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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스크랩 13.?사무엘하 12:1-31 여디디야?
꿈나무 추천 0 조회 41 15.01.18 13: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3(2013.3.31)

사무엘하 12:1-31

여디디야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취한 다윗의 범죄는 하룻저녁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진행된 사건이다. 어느 날 저녁 늦게 일어나 지붕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았고 사람을 보내서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였고 그런 다음 여인을 궁으로 데리고 와서 취하였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여인이 임신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자 전쟁터에 있는 여인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와 집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들어가지 않으니까 그를 다시 전쟁터로 보내 죽게 한 다음 밧세바를 궁으로 들여 아내로 삼았다. 한 순간의 잘못이 아니고 하루 이틀의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혼자 은밀히 행한 범죄가 아니라 여러 달 여러 사람이 동원된 치밀한 범죄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을 보고 계셨고 다윗의 본심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비유를 통해 다윗의 죄를 지적하시며 하나님께서 보시는 다윗의 죄가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셨다. 죄인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에 있다.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는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셨다. 그러자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13)라고 하였고 이에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13b-14)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죄에 대해 사하심을 받았으며 또한 죄로 인해 죽지 않는다는 약속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것으로 다윗의 죄 문제는 다 해결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여 낳은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다윗은 죽이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다윗이 낳은 아이를 죽이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본문 14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사람을 죽이는 죄를 지었으니 가인도 죽어야 한다고 선고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인은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일까 두렵다고 말할 때에 표를 주시면서 죽임을 면하게 하셨다.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신 것을 알았을 때 가인은 분노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 즉 죄가 가인을 사로잡아 지배하고 있으며 철저히 가인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셨었다.

또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있을 때에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했을 때도 아론이 잘못했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았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32:25)라고 선언하였다. 죄를 모르는 자는 단지 범죄한 행동만 지적하고 책망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죄가 죄인의 우발적이고 잘못된 행동이라고 보시는 것이 아니라 죄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고 그가 죄로 사람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죄인들은 죄의 지배를 거부할 수 없고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에 대한 이러한 성경적 인식이 없기 때문에 다윗의 행동 속에서 다윗이 죄에 잡힌 존재라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단지 다윗의 잘못이라고만 말한다. 다윗의 행동만을 죄로 생각하기에 죄의 결과에 대해서도 죄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해 버린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낳은 아이를 치시니까 그것이 다윗의 행동을 심판하시고 형벌을 내리셨다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본질적으로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에 의한 것이라고 밝힌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씀하는 여호와의 원수란 이방인이라고 보기보다 사단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다윗의 죄로 인해 사단에게 훼방거리가 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다윗이 낳은 아이를 죽이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다윗의 아이를 죽이심으로써 죄의 결과가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단절인데 그 현상이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으로 보여 주신다. 그것이 곧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다윗에게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는 다윗이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에 다윗 대신 아이를 죽이신 것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를 볼 때 죄를 지어도 용서만 구하면 다 된다는 말을 할 수 없고, 다윗이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다는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윗은 아이가 심히 앓게 되자 아이를 위해 금식을 하며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간구한다(16). 심지어 그 집의 늙은 자들이 다윗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듣지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계속 간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이레 만에 죽는다. 그러자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20)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이가 죽으면 더 상심하여 죽기 전보다 오히려 더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신하들은 다윗의 행동을 의아하게 여겼다. 그래서 다윗이 이렇게 말한다. “22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22-23). 다윗의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우리는 은연중에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무참히 무너뜨리는 것이 본문에서 보여 주는 다윗의 기도이다. 아이가 이레 만에 죽었다는 것을 보면 다윗의 금식과 간구가 이레 동안 계속되었음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그러한 다윗의 간절함을 외면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이가 정녕히 죽으리라는 말씀 그대로 행하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셔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를 살리셨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는가? 아마도 다윗의 간절한 기도가 기준이 될 것이고,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진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원수로 하여금 하나님을 훼방할 거리를 더 크게 얻게 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간구를 들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시행하신 것이다. 다윗은 인간의 간절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이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음식을 먹었다.

그러면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내려고 하는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서 나오는 기도가 바로 죄 가운데서 죄에 의한 욕심에 이끌려 자신만을 위해 나오는 기도를 보아야 하고 그것을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대로 이루시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지도록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기도에 대한 성도의 자세이다.

다윗은 다시 밧세바와 동침하여 아들을 얻었다(이때 얻은 아들을 본문에서 솔로몬이라고 나타내고 있지만 실제 사무엘하 5:14과 역대상 3:5을 통해서 보면 그 사이에 다른 아들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통해 얻은 아들을 솔로몬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에는 솔로몬이 언약을 위한 계시를 담고 있는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24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24-25).

다윗에게 있어서 솔로몬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증표이다. 여디디야란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이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병 주고 약주는 하나님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만약 세상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솔로몬이라는 이 아이는 다윗이 승승장구하던 그 때에 태어났어야 했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세력이 확장되어가던 그 시절이야 말로 누가 봐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무작정 좋은 일만 있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기는 것이 세상(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이 범죄를 하고 아이가 죽은 뒤에 솔로몬을 주셨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셔서 솔로몬을 주신 것으로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에서 생각하는 상식,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생리적 현상을 통해 얻은 혈육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의한 아들만이 언약을 이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범죄와 그 죄를 대신한 죽음과 연관하여 주어졌다. 그것을 보여 주는 것이 솔로몬의 등장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통해 다윗의 왕위를 이어가시고 이 아들을 통해 언약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신다. 결국 다윗에게서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왕권을 통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 다윗의 범죄 속에서 이방인 헷 사람 우리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언약을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곧 다윗이 결코 메시아가 될 수 없고 부실하고 못난 다윗의 왕권을 이어가고 언약을 이루시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 다윗이 무시하고 하찮은 존재로 여긴 이방인의 희생을 넣어서 완전하게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주어진 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2)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다윗 왕의 군대장관 요압은 암몬 자손의 왕이 사는 성 랍바를 공격하고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는 급히 전령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다윗 왕으로 하여금 최종적인 승리를 취하도록 했다. 요압은 전쟁의 승리에 대한 모든 영광을 다윗 왕에게 돌리기 위함이었다. 요압의 전갈을 받은 다윗은 급히 군대를 이끌고 랍바를 점령하였다. 다윗은 적군의 왕이 쓰던 금으로 된 왕관을 탈취하여 자신의 머리에 썼고 또한 엄청난 양의 전리품들을 얻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을 노예로 부리며 막강한 힘을 과시했다.

본문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윗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다윗에게 결코 다윗의 힘으로 약자의 것을 빼앗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암몬의 왕이 사는 랍바 성을 빼앗아 다윗에게 붙여주신 것을 통해 다윗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전쟁이기에 다윗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 붙여주신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은 우리의 힘에 의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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