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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여행 1박2일(2015년 5월 21일~22일)]
[대마도 여행 전 일정]
●1일: [07:30] 부산국제여객터미널 2층 '코비' 앞→ [09:00] 출국→ 히타카츠항 향발(70분소요)→
[10:10] 히타카츠항 도착 후 관광 [1. 미우다 해수욕장 2. 한국 전망대와. 조선역관사 조난 위령비
3. 에보시다케 전망대 4. 와타즈미 신사 5. 만관교(만제키바시)]→ 이즈하라→ 석식(BBQ) 후 호텔
●2일: 이즈하라 시내관광[1.수선사(최익현 순국비) 2. 나카라이 기념관 3. 팔번궁신사 4. 조선통신사비
5.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팀 구성]
이번에는 백두산보다 조금 많은 13명으로 우리 팀이 가장 많은 7명이고, 장인 장모를 모시고 온 젊은 부부 그리고
동네여자친구와 함께 2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워낙 짧은 일정이지만 즐겁게 잘 지냈다.
[여행 목적]
본래는 신안군에 있는 흑산도를 갈려고 했던 여행인데 사정이 바뀌어 대마도를 가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짧은 시간에 갈 수 있는 해외여정이고, 일정도 가장 짧은 1박 2일이다.
[1일] 15년 5월 21일 목요일
●일정: 부산→ [07:30] 국제여객터미널 2층 '코비' 카운터 앞→ [09:00] 출국→ 히타카츠항 향발(70분소요)→
[10:10] 히타카츠항 도착→ 1. 미우다 해수욕장→ 2. 한국 전망대와 조선역관사 조난 위령비
3. 에보시다케 전망대 4. 와타즈미 신사 5. 만관교(만제키바시)]→ 이즈하라 항구→ 석식(BBQ) 후 호텔
<대마도와 이즈하라 여행일정 지도>
[히타카츠 항구를 향하여]
이것도 해외여행이라고 새벽 4시부터 설치고 부산으로 향했는데 이즈하라 항구로 가는 것으로 착각하여 일정표도
그렇게 만들었는데 요사이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 조금 걱정이 됐네...
배를 타고 외국을 나아가는 것은 여행사상 이번이 처음으로 좀 특이하게 느껴졌는데 부산항대교 밑을 지날 때는
좌우로 뛰어다니며, 사진 찍기에 바빴으며, 부산의 상징인 오륙도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다.
등대가 있는 것도 처음 알았고, 이제는 바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으며, 날씨도 좋고 바다도 잔잔해서
배의 요동도 없었고, 멀미 또한 없이 잘 갈 수 있는 것이 감사했으며, 얼마가지 않아 육지가 보였다.
이곳이 말이 서로 바라보고 있다는 뜻을 가진 대마도인데 이렇게 가까운 대마도가 먼 일본 땅이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으며, 어쩌다가 우리 것으로 못 만들었는지 조금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입국수속을 밟는 장소가 협소하여 조금 지루한 수속을 마쳤으며, 대마도에서 2번째 큰 항구가 생각보다 작고
인구도 많지 않았던 것이 의외이었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미우다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오륙도(五六島): 이 섬은 동쪽(해운대달맞이고개)에서 보면 6개 섬으로 보이고, 서쪽(영도)에서 보면 등대섬이
안보여서 5개 섬으로 보여서 오륙도로 불린다고 지명의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밀물 때는 육지에서 가까운 방패섬과 솔섬이 2개로 보이고, 물이 빠지는 썰물 때는 1개의 섬으로 보여 우삭도라
했는데 이래서 오륙도라는 기록도 있으며, 나머지 4개는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이다.
이 오륙도는 월남 전쟁 때 고국을 뒤로하고 전장으로 떠나는 군인들에게는 특별한 추억을 남겼던 섬이기도 하다.
<1. 부산항대교 0-오륙도 해맞이공원 1-방패섬, 2-솔섬, 3-수리섬, 4-송곳섬, 5-굴섬, 6-등대섬>
[미우다 해수욕장으로]
차에서 맨 처음 들은 이야기는 일본의 차들은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어 차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길을 건널
때 우측에서 차가 오기에 안전에 조심하라고 하며, 외국과 한국의 해수욕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일본에는 큰 섬 4개와 작은 섬 6853개로 이루어졌기에 해수욕장도 엄청나게 많으며, 그 중에 100선을 뽑을 때
들어간 곳이 이 해수욕장이지만 한국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은 해수욕장이 아니고 온천이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일본에 와서 놀라는 것 중에 하나가 횟집이 없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한국 사람들은 활어를 좋아
하고, 일본사람 95%는 선어(鮮魚)를 좋아하기에 수요가 없어서 횟집이 없다고 한다.
활어(活魚)는 수족관을 갖춘 횟집이 필요하지만 죽은 생선을 숙성시킨 선어(鮮魚)는 횟집이 필요 없기 때문인데
일본에서 회가 비싸다고 하는 것은 선어가 아니라 활어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선어는 죽었다 깨어나도 비싼 값을 받을 수가 없다고 하고, 일본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모르는 것은
괜찮지만 잘 못 아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고 한하며, 편견을 갖지 말라고 한다.
<1. 미우다 해수욕장과 바위 2. 해변에 있는 화석 같은 바위>
[미우다 해수욕장 탐방]
거리가 이렇게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지 못했는데 10분 만에 주차장에 들어섰고, 차에 오를 때 꼭 모래를 털라는
부탁과 함께 차에서 내려 각자 흩어졌으며, 밀물 때이라서 바위는 섬이 되어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 갈수가 없었지만 섬 같이 보여서 그런대로 더 예뻐 보였으며, 우리일행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나니 더 할 것이 없었는데 주위에 있는 바위가 나무화석 같이 예뻤다.
인터넷에서는 대마도의 자랑거리이고, 비취빛 바닷물과 자연경관이 동남아휴양지를 연상케 하는 해수욕장으로
수영을 하지 않아도 휴식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했으나 별로였다.
주차장에서 가벼운 먹을거리를 파는 봉고형의 소형차가 캠핑카로 사용해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구조를
구경했는데 앞엔 폭스바겐 마크가 있는 것을 보면 차 값은 비쌀거 같았다.
차를 타고 식당으로 향하면서 가이드는 이 해수욕장은 먼 곳에서 봐야 제격이라고 하면서 아마도 먼 곳에서
본 경치 때문에 100선에 들어갔을 거라며, 높은 곳에서 잠시 멈추었다.
차 안에서 미우다 해수욕장의 전경을 볼 수 있었는데 우측 언덕에는 캠핑장도 있었으며, 주변 경치를 보고 나서
이 해수욕장이 멋지고 휴식하기에 좋은 장소라는 것을 느꼈다.
가이드는 좋으냐고 몇 번이나 물었는데 이 해수욕장은 상점 같은 부대시설이 없는 것이 불편하지만 차가 있으면
히타카츠 항구도 10분 거리라고 했으며, 이곳에는 ‘쓰레기를 버리지 마라’라는 노란 팻말도 보였다.
<1. 간이매점 차 2. 차 내부 3. 미우다 해수욕장 전경>
[식당으로 가면서]
점심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히타카츠 항구로 향하면서 일본음식은 짜거나 달거나 니 맛도 내 맛도 없는
3가지 맛이라고 하며, 일본음식의 3가지 특색 중 첫 번째는 똑 같은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면 콩나물국이 나오면 콩나물 무침은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두 번째는 똑같은 그릇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세트로 된 자기그릇이 없다고 하고, 세 번째는 똑 같은 조리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는 튀기고, 하나는 삶고, 하나는 무치고 찌는 등 다양하지만 항상 홀수가 되도록 하는 것이 일본정식이라고
했으며, 받치는 접시 하나의 그림도 음식하고 맞추어 보는 즐거움이 있도록 한다고 한다.
예로 감을 담는 접시는 그림이 없거나 단풍이나 낙엽 등의 가을그림이 있는 것을 사용한다고 하며, 일본음식이
짜거나 달아도 조리방법에 의해 소금이나 당분 섭취는 한국음식보다 적다고 한다.
여행의 명언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했으며, 항구에 다른 여객선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저 배는 정원이
450명이고, 우리가 탄 배는 정원이 150인데 오늘 한 대가 더 떴다고 한다.
그럼 오늘 대마도에 들어 온 한국 사람이 700명 정도인데 그 많은 사람을 수용할 식당과 숙소가 없을 것이라고
했으나 어쨌거나 먹고 잘 수 있으니 온 것 아닐까?
11시 쯤 식당에 도착했는데 1일분씩 차려진 일본밥상이 좀 야박한 것 같지만 위생적이라 좋았고, 음식은 차에서
들은 대로 같은 음식 같은 그릇이 없었으며, 미지근한 우동에 튀김 몇 가지이지만 맛있게 잘 먹었다.
식당에서 시킨 커피가 좀 모자지만 일행들과 나누어 먹은 덕분에 자연스럽게 인사도 나누게 되었으며, 그 덕분에
이후로는 사위가족이 가지고 온 봉지커피를 얻어먹게 되었다.
<1. 히타카츠 항구 2. 히타카츠 항구 식당에서 먹은 점심>
[한국전망대로 가면서]
오늘 한국전망대를 보고 이즈하라로 내려가는 것이 유리하기에 먼저 들린다고 했으며, 일본은 홋카이도(北海島),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규슈(九州)의 4개의 큰 섬과 6853개의 작은 섬이 있다고 한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정의로는 육지의 식물이 자생하면 섬이고, 자생하는 것이 없으면 바위라고 하며, 대마도가
우리 섬이라는 소유권을 주장하려면 3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첫 번째가 살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대마도는 우리가 살았던 흔적이 없었으며, 두 번째는 농사를 지었던 흔적, 세 번째는 호적이 있어야 하는데 독도
얼마 전까지는 호적이 없었기에 일본이 주장하는 이유라고 한다.
일본면적은 37.8만 ㎢로 가이드는 남한의 2.7배라고 했으나 3.7배가 많고 인구는 1억3천만 명 정도라고 한다.
대마도에 대한 지리는 아래에 따로 기록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남북으로 82km이지만 고속도로가 아니어서
차로 2시간 40분 정도 걸린다고 하며, 대마도의 첫 번째 주업은 오징어잡이라고 한다.
두 번째 주업은 진주와 참다랑어 양식이라고 하고, 셋 번째는 나무로 만든 공예품이라고 하며, 인구 3.1만 명
중에 1/3은 군인(자위대)이고, 1/5는 군인가족이고, 1/5는 어부와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연금 받고 노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한국연금은 평균 43.8만원이지만 일본은 163만원으로 부부는
326만원이라 대마도 같은 촌에서 놀고먹어도 된다고 한다.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노후만 받쳐준다면 뉴질랜드나 호주처럼 세금은 50% 내도 괜찮다고 했으며, 세금 낸
만큼 내게로 돌아온다면 세금이 70%가 돼도 참을 수 있다고 했다.
세금 낸 사람보다 안 낸 사람이 더 혜택을 받는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던지 덜 내고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
대마도는 옛날엔 산지가 90%가 넘었지만 지금은 개발이 되어서 80% 정도가 산지라고 했지만 사실 주택지와
도로를 뺀 경작지는 눈 뜨고 찾아도 보기 힘들었다.
에보시다케 전망대로 가는 중에 처음으로 논에 벼 심은 것을 볼 수 있었으나 한사람 식량하기에도 적어보였는데
경작지는 4%라는 것이 눈으로 느낄 수 있었으며, 대마도로 여행 오는 일본사람은 없다고 한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49.5km 대마도에서 일본본토까지는 145km 우리가 3배나 더 가까운데 우리
땅이 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일본 본토 주위에도 대마도만한 관광지는 얼마든지 있는데 굳이 멀리 떨어져 있는 대마도까지 여행 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며, 한국관광객이 많은 이유는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음은 대마도에 출입국관리센터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출입국관리센터가 없으면 후쿠오카로 가서 입국을
하고 일본 배나 비행기로 대마도에 와야 한다면 누가 오겠냐고 했다.
1999년 대아고속에서 배를 운행하는 조건으로 출입국관리센터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때 대아는 관광객을
위해 대아호텔도 지었는데 이때부터 대마도는 관광객 맞을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섬의 여행상품이 개발되지 않는 이유는 근접성이 떨어져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든 것은 섬이라는 특성인데 섬에서 살아보지 않고는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며,
대륙사람인 중국은 죽었다 깨어나도 일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옛날 대마도는 고구마는 생산했지만 쌀 한 톨 생산되지 않았기에 조선이나 중국에서 약탈해 다가 먹을 정도로
양식이 부족했기에 내 것만 챙기는 개인주의가 심하게 된 것이지만 본토 섬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남에게 베푸는 문화가 없다고 하고, 대마도의 모든 생필품은 부족해서 132km 떨어진 본토에서 실어 와야
하기에 모든 것이 비싸며, 그래서 일본음식은 가지 수도 적고 양도 풍족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본은 많이 주고 더 주는 문화가 생길 수 없는 환경이라 내 것이라도 잘 챙겨 먹어야 했기에 개인주의가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고 하며, 영국과 일본이 침략자가 된 것도 섬 때문이라고 한다.
대마도의 도로가 좁고 뒤 떨어진 것은 이렇게 관광차가 다닌 지가 얼마 되지 안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뱃길이
열린지는 15년 되지만 관광객이 많아지기 시작한 것은 2011년 대지진과 쓰나미 이후부터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일본본토를 여행했으며, 그것은 2002년 월드컵으로 비자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하며, 히타카츠항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소요 된 시간은 17분 정도로 가깝다.
<대마도에서 처음 본 경작지 모내기를 막 끝냈다.>
[한국전망대와 조선역관사(朝鮮譯官使) 조난 위령비 탐방]
차는 전망대 주차장에 들어섰는데 한국 땅을 볼 수 있는 것은 날씨가 좋아도 바다에 안개가 없어야 한다고 하며,
그런 날은 10번에 한번 정도로 오늘 같이 날씨가 좋아도 가 봐야 안다고 한다.
전망대는 대아고속정이 이곳에 입항을 시작하면서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1997년 세워졌다고 하며, 가이드와
인터넷에서는 전망대는 설계부터 재료까지 한국학자들의 자문과 전문가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 풍으로 세워졌으며, 팔각정 형태의 기와지붕은 파고다공원의 정자를 모티브로 했다고 하며, 먼저
정자 앞에 있는 표지판 앞에서 설명을 들었는데 당시 조선역관사은 외교관이라고 한다.
1703년 조선 숙종(肅宗) 때 일본의 조청을 받고 음력 2월 5일, 108명의 역관사 일행이 탄 배가 부산을 떠나
대마도로 향했으나 급변한 날씨 때문에 항구를 목전에 두고 조난을 당해 전원이 사망했다고 한다.
108명의 역관사과 4명의 일본인과 함께 112명이 죽었고, 1991년 위령비를 세면서 112개의 받침돌은 그때 죽은
112명을 의미하며, 그들의 이름이 다 기록되었다고 한다.
앞에 보이는 섬에 있는 기지는 일본의 가장서쪽 끝에 있는 해상자위대라고 하며, 욱일승천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른 이야기를 했는데 빗살이 6개이면 육군, 8개는 공군, 12개 해군이라고 했다.
전망대에 있는 지도를 보면서 쓰시마 최북단 약 80km 와니우라의 한국전망대는 한국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으로 한국까지 49.5km, 후쿠오카까지는 132km로 한국이 2.7 배나 더 가깝다고 한다.
한국이 훨씬 가까워도 우리 영토가 되지 못한 것은 섬나라 일본사람들이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기에 더 멀리
항해할 수 있었고, 그들이 먼저 이곳에 터전을 잡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보았다.
<1. 조선역관사 위령비 2. 돌에 새겨진 역관사 타고 왔던 배 그림>
전망대는 해안 단구의 높은 지형에 위치해 있어 멀리 작은 무인도들도 잘 보이며, 조류가 빠르고 작은 바람에도
파도가 거칠기에 조선역사관이 조난당해 죽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 그림 앞에서 설명을 했으며, 통신사는 보통 300명의 전문가로 구성했고, 이들을 수발하는 일본
사람은 통신사 한명에 2명이 했는데 그들은 훈도시만 입고 엉덩이를 들어낸 것이 좀 웃긴다고 해야 하나?
대충 계산해도 통신사 일행은 천명이 넘었다고 하며, 통신사들이 가지고 온 제일 좋은 물건은 대마도 사람들이
차지해서 부를 축적했다고 하고, 역관사들도 인삼 등을 파는 상업을 했다고 한다.
다음은 이곳에서 한국을 찍은 사진으로 주간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광안대교 야간사진은 알아 볼 수 있도록
또렷했는데 다음 관광지까지는 1시간 10분 소요된다고 하며, 10분 간의 자유 시간을 가졌다.
다른 팀까지 합쳐져서 설명을 하는 바람에 잘 듣지를 못했으나 별로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었으며, 주차장에서
자연산 문어도 팔고 있었고, 찹쌀 붕어빵도 사 먹어보았는데 다들 맛있다고 한다.
☆욱일승천기: 1870년 일장기의 붉은 태양에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형상화하여 만든 깃발로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의 의미를 가졌으며,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라고 부르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태평양전쟁 때 대동아기(大東亞旗)로도 불렸고, 일본군국주의 육군기는 16줄 햇살이며, 장군기(將軍旗)는 8줄
햇살이고, 해군은 변형하여 군함기로 사용했으나 1945년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사용은 금지되었다.
1954년 해상자위대는 16줄 햇살을 육상자위대도 8줄 햇살을 채택했으나 동북아시아국가들은 철저히 금지하고
있으며, 나치의 하켄트로이츠 이상으로 악의 표징이기에 우리나라도 이제는 전범기로 불러야 한다.
<1. 한국전망대 2. 욱일승천기가 아니고 전범기이다. 3. 이곳에서 본 광안대교의 야경 4. 조선통신사 행렬>
[에보시다케 전망대로 가면서]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일본사람이라고 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나 궁금해졌다.
첫 번째는 지진이 많다는 것으로 일 년에 약 12만 번 일어나지만 95%는 바다에서 생겼다 사라지지만 남은
5%가 피해를 준다고 하며, 유라시아 판이라는 지층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이번 네팔에서 일어난 지진과 마찬가지로 유라시아 판은 1년에 1cm 씩 가라앉는 다고 했으며, 그래서 지진에
강한 목조를 많이 짓지만 목조건물은 불에 취약해서 온돌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대신 겨울에는 무척 추워서 평생 따뜻하게 살아보지 못한 민족이며, 지진 때 옆방으로 피할 수 있도록 벽의
모서리 쪽은 약하기에 두들겨 소리가 통통 나는 곳을 발로 차면 벽이 무너진다고 한다.
1982년 지진에 대비할 수 있도록 건축법을 제정했기에 이후로 지은 건물을 가격이 비싸고, 2011년 대지진 때
쓰나미 높이가 20m이었는데 18m 밖에 안 되는 5층으로 피신한 사람은 살 수가 없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활화산이 많은 것으로 110개 정도가 있는데 이 산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재앙의 요소라고 하는데
대마도는 지진의 영향을 받지만 그래도 본토보다는 안전하다고 했다.
셋 번째는 다른 나라보다 더 구체적인 개인주의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연재앙에 대한 불안 때문에 내 것이나
잘 지키자는 생각이 팽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행할 때 주의 있게 볼 것은 우리와 다른 것을 찾는 것이고, 다른 것에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중앙선은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되는 노란색이지만 대마도는 항상 넘을 수 있는 흰색으로 한 것은
도로도 좁은데 추월이나 교차하다가 중앙선을 넘게 되고 그러면 중앙선 침범하는 범법자가 된다.
이런 범법자를 만들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멋진 생각으로 사소한 것 같지만 너무 자주 어기게
되면 범법을 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잠정적 범죄자나 범칙금을 벌기 위한 것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교통체계가 많아 불편을 했는데 이런
것에도 신경을 쓰는 일본사람들은 역시 선진국이며, 우리는 이런 면에는 아직 후진국이다.
<대마도는 어디서나 중앙선을 넘을 수 있도록 중앙선이 흰색의 점선이 있는 도로이며, 도로 폭은
큰 차는 꽉 찰 정도로 좁다.>
대마도에서 본 일본사람들이 교통법규를 지키는 모습은 부러울 정도이었는데 비록 과속은 있을 지라도 철저히
정지하고, 클락션을 울리지 않았으며, 법규를 잘 지키기에 감시카메라나 방지 턱을 보지 못했다.
이런 것은 우리가 본 받아야할 일인데 ‘나하나 쯤이 아니라 나부터’라고 생각하는 것이 선진국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라고 하며, 이런 것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교육이라고 한다.
일본은 환경미화원이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거리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기 때문인데
여행 온 학생이 휴지를 버리기에 그러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자 학생은 그래야 치우는 사람이 먹고 산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런 것을 바꾸는 것이 어른들이 보이는
교육이라 던지 아니면 인위적으로 행하는 벌금이 있다고 한다.
학생이야기를 들었을 때 중국쿤밍의 가이드가 생각났는데 그는 우리가 휴지를 주우려고 했을 때 휴지를 버려야
치우는 사람이 먹고 산다고, 그냥 두라고 했던 사람이며, 또 옛날에 읽은 이야기가 생각나서 옮겨본다.
일본에 부임한 영사관부인이 시장을 갔을 때 클락션을 울렸다가 사람이 주저앉는 것을 보고, 그 후로는 사용하지
않는 습관을 길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클락션을 종량제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1980년 일본에도 전주나 벽에 불법광고 부착이 많았으나 3개월간 대대적으로 비싼 벌금을 부과해서 없어졌다고
하며, 전주에는 지진 때 대피장소가 표시되어 있기에 더 단속을 한다고 한다.
운전정지에 해당하는 음전운전은 탄 사람 모두에게 1인 당 50만 엔(약 450만원)의 벌금을 부과되며, 운전면허
취소에 해당하는 음주운전은 탄 사람 1인 당 100만 엔(약 900만원)의 벌금을 부과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일본엔 대리운전은 없는 것은 수요가 없기 때문이고, 대신 택시를 이용한다고 하며, 세금부족하다고
하지 말고 벌금으로 질서도 잡고 부족분도 채우고, 일자리도 늘리면 된다고 한다.
선진국문화도 시간이 흘러 된 것으로 우리도 20년 뒤에는 어떤 모습이 될 런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했다.
이젠 자판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정말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지판기로 사람이 없는 한적한 도로 귀퉁이에도
어김없이 있는 것이 자판기로 자판기에 진열 된 것만 보아도 잘 팔리는 상품을 알 수가 있다고 한다.
모든 자판기는 그 나라의 음료문화를 알게 하는데 한국자판기는 돈이 남아 있으면 반환키를 누를 때까지 있지만
일본 자판기는 남은 돈이 바로 쏟아져서 살 때마다 돈을 다시 넣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남에게 사 주는 일이 없는 개인주의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모든 기계나 상품은 그 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는데 온수와 냉수 그리고 얼음까지 나오는 정수기라도 일본에서는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일본사람들은 냉수를 마시는 것이 아니고 녹차를 마시기 때문이라고 하며, 오늘점심에도 우리는 냉수를
주었지만 일본사람이었다면 녹차를 주었을 것인데 따로 녹차를 달라고 하면 준다고 한다.
미국은 수돗물을 마시고, 콜라도 3L, 우유는 5L 짜리를 팔기에 우리 냉장고의 칸 하고 맞지 않는다고 하며,
단일제품으로 세계 누구든지 쓸 수 있는 상품이어야 최고인데 예로 스마트폰이라고 한다.
<인적이 드문 아유모도시 계곡에 있는 자판기>
일본문화를 너무 좋게 포장하지 말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일본은 소형이나 경차가 많고 아파트 평수도 작은 것은 검소하고 절약하는 민족으로 생각하나 그건 편견으로
사실은 나라는 부강하지만 개인은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은 주차비가 비싸기도 하지만 아파트에서 관리비와 주차비가 따로 나오는데 동경 같은 경우 관리비가 2만
엔이면 1300cc의 소형차도 주차비는 6만 엔이기에 쉽게 차를 살 수가 없다고 한다.
차의 번호판이 노란색은 경차로 660cc를 기준으로 하여 분류 하는데 그 이하는 차로서 기능을 못한다고 하며,
660cc 이상은 번호판이 흰색이고, 영업용은 녹색이라고 한다.
경차가 영업을 하면 번호판이 검정색이라고 했으며, 이렇게 구별 된 것은 고속도로요금 받을 때 번호판만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고속도로의 제한속도는 80km이라고 한다.
뒤 유리에 붙어 있는 표지는 차량점검 받을 날짜인데 여기서 쓰는 년도는 서기가 아니고 일본왕의 연도를 쓰는데
2015년은 평성(平成) 27년이라고 한다.
일본에는 전세가 없고 월세만 있는데 첫 달 내야할 금액은 보증금 2달치, 방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1~2 달치, 그달
달세 12달치로 보통 5배를 내야하며, 월세로 돈을 많이 벌면 그 만큼 세금을 많이 낸다고 한다.
집과 차의 보유세도 많이 나와서 월세로 사나 집을 사서 사나 비슷해서 월세 사는 사람이 많기에 집 있는 사람은
부자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라고 하며, 일본이 질서를 잘 지키는 것도 섬이라는 문화로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중국이나 인도 사람들이 줄 서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은 사방이 탁 트인 대륙이기 때문이며, 무질서해 보이지만
도로에 차와 오토바이가 함께 뒤엉켜서 움직여도 나름대로 질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팔번궁 신사 주차장에 있는 대마도의 소형차들>
이곳에 많은 삼나무는 잎이 침(바늘)엽수라고 하며, 편백나무는 잎이 납작(편-扁)하다고 하고, 일본에 삼나무가
많은 이유가 좀 놀랐는데 그것은 1894년 청일전쟁과 1905년 노일전쟁 때 받은 배상금이 있었다고 한다.
1907년 화산지대가 많은 규수지방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산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배상금으로 나무를
심기로 했으며, 이왕이면 돈 되는 품종으로 선택한 것이 삼나무라고 한다.
북해도는 추위 때문에 땔감으로 자작나무를 많이 심었고, 삼나무는 일 년 내 푸른 상록수라서 가을단풍은 볼 수가
없지만 화산지대가 아닌 곳에는 삼나무가 없기에 단풍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일본에는 3,000m가 넘는 산이 10개가 넘는지만 볼 것이 없는 것은 화산재가 많기 때문으로 후지 산을 등산하는
왕복 12시간 동안 풀도 없는 화산재만 밟고 다녀야 한다고 하며, 계곡은 우리나라가 좋다고 한다.
일본은 화산지대라 경작지가 17%로 식량이 부족해서 품종을 많이 개량했는데 벼는 경작면적은 우리보다 적어도
생산량은 2배가 될 정도이며, 화산지대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개발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로열티를 주고 그 품종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이제는 화두를 돌려 외국인들이
우리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서 정서적으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단어가 ‘우리’라고 한다.
‘우리’라는 문화 때문에 내 것과 네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발음마저도 구별하기 힘들어 내 것 아니면
우리 것 밖에 몰라 남에게 피해를 주는 말이기에 잘 구별해서 써야한다고 한다.
가이드의 개인적인 생각은 폐 끼치는 우리라는 집단주의보다 폐 안 끼치는 개인주의가 훨씬 더 좋다고 했다.
<대마도의 삼나무>
대마도는 3개의 강이 있고, 수력발전소 2개와 화력발전소 1개가 있어 자력으로 전력을 해결하며, 도시가스는
없고, TV는 예날 우리처럼 지붕 위에 세운 안테나로 보고 있으며, 케이블 TV도 없다고 한다.
동경에 가도 한국방송이 안 나오는 것은 케이블 TV는 비싸서 그런다고 했으며, 15년 동안 일본을 넘나들면서
느낀 것은 정서나 문화가 같은 점이 없다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은 살아봐야 안다고 한다.
8년 전만 해도 대마도에는 관광버스가 없어서 우리나라 차장 아가씨가 있던 시절의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다고
하며, 처음 대마도를 다녔던 배는 대아고속(오션플라워)의 배 1척이었다고 한다.
후쿠오카를 독점했던 미래고속(코비)과 협의 하에 서로 같이 운행하게 되어 배편이 늘어나게 되었는데 미래고속은
부산에서 대마도를 다니는 배편은 사정에 따라 4~10회 정도라고 한다.
지금은 대마도를 경우해서 후쿠오카를 오고 가는 배편도 생겼고, 일본국적의 비틀이라는 배편도 있는데 한국에서
출발하는 코비는 오전에 비틀은 오후에 후쿠오카에서는 출발하는 일본 배는 오전이라고 한다.
한국 배는 오후에 출발하도록 배편이 편성되었다고 하며, 이렇게 배편이 늘어나면서 많은 관광객이 오게 되었으나
숙박시설이 부족하고, 이즈하라에 노래방이 1개 밖에 없을 정도로 부족다고 한다.
지금 시설물은 이즈하라 시민이 이용하던 것으로 아직까지는 관광객을 위한시설이 없기 때문이지만 한일관계는
하도 변수가 많아서 언제까지 갈지도 모르기에 함부로 투자하기도 힘든 다고 한다.
이곳에 식당을 개업하고자 하는 한국 사람도 많지만 외국인은 세금이 50%이라서 일본사람의 명의를 빌려 해야
하는데 사이가 나쁠 때를 생각하면 쉽지 않는 일이라고 한다.
<1. 우리가 타고 대마도에 갔던 코비 고속정 2. 일본국적의 고속 비틀 호>
이곳에서 무엇을 대량생산하여 판다고 해도 인구가 적어 소모가 없기에 외지에 갔다 팔아야 하지만 물류비용이
많이 들어서 경쟁에 이길 수 없어서 그저 자급자족할 만큼만 생산해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일본관광에서 주택가를 걸어서 관광하는 곳은 이즈하라 뿐이지만 여름엔 힘들다고 하며, 일본관광은 봄과 가을에
하는 것이 좋은데 겨울에는 영하로는 내려가지는 않으나 섬이라 칼바람이 많이 불어 춥다고 한다.
칼바람이 풍랑을 많이 일으켜 결항이 잦은 것도 겨울이고, 대마도는 한 달에 한번 올 정도로 적다고 나머지는
일본본토에 간다고 하며, 일본집 지붕은 우리나라 40년 전에 사용했던 스레드를 지금도 사용한다고 한다.
기와도 속이 비어 있어 겨울에 춥고 비올 때 시끄러운데 양철지붕은 장난이 아니라고 했는데 어릴 때 살아봐서
그 말뜻을 알 수가 있었고, 대마도는 수요가 적어서 모든 것을 본토에서 실어 와야 한다고 한다.
심지어는 인분들까지도 본토에서 데려와야 한다고 하는데 수요가 없으니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도 없고, 고령에
연금 받는 사람뿐이며, 대학교는 아예 없으니 도시로 가서 졸업하고 취직하기 때문이란다.
<대마도의 깨끗하고 조용한 농촌마을>
[에보시다케 전망대(鳥帽子岳 展望臺) 관광]
주장에서 내려 높이 176m의 전망대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다보면 숨이 찰만할 때 전망대에 도착했는데 조금 후에
우리보다 많은 일행이 도착해서 좁은 곳에서 사람들을 피해가면 힘들게 사진을 찍었다.
이곳은 대마도에서 유일하게 동서남북 4면을 모두를 볼 수 있으며, 아소만에 펼쳐있는 크고 작은 섬들과 산들의
조화와 웅대한 리아스식 해안을 볼만한데 안개로 인해 기대했던 거제도는 보이지 않았다.
전망대 4곳에는 같은 방향에서 보이는 것을 참고삼아 보라고 모형으로 만들어 놓고, 중요한 곳은 지명을 적어
놓아 쓸모가 있을 것 같아 열심히 사진을 찍었으나 전혀 쓸모가 없었다.
대마도 사람도 아닌데 산 이름 알아서 무엇 할 것 인가? 내려가는 길은 따로 되어 있으며, 전망대 아래 가까운
해안에 있는 와타즈미 신사로 향하면서 일본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에서 무속신앙을 가진 사람이 30% 정도이며, 불교를 믿는 사람도 30% 정도이고, 신을 믿는 길이라는 뜻을
가진 일본전통종교 신도(神道)를 믿는 사람이 35% 정도이라고 한다.
신도는 만물에 신이 깃들었다는 사상을 가진 종교이며, 기독교는 5% 미만으로 보기가 힘들다고 했는데 인구대비
종교가 가장 많은 곳이 일본으로 1995년 도쿄지하철 사린사건으로 악명 높은 오옴진리교도 있다고 한다.
<에보시다케 전망대에서 일행들과 함께>
<에보시다케 전망대 동영상>
[와타즈미 신사 탐방]
걷기 위해 조금 먼 곳에서 내려 신사까지 걸었으며, 태고의 분위기를 가진 삼나무 숲속을 걸었는데 붉은 기둥의
삼나무가 얼마나 큰지 미국의 레드우드 숲속을 보는 것 같았다.
신사 뒤로 내려와 편하게 앉아 설명을 들었으며, 신사하고 절하고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입구에 도리이(토리)가
서 있으면 신사이고, 없으면 절인데 화투의 ‘고(5) 도리(새)’가 일본 말로 ‘새 5마리’를 말한다고 한다.
도리이의 숫자는 아무의미가 없다고 하며, 일본사람들은 소원을 빌면 새가 전해준다고 믿었다기에 세운 것이라고
했으나 알고 것과 좀 달랐으며, 하늘 천(天)을 닮아서 하늘가는 문이라고 생각해도 된다고 한다.
신사(神社)에는 급수가 있는데 신궁은 국가 것, 궁태사는 개인 것으로 본당이 하나 있는 것을 ‘타’라고 했으며,
본당 옆에 작은 사당은 본당의 부하이거나 식구들의 것으로 본당을 지키는 형태를 ‘태’라고 한다.
일왕과 관계가 있어야 신궁인데 일본에는 국화(나라꽃)는 없으나 일왕을 상징하는 꽃이 가을에 피는 국화꽃이
지붕 맨 꼭대기 위에 얹혀 원형 통나무 옆에 조각되어 있으면 신궁이라고 하여 조금은 의아했다.
그것을 모르면 일장기가 꽂혀 있어도 신궁이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야스쿠니는 급수로 따지면 일왕하고 관계가
없으니 ‘태’라고 했는데 이곳은 일왕의 건국신화를 가진 최초의 신궁이라고 한다.
<1. 와타즈미에 신사에 있는 도리이 2. 와타즈미 신사의 급수를 말하는 국화꽃>
우측 담 벽에 있는 빨간 우체통 같은 것은 오미쿠지(おみくじ)로 신사나 절 등에서 일 년의 사주를 보는 곳으로
보통 100엔을 넣으면 운세쪽지가 나오는데 길할 길(吉)자와 불길할 흉(凶)자의 2종류가 나온다고 한다.
길흉 앞에 소(小,) 중(中), 말(末), 대(大) 숫자에 따라 크게 좋고, 나쁜 것으로 점치는데 나쁜 점이 나온 쪽지는
나무에 매달아 비가오고 바람에 없어지면 악운이 다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사를 찍을 때 저 쪽지를 찍으면 나쁜 괘를 가지고 가는 것이 되니까 찍지 말라고 했으며, 그 옆에 있는 나무패가
달려 있는 것은 ‘에마’ 기원한 소원이 이루어져 그 사례로 말(馬)을 봉납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말은 너무 비싸기에 대신 말 그림이나 조각을 만들어 걸어 노은 것이라고 하며, 신당 앞에 오면 불전함에
먼저 돈을 던져서 왔다는 것을 표시하고, 2번 절을 해서 인사를 한다고 한다.
그런 후 2번 박수를 쳐서 지금부터 소원을 말할 터이니 ‘들어주시오.’라고 시작을 알리고, 다 했다는 뜻으로 절을
1번 하고, 종은 마음대로 치며, 신당에는 일반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다고 한다.
안쪽의 본당에는 특별한 용무를 가진 사람이 허가를 얻어 들어 갈 수 있는데 일본의 건국신화는 본토가 아니고,
이곳에서 시작했다고 하며, 신의 아들 형제가 낚시를 했는데 형은 낚시 바늘이 좋아 더 잘 했다고 한다.
어느 날 형은 낚시 바늘을 잃어버려 그것을 찾으려고 용궁을 갔다가 거기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을 하였고,
임신까지 했으나 그는 돌아왔으며, 여인은 출산 때가 되어 남편이 있는 곳으로 왔다.
출산 하는 날 ‘들어다보지는 말라’는 부탁을 했지만 이를 어기고 들어다 보았는데 커다란 이무기가 똬리를 틀고
있다가 이를 본 이무기는 용이 되지 못하고 소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그 나무 신사마당에 있는 커다란 소나무이고, 똬리를 틀었던 장소가 담 옆의 바위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바위를
지키는 도리이는 특이하게도 3개가 연결되어 있는 것은 그 안은 신의 영역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1. 에마 2. 오미쿠지 3. 이무기가 변한 소나무 4. 타 5. 3개가 연결 된 도리이 6. 이무기의 똬리자리>
한국무속신앙은 특별한 것에 능력이 있다고 믿었지만 일본은 오래된 모든 세상만물에 신이 깃들었다는 사상 즉
애니미즘이 신도(神道)라고 하며, 해궁인 이 신사는 바다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입구는 바다라고 한다.
그래서 도리이가 바다에서 시작하는 이유라고 했으며, 이제는 작은 정자 아래 있는 정화장소인 ‘데미즈야’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바가지로 물을 떠서 맨 먼저 왼손을 씻는 것은 과거를 씻는 것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오른 손을 씻는 것은 현재를 씻는 것이며, 손에 물을 받아 입에 넣고, 이름을 몇 번 부르는 것은 마음을
씻는 의미인데 그 옆에 있는 스모경기장이 있는 이유는 옛날에는 스모가 종교행사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그래서 심판은 제사장이 했기에 지금의 심판관도 제사장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며, 선수가 소금을 뿌리는 것도
정화의미라고 하고, 이겼을 때 손으로 마음심(心)을 쓰는 것도 마음을 다스렸기에 이겼다는 의미라고 한다.
스모경기는 일왕가(日王家) 만이 주제해서 신사에만 약식으로 있으며, 궁태사는 없기에 이것도 신사의 구별 중에
하나라고 하였고, 입구 양쪽에 있는 해태는 일본의 영물이 아니라고 하면서 화투이야기를 했다.
화투는 일본놀이라는 것은 아는 바이고, 1월에서 12월까지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도 아는 사실인데 일본은 11월이
비이고, 한국은 오동이라는 것이 다르다고 하면서 11월의 비광에 대한이야기가 아는 것과 달랐다.
스님이 우산으로 맞고 있는 것은 비가 아니고 싸라기눈이라고 하며, 개구리는 동면하려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우산을 쓴 사람은 일본 3대 서예가 중의 한 사람인 오노도후(小野道風)로 그는 젊을 때 일이라고 한다.
서예공부의 진도에 발전이 없어 포기하려고 마음먹고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가 버드나무 잎으로 뛰어 오르는
개구리를 보게 되었는데 칠전팔기(七顚八起) 끝에 성공하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저런 미물도 저렇게 노력하는데 인간이 저 개구리만도 못해서 되겠냐는 결심으로 공부해서 우리나라의 한석봉
같이 서예가가 된 사람으로 우리나라 12월에 이 그림이 들어간 이유는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11월의 오동(똥)광에 있는 새는 상상의 봉황새로 봉황은 우리나라 영물이라서 무궁화를 감싸고 지키고
있으며, 청와대 상징인데 이 새는 오동나무에만 앉기 때문이라고 했다.
<1. 스모경기장 2. 데미즈야(정화장소) 3. 와타즈미 신사 전경>
일본도 상상의 동물이 해태이지만 좀 다르다고 했는데 신사에서 보면 왼편에 있는 해태는 입을 앙증맞게 입을
벌리고 해태는 ‘아상’이고, 오른편에 있는 것은 ‘응상’라고 하며, 둘을 합쳐서 ‘아응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가나다라는 가에서 시작하여 하에서 끝나는 것처럼 일본은 아에서 시작하여 응으로 끝나는데 이것은
처음과 끝 그리고 태어나고 죽는 것도 의미한다고 하며, 해태가 있는 의미를 설명했다.
불교양식에서 세속에 있는 절은 세상과 구병하기 위해 담이 있지만 산 속에 있는 절은 이미 세속을 떠났기에
담이 없기에 세속과 구별하기 위해 담이 있는 것처럼 해태도 세속과 구별하기 위해 있다고 한다.
그 때 낳았던 아기를 모신 신당은 우리가 올 때 산 속에 있었던 작은 도리이와 작은 사당이 그곳이라고 하며,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시간은 3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사진을 찍다가 다른 팀의 설명을 듣게 되었는데 해태상에서 아무의미도 설명하지 않고 다만 암놈 수놈만 가르쳐
떠나는 것을 보고 우리가이드가 설명을 잘 한다는 것을 알았다.
☆도리이(조거-鳥居): ‘신의 새가 앉은 자리’라는 뜻으로 일반세계와 신사의 경계를 뜻하며, 신선한 장소임을
알리는 구조물로 보통 2개의 수직원통 위에 직사각형의 들보가 가로로 2개 얹혀 있다.
이 새는 까마귀를 가리킨다고 하며, 까마귀는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안내를 하는 새라서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
해궁인 와타즈미 신사 입구는 바다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도리이는 바다에서 시작하여 신사까지 5개가 있으며,
‘신의 영역’이라는 뜻을 가진 3개가 연결된 도리이는 2곳에 있으나 한 곳은 의미를 모른다.
▶와타즈미 신사: 천신(天神)인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尊)와 해신(海神)인 요타마히메노미코토
(豊玉?命)를 모신 해궁에는 이들에 얽힌 용궁전설이 남아 있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794~1185년 헤이안(平安) 시대의 율령 세칙을 적은 ‘엔기시키(연희식延喜式)’의 ‘진묘쵸(신명막, 神名帳)’에
마상군화다도미신사(馬上郡和多都美神社) 표기 된 신사가 바로 이곳이다.
<1. 신사내부 2. 와타즈미 신사의 간략한 소개 3. 봉헌대 4. 아상 5. 응상>
[만관교(만제키바시)으로 가면서]
대마도에는 방파제를 만들 때 쓰는 데트라포트와 그 원료인 시멘트를 만드는 공장 2개 외에는 공장이 없다고
하며, 일본도 경기부양으로 정기예금이자가 년 0.2%이고, 주말 고속도로 요금도 50%이라고 한다.
일본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나 기억할 만한 것이 없었으나 일본은 불량식품을 만들면 불매운동을 하지 않아도
아무도 구매하는 사람이 없어서 살아남지 못한다고 했는데 우리도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30분 정도 달려 만관교에 도착했는데 돌풍이 심하기에 모자하고 안경을 조심하라는 부탁을 받고 차에서 내렸다.
[만관교(萬關橋, 만제키바시) 관광]
대마도는 본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1900년 일본해군이 군함이 지나가도록 가장 좁은 부분을 뚫어 인공해협을
만들어 상(上)대마 섬과 하(下) 대마 섬으로 나뉘었으나 2섬을 잇는 다리가 만관교이다.
이 다리는 1900년(80m), 1956년(81.6m), 1996년(210m) 3번 다시 놓았으며, 다리 중앙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만제키코시(萬關越) 지협을 뚫어서 만든 운하를 구경할 수 있었다.
간조 시 형성되는 조류의 소용돌이가 볼만하다고 했으나 오늘은 볼 수 없었으며, 운하를 만들 때 나온 돌과
토사가 쌓여서 만들어졌다는 마을 메고시마(여호도,女護島)도 보였다.
이 마을은 우리가 가고 있는 쪽에 있는 ‘마우라 만’이 있었으며, 반대편은 아소만으로 계속가면 대한해협으로
거제도가 있다고 했는데 밀물인지 썰물인지는 몰라도 바다 물은 대한해협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오징어가 많이 잡힌다고 하며, 다리를 다 건너면 변소만 있는 작은 휴게소가 있으며, 이곳에서 차를
타고 30분 정도가면 오늘 일정이 끝나는 이즈하라 시내에 도착하게 된다.
<1. 만관교 전망대에서 마우라 만 쪽 마을이 메고시마 2. 아소만이 있는 대한해협 쪽 운하>
이 운하를 가장 긴요하게 쓴 것은 1904년 러일전쟁으로 10월 15일 리바우 군항을 출발한 발틱함대는 전함,
순양함, 구축함, 수송선, 병원선 등 41대의 함선이 사상 최장의 원정길에 올랐다.
보급도 받지 않았으며, 쉬지도 않고, 6개월을 달려 온 발틱함대는 1905년 5월에 동해에 도착했으나 병사들은
너무 지쳐있었는데 이것을 놓치지 않고 공격한 22대 함선을 가진 일본연합함대에 섬멸 당했다.
이때 일본함대는 러시아함대가 대한해협을 지나갈지 아니면 대마도해협을 지나갈지 알 수 없는 상태이었는데
양쪽 해협으로 함선을 이동시킬 수 있었던 것이 만제키 운하라고 한다.
일본의 도고 사령관은 함포를 2배나 연장시켜 사격거리를 길게 하였고, 이순신장군이 사용했던 학이 날개를
펼친 것처럼 함선을 일렬로 세운 학익진(鶴翼陳) 전술을 사용해서 승리했다고 한다.
러시아함대 중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배는 단 2척뿐인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 중에 하나인 ‘오로라 호’를
보았으며, 1917년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린 10월 혁명은 '오로라 호‘에서 울린 포성이 신호탄이 되었다.
1905년에 있었던 을사조약은 1894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도와줄 수 있는
2나라에게 승리했기 때문인데 이운하는 우리한테는 아픈 역사를 남겨준 셈이다.
<1. 1900년(80m) 2. 1956년(81.6m) 3. 1996년(210m) 4. 현재의 만관교>
☆도고(토오고) 제독: '도고 헤이아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진해 앞 바다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러시아의 발틱
함대와 전쟁을 치루기 위해 출전 의식을 행하였다.
제독은 이 때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의 조상을 바다에 수장시킨 이순신 장군을 군신(軍神)으로 모셔 놓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달라고 기원하고 출전을 했다.
제독은 대마도 해전서 러시아 발틱 함대를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전술로 물리치고, 전승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하는 제독이 있다면 이순신장군뿐이다.'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에서 8년 동안 넬슨 제독에 대하여 연구를 한 도고 제독은 '나와 넬슨은 비교해도 이순신 장군과는
비교하지 마라 그 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그 분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도 매번 승리를 이끌어 냈다.
나를 전쟁의 신이시고, 바다의 신 이신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나는 그에 비하면 하사관에 불과 하다'라고 하였다.
또 4학년 미국 해군사관학교 임관 후보생도들이 일본을 방문하여 도고 제독을 찾았을 때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조선의 수군을 지휘하신 이순신 제독'이라고 했다.
영국학자 발라드라는 '영국 사람으로서 넬슨과 견줄만한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하긴 항상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인정될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 인물은 바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 이순신장군
뿐이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 러일전쟁에서 살아남은 2척의 전함 중에 하나인 오로라 호 2. 일본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이순신장군
3. 이순신장군을 신으로 추앙하는 도고제독>
[히즈하라로 가면서]
한국과 일본에서 20~70개까지 ‘당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3가지를 말한다면?’라고 설문조사를 했는데 한국에서
제일 많이 나온 것은 돈, 건강, 권력이라고 했지만 일본은 돈, 건강, 기술이라고 했다고 한다.
돈은 타고 태어난 그릇만큼만 벌린다는 말에는 동감이 되었는데 평생을 힘들게 저축했지만 지금이나 그 때나
넉넉하지 못한 것은 똑같아서 항상 쪼들려 사는 집사람만 불쌍하다.
가이드하면서 알게 된 것은 효도여행은 여행을 보내 주는 것이 아니라 모시고 가는 것이라고 했으며, 나이가 많은
사람은 자유 시간을 주어도 건강 때문에 못가지만 길을 잃을 것이 걱정되어 못 간다고 한다.
딴지일보 총수인 김어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행복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으며, 대마도에서 가장 오래된 가업은 양조장이라고 한다.
그 다음은 전통 화과자라고 하며, 이때 화자는 꽃 화자가 아니라 화목할 화(和)이라고 하면서 일본음식을 표현할
때도 화목하게 먹는다고 하여 화식(和食이라고 한다고 했으며, 화(和)는 일본의 특징 중에 하나라고 한다.
일본을 나타내는 문자라고 화(和)라고 한 것을 본적이 있는데 그래서 일왕 이름도 대화(大和), 소화(小和)인가?
4시 조금 넘어서 이즈하라에 도착했으며,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일정을 마치는 것도 드문 일이라 어떻게 잘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을까? 고민 좀 해야 할 것 같았는데 내린 곳이 시내의 중심이라고 한다.
왼편에 보이는 것이 쓰시마 시청이라고 하며, 모든 것이 500m 이내에 있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호텔 앞에는 우리가 발음하기엔 좀 거북스러운 열여덟 은행(十八銀行)이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숫자 十八을 좋아한다고 하며, 十八銀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1877년에 설립되었고, 1882년엔
부산출장소, 1890년엔 인천지점을 개설했는데 지금은 근대건축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마도 十八銀行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 돈이 환전해 주는 은행이라고 했으나 근무가 끝났는지는 모르나
올 때까지 여러 번 앞을 오갔지만 들어가는 사람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1. 대마도의 十八銀行 2. 十八銀行 대로 건너편 길옆에 있는 조선통신사 비>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식사 때까지 최근에 개장했다는 전통기념품을 판다는 곳으로 향했는데 이곳에는 대마도의
역사와 관광지 등을 소개한 그림과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글로 된 것은 읽어도 보고 사진도 찍고 싶었지만 일행들이 너무 빨리 나가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나온 것이 좀 아쉬웠으며, 식당으로 향했는데 앞에는 장례식장인 심화당(心和堂)이 있었다.
불고기로 저녁을 먹고 나오니 밀물이 식당 앞 수로에 들어오면서 바닷물고기가 이곳까지 올 정도로 많았으며,
항구의 출입국까지 갔다가 돌아오다가 우리가 먹었던 식당으로 많은 인원의 여인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좀 놀라 구경을 하다가 물어보았는데 이들은 김해농협산악회에서 온 사람들로 무려 105명이나 왔다고 하는데
아마도 김해시가 텅 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좁은 식당에 그 많은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지 걱정이 될 정도이었고, 안 그래도 모자란다는 숙소는 어떻게
해결했는지 궁금했으나 ‘가능하기에 왔겠지!’라고 혼자 결론 냈다.
이 팀 말고도 한국여인들이 더 보였는데 한국보다 여기서 더 많이 보았을 정도로 한국여자들이 많았는데
대마도를 한국여인들이 먹여 살린 다고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1.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고민하는 대마도도주 2. 고대인이 건너던 해류 3. 중세의 동아시아무역
4. 대륙과의 힘든 싸움 5. 내실 있는 교역과 번영 5. 장례식장 심화당>
이곳에서 자전거 타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안전모를 다 같이 쓰고 있었으며, 등에는 청소부 아저씨들처럼 야광
띠를 X 형태로 맺었고, 안전모에도 있는 것을 보고, 안전을 잘 지킨다고 생각을 했었다.
정말 잘 지키는 것은 차들의 정지인데 위험한 곳에서는 항상 멈추는 습관은 정말 본받아야 일인 것 같았으며,
먼저 마트로 들어가 구경을 하다가 손녀에게 줄 호치키스를 샀는데 가격이 너무 비쌌지만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2층을 올라가서 커피도 한잔하고, 상품을 구경했는데 중국산 호치키스는 가격이 너무 저렴해 마트에 반납하러
갔더니 한글로 적힌 종이를 보여 주었는데 거기엔 ‘교환은 가능해도 반품은 할 수 없다.’고 쓰여 있었다.
할 수 없이 2개를 더 사서 물 타기를 했으며, 선물로 주려고 슬라이드 볼펜을 찾았으나 없었고, 다른 것으로
대치할 선물을 찾았으나 가격도 비싸고 살 만한 물건도 보이지 않아 호텔로 돌아왔다.
<1. 안전교육이 잘 된 일본아이들 2. 바다로 연결된 수로 뒤에 보이는 붉은 다리는 엄원대교>
[2일] 15년 5월 22일 금요일
●일정: 이즈하라 시내관광[1.수선사(최익현 순국비) 2. 고려문, 조선통신사비 3.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
4. 팔번궁신사 5. 나카라이 기념관]
[만송원(万松阮, 반쇼인)을 찾아서]
아침에 일어나면 일정에 없어 못 볼 것 같은 만송원을 갈려고 했으나 지도를 다 주고 없어서 만들 때 기억을
찾아 갔는데 나를 믿고 2명이 더 따라와서 못 찾으면 어떡하나 슬며시 걱정도 되었다.
얼마를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방향도 맞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시청 옆을 지나 작은 도랑을 따라 갔는데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좀 아쉬웠다.
이곳은 1985년 국가지정사적지로 대마도 번주 가족의 묘소로 1615년 요시토시 묘소로 마련한 것이 시초이며,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80년 다시 지었다고 하며, 정문은 에도시대 전기의 건축물로 추측한다고 한다.
조선왕조와 에도시대의 통신사들을 담당했던 소가는 덕혜공주와 결혼을 했던 번주로서 이 가문출신의 뒤영묘도
이곳에 있다고 하며, 도랑을 건너 조금 내려오면 가네이시 성 영주의 정원이 일부 복원되어 있다.
그 앞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덕혜공주의 결혼봉축기념비가 있어 사람 없는 사진을 얻을 수 있었고, 그곳을 나오자
복원된 옛 대마도 번주(藩主)이었던 종가 가네이시 성의 노문이 있었으며, 어제 내린 주차장이 보였다.
대마도시청을 배경 삼아 사진도 찍고 호텔로 돌아오니 일행들은 이미 식당에 있었으며, 간단하면서도 깔끔한
아침을 먹었는데 대마도는 일본본토에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밥과 국만 더 주는 것이 놀라웠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더 찾으니 이제는 당연시 된 것 같았으며, 식사를 마치고 수선사에 있는 최익현 순국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는데 울산 수변공원에 있는 것보다 더 작은 절이 다리 옆에 있었다.
<만송원 2. 가네이시 성 영주의 정원 3. 노문 4. 대마도 시청>
[수선사(최익현 순국비) 탐방]
수선사 본당 앞 계단에 앉아 설명을 들었는데 대마도는 일본의 강력범죄자들의 유배지이었기에 한국에서 구금된
최익현선생님을 본토로 되려갈 필요 없이 이곳으로 데려왔으며, 이곳엔 세계3대 노예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사람은 죽으면 종교를 따지지 않고 모두가 불교식으로 하고, 100% 화장해서 납골당에 안치 하는데 보이는
것들이 다 가족단위의 납골당이라고 하며, 화장한 유골을 함에 담을 때 젓가락으로 한다고 한다.
유골을 젓가락으로 주고, 젓가락으로 받아 담기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하는데 음식을 먹을 때 젓가락으로 주고
젓가락으로 받는 것은 화장 문화이라서 무척 싫어한다고 한다.
밥을 먹을 때도 그릇을 손에 들고 젓가락으로 먹는 것이 우리는 눈엔 천하게 보이지만 어떻게 먹던 그들 문화와
다를 뿐이지 나쁜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다른 것을 틀린다고 표현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라고 한다.
한국은 납골당이 들어오면 집값 떨어진다고 야단이지만 일본은 전혀 상관하지 않지만 심지어는 집 마당 또는
망자가 살던 방에도 유골을 모시는 사람이 있으며, 이사할 때는 유골함만 들고 가면 된다고 한다.
우리는 중생을 구원하는 대비보살을 지장보살이라 하지만 일본은 죽은 애기들을 보살피는 것이 지장보살이며,
예전에는 불당을 열어 놓았으나 한국인의 도난 사고가 있은 후부터는 닫아 놓는다고 한다.
제사를 차례라고 하는데 한문으로 다례(茶禮)라고 쓰는 이유는 제사 때 차를 올렸기 때문인데 지금은 차를 올리지
않는 이유는 차는 구하는 것이 어려워서 대신 정종이나 소주를 사용했기 때문이란다.
수선사는 돌아다닐 곳이 없어 설명을 마치자 출발을 했는데 이곳저곳을 들어다 보고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 앞에서 사진을 찍고 나카라이기념관으로 향했다.
<1. 지장보살 2. 계단이 있는 정문 3.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
▶수선사(최익현 순국비): 구한말 대유학자이자 구국항일투쟁의 상징인 최익현은 쓰시마에 유배되었고, 이곳에서
3년형을 받았으며, 1906년 8월 28일 이즈하라로 호송되어 왔다.
2년형을 받은 임병찬과 함께 쓰시마경비대 수용소가 완성되기 전 하치만구신사(八幡宮 神社) 남쪽에 위치한
제사전습소에 수용되어 3개월간 구류되었으며, 단발령에 반대하여 단식투쟁을 하고 이었다.
1906년 11월 단발령은 해제되었으나 단식 때문에 얻은 병으로 12월 30일 순국했으며, 이듬해 1월 유해가
한국으로 봉환되기 전 잠시 수선사에 머물렀다 한다.
그의 문집으로 ‘면암집’이 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최익현(崔益鉉): 한말유학자이며 애국지사로 1873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임명되자 사직소를 올리고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했으며, 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었다.
이 때 그는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95년 8월 민 황후 학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리자 포천군 내의 양반들을 모았다.
그리고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했으며, 1905년 체결된 을사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상소운동이 실패하자 전국에 걸쳐 반일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했으며, ‘포고팔도사민’을 각지로 보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고,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1906년 900여 명의 유림을 의병으로 모집했으나 전주관찰사에게 바로 잡혀 쓰시마 섬으로 유배되었다.
<1. 최익현 순국 비 쪽의 무덤들 2. 반대편 쪽의 무덤들 3. 노랗게 익은 유자>
[나카라이 기념관 관람]
기념관은 오전 9시에 개관하고 오후 6시에 문을 닫으며, 화요일에는 쉬는데 우리는 조금 일찍 도착해서 문이 열릴
때까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는데 일본정원의 시작은 전국시대에 집 밖을 나가지 못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집 안에 놀면서 심심하기도 하고, 집 밖의 풍경을 보고 싶기도 해서 그것을 축소시켜 집 안으로 옮겨 놓은 것이
일본식 정원의 시작이라고 하며, 파란지붕에 십자가 있는 집은 대마도에 딱하나 있는 교회라고 한다.
수선사에서도 보았던 노랗게 익은 큰 유자들이 교회 옆에도 달려있었는데 가이드는 올해 못 보았다고 하지만
계절로 보아 작년에 달린 것이 아직 안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주변에 보이는 두꺼운 돌담은 성벽의 일부인줄 알았는데 불이 많이 나기에 불을 차단하는 방화벽이라고 했으며,
돌담에 붙어 있는 ‘경관자산(景觀資産)’이라는 표지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일본은 지방자치는 영주들이 다스릴 때부터라고 볼 수 있어 역사적으로 무척오래 되었으며, 일본의 47개 성들과
도시들이 지방자치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제력을 가지기 위해 기본적으로 가지는 3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 중에 첫 번째는 ‘일품일촌(一品一村) 제도’로 제일 우선순위로 한 마을에 하나의 제품을 경제력 있는 특산품을
생산하자는 것으로 농산품도 될 수 있고, 공산품도 될 수 있다고 한다.
코카서스지역에 갔을 때 러시아도 똑 같은 제도를 추진했던 것을 본적이 있는데 도자기 마을, 빵 마을이 보았다.
두 번째는 ‘지역한정 상품’을 생산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대기업제품은 어디에서나 살 수 있지만 이 지역 아니면
절대로 살 수 없는 일반상품을 말하는 것으로 꼭 관광객을 위한 상품만은 아니라고 한다.
타 지역에서 생산하는 좋은 제품이 있더라도 지역주민들이 지역경제를 위해 소비해 주는 상품이라고 했으며,
마트에 가면 원산지 표시가 다 있는 것도 이런 이유도 있다고 한다.
남은 세 번째가 지금 보고 있는 ‘경관자산’ 같은 ‘마을 만들기’로 이것은 영국에서 죽을 때가 되면 시골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미리 체험할 있도록 만든 ‘그린투어(green tou, 농촌체험)’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은 각 마을에는 가지고 있는 고유한 자산을 더욱더 발전시켜 경쟁력을 높이여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여 돈을
쓰게 만드는 것인데 지금 이곳은 사무라이 마을을 만들어 경관자산화 한 것이라고 한다.
요즘 우리나라도 도입해서 많은 체험마을이 생겼다고 하는데 영국 같은 나라는 포도주 만드는 체험을 하고 나면
그 사람의 이름으로 된 라벨(상표)의 포도주를 선물한다고 한다.
홈스테이(homestay) 할 때 10번을 자면 친척이라는 뜻으로 ‘친척 증’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을 모방해서
각국에서 만들어 발전한 것이 마을 만들기라고 했으며, 기념관 문이 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
<1. 교회십자가 2. 유자 3. 방화벽 4. 경관자산표지>
이 기념관은 지은 지 3년 밖에 되지 않았으며, 지갑에서 꺼낸 5천 엔 권 지폐를 보여 주면서 이 분이 유명한
여류소설가 히구치 이치요인데 미인박명이라고 25세에 죽었다고 한다.
일본이 3년 전에 천 엔과 오천 엔의 인물을 바꾸었다고 했으나 2004년 11월1일로 일본역사상 처음으로 화폐에
여자가 들어간 사람이 오천 엔의 ‘히구치 이치요’이라고 하며, 천 엔은 의학박사 ‘노구치 히데요’이라고 한다.
메이지 시대의 ‘히구치 이치요’로 그녀가 죽고 난 후에 발표된 연애소설 ‘일기(니키)’가 있는데 그 소설의 주인공이
그녀의 스승이었던 나카라이 도스이)가 아닐 까? 하고 생각한다고 가이드는 말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흠모했다는 것이 밝혀졌다라고 했는데 이곳은 나카라이가 태어난 집으로 일본사람들에겐
중요한 곳이지만 우리에겐 춘향전을 번역한 사람정도라고 한다.
<나카라이에 대한 설명을 해 놓았다. 2. 그가 번역했다는 춘향전 3. 나카라이 기념관 전경>
기념관 1층은 기모노를 입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며, 우측으로 가면 식당으로 차도 한잔 할 수 있고, 2층은
이즈하라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도서관이 있다고 하며, 들어가 보라고 했다.
내부에는 나카라이 것만 아니라 히구치 관한 것도 같이 전시되어 있고, 춘향전, 덕혜옹주에 대한 책도 있으며,
방에는 인형으로 만든 부부가 있었는데 일왕? 영주? 대마도 도주?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다미 한 장 평수는 0.5평이고, 6개가 깔렸으니 3평 되는 방으로 이 크기이면 월세가 6만 엔(54만원)이라고 한다.
2층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했는데 대마도가 우리하고 거래를 했지만 한 번도 통치를 한 적이 없었으며,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진 것은 임진왜란이라고 했는데 일본의 전진기지가 대마도라고 한다.
당시 대마도에 성인 남자가 3.000정도 있었는데 조선과 거래해서 먹고 살던 그들이라 앞장서는 것을 꺼려했으나
식구들을 볼모로 잡고, 배 잡게 하여 길을 잘 아는 그들은 정확하게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로는 무역이 끊기게 되면서 대마도는 무역을 못했으며, 본토는 필요한 물품을 중국에서 수입할 수
없었으나 중국과 교류 중인 오키나와 류큐국(유국)을 점령한 것을 숨기고 무역을 시켰다.
이 기념관하고는 상관은 없는 덕혜옹주와 고려 말 1373년 울산에서 태어났으며, 울산 학성이씨의 시조이자
조선외교관인 충숙공 이예(李藝) 선생님에 대한 책이 전시되어있었다.
그는 1397년 울산군수가 왜구에게 납치되자 아전인 그는 자진해서 따라갔다가 돌아 온 후 73세으로 죽을 때까지
40여 번 일본에 건너가 포로 667명을 귀환시켰으며, 그 공로로 종2품 동지충추원사에 이르렀다.
<1. 이 인형은 누구의 복장일까? 2. 덕혜옹주 책 3. 조선외교관 이예 책>
[나카라이 도스이(나가라이 토스이, 半井桃水, 1860~1926)와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96)]
나카라이는 대마도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는 대대로 소가 집안의 의사로, 부산초량에 있는 왜관에 근무하다가
1875년 16세 때 귀국했으며, 1882년 일어난 임오군란을 현지에서 보도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동경 아사히신문에 입사하여 춘향전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아사히신문에 연재하기도 했으며,
1926년 67세로 죽었고, 묘지는 동경 ‘요소지 절’에 있다.
히구치 아버지는 무사계급이었으나 모든 사업에 실패하고 그녀 17 때 죽었으며, 정혼자로부터 파혼을 당하고,
식구를 부양하기 위하여 1891년 그녀 아이 20세이며, 나카라이를 찾아 갔을 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그녀의 스승이 된 후 두각을 나타냈지만 집필에 의한 과로로 얻은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그녀는 ‘나 때문에’,
‘치열하게 피는 꽃’, ‘해질 무렵’ 등의 저서를 남겼다.
히구치 이치요의 이름이 한문으로 통구일엽(樋口一葉)인데 일엽(一葉)은 달마대사가 한 잎의 갈대로 배(舟)를
삼아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했고며, 우리나라도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수덕사의 여승 길일엽이다.
1896년 히구치 이치요가 죽던 해에 김원주가 태어났기에 그 의미로 춘원 이광수가 김원주 이름을 김일엽으로
지어준 것이다.
<1. 나카라이 도스이 2. 오천엔에 있는 히구치 이치요 초상화 3. 2층에서 내려다 본 기념관 1층>
☆노구치 히데요(野口 英世, 1876~ 1928년): 그는 후쿠시마 현의 이나와시로에서 태어났으며, 1살 때 난로에
떨어져 왼손이 심각한 화상을 입고, 사회의 멸시를 받으며, 자랐다.
그의 왼손을 70% 정도 쓸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동기가 되어 수술해준 의사의 제자가 되어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했으나 왼손 때문에 의사는 되지 못하고 연구원으로 세균학자가 되었다.
록펠러 의학연구소에 있을 때 독사를 연구하기도 했는데 황열병을 연구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갔다가 황열병에
걸려 가나에서 죽었는데 1913년부터 1927년까지 9번의 노벨 생리의학상 후보였으나 받지는 못했다.
그는 소아마비, 광견병, 황열병의 병원체를 발견했다고 주장했으나 사후에 그것들이 증명되지 못했다는 것을 밝혀
냈으며, 그때 당시 전자현미경이 없었던 시절이라 현미경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세균학자, 의학과 이학박사 등의 경력과 천 엔 지폐에 들어간 인물이지만 그가 주장 했던 수많은 병원체들은
대부분 잘못된 것이었음이 드러나 과학계에서 전대미문의 파렴치한 사기꾼으로 평가받았다.
<과학계의 사기꾼으로 평가 받은 노구치 히데요의 초상화가 있는 1.000엔 2. 아래에서 본 기념관 2층 >
[팔번궁 신사(八幡宮 神社) 탐방]
걸어서 5분도 안 되어 신사에 도착했는데 이곳에도 있는 스모경기장은 경기를 하는 곳이 아니고 가운데 둥근
모양은 대제사장의 의미라고 했으며, 스모와 제사장 관계는 와타즈미 신사에서 이야기했다.
신사로 올라가는 계단이 2곳으로 나누어지는 곳에서 보면 양쪽계단에 있는 석등(石燈)의 구멍 모양이 초승달부터
보름달까지 있는데 낮엔 잘 모르지만 밤에 불을 켜면 다양한 모양을 더 잘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갔는데 이 신사는 다른 신사보다 격이 떨어지는 신궁으로 정화소 데미즈야, 에마, 오미쿠지,
태, 사당, 2번 박수치고, 2번 절하는 등의 설명은 와타즈미 신사에서 했기에 기록하지 않는다.
☆팔번궁 신사: 이 신사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실존여부도 불투명하다는 신공왕후의 역사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만든 신사이지만 우리에겐 기분 나쁜 장소로 15대 일왕 ‘오진’의 신궁이다.
신공왕후는 14대 일왕 ‘주아이’의 부인이며, 15대 일왕 ‘오진’의 어머니이라고 하는데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한반도 남쪽에 있었던 삼한(마한, 진한, 변한)을 정벌했다고 한다.
<대제사장 의미인 스모경기장 2. 보름달 석등 3. 하현달 석등 4. 헌금 비(금일천원) 5. 팔번궁 신사>
[조선통신사비, 대마도경제, 사무라이 특권]
대마도역사 민속자료관으로 가다가 작은 수로에도 황금잉어가 살고 있어서 가던 길을 멈추게 했으며, 한 5분
걸으면 조선통신사비에 도착하는데 민속자료관 옆에 있는 큰 은행나무 아래 앉아 설명을 들었다.
대마도가 부유하던 시절은 12회에 걸쳐 파견되었던 통신사 시절이고, 다음은 이즈하라 서편에 은(銀)을 생산하던
광산이 있었던 시절에는 인구가 8만 명 정도 살았지만 지금은 폐광이 되었다고 한다.
20년 전 공동어시장이 있을 때 참 다랑어 같은 비싼 고기가 많이 잡히면 억대를 넘었기에 그들을 수용하던 시설이
지금 남아 있는 여관 등의 시설이나 공동어시장이 후쿠오카로 옮겨간 후로는 돈 될 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사무라이들이 가질 수 있는 특권 중 첫 번째는 칼 찰 수 있는 타이토(帶刀) 특권이며, 두 번째는 서열이 아래인 농,
공, 상을 죽일 수 있는 권한 즉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이 있었으나 체면 때문에 잘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질 나쁜 사무라이를 만나서 죽지 않으려고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허리를 굽실거리며,
중얼거린 것이 지금은 죄송하다는 뜻을 가진 ‘쓰미마생’이다.
사무라이들도 ‘상시’와 ‘하시’ 계급이 있었으며, 아래 계급의 사무라이는 위 계급이 지나갈 때 허리를 굽혔으나
동급이 지나갈 때는 굽히지 않아 서열을 정하기 위해 싸움을 했다고 한다.
세 번째는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가문의 문장이고, 네 번째가 성이라고 하지만 직업이 늘어나면서 세금을 걷을
때 성과 이름이 필요하여 농, 공, 상도 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 이름의 성(姓)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에 유럽 아름이야기와 함께 기록해 놓았다.
▶조선통신사비: 1992년 세운 조선통신사비는 통신사의 방문으로 이루어진 활발한 교류와 우호 관계를 21세기
한일우호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조선통신사지비(朝鮮通信使之碑)를 세웠다.
<1. 통신사 설명비석 2. 조선통신사비 3. 쓰시마(대마도)역사 민속자료관>
☆조선통신사: 일본과 조선은 외교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서 파견한 사절단은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라고
했으며, 일본에서 파견하는 사절단은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했다.
최초로 통신사가 오고 간 것은 1404년(태종 4년)이며, 1590년 선조 23년 일본의 정세를 알기 위해 황윤길을
정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구성하여 300명을 파견하였다.
돌아온 황윤길은 일본이 쳐 들어온다고 하였으나 조선정부는 김성일은 안 쳐들어온다는 말을 받아드려
임진왜란으로 엄청난 재난을 당했다.
임진왜란 후 에도정부의 노력으로 1607년 선조 40년에 사절단을 파견하였고, 그 후 1811년 순조 때
삼포왜란으로 인해 대마도와 통교를 단절할 때까지 204년 동안에 12번 방문하였다.
규모는 300~500명 정도 이었으며, 모두 비용은 일본이 부담하였는데 에도정부는 국내외에 위신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최고의 수준으로 대접하여 그 비용이 약 600억 원 정도가 소요되었고 한다.
통신사가 가져간 품목에는 인삼, 호피, 모시, 삼베, 붓, 먹, 은장도, 청심원 등이며, 그들이 머무는 객사에는
일본의 학자들이나 문화인과 그림 같은 물품을 사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일본 건물은 화재에 약한 건물구조 때문에 통신사가 통과하는 곳에는 일절불도 피우지 못하게 하여 불로
하는 장사는 모두 문을 닫았다고 한다.
에도정부는 쓰시마(대마도) 번사를 부산 왜관에 파견하여 조선정부에 파견을 요청하면 사절단이 구성되어
부산에 도착하면 쓰시마→시모노세키→오사카→에도까지 안내와 경호를 했다.
임진왜란 이후 1~3회는 주로 포로교환이 있었고, 대부분은 막부의 책봉이 있을 때 축하사절단으로 초청하여
국서를 주고받았으며, 조선은 주자학, 유교 등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었다.
일본은 고구마, 담배, 고추 등을 전했는데 고추는 포르투갈 상인이 중남미로부터 일본에 전하고 일본사람들이
임진왜란 때에 고추를 태워 매운 연기로 적이 화살을 못 쏘도록 하는 화생방 무기로서 쓰기 위하여 가지고
왔다는 설이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왜국에서 건너왔기에 '왜 개초'라고 하였다고 기록했다.
<1. 조선통신사가 다니던 길 2. 조선통신사를 안내하는 일본 사람 3. 재현한 통신사절단>
[대마도 역사 민속 자료관 탐방]
기억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닌데다 민속관 안에서는 사진마저 찍을 수 없었으나 대충 기록해 보면 통신사들이 전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 드는 것으로 그 첫 번째가 전쟁무기와 조총이다.
다음은 우리가 어릴 때 사용하던 도구들인데 바느질도구, 다림질도구, 도롱이(짚으로 만든 우비), 물레, 모시 옷감,
옷감 물 드리기, 저울, 주산, 등이 있으며, 거대한 진주, 대마도상징인 산고양이(삵) 박제도 통로에 있다.
사무라이에게 하사했던 검에는 자물쇠 장치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사 때 그 칼로 해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에 3개의 검을 3단으로 걸쳐두고 보관할 때에도 그 칼로 해함을 받지 않으려는 의도라고 한다.
여기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조선통신사 왔을 때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행렬도이라고
하며, 아메리노모리 호오슈(1668~1755)의 그림 앞에서 그의 대한이야기를 했다.
조선과 교역을 하기 위해 조선어를 배우려고 대마도에 최초로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한어사)’를 개소했고, 그는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통신사를 수행하여 부산초량의 왜관에서 3년간 조선어를 배우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가 남긴 말 중에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은 국가 간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로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 글과 그의
대한 이야기는 고려문 안에 있으나 우리는 가지를 않아 볼 수 없었다.
이젠 이번 여행은 마지막 탐방지인 아침에 보았던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로 향했는데 자료관에서 덕혜옹주의
남편 종무지공(宗武志公)이 그렸다는 그림을 못 보고 나온 것이 섭섭했다.
<자료관에서 주는 팸플릿 사진>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 탐방]
기념비는 자료관에서 3분 거리에 있었으며, 덕혜옹주를 ‘비운의 옹주’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인데 정신병이
있어서가 아니고 우리들에게서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대마도여행이 활성화되고, 책도 나오면서 옹주가 다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3년 정도라고 인데 옹주는 1912년
고종황제의 환갑 때에 귀인 양씨에게서 태어난 외동딸이라 고종이 무척 예뻐했다고 한다.
밖의 학교에 다니면 볼 수 없다고 하여 궁 안에 준명당(浚眀堂)이라는 유치원을 만들만큼 사랑했으며, 유치원에서
거문고, 피아노, 그림도 배웠는데 영친왕(英親王)이 일본의 이방자여사와 1920년 결혼하게 되었다.
1919년 고종은 죽기 전 영친왕처럼 덕혜옹주도 일본사람과 결혼할 것을 염려해서 황제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환과 미리정혼을 하려했으나 일본이 미리알고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 당했다.
그 때문에 김장환과 정혼하지 못했는데 예체능을 좋아했던 옹주는 말이 줄었으며, 1925년 옹주는 일본식교육을
받기위해 이방자여사 댁으로 보내졌으며, 일본귀족들이 다니는 여자학습원에서 공부했다.
이때 옹주는 보온병을 3개나 가지고 다녀서 이상해서 친구들이 ‘학교에서 물도 주는데 왜? 보온병을 들고 다니니?’
라고 물었더니 ‘나도 언제 죽을지 몰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 기념비에 대한 설명 2.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옹주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으며,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고, 순종이 사망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1929년 친 어머니 양귀인이 사망하여 귀국했지만 이것도 일본의 방해로 장례에 참석지 못하고 다음 날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그 후로는 학교에 다니는 것도 거부했다고 한다.
1930년 행동이 이상한 옹주를 이방자여사가 발견하여 진찰받게 하였으며, 몽유증 증세가 밝혀져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으면서 증세는 좋아졌으며, 다급한 일본은 정혼 자를 찾았다고 한다.
1931년 5월 가장 힘이 없었던 쓰시마 섬(對馬島) 13대 도주의 후예의 손자이며, 동경대 영문학과를 다니고 있던
작위가 백작이었던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 결혼시켰는데 둘 다 희생자라고 한다.
1932년 딸 정혜(正惠)를 낳았으나 병세가 악화되었고, 귀족의 재산이 몰 수 되면서 남편도 돈 벌이를 해야 하기
때문에 1946년 마츠자와 도립병원에 입원시켰다.
1950년 기자였던 정혼 자가 될 뻔했던 김장한의 형, 김을환이 입원중인 덕혜옹주를 찾아갔다 온 후 한국정부에
덕혜옹주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이승만대통령의 반대로 귀국하지 못했다.
결혼생활 불가능으로 1955년 이혼하게 되었으며, 1956년 딸 정혜가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 실종되었고, 1961년
11월 11일 미국으로 가던 박정희 의장이 일본에 들렸고, 김을환 기자에게서 옹주에 대한이야기를 들었다.
박정희 의장의 허락으로 정신병동에서 15년간 감금되었던 옹주는 1962년 1월 26일 귀국했으며, 남편도 낙선재를
찾았으나 병세가 악화될 것을 우려해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방자 여사를 보고 싶다는 말과 낙선재에서 오래 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1989년 창덕궁낙선재에서 76세로
별세했는데 이곳에 있는 결혼기념비는 팔번궁 신사에 버려져있었다고 한다.
관광객이 오니까 급하게 이곳에 다시 갔다 놨지만 ‘이왕가(李王家)’라고 낮추어 표기되어 있어 못 마땅한다고
했으나 힘이 없던 시절에 만든 것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1. 권비영의 장편소설 덕혜옹주 2. 덕혜옹주의 결혼식>
2차 대전 후 미국이 일본을 점령한 후 일본서 행한 것을 말했으나 기록할 만한 것은 미쓰비시(Mitsubishi)에서
만든 4륜구동차인데 전쟁 때 탱크를 만들던 회사이라서 유명하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일본에 살던 사람은 재일교포이지만 그 후에 들어간 사람은 신 한국인이고, 1950년
한국전쟁 이전에 살던 사람은 국적은 조선이었으나 한국전쟁 이후로는 국적을 정해야 했다고 한다.
이때기준은 고향이었는데 사상이 공산주의가 아니더라도 국적을 북한으로 두고 있는 사람은 남한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사람 중에 축구선수 정대제가 있다고 한다.
어제 저녁에 만났던 김해농협에서 온 일행 중 몇 사람을 만났는데 105명이나 되는 많은 일행이라 그중에 일부가
등산을 마치고 하산하다가 본 팀과 헤어지고 이리로 온 사람들이다.
본 팀은 우리가 이리로 올 때 벌써 시내로 가고 있었는데 그들을 어떻게 찾을꼬? 참 걱정되네.
이제 여행의 일정을 다 마쳤지만 10시가 조금 시간이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계곡으로 향했는데 욕심 같아서는
고려문 같이 우리와 관계있는 곳을 찾아가면 좋겠지만 이것도 감사해야지!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 덕혜옹주는 결혼하여 시댁이 있는 대마도엔 인사차 들리긴 했어도 살지는 않았지만
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대마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건립하였다.
현 기념비는 한국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2001년 11월 복원된 것이며, 옹주는 딸 정혜(正惠)는 이혼을 당한 뒤
유서 때문에 현해탄에서 자살했다고 잘못 알려졌으나 일본 남부산악지대에서 실종했다.
☆고려문: 고려문은 옛 이즈하라의 성문으로 조선통신사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만들어져 고려 문이라 했으며,
태풍으로 인해 훼손된 것을 1989년 다시 복원했다고 하나 가이드가 잊었는지 가지 않았다.
☆노문(櫓門, 야쿠라문): 현재는 주차장으로 쓰이는 곳에 있는 노문은 옛 대마도 번주(藩主)이었던 종가 가네이시
성의 복원 된 성문으로 성안에는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와 가네이시 성 영주의 정원이 있다.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입구에 있는 노문>
★ 일본 성(姓)의 이야기
1870년대에 일본은 납세자 명단을 전국적으로 작성하다 보니 이름만 가지고는 도저히 구별이 불가능하여 성을
만들게 하였는데 갑자기 성을 만들다보니 사는 곳과 직업이 주로 성씨가 되었다.
예로 산 밑에 사는 철수는 ‘산하철수’ 상품 파는 상인이면 ‘경매 영희’이라고 하며, 세계에서 인구대비 가장 성이
많은 나라가 일본으로 가이드는 약 2만2천개가 있다고 했다.
자료에는 10만개 이상이 된다고 하며, 일본 이름 중에 가장 흔한 것은 나카무라인데 이는 중앙마을(中村)이라는
뜻으로 어느 마을이던지 마을에는 중앙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요다(풍전-豊田: 풍요한 밭), 마츠다(송전-松田: 소나무 밭), 고가와(소천-小川: 작은 시내), 다나카
(전중-田中: 밭 가운데), 마쓰시다(송하-松下: 소나무 아래), 다카무라(고촌-高村: 높은 마을) 등이 있다.
1. 유럽의 이름들
유럽에도 성을 가진 역사는 200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며, 귀족들만 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한 볼프강 폰
괴테'나 '마리 드 메데치' 등에서 볼 수 있으며, '폰'과 '드'가 성이다.
폰은 게르만 귀족, '드'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귀족, '판'은 네덜란드 귀족에 쓰였다.
천민은 직업으로 구분되었는데, 빵집(베커), 메츠거(정육점), 슈미트(대장장이), 뭘러(방앗간), 양복장이(슈나이더),
베컨바우어(도자기 굽는 사람), 바우어(농사꾼)이고, 목축업에는 골짜기(마우어)로 분류하여, 위 골짜기(오버
마이어), 아래 골짜기(운터 마이어)이다.
샤를레망(샤를마뉴-카알대제) 대제의 이름에서 독일-카를, 프랑스-샤를, 라틴-카롤루스, 폴란드와 루마니아-카롤,
이탈리아-카를로, 스페인-카를로스, 영어-찰스, 네덜란드-카렐 등이다.
부족의 이름으로 피에르, 한스, 헬무트, 유르겐 등이 있으며, 스웨덴에는 20만개의 성이 있으나 40%에 해당하는
사람이 끝에 슨'son'를 사용하여 요한슨'Johnson'이 가장 흔한 성이다.
2. 기독교의 이름들
성경이름이나 세례명에서도 많이 왔는데 너무 복잡하여 각 나라 별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고, 또 어느 나라
언어인지 잘 모르는 것도 있으며, 조금차이가 있는 부분도 있지만 이해가 쉽도록 정리해 본다.
(1) 바울: ‘작은 자’의 뜻으로 예수님이 직접 선택한 제자는 아니지만 사도로 불리며, 영어- 파울로(Paul),
존 파울로(John Paul), 독일- 요한네스 파울(Johannes Paul), 이탈리아- 파울로 (Paolo) 라틴(바티칸
공용어) - 파울루스(Paulus), 그리스- 파울로스(Paulos), 러시아- 파벨(Pavel)로 표기된다.
그 밖으로 파올리(Paoli), 파울(Paul), 파울로(Paulo), 파울루(Paulo), 파울루스(Paulus), 파울리(Pauley,
Pauli, Pauly), 폴(Paul)로 표기된다.
(2) 베드로: ‘반석’의 뜻으로 영어- 피터(Peter), 러시아- 표트로(Pyotr), 포르투갈- 페드루(Pedro),
스페인-페드로(Pedro), 독일- 페터(Peter), 페테르(Peter), 이탈리아- 페트루스(Petrus), 피에트로(Pietro),
피에로(Piero), 프랑스- 피에르(Pier, Pierre), 그리스- 페트로스(Pertros)로 표기된다.
(3) 요한: 영어- 존(John), 프랑스- 장(Jean), 네덜란드, 체크, 폴란드- 얀(Jan), 야노비치(Ivanobich),
덴마크와 노르웨이- 한스(Hans), 독일-요한(Johann), 요하네스(Johannes), 라틴- 요한네스
(Johannes), 요안네스(Joannes), 러시아- 이반(Ivan), 스웨덴- 요한(Johan), 스페인- 후안(Juan),
포르투갈- 주앙(Joao), 그리스- 이오안네스(Ioannes), 헝가리- 야노슈(J?nos)이다.
예로 미국 영화배우 존 웨인,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 핀란드 작곡가 얀 시벨리우스, 스코틀랜드
출신 영화배우 숀 코너리가 있다.
여자들 이름으로 영국- 조안(Joan), 독일- 요한나(Johanna), 프랑스- 잔느(Jeanne), 스페인- 후아니타
(Juanita), 이태리- 조안나(Joanna)라고 한다.
(4) 야고보: 예수님 제자와 '주의 동생'이 있으며, 구약의 아브람의 손자 야곱도 같은 이름이다.
영어- 제임스(James), 스페인-티아고(Tiago), 하이메(Jaime), 이탈리아-자코모(Giacomo)가 있다.
파생어로 지미(Jimmy), 재클린(Jacqueline)등이 있으며, 프랑스에선 자크(Jacques)가 있다.
영어로 성 야고보(Saint James)는 지명으로 더 널리 알려졌는데 샌 디아고(San Diego)는 미국 서부
해안에 있고, 스페인에서는 산 티아고(San Tiago)라고 하는데 칠레 수도이다.
(5) 안드레: ‘남자다운’ ‘씩씩한’ 뜻으로 요한의 아들이요 베드로의 형제이다.
영어- 앤드류(Andrew), 앤디(Andy), 프랑스- 앙드레(Andre), 폴란드- 안제이(Andrzej), 헝가리-앤드라스
(Andras), 덴마트- 안데르센(Andersen)으로 표기된다.
(6) 빌립: ‘말을 사랑하는 사람’ 뜻으로 빌립을 필립보라고도 하며, 예수님의 제자와 초대교회 집사가 있다.
영어- 필립(Philip), 그리스- 필리포스(Philippos), 독일- 필리프(Philippe), 라틴어- 필리푸스(Philippus),
스페인- 펠리페(Felipe), 포르투갈- 필리페(Filipe), 프랑스- 필리프(Philippe)이다.
(7) 도마: ‘쌍동이’의 뜻으로 요한복음에는 ‘디두모’로 쓰여 졌으며, 예수님의 의심 많은 제자이다.
영어로 토마스(Tomas), 톰(Tom), 토미(Tommy)가 있다.
[그 밖의 성경 인명들]
(1) 엘리사벳: ‘하나님은 맹세이시다’ 뜻인데 (1)세례 요한의 어머니 (2)제사장 사가랴의 아내 (3)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친족이 있는데, 영어- 엘리자베스(Elizabeth, Elisabess), 베티(Betty), 리즈(Liz), 리사
(Lisa), 엘리사(Elisa), 엘시(Elsie), 베스(Beth) 베시(Bessie)가 있고, 스페인- 이사벨(Isabel)이다.
(2) 안나: ‘은혜 또는 자비’의 뜻으로 히브리어로는 ‘한나(Hannah)’인데 (1)눅 2:36-38에 나오는 안나
(Anna)로 성전에서 84년간 봉사하다가 아기예수를 만나 경배하고 기뻐하였고, 신약 성경에서 가장 오래
장수하였다. (2)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는 전설에 의하면 베들레헴 사람이며, 제사장 마단의
딸로 안나는 딸 형제를 두었고, 그 중 하나는 엘리사벳의 어머니 곧 세례 요한의 할머니로 희랍교회에서는
4세기경부터 안나 숭배가 시작되었다.
영어로 안나(Anne), 고앤(Ann), 낸시(Nancy), 애니(Anny), 낸(Nan), 내니(Nanny)이다.
또 안나를 성 카타리나(Saint Catherine)라고 부르는데 영어로 캐서린(Catherine), 카렌(Karen),
캐시(cathy), 케이티(Katie), 키티(Kitty)이고, 프랑스에선 카트린느(Catherine), 러시아는
예카테리나(Catherine)이다.
(3) 마리아: 1.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2.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3.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의 마리아가
있고, 구약 히브리어로는 미리암(Miriam)으로 모세 누이가 있다.
영어- 메리(Mary), 애칭으로 몰리(Molly), 스페인어- 마리아(Maria), 이탈리아어로 ‘모든 이의 어머니
뜻’인 마돈나(Madonna)가 있다.
(4) 수산나: ‘백합화’의 뜻으로 눅8:3에 나오며, 주께 봉사하였는데, 영어- 수잔(Susan), 수산나(Susanna),
수지(Suzy), 수(Sue), 프랑스- 수잔느(Sazanne), 스페인- 수사나(Susana)로 표기된다.
(5) 미가엘: ‘하나님과 같은 사람 누구리오?’라는 뜻으로 구약에 9번 나오나 유명한 사람은 없고, 천사장
미가엘(Mihael)이 널리 알려졌다.
영어- 마이클(Michael), 마이크(Mike), 믹(Mick), 미키(Mickey)가 있으며, 스페인- 미구엘(Miguel),
러시아- 미하일(Mikhail),미카엘(Michael)로 표기된다.
(6) 스데반: ‘면류관’ 뜻으로 행 6-7장에 나오며, 스데파노라고 하고,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 뽑은 7집사
중 한 사람으로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데, 영어- 스티븐(Stephen), 라틴- 스테파누스(Stephanus),
루마니아- 슈테판(Stefan), 세르보크로아티아- 스테판(Stefan), 폴란드- 스테판(Stefan),
헝가리- 이슈트반(Istvan)이다.
(7) 요셉: ‘그는 이김 여호와가 더하시기를 바란다.’의 뜻으로 야곱의 아들과 마리아의 남편이 있으며,
영어로 조세프(Joseph)이다.
(8) 유다(Judah): ‘하나님은 찬송을 받을 지어다’ 뜻인데 성경에 8명 나오며, 예수님 제자 중에 유다서를
기록한 야고보의 형제인 다대오 유다와 가롯 유다가 있고, 야곱의 4째 아들과 예수님의 동생이 있다.
유다(Judas)는 민족이나 인명으로 유대(Judea)는 땅의 지명으로 많이 사용 된다.
[아유모도시(다시 돌아 온 은어)를 찾아서]
아유모도시로 향하다가 마트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유치원생들을 만났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일본에서 아이들의 사진을 함부로 찍으면 안 되지만 차안이라 찍을 수 있었는데 일본아이들은 일사병을 방지하기
위해 꼭 모자를 쓰게 하지만 대신 면역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힌다고 한다.
<횡단보드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유치원생들>
일본사람들을 소식해서 장수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음식가지 수가 적다고 소식하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살겠다고
소식하는 사람도 본적이 없지만 장수의 원인 중에 일본이 세계에서 뛰어난 것은 첫 번째가 의약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아직 허가 되지 않는 줄기세포치료를 받을 수 있는데 한국에서 재발한 암환자들이 다시는 재발하면
위험함으로 후쿠오카를 방문하여 자기줄기세포를 배양해서 년 간 20회를 주사 맞는다고 한다.
그러면 거의 재발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일본에는 복약수첩이라는 제도가 있어 환자가 어떤 약을 먹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라고 하며, 1990년대에 단골약국 만들기 운동을 했다고 한다.
한국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의료보험비용이 많이 들지만 미국과 일본은 의료비용을 줄이기 위해 안
아프기 위한 제도로 미국은 주치의제도가 있으며, 일본은 단골병원제도가 있다고 한다.
한국은 치료의학이며, 일본은 예방의학이고, 이런 조은제도는 우리도 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했으며, 일본이
장수하는 이유는 첫 번째가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가이드건강실천은 헌혈이라 했는데 주기적으로 하면 건강 체크도 되고 나중에 도움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일본이 세계에서 강한 것으로 두 번째는 특수강이라고 했다.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건물에 설치하는 스프링은 일본이 최고로 47층인 고베시청에 적용했다고 한다.
아유(연어) 모도시(다시)는 이곳에 왔던 연어가 이곳이 좋아 다시 돌아 온 다는 뜻을 가진 곳이라고 했는데 이곳은
용량산(龍良山) 원시림 안에 있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자연공원이라고 한다.
일본에는 3가지 공원이 있는데 국립공원, 국정공원, 자연공원이 있으며, 국립공원은 인위적인 시설이 잘 되어
있고, 이에 준하는 국정공원이 있지만 인위적인 것이 최소한으로 있는 자연공원이 좋다고 한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의 계곡>
대마도에도 잡 꿀인 토종꿀은 한 되 정도의 가격이 30만 원 정도인데 단 맛도 있지만 쓴 맛도 있다고 하였으며,
귀해서 쉽게 구입할 수는 없다고 하였고, 지금부터는 계곡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이드도 들은 이야기인데 2년 전 허가 받지 않은 일본 무속과 그 신도들 200여명이 5대의 관광버스를 타고
대마도에서 가장 기운이 좋다는 이곳으로 왔을 때 어떤 일이 생길 가봐 경찰까지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즈하라에서 25분 정도 달려 아유모도시자연공원에 도착했으며, 물이 있는 곳은 이끼가 있어 미끄러우니 밟지
마라는 주의를 듣고 각자 계곡으로 향했는데 계곡위에는 출렁다리가 놓여있었다.
계곡의 맑은 물과 평평하고 넓은 바위는 울산에 있는 작천정(酌川亭) 계곡을 생각나게 했으며, 가이드는 파전을
구워 팔고 싶다고 했으나 바위위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서 20분 정도 산책할 시간을 가졌으며, 우리는 숲속을 따라 걷다가 철조망 안에 있는 모노레일 같이 생긴
것은 정체를 몰라 궁금했으나 꾹 참아야 했었고, 캠핑장을 지나 되돌아와 차에 올랐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의 계곡>
[식당을 향하여]
이번 여행의 마지막식사를 위해 이즈하라로 향하면서 오후에 있을 쇼핑에 대한이야기를 들었는데 혈관에 좋다는
낫토(Natto)와 관절통증에 좋다는 게르마늄 팔찌와 양식진주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어제 머물었던 이즈하라에서는 보이지 않아 몰랐으나 실제로 인구가 많이 사는 곳은 왼편에 보이는 곳에
있었고, 큰 건물도 많이 보였는데 시간이 있다면 가보고 싶었으며, 정각 12시 식당에 도착했다.
오늘 메뉴는 일본식 벤또(도시락)로 한글로 어머니라고 쓰인 상자 속에 있는 음식은 깔끔하고 먹음직스러웠으며,
‘스미마셍’ 하면 밥을 더 주었는데 일행이 아무리 ‘스미마셍’하고 불렀으나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중에 ‘스미마셍’이 아니고 ‘스리마셍’이라고 했기에 그들이 쳐다보지도 않은 것을 알고 배꼽잡고 웃었던 것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웃었던 일인데 마지막 식사는 이렇게 즐겁게 먹었다.
식사 후 쇼핑을 했으며, 히즈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300년 되었다고 소개 해준 ‘카스마키 빵’ 한 봉지를 사서
맛만 보는 것으로 전 일정을 마치고 히타가쯔 항구로 향했다.
<대마도여행의 마지막 식사 어머니 도시락>
[히타가쯔 항구로 가면서]
히타가쯔 항구로 가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으나 그중에 중요한 것만 간추려 기록해 보았다.
일본은 아파트보다 단독주택을 더 선호한다고 하며,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아파트 이름을 크게 써 노지 않고 현관
입구에 작게 써 노는다고 하는데 한국은 건설사의 선전 때문에 커졌다고 한다.
일본아파트는 계단식이 거의 없는 것은 지진 때 피하기도 좋지만 실제로는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라고 하며,
복도식은 방음이 잘 안 되기에 젊은 부부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단독주택에서 산다고 한다.
5월10일~20일까지 중국인 1만2천700명이 태국단체관광을 했는데 항공기 110편, 버스 400대, 객실 3만8천개를
예약했고, 내년에는 2만2천명이 여행할 것을 계획하고 있으며, 이번 관광수입은 한화 195억 원이라고 한다.
이처럼 일본에도 중국관광객이 넘쳐 나는데 후쿠오카에 5만 5천 톤급의 크루즈선이 1주일에 3번 들어오는데 2천
명 정도의 관광객이 내리면 버스 50대가 동원 되어 움직이면 도시가 마비될 정도라고 한다.
2500명 입국절차에서 마지막 사람들은 7시간이 걸렸으며, 이 시간동안 여행을 하지 못한 것을 이유로 컴플레인을
걸었다고 하는데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제주도는 이런 이유로 대형의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외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부산이지만 장소가 협소해서 크루즈선이 못 들어 와서 새로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을
짓고 있지만 부산항대교의 높이가 낮아 5만 톤 이상은 들어 올 수 없다고 한다.
크루즈 선은 물부터 시작해서 먹는 것까지 모두가 무료이라서 술을 팔아야 돈이 되기에 철저하게 외부반입을
막는다고 하며, 배에서는 관세가 없어 술값이 거의 1/3 정도 밖에 안 되어 매우 저렴하다고 한다.
일본은 취업 때 영어가 필요치 않는 곳은 영어시험을 안 본다고 하며, 대신 자격증을 우선시 하는데 필기시험이
10만 엔 이고, 실기시험은 20만 엔이 필요하여 한화 300만 정도가 필요하다고 한다.
승용차 운전면허도 15만 엔이고, 대형은 20만 엔이라 정말 열심히 하지 않고는 면허시험을 볼 수 없기에 제대로
된 자격증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이번여행의 모든 설명을 마쳤다.
<새로 짓는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긴의(금의, 琴の) 거목(大) 은행(銀杏) 나무]
‘긴노오이쵸’라는 은행나무는 오는 도중에 들렸던 간이 휴게소에 있었던 나무로 1500년 전 백제로부터 전해졌고,
일본에서는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이기도 하지만 높이는 23m, 둘레가 12.5m나 되는 거대한 나무이다.
‘바다에서 보면 나무가 울창한 산과 같다.’라고 고문서에 기록되어있을 만큼 웅대한 모습을 자랑하는 나무지만
1798년 낙뢰를 맞아 나무 안이 타버리고, 가지도 꺾여 졌고, 1950년 태풍으로 기둥줄기가 부려졌다.
‘긴노오이쵸’가 경이로운 것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은행나무: 이 나무는 ‘살아있는 화석’으로 1억5천만 년 전부터 쥐라기, 백악기, 빙하기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1과 1속 1종으로 오직 종류가 하나 밖에 없는 희귀한 종이라고 말한다.
‘살아있는 화석’이지만 이름만은 살구에서 왔는데 나무열매가 ‘은(銀) 색의 살구(杏) 씨’에서 왔으며, 유일하게
중국남동부에서만 살아남아 것이 삼국시대에 불교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한다.
영력이 있다고 믿어 절에 많이 심었고, 일본으로 전파되어 신사에도 심었는데 요사이는 병충해가 없어 살충제를
칠 필요가 없음으로 가로수로 많이 심었으나 열매로 인해 도로가 더러워졌다.
이제는 암수를 기릴 수 있다고 하니 얼마 있지 않으면 홀아비들만 도시를 지키게 될 것이라고 하며, 이 나무의
엄청난 생명력은 수천 년 된 줄기에서도 새싹이 돋아나서 자란다.
<거목 은행나무>
[쓰시마(Tsushima, 對馬)의 지리역사]
1. 지리
2마리의 말이 마주보고 있다는 뜻을 가진 대마도는 일본과 한국을 가르는 대한해협에 위치해 있으며, 5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졌고, 주요도시는 행정 중심지인 이즈하라(嚴原)는 쓰시마시청이 있다.
섬 전체가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지이고, 산지의 계곡들이 험준하며, 농경지는 4%에 불과하고, 계단식
밭이 많으며, 최근까지 화전경작을 했고, 산촌에서는 숯구이와 표고버섯재배가 주업이었다.
산은 조림이 이루어졌고, 바다에서는 오징어, 도미, 전복, 소라, 성게, 천연 김 채취를 하고, 아소 만에서는
진주조개 양식이 성하다.
대마도 총면적 705㎢(진도의 2배, 제주 3/10))이며, 인구 약 5만 명이고, 남북으로 82km, 동서로 16km이다.
2. 쓰시마 역사
일본 신화에 따르면 창조신들이 쓰시마를 일본 최초의 섬 중 하나로 만들었다고 하며, 중심지역인 이즈하라는
12세기에서 1868년까지 다이묘(大名) 소씨(宗氏)의 봉토로 소씨 일족의 거성(居城)이 있었다.
지금도 성터와 그 시주사 등이 남아 있으며, 1418년(태종 18) 대마도에 흉년이 들자 왜구들은 비인(庇仁)과
해주(海州) 해안에 침입했다가 제3차 정벌을 당했다.
소(宗)의 간청으로 조선이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를 개항하여 쓰시마는 에도(江戶, 1603~1867년)시대
말기까지 조선무역을 독점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수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1861년 러시아는 이 지역의 토지사용권을 확보하려고 했으나 실패로 끝났으며, 1905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쓰시마해전에서 패했다.
<작곡가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일본여성의 옷 기모노 모양에서 왔다.>
3. 우리나라와 대마도의 역사
1274년 1281년 두 차례 몽고군이 상륙하여 주민들이 대량학살 했으며, 농토가 부족하여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 콩 등을 답례로 받으나 왜구가 대마도를 근거지로 하여 출몰하자 정벌에 나섰다.
1389년(고려 창왕 2년) 박위(朴葳)가 제1차 정벌하였고, 조선은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통상의 편의를 봐주는
등 대마도를 우대하고, 회유책와 귀화정책을 썼지만 기근이 들면 해적이 되어 해안을 약탈했다.
이에 1396년(조선 태조 5년)에 제2차 정벌은 했으며, 1419년(조선 세종 1년)이해가 기해년이라 기해동정
(己革征))이라고 하는데 이종무(李從茂)가 제3차 정벌을 했다.
이 정벌이 가장 유명하며, 대마도에서는 누카다케 전쟁(糠嶽戰爭)이라고 했고, 일본은 규슈(九州) 제후를
총동원하여 대마도를 방어케 하므로 전도(全島)를 토벌할 수는 없었으며, 그해 7월 회군했다.
1663년 일본말 고귀위마(古貴爲麻)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고구마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현종 4년 김여휘
등이 일본에 표착하여 고구마를 먹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작물을 재배하면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고 보고한 기록이 있고, 1763년 영조 때 조엄이 통신사로 가던
중 대마도에 들러 종자를 얻어와 동래와 제주도에서 시험 삼아 심게 한 것이 고구마 유래의 기원이다.
대마도는 역사상 한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자와 통신사 안내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부산에서 정기여객선이
1주일에 6차례 운항되고 있는데 거리로는 이웃나라이나 마음으로는 먼 나라이다.
<쓰시마 시청이 있는 이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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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송박사님의 놀라운 자료가 던지는 의미를 파악하면서 잘 읽고 보고 느끼고, 감히 상상을 불허하는 열정에 놀라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