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覺齋權公行狀(각재권공행장) 萬齋權公行狀(만재권공행장) 友新權公行狀(우신권공행장) 處士權公行狀(처사권공행장) 十一代祖德菴府君事狀(11대조덕암부군사장)
十一代祖德菴府君事狀(십일대조덕암부군사장)
부군(府君)의 휘는 극리(克履)요 자는 원길(元吉) 성은 권이니 선조는 안동인이다. 고려태사 휘 행(幸)으로 시조를 삼는다. 이로부터 세세로 관작이 혁혁(赫赫)하더니 문탄공(文坦公) 일재선생(一齋先生) 휘 한공(漢功)에 이르러 더욱 대현(大顯)하여 문장과 훈업(勳業)이 일세에 빛났다.
是生諱仲達花原君諡忠憲. 入我朝軍資監正諱執德始筮遯于嘉樹至奉事諱金錫又移居丹城至. 諱世仁有壬辰義勛官至縣監是爲府君之王考. 考諱濬世稱霜嵒先生官弼善光海時有出處大節,丙子以光州牧倡義勤王聞和成而歸遂絶意於世.
휘 중달(仲達)을 生하니 화원군(花原君)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군자감정(軍資監正) 휘 집덕(執德)이 비로소 삼가 대평에 우거하고 봉사(奉事) 휘 금석(金錫)에 이르러 단성(丹城)에 이거(移居)하니라. 휘 세인(世仁)은 임진란에 의훈(義勛)이 있고 벼슬은 현감(縣監)이니 부군의 조(祖)요. 고(考)의 휘는 준(濬)이니 세인이 상암선생(霜嵒先生)이라 칭하니 벼슬은 필선(弼善)이라. 광해군 시절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오셨고 병자호란에 광주목사로써 창의(倡義), 근왕(勤王)하였으나 남한산성에서 화의가 성립함을 듣고 향리에 돌아와 은거 불출하시다.
비(妣)는 숙인(淑人) 함안조씨(咸安趙氏)이니 임진왜란때 충신으로 증(贈) 참의(參議) 응도(凝道)의 女니 정숙하고 근신하여 부덕이 심히 있더라. 만력신축(萬曆辛丑) 6월 21일에 단성현 단계리 본가에서 부군을 生하니라. 부군의 그릇이 심중하고 성행(性行)이 순근(醇謹)하여 어릴때부터 노성(老成)한 기상이 있으니 상암선생이 크게 기대하여 가르침을 반드시 법도로써 하니 부군이 가르침을 따라 조금도 어김이 없고 스스로 학문의 귀함을 알아 독려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경전과 사서(史書)를 즐겨읽었다.
時霜嵒先生多從仕在外而府君惟勵志篤學有穿榻之勤措置家政井井有措處宗族御僮僕無不曲盡恩義家庭之內無或間言讀書惟務躬行實得而不以剽竊爲事持身惟務闇然內修而不求燁燁於外其視名利若鴆毒也
당시에 상암선생이 관직에 계셔 외유가 잦았는데 부군은 오직 열심히 독서하여 자리를 뚫는 부지런함이 있었고 가사를 돌보아 정연히 조리있으며 일가친척을 대접하고 사환을 통어함에 모두 은의(恩義)를 곡진히 하고 가정안에서 조금도 원언(怨言)이 없더라. 독서는 오직 실지로 행하기를 힘쓰고 문장을 일삼지 아니하며 더욱이 명예와 이익은 독약같이 보더라.
嘗薄遊公車見黨論乖張奔競成風輒券而歸遂絶意進取益務晦養惟從賢師友譚經論道如趙澗松任道李梅軒瑴父友也而往來考質李槐堂曼勝鄭學圃暄朴鏡川以赫河謙齋弘道世交也而追遊切磋自是學問益邃而志尙益高矣
숭정 병자년(崇禎丙子, 서기 1636년)에 모상(母喪)을 당하고 임자(壬子 서기 1642년)에 부상(父喪)을 당하여 전후 상중(喪中)에 예절을 어기지 아니하였고 장차 장례를 치르고자 의령 부령산(縛嶺山) 아래에 복지(卜地)하였더니 산하(山下)에 세력가에 있어 금장(禁葬)하는지라. 부군이 아우와 더불어 그 세력가를 찾아보고 지성으로 간청한즉 그 세력가가 말하기를 “어젯밤 꿈에 신령이 이르는 말이 있으니 내가 부득이 피하겠노라.”하고 타지로 이사하니 부군의 효성이 족히 신명(神明)을 감동케 함이더라. 先是府君之外祖參議公之殉節其家蕩無主者府君嘗以親命往來幹之後因搬而移之築室於萬德山中自號德菴居士圖書自娛囂囂然無求於世惟以頤養德性爲事童土尹公舜擧宰縣一見輒稱以處士高蹈道義相結與相唱和者甚多而今祗有一首詩傳於家其詩曰九重淵裡還投足千仞岡頭可振衣蓋美其遯世旡悶而惜其抱才不試也
부군의 외조(外祖) 참의공(參議公) 댁이 의령 신반리에 있는데 참의공이 무자함에 참의공 졸후로 그 집을 주관할 자 없는지라. 부군이 친명(親命)으로 왕래하며 돌보다가 인하여 그곳으로 이사하여 만덕산(萬德山) 아래에 집을 짓고 자호를 덕암거사(德菴居士)라 하여 도서로 자락하며 공명에 뜻이 없고 오직 수덕양성(修德養性)으로 일을 삼더라. 윤순거(尹舜擧)가 의령현감으로 와서 부군을 한번 보고 높은 절개를 크게 흠복(欽服)하여 도의로써 서로 사귀었으며 창화(唱和)한 시도 많았는데 지금은 다만 일수(一首)만이 전하여있으니 그 시에 <구중연리환투족九重淵裡還投足 천인강두가진의千仞岡頭可振衣>라 하였으니 이것은 부군이 둔세하여 후회하지 아니함을 아름다이 여겨 포부를 지니고 세상에 쓰이지 아니함을 가석하게 여김이더라.
每與姜石溪山斗李蒙軒東柱從遂無虛日山寺江干一僮一壺恣意傲遊悠然有物外之遐趣而視世之得喪榮辱不啼如浮雲其次姜公詩有曰物外觀遊飛逸興樽前酩酊却盡心一生自是悠悠者浮世何人識此音此蓋自道也
매양 강산두(姜山斗)와 이동주(李東柱)로 더불어 행장을 간략하게 하여 사찰과 명산에 마음대로 유람하여 유연(悠然)히 물외(物外)의 취미를 즐기며 세상의 득실 영욕은 부운같이 보았으니 강산두가 시로써 화답하여 말하되 <물외환유비일흥物外觀遊飛逸興 준전명정각진심樽前酩酊却盡心>이라 하고 또 말하되 <일생자시유유자一生自是悠悠者 부세하인식차음浮世何人識此音>라 한 것은 자기의 지상을 말함이러라.
其於先賢嘗篤慕退溪先生德學而又家學淵源之所自也故羹墻之尤切縣之德谷有先生平日遊賞之跡府君因與趙澗松姜寒沙諸名碩創立院宇以爲春秋俎豆士林矜式之所而衆推府君爲山長府君因條定院規嚴立士綱一鄕儒風賴以復振
일찍부터 퇴계선생의 덕행과 학문을 존모하고 또 선세로부터 퇴계선생을 신봉하는 고로 더욱 간절히 사모하더니 군내덕곡(郡內德谷)에 퇴계선생의 유상(遊賞)한 유적이 있는지라 부군이 조간송(趙澗松) 강한사(姜寒沙) 기타 여러 명사로 더불어 서원을 창립하여 춘추로 향사하여 유림의 공경하며 법받는 곳으로 삼으니 중인이 부군을 원장으로 추대하니라. 인하여 유생의 행신강령을 엄히 규정하니 일향유풍(一鄕儒風)이 다시 진흥하니라.
顯宗辛亥三月三日卒年七十一墓祔霜嵒先生兆下其原負酉配昌寧曺氏府使挺生女擧二男長欽贈司僕正次鑐生員孫男五人宇亨文牧使復亨井亨長房生太亨致亨二房生曾玄不盡錄嗚呼府君襲簪纓之緖服詩禮之訓種德積學蘊抱者大以是出而需世何施不可以顧乃早謝場屋鞱光鏟彩未嘗一出求售詩書自適甘於隱淪無聞而漠然若與世相忘者豈無以哉
흠(欽) 증사복정(贈司僕正) 자 우형(宇亨) 문과목사(文牧使) 아아 부군이 명문후손으로 가정교훈을 받아 덕성을 가르고 학문을 닦아 성취한 바 크니 이로써 세상에 활용하면 무슨 큰 일을 못할 바 없거늘 이에 일찍 출세를 단념하시고 향촌에 은거하여 한번도 남에게 알리기를 구하지 아니하시고 시주(詩酒)로써 스스로 즐기어 세상을 잊은 듯이 한 것이 어찌 이유없으리오.
府君嘗名其里曰栗里村其祭李槐堂文曰臨亂擧義和議是斥又曰滿紙說話正孚賤意 竊嘗就此而想象之當丙丁以後冠履倒置天下之變極而國家之辱大矣霜嵒先生之晩年自靖蓋爲是也則府君亦有所受於斯義而于斯時也又黨論潰裂和議誤國大義無地可伸而天下不復知有華夷之防矣此蓋府君之深痛于中而自甘隱淪之微意也歟
부군이 일찍 이괴당 제문에 하였으되 “난리를 당하여 의를 거하고 청국과 화해함을 배척했다”하야 찬양하시고 또 하였으되 “지면에 가득한 설화가 정히 내 뜻에 합한다.”고 하셨으니 이로 미루어 상상해보건대 병자호란을 즈음하여 천하의 난이 극도에 이르고 국가의 치욕이 또한 큰지라 상암선생의 만년 은거하심이 이를 인연하심이니 부군이 또한 가정에 받은바 있음이요.
然而亦未嘗以是自命而混跡丘園使人莫得以窺其除故世無知府君之實德者而狀碣文字及時未作著述又失於鬱攸今無以考府君之眞面此在府君之潛德固無加捐而其爲子孫之痛恨當如何哉惟辛若干詩文載於幷世諸賢集中者猶可考其彷佛因幷家史所傳而舒錄之以備尙論者考焉
그러나 부군의 혼후하심으로 자기의 고상한 절조를 표시하지 아니하시니 사람이 부군의 실덕(實德)을 아는 이 드물었고 묘도문자(墓道文字)도 그 때에 이루지 못하고 또 평일저술도 화재를 당하여 전함이 없으니 비록 부군의 잠덕(潛德)에는 가손(가손)이 없다 할지나 자손의 통한이야 말할 수 있으리오. 다행히 약간 시문이 동시(同時)의 제현문집에 실린 바 있어 가사(家史)의 전하는 바와 아울러 서술하여 학자의 참고가 되게 하노라.
각재선생 행장(覺齋先生 行狀)
선생의 휘(諱)는 삼현(三鉉)이요 자(字)는 경효(景孝)이다. 일찌기 연재 송선생(淵齋 宋先生) 문하에 오르니 살펴서 깨달으라는 교훈을 듣고서 인해 각재(覺齋)라고 그의 방에 현판하고는 자장(子張)이 그의 스승의 교훈을 명심하려고 큰 띠에다 새겨 쓴 뜻에 부쳤는데 심석 송선생(心石 宋先生)이 위하여 기록하였다. 우리 권씨는 고려태사 휘(諱) 행(幸)으로부터 달권(達權)으로써 성을 얻어 안동에 봉해지니 인해 본관을 삼았다. 고려에서는 높이 들라여 일재 문탄공(一齋 文坦公) 휘 한공(諱 漢功)과 유암 충헌공(柳庵 忠憲公) 휘 중달(諱 仲達)이 가장 드러났다. 삼세를 지나 양각옹(凉閣翁) 휘 우형(諱 宇亨)은 문목사(文牧使)인데 우암 송선생(尤庵 宋先生)을 심복해 섬기다가 기사사화에 연루되었다. 삼세를 지나 납신재(納新齋) 휘 필중(諱 佖中)은 병계(屛溪) 윤선생(尹先生)에게 배워서 행학(行學)으로써 여러번 천거에 오르니 이분이 육세조이다. 증조의 휘는 병숙(秉肅)이요. 조의 휘는 재봉(載鳳)이요 비는 상주 주씨 진열(軫烈)의 딸이며 효순자애(孝順慈愛)하여 부덕을 능히 갖추었다. 홍릉 기묘년(洪陵 己卯年) 유월십칠일에 선생을 낳으니 어려서 골상이 준수하고 행동거지가 침잠하여 아이들 노는 데에는 따르지 아니하고 어른 곁을 가까이 모스는 것을 좋아하여 응하고 대하고 절하고 꿇어앉기를 부지런히 하니 죽오공(竹烏公)이 기특함을 사랑히 여겨 스승을 맞이하고서 독려해 가르치니 빼어난 깨달음은 비록 적으나 겸손하면서 부지런히 하니 남보다 앞섰다. 받은 글이 이해가 안되면 반드시 탐구하기를 게으르지 아니하여 기어코 뚫어서 깨달았다. 이로 말미암아 식견과 이해가 날로 나아가서 몇 해 안가서 이미 경서와 역사를 대략 통하니 드디어 학문이란 한가지의 큰일이요 도는 반드시 구해야 됨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외출하여서는 고을의 장덕을 쫒아 의심되는 것을 물어서 유익함을 청하였고 또한 어진 선비 벗과 산방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도의를 연마하니 빠르게도 규범을 이루고 명성이 드러났다. 임인년(壬寅年)에 폐백을 가지고 연재 선생(淵齋 先生)을 호상(湖上)에서 뵙고 가르침을 청하니 연재 선생이 그의 학력을 당겨보고는 가상히 여기며 또한 선의(先誼)의 인연으로 더욱 사랑하고 기특하게 여기면서 자기를 위하거나 남을 위하는 분별과 기질이 변화하는 방법을 거듭일러 가르쳐주기에 성의에 심복하였고 또한 그의 동생 심석 선생(心石 先生)을 좇아서 글의 요지를 듣고 받으니 정자(程子)문중 형제하의 문하생 같았다.
기사년(己巳年)에 나라가 굴욕적인 강제조약의 변란이 있었는데 연재 선생이 도를 위하여 죽으니 종팽()의 근심과 산량()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글을 지어가서 슬픔을 쏟았다. 문집을 창계동에서 출판할새 동문제공(同門諸公)이 시종 힘을 다해 완성하였다. 경술년(庚戌年)에 또한 심석 선생의 명을 받들어 대축(大祝)의 임사(任司)로써 황묘(皇墓)향사에 참여하였는데 이 해에는 나라에서 제사지내지 아니하였고 임자년(壬子年)에 심석선생이 또한 의를 위하여 죽으니 더욱 슬퍼서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았다. 매양 수학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고 도가 없어진 때를 당하였으니 우리들은 이미 나갈 수 없게 되었고 할 것이란 오직 문을 닫고 자정하여 금화(金華)의 道를 지킬 따름이라 하였다. 먼저 말한 죽오공(竹烏公)이 비로소 붕산(鵬山)에 옮겨와 정자를 세우고서 간수해 닦는 곳으로 삼았다. 붕산(鵬山)은 미타산 남쪽 골짜기에 있는데 높으면서도 넓어서 가히 은거할 만 하였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여기에서 강학하니 원근에서 바람을 듣고 도와주기를 청하는 자가 많이 오니 그 집으로서는 수용을 못다 하는지라 학칙을 정하고 과정을 모으고 규약을 세워서는 이름을 근종(謹綜)이라 하고 예속을 권하고 풍기를 떨치니 춘추강회에는 의관행색 풍성하고 사람들이 요즘 세상의 금화(金華)라 일컬었다.
일찍이 어버이를 살피는 외에는 산밖을 한걸음도 나가지 아니하니 책을 끼고 배우려는 자가 원근에서 청하는데에도 접인하기를 게으르지 아니하고 한가닥이라도 전하려는 소임을 기약하였다. 경오년(庚午年)에 모친상을 만나니 나이 이미 쇠해 늙었어도 상례 치르기를 극진히 하였다. 계유년(癸酉年)에 강제삭발의 화를 입게 되자 개탄하면서 문하생들에게 말하기를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망하지 않는 것은 의리로다 머리카락 하나가 유교의 일맥을 보존하는 까닭이면서 망하지 않는 의리를 나타냄이로다 지금의 삭발은 살을 깍는 재앙이라 우리의 인재와 문벌을 모두 삭발하려하니 벼슬한 자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나 선비가 머리털을 위해 죽음은 그 뜻이 하나이다. 한번 죽는 외에 무슨 다른 말이 용납되겠나 하고 언동을 늠늠히 하여 치장하고서 변모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 같이 하니 화가 따라서 점점 누그러졌다. 그러나 항상 울분을 품었어도 초연히 장재를 당겨보는 뜻이 있었다. 회갑년이 되어 자제들의 헌작(獻爵)을 불허하고는 드디어 풍악산을 유람할새 내외의 산을 두루보고 관동의 여러 경치에 미치게 되자 나부끼듯 세상일도 잊고 돌아감도 잊은 것 같았다. 인해 도산서원을 지나오다 뵙고 태사(太師)의 사당에 절하고 선조 선현의 자취를 추모하면서 느낌은 백세토록 널리 감동케 함은 시국을 상심하고 옛을 연모하는 데에서 나오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었다. 이로부터는 더욱 그림자를 산속에다 숨겨서 다시는 세상과의 접촉을 아니하고 오직 책을 잡고서 읊고 외우며 후학을 가르치면서 여생에 부치려 하였다. 늦으막에 아들의 참상을 당했는데 능히 다스리고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팔십칠세인 을사년(乙巳年) 이월 십칠일에 고종(考終)하였고 달을 넘겨 삼월 십일에 명석정(明石亭) 뒷산 갑자원(甲子原)에 장사하니 조문객이 수백인이요 상복입은 자가 수십인이었다.
영기 아들에 덕상(悳相) 명상(明相) 호상(昊相) 정상(貞相)이요 영우 아들에 철상(哲相) 기상(琪相) 억상(億相) 진상(振相)이다. 송준용 아들에 호학(鎬鶴) 호철(鎬哲) 호국(鎬國)이요 윤대균 아들은 종한(種漢)이다. 선생은 천성이 침잠돈후(沈潛敦厚)한 자태이지만 강인한 뜻이 있어서 젊을 때부터 다른 즐김은 없고 오직 한결 마음으로 글로써 뜻을 세우려는 고상함인즉 반드시 옛사람과 맞게 하려고 가깝거나 적은데에 국한하지 아니하였고 공부 힘씀에는 치밀함인즉 저울눈처럼 쌓아갓었지 지나치게 섭렵하기를 일삼지 아니하고 근면으로써 얻었기에 오래 유지해서 도있는 문에 올랐고 사람을 감동함이 오래갔다.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음식이나 남녀의 욕심에는 크게 경계하고 공부에만 힘쓴고로 오늘이 있었다고 하였다. 집에 처해서는 양친을 사랑과 공경으로 섬기되 부친에게는 더하였다. 젊어서 기운을 믿고 지나침이 있어서 집안사람이 난처해 하였으나 모두가 순종하였고 환심얻기를 힘쓰니 마침내 감화하여 기절을 꺽었다. 동생과 우애가 돈독하여 사이 없었고 집안 대소사를 일임해서 출납에 가감을 묻지 아니하였고 혹 실패함이 있어도 기미나 원망하는 빛이 없었다. 가솔을 예로써 받드는 정성에는 제수를 깨끗이 마련하되 반드시 형편에 맞게 하고 조금이라도 여의치 않으면 화를 내었다. 나이가 여든이 넘었어도 자력으로 예를 갖추었고 먼 산의 묘사에도 반드시 몸소 조부모 묘소에도 수리로 성묘하면서 석물을 갖추었고 기일에는 제수 보내기를 해마다 빠트림이 없었다.
동문 및 동향의 벗에게는 더욱 마음을 쏟아 상종하여 강마하였고 길흉사에 방문하되 예의를 근실히 하고 정도 진지하게 하였다. 친족에 처함에는 은의가 상부하여 돈독을 힘써서 혹이라도 상충함이 없는 고로 친소간에 모두 기뻐하였다.
신학의 치열에 당하여서는 어느 집이든 후손들이 그 길로 달려가니 마음 슬프고 머리 아파서 만회해 보려고 매양 사람들에게 서찰을 보내었고 논의중에도 통절한 말로 강행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옳음을 잡는데에는 비록 바르고 격려하는 행위는 못되나 밖으로 밫나게 확실한 지킴이 있었다. 저 오랑캐의 강제령으로 무덤을 없애려는데에 당해서는 종중의론을 일으켜서 항거하여 나라를 굴복시켰고 변론에 있어서는 이설을 물리치고 우리 임금을 받드는 의리를 밝혔다. 머리를 깍는다 성을 바꾼다 달력을 고친다 등의 일에는 그들의 위협적인 제도에 사람들은 벌벌 떨었지만 선생은 한번도 두려워함이 없었다. 지론을 피력함에는 젊을 때부터 글에 잠기면서 경전과 정,주자(程 朱子)의 글에 이르기까지 도체(道體)의 정미함과 의리의 요지에 탐구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힘써 찾아 체험해서 자득하였다. 또는 유래된 제가(諸家)의 이설 동설에는 모두 그 근원을 고증해서 외곡됨과 득심됨을 알아야 하는데 선비들은 입으로 삿대질로 서로 주장함을 징계하였고 논리를 정연하게 세워야지 쟁점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오직 토론이 왕복하는 즈음에는 부득이 그 발단을 대략 밝히는 것도 한두번 뿐이었다. 마음과 성품이 하나라는 설을 변명함에는 심성이 비록 둘은 아니지만 그 참된 심령은 나누어진다.
이치는 하려함이 있다는 설을 변명하는데 있어서는 태극의 움직임과 조용함은 물리친즉 동과 정을 바로 알 것 인즉 이는 도체의 행위로 되는 것이지 어찌 저절로 되는 근본이겠나 하였다. 덕을 밝히고 이치를 주로 한다는 설을 변명함에는 명덕(明德) 글귀에 의하면 텅 빈 심령은 잠자지 아니한다(虛靈不昧) 하니 이는 마음을 주로 한 말인데 여러 이치를 갖춘다함은 특히 그 중의 갖춘 것을 말함이라 어찌 갖추어진 것을 이치라 하면서 주된 것이 마음에 있음을 살피지 못하는가 하였다.
예속의 무너짐을 개탄하면서 간략하게 풍속을 이루려고 하면 비록 적은 예절일지라도 반드시 세밀하게 해야지 조금이라도 방심하여 지나쳐서는 안된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의 행위에는 예보다 먼저함이 없고 예를 삼가지 않고서는 소행이 더욱 구차해진다. 비록 고금을 널리 통하였으나 어찌 배웠다고 이르겠나 일찍이 말속적인 글의 폐단은 매우 심하게 가식하거나 지음을 미화하여 남과 비교하면 짝도 못되면서 문집발행을 성행하는데에 깊이 병들은지라 통절히 징계하였다. 선생이 죽으니 수학자들이 모두 이르기를 "전하지말라 함은 진실로 선생의 뜻이지만 전함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은 우리들의 책임이라" 하고 드디어 간행하기를 합의하니 대개 부득이 한 것이었다. 슬퍼도다. 선생은 꽃보다 나이에도 도를 구하려고 추향하는 자에게는 거기에 맞추어 주었고 마음을 써려는 자에게는 오로지 하도록 하였으니 도를 바라보는 정성은 숨쉴 사이에도 게으르지 아니하였고 도를 다루려는 행동은 한걸음도 어긋나지 아니하였다.
비록 일생을 깊숙한 골짜기에서 궁색하게 지내어 명성과 얼굴이 들라지는 못했으나 업적이 사람에게 미침은 어찌 적다 하겠나 선생은 일찍이 인산 백운 금화(仁山 白雲 金華)의 업적을 스스로 기약하였었는데 이제서야 겨우 동력이라해도 부끄러움이 없으련가 선생은 일찍이 나의 선친과 친족간에 지우지기로 허락되어 마음기대가 서로 비쳤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여 두터운 깨우침의 은혜를 입었다. 지금은 아버지를 일찍 잃은 나머지라 흰머리 덥수룩해도 미루어 생각하니 눈물을 금하지 못하겠도다.
정미년(丁未年) 삼월에 문하족제 용현 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