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외출
(홍콩, 마카오, 심천 여행기)
정재연
이른 새벽 남편과 나는 그 동안 준비해 둔 짐을 들고 아이들이 선잠을 깰까 조심하면서 집을 나섰다. 며칠 간 바삐 여행 준비를 해 두었던 것이다. 먹을 음식과 약간의 용돈을 아이들에게 미리 주었다. 등교시간에 맞춰 일어나게 시켰지만 걱정은 좀 되었다.
공항청사에 들어서자 벌써 많은 중 노년층들이 크고 작은 캐리어백을 끌고 가이드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 빙 둘러 서있는 모습이 곳곳에 띄었다. 우리 일행도 부석부석한 모습으로 긴 의자에 앉아 안내인을 기다렸다. 카키색 바바리를 입은 청년이 여행사에서 나왔다면서 몇 가지 서류가 든 푸른색 투명 지퍼 백을 나눠 주었다. 그것에는 항공권과 출국 신고서, 비자, 주의 사항 등이 들어 있었다. 분주한 우리들과 달리 외국인들은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대조를 이뤘다. 남편들이 홍콩과 US달러 위안화로 환전해 왔다. 처음으로 국제선 비행기를 탄다고 생각하자 기분은 들떴지만 '하이잭킹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든 것이 사실이었다. 맨 먼저 아이들 걱정이 되는 것은 다 같은 부모 된 입장일 것 같았다.
세련된 승무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비행기 출입구에 서비스로 놓여 있는 신문을 몇 개 들고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우리가 앉은 좌석은 비상구가 있는 가운데 자리로 공간이 넓어 다리를 주~욱 뻗을 수 있어 좋았다. 가끔 창문을 내려다 본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하고 우리가 탄 비행기는 그 위를 지나는 중 이었다. 굉장한 풍경이 보일 줄 알았지만 조금은 실망이 되었다. 홍콩으로 가는 중이므로 남으로 계속 내려가는 것 같았다. 가는 도중에 비행기에서 턱턱 소리가 났다. 마치 육지에서 달리는 차량이 돌부리에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또, 태풍이 오면 바람소리가 시끄럽거나 물건들이 부딪히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들이 들렸다. 그러자 기장이 안내 방송을 하며 위로했다. 그럴 경우에는 기내가 조용해 졌다. 모두가 위협을 느끼는 모습 이었다. 홍콩 섬이 가까워지자 푸른 모습들이 간간이 나타났으나 공항에 내리는 순간 콘크리트 벽들이 앞을 가렸다. 항만 시설들이라고 했다. 그 때가 3월 초인데도 그 곳은 무더웠다. 우리들은 로비로 나오자마자 화장실로 가서 반팔 옷으로 갈아 입었다. 마치 컨베이어벨트를 지나는 가방들처럼 우리들도 가만히 바를 잡고 서 있으면 입국 심사소에 닿았다. 여행객의 대부분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라 그 곳 현지인들이 한국말을 잘 하는 것을 보고 의아하고 가슴 뿌듯했다. 예전에는 홍콩을 찾는 관광객의 구십 퍼센트 정도가 일본인들이었지만 지금은 한국인들이 그 자리를 메워 나간다고 했다. 외국에 나와서 비로소 우리나라의 국력을 실감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영국의시인 바이런이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해져 있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곳에 근무하는 오십 대 후반의 가이드가 버스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후덥지근한 물때 냄새가 났다. 가이드는 여기는 섬이라 습기가 많아서 그런 냄새가 난다고 했다. 또한 운전수가 제일 신경 쓰는 것이 곰팡이냄새를 없애기 위해 향기 나는 스프레이 뿌리는 일과 버스 도색이라고 했다. 도시를 돌아보는데도 건물들이 낡고 오래되어 볼품없었다. 안개가 며칠 외에 일 년 내내 발생하기 때문에 페인트가 잘 벗겨져서 아예 색칠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로수도 거의 없는 곳이 많았고 황량하고 그곳에 오래 살면 정신이 메마를 것 같았다. 거리의 인파는 거의 볼 수 없었다. 간혹 보이는 사람들 중에는 팬티만 입은 남자 몇몇이 좁은 거리를 조깅을 하고 있었다. 낮에는 더워서 활동을 할 수 없어서 집에서 시원하게 자고 밤에 많은 사람들이 활동을 한다고 했다. 집집마다 에어컨이 서너 대씩은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홍콩은 물 값은 최고 비싸지만 전기료는 공짜라고 한다. 전기는 중국 본토에서 무료로 보내주는 까닭이다. 그러나 섬 전체가 바위로 되어 있어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담수화시설을 하여 물을 공급한다고 했다. 텔레비전이나 엽서에서 보던 영국식 2층 빨간 버스들이 달리는 거리에는 유난히 붉은 색 차가 많았다. 택시들이었다. 택시도 빨강 노랑 파랑으로 구분되어져 있고 색깔별로 거리를 제한해서 구역을 침범 못하게 정해져 있다고 했다. 번호표가 유난히 긴 차량들이 눈에 띄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그런 차량의 소유주들은 부자들로서 그 번호판을 받기 위해 공개경쟁입찰을 하여 기부금을 엄청 많이 내었다고 했다. 그래서 홍콩에서는 우리나라 부자들과는 달리 존경을 받는 분위기라고 했다.
저녁식사 때에는 사천요리를 맛보기 위해 한 음식점에 들렀다. 둥근 식탁에 우리 팀 전체가 앉아서 식사를 했다. 회전식으로 되어 원하는 요리를 작은 접시에 들어 먹었다. 뷔페처럼 큰 그릇에 한꺼번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닭 뼈 고은 것처럼 고소하고 흐물흐물한 것과 소금 외는 양념이라곤 전혀 하지 않은 배추 삶은 것 안남미를 볶은 쌀밥…. 정말 우리 입맛과는 맞지 않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해외에 나온 기념으로 먹어보는 것도 괜찮다고 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식당 안은 넓었지만 깨어진 접시들이 많았다.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라 그것이 전통이라고 하는 데야 할 말이 없었다. 자연스런 그들의 문화라고 했다. 해안가로 이동을 했다. 우리나라의 간척지처럼 그 곳에서는 바닷가에 침목을 박아 테라스처럼 꾸며서 밟고 다닐 수 있었다. 근처에는 이소룡의 무술 동작이 동상으로 세워져 있었다. 포장된 바닥에는 이연걸, 성룡, 이소룡 등 홍콩스타들의 손바닥 도장들이 찍혀 있었다. 참, 이곳이 스타의 거리라고 했다. 이곳에는 인공으로 세워진 나무들이 서 있었다. 꽃이 노랗고, 빨간 것이었다. 꽃 모양은 우리나라의 아카시아를 닮았다. 다시○○절로 향했다. 바닷가에 있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역사가 오래되어 유명하며, 동전을 물속에 던지고 부자가 되도록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했다. 일행 중에서 부동산으로 부자가 된 부부가 그곳에 가서 절을 하는 것 같았다. 시의원으로 출마를 생각한다고 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를 빈 것일까? 우리나라의 암자 같은 곳이지만 이들은 관광코스에 넣어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그 후 재래시장 쇼핑을 했다. 물건마다 계산기로 환산을 해 봤다. 거의 다 우리나라에서 사는 것이 싼 것 같아서 사지 않았다. 그러나 넥타이가 한 개에 900원 밖에 안 된다면서 열 개를 산 사람이 있었다. 저녁에는 야경을 보기로 했다. 홍콩에서는 꼭 야경을 봐야 진짜 관광을 한 것이라고 했다. 아홉 시 경 버스를 타고 고불고불한 고개를 올랐다. 제법 긴 거리였다. 옥천의 말티 고개 같았다. 꼭대기의 산장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가지각색의 불빛과 건물들이 번쩍거리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낮의 볼품없었던 모습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야경은 아름다웠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겨드랑이를 끈적거리게 했지만 산 정상이라서 그런지 바람이 불어와 태풍이 올 전야처럼 느껴졌다. 바로 옆에는 홍콩인이 '컴퓨터 사진을 찍어라' 고 영어로 부추겼다.
일본의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사람 몇몇이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보였다. 컴퓨터에 내장 된 배경에다 사진과 합성을 해서 한 장 당 우리나라 돈 만원이라고 하니 비싼 것 같았다. 우리들은 들고 간 카메라로 열심히 찍었지만 잘 나올지 의문이었다. 가는 곳 마다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그 곳도 우리나라 사람 일색이었다. 간혹 서구인들이 가뭄에 콩 나듯 했다. 이곳은 홍콩의 부호들과 성룡 같은 스타들의 별장이 다 모여 있다고 했다. 평지의 무더운 날씨와 비좁고 지저분한 환경에 비해, 산꼭대기는 때때로 쾌적하고 밤늦도록 댄스파티를 즐겨도 시비하는 사람이 없으며, 낭만을 즐길 수 있는 금상첨화의 적지라고 했다. 우리나라와 정반대되는 생각이라서 어리둥절했다. 그 곳에서 내려올 때는 계단식무게차를 타고 순식간에 내려왔다. 그 차는 우리들이 앉은 상태에서 그대로 뒤로 내려왔다. 어지럽지도 않고 신기했다. 야경을 보면서 올 수 있어 좋았다. 기차의 앞뒤에 운전수가 있어서 오르내릴 때 교대로 운전을 한다고 했다. 운전이래야 자동차의 기어 넣듯이 한 번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곳 홍콩에 와서 느낀 점은 우리나라의 관광정책의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풍광을 보는 것에서 벗어나서 이런 시설도 설치했으면 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시내에는 한 달 전 해외 토픽에 난 아파트가 있다고 했다. 습기가 많은 관계로 한 노인이 화장실에서 신문을 보면서 일을 보다가 건물 전체의 반이 무너졌으나 그 노인은 가까스로 살았다고 했다. 이렇게 볼품없는 곳에 수많은 관광객을 모은다는 것이 정말 부러웠다. 세계의 대기업들이 다 모여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삼성과 엘지가 파낙소닉 필립스 등의 건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러나 그들 건물보다 약간 낮아 안타까웠다. 세계의 명품이 다 모인 곳도 이곳이라고 했다. 아이쇼핑만 하고 돌아섰지만 가이드의 끈질긴 쇼핑 소개는 계속되었다. 여기는 보석이 비과세이므로 우리나라 보다 40% 싸다고 했다. 옥이 건강상태를 체크해 준다고 해서 옥팔찌를 한 개 사 보려다 말았다. 보석가게에 가면 의례 자수정 덩어리를 볼 수 있었다. 컴퓨터 화면만 한 크기의 자수정들이 모인 조합이었다. 참 아름답고 신기했다. 그 곳도 한국인 직원들이 배치되어 전혀 의사소통에는 지장이 없었다. 우리 팀은 물건을 거의 사지 않아서 가이드에게 미안 했다. 나는 외국에 가면 물건은 거의 사지 않는다. 왜냐면 달러 벌려고 뛰어다니는 기업들을 생각하면 쓰고 싶은 마음이 없다. 또한 요즘은 우리나라 물건이 더 싸고 품질이 우수해서 사고 싶지 않았다.
이틀째 되는 날은 중국 심천(선전-중국어)으로 가기 위해 전용버스를 탔다. 가는 도중에 밖을 내다보면서 가이드의 연음적인 안내방송이 이어졌다. 그 곳에서도 중국 큰 손들이 아파트나 건물들을 통째로 사들여 값이 폭등했다고 했다. 특이한 것은 희끗한 비석들이 아파트 바로 옆에 계단식으로 늘어서 있었다. 홍콩인들은 조상들이 자신들을 잘 보살펴 주기 때문에 묘지를 혐오시설로 생각지 않고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파트값 내린다고 시위하는 일은 전혀 없다고 했다. 사람의 생각의 차이가 이처럼 조화로운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놀랐다.
한 여학생의 안내를 받아 홍콩에서 기차를 타고 네 시간을 가야 중국 심천역이라고 했다. 그 곳에서는 노약자에게 양보란 없었다. 우리는 맨 뒤에 한 곳에 모여 앉았지만 초등생으로 보이는 한 남자 아이는 가는 동안 계속 서서 문제를 풀고 있었고 한 노인과 남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단잠에 빠져 끄덕이는 우리를 힐끔 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눈을 뜨고 있었다. 또, 가이드가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줬기 때문이다. 중국에 도착한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여행객들을 배려하려는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가파른 계단 한 옆을 편평하게 되어 캐리어백을 끌고 가기 수월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한두 곳 본 적이 있었지만, 요즈음은 워낙 무거운 짐을 들고 가거나 여행객들이 많아 모든 계단에도 이 같은 시설을 했으면 싶었다.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데리고 온 여학생은 인사를 하며 떠나고 대신 삼십 중반쯤 되어 뵈는 가이드가 우리를 인솔해서 전세버스에 올랐다. 심천 시내를 관광하는데 광활한 아파트와 각종 건물들, 질서 정연하게 세워진 정원수와 복잡하지 않으면서 쾌청한 날씨가 홍콩보다 훨씬 좋았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창원처럼 계획된 도시 같았다. 낙후되었던 도시가 불과 십년 사이에 이렇게 변했다고 한다. 그것은 오로지 비즈니스를 위해 홍콩에 머무는 세계인들을 끌어들여 달러를 벌기 위한 도시라고 했다.
주말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했다. 그곳은 홍콩과 마주보는 항구도시였다. 개혁개방 전에는 중국인들이 자유와 부를 찾아, 홍콩으로 가기 위해 가시철조망을 넘다가 군인들의 총격을 받으며 헤엄쳐 갔다고 했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변해서 지금은 역전이 되었다고 했다. 자연히 그들을 통제하던 것은 사라졌단다. 가이드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곳은 꼴값 떠는 도시입니다. 명품을 갖고 다니지 않으면 사람대접을 못 받아요. 중국에서 잘 생긴 여자들은 전부 다 모였어요. 머릿속에 든 것과는 아무 상관 없습니더. 나중에 한 번 보이쇼. 인플레가 심해서 아파트가 몇 배씩 오르고 주로 스물다섯 살 이하의 여자들이 거주하며 그 이상의 나이가 되면 퇴출입니더. 저는 조선족 동포입니더. 말씨가 북한의 영향을 받아서 좀 투박합니더. 이해 해 주이쇼." 했다. "제가 사는 곳은 연길인데 대륙 안으로 들어가면 너무나 못 삽니더. 비참합니더. 저는 4년째 고향을 못 갔어요. 기차를 타고 꼬박 4일을 가야 합니더. 먹고 살려고 하다 보니…, 보이쇼 저도 구찌 가짜 명품 들고 다닙니더. 진짜인지 검사하는 것도 아니고, 참…." 우리나라 경상도 특유의 말을 하는 것으로 봐서 일제 때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경상도조상을 둔 것 같았다.
모조품과 중국에 사는 소수민족들의 생활풍습을 한곳에 모아 두었다. 다 보려면 두 시간 반이 걸린다고 해서 우리는 도로를 달리는 장난감 기차 같은 것을 타고 이동하면서 사진도 찍었다. 현지인들이 이곳을 오려면 입장료가 한 사람당 육 만원이나 된다고 한다. 그것은 형편이 되는 사람만 와서 구경하라고 하는 정부의 방침이라고 했다. 체제가 다른 우리와 대조를 이뤘다. 우리나라라면 차별한다고 야단일 것이다. 날씨는 좀 더웠지만 홍콩보다는 시원했다. 우리는 기념품점에서 쇼핑을 하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가격이 천차만별이고 물건은 같았다. 중국에서는 관광객은 달러였다. 철저히 쓰고 가게끔 되어 있었다. 저녁에는 큰 극장에서 쇼를 관람했다. 그렇게 큰 극장은 처음 봤다. 외국인을 위한 극이었으나 중국의 삼황시대와 전설과 소수민족들의 연이은 극이 펼쳐졌다. 화려한 갓과 흘러내릴 듯한 옷으로 치장한 여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구려 시조를 그들의 조상인 것처럼 묘사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나중에는 조선족이 색동저고리를 입고 아리랑에 맞춰 춤을 추니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고 함성을 질렀다. 가방을 조심하라는 가이드의 말을 들으며 손으로 꼭 잡고 다녔다. 그 후 저녁을 먹고 불 쇼를 본다며 야외극장으로 안내 되었다. 구덕운동장만 한 곳이었다.
마치 미국의 인디언 과 큰 바위 얼굴을 연상하는 세트를 설치해 놓고, 석유냄새가 나는 불덩어리를 쏘아 불을 붙이더니 이곳에서도 신화라든가 풍속 무술 등 중국 고대사에 대한 레퍼토리였다. 그 후에는 냄새나는 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전반적으로 유치했지만 화려하고 규모가 굉장히 컸다. 관광지이지만 상인들에게는 간단한 영어도 통하지 않아서 일일이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도 신뢰가 없는 것 같아 아쉬웠다. 그들은 우리가 달러로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호텔의 시설은 수준급이었다. 나도 많이 다녀 보진 않았지만 풍광이 좋은 곳에 잘 갖춰져 있었다. 뷔페에는 김치가 항상 있었다. 그 곳 프런트에서는 달러로 위안화를 바꿀 수는 있어도 위안화로 달러를 바꿔 주지 않아서, 서투른 영어로 물었더니 방침이 그렇다고 해서 황당했다. 은행을 가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호텔도 달러벌이만 하였다.
중국에서의 가이드와 작별하고 마카오로 가기위해 여객선 터미널에 갔다. 비가 와서 춥고 쌀쌀했다. 바람도 많이 불었다. 배를 타기 전 홍콩영화에 자주 나오는 영국식 건물이 눈에 띄었다. 접시모양으로 된 베란다에 꽃들이 놓여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출입국 관리 직원들은 딱딱했다. 남편이 빠른 편의를 위해 허락 없이 옆줄로 가자 검지로 지적을 하며 한참 동안 기다리게 한 후에 통과시켜 줬다. 그들의 방식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던 배를 타고 마카오로 향했다. 그 곳에서 한 시간 반을 타고 가야 했다. 한참을 가자 말뚝이 몇 개 보였다. 마카오가 가까웠다는 징후였다. 파도가 산맥을 이루었다가 흩어지곤 했다. 흙탕물만 보이는 바다가 지겨웠다. 오직 우리가 탄 배만 있을 뿐이었다. 푸른 바다와 흰 잔물결이 그리웠다. 고둥과 파래가 붙어 있는 바다와 갯벌이 눈에 선했다.
드디어 마카오에 닿았다. 오십 대 후반의 가이드는 친절하고 싹싹했다. 오자마자 지갑을 잘 챙기고 도박장에는 소개하고 싶지 않다고 하며 사모님들께 지갑을 다 맡기라고 남편들에게 말했다. 제 발로 들어와서 제 발로 못 나가는 곳이 이곳이란다. 깡통 찬 사람들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중국인들은 통이 커서 한국인들이 상상도 못 할 몇 백 억씩 가져와서 알거지 된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현지인들도 도박을 하다 전 재산 다 날리고 사니까 중국 정부에서 그들에 한해 아파트를 지어 주고 한 달에 삼만 원 정도만 내고 평생 살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고등학교까지 학비도 무료라고 했다. 현지인의 수는 이 만 명 정도라고 했다. 그들은 주로 도박장이나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며 외국인 수가 훨씬 많다고 했다.
이곳도 낮보다는 밤에 활발한 문화였다. 환락가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 같았다. 보이는 것 마다 번쩍거리는 테두리를 하고 저마다의 특색을 뽐내며 사람들을 유혹하는 도박장들. 여기도 명품만 파는 고장이었다. 우리는 주로 보기만 했다. 이곳은 포르투칼인들이 이룩해 놓은 도시라고 했다. 그러나 홍콩의 영국인만큼 대접을 못 받는다고 했다. 업적이 없기 때문이란다. 온 도시가 도박꾼들의 천국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중에서 베네치아 호텔이 제일 컸다. 이탈리아의 베니스처럼 수로를 만들어 곤돌라 배들이 드나들고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도 방영했다고 하며, 건물 내에 있는 하늘의 별자리들은 낮인데도 저녁 무렵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호텔이 하나의 우주처럼 느껴졌다. 너무 많은 인파 때문에 잊어버리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기에 꼭꼭 붙어 다녔다. 다음 날은 세계사에 나오는 마테오릿치 신부가 지었다는 불타버리고 한 쪽 벽면만 남은 성당 광장으로 갔다. 식민지 시절 건물들이 그대로 전시 되고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정원이 비스듬히 누워 있엇다. 많은 인파들이 셔터를 눌렀다. 옛날 그대로의 포르투칼식 빵집이 유명하다고 해서 사먹기도 했다.
여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남자들은 여기까지 왔으니 도박게임을 해 보는 것도 추억이라며 위한화나 마카오 달러로 환불해서 게임기에 앉았다. 처음에는 60달러까지 올라가더니 결국 한국 돈 한 삼만 원 되는 돈 다 먹어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붙어 있는 것을 볼 때 한심했다. 밤에는 좋은 구경거리가 있는 호텔로 안내되었다. 남자 두 명이 만담을 하더니 우리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돔 같은 천정에서 수많은 황금빛 동전들이 머리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뜬 호랑이가 마치 나에게로 뛰어 들듯이 달려 왔다. 용이 날아오르기도 했다. 3D화면이었던 것 같았다. 또 어디론가 따라 갔다. 분수가 무지개 빛깔로 오르내렸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부산의 다대포 분수 쇼 보다 못하다' 고 했다. 우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찬란한 불빛에 둘러싸인 호텔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궁전의 첨탑처럼 된 아라베스크 양식의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이튿날에는 집으로 오기 위해 전세버스를 탔다. 그 곳에서도 운전수와 가이드의 상품을 사야했다. 나중에 슈퍼에 가서 값을 봤다. 배는 비싼 값에 산 것 같았다. 지갑을 끝까지 털리고 왔다. 심천과 마카오에서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지만 모양이 같은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정부의 정책으로 특징 있게 지어야 된다고 했다. 건물이 성냥갑 같은 우리나라도 정책입안에 반영했으면 생각했다.
한 번은 가도 두 번 갈 곳은 아닌 것 같았다. 중국의 거대한 힘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아 착잡했다. 하필 우리나라 바로 옆에 이런 강대국이 있다니 옛날처럼 조공을 바쳐야 될까봐 걱정이 앞섰다. 떠날 때 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 왔다.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와 후손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단결된 힘과 인재를 양성하여 경제대국이 되는 것이다. 전 세계를 움직이는 영국이 결코 큰 나라는 아니지 않은가? 또, 자연 환경에서 어느 나라보다 뒤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시사철과 다양한 생물군은 우리의 경쟁력이다. 점점이 펼쳐진 소나무 군락과 주상절리의 빼어난 절벽들은 우리나라의 자랑거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해외 여행시 우리들의 가방은 왜들 그리도 큰지…. 혼자 다니는데도 대형 캐리어와 쇼핑백을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쩔쩔매는 이들이 많았다. 서양인들은 거의 배낭 한 개 달랑 메고 다녔다. 역발상적 관광 정책을 펼쳐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이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