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주 김반의 생애와 연산서씨의 열행
충남대학교 송백헌 명예교수
1626년(인조 4 丙寅)에 또 헌납에 제수되고 부교리를 거쳐 다시 이조좌랑에 전직해서는 ‘요행을 억제하고 옛날의 바른 도리’을 따라 행정을 집행하니 당시 이조(吏曹)에서는 ‘우리 낭관(郎官)의 체통을 세운 사람은 오직 김 아무개뿐이다’ 라고 했다. 이어 직강(直講)으로 교체되었다가 교리, 헌납에 각각 세 번씩 임명되었고 다시 이조좌랑으로 제수되었다가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다. 이때 임금이 강화도로 행차하게 되었는데 임금을 호종하는 체찰사(體察使)가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순시하도록 하였다.
1628년(인조 6 戊辰)에 조정에 돌아와 겸문학지제교(兼文學知製敎)로서 부응교(副應敎)에 승진되어 사간원 집의, 응교, 겸필선 종부사, 상의원 등 부서에 전임되어 정(正)의 직을 맡았다.
1629년(인조 7 己巳)에 사인 겸보덕에 제수되어 집의로 옮겼다가 목성선(睦性善)의 일로 대사헌 김상용 등과 함께 파직을 청하여 면직되었다.
1630년(인조 8 庚午)에 다시 집의, 응교에 제수되자 상소로 사직하고 사인(舍人), 전한(典翰)을 거쳐 집의로 옮겼다가 또 전한에 제수되었다.
1631년(인조 9 辛未)에 부친 사계의 상을 당하자 여막에 거처하면서 예제(禮制)를 극진히 하였다. 이 때 응교, 집의 사간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3년(인조 11 癸酉)에 사인, 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응교로서 소명을 받고 서울에 올라가 전한 겸보덕에 제수되었다.
1634년(인조 12 甲戌)에 여러 번 사인 응교, 전한이 되었고 그 사이에 장악원정의 자리에 앉기도 하였다.
1635년(인조 13 乙亥)에 사간(司諫) 사도감사(仕都監事)로서 통정대부에 승진하여 병조참지, 대사간, 동부좌부승지, 형조참의를 역임하고 1636년에 거듭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신병으로 사직하였으며, 그 해 겨울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이 때 조정은 오랑캐인 청나라와 화친을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들의 공갈에 겁내어 다시 사신을 보내어 수교하려 하자, 연소한 사론(士論)들이 연일 일방적으로 정부를 강력히 공척(恐斥)하였기 때문에 정부는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하였다. 허주는 이것이 매우 걱정스러워 주변 사람들에게 “예로부터 사론이 격화, 분열되고서 패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 그 조짐이 이미 보인다.”라고 말하면서 항상 대각(臺閣)에서 조제(調劑)하는 의논을 펼쳤던바 그가 예측한 대로 얼마 안 있어 오랑캐가 갑자기 쳐들어왔다.
허주는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 때 몇몇 흉악한 무리들이 성을 지키는 군사를 사주하고 조정을 위협하여 척화신(斥和臣)을 내쫓게 하니 묘당에
14)金尙憲., 贈領議政行吏曹參判金公 諱 槃 神道碑銘. 光山金氏虛舟公派譜.
15)김상헌 신도비명, 광산김씨 허주공파보.
16) 조선왕조실록, 영인본 34책 P. 355
17) 사헌부와 사간원의 이칭
18) 김익희, ‘가장’ 같은 책. PP. 149-150
서 드디어 크게 수색을 벌여 앞서 연소한 사람으로서 격렬하고 분열된 의논을 벌린 사람 중에는 처벌을 모면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남한산성은 그 얼마 후에 고립되면서 곧 함락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인조에게 주청하기를 “몸소 성에 올라 네 벽[四壁]의 모든 장수를 독려 격전하신다면 거의 사지(死地)에서도 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요, 만약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군신 상하를 막론하고 함께 사직(社稷)에 죽는 것이 옛 의리입니다.”라고 했다.
1637년(인조 15 丁丑)에 화친이 이루어지자 그는 인조를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3월에 대사성이 제수되고 여름에는 조정에서 호종한 여러 신하를 포상하여 그는 가선대부에 승진 대사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변란 때 여러 장수 중에서 머뭇거리거나 도망친 사람은 모두 훈구거실(勳舊巨室)이었는데 그 처벌이 유배(流配)에 그치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은 의논이 정지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처사를 보고 분개한 허주는 대사간직을 사면하고 아뢰기를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군법이 엄격하지 못한 데서 연유된 것입니다. 당초 큰 군사를 맡은 사람이 적을 놓아주고 임금을 저버려서 어두운 밤 외로운 성에서 환란이 조석에 박두했는데 군사로서 자신만을 호위하고, 위급한 성에 와서 후원하지 않았으며, 강도(江都)에서 일을 맡은 신하는 변란이 임박하자, 도피하여 종묘사직을 도탄에 빠뜨리고 민생을 짓밟았으니 그의 죄상은 머리카락을 뽑아도 수를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몇몇 사람은 나라를 이처럼 저버렸는데 오히려 사형에 모면되었으니 천하고금에 이러한 법은 있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어 대사성, 공조, 예조참판에 제수되고 여러 번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며 곧 이조참의에 옮겨졌으나 모두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다시 대사간 대사성에 제수되고 예조참판으로서 동지경연을 겸직하였으며 병조참판으로 전보되었다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