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姓名) |
본관(本貫) |
사적(事蹟) |
홍범도 (洪範圖) |
남양홍씨 예사공파 |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상 수령, 평북출생 갑산(甲山)에서 차도신 송상봉 허근 등과 같이 기병, 북청에서 일본군 1개 중대를 섬멸하였고 1920년 만주간도에서 일본군 소좌 안천(安川)이 인솔한 1개 연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림 |
홍세표 (洪世杓) |
남양홍씨 남양군파 징후 해봉공 휘 명원계 |
73주년 삼일절을 맞아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령 1919년 기미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같은 마을에 사는 홍범섭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어서에 자극을받아 태극기를 만들고 정산장날인 4월5일 군중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 만세운동을 하였다, |
홍종현 (洪鍾顯) |
남양홍씨 문정공파 |
을사조약을 반대하고 절사(節死)한 의사들의 뒤를 이어 지성수도(至誠修道)만을 일관하여 천운의 도래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 또다시 경술년 한일합방의 국치를 들으시고 대의초지를 더욱 굳게 명세 한 후 왜정 36년간 수십차 구금되었다, |
홍병기 (洪秉箕) |
남양홍씨 남양군파 |
1950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수여, 31운동 때 33인중 한사람이며 고종31년 동학에 가담하여 개화 운동에 참여하시었고 1919년 기미년에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방방곡곡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고 천주교 대표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일군에 항거하다가 체포되어 2년형을 받았다, |
홍사구 洪思九 |
남양홍씨 토홍계 |
63년 국민훈장 수여 열사 홍사구는 1895년에 스승인 안승우(安承禹)가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열사는 종사(從事)가 되어 활약하였으며 충주 싸움에는 병으로 인하여 참전치 못하고 재거할 것을 준비코자 제천으로가서 스승 안승우를 도와 주야를 가리지 않고 맹렬히 활약하였다, |
홍일섭 (洪日燮) |
남양홍씨 남양군파 빈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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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걸 (洪性杰) |
남양홍씨 남양군파 징후 |
중국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임관 후 장교로 항일투쟁에 헌신하다가 체포되어 4년간 옥고를 치렀다, |
홍기조 (洪基兆) |
남양홍씨 예사공파 |
31 운동 때 33인중의 한사람, 평북 용강출신 홍경래의 후손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용감, 22세에 동학당에 입당 1894년에는 손병희 영도하에 황해도 평안도 지방 대접주의창대령으로서 민중을 이끌고 봉기하여 개혁운동에 참가 1919년 3월 1일 천주교대표로 독립선언에 참가하여 운동을 지도하다 체포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에는 고향에 은퇴하여 왜경의 탄압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정신을 고취하다가 옥고로 이한 발병으로 사망 |
홍 진 (洪 震) |
본관 미상 |
충북영동출생 한성평리원 검사 정청 검찰청 검사역임 31운동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법무총장 내무총장 의정부의장을 역임하면서 독립운동에 활약, |
독립투사 홍범도(洪範圖) 장군의 주요연보(主要年譜)
(1868 - 1943년)
1895년 유인석(柳麟錫) 의병부대와 함께 항일투쟁을 벌었으며 1907년에는 함경도 갑산 삼수 등지에서 유격대로 일본군을 격파(擊破)하였다, 일제(日帝)의 독립군(獨立軍) 토벌(討伐)로 1921년 연해주로 망명해 항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는데 1937년 스탈린의 한인(韓人) 강제(强制)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의 크질오르다시로 이주 그 곳에서 7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했으며 1966년 5월에는 1,500만원의 예산을 들여 크질오르다 시립공원 묘지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묘역(墓域)을 성역(聖域)(뜻; 거룩한 지역)으로 꾸몄다.
* 홍범도 장군의 주요 연보를 보면 다음과 같다.
@ 1868년 8월 27일 평양 서문안 문열사 부근에 사는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후일 유인석(柳麟錫)이 여천(汝千)이라는 호(號)를 지어 주었다, 홍범도의 고조부는 순조(純祖) 때의 홍경래의 난(1811년 - 1812년)의 홍경래와는 가까운 친척이어서 화(禍)를 면하기 위하여 가족을 데리고 평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한다. 홍범도는 어머니가 산후병(産後病)으로 생후 7일만에 작고(作故)하고 아버지도 겨우 구걸하며 아이들을 키우다가 9세대 돌아가시니 15세까지 숙부(叔父) 집에서 살았다.
@ 1882년 15세 때 두 살을 높여 평양 신건친군에 들어가 나팔수로 3년간
근무
@ 1885년 - 1888년 황해도 수안군 수구면 종이공자에서 일을 하였다.
@ 1889년 - 1895년 함남 상수갑산에서 단양 이씨와 결혼하여 맏아들 양순 (용법)을 낳았고 사냥꾼 생활을 하였음.
@ 1895년 10월 11일 김수협등과 함께 강원도 철령 길목에서 일본군 수비대 12명을 소탕(掃蕩)하고 노획한 무기를 가지고 학포리로 이동하였는데 이것이 첫 번째 싸움이다.
@ 1895년 11월 강원도 철원 보게산에서 유인석의 의병 100명과 합류
@ 1896년 - 1897년 일군과의 전투에서 패배(敗北)하여 모두가 흩어지자 혼자 성천 여원 등지에서 의군(義軍) 활동을 하였음.
@ 1904년 10월 9일 노, 일 전쟁 때 북청군에서 체포되어 6개월간 복역하다가 도주 연풍 금광으로 은신하였음.
@ 1905년 - 1907년 북청군 안산면에서 포수들을 모아 연대장으로 추대되었음 또 안평군에서도 60여명의 포수들로 의병대 조직
@ 1907년 11월 안산면에 사는 일본의 앞잡이 일진회원들을 처벌하였으며 22일 화승총을 호송하는 일군을 후치령에서 습격 화승총 73정을 탈환하고 또 우편마차를 습격 다량의 무기를 탈환하였음.
@ 1907년 11월 25일 후치령에서 일군 수비대 아베대위 부대를 섬멸 첫 승리를 거두었다.
@ 1907년 11월 12일 의병대 재편성하여 의병장으로 추대
@ 1907년 12월 15일 장황리에서 북청으로 가는 일군 화물차를 습격 많은 물자, 무기를 노획
@ 1907년 12월 26일 삼수군 중평장에서 일본 함흥수비대의 기병대를 습격 섬멸하였음.
@ 1907년 12월 1,000명의 의병대로 뭉쳐 4개 분대로 편성
@ 1907년 12월 31일 400여명의 의병을 지휘 삼수의 일본군 분쇄
@ 1908년 1월 9일 세 번째 상수성을 공격 미츠키소좌의 200여명과 교전하였고 10일에는 갑산 수비대 공격 섬멸하였고 12일에는 갑산군 삼남면 일진회원 48명을 처형하였고 23일에 단천군 수하면 운송리에서 일군과 2시간 격전 끝에 격퇴시켰고 장진 혜산 지방의 전선줄을 전부 절단
@ 1908년 2월 10일에 하덕리에서 일군 60여명을 섬멸하였고 12일에는 혜산진 경찰분서 습격 21일에 갑산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격퇴 시켰고 23일은 단천군 하동리에서 또 25일은 청학 서북방 수의동에서 그리고 27일 하농리 28일 교벌리에서 일군과 교전하여 수십 명을 섬멸하였음
@ 1908년 3월 8일에는 구전부근에서 일군과 교전하였고 11일에는 삼수주재소 습격 20일에는 이씨 부인과 큰아들 양순이 일진회원 이재덕 김원홍 및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장평리 유치장에 구속됐음 25일에는 고원읍을 습격했고 29일에는 고소성리 부근에서 군화물운수차를 습격
@ 1908년 4월 19일 장진 능골에서 일군과 접전 85명을 소탕하였고 20일에는 삼수외곽에서 일본 헌병대를 섬멸
@ 1908년 5월 5일 일진회원 임재덕과 김원홍등에 의하여 부인 이옥녀가 피살되고 아들 양순이는 놈들의 편지를 가지고 의병대에 귀환시키는 놈들의 계략을 이용하여 덕팽장 거리에서 일군 190여명 일진회원 190명을 습격 200여명을 사살하고 임재덕과 김원홍도 처단하였음
@1908년 5월 8일 함남 장진군 연하산 병풍바위 끝에서 1864명의 의병대로 재편성 11개중대 33개 소대로 구성하였고 20일에는 통폐장골 쇠점거리에서 일본수비대습격 장병 40여명을 소탕하고 25일에는 갑산 간병에서 일군과 접전하였고 28일에는 갑산군 괘탁리 구렁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섬멸하였음.
@ 1908년 6월 2일 홍범도가 직접 180여명을 인솔 북청군 안상면으로 진격하였고 4일에는 갑산 상남사에서 10일에는 신정동 전투에서 일군과 교전 대승하였고 금창에서도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토벌대를 격퇴 16일 정평바배기 전투에서도 일군을 격퇴시켰음.
@ 1908년부터 1911년에는 군자금을 모금하여 무기와 탄약 등을 구입하여 삼수 갑산 단천 등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나 한때는 무기와 탄약이 없이 산림 속에 은신하고 있은 때도 있었다, 1910년 6월에는 남만촌에서 “창의회,,를 결성하고 윤인석을 총재로 추대하였고 예하 정예부대를 이끌고 함북 경원 세천 등에서 일군수비대를 습격하여 승리하기도 하였다.
@ 1913년부터 1915년까지는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항구나 금광 또는 어장 등에서 노동을 하여 군자금을 모아 무기를 구입했다.
@ 1919년 봄 중국 길림성 안도현 명월구에서 “대한독립단,,을 창설 사령관에 추대되었고 그후 이동휘 등과 합류(合流)하여 일 천명 이상의 병력을 이루어 안포진을 공략하여 승리하였다, 1920년 병력이 2,000명이 넘었고 회령을 습격하였다. 홍장군의 대표적인 전투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만을 간단히 소개한다.
* (가) 봉오동 전투
@ 봉오동 전투는 일반적으로 삼둔자 전투 후안산(後安山) 전투 봉오동 전투 등 계속된 전투가운데 한 전투를 말한다, 1920년 6월 4일의 삼둔자(중국 도문시 월창향 마패일대를 가르키는 말) 전투와 6월 6일의 후안산 전투에서 일군의 사망자가 120여명이나 됐다는 사실은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봉오동 전투는 홍장군이 중국땅 간도에서 독립군을 지휘하여 일군과 싸운 첫 번째 전투이다, 봉오동은 두만강 대안에서 위치한 남양(南陽) 맞은편 도문시에서 동북쪽으로 약 30리 떨어진 곳에 있다, 동서북 삼면이 높고 가파른 산으로 둘러 있어서 방어하기는 쉬워도 공격하기에는 나뿐 천연적인 요새지이다, 봉오동안에는 당시 300여 가구의 농가가 산재해 있다 이 고을 안의 개간지(開墾地)는 모두가 독립군 부총장 최명록(崔明錄)의 소유인데 이곳뿐만 아니라 근처(近處)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던 최명록은 이 토지에서 나오는 수확(收穫)으로 각 독립군의 군량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홍장군은 1920년 5월 주력부대를 인솔하여 봉오동에 들어가 있었는데 삼둔자, 후안산 전투소식을 접한 후 그 고을의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병력을 신속히 배치하고 일군의 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당시 독립군 병력은 홍장군 의병 63명 최명록 독립군부대 100 신민단 60여 명 도합 230여 명이었다.
일군 병력은 야스가와소좌가 이끄는 부대등 약 300여명으로 6월 7일 새벽에 후한산 전투후 봉오동마을에 들어와 독립군 지휘부가 있는 곳을 향하여 진격해 오는 것을 12시경에 미리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이 불의에 공격하여 맹사격을 가하였다. 사면이 가파른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곳이다 적은 변변히 대항도 못하고 저녁 무렵에야 많은 시체와 죽은 말을 남겨두고 파파정 쪽으로 외각 하였는데 이것이 봉오동전투로서 6월말 경부터 중국의 언론에 의하여 보도되었다.
* (나) 청산리 전투
청산리는 삼도구 동신장에서 20리 떨어진 산간마을인데 근처마을인 송림평 백운평 연월평을 통칭하여 청산리라 부르며 이곳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를 통털어 청산리 전투라 한다. 청산리 전투는 우리의 독립전쟁사상 뚜렷하게 알려져 있는 전투임으로 설명을 약하고 다만 홍장군의 전공만을 기술하면 1920년 10월 7일부터 일군이 간도에 출병하여 우리 독립군을 소위 소탕하기 시작했는데 같은 해 10월 21일 청산리 전투다 시작되어 김좌진 장군의 지휘하에 송림평 배운평 천수평 어랑촌 전투가 있었으며 홍장군의 지휘하여 치룬 전투로는 완루구 전투 어랑촌 전투 맹가곡 전투 천보산 전투 고동하 전투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크고 적군에게 손실을 많이 준 전투가 김좌진장군이 지휘한 배운평 전투와 홍장군이 지휘한 완루구 전투이며 두 장군이 함께 지휘한 전투가 어랑촌 전투인 것이다.
이 전투에서 적군(敵軍)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과 1,000여명의 병졸이 죽었든 것이다. (청산리 전투는 나중에 상술(詳述)하였다)
@ 1921년 1월 우수리강을 건너 이만으로 옮겨 4월 12일 대한독립단을 조직 부총재에 추대됨
@ 1922년 12월말 소련에 남아 여생을 마치기로 하고
@ 1923년 - 1927년 이만의 카가린구역의 꿈나무 관리위원장으로 활약하고
@ 1937년 연해주로부터 가자흐스탄, 모질오르다시로 이주 조선인주장 수위로 있었고
@ 1941년 1월 16일 크질오르다시에서 희곡 홍범을 공연(公演)한 첫공연식에서 개막사를 하였고
@ 1941년 10월 25일 크질오르다시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음
* (다) 맺는 말
홍범도 장군은 민비시해(閔妃弑害)사건이 있은 후인 1895년 10월 강원도 철령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모아 봉기하였다, 그후 을사조약, 정미조약이 일제의 강압 속에 체결되자 1907년 11월부터 함경도 북청에서 또는 삼수, 갑산에서 의병을 거느리고 여러 번 일군을 섬멸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있었고 1919년 3, 1운동이 있었는데 홍장군은 직접 의병군을 이끌고 국내로 진격하여 일군과 많은 교전을 하면서 승리로 이끌었다.
이러한 독립전쟁가운데 가장 큰 전투로는 1920년 6월의 봉오동 승첩과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을 들 수 있다. 이 두 대첩은 한국의 독립전쟁으로서는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역사적인 전투이며 후일 한국 사람으로 이 대첩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홍장군은 항일전쟁터에서 사랑하는 부인과 두 아들까지도 잃었고 홀로 단신으로 1895년부터 1938년까지 오르지 조국의 광복을 위해 43년 간을 생명을 걸고 일군과 싸워 많은 승리를 거두었건만 1943년 광복 2년을 앞두고 애석하게도 그렇게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역 만리에서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으니 참으로 원통하고 통탄할 일이라 하겠다.
일군들은 홍장군을 날르는 장군이라고 하여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우리 동포(同胞)들도 축지법(縮地法)을 하는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홍장군은 조국의 산과 계곡에서 또는 압록강과 두만강 근처의 출장한 원시림지대에서 때로는 중국의 넓은 황야들판에서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에서 일군과 격전을 거듭하면서 한평생을 보낸 분으로 우리의 독립투쟁사상 이렇게 장기간 처절하게 조국광복을 위하여 투쟁한 애국투사는 고금을 통하여 홍범도 장군뿐이라고 할 수 있다.
홍장군의 기록으로 주된 것은 일지(日誌)이고 직접 함께 싸웠다는 사람들의 증언과 청산리 싸움의 목격자나 임시정부(臨時政府)의 발표 그리고 일본의 발표와 문건이 있다. 그리고 근래에 와서 영변역사연구소와 각 대학의 교수들이 장군에 관한 연구자료등을 발표하고 있다.
장군의 본명은 홍종학이라고 한다, 1907년 의병으로 활약하면서 홍범도로 개명했다고 한다. 본 고향은 자성이라고도 하는데 현 자성군수 김병수씨 증언에 의하면 동기간이나 친척들이 피해를 당할 것을 우려하여 평양이 출생지라고 했다고 한다, 여하튼 홍장군의 남양홍씨임은 명확한 것이다.
(* 역사교본 247 페 -지 홍경래 난에 홍범도의 본관의 대하여 기록하였으니 참고 바람) (남양회보 18호에서 水落山 松亭 洪光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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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의사(己未義士) 홍세표(洪世杓)
제73주년을 맞아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수여
남양홍씨 남양군파 징(徵) 후 해봉공(海峰公) 휘(諱) 명원(命元)계 홍세표 애국지사(愛國志士)는 제주목사 홍순오의 장남으로 1887년 정산면 백곡리 326번지에서 출생하여 학문을 익히고 농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擴散)되자 같은 마을에 사는 홍범섭이 서울서 가져온 독립선언서에 자극을 받아 임의제, 윤석희, 박상종 등 5명이 거사계획을 수립 태극기를 만들고 정상장날 4월 5일 군중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 만세운동을 하였다.
이 만세사건으로 홍세표 등 주모 5명은 체포(逮捕)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2년 - 1년6월의 언도를 받고 공소하여 경성 복심원에서 1년을 선고받아 복역하였으며 188명이 태형을 받았다. (당성 67호에서)
치당(痴堂) 홍종현(洪鍾顯) 선생 독립운동 약사(略史)
치당 홍종현 의사는 남양홍씨 시조하 32세 문정공파 경북 의성(慶北 義城) 출신 선생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을 반대하고 절사(節死)한 의사(義士)들의 뒤를 이어 지성수도(至誠修道) (뜻; 지극한 정성으로 도를 닦음)만을 일관(一貫)하여 천운(天運)의 도래(到來)(뜻; 닥쳐 옴)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 또다시 경술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의 국치(國恥)를 들어서 대의초지(大義初志) (정당한 의리를 처음부터 끝까지)를 더욱 굳게 맹서(盟誓)한 후 왜정(倭政) 36년간을 하루같이 관청지시를 전부 불응(不應)하여 수십 차 구금과 4, 5번 영위생활(囹圍生活)을 계속하면서 나라를 위한 지성만을 하늘에 축원하던 애국자천신모범(愛國者薦信模範)의 주인공 치암 홍종현선생이 건재(健在)하셨다.
편모(片貌)를 소개하면 원적은 경북 군위군 군위면 외양리(軍威君 軍威面 外良里)에서 몹시 어려운 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하고 지내게 되었다, 선생은 본시 천성(天性)이 강직하고 모든 일에 순종하였고 특히 부친(父親)에게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원근향리(遠近鄕里)에 칭송(稱誦)이 자자하였고 갑진혁신 운동이 전개되자 자진 참가하여 대활동(大活動)을 하였으며 기미독립운동이 봉기(烽起)하자.
생사를 불구하고 지방각처를 일주하면서 만세를 부를 것을 선동(煽動)하여 독립운동에 전력하시다가 1년여에 철창고초를 당하였다, 그후 세월이 갈수록 배일사상(排日思想)(뜻; 일본을 배척함)은 고조(高調)에 달하여 당시 총독정치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최후 일경(日警)들은 선생을 가리켜 홍종현이가 아니라 홍충신이라고 지명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선생의 이의이충(以義以忠)에는 일본 군경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천운순환(天運循環)에 무왕불복지(無往不復之)라 기미독립선언 27년 후 1945년 해방(解放)으로 포학무도(暴虐無道)한 일본은 물러가고 우리민족은 자유독립을 쟁취하였다, 우리 정부가 수립되고 정부시책에 선생은 솔선수범 국민의 의무를 이행(履行)하였다 당국으로부터 방문객(訪問客)이 좌석(座席)에 가득함은 물론 물심양면(物心兩面)의 원호(援護)와 훈장(勳章)이 수여되었다, 선생의 입지불변(立志不變)한 대의(大義)는 세계(世界)에 표치가(表幟家)가 되고 우주(宇宙)에 등대(燈臺)가 되었다.
(당성 52호에서)
인암(仁菴) 홍병기(洪秉箕) 선생 독립운동 약사(略史)
홍병기선생은 자(字)는 개훈(啓薰)이요 호(號)는 인암 또는 삼묵(三黙)이다, 1869년 기사 11월 2일 고종(高宗) 6년에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출생하시었으며 남양홍씨 시조하 29세손이요 남양군파 첨지중추(僉知中樞) 서한공(瑞翰公)의 7대 손으로서 3 1운동 때 33인중 한사람이며 고종 31년 동학(東學)에 가담하여 개화운동에 참여하시었고 1919년 기미에 고종황제가 승하하시자 배일감정이 폭발되어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심야(深夜)를 타서 동지들과 거국적(擧國的) 삼일운동을 획책하였고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일군에 항거하다가 체포되어 2년형을 받았으며 출옥(出獄) 후 1922년 7월에 천도교 동지들과 독립운동단체로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그 뒤 1926년 12월에 먼저 만주(滿洲)에 진출하여 고려혁명당을 조직한 동지들을 만나기 위하여 만주로 건너가다가 신의주에서 일군에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다시 천도교 장로로서 교세확장과 항일운동에 힘썼고 1950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 복장을 받으셨다.
(당성 5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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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구(洪思九) 열사(烈士)
1963년 국민훈장 수여
열사는 1878년에 순흥원구리(順興院邱里)에서 출생하니 자(字)는 우용(又容)이라 불렀고 남양홍씨 (토홍계) 홍성유(洪聖裕)의 아들이다 성유의 부모들이 성씨(成氏)와 약혼시켰다가 뒤에 성씨가 목묘(木眇)(뜻; 애꾸)하다하여 퇴혼(退婚)코자하니 성유가 듣고 이미 정혼(定婚)하고 퇴혼함은 의리가 아니다 하여 결혼하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열사가 둘째이다.
열사는 상주성씨(尙州成氏)와 결혼한 후 지평 상우리(砥平 上右里)로 이거 하였다, 그곳에서 하사(下沙) 안승우(安承禹)에게서 수학(修學)하니 위인이 총명하고 정직하였으며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글씨가 명필이었다.
열사가 화포집(花圃集) (병자호란의 삼학사(三學士) (통홍계) 홍익한(洪翼漢)을 보고 감탄(感歎)하여 베끼다가 출진(出陣)하느라고 끝마치지 못하였다.
1895년 (고종 32)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 된 뒤 스승인 안승우(安承禹)가 제천(提川)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키자 열사는 종사(從事)가 되어 활약(活躍)하였으며 충주(忠州) 싸움에는 병(病)으로 인하여 참전(參戰)치 못하고 재거(再擧)할 것을 준비코자 제천으로 가서 스승 안승우를 도와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맹렬(猛烈)히 활약(活躍)하였다.
1896년 4월 13일 제천에서 일본군이 인솔한 적군(賊軍)과 격전(激戰)하던 중 안승우가 적의 탄환(彈丸)에 맞아 사로잡히니 열사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호위하였다, 안승우는 열사에게 {나는 장령(將領)으로 주검을 면할 수 없으나 군(君)은 나와 같이 죽는 것이 무익하다}하고 빨리 물러가서 후사(後事)를 계획하라고 권하였으나 열사는 {의(義)를 위하여 생사를 같이하자 본래부터 결심하였거늘 항차 스승이 죽음을 당하는데 문생(門生)이 어찌 홀로 살고자 하겠느냐} 하고 움직이지 않음에 수 삼차 간권(諫勸)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적구(賊寇) (즉; 일본군)가 안승우의 의지를 돌리려고 권유하다가 꾸짖음만 받고 이에 실패(失敗)하자 안승우를 죽이고 말았다, 이때 옆에 섰든 열사는 감추었든 검(劍)으로 몸을 돌리며 적(賊) 1명을 죽이니 여러 적병(賊兵)들은 총(銃)을 쏠틈이없어 검을 들고 달려들어 열사의 한 팔뚝을 잘랐다.
열사가 꾸짖기를 마지않음에 또 한 팔뚝을 아주 짤랐으나 또 꾸짖기를 마지않자 적은 총을 쏘아 사살하니 순사(殉死)한 시체의 참상은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이때 열사의 꽃다운 나이 19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홍씨 가문에 화포(花圃)가 한 분 더 났다] 하고 칭송하였다. 열사의 부인 성씨는 남편의 시체를 보고 {장부의 순국은 충성된 일이나 모친을 버리고 죽음은 효도가 아니다} 하고 울지 않고 마음을 청하여 통곡하는 시어머니에게 권하며 자기도 미음을 마시면서 극진히 위로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니 시모도 감히 호곡하지 못하였다.
장례(葬禮)를 치르고 시모가 자다가 보니 며느리가 없음에 당황하여 찾으니 협실(狹室)(뜻; 좁은 방)에서 목매어 있음을 발견하고 급히 구출하였다, 시모(媤母)가 네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느냐하니 성씨(成氏)는 자기(自己)의 경거망동(輕擧亡動)의 죄를 용서하시라고 빌고 차후로는 시모를 효성(孝誠)으로 봉양하니 성씨의 방년(芳年)이 18세였다.
도사(都事) 이도철(李道轍)이 자기 선산(先山)에 열사가 안장케 하였고 제천 선비들은 통문(通文)을 내어 충북 일대에서 배양(裵陽) 간성(杆城)까지 1,700여량의 의연금을 거두어 집을 사주고 성씨의 고부가 살도록 하여 주었다.
그 후 성씨는 내가 순사(殉死)못하였으니 양자를 두어 후사(後嗣)를 있겠다 하고 상주(尙州) 친정으로 가서 약 반년동안 있을 무렵 하루 밤 시모가 별세한 꿈을 꾸고 대경하여 급히 귀가하니 과연 시모는 병이 나서 몇 일간 신음하고 있었다, 성씨가 꿈을 꾸고 급히 돌아왔다는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성씨의 효심에 감복하였다. 이튼날 시모가 별세하니 원근(遠近)의 선비들이 다 모여 초종장례를 극진히 예로써 치루었다.
성씨는 온갖 정성을 다 바쳐 화포 홍익한의 종손인 홍모(洪某) 승지(承旨)의 셋째 아들을 양자로 얻어 열사의 후사(後嗣)를 이었다 한다, 열사의 집은 참으로 충렬(忠烈) 쌍전(雙全)의 구감(龜鑑)으로 길이 빛나리로다.
(당성 53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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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독립투사 홍성걸(洪性杰)
1999년 12월 8일 조선일보 [나의 20세기] 난에 김학철(金學鐵)씨의 “20세기의 신화,,의 진실이라는 글이 실려 있어서 이 글을 줄여서 소개한다.
“20세기의 신화,, 의 저자인 김학철(金學鐵)옹은 본명이 홍성걸(洪性杰)씨로소 남양홍씨 남양군파 당성군 휘 징(徵)후 좌랑공 휘 상연(尙淵)계 덕원문중(德原門中)이 신데 서울의 보성고보(普成高普) 4학년에 중국육군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입관 후 장교로 항일투쟁에 헌신하다가 체포되어 4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후부터는 김학철이라고 성명을 바꾸어 사용하여 왔으며 해방 후는 모택동 김일성의 공산독재청치를 혹독하게 비판하다가 10년 징역형도 살았고 22년간을 강제노동에 끌려갔다가 풀려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항일 투쟁할 때 한쪽 다리도 잃었다.
지금은 중국 연변에서 작가(作家)로서 작품활동(作品活動)을 하고 있는 애국투사이다, 1998년 10월 20일 모교(母校)인 보성공등학교(普成高等學校)에서 [자랑스런 보성인(普成人]으로 추대를 받은 바 있다.
(남양회보 24호에서)
우리 현대사의 기여도(寄與度)컸던 홍문 홍재학(洪在學)
,, 홍재구
(마천공종중 제공)
광복(光復) 50주년을 맞아 초대(初代) 이승만(李承晩) 대통령(大統領)의 생애(生涯)와 우리 현대사(現代史)가 재조명되면서 우리 홍문(洪門)의 개화파나 독립투사들이 하나 하나 새로이 부각(浮刻)되어 가고 있다, 2000년 2월 8일 자 중앙일보(中央日報)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 ”사진(寫眞)으로 본 일대기 (3),, 에 실린 이승만의 “옥중개화당,, 동지(同志)들 사진에 홍재구씨의 모습이 엿보인다.
홍재구씨는 마천공(麻川公)후예(後裔)로서 일제침략(日帝侵略)을 규탄(糾彈)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가 투옥(投獄)된 것으로만 알려졌을 뿐 확실한 것이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진으로 이승만의 옥중개화당 동지였으며 이상재, 안명선 등과 교분(交分)이 두터웠음이 드러났다.
또 홍재학씨의 경우는 일제침략(日帝侵略)을 규탄(糾彈)하는 상소(上訴)를 여러 차례 올렸다가 붙잡혀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한 애국지사로 전해왔는데 그 가 재남(宰南) 박장호(朴長浩)씨나 유인석(柳麟錫)씨 등과 어울렸음이 드러났다.
제남 박장호씨의 진짜 손자(孫子)로 경기도 파주군(坡州郡) 적성면(積城面) 박정희(朴正熙)씨가 인정(認定)받는 과정(過程)에서 밝혀진 것이다. 홍재학(洪在鶴)씨 역시(亦是) 마천공(麻川公) 후예이다.
그리고 중앙일보의 “ 다시 사는 현대사” 에 의(依)하여 홍영식(洪英植)씨 등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 개화파(改化派)도 시대(時代)의 선각자(先覺者)였음이 분명해져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