 진출하였다. 기계는 도로상의 요지이므로 국군은 일대위기를 맞게 되었다.
한편 동해안 축선을 담당한 국군 제 3사단도 적군이 강구까지 접근해오자 제 23연대를 오십천 남안에 배치하여 전투를 계속하던 중, 8월 10일 저녁 흥해 남쪽의 냉천동 일대에 적 1개 연대가 출현하여 포항에 접근함으로써 제 3사단은 후퇴로가 차단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한편 8월 11일 포항 여자중학교(현 포항 여자고등학교)에 위치한 국군 제 3사단사령부에서 71명의 학도병들과 인민군 제 12사단 병력간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15:00시 까지 학도병들은 온갖 힘을 다해 저항하였으나 실탄도 없고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도병들은 그곳에서 새벽 4시부터 11시간 동안이나 격전을 치르는 동안 47명이 전사하였고, 14명은 부상당하여 적의 포로가 되었으며, 그 중에서 4명은 탈출하여 반격 작전에 참가하였다.
비록 포항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이들의 분투로 적의 포항 시내 진출이 지연되어 제 3사단 사령부와 기타 지원부대 및 경찰, 행정기관 등이 무사히 안전지대로 철수할 수 있었고, 특히 군 보급품을 손실 없이 후송할 수 있게 되어 차기 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적중에 고립되어있던 제 3사단은 육군본부로부터 해상철수명령을 받아, 8월 17일 아침 6시 30분부터 장사동에서 철수를 개시하였다. 제 3사단은 4척의 LST를 이용하여 사단병력 9,000여 명, 경찰 1,200여 명, 노무자 1,000여 명 등을 데리고 10시 30분까지 구룡포 일대에 철수를 완료하였다.
3사단이 철수할 무렵, 포항 남쪽에서는 민부대가 미군 전차소대의 지원을 받아 포항을 탈환하였으며, 작전간 포로 180명을 획득하고 야포와 박격포 53문 등을 노획하였다.
한편 기계 부근에서는 8월 18일 새벽부터 총공격이 개시되어 북쪽에서는 제 18연대가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면서 오후에 기계로 진입하였으며, 남쪽에서는 제 17연대 1대대가 시내로 돌입하여 잔적을 소탕하였다.
(3) 낙동강 돌출부(영산 돌출부) 전투
낙동강 전투에서 미군 방어지역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영산은, 행정구역상 경남 창녕군 영산면으로 굽이쳐 내려오던 낙동강이 서쪽으로 돌출해 마치 반도처럼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이 때문에 창녕과 영산 부근을 흔히 '영산 돌출부' 또는 '낙동강 돌출부'라고 부fms다. 인민군 입장에서는 여러 곳에서 동시 도하할 경우 포위 공격이 가능한 데 비해, 미군 입장에서는 방어정면이 37㎞에 이르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그 때문에 현풍에서부터 남지까지 방어정면을 미 제 24사단이 맡아, 북한군 제 4사단의 공세를 힘겨운 혈전으로 막아 내었다.
방어를 담당한 미 제 24사단은 제 34연대를 영산에, 제 21연대를 창녕에, 배속된 국군 제 17연대를 현풍에 배치하고, 제 19연대를 예비대로 창녕에 위치시켰다.
8월 5일 자정 무렵, 적군 제 4사단 16연대 주력이 오항 나루터로, 일부가 부곡 일대로 기습적인 도하 공격을 가해왔다. 이때 미군들은, 전황이 급하고 진지를 구축할 마대가 없어 전사한 군인들의 시체로 진지를 쌓아서 싸움을 계속하였다.
8월 10일에는, 새로이 배속된 미 제 9연대와 제 19연대 2대대로 적을 공격하여 오항 일대와 클로버 고지 일부를 탈환하였으나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한편 적군 제 4사단은 야간을 이용하여 오항, 박진나루 일대의 강물 속에 수중교 가설작업을 완료하고, 대규모의 병력과 전차 및 포를 도하시켰다. 사단장은 힐특수임무부대를 편성, 공격을 계속하였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대부분의 장교가 전사 또는 부상하는 등 전투력을 거의 상실하고, 오항 고지와 클로버 고지를 적에게 빼앗겼다.
이에 워커 장군이 강력한 예비대인 미 제 1해병여단을 제 24사단에 배속하여, 8월 17일 해병대 함재기 코르세어 전폭기 18대가 오봉리 능선을 강타한 가운데 공격을 개시하였다. 곧이어 해병 2대대가 공격, 1개 소대가 고지 정상에 진입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해병 제 2대대는 7시간의 전투에서 전투력 60%가 상실되었다.
이후 사단장은 전 부대에 공격명령을 하달하여 제 9연대가 클로버 고지를, 해병대가 오봉리 능선을 다시 빼앗았다. 적군 제 4사단은 처음으로 전차 4대를 투입하여 공격해 왔으나, 미군의 폭격기와 퍼싱 전차 등에 의해 파괴되었다.
기세가 꺾인 적군은 아군의 포격을 받으며 10여 명씩 무리지어 낙동강을 건너 철수하였으며, 결국 적군 제 4사단은 낙동강 돌출부에서 입은 타격으로 다시는 낙동강 전투에 참전하지 못하였다.
(4) 영천 전투
영천은 대구에서 34㎞, 경주에서 28㎞ 거리에 위치하여 영천을 중심으로 대구, 경주, 포항, 안동, 청송에 이르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만약 이 지역을 빼앗긴다면 국군 제 1군단과 2군단은 분리되고, 북한군이 대구로 진출할 경우 낙동강 방어선이 후방에서 무너지게 되며, 아울러 영천부터 경주, 부산으로의 통로가 개방됨으로써 부산이 일거에 무너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북한군이든 국군이든 영천은 사활을 건 한판 승부의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인민군 전선사령부는 1950년 9월 2일 전 전선에 걸쳐 공격을 명령하여, 인민군 15사단도 다부동 전투에서 공격이 여의치 않자, 작전을 변경하여 국군 제8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영천을 일제히 공격하였으며, 9월 5일에는 단숨에 중앙의 제 16연대, 3연대 1대대와 좌우측의 21, 5연대 등을 붕괴시키고 이날 오전 영천 동북쪽 고경면 단포동을 점령하였다. 9월 6일 새벽 3시에는 영천 시내 전체를 점령하고 경주 방면으로 진격해왔다.
전선 붕괴 직전의 위기에서, 유재흥 국군 2군단장은 즉시 군단 작전회의를 소집, 제 1, 6사단장 및 참모들과 대책을 논의하여 우선 국군 8사단을 영천 동남쪽 금호강변에 배치해 적군 제 15사단을 견제하고, 국군 제 1사단과 제 6사단에서 1개 연대씩 병력을 차출해 제 8사단에 배속, 제 7사단과 함께 영천을 공격하도록 했다.
- 맥아더장군과 워커장군 -
그러나 문제는 전차였다. 정일권 육군총참모장은 전차 1개 소대(5대)만 있다면 적에게 큰 위협이 되고 아군의 사기를 올릴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미 제 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과 미 제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협조하자 미군 측에서 "내일 아침부터 미군 전차 1개 소대가 지원할 것"이라고 통보해 왔다.
이렇게 영천이 돌파될 위기에 처하자, 워커 장군은 정일권 총장에게 '영천을 탈환하지 못할 경우 미 제 8군은 일본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다. 국군 2-3개 사단을 포함, 약 10만 명의 요인을 괌이나 하와이로 철수할 것이니 준비하고, 이 일은 극비로 해 달라.'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한국교회는 하나가 되어 구덕 운동장에 모든 선교사들, 목사들, 장로들, 성도들이 함께 모였다. 또한 많은 목사님들이 부산 서대신동 항성교회에 모여서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였다. 초량교회와 광복교회에서도 회개의 역사가 뜨겁게 일어났다.
9월 7일 새벽부터 국군 제 19, 21연대 등이 수차례 공격과 기습으로 큰 전과를 올리고, 다음날인 8일 오후 2시 45분 영천을 탈환했다. 이날 적의 돌파구 봉쇄를 위해 영천을 중심으로 적의 진출로를 따라 북쪽 제 21연대에서 남쪽 제 5연대까지 낚싯바늘 모양의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국군 제 2군단은 9월 10일부터 총반격 작전을 개시하였다. 영천 북쪽에서 제 19?21연대로 적의 후퇴로를 차단하고 남쪽에서는 제 5연대를 비롯한 총 5개 연대(제 8, 10, 11, 16)가 반격을 개시하였다.
이로써 5일 동안 차단됐던 영천-경주간 도로가 완전히 개통되고 영천 북쪽까지 밀고 올라가, 9월 12일 마침내 9월 공세 이전 8사단의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반면 북한군 제 15사단은 전사 3,799명, 포로 309명, 전차 5대 파괴, 장갑차 2대, 차량 85대, 소총 2,327정 상실 등 사실상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와해되고 말았다.
(5) 신녕전투
1950년 9월 6일 북괴군 제15사단이 영천을 점령하게 되자 북괴군 8사단도 아군 제6사단 정면에 주력을 투입하여 신녕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아군 제6사단은 신년 북쪽의 조림산과 화산동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전차 10대로 증강된 북괴군 제8사단을 맞아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으며, 사단 특공대는 3.5인치 로켓포를 활용 적전차 8대를 파괴하였다.
한편 북괴군은 유엔 공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주로 야간에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제6사단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북괴군 8사단은 신녕지구에서 큰 타격을 받아 전투력을 거의 상실하고 남아있는 병력으로 현 전선을 겨우 유지하는데만 급급하게 되었다.
(6) 낙동강 방어 전투의 성공요인
낙동강 방어 작전은 막강한 유엔 해·공군의 지원 아래 미 제 8군의 과감한 예비대의 투입과 역습작전을 수행한 것이 가장 큰 성공 요인이었다. 7월 중 근접지원 출격 대수는 4,349대였고, 8월 중에는 7,028대로 증가하여 1개 사단마다 일일 평균 40대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는 지상 최대의 작전이라고 불리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브래들리 집단군의 각 사단이 지원받았던 것을 능가한 것이었다.
해군은 함포지원 외에도 증원 병력 수송, 북한군 해상보급로 차단 등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미 제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위급한 전선을 현장방문하고, 덜 위급한 부대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돌파된 지역에 투입하는 과감한 역습을 통해, 마치 긴급히 출동해 불을 끄는 소방차와 같은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