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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주능선을 따라서 ,,,
북한산성 13성문 탐방산행
북한산성 대동문 성곽의 전경
보국문(동암문)에서 대성문 방향의 주능선을 따라 쌓은 북한산성의 모습
♧ 산 행 일 : 2010년 9월 12일(일) 날씨 : 비(안개 비) 일강수량:15.5mm, 기온 : 최저 21.0℃, 26.1℃)
♧ 산 행 지 : 북한산
♧ 산 행 자 : 마눌님과 둘이서
♧ 교 통 편 : 자가승용차이용
♧ 코 스: 북한산성매표소주차장⇒①시구문(서암문)⇒원효봉⇒②북문⇒대동사⇒③위문⇒백운대(836m)⇒북한산장⇒④용암문⇒동장대⇒⑤대동문⇒⑥보국문⇒⑦대성문⇒⑧대남문⇒문수봉⇒⑨청수동암문⇒의상봉능선 나한봉⇒나월봉⇒⑩부왕동암문⇒용혈봉⇒용출봉⇒⑪가사당암문⇒국녕사⇒⑫중성문⇒북한산성계곡⇒⑬대서문⇒북한산성매표소주차장 = 원점산행(산행거리 약 15.6㎞)
♧ 소요시간 : 북한산성매표소주차장(10:30)⇒①시구문,서암문(10:57)⇒원효암(11:16)⇒원효봉(11:34)⇒②북문(11:52)⇒상운사(12:02)⇒대동사(12:08)⇒③위문(12:55)⇒노적봉(13:14)⇒④용암문(13:29)⇒북한산장(13:33)⇒동장대(13:57:점심식사)⇒⑤대동문(14:31)⇒⑥보국문(14:47)⇒⑦대성문(15:08)⇒⑧대남문(15:23)⇒문수봉(15:30)⇒⑨청수동암문(15:35)⇒⑩부왕동암문(16:09)⇒용혈봉(16:34)⇒용출봉(16:45)⇒⑪가사당암문(16:56)⇒국녕사(17:05)⇒⑫중성문(17:26)⇒⑬대서문(17:49)⇒북한산성매표소주차장(18:00) = (소요시간 7시간 30분)
♧ 산행개념도
♧ 발자국(북한산성 13성문) : ①시구문,서암문(10:57)⇒②북문(11:52)⇒③위문(12:55)⇒④용암문(13:29)⇒ 대동문(14:31)⇒⑥보국문(14:47)⇒⑦대성문(15:08)⇒⑧대남문(15:23)⇒청수동암문(15:35)⇒⑩부왕동암문(16:09) ⇒⑪가사당암문(16:56)⇒⑫중성문(17:26)⇒⑬대서문(17:49)
♧ 산행소개(북한산국립공원)
북한산국립공원은 15 번째 국립공원으로 1983년 지정되었으며, 그 면적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약 78.5㎢,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한산국립공원은 세계적으로 드문 도심 속의 자연공원으로 공원전체가 도시지역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수도권 이천만 주민들의 자연휴식처로 크게 애용되고 있다. 연평균 탐방객이 500만에 이르고 있어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 특징·볼거리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봉 정상에 서면 맞은편의 깍아 지른 듯 인수봉이 서 있다.국망봉, 노적봉 등 높은 봉우리들이 모두 발밑에 있음은 물론 도봉, 북악, 남산, 남한산, 관악산 등 멀고 가까운 산들이 모두 눈앞에 들어온다. 시계가 넓은 날에는 서쪽으로 강화도, 영종도 등 서해상의 섬들도 볼 수 있다.
백운봉 서쪽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은 문수봉에서 비봉능선으로 이어진다. 주능선 남쪽으로는 진달래능선, 칼바위능선, 대성능선 및 형제봉능선이, 북쪽으로는 숨은벽능선, 원효봉능선, 의상능선 등이 뻗어 내린다.
북한산 기슭에는 세검정과 성북동, 정릉, 우이동 등 여러 계곡들이 있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수십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내고 있으며, 삼국시대 이래 과거 2,000년의 역사가 담겨진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 문화유적과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선사(道詵寺), 태고사(太古寺), 화계사(華溪寺), 문수사(文殊寺), 진관사(津寬寺) 등 100여개의 사찰, 암자가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년)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 유역을 신라 영토로 편입한 뒤 진흥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진흥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이유 등이 기록돼 있으며, 대부분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진흥왕 순수비는 1972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으며 비봉에는 복사본이 설치되어 있다.·
(북한산 명칭)
북한산은 백운봉(백운대 836m), 인수봉(810m), 국망봉(만경대 800m) 세 봉우리가 마치 뿔처럼 날카롭게 솟아있는 데서 유래해 고려시대부터 근대까지 1000여년 동안 삼각산이라 불려져 왔다. 1915년 조선 총독부가 북한산이란 명칭을 사용한 이후 1983년 북한산국립공원 지정과 함께 북한산이란 명칭이 공식화됐다.
1916년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위원이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한강 이북의 서울지역을 가리키는 행정구역명인 '북한산'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병자호란 때 김상헌(1570-1652)이 청나라로 끌려 가면서 읊었던 그 삼각산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 공식문서와 지도에서 사라져버렸다.
서울 강북구는 2003년 10월 백운봉 등 3개 봉우리가 있는 지역이 삼각산이란 이름으로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10호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서울시와 중앙정부에 명칭복원을 건의하고 '삼각산 제이름 찾기 범국민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삼각산 제이름 찾기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국가지정문화재 명승 10호 삼각산)
인기순위 : 인기 100명산 중 3위 (한국의산하 1년간 접속통계에 의한 순위)
♧ 산 행 기
휴일을 맞아 오늘은 어디로 산행을 떠날까 생각하던 중 수도권에 있는 북한산을 택한다.
늘상 오르던 산행지 이었지만 그동안 백두대간산행 등으로 자주 오르지 못했든지 1년 만에 찾은 듯한 생각이 드는데 오늘은 자주 찾았던 북한산의 주능선을 따라 축조된 북한산성의 석성에 설치된 13성문의 성곽을 탐방하는 산행을 나선다.
산행들머리는 북한산성매표소주차장에서 계곡을 건너 원효봉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첫 번째로 만나는 서암문 또는 시구문이라는 성문을 들어선다.
숲속도 산성도 온통 비에 젖은 채 이고 빗길인 등로길의 바위도 나무뿌리도 상당히 미끄럽고 조심스러웠다.
작은 암자인 원효암을 지나 원효봉을 오르는 길은 몹시 가파르고 힘이 든다.
물론 힘든 만큼 주어지는 주변에 펼쳐지는 전망이 시원스럽고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안개비를 뿌리는 오리무중 산행길이 한치 앞을 조망할 수 없는 아쉬움으로 가득한 일기였다.
올 여름 올랐던 주말산행은 우중으로 가득한 일기로 지겨울 정도다.
산행을 나서는 날이면 언제나 좋은 일기이기를 바라고 기원해보지만 오늘 산행도 저번과 같은 일기로 역시나 이었다.
원효암을 지나면서부터 다시 숲속으로 안개가 들락거리며 안개비를 뿌린다.
덕분에 펼쳐지는 시야는 좋지 않았지만, 살갗에 내려 닿는 안개비의 시원함은 또 다른 느낌을 갖게 하는데 얼마쯤 올랐을까 눈앞에 들어나는 축조된 석성을 따라 올라서니 헬기장이 나타나고 원효봉 정상에 올라선다.
안개로 가득한 이곳에서도 조망할 수 없는 아쉬움 대신 원효봉에서 바라 볼 수 있는 조망안내판을 살펴보고서는 자리를 펴고 앉아 약간의 허기진 듯 시장한 생각에 산주로 막걸리 한잔을 들이키고는 내려서니 북문을 만난다.
북문은 해발 430m지점의 안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간이 뚝 터여 하늘문을 열어둔 듯한 특이한 석문이었다.
그런데 하늘문을 열은 듯한 툭 터 여진 곳에 문루(門樓)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다.
지금은 없어진 상태로 남아 있지만,,,
※ 문루(門樓)는 성문 위에 지은 다락집으로 유사시 장수의 지휘소가 되며 성 밖의 적을 조기에 발견하고 감시하고자 만든 건축물이란다.
암튼 북문을 탐방하고 내려서니 조용한 듯 고즈넉한 분위기의 상운사가 그 모습을 들어내고 이어서 대동사의 모습 또한 눈앞에 들어난다.
일기 탓인지 이곳 사찰도 조용하고 정숙한 분위기다.
비를 맞으며 북한산 연초봉 대동사라는 입문을 나서지만 북문에서 만난 비는 좀처럼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는데 어느새 백운대를 향해 위문을 올라서는 등로길은 계곡을 따라 흘려 내리던 빗물이 넘쳐나고 있었다.
백운대로 목계를 밟고 올라서는 산님들로 가득하였고 위문을 지나 길을 이어가니 허름한 북한산장이 그 모습을 들어 내 보이는데 그 안에는 비를 피해서 점심식사를 하는 산님들로 가득하였다.
이곳에서 우리도 점심식사를 할까하고 삐 집고 들어 설레야 들어 설 자리가 없어 주변을 맴돌다가 동장대로 발걸음을 옮긴다.
동장대에 도착하니 내리던 비도 멈추고 서서히 일기가 갠 듯하여 이곳에서 잠시 여장을 풀고 점심식사를 한다.
※ 장대(將臺)란 성, 보(堡:작은 성), 둔(鎭 칠 둔), 수(戍:수루) 등의 동서에 쌓아 올린 장수의 지휘대인데, 북한산성에는 동장대(시단봉 위), 남장대(나한봉 동북쪽), 북장대(중성문 서북)의 3개의 장대(將臺) 가 있었고, 지금은 그 중 크고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동장대(東將臺)만 복원하여 놓았다한다.
동장대를 지나면서부터 비 그치고 안개로 가려졌던 장막이 걷히면서 북한산의 아름다운 전경들이 펼쳐 보여 지는데 구름으로 가려진 하늘문이 열리면서 펼쳐지는 산하가 장관이었다.
대동문, 대성문, 대남문을 거쳐 의상봉능선을 이어가며 용혈봉에 올라선다.
3년전 2007년 7월 29일 낮 12시쯤 북한산 해발 581m 용혈봉 정상에 산비둘기 산우회 회원 5명이 낙뢰를 맞아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그 현장에는 누군가 애도하는 의미로 심어 둔 코스모스가 자리를 하고 있었다.
어느새 일기가 갠 하늘에는 햇볕이 드리우고 있었고 바람 또한 산뜻한 것이 가을바람이듯 살랑거리며 숲을 어루만지며 지난다.
용출봉에서 의상봉을 이어가다가 가사당암문을 탐방하고 산성계곡에 있는 중성문을 향해 국녕사로 내려선다.
국녕사 경내로 들어서 구경도하며 중성문도 들어서보고 내려서면서 마지막 관문인 대서문을 나선다.
이렇게 해서 북한산성의 주능선으로 축조된 산성을 따라서 멋지고 의미 있는 13성문의 탐방산행을 마친다.
♧ 사 진 탐 방
북한산성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원효봉을 향하여 계곡을 건너간다
북한산계곡을 건너다 바라다 보이는 원효봉에는 안개가 내려 앉는다
오솔길 같은 숲을 들어서면
요즘에 만들어 놓은 북한산둘레길을 만난다
둘레길을 벗어나 산을 오른다
오르는 등로길이 요즘 국지적으로 내린 호우에 파이고 쓸려 내려가 앙상한 돌들이 들어 난 것이
빗물이 잘 흘려 내리도록 만들어 놓은 고랑 같았다.
눈앞에 들어나는 石城을 따라 오르니 시구문을 만난다
△ 시구문(尸柩門)
정확한 본래 이름은 서암문(西暗門)으로 대서문 북쪽, 수문(水門)에서 원효봉으로 오르는 해발 180M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안에서 생긴 시신을 내보내던 문이라 하여 주민들에게 시구문(尸柩門)이라고 불리웠고 이 이름이 원래 성문이름인 서암문(西暗門)을 대신하여 성문에 시구문 현판이 걸려 있다.
시구문을 들머리로 하여 흔적을 남기고 성문을 들어선다
이곳 시구문에서 원효봉 정상까지 거리가 1Km란다
시구문에서 원효봉까지 가파른 산행길이 이어진다
원효봉을 향하여 오르다 보니
자그만한 암자 원효암을 만난다
암자는 전망 좋은 위치에 자리를 하고 있었다
비경이라도 조망 해 볼까하고 암석에 올랐으나 숲속 가득 안개로 인해 아쉬운 듯 발길을 옮긴다
멋진 암봉을 올랐건만 좋치 않은 일기로 인해 조망하지 못하고 암봉을 내려선다
축조된 석성을 따라서 오르다 보니
원효봉 정상의 헬기장을 만난다
원호봉 정상주변의 전경이다
원효봉 정상이 해발 505m라한다.
바위를 이용해 쌓은 석성의 모습을 바라보며 원효봉을 내려서니 북문을 마주한다
△ 북문(北門)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북쪽을 대표하는 성문으로 원효봉(元曉峰)과 영취봉(靈鷲峰-현재 염초봉의 본래 이름) 사이의 해발 430m 지점 안부(鞍部)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지금 현재는 문루(門樓)가 폐기되어 없어진 상태로 남아 있다.
※ 문루(門樓)는 성문 위에 지은 다락집으로 유사시 장수의 지휘소가 되며 성 밖의 적을 조기에 발견하고자 감시하는 기능을 가진 건축물이란다.
북문앞에서 흔적을 남기고
내려서니
상운사의 모습이 들어나 보이는데,,,
정숙한 분위기로 가득한 경내는 마냥 조용한데
사찰안에 두마리 백구의 모습이 보이지만 개짖음소리는 없다
상운사를 내려서니 인근에 대동사라는 사찰을 또 만난다
이곳도 조용한 분위기는 상운사와 마찮가지다
북한산 연초봉 대동사라는 간판이 설치된 입문을 나선다
백운대 방향으로 길을 잡아 오르다 보니
등로길을 따라서 내린 빗물이 넘쳐나고 있다
암석에 약수암이라는 표지가 새겨져 있었는데
약수암이라는 암자는 온데간데 없고 쉼터를 만난다
아마도 이곳이 약수암 터인듯 싶다
백운대로 올라서는 갈림길이다
백운대로 올라서는 목계은 우기속에서도 백운대를 올라서는 산님들로 분주한 발길들이다
△ 위문(衛門)
정확한 본래 이름은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으로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의 안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며 현재는 위문(衛門)이라 일컫고 있는데, 일제시대 때부터 그렇게 불리어 왔다고 한다.
노적봉 이정목에서 대동문을 향하여 걸을을 하다 보니 용암문을 만난다
△ 용암문(龍岩門)
정확한 본래 이름은 용암봉암문(龍巖峰暗門)으로 무인대피소인 지금의 북한산장 부근 용암봉 기슭 해발 580m 지점에 한다
대동문으로 걸음을 이어가다가 북한산대피소에 들린다.
이곳 대피소 안에는 우기를 피해 점심식사를 하는 산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는데 우리 부부도 이곳에서 식사를 할까하고
주변을 두리번 거려보아도 삐집고 들어설 틈 조차도 없었다.
대피소 앞 풀숲은 빗물을 머금은 채 맺힌 물방울들이 한껏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비에 젖은 석성을 따라 오르니
해발 610m에 설치되어 있는 동장대에 오른다
동장대다
※ 장대(將臺)란 성, 보(堡:작은 성), 둔(鎭 칠 둔), 수(戍:수루) 등의 동서에 쌓아 올린 장수의 지휘대인데, 북한산성에는 동장대(시단봉 위), 남장대(나한봉 동북쪽), 북장대(중성문 서북)의 3개의 장대(將臺) 가 있었고, 지금은 그 중 크고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동장대(東將臺)만 복원하여 놓았다한다.
산성을 따라 내려서는 저 마치 성곽이 바라 보이는데 발길이 닿고 보니 대동문이었다
△ 대동문(大東門)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동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지금의 문은 1993년에 문루(門樓)를 갖추는 복원을 하였다 한다.
대동문에서 보국문으로 발걸음하다가 바라 본 칼바위능선이다
주능선을 따라서 축조된 산성을 따라 능선을 오르내리며 보국문으로 탐방산행을 이어간다
△ 보국문(輔國門)
정확한 본래 이름은 동암문(東暗門)으로 대동문과 대성문 사이의 해발 567m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아래에 보국사(輔國寺)가 있었다고 하여 보국문(輔國門)이라 불리우고 있다 한다.
내리던 비 그치고 일기가 개면서 바라다 보이는 노적봉 백운대에는 운무가 아름답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산성이 파노라마 같은 모습으로 펼쳐지고
피어 오르는 운무로 인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아 보이는 전경이다
운무 피어 오르는 백운대를 배경으로 모습을 담아 본다
안개로 가득했던 산정들이 하늘빛이 열리면서 재 모습들을 들어내어 보인다
눈앞에 들어나 펼쳐진 세상이 시원스럽게 아름다운 풍광들을 연출하고 있다
노적봉과 백운대를 감싸고 있는 운무의 모습이 멋지다
아름다운 풍광들을 담으면서 이어가는 발걸음이 힘든 줄 모르고 어느새 대성문 성곽에 들어선다
△ 대성문(大城門)
보현봉(普賢峯)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성 능선 해발 625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서 가장 큰 문이란다.
처음에는 소동문(小東門)으로 불리우는 작은 암문(暗門)이었으나 성문 위치가 문 북쪽 기슭 행궁(行宮)이 있는 곳에서 이곳을 통과하여 형제봉과 보토현(輔土峴-현재 북악터널 위쪽)을 경유하여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편리한 코스에 위치해 있어서 임금이 이 문을 출입하게됨으로써 뒤에 성문을 더욱 성대하게 개축하여 임금이 출입하는 성문으로서 위용을 갖추게 함으로서 그 이름도 대성문(大城門)으로 개명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갖게한단다.
※ 행궁(行宮)이란 임금이 국도(國都)의 왕궁 밖에서 머물던 별궁(別宮)으로 북한산성 내행궁은 산성을 축조하던 조선 숙종37년(1711년)에 지워졌단다.
굴려 떨어지던 바위가 걸터 있는 모습이다
3개지구의 경계지점이란다
구름에 가려졌던 하늘문이 열리면서 아름다운 세상 빛이 펼쳐 보인다
대남문 성곽이다
성곽위에서 바라다 보며 만나는 자연의 모습이다
△ 대남문(大南門)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남쪽을 대표하는 성문으로 음축조 당시는문수봉암문(文殊峯暗門)으로 불리웠던 성문으로 해발 715m 의 보현봉(普賢峯)과 해발 727m 의 문수봉(文殊峯)을 잇는 해발 663m 능선 한가운데 안부(鞍部)에 위치한다.
대남문에서 바라보는 성가봉의 모습과
문수사 주변경관의 산세도 바라다 보면서 발걸음 하다보니 청수동암문을 지난다
△ 청수동암문(靑水洞暗門)
해발 694m 에 위치한 성문으로 산성주능선과 의상능선 그리고 비봉능선으로 향하는 갈림길에 있는 암문으로 비상출입구였단다
청수동암문(靑水洞暗門)의 안내판이 산성의 내력과 의미를 알려주고 있다
청수동암문을 내려서면서 비봉 사모바위가 있는 능선을 조망해 보다가 만난
정말 멋진 자연의 풍광을 대면하고 있다
의상봉능선이다
실로 그아름다운 풍광은 말로 표현 할 수 없고 그저 감탄 할 뿐이었다
아직도 백운대는 안개속에 얼굴을 묻고 그 모습을 들어내 보이지 않고 있다
의상봉능선을 따라 내려서면서 바라본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들이다
△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
나월봉(蘿月峯)과 증취봉(甑炊峯) 사이 산 능선 해발 521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 7개 암문(暗門)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부왕동(扶旺洞)이란 이름은 성안 동쪽에 있는 부왕사(扶旺寺)로 내려가는 계곡일대를 일컫던 이름으로 보여진단다.
이곳 성문 앞에서 흔적을 남기고 의상봉능선을 이어가면서
용혈봉에 올라선다
이곳에서 3년전 2007년 7월 29일 낮 12시쯤 북한산 해발 581m 용혈봉 정상에 산비둘기 산우회 회원 5명이 낙뢰를 맞아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있었다.
그 현장에 누군가 애도하는 의미로 심어 둔 코스모스가 자리를 하고 있다.
용혈봉에서 바라본 용출봉과 의상봉의 멋진 모습을 담아 본다
왼쪽 - 원효봉을 따라 연초봉 - 백운대 그리고 노적봉의 모습을 담아본다
용출봉을 오르는 철계단이 가설되어 있다
용출봉에서 은평방향으로 조망해 본다
용출봉 정상이다
북한산성매표소와 고양 방향으로 조망해 본 전경이다
가사당암문 윗길을 지나서 성문으로 내려선다
△ 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
의상봉(義相峯)과 용출봉(龍出峯) 사이 산능선 해발 488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 부근 산성안에 국녕사(國寧寺)가 있다고 하여 국녕문(國寧門) 또는 국령사암문(國靈寺暗門)으로도 불리웠다 한다.
※ 암문(暗門)이란 노출을 꺼리는 출입통로로 출입문위에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출입 할 수 있도록 만든 문이라는데 성안에 필요한 병기 및 식량등을 운반하고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극비리에 구원을 요청하거나 적을 역습할 때 이 통로를 사용했다 한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모두 7개의 암문(暗門)이 남아있다고 한다.
중성문을 탐방하기 위해 국녕사 경내로 들어서 내려선다
국녕사를 나서서 계곡을 따라 대남문방향으로 올라서면 중성문(中城門)을 만난다
△ 중성문(中城門)
원효봉(元曉峯)과 의상봉(義相峯)을 직선으로 그 중간 지점에 해당되는 현재 산성주차장 일대에서 산성안 중심부에 위치한 중흥동 계곡을 향하여 오르는 중간 지대 길목에 위치한 성문이다.
중성문은 문 이름에 가운데 중(中)자를 써 중성문(中城門)이지만 이곳에 쌓았던 중성(重城)은 무거울 중(重)자를 쓴다는 것,
무거울 중(重)자는 '겹'이란 뜻도 있기 때문에 북한산성에서 가장 수비가 취약한 부분인 대서문(大西門)방면의 수비를 보강 하기 위해서 안쪽에 쌓은 내성(內城)을 뜻하고 그 내성의 성문이 중성문이란다.
중성(重城) 안쪽에서 바라본 중성문(中城門)의 모습
△ 시구문 : 중성문(中城門) 바로 옆에는 특이하게도 중성(重城)안에서 생긴 시신을 내보내던 문으로 한 사람이 서서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높이가 낮고 규모가 자그마한 시구문(尸柩門)이 있었다 하고 중성(重城)의 중성문(中城門)은 북한산성 계곡 바로 옆에 축조하였기 때문에 계곡을 가로지는 구간에 수문(水門)이 있었다고 하는데 1925년 8월 을축년대홍수(乙丑年大洪水)때 완전 유실되었다 한다.
중성문 안내판
중성문 옆 계곡물이 수려하다
계곡을 따라서 내려서다 보니 마지막 대서문을 나선다
△ 대서문(大西門)
의상봉(義相峯) 서북쪽 해발 150m 높이의 낮은 구릉지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서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인동시에 북한산성의 정문(正門)으로 지금의 문루(門樓)는 1958년에 당시 경기도 지사였던 최헌길이라는 분의 주도로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북한산성의 13성문 탐방산행 종주를 마치며
그동안 북한산을 오르며 막연하게 대하며 생각했던 산성의 성곽과 성문들에 대하여
새로운 의미와 인식을 각인시켜 주는 의미심장한 산행으로서
우중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의미가 남 다른 산행으로 산행의 즐거움 또한 배가 되는 듯한 시간이었다.
♧ 참고자료(북한산성)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때 한성의 관망을 위해 도성을 축조하고, 그 방어 효과를 높이기 위해 삼각산에 산성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북한산성이란 이름은 ≪삼국사기≫에 백제 개로왕(蓋鹵王) 5년(132)에 이미 나타나고, 신라는 이곳의 비봉(碑峰)에 진흥왕(眞興王)이 순수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진평왕(眞平王) 25년(603)에는 고구려 장군 고승(高勝)이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하자 왕이 1만명의 군사로 구원한 기록이 있고, 661년에는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함께 북한산성을 20여일간 포위 공격하자 성주이던 동타천(冬陀川)이 성안의 주민 2, 800명과 함께 필사의 결전으로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북한산성은 오늘날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북한산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한산성(漢山城) 즉 한산 지역의 북쪽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한편 11세기 초 거란의침입이 있자 고려 현종(顯宗)은 고려 태조의 재궁(梓宮)을 삼각산에 옮겨왔다. 고종(高宗)19년(1232)에는 삼각산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으며, 우왕(禑王) 13년(1387)에는 삼각산에 중흥산성(重興山城)을 쌓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의 외곽 산성을 마련하자는 축성론(築城論)이 일어나 효종 10년(1659) 송시열(宋時烈)에게 명하여 수축하게 하고, 숙종37년(1711))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해 4월에 착수한 이 공사는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3군문이 담당하였고, 그 아래 각 군문에는 책임 감독관으로 낭청(郞廳)을 두었으며, 또 그 아래에 내책응(內策應)·외책응(外策應)·독책장(督策將)을 두었다. 공사별로 부석패장(浮石牌將), 축성패장(築城牌將), 수구패장(水口牌將), 운석패장(運石牌將), 치도패장(治道牌將)과 이장변수(泥匠邊首), 야장변수(冶匠邊首), 석수변수(石手邊首), 목수변수(木手邊首) 등으로 공사를 감독하도록 하였다. 축성에 필요한 노동력은 3군문의 군사는 물론 서울의 주민과 승려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 모역군(募役軍)과 각종 공장(工匠)이 동원되었다. 서울의 주민은 경상가(卿相家) 이하 각 호(戶)를 대·중·소로 구분하여 대호는 3명, 중호는 2명, 소호는 1명씩 식량을 지참하고 취역에 나섰으며, 모역군은 한 달에 쌀 9두와 면포 2필씩이 지급되었다. 이때 이룩된 것이 오늘날의 북한산성이다.
약 6개월에 걸쳐서 완성을 보게 된 북한산성의 성기(城基)는 보현봉·만경대·백운대·원효봉·대서문·의상봉·증취봉·나한봉 등을 연결하는 선으로 길이는 모두 7, 620보, 즉 21리 60보가된다. 그 중에서 수문(水門) 북변에서 용암(龍岩)까지의 2, 292보는 훈련도감이, 용암 남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 821보는 금위영에서, 수문 북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507보는 어영청에서 각각 담당하여 쌓았다. 성문은 모두 13개로 수문 북변에서 용암까지 사이에 수문(높이16척, 폭 50척), 북문(높이 11척, 폭 10척), 서암문(西暗門, 높이 7척, 폭 7척), 백운봉암문(높이 6척 3촌)이 있고, 용암 북변에서 보현봉까지 사이에 용암봉암문(높이 6척 5푼, 폭 7척 5푼), 대동문(大東門, 높이 9척, 폭 10척), 보국문(輔國門, 높이 6척 6촌, 폭 6척 5촌),대성문(大成門, 높이 13척, 폭 14척)이 있으며, 수문 남변에서 보현봉까지 사이에 대서문(大西門, 높이 11척, 폭 13척), 청수동암문(높이 7척, 폭 7척), 부왕동암문(높이 9척, 폭 8척), 가사당암문(높이 7척, 폭 7척), 대남문(大南門, 높이 11척, 폭 11척)이 있었다.
축성이 끝난 후 숙종 38년(1712) 10월에 이르러서는 북한산성의 주관부서로 경리청(經理廳)을 설치하고, 여기에 도제조와 제조관을 두었다. 행궁(行宮)의 수호ㆍ관리는 관성장(管城將)이 맡았으며, 수성장병(守城將兵)으로는 대성문ㆍ동문ㆍ 서문에 수문장 각 1인과 갑사둔(甲士屯), 점암둔(點岩屯)에 둔장 각 1인을 배치하였고, 수첩군관(守堞軍官)은 266인, 별파진(別破陣) 200인, 아병(牙兵) 635인이 항상 거주하였다. 그 후 영조 23년(1747)에는 총융청(摠戎廳)으로 하여금 관리토록 하였고, 이듬해에는 상원봉(上元峰) 아래에 130칸의 행궁과 140칸의 군창(軍倉)을 지었다. 성내에는 승군(僧軍)을 위한 136칸의 중흥사(重興寺)가승군 총섭(摠攝)이 있는 곳이었고, 이 밖에도 11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가 있었다. 성안에는 8개소의 창고가 있었으며,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 성 안의 면적은 200여만평으로, 성벽은 아직도 잘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성곽의 여장은 허물어졌으나, 현재 대서문이 남아 있고 장대지(將臺址)·우물터·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시설의 일부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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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즐산 안산되었음을 글월로서 함께 공감대를 형성해 봅니다. 저두 개인적으로 한 3년전쯤 선생님과 똑같은 코스로 12지문을 혼자 산행했었던 기억이 새롭게 떠 오르네요.... 산곡풍선생님 늘 가내에 행운과 행복만이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