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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강형철(姜亨哲)
학 력
· 1981.2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
· 1999.2
숭실대학교 국문과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주요경력
· 1985
『민중시 2』등단
· 1985~1995
숭실대학교, 숭의여자전문대학 강사
· 1989~1994
도서출판 푸른 숲 주간 역임
· 1996~2003
숭의여자전문대학 교수
· 1990~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 2002.1.26
(사)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취임
· 2005.3
(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사무총장
저서 및 수상경력
· 시집 해망동일기(1989), 야트막한 사랑(1993), 도선장 불빛 아래 서있다(2002)
· 평론집 발효의 시학(1999), 시인의 길, 사람의 길(1994) 등 다수
· 편저 민족시인 신동엽(1999) 등 다수
4월의 문화인물 신 동 엽
차 례
1. 신동엽의 생애
2. 신동엽의 작품 세계
1)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2) 단형 서정시
3. 신동엽의 장시와 시극
4. 서사시 ‘금강’에 대하여
5. 참고문헌
6. 신동엽(申東曄) 연보
통일을 향해 여전히 앞서 나아가고 있는 시인 신동엽
들어가는 말
6.15공동 선언 이후 한 인사가 “통일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라는 말을 한 바 있다. 이 말은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 합의한 일의 감격을 실감있게 표현한 말이지만 6.15선언 이후 흘러온 세월을 큰 눈으로 보면 과히 틀리지 않은 말처럼 여겨진다.
우선 남쪽의 상황만 본다면 꿈에서나 그리던 금강산을 관광차 다녀올 수 있고 개성공단에서 남쪽의 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백화점에서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남북의 철도가 연결되고 남쪽의 전기가 개성공단에 공급되어 거기에 입주한 남쪽의 기업체에서 제품을 생산하는데 쓸 수 있게 되었다. 실질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외면의 긍정적인 부분을 말한 것이고 그 내면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만만찮은 문제들이 요동을 치고 있다. 우선 국가보안법이 엄연하게 존속하고 있으며 일부의 집단들과 단체들은 북쪽의 지도자를 타도해야한다고 아우성이고 중국의 국경을 넘어 남쪽으로 망명하는 북쪽의 주민은 확대일로에 있다. 또한 남과 북의 통일은 분단체제가 확립된 48년 이후 주변국가와의 이해관계 때문에 남과 북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와의 함수관계가 작동하는 국제적인 문제가 되어 있어 그 매듭을 정리하기란 실로 난망한 일에 속하고 있다. 이런 모든 문제는 남과 북의 통일에 장애요인으로 작동하면서 오늘 우리 역사는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외부적인 문제 이외에도 해방 60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서 보자면 남과 북의 통일은 어떤 미래를 지니는 것이며 그 행로는 어떠해야하는지 여전히 미루어둔 문제의 영역에 속한 일이 되고 있다. 너무도 상식에 속한 말이지만 남과 북의 민중들이 실제로 삶의 향기를 느끼며 남북통일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통일의 그날을 이루기까지 넘어야 할 장애는 무척 많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곡절은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통일이라는 대업 앞으로 줄기차게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러한 난감한 상황에서 우리가 36년 전에 작고한 시인 신동엽의 삶과 시작품을 살펴보는 일은 매우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이른바 냉전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모든 사람이 암중모색의 길을 걸을 때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분단의 상황은 불구의 것이고 이를 깨쳐나가지 않는 한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때로는 온 몸으로 때로는 시를 비롯한 문학적 성취를 바탕으로 제기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저 유신시절에는 그의 작품이 판매되는 것조차 금지되었고 민중들의 힘에 의해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야 빛을 보게 되었다. 신동엽은 80년대 이후 김수영과 더불어 시에 있어서 괄호쳐진 현실을 복원하여 시가 우리 삶의 가치를 발현해내고 시대의 중심을 향하여 발언권을 가진다는 것을 웅변한 한 대표적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동엽의 삶과 시
신동엽은 193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1969년 간암으로 타계했다. 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한 이래 1963년에 시집 “아사녀”를 발간하였고 1967년에 장시 ‘금강’을 발표했으며 타계하기 전까지 시집 아사녀에 수록된 작품을 제외하면 20여편의 단형 서정시만을 발표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위력과 업적은 그의 사후에 이르러 더욱 빛이 난다. 무엇 때문인가? 이를 살펴보기에 앞서 그의 생애를 더듬어보기로 하자.
1. 신동엽의 생애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군 동남리 294번지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동엽은 부친 신연순 옹이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이복누이가 있는 상황에서 다시 결혼한 김영희 씨와의 사이에서 출생했다. 1937년 신동엽은 8세로 부여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교사 김병익의 총애를 받았다. 성민엽이 쓴 전기에 의하면 김병익은 상당히 진보적인 교사였으며 그의 남다른 가르침 속에서 식민지 교육의 폐해로부터 상당부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난하지만 줄곧 우등을 했던 신동엽은 1943년 4월 전주사범에 입학한다. 전주사범 재학초기에 그는 외견상으로는 매우 조용하고 지나칠 정도로 내향적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가 즐겨 읽은 책은 일본 암파문고 발행의 사회과학 서적과 엘리엇의 시와 시론 그리고 투르게네프와 크로포트킨이다.
성민엽은 신동엽의 전주사범 시절의 독서가 그의 사회의식의 토대가 되었고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신동엽은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의 현실 속에서 때에 따라 좌우익 학생들에게 끌려가 매를 맞기도 했으며 이러한 갈등이 그의 시에 나타나는 무정부주의적 요소와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되고 있다. 신동엽은 전주사범 시절 많은 습작을 하였고 1948년에는 동맹휴학에 참여했다가 졸업을 하지 못하고 만다. 1949년 9월 신동엽은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당시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1950년 6.25가 발발하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게 되는 데 그는 7월 초부터 9월 말까지 인공 치하의 부여에서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을 한다. 그의 전기를 다룬 글들을 보면 이 시기 즉, 수복 이후부터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당할 때까지의 일은 다소 불분명하게 처리되어 있다.
한반도에 생혈이 뿌려지던 6.25의 혼란기 - 이 당시에 동엽이 어떤 세월을 보냈는지에 대해선 답을 얻기가 힘들다. 이 부분에 대해선 언젠가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이 내려질 것으로 기대하면서 더 이상의 무책임한 언급은 피하기로 한다.
아무튼 그는 이 땅을 통째로 살육한 양대 이데올로기의 와중 속에서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1).
부여가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진 것은 대전 공방전 초기인 7월 15일경이었고, 대전 함락은 7월 20일 저녁 무렵이었다. 인민군의 뒤를 바싹 따라 북에서 파견된 요원들이 들어와 신속한 조직사업을 전개했다. … 각 군에도 북로당원들이 내려와 군당위원장이 되었다. … 이들은 남로당원, 토지 분배를 받은 자, 농촌위원회 위원, 노력 동원에 잘 나가는 열성분자 등으로부터 당원 등록을 받아 당을 재건하고 이․면․군 순서로 추천 형식의 선거를 해서 인민위원회 조직을 완료하는 한편, 당의 외곽 단체로 민주청년동맹, 여성동맹 직업동맹 농민동맹 등을 조직했다. … 각종 동맹은 해당자들에게 맹원 가입을 요구했는데 그 요구에 불응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 반동임을 인정하는 것과도 같았다2).
앞의 글은 윤재걸의 신동엽 평전이고 뒤의 글은 성민엽의 신동엽 평전이다.
윤재걸은 이 시기의 일을 밝히기를 회피하고 있지만 성민엽은 그 시기의 일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스무 살 무렵에 운명적으로 마주친 6.25상황에서 신동엽은 민주청년동맹(이하 민청)의 선전부장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30일 부여가 해방되면서 상황은 뒤바뀌고 만다. 인공(人共) 치하에서 그는 자의건 타의건 이른바 부역자였고 군, 검, 경 합동 수사에 의해 당시 부역자들은 A, B, C 등급으로 나누어 처리되었다. 신동엽은 외형적으로 A급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인 조치였고 수복 초기에는 재판을 거치지 않고 즉결처분이 이루어졌다. 신동엽은 당장 살아남는 일이 급했다.
성민엽은 이 시기 신동엽이 부산에서 열린 전시연합대학에 적(籍)을 두고 피신 겸 학업이 가능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해 연말에 국민방위군 소집영장을 받고 입대하게 됨으로써 목숨을 연명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시기의 국민방위군에 입대할 때까지 3개월의 공백기간이 생긴다. 당시 전쟁의 상황이었고 곳곳에서 이른바 부역자들이 사형에 처해지는 상황에서의 3개월 간 행적이 편안할 리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현재 이 시기의 일을 아는 사람은 없다. 부인 인병선은 이 시기인지 그 이후인지 신동엽이 1개월 정도 산사람이 됐었노라는 증언을 하고 있다. 이런 전황을 참작하여 판단해 보면 산으로 일단 피신하여 결과적으로 빨치산 활동을 한 시기가 아니였을까 추론할 수 있다.
바로 이 시기의 뼈아픈 체험과 기억이 신동엽의 초기 시부터 뒤의 시까지를 관통하는 근원적인 비극 모티프 원형이 된다고 판단된다.
이후 신동엽은 국민방위군을 탈출하여 한동안 더 방황한다. 그러나 건강상태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자 대구, 김천, 영동, 대전을 거쳐 부여에 이르는 길을 걸어서 돌아오게 된다. 이때 낙동강변을 따라 북상하면서 게를 잡아 날로 먹어 폐디스토마에 감염된다. 죽은 자와 다름없이 몸이 극도로 피폐해져 귀환한 국민방위군 장정에게 부역문제로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반 년 넘는 냉각기가 있었던 탓도 있었으나 신동엽이 적극적인 부역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1951년 그의 나이 22세 때에는 대전 전시 연합대학에 적을 두고 학업을 계속하게 되었고 전시 연합대학 동창 구상회와의 본격적인 친교가 시작되었다. 이 해 가을부터 다음해 가을까지 충남 일대의 백제 사적들과 갑오농민전쟁의 자취를 두루 답사한다. 부여 출신인 신동엽은 부여를 중심으로 한 백제 사적들을 안내하고 공주 출신인 구상회는 공주의 봉황산, 동혈산, 우금치, 곰나루 등 갑오농민전쟁의 전적지를 안내했다3). 이들의 관심은 갑오농민전쟁으로 집중되어 문헌 자료를 섭렵하는 한편 사적 답사의 범위를 넓혀 논산으로, 더 나아가 옛 고부땅인 정읍 백산 황토현 등을 비롯한 전북 일대로, 멀리는 전남 해남 지방에까지 발길을 옮겼다. 성민엽은 이 시기가 신동엽 시 정신의 진정한 기틀이 다져진 시기로 보고 있다.
전주 사범 시절 신동엽은 각고의 지적 탐구를 통해 독자적인 시세계를 형성해 갔지만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세계관은 관념적 성격이 강했을 것이고 문화적 식민주의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한 일종의 코스모폴리탄이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것의 한계는 6.25라는 민족적 비극의 체험을 통해 노정되었고, 여기서 신동엽의 시계 내지 지평은 혁명적 변환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혁명적 변환의 계기는 민족개념의 정립으로부터 주어졌다. 반봉건 반외세의 갑오농민전쟁에서 민족의 실체로서의 민중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진보와 민족의 창조적 통일 - 진보와 민족은 별개의 독립된 목적 대상이 아니며 각각 다른 실천 방법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4).
이러한 의식변화에 대한 성민엽의 추론에 대체로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신동엽이 지닌 그 때의 민족개념의 실체에 대해선 보다 치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것보다 오히려 그 당시의 전체 민족적 역경과 고난을 통해 신동엽 자신이 느꼈을 실존적 고뇌의 폭에 훨씬 더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민족상잔에 운명적으로 휩쓸린 20대 초반의 청년이 곧바로 민족의식으로 나아갔다고 보는 것보다는 그러한 거대한 흐름 속에서 지극히 무력하고 끊임없이 위협받는 생명의 위협, 거기서 생겨나는 실존적 비극의식을 먼저 상정하고 이러한 의식이 어떻게 변모해나갔을 것인가를 충분히 탐색하지 않는 한 신동엽이 이 시기에 민족의식으로 급격히 변모했다는 성급한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1953년에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게 되는데 졸업과 동시에 제 1차 공군 학도간부 후보생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정식으로 발령받지 못하고 초봄에 상경하여 시청에 다니던 친구가 차린 헌책방(돈암동 사거리)에서 숙식하며 책방 일을 보면서 소일한다. 이 무렵 현재훈을 만나 교우를 가졌고 당시 이화여고 3학년 재학 중이던 인병선을 만난다. 1955년에 그는 4년만에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고, 고향에서 여름을 보낸 뒤 온양의 구상회를 찾아 함께 상경하여 동두천에서 현지 입대하여 6군단 공보실에 근무하다가 구상회와 함께 서울 육군본부로 전속되어 왔으나 이듬해 초가을 의가사 제대를 한다.5) 그리고 그는 그 해 겨울 구상회 노문 이상비, 유옥준 들과 문학적 교류를 가졌고, 가제 ‘야화’(野火)로 동인지를 내려고 준비에 몰두한다. 주로 노문의 하숙집에서 열띤 문학토론을 벌였고, 이때 신춘문예 시 부문에 응모하나 낙선한다. 1957년 가을 충남 보령 주산농고에 국어교사로 취직하여 보령으로 이사하였으나 겨울방학 직전 각혈을 하게 되는 데 신동엽은 이를 폐결핵으로 오인하고 주산농고를 사직하고 혼자 부여에 남아 요양에 들어간다. 이때 인병선은 아들 정섭을 데리고 서울 돈암동의 친정으로 간다. 1958년에 신동엽은 부여읍 동남리 501-3에 틀어박혀 장시「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의 수정작업에 몰두6)하여 석림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에 응모한다. 이때 그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秋收記’도 응모했다고 한다. 1959년「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면서 문단에 데뷔한다. 그가 문단에 데뷔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신춘문예 심사위원인 양주동이 쓴 심사평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石林의 장시「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가 약간 선자를 놀래었다. 대단한 요설, 줄기찬 행진, 너무 얌전한 소리와 잔재주의 단장에 물린 시단은 이런 거칠은 호흡과 구비치는 長江을 기다리기도 하였겠다. 용어도 꽤 새롭고 가다간 무던한 경구도 금방 튀어나오고 무엇보다도 그 연줄을 감았다 풀었다 하는 시법 시나리오적 구성이 좋았다. 단 그 후화가 완전히 무력한 것은 기술적인 실수라기보다 차라리 근본적으로 작자의 수련한 사상이 아직 덜 익어 혼돈한 때문이리라7).
그런데 이 시를 예심한 박봉우의 말은 더 극적이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나는 시부 예선을 보았다. 그때 시에서 응모 작품 천여 편을 전부 넘기면서 백 편만 엄선하여 달라고 했다.
나는 혼자 3, 4일 동안을 엄선, 또 엄선하여 좋은 시를 위하여 몰두하였다. 그리고 기쁨을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무릎을 치고 싶도록 좋은 시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신동엽의 장시「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다. 그 당시 문화부에서 문화면을 맡고 있던 평론가인 C씨는 예선 결과를 물었고 그때 나는 서슴지 않고 ‘좋은 장시가 들어 왔는데요.’하고 흥분하였다8).
그러나 이 시는 그 작품의 독창성과 시를 만들어내는 솜씨의 탁월함은 인정하면서도 당선작으로 뽑지 않고 가작으로 결정하고 40여 행을 삭제하고 여기저기 표현을 바꾸어 발표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치적 상황과 관련한 현실적 제약만이 아니라 문화적 경직성이 일종의 자기억압으로 작용했다는 데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상처투성이의 작품 발표였지만 신동엽의 문단 데뷔는 그의 삶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부여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개시한다.
그러나 데뷔 이후 처음으로 발표한 시「진달래 산천」으로 불온성 문제에 시달린다. 이 시에 등장하는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란 구절이 빨치산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러한 혐의에 대해 해명하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당시 우리의 시대상황은 휴전협정이 조인이 되고난 뒤 이른바 내전 이데올로기가 우리 삶의 지극히 미세한 부문까지 작동하고 있었던 터라 시에서 연민과 한탄의 어조로 말하고 있던 구절 하나를 문제 삼아 사람의 사상 전체를 불온시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후 벌어진 1960년 4.19는 신동엽에게 새로운 자극을 준다. 이 해 그는 4.19혁명을 찬양하는 시「阿斯女」를 쓰고 7월에는 자신이 다니던 출판사에서『학생혁명시집』을 간행한다. 다음해에 그는 명성여고 야간 국어교사로 자리를 옮기고 1962년부터는 소설가 하근찬, 남정현, 현재훈, 박봉우 등과 만나 활발한 교류를 갖는다. 그러나 이 때는 4.19의 좌절을 겪은 후여서 그의 의식은 정신지향적 성격을 띠기도 했다. 1963년 첫 시집『阿斯女』를 문학사에서 간행하면서 그는 새로운 모색을 시도한다.
이후 얼마간의 침묵을 거친 후 1965년 5월에 시「三月」을 발표하는 것을 계기로「발」, 「4月은 갈아 엎는 달」등을 발표하고「껍데기는 가라」를 발표한다. 이 작품으로 그는 문단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1967년에는 서사시「금강」을 발표하면서 확고한 문학사적 위치를 차지한다. 1968년에는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고 또다른 서사시「임진강」을 쓰기 위해 준비하다가 1969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의 전기적 고찰을 통해 볼 때 그의 작품 발표 시기는 10년에 불과했고 문단의 주목을 받은 시기는 죽기 전 5년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짧은 시기였지만 그가 남긴 시편들은 우리 시사에 굵은 획을 긋게 되는데 이를 이제 살펴보기로 한다.
2. 신동엽의 작품 세계
1)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신동엽의 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는 신동엽 시의 전체를 통관해볼 수 있는 관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데뷔 순간부터 문제적인 시였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신문에 발표된 시보다도 더 후퇴한 모습으로 시집과 전집에 수록됨으로써 신동엽 자신의 말처럼 ‘정성을 들여 개성을 표현한 낱말 하나하나가 평범한 말로 교환’되어 있어 신동엽 시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오해되거나 곡해되어 읽히게 된다.
그 절정의 말들은 무엇일까? 현재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에 대해 연구를 하던 중 필자는 인병선 여사가 간직하고 있던 신동엽의 유품에서 초고원고를 찾아내 이를 바탕으로 그 절정의 시구들을 복원하는 시도를 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발표된 채로 이 작품을 읽으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은 장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덟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이중 앞과 뒤로 서화와 후화가 배치되어 있는데 서화는 여인이 화자로 등장하여 무성한 풀숲에서 사내와 사랑을 나누었던 추억이 배치되어 있고 맨 뒤의 후화는 선지자적 육성과 톤으로 문명사 전체를 관통하며 지켜냈던 석가의 정신과 예수의 삶을 얘기하면서 미래에는 무슨 꽃 무슨 사상이 피어날 것인가를 묻는 방식으로 새로운 삶에 대한 희원이 그려지고 있다.
시의 본체에 해당하는 제 1화는 한 남성 화자를 등장시켜 전쟁이나 문명사가 전개되기 전의 원시적 삶과 형태가 그려져 있다. 2화는 갑자기 전쟁의 형상이 전개된다. ‘찬란히 빛나 있을 사형집행장, 꽃바람 부는 교외’에서 끌려 나가 총살당하는 사람들의 혼을 위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동리 불사른 사람들의 훈장을 용서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사막에서 일사병으로 눈 먼 식민지 병사들의 월급봉투를 위하여’ 이 시가 헌정되고 있음을 밝힌다. 제 3화는 그 전재의 양상이 얘기되고 있으나 대단히 막연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기에 이를 분석한 많은 사람들이 문명사적 비극이라는 큰 틀로 이 대목을 이해하게 된다. 제 4화는 우리 원시공동체의 삶이 얘기되면서 그것이 역사의 시간들을 경과하는 동안 착취와 피착취의 과정으로 변환되고 있음을 밝힌다. 제 5화는 그러한 착취구조를 모두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 6화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수컷들의 불구성을 비판하면서 파편화된 모든 수컷들을 하나로 받아들여 제대로 된 인간 하나를 창조하고 말겠다는 여인의 다짐을 그리고 있다.
결국 시는 현대사 전체를 원시공동체의 삶과 그 이후의 국가가 출현하고 계급이 출현하는 시대까지를 관망하며 인류를 해치고 있는 전쟁이나 억압과 착취구조를 쓸어낸 참된 세상을 열망하는 모습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시는 물론 크게 보아 문명비판의 시로 읽힐 수 있지만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이고 그 핵심은 6.25 전쟁의 비극을 자신의 구체적 삶과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당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인 반공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해방 더 나아가 반외세의 민족해방이라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밝혀보기 위하여 기존의 판본과 가장 큰 변화를 이루고 있다고 판단되는 제 3화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는 조선일보에 처음 발표될 때의 판본 그리고 신동엽전집에 실렸을 때의 ‘아사녀’판본 그리고 초고본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초고본의 3화를 먼저 보기로 한다.
第 3 話
내가 온달 때 당신은 구름 덮으시더라. 나는 遠視 그래서 당신은 멀리 있어야 잘 生覺난다 일렀더니, 싫어도 당신은 끄덕이시이더라.
무엇을 너는 내게 要求코 있는 건가. 나의 肝말인가.
금니빨 말인가. 귀 말인가.
옛날엔 명실상부 職業戰鬪家가 있었삽니다. 이族 저族 팔려 다니며 城門지기 호랑이잡이 鬪人거리. 이마에 뿔돋히고 양 어금니 째져나온 불쌍한 種子들이 살었답니다.
오늘엔 그들이 出世하였읍니다. 內城에 드러와서 玉座를 마련코. 部族 눕혀 九重宮闕 쌓아올리고, 百姓목덜미 위 君臨하여 天下를 號令하고.
나도 물론 氏族전쟁엔 나가보았읍니다. 槍들고 도끼들고 코거리하고 귀거리하고. 닥치는대로 대갈통을 바수어 함지박처럼 머리에 엎어 쓰고. 가슴팍을 꿰어선 나무에 매달아 두고.
시샛사람들 屠殺. 그건 정 시시한 짓이야요. 눈웃음도 못할 사이 원恨도 없이. 都市 채 시들시들 사라져 버리는 것.
싱겁기 짝이 없는 都賣굿이야요
못난짓 버릇 가운데 몸을 담그고
오늘 낼 숨 쉬어 가는 사람들이여
도끼는 新奇해도 손재주가 만든 것이며
飛行機는 비싸도 땅에서 뜨는 것이다.
떡쇠의 입에는 쌀이 하루 세 사발,
首相님의 大腸에는 비게가 하루 세 사발,
大憲章은 尊嚴해도 코끼리의 眼境이다.
못난짓 버릇 가운데 몸을 담그고
오늘 낼 세월 버둥겨가는 사람들이여,
가마귀는 나려와 紛이 가슴 위에
구데기를 쪼아서 주둥일 닦을 게고,
將軍님의 尊顔 위에 平素히 앉아서
누깔을 빼먹고선 갸웃거릴 것이다.
내 故鄕에 피는 꽃은 무슨 꽃일까?
봄. 갈. 여름. 내 生地에 펴나는 꽃은 무슨 꽃일까?
두견이, 패랑이 들菊? 거짓말이다. 그러 한 꽃은.
내 故鄕山川에 펴나지 않는다.
들길을 가루질러 달구지가 지나갔다.
낯익은 얼굴들이 호박처럼 매달려
메마른 돌밭 위에 부숴져 가고 있었다.
벗이여 말하라
어데를 가면 나의 노래 自由스러운 깃을 달고 푸른 하늘 九天世界를 훨훨 날아올을수 있을 것인가. 벗이여 말하라 어데를 가면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은 바람잔 구름밭 언덕위 들노래처럼 사라져간 그리운 이름 이름이여.
聖者 宗主의 이름으로.
國家와 人類. 自由와 平和의 이름으로. 모든 洗練된 美德의 이름으로 强制와 殺人에 加擔하고 있는. 二十億 젊잖은 病身들이여.
어데로 흘러가는 싸움떼이기에 그 많은 다툼에도 是非가 남았느뇨. 어데를 흘러가는 목숨들이게. 양뿔이 빠지고도 꼬리마져 짤려 있느뇨.
하면 오늘밤은 어떻게 할테란가.
槍을 쥔 雪人이여 貨車같은 뱃장이여 칼을 든 指導者여 地獄의 魁首여 侵略이 아니면 逃亡兵 收容所가
벗이여, 廣漠한 原始林
人間된 거죽 훌훌히 찢어 던지고
어두운 골짝 오손도손 짐승이 되어질 순 없단 말인가.
아름다운 바람 하늘 높이 흘러가고
億萬年 햇빛 머리위에 퍼붓는다.
正義로운 폭약이여,
博愛스런 植民이여.
메마른 公分母가
李道令은 당신네 高等國民의 호랑이굴 아구리에 네다리로 막고서서 꽃혀 오는 화살을 등가죽으로나 헤이고?
고만한 눈알이여 창고같은 뱃장이여
侵略이 아니면 凶器공장굴뚝이
괴수들의 文明市엔 허리조른 예산이 되고
山과 山.
山과 山,
모과나무 가지엔 무엇이 걸레처럼 발기발기 찢어져 걸려있었고, 돌 벼개. 바위 그늘. 땀으로 세수하고 이슬에 목추기며. 東으로. 西으로. 南으로. 北으로.
오늘에 미친 사람 내일로 바람잫게
내일로 죽힌 사람 모레에 還生하게.
하여 怨讐로 죽은사람 怨讐로 더불어 復讐케 하며, 바퀴엔 바퀴로 불엔 불로 칼엔 칼로 수레바퀴로 죽은 사람 수레바퀴로하여 짓니까려 復讐케 하라
太陽 밑에 있고 싶은 자 있게 하고,
없고 싶은 자 없게 하라.
싸우고 싶은 자 骨肉끼리 싸우게 하고,
獨尊하고 싶은 자 鐵窓속에 獨尊케 하라.
투구를 쓰고 싶어 하는 자 쇠항아리를 만들어 씌워주라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자
성가시게 찝적대는 자
英雄이 되고 싶어 하는 자
로켓트에 매달아
대기 밖으로 내던져버려라
빛나는 여름,
구슬 뿌리며
山脈을 넘어 간
少女들의
흰 발이여.
지금은 바람 잔 언덕 위
패랑이
민들레
들 노래처럼
사라져 간
그리운
이름 이름이여
3화는 초고본과 다른 판본이 가장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총 25연으로 되어 있는 초고본이 조선일보판에는 21연으로 되어 있고 전집판은 36연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연갈이로 연수가 늘어났을 뿐 조선일보판과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문제의 사십여 행은 바로 이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탈락되었고 표현은 군데군데 약화되어 있다. 3연에서 초고본과 조선일보판에는 ‘이族’ ‘저族’으로 되어 있으나 전집판에는 ‘이旗’ ‘저旗 ’로 되어 있다. 또한 5연도 ‘氏族전쟁’이 ‘蠻族戰爭’으로 되어 있는 것도 사정이 같다. 시의 문맥상 의미가 확연히 달라지는 부분이다.
좀더 자세하게 초고본과 전집판 그리고 조선일보 판본을 비교해보기로 한다.
1연과 2연은 세 판본이 같다. 그러나 3연은 조선일보판과 초고본이 같으나 전집판에는 중요한 단어가 바뀌어져 있다. 전집판을 보자.
옛날엔 명실상부 직업전투가가 있었삽니다.
이 旗 저 旗 팔려 다니며 城門지기, 호랑이잡이, 이마에 뿔 돋치고
양 어금니 째져 나온 불쌍한 종족들이 살었댑니다.
오늘날 그들은 출세도 했습니다.
內城에 들어와 玉座를 마련코, 部族 눕혀 九重宮闕 쌓 올리고
백성 목덜미 위 君臨하여 천하를 호령하고.
나도 물론 蠻族戰爭엔 나가 보았습니다.
槍 들고 도끼 들고 코거리하고 귀거리하고.
닥치는 대로 대갈통을 바수어 함지박처럼 머리에 엎어쓰고,
가슴팍을 꿰어선 나무에 매달아 두고.9)
초고본의 3연에서 ‘이 族’, ‘저 族’이 ‘이 旗’, ‘저 旗’로 뒤바뀌어 있고 5연은 ‘氏族戰爭’이 ‘蠻族戰爭’으로 뒤바뀌어 있다. 이렇게 뒤바뀐 것은 작은 차이가 아니다. 초고본에서의 ‘이 族’, ‘저 族’은 분명히 6.25 당시의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을 뜻하고 있는데 이것을 ‘이 旗’, ‘저 旗’로 바꾸면 그 뜻은 한층 모호해진다. 특히 6.25전쟁에 대한 시인의 분명한 의미규정인 氏族戰爭이 蠻族戰爭으로 바뀐 것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판단된다.
바로 이어지는 6연은 6.25 당시의 동족상잔의 풍경을 형상화하고 있는바 이것은 당시의 시대적 한계 때문에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7연과 8연은 세 판본이 대동소이하고 9연의 3행은 전집판에 ‘대헌장은 존엄해도 개호지의 안경이다’로 되어 있고 조선일보판엔 ‘헌장은 존엄해도 개호주의 안경이다’로 되어 있으나 초고본엔 ‘대헌장은 존엄해도 코끼리의 안경이다’라고 되어있다.
대헌장에서 명시하고 있는 인간의 평등과 존엄은 유명무실하다는 뜻일 터인데 개호지 혹은 개호주라는 말보다는 ‘코끼리의 안경이다’라고 하는 편이 훨씬 뜻이 명료해 보인다. 9연은 죽은 시체에 까마귀가 내려와 주둥일 씻는 사람이 초고본에는 ‘紛이’로 되어 있고 전집판과 조선일보판에는 ‘선달’로 되어 있다.
10연과 11연은 행갈이가 되어 있다는 점 외엔 같다. 12연은 초고본에 있으나 본인이 지워놓고 있는데 이 연은 다음과 같다.
벗이여 말하라
어데를 가면 나의 노래 自由스러운 깃을 달고 푸른 하늘 九天世界를 훨훨 날아올을수 있을 것인가. 벗이여 말하라 어데를 가면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은 바람잔 구름밭 언덕위 들노래처럼 사라져간 그리운 이름 이름이여.
이 연을 삭제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시에서 이 부분은 신동엽의 핵심적 시작의도로 판단된다. 6.25 당시 그 분노의 실체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그가 매우 억울해하고 그렇게 말없이 죽어가야만 했던 민중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연민을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어디를 가서야 이 억울한 심정을 마음 놓고 털어 놓고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 것은 아닐까.
그 뒤에 이어지는 13연부터 20연까지는 초고본이 매우 혼란스럽다. 초고를 쓴 다음 퇴고 과정에서 덧붙인 시행들이 어지럽게 적혀 있는데 이를 시의 전체 흐름을 잡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聖者 宗主의 이름으로.
國家와 人類. 自由와 平和의 이름으로. 모든 洗練된 美德의 이름으로 强制와 殺人에 加擔하고 있는. 二十億 젊잖은 病身들이여.
어데로 흘러가는 싸움떼이기에 그 많은 다툼에도 是非가 남았느뇨. 어데를 흘러가는 목숨들이게. 양뿔이 빠지고도 꼬리마져 짤려 있느뇨.
하면 오늘밤은 어떻게 할테란가.
槍을 쥔 雪人이여 貨車같은 뱃장이여 칼을 든 指導者여 地獄의 魁首여 侵略이 아니면 逃亡兵 收容所가
벗이여, 廣漠한 原始林
人間된 거죽 훌훌히 찢어 던지고
어두운 골짝 오손도손 짐승이 되어질 순 없단 말인가.
아름다운 바람 하늘 높이 흘러가고
億萬年 햇빛 머리위에 퍼붓는다.
正義로운 폭약이여,
博愛스런 植民이여.
메마른 公分母가
李道令은 당신네 高等國民의 호랑이굴 아구리에 네다리로 막고서서 꽃혀 오는 화살을 등가죽으로나 헤이고?
고만한 눈알이여 창고같은 뱃장이여
侵略이 이니면 凶器공장굴뚝이
괴수들의 文明市엔 허리조른 예산이 되고
이 부분을 이렇게 정돈해서 읽으면 외세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지와 민족애, 나아가 현대 문명 전체에 대한 비판 의식을 찾을 수 있다. ‘세련된 미덕의 이름으로 살인에 가담하고 있는 이십억 젊잖은 병신들이여’라는 구절이나 ‘침략이 아니면 흉기공장 굴뚝’, ‘칼을 든 지도자여 지옥의 괴수여’란 표현에서 그것은 확실하다. 또한 이러한 강력한 외침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삭제가 불가피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21연은 세 판본이 같고 22연은 ‘바퀴엔 바퀴로 불엔 불로 칼엔 칼로 수레바퀴로 죽은 사람 수레바퀴로 짓니까려 복수케 하라’란 구절이 초고본에만 있다.
23연은 초고본에 ‘골육끼리’로 되어 있으나 조선일보판이나 전집판에 저희끼리로 바뀌어 있다. 24연의 초고본은 다음과 같다.
투구를 쓰고 싶어 하는 자 쇠항아리를 만들어 씌워주라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자
성가시게 찝적대는 자
英雄이 되고 싶어 하는 자
로켓트에 매달아
대기밖으로 내던져버려라
여기에서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자 성가시게 찝적이는 자’가 조선일보판과 전집판에는 빠져 있다.
25연은 나머지 판본에서 연갈이와 행갈이가 된 점을 제외하고는 같다. 이렇게 비교를 해보면 신동엽이 인병선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가장 생명을 기울여 엮은 절정의 구절’이라든가 ‘정성을 들여 개성을 표현 한 낱말’의 실체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표현을 복원시키고 누락된 부분을 보충해서 이 시를 읽으면 그가 6.25의 실체를 단순히 남북간의 이데올로기 전쟁이 아니라 외세의 개입에 의한 야만전쟁으로 봤으며 동시에 이 시는 6.25 당시 희생된 민중들에 대한 조사의 의미로 씌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작품의 제재에는 6.25 당시 이른바 민청활동과 이후의 도피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목도하게 된 동족끼리의 살육 장면이 담겨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신동엽은 이 시에서 6.25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으며 그것도 타자적인 관조적 입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야스퍼스의 “비극론”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난파하여 새로운 전형을 이루어낸 진정한 비극의 형태로 승화시켜 이를 완성해낸 것이다.
2) 단형 서정시
신동엽 시세계를 관류하고 있는 6.25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인식인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살펴보았는데 이 비극적 인식은 그의 여타 시에서도 줄기차게 변주되어 등장한다.
먼저 단형 서정시를 살피고 그의 여타 장시 시극, 서사시「錦江」등을 차례로 점검해 보기로 한다.
신동엽은 산문 26편(전집판 18편, 유고 산문집 8편), 시 153편 (전집판 67편, 유고 시집 86편)과 장시 2편, 서사시 1편, 시극 및 오페레타 그리고 평론 17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가 생존해 있을 때 발표한 작품은 전체 작품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이는 그의 사후 습작시절부터의 작품이 발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도 상당히 있다. 그것은 그의 작품이 데뷔 당시부터 이른바 ‘불온성 시비’에 연루된 탓으로 볼 수도 있고 한편으로, 당시의 시대적 한계에서도 상당 부분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먼저 미발표 시집이라는 부제로 묶여진 『꽃같이 그대 쓰러진』에 실려 있는 86편을 잠시 훑어본다.
신경림에 의해 엮어진 이 시집은 그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발굴된 것인데 그의 습작품까지 포함되어 있어 작품의 완성도에선 미흡한 점이 많다. 또한 작품의 일부분은 기왕의 다른 발표작과 같은 부분이 있어 엄밀한 의미에서 신동엽 시의 텍스트로 삼는 데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신동엽 시의 지향과 꿈은 더 선명하게 추적할 수 있다.
신경림은 이 시집의 시가 지닌 특징을 다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공동체적 서정성이 풍부하다는 점, 둘째 민요에 대한 관심이 짙게 표현되어 있으며, 셋째 사랑시가 많다는 점, 넷째 문단에 대한 비판이 있고, 다섯째 6.25 직후의 시들에서 보여주는 민족모순, 계급모순 의식이 그것이다10).
그는 이어서 이 시집의 전체적 특징을 아우르는 시로 「서시」를 들고 있다. 그는 이 서시를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신동엽 의식의 본류를 ‘외세와 식민지적 현실의 극복, 핵과 전쟁의 제거’라고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원자탄에 맞은 사람
태백줄기 고을마다
강남 제비 돌아와 흙 물어 나르면
솟아오는 슬픔이라 묘지에 가 있는
누나의 생각일까……?
산이랑 들이랑 강이랑
이훠 그 푸담한 젖을 키우는
울렁이는 내 산천인데
머지않아 나는 아주
죽히우러 가야만 할 사람이라는
것이다.
-「序詩」 부분 (밑줄 필자) -
여기에서 보이는 현실 의식은 신동엽 시의 본질적 모습이라 하겠다. ‘그러나 나는 원자탄에 맞은 사람’이며 ‘머지않아 나는 아주 죽히우러 가야만 할 사람’이라는 뜻은 자신이 6.25 전쟁에 가담했던 사실에 대한 죄의식의 표명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 전쟁의 실체가 강대국 간의 대리전쟁이라는 의미를 함유하고 있고 또 그 전쟁에 의해 자신이 희생당한 자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 동시에 “외세와 식민지적 현실의 극복, 핵과 전쟁의 제거”라는 명제가 그의 시 전반에 깔린 것임을 밝혀준다. 이 시의 뒷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연이 이어지고 있다.
잘 있으라
해가 뜨나 해가 지나 구름이 끼던
두 번 다시 상기하기 싫은
人種의 늦장마철이여
이러한 노래 나로 하여
처음이며 마즈막이게 하라
진창을 노래하여 그 진창과 함께
멸망해 버려야 할 사람이
앞과 뒤를 헤쳐 세상에
꼭 하나뿐 필요했던 것이다.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싶었던, 굳이 희생이 필요하다면 스스로가 그 짐을 지겠다는 순교자적 태도, 이것이 신동엽이 지녔던 비극적인 시작 태도였고 동시에 그것은 동시대의 여느 시인과 다른 점이었다.
이러한 비극적 의식은 그의 여타 단형 시에도 끊임없이 출몰한다.
이러한 근원적 비극의식은 첫째로 6.25 당시의 상황에 대한 증언 혹은 실상 드러내기의 모습으로 표출되며 둘째로는 그러한 비극에 직면하기 전의 훼손되지 않은 민족의 정체성의 모색으로 셋째는 반외세 반미 의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러한 의식의 총화로서 민중의식 혹은 통일에의 염원으로 나아간다.
(1) 6.25 상황에 대한 증언 혹은 실상 드러내기
6.25 당시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고발정신은 우리 시사에 풍부하다. 이때의 비극의식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첫째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야기된 전쟁이라는 전제하에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시를 들 수 있다.
둘째는 남․북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의한 비극 혹은 주체적 힘에 의해 달성되지 못한 해방에 대한 의식을 기초로 해서 민족사적 비극이라는 측면에서 증언하는 시이다.
셋째는 이러한 전쟁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탈락시킨 채 인간이 지닌 원초적 불구성에서 6.25의 비극을 보려는 태도의 시이다.
이렇게 구분하고 살필 때 신동엽의 6.25 관련 시들은 크게 보아 둘째 시각에서 씌어졌다고 할 수 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 「진달래 산천」 중에서 -
줄줄이 살뼈로 흘러내려 내를 이루고 怨恨은 물레밭을 이랑이뤄 만사꽃을 피웠다
- 「阿斯女의 울리는 祝鼓」 중에서 -
어머니를 불렀지
執行場 문앞
엉버티었지, 안가겠다고
있는 힘 다하여 안간힘하며
마지막 땀 흘리던
연약한 다리여
- 「발」 중에서 -
이상의 시들은 6.25 당시의 상황 속에서 당시의 일반 민중들이 어떻게 희생당했는가를 보여준다.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에서 보듯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이 산하에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그 시신들이 ‘내를 이루고’, ‘원한이 만사꽃’을 피우고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기다린 것은 무엇인가?
또한 당시에 수시로 행해진 사형(私刑)에 의해 끌려가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풍경이 형상화된 「발」을 보면 그 참혹함이 극에 달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단순히 비극의 현실적 재현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시에서 보듯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이라는 한정어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냉전 이데올로기에 짙게 침윤되어 있던 사람들은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빨치산이라고 말하면서 신동엽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것에 대해 신동엽의 친구인 구상회는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은 50년대의 당대적 표현만이 아닌 당시의 민중 일반을 다룬 것이라고 옹호했다.
신동엽은 69년에 「선우휘 씨의 홍두깨」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문학은 수도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괴로움이요, 영원한 부정이요, 영원한 모색이다.
안이하게, 세계를 두 가지 색깔의 정체(正體)싸움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군사학적․맹목기능학적 고장난 기계하곤 전혀 인연이 먼 연민과 애정의 세계인 것이다11).
즉, 문학은 단 하나의 해석 혹은 정치사회적 인식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그러한 복잡한 인식의 총화에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임을 밝힌다.
그러나 당시의 분위기는 그것을 곧바로 신동엽 자신의 사상성으로 연결시키고 위해를 가하려는 상황이었다. 자연 신동엽은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동엽은 그러한 위태로운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당시의 가장 핵심적 문제인 6.25의 비극을 형상화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한 고통은 ‘우리들의 이야기는 걸레’, ‘살아 있는 것은 뼈 뿐’이고 ‘非本質的인 것’들에 의해 괴로움만 당한다(「살덩이」)라는 자조적 의식으로도 나타나고 어떠한 것에도 무책임하게 긍정만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응」). 그러나 그는 훨씬 상징화된 형식으로도 자신의 생각을 형상화한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山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숨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行人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人情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山에 언덕에」 전문 -
이 시는 그의 기념관 옆에 있는 시비에 새겨진 시이기도 하지만 ‘신동엽의 6.25 체험’을 상기하면서 그날 소문 없이 사라져간 사람들에 대한 헌사로 읽으면 그 감동의 폭은 배가 된다고 하겠다. 또한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시어 ‘山’이 단순한 완상대상으로서의 山이 아니라 6.25의 비극이 구체적으로 행해진 곳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때 그의 시가 훨씬 명료하게 드러난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山에도 분수를」이란 작품의 의미도 새로운 지평에서 이해된다.
산에도 들에도 噴水를.
農村에도 도시에도 噴水를.
太陽쏟아지는 半島의 하늘, 사시사철 시원한
意志, 무지개 돋게.
산에도 들에도 噴水를.
牧場지대 우거지고 南北평야 기름지게.
속 시원히 낡은 것 밀려가고 外勢도 근접 못하게,
太白山 地脈 속서 솟는 地下水로 수억만 개의 噴水 터 놨으면.
농어촌에도 金浦空港에도 噴水 치솟았으면.
侵略도 착취도 발 못 붙이게.
半島를 가로지른 가시줄, 씻겨 가 버리게,
우리의 머리마다 속 시원한 噴水
- 「山에도 噴水를」 전문 -
분수는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분수는 도시의 한복판이거나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설치된다. 그 점에서 신동엽의 「山에도 噴水를」이란 작품은 읽는 이를 낯설게 한다. ‘산에도 들에도’ 분수를 기원하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2연을 보면 ‘속 시원히 낡은 것 밀려가고’, ‘외세도 근접 못하게’란 구절은 도시에서 솟는 분수를 지칭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태백산 지맥’ 속의 지하수를 하늘로 쏟아지게 하여야 한다는 말을 태백산에서 죽이고 죽은 이 땅의 민중들의 넋과 관련시켜 해석하면 우리의 현대사의 비극이 깨끗이 척결되지 않는 한 새로운 미래란 열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이 시를 「이야기 하는 쟁기꾼의 大地」 3화와 4화를 연결시켜 생각하면 한결 명료해진다고 하겠다. ‘인육으로 구축된 말하자면 기생탑’이라든가 ‘등가죽으로 창자로 목통으로 꿰뚫린 그 놈을 달고 다니게 된 그 밑 신하층 그날부터 山이지.’에서 보듯 그 산은 비극의 원천이다.
바로 이 점에서 신동엽의 시에 나타나는 6.25상황의 비극은 어느 한편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적개심이나 비극의식이 아니라 민족사적 지평 속에 위치한 비극적 세계인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그의 다른 시 「그 가을」, 「너는 모르리라」, 「아니오」, 「빛나는 눈동자」, 「미쳤던」, 「눈 날리던 날」, 「山死」, 「초가을」 등등 생전의 발표작과 「祖國」, 「江」, 「왜쏘아」, 「불바다」 등등의 유고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 훼손되지 않은 정체성의 모색
신동엽의 시에는 끊임없이 우리의 민족공동체적 이상향이 출몰한다. 이러한 이상향에의 몰입은 민족사 앞에 출현한 극한적인 비극 앞에서의 지식인적 암중모색이라 할 것이다. 또한 전주사범 시절 혼란기를 살면서 심취한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 사상의 잔영이라 할 수도 있다.
㉠ 香아 너의 고운 얼굴 조석으로 우물가에 비최이던 오래지 않은 옛날로 가자
수수럭거리는 수수밭 사이 걸찍스런 웃음들 들려 나오며 호미와 바구니를 든 환한 얼굴 그림처럼 나타나던 夕陽…
- 「香아」 중에서 -
㉡ 보세요. 이마끼리 맞부딪다 죽어가는거야요. 여름날 洪水 쓸려 罪없는 百姓들은 발버둥쳐 갔어요. 높아만 보세요. 온 歷史 보일꺼에요. 이 빠진 古木 몇 그루 거미집 쳐 있을 거구요.
하면 당신 살던 고장은 지저분한 雜草밭, 아랫도리 붙어살던 쓸쓸한 그늘밭이었음을 눈뜰 거예요.
-「힘이 있거든 그리로 가세요」 중에서 -
㉠의 시에서 ‘오래지 않은 옛날’, ‘철따라 푸짐히 두레를 먹던 내일’, ‘맨발로 벗고 콩바심하던’ 날들로 돌아가자는 뜻은 이곳 현실이 철저하게 훼손되어 있다는 말이고 그것은 바로 얼마 전까지의 우리 민족의 살림살이였던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수가 되지 않고, 착취의 대상이 되지 않던 날들이 바로 얼마 전이다. 그러나 그것은 6.25가 발발하면서 완전히 훼손되었다.
㉡의 시 「힘이 있거든 그리로 가세요」에서는 그러한 비극의 원근법을 제시하고 있다. 당장 서로를 규정하고 있는 ‘적’, ‘원수’ 등등의 관계를 조금만 더 큰 눈으로 보면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그의 사후 발표된 산문「傳統精神 속으로 結束하라」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제주에서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하면 두 시간도 안돼 평양 압록까지 합창이 번질 것이다’라고 말하며 ‘날짜를 택해 판문점이나 임진강 완충지대에 그리운 사람끼리 모여 아리랑을 합창해보자’고 제시한다. 그것은 민족의 내부에 흐르는 연면한 동질감에 대한 확신이다.
여보세요 阿斯女. 당신이나 나나 사랑할 수 있는 길은 가차운데 가리워져 있었어요.
말해 볼까요. 걷어치우는 거야요. 우리들의 포등한 알살을 덮은 두드러기며 딱지며 면사포며 낙지발들을 面刀질해 버리는 거야요. 하여 濟州에서 豆滿까지 땅과 百姓의 웃음으로 채워버리면 되요.
누가 말리겠어요. 젊은 阿斯達들의 아름다운 피꽃으로 채워 버리는데요.
- 「주린 땅의 지도 원리」 중에서 -
위의 시에서 보듯 그러한 이상향의 회복은 낙지발들을 잘라내고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현실을 지우고 ‘濟州에서 豆滿까지’ 땅과 ‘百姓의 웃음’으로 채우는 지극히 간단한 방법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외에도「正本 文化史 大系」,「阿斯女」,「나의 나」,「눈 날리는 날」,「水雲이 말하기를」,「散文詩」 등의 시편에서 원시 공동체적 이상향의 모색을 확인할 수 있다.
(3) 반외세 반미 의식의 양상
이러한 공동체적 이상을 꿈꾸는 신동엽 내면의 대척점에 그러한 공동체를 훼손한 세력에 대한 적개심으로 구체적으로는 반미 의식으로 민족사적 지평에서는 반외세 의식으로 나타난다.
㉠ 왜 쏘아
우리가 설혹
쓰레기통이 아니라
그대들의
그대들의 板子안방을 침범했었다 해도
우리가 맨손인 이상
총은 못 쏜다
쏘지 마라.
솔직히 얘기지만
그런 총 쏘라고
朴첨지네 기름진 논밭,
그리고 이 江山의 맑은 우물
그대들에게 빌려준 우리 아니야.
- 「왜 쏘아」 중에서 -
㉡ 강산은 좋은데
이쁜 다리들은 털날 딸라들이
다 자셔놔서 없다,
- 「발」 중에서 -
㉢ 무더운 여름
불쌍한 原住民에게 銃쏘러 간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쓸쓸한 간이역 신문을 들추며
悲痛 삼키고 있지 않은가.
그 멀고 어두운 겨울날
異邦人들이 대포 끌고 와
江山의 이마 금그어 놓았을 때도
그 壁 핑계삼아 딴 나라 차렸던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꽃 피는 南北平野에서
주림 참으로 말없이
밭을 갈고 있지 않은가.
- 「祖國」중에서 -
㉠의 시편은 배가 고파 미군부대 이른바 ‘꿀꿀이죽’을 먹으러 들어갔던 소년이 미군에 의해 사살된 현실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려놓고 그것에 대해 항거하는 시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가 미군의 점령을 허락한 것은 이땅의 평화를 보존하려는 뜻이었지 가난한 민중을 적으로 여겨 총질하라고 허락한 것이 아니라고. ㉡의 시는 우리 처녀들이 주둔군 병사들에 의해 이른바 ‘양공주’로, ‘웨이트레스’로 떨어지고 그들에 의해 민족성이 훼손되어가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시이다.
㉢의 시는 60년대 월남파병에 동의하게 된 것은 미국의 강력한 요청에 의한 것이었고 그리하여 제3세계 민중에게 총질하게 된 것은 순전히 타의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우리 조국의 백성들은 아직도 ‘무순을 다듬으며 언젠가 올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정점에 그의 시「껍데기는 가라」가 있다12).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漢拏에서 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전문 -
가령 ㉠의 시에서 보듯 직설적인 어법은 「껍데기는 가라」에 이르면 말끔히 가시고 그야말로 진술과 묘사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선지자적 지성과 품격이 적절한 목소리를 얻은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반미 의식 혹은 반외세 의식은 신동엽 시의 전부를 관철하고 있다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4) 민중의식으로의 지양
6.25의 참상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새로운 대척점으로서의 원시공동체에의 침잠은 마침내 외세 혹은 미군에 대한 저항 의식으로 표출되지만 그것은 단순한 차원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미군에 대한 비판 의식이 피학적 혹은 수동적 차원에 머물고 현실적으로 전개된 자본주의 사회를 심정적 차원에서 거부하고 상대적으로 원시공동체만을 지향하는 것은 현실에서 지극히 순진한 반응양상이라 하겠다. 그러한 비극의식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변화 혹은 개혁의 구체적 양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이 지점에 신동엽 시의 또 다른 자장이라 할 수 있는 혁명 의식과 만나게 된다. 이러한 개혁 의식의 실체는 사회변혁에의 신뢰이며, 그 주체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은 4.19에 대한 시의 형상화로 표출된다.
그는 4.19를 문단에 데뷔한 이듬해에 만난다. 그는 처음 4.19에 대해 그야말로 열광적으로 환호한다.
미치고 싶었다
四月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東學의 함성,
光化門서 목터진 四月의 勝利여
江山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훌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享樂의 不夜城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한강변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결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 「四月은 갈아 엎는 달」 중에서 -
四月十九日, 그것은 우리들의 祖上이 우랄高原에서 풀을 뜯으며 陽달진 동남아 하늘 고흔 半島에 移住오던 그날부터 三韓으로 百濟로 흐르던 江물, 아름다운 치마자락 매듭 고흔 흰 허리들의 줄기가 三․一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 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 오른 阿斯女의 몸부림, 빛나는 앙가슴과 물구비의 燦爛한 反抗이었다.
- 「阿斯女」 중에서 -
그래서 과녁을 낮추자 얘기해 왔던 거야요. 四月에 맞은 건 帽子, 帽子뿐 날라갔어요. 心臟이, 허지만 등치가 성성하군요. 보세요 다시 떠들기 시작하는 저 소리들. 五百年 붙어살던 宮殿은 그대로 무슨 청인가로 살아있어요. 잇달은 벼슬아치들의 中央塔에의 行列이 곤두 서 볼만쿤요. 겨냥을 낮추자는 얘기에요. 帽子가 아니라 겨드랑이 아니라 아랫도리를 뻘어야 되겠다는 거야요.
- 「주린 땅의 指導原理」 중에서 -
6.25 이후 전개된 역사에서 신동엽이 느끼고 있었던 것은 극심한 정신의 위축이었으며 민족사에 대한 극단적인 비극의식이었다. 그랬기에 신동엽은 4.19에 대해 누구보다도 감격했다. 「4月은 갈아 엎는 달」이라는 제목에서도 시사하듯 그동안의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이 역사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 것으로 판단했다. 4.19는 신동엽에게 젊은 아사달의 ‘찬란한 반항’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바로 이어지는 5.16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그것이 「주린 땅의 지도 원리」에서 형상화되고 있다.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최고 지도자를 교체한 것으로는 변혁이 완성되지 않는 것이다. 4月은 모자만을 날렸을 뿐 심장은 멀쩡했던 것이다.
신동엽의 민족적인 것과 민중적인 것의 원형에 대한 집중과 천착은 엄격한 자기 긍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신동엽의 민중적 자기 긍정은 민족적 상황 ‘전체’ 에 대한 탁월한 역사적 ‘개괄’에는 성공적으로 작용하지만 구체적인 당대 현실과의 관계에서는 강력한 저항의 ‘지시성’을 확보하는 데 장애가 되기도 한다. 김수영은 신동엽의 시들이 참여시로서의 최소한의 조건을 고루 다 갖춘 작품을 내놓고 있지만 자칫하면 쇼비니즘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는데 이는 역사적 사건을 시적 형상의 소재로 차용해 오는 데서 발생한 문제이지 문학 정신의 문제는 아니었음을 간과하는 데서 비롯되는 오해라 여겨진다.
소월의 민요조에 육사의 절규를 삽입한 것 같은 그의 작품에서 전반적으로 느끼는 어떤 危懼感이 있다면, 그것은 쇼비니즘으로 흐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13).
김수영에게 있어서 ‘自由’ 와 ‘革命’ 이란 단어는 매우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분단된 체제의 사상적, 이데올로기적 금기로부터 당대의 집권 세력들이 독재 권력을 유지해가기 위해 교묘하게 제도화시켜 놓은 정치․사회적 금제 등이 ‘큰 부자유’에 속한다면 일상생활에서 맞부딪히는 사소한 부패와 부정 같은 것들은 ‘작은 부자유’에 속한다. 김수영은 곧잘 이 ‘작은 부자유’의 세밀한 디테일을 통해 자본과 관료가 지배해나가는 사회의 부조리와 억울함을 증명해 보이곤 했다14). 촘촘한 그물코처럼 얽힌 작은 일상생활에서의 부자유에 대한 천착과 분노는 곧잘 구조적인 ‘큰 부자유’로 확대되기도 한다.
또 이 모이값이 떨어지려면 미국에서 도입농산물자가 들어와야 한다는데, 언제까지 우리들은 미국놈들의 턱밑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나? 여하튼 이만한 불평이라도 아직까지는 마음 놓고 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일주일이나 열흘 후에는 또 어떻게 될는지 아직까지도 아직까지도 안심하기는 빠르다15).
생업으로 양계를 하던 김수영은 닭 사료값을 통해 미국의 농산물 도입의 경제적 실상을, 닭 예방주사 뉴캐슬을 놓아주는 일선관료사회의 ‘커미션’ 관행을 통해서는 정치적 민주화의 정도를 각각 측정하고 있다. 한 사회의 법률과 그 구성원들에 관철되는 형태는 일상생활의 사소한 풍속을 통해서 드러난다. 법률과 제도가 그 자체로 추상적인 것이라면 일상의 실물세계는 매우 구체적인 형상과 사물의 육체를 갖는다. 그러므로 사상과 이데올로기, 정치적 명분과 사회적 가치체계 등은 추상적이며 큰 개념으로 포괄적인 현실 전체에 개입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화되는 양상을 바로 닭병을 예방하기 위한 예방주사와 사료값 같은 것들로 나타내게 되면 동직원과 보건소직원과 양계업자 사이의 사소한 일상적 관계로 귀결된다.
보통의 생활인들과 소시민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큰 개념의 추상적인 것들에 대해 둔감하기 쉽다. ‘큰 부자유’는 의인화되지 않을 때가 더 많으며 책임을 물을 곳이 불분명한 때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큰 부자유의 익명성과 비의인화된 억압은 소시민 개개인의 단위로는 해명과 저항이 불가능하다. 개인들은 도시로 집단화되어 있는 것 같지만 기실은 자루 속의 모래알처럼 서로 분리되어 있다. ‘여론’이라고 하는 의사소통의 방법이 있긴 하지만 매스커뮤니케이션은 얼마든지 국가 이데올로기․통속 이데올로기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적 무력감과 소시민적 비애는 그러므로 아주 근원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각성된 개인’ ‘감시하는 개인’들의 조직적 대응과 적극적 대응은 정치적 의사 표시만으로 완료되지 않는다. 여기에 근대사회의 자기 갱신을 위한 끊임없는 ‘부정의 정신’이 놓일 자리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김수영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부정적인 현실에 대해 소시민적 자기 부정의 정신을 통해 치열하게 대응해 간 시인이다.
신동엽이 후고구려, 북부여, 동학, 삼한 등의 고유한 명사들을 통해 민족의 장구한 역사 속에 내재된 저항의 아름다움과 우리다움의 주체적 미학을 드러냄으로써 부정적인 분단 체제의 현실에 저항하고자 했음에도 저항의 강도가 김수영에 비해 소극적인 것으로 비친 까닭은 바로 그가 동원한 언어들이 갖는 ‘큰 틀’ 때문이다.
후고구려, 동학과 같은 오브제는 소시민적 일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 어휘들은 고유한 명사임에도 추상적인 속성을 갖는 어휘들이다. 그 자체로 전 고대의 역사적 시간으로 대상화되어 있는 추상적 언어들로 ‘지금, 이곳’에서의 삶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몇 단계의 수사적 장치를 거쳐야 되며 ‘역사적 기표’가 갖는 상징성이 근대의 ‘역사적 기의’와 일치되는데 장애가 되기도 한다. ‘큰 틀’의 개괄적 성격이 ‘전체’의 구조를 형상화하는 데 장점을 갖는다면 작은 이야기들이 갖는 현재성이 이것과 결합되는데 어쩔 수 없이 ‘큰 공간’이 남게 되는 것이다.
3. 신동엽의 장시와 시극
신동엽은 장시 형식의 시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와 「女子의 삶」을 남겼다. 여기서는 「女子의 삶」과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에 대해 그 내용을 위주로 살피기로 하겠다.
「여자의 삶」은 『여성 東亞』 1969년 1월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섣달그믐이고 장소적 배경은 한 해안이다. 그 길을 걸어가는 여인이 생각하고 꿈꾸는 것을 말하고 이어 女子란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러나 「女子의 삶」은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의 6화와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나는 밭,
누워서 기다리고 있어요
씨가 뿌져질 때를
하늘 나르는 구름이든
여행하는 씀바귀꽃이든
나려와 쉬이세요
씨를 뿌려 보세요
선택하는 자유는 저한테 있습니다
둘은 씨 받아서
둘은 神性 가꿔보고 싶으니까.
- 「女子의 삶」 중에서 -
이어서 그 女子는 ‘전쟁을 좋아하는 종자’, ‘화폐냄새로 가득한 자’, ‘우둔과 모략에 뿌리 박은 자’를 거부하면서 계속 해안을 간다. 그러나 그 여자는 현재 해안에 있지만 그 언젠가 지리산 산정에도 있었고 경부선 가로수 총멘 소녀의 모습으로도 환원되며 그러한 모습의 뒷 끝에 시인의 여성상이 제시된다.
女子는
집
집이다, 여자는,
남자는 바람, 씨를 나르는 바람.
여자는 집, 누워있는 집.
빨래를 한다, 여자는 양말이 아니라 남자의 마음.
전장에서 살육하고 돌아온
남자의 마음
그 피묻은 죄까지
그 부드러운 손길로
그 신비로운 늪에서
빨래를 시켜준다.
쇠붙이도
탄도탄도
그녀의 무릎 밑에 와선 흐물흐물
녹아 나리는 물.
- 「女子의 삶」 중에서 -
여자는 인간의 죄악을 씻어주는 생명수며 평화이며 신성(神性)을 지닌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발표지면을 고려하여 대중적 감상성을 기초로 하는 이야기를 구성했고 거기에 자신의 ‘전경인 정신’을 담으려다 보니 전체적으로 교훈적 멜로드라마의 성격을 지닌16)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시에서도 6.25체험의 비극적인 근원 모티프가 계속 작동되고 있다.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강강수월래 대열에 끼여
조국을 돌던 내 소녀.
그때 네 뒷꿈치에선
선혈이 흐르고 있었지17)
에서 보듯 ‘빛나는 여름’에 피를 흘리며 강강수월래 춤을 추었고 그 춤이 끝난 후에는 ‘전장에서 살육하고 돌아온 남자를’ 빨래해 주기도 한다. 또한 그 여자는 ‘붉은 벽돌담이 있는 도시’로 ‘옥바라지 봇짐’을 들고 가기도 하며 새로운 문화를 가꾸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작품은 우리 민족에게 강요되었던 동서 강대국의 냉전 이데올로기를 민족 동질성에 입각하여 극복하는 것을 그 주제로 삼는 작품이다.
이의 상세한 분석을 위해 시극의 중요 전환점을 나누어 살피고자 한다. 다만 한 가지 전제해 둘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이 시극(詩劇)이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의 온전한 파악은 그 장르의 특성과 함께 적절히 파악되어 평가되어야 할 것이나, 작품의 내용 중심으로 밖에는 논의를 진행시키지 못하는 점이다.
전쟁 중의 어느 봄, 대낮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치열한 육박전이 휩쓸고 지나간 산중 계곡이라는 공간적 배경으로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전쟁의 와중에 서로 육박전을 벌이던 ㄱ측과 ㄴ측의 군인들 중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두 군인이 자신들의 싸움이 대리전이요 이데올로기에 의한 껍데기의 싸움임을 자각하며 서로 사랑하지만 정체 모르는 비행기의 폭격에 의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그 줄거리이다.
등장인물 중 ㄱ측의 부상병 남자와 ㄴ측의 부상병인 여자가 육박전이 끝 난 뒤 유일한 생존자로 만난다. 처음에는 경계의 눈빛을 떼지 않는다. 이중 ㄱ측의 부상병은 학도병으로 전쟁에 가담하였고 고향엔 부모님과 누님이 살고 있었다. 그는 ㄱ측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전쟁에 참여하였다. ㄴ측의 부상병도 대동소이한 가족과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ㄱ측의 군인을 용감히 무찌른 공로로 훈장을 탈만큼 ㄴ측의 이데올로기에 젖어 ㄱ측을 증오하며 전쟁에 가담한다. 이 두 주인공은 모두 그 싸움터에서 극심한 부상과 기력의 쇠잔함으로 쓰러졌다가 거기에 내린 소나기에 의하여 의식이 깨어나게 된다.
이렇게 죽음을 통과한 이들은 다시 깨어났을 때에도 서로에게 총을 겨눌 만큼 각각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사람들이지만 갈증을 느끼는 여인에게 수통의 물을 건네주면서 화해의 단초를 열어 보인다. 그 물을 마신 여인은 그 물의 맛 속에서 자기 고향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뒤곁에 장독이 있었어요. 그 장독 옆에 앵두나무가 있었구, 앵두나무 밑에 맑은 옹달샘이 솟고……고조할아버지께서 꿈 속에 현몽받은 샘이었데요. 초여름이면 빨간 앵두알이 그 맑은 물 속을 주렁주렁 굽어들고 있었어요18).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눈빛에서 살기를 띄던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화해의 자리에 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가능하겠지만 신동엽은 아마도 이 대목에서 그까짓 계급장, 이데올로기는 민족의 동질감 속에선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친다. 이렇게 자기 고향을 떠올린 여인이 그의 본래 심성으로 아니 돌아올 수 없다. 그는 남자의 상처에 대해 묻고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같은 동족이라는 확신 및 일치는 자연스럽게 그 둘의 포옹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러한 포옹도 잠시 뿐 전쟁의 와중에 들려오는 포성소리에 남자는 자기가 속한 쪽이 어디인가를 깨닫는다.
저 소리……저 소리, 저 소리 근처에서 이 시간 아우성치며 쏟아지고 있을, 내 동지들.
나는 지금 당신을 쏘아버릴 자신은 없지만, 미워한다. 열번 백번이라도 쏘고 또 쏘고 싶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쏘지 못하는 것은 여인을 팔로 안았을 때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씨가 자기 어머니와 누이가 쓰던 같은 말이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며 신동엽의 작품을 뒷받침하는 기본 정서인 연민의 정을 그녀의 팔에 있는 우둣자국에서 보아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실체로 두 주인공을 감싸고 있는 것은 냉전 이데올로기이다. 다만 그것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갈등에 빠져 있을 때 이 두 사람의 주인공 앞에 나타난 인물은 시대불명의 부상병이다.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절뚝절뚝 걸으면서 그는 말한다.
어쩐다 어쩐다 이 구름을 어쩐다 이 행복을 어쩐다. 마렵긴 하고 땅은 넓고 누구 얼굴에다 쏟는다. 많아도 걱정이야. 헌데 이 쓸개빠진 산천은 어쩌자고 하필이면, 내 눈 앞을 탐낸다?20)
그 부상병은 누구일까. 안대를 하고 한쪽 눈을 가리고 있음은 무엇을 상징할까. 자라면서 한쪽의 이데올로기만을 주입받은 작중 주인공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은 아닐까. 분단시대는 분단된 쪽의 사회체제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절름발이 인간으로 육성되기를 강요하는 것이므로. 이어 또 다른 인물이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남루한 옷을 입고 한쪽 어깨에 구럭을 매고 보자기에 싼 유아를 업은 귀머거리 노인이다.
그는 야전용 삽과 약초뿌리를 들고 있었는데 두 사람을 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길할…제에길할…죽은 송장을 보면 그렇게 내 친자식처럼 반가운데…멀뚱멀뚱 살아 있는 사람들만 보면 이렇게 벌벌 떨리네21)…
그는 귀머거리였다. 원산에서 폭격을 맞고 자식을 잃었으나 자신은 귀머거리가 되어 이 산속을 헤매고 다니며 죽은 송장들을 한 번씩 껴안아 주고 묻어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느 한편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곤 상대방 이데올로기를 지닌 자에겐 폭력을 행사함으로 죽은 자는 편하고 살아 있는 인간이 무서운 것이다. 이 귀머거리 노인은 누구일까. 누구를 상징하는 인물일까. 작자는 이 두 사람의 젊은이 앞에 냉전 논리과정에서 귀머거리가 되어버린 주인공들의 초상을 드러내 보여줄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도 남자는 자기 고향으로 가자고 한다. 그러나 여자는 ‘껍데기끼리의 멱살잡이가 끝나지 않는 한 아무쪽에도 살고 싶지 않아요.’ 하면서 거부하고 공동 우물 바닥에 가서 살든가 이 산속에 살겠노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남자는 현재의 상황이 구성원 개인에겐 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에겐 그런 선택권이 지금 없어. 이 답답한 반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22)
이에 대하여 여자는 그러한 판단이야말로 미래를 좀더 확실히 전망하지 못한 것임을 말한다. 미래는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얘기하면서 산 속에 움막을 짓고 살아가자고 한다. 말하자면 현재의 상황이란 한 개인이 분단 의식을 극복했다고 해서 결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삶의 공간이라 할 수 없다는 여자의 말과 그러한 공간 속에서도 살 길이 있을 것이라는 남자의 생각이 현실적으로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가 자기 고향으로 가자는 말에 여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건 우리 한두 사람의 힘으론 발뺌이 안돼요. 그 큰 톱니바퀴 속에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말아요.’라고.
이러한 갈등 속에서 결국 남자는 결단을 내린다. 사랑하지만, 헤어지고 싶지 않지만 각각 자기의 모자를 쓰고 헤어지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둘은 헤어질 것을 합의한다. 그리고 산새 울음소리 들리는 산 속의 풍경을 뒤로 하고 떠난다. 그러나 몇 발을 가다가 남자는 먼저 뒤돌아서 자기의 사랑을 포기치 않을 것을 선언하며 여자를 껴안는다.
정말이지 누군가가 쏘아 줬으면 좋겠어. 우리 둘이 맞부등켜 안고 있을 때 우리 둘을 맞뚫어 거기 그 순간에 영원히 못박아 줬으면 좋겠어. 누군가가 해결해 줬으면 좋겠어23)
이 구절은 신동엽이 냉전 의식이 야기하는 고통의 실체를 명확히 드러낸 것으로 판단된다. 즉 서로가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각 구성원의 운명을 적실하게 묘파해낸 것이다. 벽 앞에서 개인이 느끼는 절망감이 처절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거짓해결의 방식이지만 둘의 가슴이 만나고 있는 순간에 그 만남의 순간을 영속시키기 위해 누군가의 총을 맞고 죽고 싶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당시에 지배하던 냉전 의식의 일단을 표현하고 있는 사례다.
앞에서 개인들은 서로의 상황을 개인적 차원에서 수용한 결과 만남과 헤어짐의 갈등구조로 종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음의 상황은 그들의 상황 속에 동학혁명을 상기시킴으로써 현재 그들이 처한 위치를 새롭게 인식시킨다.
물론 그러한 상황에 이르기 전 그 둘은 명백하게 자기 동포를 신뢰하는 지경 즉 서로에게 먼저 죽여 달라는 말을 한다.
거센 음, 북소리 들리면서, 무대 어두워지고 앞 쪽만 스폿트. 머리에 노랑 수건 두른 하늘 찌를 듯 두 간 넘는 죽창 가진 동학군. 무용스런 동작으로 등장. 중앙에 죽창 쥐고 앉으면서 기도하는 자세. 청나라 군인과 일본 군인 반대 방향에서 등장. 무언으로 춤추며 접근. 동학군의 대창을 치고 또 친다24).
이어서 청나라 군인과 일본 군인은 서로 아랫도리만 혹은 젖가슴만 달라면서 동학군의 죽창을 향해 공격을 퍼붓는다.
이 점은 동학혁명의 좌절이 외세의 힘에 의한 것이었음을 떠올려 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실은 그 둘이 서로 싸우고 있는 싸움의 정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들의 전쟁 속에 동학이라는 반봉건 반외세의 농민 봉기 참뜻이 접맥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돌연한 상황 변화는 추후 정밀한 분석이 요망된다 하겠으나 한 가지 관련시켜 생각해 볼 것은 신동엽의 또 다른 시 「금강」의 19장, 20장, 25장에서 갑오농민전쟁의 풍경 속에 난데없이 등장하는 6.25의 상황이다.
이어서 그 둘은 총을 녹여 호미를 만들고 쇠붙이와 껍데기를 버려 서로의 갈라섬을 하나로 통일시키자는 결단에 이르게 된다.
물론 그들의 마음속에 추억처럼 어려 오는 일말의 불안감, 냉전 의식의 찌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젠 끝났구료…그렇지만 역사가 우릴 용서해 줄까?” 그러나 女子는 단호하다. “그래요. 내일의 역사가 우릴 용서 안 해 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다음의 역사는…” 둘은 기뻐한다. 드디어 조국의 일부분이 지금 이곳에서 통일되었다고 기뻐하며 여태까지의 싸움이란 껍데기가 껍데기끼리 싸웠던 것으로 확연히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 부근에서 우리는 그의 시「껍데기는 가라」의 의미를 새롭게 듣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 둘은 열평짜리 완충지대를 확보하고 거기서 살기로 맹세한다. 죽어도 거기서 죽으면 이 강산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골짜기를 빠져나가려고 서로의 몸을 부축하면서 주위를 살피며 나아간다. 그러나 그들이 무사히 빠져나갈 듯한 순간에 난데없는 비행기가 나타나고 그들은 결국 폭격을 당하여 죽고 만다. 이 상황을 신동엽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귀를 째는 제트기 폭음 머리를 스쳐 하나가 지나간다. 이어 또 하나의 제트기 폭음, 가까이 내려오면서, 따, 따, 따, 따, 따, 따, 하는 기관포 사격소리. 무대는 온통 불꽃 바다가 되면서 오색 조명 회전한다. 소리 멎고 무대 점점 안정되어 밝아지면서 남, 녀의 늘어진 시체 어슴프레 나타난다. 늘어진 두 시체, 서로 한쪽팔을 길게 뻗어 맞잡으려고 했으나 겨우 두 손가락이 닿을 듯 접근해 있을 뿐이다25).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이미 냉전 의식을 서로간의 사랑에 의해 극복한 상태에서의 죽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장 행복한 죽음이고 또한 역설적으로 가장 슬픈 죽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은 적어도 반도 안에서의 참 삶의 경지에 이른 또 다른 죽음이며 그 죽음의 역설적 의미를 극명하게 보이고 있는 죽음이다.
이 작품에 확실히 언급된 것은 없지만 이 작품의 소재는 6.25 전쟁이다. 그는 남과 북의 민족적 동질성을 가장 참혹하게 파괴한 그 외형상의 의미 이외에 민족이라는 뜨거운 동질성을 찾아내 보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신동엽이 이 작품에서 결말처럼 제시하고 있는 대목에서 우리는 그의 뜨거운 민족애의 근본적인 신뢰감을 접하게 된다. 이는 곧 새로운 결단 혹은 인식의 단초를 열어두고 있는 것이다.
알 수 없이 전쟁에 휩싸였다가 서로 상대방이 바로 자기의 형제와 이웃의 얼굴과 하등 차이도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로가 인간적인 만남의 광장을 구축하면서 이 짧은 과정을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결말은 지금 이곳의 문제로 분명하게 떠오를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로 보건대「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60년대의 극심한 냉전 시대에 발표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4. 서사시 ‘금강’에 대하여
서사시 “금강‘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의가 있었다. 크게는 장르상의 분별문제로 서사시냐 아니냐의 문제가 있고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신하늬를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 아닌가 등이다. 총 4500여행에 이르는 이 시는 신동엽이 1967년에 펜클럽의 지원을 받아 발표하였다. 이 시는 갑오농민전쟁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단순한 역사적 사실만이 아니라 그 전쟁의 전개과정에 가공의 인물인 신하늬를 등장시켜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물론 이 시는 형식상으로 그 평가를 시의 앞과 뒤쪽에서 3.1독립운동 4.19혁명의 흐름 속에서 그 으뜸의 전통으로 갑오농민전쟁을 제기하고 있고 그러한 역사적 흐름은 시가 씌어진 69년대 중반의 구체적인 서울의 삶 속에 어린 노동자의 삶으로 이어져 현재화되고 있다.
신동엽은 6.25전쟁의 와중에도 갑오농민전쟁의 전적지를 찾아다니고 그 역사적 자료들을 채증하고 다녔다고 하는 데 이 시에서는 그러한 자료들이 갑오농민전재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가공의 인물인 신하늬를 등장시켜 갑오농민전쟁이 이룰 수 있었던 성취를 그리고 있다.
신하늬는 사실로서의 동학혁명에 대한 작자의 상상력이다. 그러한 실패를 맞지 않기 위해서 그러한 작전이었으면 성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신하늬가 대신해서 행동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안타까움을 작자는 혁명의 주인공인 전봉준을 잡혀 죽게 만들고 신하늬는 자발적인 죽음을 맞게 하는 대비를 통해서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신하늬의 죽음 전에, 인진아가 하늬의 후손인 아기 하늬를 잉태하게 하고, 낳게 하기도 하고, 아버지 하늬가 차고 있던 방울을 달아줌으로써 아버지의 삶과 같은 연계적 삶임을 예시하고 있고 금강의 마지막 부분, 즉 종로 5가 비오는 골목길에서 바로 그의 아들 신하늬를 작자가 만나게 함으로써 이 작품의 출발점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결국 「금강」은 사실과 사실에 대한 또 다른 작자의 해석이 신하늬라는 상상적 인물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 있는 일은 작중 주인공 신하늬의 삶과 신동엽의 삶이 지닌 유사점이다. 이 둘은 현상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 흡사하다.
신동엽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상태에 있었던 1930년대에 태어났고 외세의 개입에 의한 분단을 겪었다. 또한 좌․우 이데올로기의 격심한 충돌의 현장에 속해 있었으며 4.19혁명 속에서, 5.16의 좌절 속에서 살았던 한국 현대사의 전형적인 삶과 일치하는 삶을 영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 그 자체만으로 어떤 독특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삶이 그의 작품 속에 용해되어 적절히 형상화되어 있음으로 해서 그의 삶이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의 삶이 「금강」에서의 ‘신하늬’라는 주인공의 삶과 상동단계를 갖고 있음으로 인해서 그의 삶이 갖고 있는 의미가 다시 되물어지는 것이고 이러한 물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삶의 이해를 폭넓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신하늬의 삶과 신동엽의 삶은 첫째, 시대적 과제를 온몸으로 감당한 점이 일치한다. 다만 신하늬가 봉건시대에 살았다는 점에서는 다르나 시대의 한계, 모순을 돌파해야 한다는 당위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수용하고 있다. 신동엽은 자본주의 시대에 살았고 자본주의의 독소적 측면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 속에서 살았다. 둘째, 신하늬는 그의 삶 속에서 여러 민란과 동학혁명 등을 겪는 혼란의 시기에 그 혼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신동엽은 그의 삶 속에서 분단 상황, 6.25전쟁, 4.19혁명, 5.16 등의 과정 및 혼란을 겪었다. 셋째, 신하늬의 좌절은 혁명지도부의 투쟁방법 실패 및 외세의 개입에 의한 좌절이었듯이, 신동엽의 좌절은 혁명 및 모든 혼란의 이면에 외세라는 한계가 있었다. 넷째, 출생, 성장, 결혼의 과정에서의 유사점이 있다.
신동엽과 신하늬의 성씨와 부인 인병선의 인진아의 성씨가 같고 신하늬의 아버지는 경복궁 공사장에 부역 나왔다가 죽는다. 인병선의 부친 인정식은 6.25때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 또한 그의 전기를 다룬 성민엽이나 윤재걸의 글에 보면 「錦江」에서 신하늬와 인진아가 만나서 사랑하는 풍경과 신동엽과 인병선의 사랑 풍경이 아주 유사하다.
그렇다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신하늬의 모습이 실은 신동엽이 우리 역사를 보는 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맺는 말
굶주려본 사람은 알리라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철들면서부터
그 지루한 30년 50년을
굶주려본 사람은 알리라
굶주린 아들 딸애들의
그, 흰 죽사발 같은 눈동자를
죄지은 사람처럼
기껏 속으로나 눈물 흘리며
바라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리라
뼈를
깎아 먹일 수 있다면
천 개의 뼈라도 깎아 먹여주고
싶은
그 아픔을
맛본 사람은 알리라26)
이 시구는 금강의 한 부분으로 가히 신동엽의 절창을 이루는 부분이다. 글을 맺으면서 이 시구를 다시 읽어보는 것은 신동엽의 삶과 시 전체를 관류하는 연민의 정서를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신동엽은 식민지의 복판에서 태어나 이후 해방과 6.25전쟁 그리고 4.19와 5.16을 겪으면서 더 나아가 한일 협정과 베트남 파병 등의 현대사를 통과하면서 누구보다도 분단을 비통하게 생각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온몸을 던진 시인이었다. 더욱이 그의 삶이 녹아있는 그의 시편들은 이후 분단을 넘어 통일로 가는 길에서 늘 함께 불리우고 다시 음미되어야 할 중요한 텍스트로서 작동하리라고 여겨진다.
그의 시 ‘산에 언덕에’를 읽으면서 그가 노래하고 있는 것이 그저 객관화된 무정의 우리 산하와 언덕이 아니라 분단의 상처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던 갈등과 눈물 그리고 슬픔이 풀 한포기 하나하나에도 점점이 배어있음을 느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그 공감 속에서 이후 우리가 열어야 할 아름다운 평화통일의 그날은 말 그대로 누구의 결단이 아니라 신동엽 시인과 같은 빼어난 민족시인의 숨결이 작동하고 있음을 우리 모두는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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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1세)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 294번지 초가에서 평산 신씨 연순과 모 광산 김씨 영희 사이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1937년(8세) 부여초등학교 입학. 부여읍 동남리 501-3으로 이사
1942년(13세) 초등학교 6학년이 되다. 담임교사 김병익의 총애를 받다.
4월 ‘內地 聖地 參拜團’의 부여초등학교 대표로 선발되어 충남 각 학교에서 선발된 150명 중의 하나로 15일간 일본을 다녀오다.
1943년(14세) 부여초등학교 졸업하다 6년간 줄곧 우등생으로 상장을 타오다.
관립학교인 전주사범에 응시, 합격하다.
1948년(19세) 동맹휴학으로 전주사범을 그만두다.
*** 전집에는 전주사범을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음. 확인 요망
귀향하여 부여에 머뭄 부여 인근의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기도 했으나 부임 사흘 만에 그만둠.
1949년(20세)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다. 시 나의 나 쓰다.
1950년(21세) 6.25가 발발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다.
7월 초부터 9월 말까지 인공 치하의 부여에서 민청 선전부장을 하다.
수복 후 고향을 떠나다. 12월 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다.
1951년(22세) 2월 중순 국민 방위군 대구 수용소를 빠져 나오다. 처음에는 남향하여 밀양의 한 여관에서 방우 노릇을 하다가 건강의 악화로 다시 북상 귀향하다. 귀향 후 몇 개월 요양하고서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다시 부여를 떠나 대전으로 가다. 대전 전시 연합대학에 적을 두고 학업을 계속하다. 전시 연합대학 동창 구상회와의 본격적인 친교가 시작되다. 이 해 가을부터 다음해 가을 까지 충남 일대의 백제 사적들과 갑오농민전쟁의 자취를 두루 답사하다.
1953년(24세) 단국대학교 사학과 졸업
부산으로 내려가 졸업식에 참석. 졸업과 동시에 제 1차 공군 학도간부 후보생으로 임명되나 발령받지 못함. 초봄 상경하다. 시청에 다니던 친구가 차린 헌책방 (돈암동 사거리)에서 숙식하며 책방 일을 보다. 이 무렵 현재훈을 만나 교우를 가짐. 당시 이화여고 3학년 재학 중이던 인병선을 만나다.
1955년(26세) 여름 4년만에 고향땅을 밟다. 고향에서 여름을 보낸 뒤 온양의 구상회를 찾아 함께 상경하여 동두천에서 현지 입대하다. 6군단 공보길에 근무하다가 구상회와 함께 서울 육군본부로 전속되다.
1956년(27세) 봄 구상회는 온양으로 전속되다.
인병선의 노력으로 초가을 의가사 제대. 제대 후 인병선과 결혼하여 부여집에 신혼살림을 차림.
*** 전집 연보에는 57년에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음. 확인 요망
겨울 구상회 노문 이상비 유옥준 들과 문학적 교류를 가짐.
가제 야화 (野火)로 동인지를 내려고 준비 몰두 주로 노문의 하숙집에서 열띤 문학토론을 벌임. 신춘문예 시 부문에 응모하나 낙선함. 이상비도 평론부문 낙선
1957년(28세) 인정식씨의 장녀 인병선 여사와 결혼. 맏딸 정연 태어남.(전집)
봄 인병선이 부여 읍내에 양장점을 차림. 7월 맏딸 정섭 태어남. 가을 충남 보령 주산농고에 국어교사로 취직하다. 보령으로 이사하다. 겨울방학 직전 각혈 폐결핵인줄 알고 주산농고 사직. 혼자 부여에 남아 요양에 들어가고 인병선은 정섭을 데리고 서울 돈암동의 친정으로 가다.
1958년(29세) 충남 주산농고에서 교편을 잡음.
*** 전집에 있는 부분임. 상위
부여읍 동남리 501-3에 틀어박혀 시작에 몰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쓰다. 석림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에 응모.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秋收記를 응모
1959년(30세)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석림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 평론은 결선에서 탈락. 봄 상경하여 돈암동에서 단간 전세방을 얻고 서울살림을 시작. 맏아들 좌섭 태어나다.
시‘진달래 산천’(조선일보), ‘새로 열리는 땅’(세계일보) (향아)등 발표.
1960년(31세) 월간 교육평론사에 취직
전주사범 동창 하근찬을 다시 만나다.
4.19 일어나다.
동사간 [학생혁명시집] 편저하다. 여기에 혁명 시 ‘싱싱한 동자를 위하여 ’수록. ‘풍경’(현대문학), ‘그 가을’(조선일보)등 발표
1961년(32세) 명성여자고등학교 야간부 국어교사로 교편생활 시작.(작고 시까지 재직)
5.16 일어나다. 시론 ‘시인정신론’을 [자유문학]지에 발표(69년 [시인]지 8월호에 재수록). 평론 ‘60년대의 시단분포도’(조선일보), 시 ‘아사녀의 우리는 축고’(자유문학) 등을 발표
1962년(33세) 둘째 아들 우섭 태어남. 장모의 도움으로 서울 동선동 5가 46에 한옥을 마련하다. 이후 타계까지 이 집에 살다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 입학하다.
‘나의 나’(신사조), ‘이곳은’(현대문학), ‘별밭에’(성 ), ‘너는 모르리라’(경향신문) 등 발표. 산문 ‘서둘고 싶지 않다’ 발표
1963년(34세) 3월에 시집 [아사녀]를 문학사에서 상집. 이 시집에는 ‘이야기 하는 쟁기꾼의 대지’, ‘진달래 산천’, ‘그 가을’, ‘정본 문화사 대계’, ‘이곳은’, ‘내 고향은 아니었었네’, ‘아사녀의 울리는 축고’, ‘나의 나’, ‘힘이 있거든 그리로 가세요’ 등과 신작 8편. ‘아니오’, ‘빛나는 눈동자’, ‘미쳤던’, ‘눈날리는 날’, ‘산사’, ‘산에 언덕에’, ‘완충지대’, ‘꽃대가리’를 묶었음. 18편이 수록됨.
장정은 인병선이 맡음. 그밖에 ‘주린 땅의 지도원리’, ‘기계야’, 산문 ‘금강잡기 시와 사상성’ 등을 발표
[시 ]지에 ‘기계야’ 발표
1964년(35세) 6.3사태 발생.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이수
‘진이의 체온’(동아일보) 발표
1965년(36세) 한일협정 비준반대 문인서명운동에 참여 ‘웅(시 )’, ‘삼월’(현대문학), ‘초가을’(사상계) 발표
1966년(37세) 창작과 비평 창간. ‘발’(현대문학), ‘4월은 갈아엎는 달’(조선일보), ‘산에도 진수를’(신동아), ‘담배 연기처럼’(한글문학) 등 발표
6월 *** 2월 (평전)에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을 최일수 연출로 국립극장에서 상연(시극동인회 제2회 공연작품)
발, 4월은 갈아엎는 달 산에도 분수를 담배연기처럼 등 발표
1967년(38세) 1월, 신구 문화사 간 현대한국문학전집 제18권 [52인시집]에 신작 ‘껍데기는 가라’와 ‘삼월’ ‘원추리’, ‘발’, ‘그 가을’, ‘아니오’, ‘원추리’ 등 7편 수록. (작가는 말한다)라는 타이틀 아래 산문 “노동과 서정의 이성” 수록
6-8월, 중앙일보에 시월평 집필. 펜클럽 작가기금을 받아 4800행에 이르는 ‘금강’ 집필을 위해 여관을 전전하기도 함. 장편서사시 ‘금강’을 을사문화사간 한국현대신작전집 제5권 “장시, 시극 서사시” (김종문․홍윤숙․신동엽 공동시집)에 발표. 김수영이 참여시의 정리 창작과 비평 67년 겨울호 에서 신동엽의 시를 높이 평가하다. 시 창가에서 종로5가 산문 공예품 같은 현대시 낯선 외래어의 작희 확 트인 이야기로 빛을 본 모국어 등을 발표
1968년(39세) 장편 서사시 임진강 집필을 계획하고 임진강변이며 문산 일대를 답사하기도 했으나 마무리 되지 못함.
5월, 오페레타 ‘석가탑’(전5경, 백제동작곡)을 드라마 센터에서 상연
6월 16일 김수영 타계, 조시 ‘지맥 속의 분수’ 한국일보를 쓰다.
[창작과 비평]지 여름호에 ‘보리밭’, ‘여름 이야기’,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그사람에게’, ‘고향’등 5편 발표. 그밖에 ‘봄은’(한국일보), ‘수운이 말하기를’(동아일보), ‘여름고개’(신동아), ‘산문시’(월간문학) 등 시 발표
1969년(40세) 시론‘시인.가인.시업가’(대학신문), ‘선우휘 씨의 홍두깨’(월간문학)등 발표
3월 간암 진단을 받다 세브란스 병원. 며칠 입원했다가 4월7일으로 자택(서울 동선동 5가 46)에서 영면. 남정현의 품에 안겨 타계. 4월 9일 경기도 파주 금촌읍 월롱산 기슭에 안장. 12월 14일 묘소에 묘비 세움.
유작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고대문화), ‘조국’, ‘일 이야기’(월간문학), ‘영’(현대문학), ‘서울’(장형), ‘좋은 언어’, ‘마려운 사람들’(사상계) 등이 발표됨. 유네스코 소강당에서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공연되다.
1970년 4월 18일 고향인 부여읍 동남리 금강 기슭에 시비를 세움.
시비엔 ‘산에 언덕에’가 새겨짐. 이날 부여읍 예식장에서 추모문학 강연회가 있었음. [창작과 비평]지에 ‘봄의 소식’등 유작시 5편이 발표됨.
1971년 시 ‘단풍아 산천’, ‘권투선수’, 평론 ‘시운동의 가능성’ 등 가 [다리]지에 발표됨.
1975년 6월, [신동엽전집]이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됨. 7월, 책 내용이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판매 금지됨.
1979년 3월, 시전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가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됨.
4월, 서울 YWCA에서 출판기념회를 겸한 10주기 행사
1980년 증보판 신동엽전집이 간행됨.
1982년 신동엽 창작기금 제정됨.
1. 기념행사
□ 신동엽 추모제
○ 일 시 : 2005. 4. 9(토) 15: 00
○ 장 소 : 신동엽 묘소(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 56-2)
○ 주 최 : 부여군
○ 주 관 : 전교조부여지회(☎ 019-419-9957)
부여문화원(☎ 041-835-3318)
○ 내 용 : 헌화, 추모제향, 시낭송 등
□ 신동엽 문학의 밤
○ 일 시 : 2005. 4. 9(토) 19: 00
○ 장 소 : 부여청소년수련관 소공연장
○ 주 최 : 부여군
○ 주 관 : 민족문학작가회의(☎ 02-313-1486~7)
부여문화원(☎ 041-835-3318)
○ 내 용 : 기념강연 - 강형철(시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사무총장)
시 낭 송 - 황명걸(시인), 이문복(시인), 이원규(시인),
인병선(유족대표, 짚풀생활사박물관장)
노래공연 - 안치환(가수)
□ 신동엽 시극공연
○ 일 시 : 2005. 4. 9(토) 20: 30
○ 장 소 : 부여청소년수련관 소공연장
○ 주 최 : 부여군
○ 주 관 : 민족문학작가회의(☎ 02-313-1486~7)
부여문화원(☎ 041-835-3318)
○ 내 용 : 신동엽 작『그 입술에 파인 그늘』공연
○ 연 출 : 김석만(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 신동엽 문학기행
○ 일 시 : 2005. 4. 10(일) 09: 30
○ 장 소 : 부여 신동엽 유적
○ 주 최 : 부여군
○ 주 관 : 부여문화원(☎ 041-835-3318)
민족문학작가회의((☎ 02-313-1486~7)
○ 강 사 : 인병선(유족대표, 짚풀생활사 박물관장) 외
○ 내 용 : 신동엽 생가 → 시비 → 묘소 → 금강 → 곰나루 → 우금치 답사
□ 신동엽 백일장
○ 일 시 : 2005. 4. 15(금) 13: 30
○ 장 소 : 부여 궁남지(사적 제135호)
○ 주 관 : 부여문화원(☎ 041-835-3318)
전교조부여지회(☎ 019-419-9957)
○ 내 용 : 초 ․ 중 ․ 고학생 대상, 시 ․ 산문 쓰기
□ 신동엽 문학도록 발간
○ 기 간 : 2005. 3. 14~6. 30
○ 주 관 : 부여문화원(☎ 041-835-3318)
○ 내 용 : 신동엽 관련 각종 사진과 육필원고, 약전, 연보 등 수록
○ 부 수 : 2000부(CD 별도 제작)
2. 언론홍보 기타
가. 문화관광부 인터넷 서비스
○ 명 칭 : 이달의 문화인물
○ 주 소 : http://www.mct.go.kr(문화마당 → 이달의 문화인물)
나. 포스터 및 소책자 발간 등
○ 발 간 처 : 문화관광부
○ 배포내용 : 포스터(2만매), 소책자(2만5천부), 문화달력(2만5천매)
다. 일간지, 정기간행물 특집기사 게재 홍보
○ 중앙일간지, 방송, TV, 정기간행물 등 보도자료 배포
○ 전국 시․군․구 소식지 게재
○ 공공기관 기관지, 기업체 사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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