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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1) 닭실마을과 안동권씨 충재 권벌(1478∼1548) 종가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은 안동 권씨 중에서도 충재( 齋) 권벌(權 , 1478-1548)을 중심으로 한 일가의 동족 마을이다. 유곡(酉谷)은 한글로 풀어서 '닭실'인데, 마을 동북쪽에 있는 문수산(1205m)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 서남으로 뻗어내린 백설령이 암탉이 알을 품은 형상이고, 동남으로는 신선이 옥통소를 불었다는 옥적봉이 수탉이 활개치는 모습이어서, 마을 서쪽의 산에서 바라보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형국이다.
권벌은 안동의 북후면 도촌리 외가 마을에서 성균관 생원 권사빈과 파평윤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밝아 연산군 10년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사간원, 사헌부 등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러 중종대왕에게 강론을 하기도 했다. 조광조가 신진사류의 대표로 왕도정치의 뜻을 펼칠 때 영남 사람파의 한 사람으로 기호사림파와 연결하여 개혁정치에 참여하였다.
1519년 기존정치 세력인 훈구파가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사림파를 대거 축출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자 어머니 묘소가 있던 유곡에 자리잡았다. 닭실 마을은 권벌의 5대조때 안동에서 옮겨와 자리잡고 권벌 이래로 번창했기 때문에 '유곡 권씨'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안동 하회의 풍산류씨를 '하회류씨' 임하면 천전리의 의성김씨를 '내앞김씨'라고 하는 것처럼 성씨를 종가 마을과 연결시켜 호칭하는 방식은 영남 양반가 사이의 유행이었다.
종택 서쪽에는 연못 가운데 넙적한 바위에는 청암정(靑巖亭)이란 정자가 있는데 누마루로 개방되어 있다. 종택에서 돌다리를 건너야 정자로 갈 수 있으며 공부하다가 바람을 쐬일 양으로 지은 휴식공간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청암정의 경치를 보고 "정자는 못 복판 큰 돌 위에 있어 섬과 같으며, 사방은 냇물이 고리처럼 둘러 제법 아늑한 경치가 있다"고 하였다.
권벌은 영남의 주도적인 학들인 이현보, 손중돈, 이언적 등과 교유하였으며, 23년 연하인 퇴계 이황과도 학문적인 공감을 나누었다. 청암정의 현판글씨 '청암수석(靑巖水石)'은 미수 허목이 88세에 쓴 그의 마지막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퇴계가 65세에 이곳 청암정에 읊은 시를 비롯해 많은 유물들이 있다.
2) 석천계곡과 석천정사(石泉精舍)
닭실마을의 주산인 문수산(1205m)을 분수령으로 남서류하는 창평천이 종택 앞 들판(명당)을 빙 돌아 환포하고 빠져나가는 수구처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개울이 있다. 동막천과 합류하여 맑은 물과 울창한 송림, 기암괴석들이 어우려져 자연경관이 수려하기 그지 없다. 이곳을 석천(石泉)이라 하고, 충재 선생의 장자인 청암 권동보가 부친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정자를 지었는데 석천정사다. 주위환경과 어울려 더욱 고아한 분위기를 내는 이곳에서 옛 선비들의 채취를 느껴보자. 건물 뒤편 큰 바위에 새겨진 '석천정(石泉亭)' '청하동천(靑霞洞天)'처럼 신선이 되는 기분이 될 것이다.
3) 김언구 생가와 쌍벽당
봉화군 봉화읍 건촌리 148 중요민속자료 제17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중기 성리학자인 쌍벽당 김언구가 태어나 살던 집이다. 안채와 사람채는 그의 부친이 1450년에 건립한 것이고, 상벽당 정자는 김언구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서 명종21년(1566) 유림에서 건립한 것이다.
4) 만회 김건수 고택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485. 조선 말기의 문신인 만회 김건수가 살던 집으로 안채는 그의 6대조가 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랑채와 명월루는 김건수가 1850년에 건립한 것이다. 행랑채는 기울어져 1981년 철거하였다.
5) 청녕성씨 성이성(成以性) 종택과 계서당(溪西堂)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에 있으며 창녕 성씨 집성촌에 있는 종택이다. 조선 중기 문신인 성이성(1595∼1664)이 살던 집으로 광해군 5년(1613)에 건립되었다. 성이성은 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에서 당대의 세력가인 김류, 김자점 등의 죄를 논하기도 했으며, 외직에 나가서는 진주부사를 비롯하여 강계 등지에서 선정을 배풀어 청백리에 뽑히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부용당(芙蓉堂) 성안의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곽재우 밑에서 활약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남원부사와 광주목사를 지냈다.
6) 풍산김씨 동족마을과 장암정(藏庵亭)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 물야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풍산김씨 동족 마을이다. 기와집과 돌담 등이 아름다운 이곳에 장암 김창조(1581∼1637)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서 문중에서 세운 장암정이 있다.
7) 무량수전으로 유명한 부석사
상주시
1) 수암종택
상주시 중동면 간물리 1102번지. 이 종택은, 서애 선생의 셋째 아들인 수암(修巖) 류진(柳袗)선생이 37세에 가사리(佳士里)에 터를 잡은 데서 비롯되며 풍산류씨 우천파 종택으로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낙파(洛波) 류후조(柳厚祚)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등 석학과 명공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
이 집은 속리산 팔공산 일월산의 지기가 모이고 낙동강과 위강이 합류하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명당지로 알려진 곳에 서 있다. 수암 류진(1582년∼1636년)선생은 서애 선생의 제3자요 문하생으로 가성을 찬양한 선비다. 강고 류심춘 선생은 구당 조목수, 가은 조학수, 입재 정종로 등 많은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행으로 벼슬에 나간 선비다. 낙파 류후조(1798년∼1876년)선생은 현달하여 좌의정에 오른 명신이며 후덕중망(厚德重望)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선비였다. 계당 류주목(1813년∼1872년)선생은 영남학파를 최후까지 이끈 성리학자요 교육자로서 류도수 외 320명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이처럼 많은 명현을 배출한 것은 종택이 명당에 자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가의 정침(몸채)은 정면 6칸, 측면 6칸, 전면 박공, 후면 합각지붕이며 녹사청(祿事聽)은 7칸, ㄴ자형 곡자집으로 몸채의 남방에 배치되었다. 이 녹사청은 대신의 비서격인 녹사가 기거하며 봉조하의 녹봉을 지고 오는 지방 관리들을 영접하고 유숙케 하던 건물로 희귀한 존재다. ㄴ자형의 정면 4칸, 측면 4칸의 우진각 지붕이다. 사당은, 전면에 원주를 세우고 퇴를 물린 건물로 3양가(양架)에 판대공(板대工)을 얹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반, 박공기와 지붕이며, 파조인 수암선생(修巖先生)의 신주를 모시었다.
2) 양진당과 오작당
양진당은 경북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214번지에 있다. 이 건물은 풍양조씨로 임진왜란 때 상주땅에서 가장 먼저 창의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검간 조정((黔澗 趙靖, 1555~1636) 선생이 지은 집이다. 조정은 서애 류성룡의 제자이면서 학봉 김성일의 조카사위가 되어 퇴계학파의 맥을 이은 사람이다. 비록 학맥을 주도적으로 잇거나 큰 정치력을 발휘하지는 않았지만 상주 최초의 서원인 도남서원을 세우고 향약을 실시하여 임진왜란 이후 흉흉했던 민심을 성리학적 질서로 안정시키려했다.
조정은 처가인 의성김씨 가문으로부터 적지 않은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말년인 65세 때는 처가인 임하면 천전에서 1년 쯤 살다가 돌아온 오면서 99칸 양진당 건물을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전하는 말로는 처삼촌인 학봉 김성일이 터를 잡아주었다고 한다.
양진당에서 큰길 맞은편에 있는 오작당(梧昨堂)은 규모는 작으나 양진당과 비슷한 집이다. 본래 조정의 종가로 양진당을 지으면서 이곳으로 옮겨 놓은 일명 구당이다. 양진당 보다 25년이나 앞선 것으로 이전 당시는 내사 외사 모두 40여 칸이었다고 한다. 1781년(정조 5년) 중수시 겹집과 흩어짐이 공존하는 건물이 되었으며 양진당의 원초 형이다.
부재(部材)의 세장한 조각, 기둥의 모접과 격자창 등은 고식의 중후감을 더한다. 현재는 안채, 사랑채, 사당 등 3동이 남았다. 오작당은 처음 이건 한 입재(立齋) 조대윤(調大胤)선생은 문명(文名)을 얻은 선비였으며 특히 일가의 친목을 도모하려면 목연(睦姸)이란 계를 조직하여 가문의 흥창을 도모한 선비이기도 하다.
3) 의암고택
상주시 낙동면 운평리 141-1번지. 의암고택은 1410평의 대지 위에 안채, 사랑채, 고간, 행랑, 가묘, 대문간, 소슬대문 등 157평의 대규모로 1830년에 세웠다고 하며 이 마을에는 많은 기와집과 초가집이 옛 그대로 잘 보전되어 민속 마을로서 많은 소재를 지닌 부락이다.
의암고택은 조선후기에 지은 건물로서 안채 사랑채 안사랑채 고방채 대문간채 사당 장독대 등 조선사대 사대부주택의 구성요소를 고루 갖춘 집이다. 이 마을은 상남주인 (商南主人 堂號)의 안채를 비롯해 누정 제옥 가묘 성화당 기와집 초가 우물 막돌담장 등 노송과 조선시대 양반과 서인이 공존하던 주거생활의 종합적 양상을 띤 민속자료를 고루 갖추고 있다.
이 한옥의 소유자인 조준희씨는 13대조 때 이 마을에 입향 하였고 6대조 때 부모가 양진당 근처에 승곡 마을에 있던 동고공(東庫公 종 10대조)종택 을 이건 한 것이라며 사랑채는 70여 년 전에 지은 것이라 한다.
이 집으로 드는 대문 앞에 큰 바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를 의암(依岩)이라 하여 당호로 삼았다 한다. 의암이란 말은 조준희의 고조부이신 조범구선생의 호가 " 의암 "으로 바위를 의암이라 하는 것은 후대 사람들이 선생의 덕망을 기리기 위해서 붙인 명칭으로 본다.
대문간과 평행으로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가 배치되었고 전면 좌측에 설치된 1관문에 들어서면 ㄱ자 곡간채와 一 자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안채도 남향이며 좌측의 2m정도 거리를 두고 뒤주가 빗겨 있으며 안채 뒤뜰에 장독대가 설치되었고 사랑채의 뒤편에는 방형으로 토담을 두르고 가묘를 모시었다.
4) 상주 향교
경북 상주시 신봉동 203-1. 향교는 존현.육영의 현장이다. 상주는 고도요 웅주였던 만큼 향교 설치가 일찍부터 있었을 것이나 그 창건 년대는 상고할 수 없다. 1426년(세종 8)에 판목 조치(曺致)가 남루를 세우고 1485년(성종 15)에는 목사 강구손(姜龜孫)이 성전과 재루를 중창하였음은 향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임란(1592)에 완전 소실된 것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정면은 퇴간, 측면은 벽체로 막았다. 중수를 거듭하였다.
상주향교는 경주향교와 더불어 대설위 향교로서, 1966년에 우리나라 18현, 송나라 2현의 위패를 추존하였다. 대성지성 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의 위패를 전면에 남향으로 사성 위패를 전면 양쪽으로 하여 25위의 위패를 모시었다. 배치는 산자락의 경사지를 3단으로 정지한 후 맨 앞쪽부터 외삼문과 과정적 공간, 강학공간, 제향공간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외삼문-명륜당(강학 공간)-내삼문-대성전이 일축선을 이루고, 고직사는 동재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강학공간은 명륜당(明倫堂)을 앞에 두고 양재(동, 서재)를 뒤쪽에 둔 전당후재형(前堂後齋形) 또는 전학후묘형(前學後廟形)으로 구성하고, 제향 공간은 양무(동, 서무)를 앞에 두고 대성전을 높게 쌓은 기단 위에 놓아 그 위상을 높게 하였다. 이 향교는, 1949년에는 상주고등공민학교의 교실로, 1961년에는 명륜당을 남산중학교 교실로 사용한 적도 있다. 현재,이 곳에는 향안(鄕案)과 향약절목(鄕約節目) 등의 사료를 보관하고 있다.
문묘에 배향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 사성(증자, 안자, 맹자, 자사), 송2현(주희, 정호), 동방18현(최치원, 설총, 정몽주, 안유,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5) 우복 종가와 병암고택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193-1번지. 우복 정경세 선생의 종가로, 대산루 남쪽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팔경을 바라볼 수 있다. 상주에는 이와 같은 많은 민가들이 남아있어 상주의 옛 마을 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이 집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선생의 종가로 16대 손이 살고 있다. 선생의 유적은 공검면 부곡리에 묘소와 신도비, 사벌면 묵하리의 유허비, 청리면 율리에 유허비가 있고 이 곳에 사당과 서실 강당 등이 있다.
종택은 대산루 남쪽 언덕에 자리잡아 우산팔경(愚山八景)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명당지라 알려져 왔다. 토담으로 주위를 에워싼 종택은 넓은 공간에 다섯 동이 있는 독가촌으로 사랑채는 2단으로 쌓은 높은 기단이나 뒷면은 자연지세와 면을 수평 하게 하여 안마당과 평행 되게 하였다.
2칸을 통간으로 한 온돌방과 대청마루 2칸, 한 칸의 온돌로 하여 마루 앞은 계자난간을 설치하였고 홑처마에 탈작지붕을 한 정면 5칸 측면 한 칸의 12.67평의 기와집이다. 안채는 ㄱ자 집으로 남·서 쪽으로 배치하였는데 안방과 건너 방을 온돌로 하고 2칸의 대청마루와 부엌은 2칸으로, 위는 도장으로 루마루형을 이루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을 한 기와집이다. 행랑채는 2칸은 뒤주로 가운데 칸은 마루를 놓은 공간으로 하고 온돌방을 둔 정면 5칸, 측면 1칸, 11.37평의 맞배지붕이다. 사당은, 담장 안에는 우복선생, 밖에는 입재선생의 사당이 배치되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집 전체 배치는 트인 ㅁ자 형이며 1600년경에 지은 집이다. 한마디로 이 건물은 우복선생을 비롯한 소대명신행적(昭代名臣行蹟)을 저술한 무첨재(無添齋) 정도응(鄭道應)과 류심춘(柳尋春) 외 247명의 제자를 양성한 성리학자요 교육자였던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같은 석학의 학풍과 덕풍이 서린 유서 깊은 고택이다.
우복 정경세(遇伏 鄭經世)종택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193-2번지에 있는 우복 종택은 조선 영조임금이 우복 정경세 선생의 덕을 기려 하사한 땅에 5세손 정주원이 1750년경에 건립한 것으로 추종되는 고택이다.
한마을이 들어서도 충분할 만큼의 넓은 양기에 자리하고 있고 사랑채에서 대문칸 너머 안산을 이루고있는 노음산줄기의 뛰어난 경관을 한눈에 바라볼수있어‘山水軒’이라 이름지었다.
☆정경세(遇伏 鄭經世, 1563~1633) :
상주 청리면에서 태어나 18세에 상주 목사로 부임한 서애 류성룡의 문하에 들어감. 이로써 그는 영남학파에서 퇴계 이황의 양대 제자인 류성룡과 김성일 가운데 류성룡의 학맥을 잇는 수제자가 됨. 30세에는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에는 관직에 나아가 형조·예조·이조 판서를 거쳐 홍문관 대제학을 지냄. 학문에서만 머물지 않고 실천을 중시하였던 그는 예를 중심으로 한 수양론과 경세론을 정립하여 기호학파의 김장생과 함께 17세기 조선 사회의 사상적 중심에 섬
6)병암고택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112번지. 본 가옥은 우복선생의 6대손인 입제(立劑) 정종로(鄭宗魯)(1738년∼1816년) 선생의 아우인 재노(宰魯 1775년생) 공이 15세 때 주거용으로 1770년(영조 46년)년에 건축하였으나 현재는 사랑채만 남았으며 안채는 80년 전에 개축하고 별채(현 병천정 현판이 있는 집)는 70년 전에 개축한 것이라 한다. 이 마을에는 고 가옥이 20여 동이나 있으나 병암만 민속자료로 지정 받았다.
고택은 자연석 기단과 주초에 각주를 사용하고 벽체는 흙으로 사벽 처리하였다. 대청은 우물마루를 놓고 상부가구(上部架構)는 오량가로 동자주(童子柱)를 사용하였다. 병암의 평면구성은 부엌이 고방으로 바뀌었을 뿐 남쪽지방의 주택의 안채와 꼭 같은 방 배열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예는 특이한 것이라 한다.
병천정이란 현판이 있는데 이는 정동두(鄭東斗)가 1840년경에 우산고개 계곡에 전면 5간, 측면 2간의 정자를 짓고 앞에는 연못을 만들어 멋진 곳이었으나 1982년에 허물고 현판만 이 곳에 보관하였다. 또한, 지붕 안에 양각한 현판의 병암은 소유자인 정재하(鄭在夏)의 증조부인 진사 정철우(鄭喆愚)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라 한다.
7) 우복 정경세 선생 묘
경북 상주시 공검면 부곡리 27-3에 있다. 우복 선생은 禮學(예학)에 밝아 예학자로 불리었으며,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선생의 수제자로 선생의 학문은 영남과 기호 지방에서도 널리 인정하였다.
만학풍천에 빗장 걸어 닫고 홀로 있으니 (萬壑風泉獨掩),
긴긴 해 계정에 찾아오는 나그네 없도다 (日長無客到溪亭).
해질녘 정신 지쳐 서책 버려 두고 나오니 (晩來意倦抛書出),
눈부신 신록의 그늘 뜰 안에 가득하구나 (潑眼新陰綠滿庭).
이 시는 우곡잡영(愚谷雜詠) 20 수 중에 계정(溪亭)을 읊은 것으로 우복의 막내 사위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는 우복종택(愚伏宗宅) 주변의 풍광을 시(詩)로 노래한 것이다.
그래서 '우복' 선생하면 망인이 영면하는 음택(陰宅)보다는 그의 삶의 체취가 묻어나는 우산리의 청간정(聽澗亭)을 먼저 떠 올리게 되고, 실제 역사나 문학, 풍수를 공부하는 학인들도 이곳보다는 종택에 더 관심을 보이는 연유이다.
우복선생은 14번이나 대사헌으로 임명된 고관대작의 반열에 들었지만, 고향에 내려오면 우산리 산중으로 들어가 초라하기 그지없는 계정에서 청검하게 평생을 지냈다. 그만큼 우복은 청렴한 인물로 상주는 물론 영남을 대표하였다.
홍재전서에서 정조(正祖)가 영남 출신 관료들과 영남의 인물 개황을 요약할 때, 조선 최고의 영남 출신 선현(先賢)으로, 함양의 정여창, 금산(金山, 지금의 김천시 일대)의 조위, 안동의 권벌, 경주의 이언적, 예안의 이황, 진주의 조식, 성주의 정구, 상주의 정경세, 인동(仁同, 지금의 구미시 일대)의 장현광등, 9 사람을 꼽았다.
이곳 묘소는 백두대간이 일으킨 국사봉에서 낙맥된 연맥이 서에서 동으로 진행하면서 상하기복(上下起伏), 위이(위이)와 천전과협(穿田過峽)으로 수리(數里)를 진행하다가 묘역 뒤, 과수원 아래에서 과협(過峽)으로 오르면서 펑퍼짐하게 퍼진 완맥(緩脈)으로 고개를 쳐들고는 가운데가 둥글면서 오목한 와중미돌(窩中微突)의 당판을 일구었다. 후룡(後龍)의 형세가 낮고 지지부진하다 보니 고개를 가로 젖는 학인들도 있지만 당판에 서서 앞을 관망하면 어느 것 하나 이곳 터를 시샘한다거나 홀대하는 사격(砂格)이 없고, 아스라이 넓게 전개되는 전답(田畓) 명당을 품안에 두르면서 묘역을 응기(應氣)하는 평온(平穩)함 그 자체로 다가와 청렴한 삶을 우선으로 삼았던 우복의 일생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이곳 묘역은 와장(窩場)의 터를 일구면서 돌기(突起)한 도두(到頭)에서 좌우로 둥글게 감싸며 끝자락을 살짝 안으로 만곡(彎曲)한 현릉(弦凌, 소뿔 같은 형상)과 선익사(蟬翼砂, 매미의 날개)가 선명하여 혈(穴)로 단정짓는 중요한 증거 중의 하나다. 현릉과 선익사는 혈이 간직한 정기가 옆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보호막을 치고, 혈장 밖에서 지면을 타고 흐르는 바람과 지표수(地表水)가 안으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도록 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와형(窩形)의 필수요건으로 전순(氈脣)을 풍족하게 늘어뜨리고 있어 금상첨화(錦上添花)의 조건을 구비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과수원과 논으로 이용되는 둔덕은 묘소를 조성할 당시 내백호(內白虎)가 되어 관쇄(關鎖)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 전형적(典型的)인 와혈에 사신사(四神砂)가 완벽한 형기론(形氣論)에 부합하는 최상의 입지(立地)였음을 판단할 수 있다.
이곳 묘소의 발응은 평지(平地)의 와혈이란 점과 신좌을향(辛坐乙向)을 놓아, 귀(貴)보다는 손(孫)과 부(富)의 영향으로 나타나는데, 재물보다는 자손의 번성(繁盛)을 더 예고하고 있다.
모름지기 진정한 풍객(風客)이라면, 당판에 올라 대충 관산(觀山)식으로 산천을 살피거나, 또는 명당의 국세나 사격(砂格)을 보고 결론을 내리는 작대기풍수를 지양하고, 옛 선사들이 했던 발 품을 들여, 내맥(來脈)의 진위(眞僞)여부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한다.
즉, 혈(穴)을 잉태시킨 부모(父母)인 용세(龍勢)의 역량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요, 자식(子息)인 혈을 살피는 것은 다음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였다. 그래서 터를 살필 때는 순차(順次)가 있다. 먼저 부모봉(父母峰, 입수봉)과 현무봉(玄武峰), 주산(主山), 조종산(祖宗山)의 내력 등을 살펴 행도(行度)하는 산세(山勢)의 역량을 살피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개장천심(開帳穿心), 요도지각(橈棹地脚), 박환(剝換), 과협(過峽), 용맥을 이어주는 영송(迎送)여부, 주룡을 따라붙는 보룡사(補龍砂)유무를 면밀히 검토한 후에 용맥으로 이어지는 정기를 혈로 응집(凝集)시키는 입수처(入首處)의 역량을 판단해야 한다. 입수는 기복굴곡(起伏屈曲)의 변화로 나타나는 취기입수(聚氣入首)와 용신(龍身)을 조이는 결인속기입수(結咽束氣入首), 암석으로 일군 암석돌출입수(岩石突出入首)가 있는데, 이것이 입수의 격(格)을 결정짓는 입수삼격(入首三格)이다. 그런 다음 혈장으로 내려와 산진처(山盡處)여부와 산수(山水)의 배합여부, 혈의 사과(四科)로 혈형(穴形, 와겸유돌), 혈성(穴星), 혈증(穴證), 혈기(穴忌)를 꼼꼼히 살피고, 개점의당(蓋粘倚撞), 탄토부심(呑吐浮沈)등의 법수로 점혈(占穴)과 재혈(裁穴)여부를 검증해야 한다.
요즈음 풍수계를 보면 이기(理氣)는 문외한(門外漢)으로 형세(形勢)가 풍수의 전부인 양 주장한다든지 형세(形勢)와 패철의 법수는 제쳐두고 이상스런 이기(理氣)만을 고집하는 부류도 있는데, 이것은 진정한 풍객이 취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풍수의 이치나 이론을 완벽하게 터득하지 못하고 답사(踏査)에 목숨을 거는 강호파(江湖派)나, 지가서를 달달 외워 강단에 섰으면서도 정작 현장 용사(用事)나 간산에는 사리에 맞지 않는 행태나 주장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강단파(講壇派)도 있다. 또한 모든 풍수를 평정이라도 한 듯이 매스컴을 등에 엎고 자신의 무식과 우매함을 세상에 과시하는 꼴불견도 보인다.
모름지기 우리는 풍수의 이론이 제시하는 바를 통달한 연후에 그에 대한 비판을 스스럼없이 수용하는 몸가짐이 중요하다고 본다. 즉, 풍수의 궁극적 목적은 배운 것을 토대로 현장에 나가 지기와 천기를 묘용(妙用)할 줄 아는 진정한 풍인의 반열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산을 생략한 이론은 부질없는 것이며, 이론을 무시한 간산도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다.
8) 난재 채수 선생 묘
경북 상주시 공검면 율곡리 산71에 있다. 난재 채수 선생은 1511년에 패관소설인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었으나 그 내용이 윤회화복(輪廻禍福)으로 민심을 현혹시킨다 하여 탄핵을 받아 불태워져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지난 1998년 4월에 충북 괴산의 성주이씨 문중문고에서 당시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 쓴 "묵재일기"의 낱장 속면에서 필사본인 총 13쪽 3,472자(일부분)가 발견되었다.(논문, 서경대 이복규교수) 이는, 완역본이 아니긴 하나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보다 무려 100여 년이나 앞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로 평가를 받고 있다.
신도비는 1449년(세종 31)~1515(중종 10) 동안 조정의 문신으로 활약한 난재(懶齋) 채수(蔡壽)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 된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신도비이다. 비석의 규모를 보면 이수는 높이 65cm, 폭115cm, 두께30cm로 다듬어 양면과 음면에 각각 양감이 뚜렷한 두 마리의 용과 구름무늬를 새겨 생동감이 있도록 하였으며, 비신(碑身)은 높이 210cm, 폭 104cm이고, 귀부(龜趺)는 가로 180cm, 높이 85cm, 두께 110cm로 하여 화려하면서도 힘찬 느낌을 준다. 비신의 우측 상단에 균열이 있어 봉합(縫合)한 것이 흠이긴 하나 우리 지방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신도비로서 가치가 높다.
9) 가야왕릉, 왕비릉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에 있는 고분으로서 고령국태조가야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다.
함창김씨의 시조인 태조는 신라 유리왕 18년 가락국 북쪽 구지봉에서 강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낙동강유역의 아래쪽에 위치해 있었던것으로만 알아온 가야국의 하나가 당시로서는 신라의 북방 경계이었을 상주에 까지 자리하고 있었다는사실에 놀랍기만하다.
증촌리에는 300미터 거리를 두고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있는데 왕릉에 비해 왕비릉이 풍수적으로는 훨씬 우수하다는 판단이되는데 당시에 사람들의 풍수관을 짐작할수 있을 것 같다.
10) 잉어명당의 권찰도 묘소
이곳 묘소는 연산군 때 대제학을 지낸 퇴제의 음택으로 영남지방에서 전하는 잉어명당으로 더 유명한 곳이 되었다. 전하는 설에 의하면 이곳에 터를 정하고 길을 떠난 지관이 무덤을 두 자 이상 파지 말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퇴제 자손들이 지관의 말을 무시하고 깊이 파 내려가다 석자쯤 팠을 때 갑자기 잉어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와 앞의 연못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놀란 자손들이 지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이미 잉어가 튀어나간 묘소이기 때문에 명당의 발음(發蔭)도 끝난 줄 알았는데, 얼마후 퇴제의 아들이 호조판서가 되고, 손자가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손녀는 중종의 며느리가 되어 8대까지 줄곧 높은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이곳 묘역을 오르면 아래쪽에 상석과 제단이 설치되었고, 경사를 따라 다시 오르면 지금은 원분(圓墳)으로 치장한 원래의 팔각형 석축 위로 봉분과 함께 망주석, 상석 등이 또 설치되었다. 이곳 묘소는 정경부인 풍산김씨와 합폄(合폄)된 묘다.
봉분 뒤로 난 희미한 발자국을 따라 오르면 꽤 넓다고 느껴지는 입수도두(入首倒頭)가 나타난다. 이곳에 서서 시야를 주산에 옮기면 입수룡을 탯줄처럼 길게 연결시킨 숭덕산이 양팔을 벌리고 혈장을 옹골지게 포옹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낙맥된 입수룡은 좌우로 꿈틀꿈틀 위이(위이)로 길게 진행하여 도두(到頭)아래에서 식(息)인 입수처(入首處)를 구성하고, 언덕을 뛰어넘듯이 비룡으로 올라와 펑퍼짐한 잉처(孕處)로 매김되는 만두(巒頭)가 선명하다. 이곳 묘역은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도 예나 다름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당판에는 아직도 희미한 선익(蟬翼)자국과 함께 전순(氈脣)아래로 여기(餘氣)의 응집이 느껴지는 교과서적인 명당이다.
그러나 이곳 묘소의 결함도 크다. 입수룡의 역량을 판단하는 주산(숭덕산)이 아직 탈살(脫殺)이 덜된 암반(岩盤)덩어리를 이루는 것과, 주산에서 길게 탯줄로 이어가는 입수룡과 입수처를 지근에서 보호하는 보룡사가 전무하여 협곡을 따라 형성되는 바람으로부터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흠이라면 묘소가 정혈처(定穴處)보다 아래로 살짝 빗겨 터를 정한 것과 명당이 광활하고, 안산이 멀다보니 재혈(裁穴)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탁 터진 명당 국세를 보면 우측이 약간 높은 지형을 이루면서 묘소의 천지 배합수(配合水)도 우선(右旋)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전답사 때만 하더라도 온통 사방이 숲과 잡풀을 이루면서 정확한 판단이 곤란하여 내명당의 지형조건에 따라 간산안내에 우선수(右旋水)로 명시하였다. 그러나 잡초 등이 정리된 상황에서 다시 한번 과당수 여부를 살펴본 결과 천수(天水)시 묘소 앞을 감고 흐르는 물은 묘역과 경계를 이루는 포장된 농로가 우측보다 좌측이 더 높은 지형을 이루고 있어 길을 물로 본다거나, 또는 묘전(墓前)에서 입을 맞추는 일차(一次) 배합수로 매김되면서 좌선수(左旋水)가 분명하다. 묘향(墓向)은 계좌정향(癸坐丁向)에 곤신파(坤申破)로 정묘향(正墓向)이다
11). 어옹수조형(漁翁垂釣形)의 한산이씨 선산
상주시 화동면 이소2리 어방마을 뒷산에는 漁翁垂釣形의 명당인 한산이씨 선산이 있다.
지금부터 200여년전 화동면 선교리에 한산이씨성을 가진 사람이 부자로 살고있었는데 이사람은 철저한 음택발복론자로서 부근 어방마을 뒷산에 명당이 있음을 은밀히 알고 자기 소유로 하고자 하였으나 산 주인인 과부 광산 노씨 가 산을 팔지 않자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후한값을 주고 이명당을 사게 되었다.
이 명당의 모양이 어옹수조형으로서 고기낚는 늙은이가 낚싯대를 드리우고있는 형국이라한다. 마을 이름인 어방도 이에 연유했다.
또한 인근 판곡리에도 仙人舞手形의 한산이씨명당이 있는데 한산이씨들은 지금도 이부근에 많이 살고있을뿐 아니라 각계 각층에서 많은 활동을 하며 번성하게 잘살고 있다함.
12). 개암 김우굉(開巖 金宇宏) 묘소
상주시 중동면 회상리 매골에 있는 조선 중기 충청도 관찰사, 대사간, 대사성을 지낸
개암 김광우의 묘소가 있다. 보통의 명당은 강하수가 명당의 앞에있어 요대수의 역할을 하는데 이묘는 낙동강이 공배수의 역할을 하고있는 다소 특이한 모습의 명당이다.
경북 영천의 보현산에서 출발한 용맥이 수백리를 행룡하다가 낙동강을 만나 더 이상의 행룡을 멈추고 결지한 명당이다.
※ 開岩 金宇宏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인 金宇宏(1524~1590)의 본관은 의성이다. 자는 敬夫, 호는 開岩이다. 경상북도 星州 출신이다. 아버지는 府使 希參이며, 어머니는 郭氏이다. 李滉의 문인으로 19세때인 1542년(중종37) 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552년 (명종7) 進士試에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하여 여덟차례에 걸쳐 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다. 年譜에도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실려있다.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注書·待敎·奉敎·典籍 예조와 병조좌랑·정랑, 知製敎·正言·獻納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573년(선조6) 부수찬, 1578년 司僕寺正을 거쳐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 등을 지내고 이듬해 병조참의·승지에 이르렀으나 李銖의 옥사로 파직되었다. 1582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조참의·장례원판결사·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유생 朴濟로부터 음흉하다는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靑松府使·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1589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星州로 돌아갔다. 그 해에 동생 宇 이 정여립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그는 영천으로 달려가 동생을 만나 갓과 옷을 벗어주고 시 한수를 지어주며 이별하였다 한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獄訟을 결정한 형조판서를 당당히 탄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644년(인조22) 李埈이 撰한 碣石을 세웠으며, 1730년(영조6)에 상주 速水書院에 배향되었다.
13) 청주곽씨(곽존중), 창령조씨(조계권) 족분 묘역 <채수 묘의 백호자락>
채수 묘에서 보면 마치 백호자락으로 매김되지만 실제로 이곳에 서면 숭덕산에서 낙맥된 수 개의 용맥 중에 중출룡(中出龍)에 해당되며, 이곳 일대에서는 수맥(首脈)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모름지기 주혈(主穴)의 조건에 드는 산진처(山盡處)란 이곳 용맥처럼 두면(頭面)이 일직선으로 곧게 흘러야 한다. 만약 진행하는 용맥이 좌나 우로 몸통을 휜다면 그것은 본신(本身)에서 혈을 맺는다기보다는 좌변(左邊)이나 우변(右邊)의 용을 호종(護從)하거나 보호하고자 하는 보조룡(補助龍)에 불과하다.
동일 용맥 선상의 위쪽은 조계권을 포함한 창령조씨 들이 점했고, 아래쪽은 곽존중을 비롯한 그의 족분(族墳)터다. 과연 어느 성씨가 정혈처(定穴處)를 선점한 것일까?
용맥의 상처(上處)에 조성된 창령조씨 조계권의 음택에 올라 전방(前方)을 조망하면 안산너머로 겹겹으로 장막을 치고 굽이굽이 전개되는 백두대간의 연맥이 장관을 이루면서 전개된다. 그러다 보니 나지막한 안산을 눈 아래로 깔보고 응시하게 되고, 우에서 좌로, 위에서 아래로 경도(傾倒)되는 명당이 훤하게 모습을 들이미는데,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아 그러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지만, 웬만한 천수(天水)시에도 횡류수(橫流水)로 급하게 이동하는 물길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
그러나 용맥의 아랫자락을 점한 곽존중의 음택은 사세(四勢)가 완벽하게 보듬으면서 수구를 관쇄(關鎖)하고, 비스듬한 안산의 아랫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물길을 자연스럽게 수용함으로써 귀(貴)보다는 재(財)의 발응을 짐작케 한다.
이곳 묘역을 일군 용맥은 여인의 유방처럼 볼록한 음룡(陰龍)으로, 사상혈(四象穴) 중 유혈(乳穴)을 맺는다. 유혈은 사상 중에 소음(少陰)에 속하며, 대개 용맥의 아래쪽에서 혈을 맺는 유두혈(乳頭穴)과 중간에서 혈을 맺는 현유혈(縣乳穴), 위쪽에서 맺는 수유혈(垂乳穴)로 구분하는데, 이곳은 볼록한 혈장에 약간 오목한 유중미와(乳中微窩)로, 작은 혈(穴)을 감추고 있어 위쪽의 창령조씨보다는 아래쪽의 청주곽씨의 음택이 정혈에 가깝다.
14) 정기룡(鄭起龍) 장군 음택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
자는 경운(景雲)이고, 호가 매헌(梅軒)이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며, 초명(初名)은 무수(茂壽)다. 곤양정씨(昆陽鄭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공이 많았던 장군으로, "바다는 이순신, 육지는 정기룡" 란 말이 나올 정도로 지략가다.
1580년(선조 13) 고성(固城)에서 향시에 합격하였으며,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왕명으로 개명하였다. 1590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립(申砬)의 휘하에 들어가 훈련원 봉사(奉事)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별장(別將)으로 승진하여 우방어사 조경(趙儆)을 따라 종군, 거창(居昌)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금산(錦山)싸움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한 뒤 곤양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었다.
유병(遊兵)별장을 거쳐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왜군과 대치하여 격전 끝에 상주성을 탈환하였으며, 1593년 전공으로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승진하고 이듬해 상주목사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어 고령(高靈)에서 적장을 생포하는 한편 성주(星州), 합천(陜川), 초계(草溪), 의령(宜寧) 등을 탈환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승진, 이어 경주(慶州), 울산(蔚山)을 수복하였다. 경상도방어사, 김해부사, 밀양부사를 거쳐 중도(中道)방어사에 오르고, 뒤에 용양위부호군 겸 오위도총부총관,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상호군(上護軍)에 승진, 1617년 3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통영(統營)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묘소는 묘좌유향(卯坐酉向)을 놓으면서 녹존성(祿存星)의 창고사(倉庫砂) 안(案)을 대었다.
15) 사벌국의 사벌왕릉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
사벌국은 상주지방에 위치한 삼한 소국 중의 하나로, 일명 사량벌국이라고도 한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나라는 본래 신라에 속했으나 점해왕 때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에 귀속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우로(于老)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여 사벌주를 설치하였다. 그 뒤 신라 54대 경명왕의 여덟 왕자 중 다섯 번째 왕자인 상산박씨의 시조인 박언창이 사벌주의 대군으로 책봉되어 사벌국이라 칭하고 11년 간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러다가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을 받아 929년 패망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는 <옛 사벌국의 성이 병성산에 있고 이 성의 곁에 있는 언덕에 우뚝하게 솟은 고분이 있어 사벌왕릉이라 전해오고 있다.> 라 기록되어 있고 상주군읍지 고적조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만 위치를 <성의 북편 9리쯤 떨어진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좌향은 병성천이 흐르는 벌안을 바라보고 계좌정향(癸坐丁向)을 놓았다.
영천시
1) 광주이씨 시조 李 唐 墓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유동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는 요승 신돈(辛旽)이 정권을 잡고 전횡할 때로 둔촌 이집(遁村 李集)이 신돈의 횡포를 비판한일이 문제가 되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서울의 둔촌동(遁村洞) 굴속에서 몸을 피해 있었으나 이 사실이 신돈에 게 알려지게 되자 병든 부친 이당을 등에 업고 밤을 낮 삼아 천리길인 영천(永川)으로 내려와 낙향해 있는 최원도를 찾아가 은신해 살게 됐다하며 현자(賢者)인 둔촌(遁村)이 숨어 지내던 동리라 하여 둔촌 동이라는 동명(洞名)도 생겨나게 됐다한다.
은신 중에 이당이 사망하여 최원도는 자기가 죽은 뒤 쓰려고 잡아놓았던 묘 자리에 은밀하게 장사를 지냈다.
그 결과 최원도의 후손들은 번창하지 못한 반면 이당의 후손들은 대창(大昌)해서 그의 아들 5형제가 후손들에 의해 파조(派祖)로 추앙받게 됐으며 이인손, 이극균, 이극배, 이준경, 이덕형 등이 연이어 정승 의 반열에 올랐고 그 중에서도 이인손(李仁孫)의 아들 다섯 명이 모두 등과(登科)해 세상 사람들의 선 망을 받기도 했다.
정승반열 5명과 문과급제자 188명을 나오게 한 也字形明堂이다.
영주시
1) 소수서원(紹修書院)
영주시 순흥면(順興面) 내죽리(內竹里)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서원.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현(儒賢) 안향(安珦)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다음 해에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그 후 1544년 여기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1633년(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였다.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과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私學)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서원 중의 하나로 지금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원의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이 걸린 강당, 그 뒤에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동북쪽에는 학구재(學求齋), 동쪽에는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또한 서쪽에는 서고(書庫)와 고려 말에 그려진 안향의 영정(影幀: 국보 111)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 보물 485)가 안치된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2) 부석사(浮石寺)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 절.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 ·조사당(국보 19)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 ·조사당 벽화(국보 46)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 ·석조여래좌상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 ·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 ·취현암(醉玄庵) ·범종루(梵鐘樓) ·안양문(安養門) ·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의상은 제자가 3,000명이나 있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 10대덕(十大德)이라 불리는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은 모두 화엄을 현양(顯揚)시킨 승려들이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그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및 신림(神琳) 등도 의상의 훌륭한 제자였으며 의상 이후의 부석사와 관계된 고승으로는 혜철국사(惠哲國師) ·무염국사(無染國師) ·징효대사(澄曉大師) ·원융국사 ·원응국사 등이 그 법통을 이었다
칠곡군
1) 김복동 장군 선친묘
칠곡군 동명면 가천리
전 국회의원인 김복동 씨의 선친 묘소로, 1980년 경, 육관 손석우씨가 이곳에 터를 정하면서, 외손(外孫)발복지 임을 천명하고는, 먼저 딸에게 발음되어 왕비로 등극되고, 그 다음에 손자가 복을 받을 거라 예언하였다. 그의 말대로 7년 후에 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인 김옥숙 씨가 영부인이 됨으로써,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간 수많은 풍수애호가들이 이곳 묘소를 찾고자 전전긍긍하였으나 김복동씨 가 철저하게 함구하는 바람에, 한때 베일에 쌓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음택은 여러 기의 민묘 들과 터를 공유하면서도 어떤 표식을 생략하여, 대충 설명만 듣고 찾을 경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또한 노 대통령이 재임 중, 대여섯 차례나 이곳 묘소를 방문하게 되자, 마을사람들 사이에 풍문이 돌기도 하였는데, “대통령이 장인의 묘를 저렇게 자주 찾는 것은 필시 명당 현몽을 하였거나, 자신이 장인 덕으로 대통령이 된 것을 알았을 것이다.” 란 후문이었다.
이곳 터를 일군 용맥은 5번 국도 건너편의 팔공산에서 출맥한 지맥이 거의 서쪽방향으로 진행하다가, 다부동 전적기념관 어름에서 도로를 대단과협하여 분지(分枝)된 한 맥이 방향을 동남쪽으로 틀고는 역방(逆方)으로 진행한다. 위로 높게 솟구친 용은 두 세 번의 역동적(力動的)인 기복을 반복하고는 평탐(平貪)의 도지탐랑(倒地貪狼)으로 등을 세운 뒤, 산고곡심(山高谷深)의 음룡으로 길게 내려와 편편한 양룡으로 매김하였는데, 당판을 일군 두면(頭面)이 산정(山頂)의 평탐보다 우람하고 길다. 목(木)은 본디 곡직인수(曲直仁壽)라 하여 그 본성이 위로 솟구치는 기운을 지녔지만, 옆으로 누운 도지목(倒地木)은 두면에 기운을 쏟아내면서 대지(大地)를 일구는 특성이 있다. 그리고, 이곳 당판을 보면 양균송의 도장법(倒杖法)을 가미한 것으로 보아, 그간 육관의 용사방법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장법이다.
이곳 터를 멀리서 조망하면 숲을 나온 호랑이가 목을 우측으로 돌려, 먹이를 찾아 나서는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으로, 그의 예언처럼 남자 자손의 발복을 예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명당 건너로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수많은 차량이 섬칙한 굉음을 내며, 도로살(道路殺)을 쏟아내고 있어, 과연 육관의 말대로 손자들이 발복을 이룰지는 답사자의 판단에 맡기기로 한다.
김천시
1) 매계 조위 음택
대항면 복전2리
조선 성종 때 학자로,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현감(縣監) 계문(繼門)의 아들로 태어나 1474년(성종 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차례 시제(詩製)에서 장원하여 문명을 떨쳤고, 유호인(兪好仁)과 함께 성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으며, 검토관, 시독관 등으로 경연에 나갔다. 그 후 지평, 문학, 응교를 거쳐 노모 봉양을 위해 함양군수로 나가 선정을 베푼 공로로 여러 차례 표리(表裏), 녹피(鹿皮) 등을 상으로 받았다. 1491년 검상, 장령 등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 도승지, 호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495년(연산군 1) 대사성으로 지춘추관사가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수록하여 올리자 원문대로 받아들여 편찬하였다.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부총관을 겸직했다.
1498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때마침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로, 김종직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의주에서 체포, 투옥되었다. 이극균(李克均)의 극간으로 죽음은 면하했으나, 오랫동안 유배생활 끝에 순천으로 옮겨진 뒤 죽었다. 시호(諡號)는 문장공(文莊公)이다. 매계 선생이 죽은지 이듬해, 연산군의 명으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어 시신이 무덤 밖으로 꺼내져 3일 동안이나 방치된 기구한 사연과 함께, 당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묘소 아래에는 경부선 철길이 달리고, 건너편으로 운치가 돋보이는 매계사당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좌향은 축좌미향(丑坐未向)에 우선수(右旋水) 유파(酉破)다.
2) 장택상 선친 장승원음택
대항면 운수리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神虎衛) 상장군(上將軍) 금용(金用)의 후손인 장승원은인동(仁同)고을의 거부로 태어나 경술국치(庚戌國恥)이후, 관찰사를 지냈다. 그는 모두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인 길상(吉相)은 은행장, 둘째인 직상(稷相)이 중추원 참의, 셋째인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이 이승만정권시절국무총리를지냈다. 길상은 부호인 아버지의 후원으로 일찍 금융계로 뛰어들어 일제(日帝)하 대구 유수의 은행이던 경일(慶一)은행의 두취(은행장)가 되어, 가문의 재력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둘째인 직상은 1910년 경북 신녕(新寧)군수와 총독부 고등관직에 올랐으나, 형 길상이 경일은행을 설립하자 사업가로 변신, 은행의 전무를 거쳐 1927년, 대구상의 회장이 되었고, 1930년에는 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올랐다. 그리고 장택상은 1950년에 국회부의장, 1954년 5월에는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 이라는 국무총리에 올라, 부(富)를 이어 세속적인 명예를 세상에 떨치며 장씨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이다.
이곳 묘소는 김천의 명찰(名刹)인 직지사(直指寺) 옆에 둥지를 틀었다. 남하하는 백두대간맥이 황악산을 일으키기 직전, 천덕산에서 낙맥한 용맥이 급하게 구르다가 천전과협(穿田過峽)으로 박환(剝換)하여 비룡(飛龍)으로 고개를 쳐들고는 승금도두(乘金到頭)아래에 터를 정한 교과서적인 돌장(突場) 이다. 초학자들에게는 노룡(老龍)이 눈룡(嫩龍)으로 박환되는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무덤이다. 좌향은 신좌을향(辛坐乙向)에 좌선수(左旋水) 손사파(巽巳破)다.
3) 이덕손 음택
김천시 양천동
본은 벽진(碧珍, 지금의 성주)이고, 세종조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그의 아들은 성종조(成宗朝)에 이조참판(吏曹參判)과 개성유수(開城留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내고, 1514년 청백리(淸白吏)에 선발된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이다.
이곳 묘소는 3번 국도변의 김천중앙고등학교 옆에 자리를 잡아, 관심있는 풍객들이라면 놓치지 않고 답사했을 것으로 본다. 도로변에서 보면 숲이 울창하여 직룡(直龍)의 등을 치면서 내려오는 당배룡(撞背龍)처럼 보이지만 용맥을 밟고 조금만 위로 오르면 횡결맥(橫結脈)에 용사된 것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다. 그런데, 횡결(橫結)의 조건이...........???? <횡룡입수와 앙와를 공부하기에 이보다 좋을 수가...>
간산을 하다보면 길지에 든 무덤도 있고, 흉지에 버금가는 무덤도 있다. 그래서 풍인(風人)들은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여러 곳의 무덤을 섭렵해야 개안(開眼)할 수 있는 것이다. 좌향은 해좌사향(亥坐巳向)에 좌선수 정미파(丁未破)다.
4) 금차낙지형의 이말정(李末丁) 음택
구성면 상원리
이말정(1395∼1461)은 조선초 문신으로, 본은 연안(延安), 백겸(伯謙)의 막내아들이며, 연천군(延川君) 보정(補丁)의 아우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평절공(平節公) 한옹(韓雍)의 사위가 되어 그 문(門)에서 수학하였으며, 1426년(세종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검교(檢校), 충청도사(忠淸都事), 예빈소윤(禮賓小尹)에 이르렀으나 관을 버리고 김천 구성면 지품(知品)으로 귀향(歸鄕)하였다가 얼마 후 거창(居昌) 모곡(茅谷)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는 훌륭한 아들을 다섯이나 길러 연안이씨 가문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그의 아들들은 숙황(淑璜: 문과급제, 성균관 직강), 숙형(淑珩: 문과급제, 현감), 숙규(淑珪: 문과급제, 감찰), 숙기(淑琦: 무과급제, 廷安君) 숙함(淑喊: 문과급제, 이조참판) 등이다. 1461년에 사망, 시호는 평정공(平靜公),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사당우측으로 난 가파른 길을 타고 묘역 안으로 발을 들어놓으면 산등성이 위로 넓게 조성된 묘역에는 수 기의 묘소가 옹기종기 터를 정하고 있는데, 모두 자손들의 묘다. 마치 묘역 위로 포진된 자손들의 무덤과 경계라도 짓는듯이 아래로 뚝 떨어진 백호자락에 상하장(上下葬)의 묘소가 다소곳하게 자리를 정했는데, 이곳이 바로 영남지방에서 소문난 '금차낙지형(金차落地形)' 의 이말정 음택으로 배위(配位)가 위다. '금차낙지' 는 땅에 떨어지는 금비녀란 뜻을 간직하고 있는데, 금비녀가 땅에 떨어지면 쇠 소리를 내면서 사람들의 주위를 끌기 때문에 숨은 선비가 고위직으로 발탁된다고 본다. 또 비녀가 땅에 떨어지면, 토생금(土生金)의 상생을 이루어 부귀(富貴)를 겸전한 자손들을 배출한다.
그런데 금차형(金차形)은 전방에 옥소안(玉梳案, 옥 빗)의 조건을 구비해야 격을 갖춘 것으로 보는데, 거기에 합당한 안대가 구비되었는지 회원들과 함께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좌향은 유좌묘향(酉坐卯向)에 인파(寅破), 또는 갑파(甲破)다.
이곳 묘역입구에는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하는 시도유형문화재 제46호인 방초정(芳草亭)이 빛 바랜 모습으로 서 있고, 특이하게 생긴 연못이 그 자태를 뽐내며 탐방객을 맞는다.
5) 김천 직지사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준령(竣嶺)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그 서쪽 추풍령(秋風嶺)에서 잠시 머물러 관문(關門)을 이루었고,다시 서남쪽으로 웅장(雄壯)한 산세(山勢)를 유지하며 달려와 힘차게 솟아오른 황악산(黃岳山) 동남쪽 산자수명(山紫水明) 한 곳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해있다. 해발 1,111m에 달하는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三道)의 도계(道界)에 접하였으며, 이중심에 눌러 앉은 본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慶尙北道) 김천시(金泉市) 대항면 (代項面) 운수리(雲水里) 216번지이다.
황악산(黃岳山) 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본사(本寺)로부터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선(京釜線)을 비롯하여 태백산(太白山), 삼척(三陟)등 동해방면(東海方面)으로도 연결되는 한반도(韓半島) 교통의 요충지이며, 예로부터 길상지지(吉祥之地)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에 직지사는 정좌(定座)하고 있다.
본사(本寺)의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대구광역시
1)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 및 조부모 묘
대구시 동구 신용리
생가는 신용동의 용진 마을 제일 안쪽으로 터를 대었는데, 팔공산 순환도로에서 가까운 구릉지에 위치한다. 마을의 지세는 한 마리의 큰 용에 비유할 수 있는데, 마을은 용의 머리가 되고, 생가는 왼쪽 귀 부분쯤에 위치한다. 이곳 생가는 팔공산의 대지룡(大枝龍)이 굽이굽이 꿈틀거리면서 내려와 생가위쪽이 되는 산자락 끝에 현무봉이 수두(垂頭)하였다. 마을 좌우를 감싼 지맥이 함지박을 이루는 가운데, 산과 마을의 접경을 이루는 능선 끝자락, 언덕바지에 생가가 터를 대고 있다. 생가 뒤쪽으론 팔공산의 연맥이 겹겹으로 솟구친 봉우리와 과수원 등으로 개간된 둔덕을 이루며, 앞쪽에는 응해산과 아랫도덕산, 윗도덕산이 안산으로 매김한다. 특히 마을 우백호(右白虎)끝자락의 옥인사(玉印砂)처럼 작고 둥그런 동산은 제왕을 배출할 기상이 서려있다.
생가 위쪽, 현무봉 아래에 등을 댄 조부모 묘소는 간좌곤향(艮坐坤向)을 놓아 거의 남향판을 이루면서 양명한 천기를 수용한다. 안산과 조산들이 응기(應氣)하는 가운데, 신용동 마을입구에서 모든 물길이 합수(合水)되는 형세와는 반대로 역세(逆勢)의 내명당(內明堂)을 이루면서, 당판 배합수(配合水)는 우선수(右旋水)로 과당(過堂)하는 자생향(自生向)을 놓았다.
2) 신숭겸장군 순절지
대구시 동구 지묘동 526
장군은 ?~927(태조 10)의, 고려 태조 때의 무장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춘천도호부 인물 조에 신숭겸의 이름이 실려 있고,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본래 곡성출신이었지만 뒤에 춘천에 옮겨와 살게되어, 춘천에 장사지낸 것으로 보고있다.
신숭겸은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혁명으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 건국의 큰공을 세우면서,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공은 그 뒤 대장군이 되어 927년(고려 태조 10)에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 견훤을 물리치기 위해 왕건과 함께 경주로 출전한다. 그러다가 왕건이 이곳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후백제 군에 포위되어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왕건을 위장 탈출시키고, 왕건으로 가장하여 싸우다 전사하였다
왕건은 장군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의 목이 없는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지금의 춘천)에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신숭겸이 순절한 이곳에 순절단과 지묘사(미리사)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고, 토지를 내려 이 곳을 지키도록 하였다. 1607년(선조40)에는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서원인 충렬사를 세워 장군을 모셨으며, 1672년(현종 13)에 충렬사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1871년(고종 8)에 서원 철폐령에 따라 표충사가 없어지자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오다가 1993년에 복원되었다.
3)명나라 이여송의 지리참모 대구 두사충 묘
모명제에서 주변 산세를 보면 감탄을 자아낼 만큼 순하고 아름답다. 담티 고개에서 형제봉으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갑자기 머리를 돌려 오던 곳을 바라보고 있다. 이를테면 회룡고조(回龍顧祖)다. 회룡고조혈은 전국에 많이 있지만 한눈에 산맥이 빙 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은 흔치않다. 산맥이 한 바퀴 돌면 그 안에는 평탄한 공간이 생기는데 이곳을 명당이라고 한다. 그리고 산과 물, 명당이 어루어진 공간 전체를 보국(保局)이라고 한다. 이 보국을 보고 혈이 있겠는지 없겠는지를 판단하고, 있으면 어디쯤 있는지도 가늠한다. 보국을 보자면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곳이 여기다.
아마 두사충이 담티재에서 되돌아오면서 아들에게 저곳 계좌정향(癸坐丁向)이라고 알려준 것도 이 보국을 보고 판단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의 수려한 산들이 균등하게 잘 짜여준 보국으로 보아 어디쯤 대혈(大穴)이 있을 거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이 때 명당의 물이 어느 쪽을 향해 감싸주고 있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감싸주고 있는 쪽의 주산 또는 현무봉을 살피고 그 봉우리의 중심맥을 찾는다. 만약 이로도 분간이 어려울 때는 반대쪽을 보고 안산이 될만한 봉우리를 찾는다. 안산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능선 끝 부분 즉 용진처(龍盡處)에 혈은 맺는 법이다. 이것이 심룡(尋龍)이나 심혈법(尋穴法)의 기본이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 나는 안산이 될만한 봉우리를 찾았다. 모명제 앞에 보이는 산이 너무 수려했기 때문에 안산심혈법으로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그곳에 두사충의 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명제 뒤로 난 산길을 오르자 작은 능선 하나가 우측에서 좌측으로 길게 감아주고 있었다. 위에 묘가 있으면 내백호가 될 것이므로 혈이 분명하게 있다는 증거다.
과연 한기의 묘가 비석과 함께 나타나는데 풀한 포기 나지 않고 봉분이 반쯤 무너져 있었다. 비문을 보니 "증통훈대부규장각직각두공지묘(贈通訓大夫奎章閣直閣杜公之墓)"라고 적혀 있었다. 두사충의 후손으로 짐작되나 어떤 관계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이곳은 혈이 아니고 그 위 묘가 혈에 해당되었다. 비석이 없어 주인공을 알 수 없었지만 입수도두, 선익, 순전이 분명하게 있고 순전 아래 우선룡(右旋龍)으로 돌아준 하수사가 뚜렷하다. 아래 묘는 이 묘의 합수처에 해당되므로 물이 가득 고여 풀한 포기 나지 않고 봉분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나 국세로 보아 이곳이 정혈 같지는 않았다. 백호 능선에 자리잡은 작은 혈이다. 용에는 정룡(正龍)과 방룡(傍龍)이 있는데 방룡은 정룡을 보호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변화가 있으면 혈을 맺기도 하는데 정룡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혈처가 분명한 곳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두사충이 이곳을 가리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 두사충 묘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 이보다 더 좋은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그곳에서 좌측으로 난 능선으로 가자 두사충 묘가 나왔다. 작은 무인석과 동자가 묘 앞에 있는데 무인석은 명나라 장수였다. 장수로써 위엄이 없는 앙증맞은 표정을 바라보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묘지를 보고도 웃음이 나왔다. 혈은 고사하고 용맥 조차도 제대로 받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맥이 비껴간 사맥지(斜脈地)에 있어서인지 봉분은 거친 풀들이 듬성듬성 나이었다. 봉분 또한 축축하고 무너진 흔적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명나라 원군(援軍)의 일급 지리참모였고 오늘날까지 두사충결로 유명했던 인물의 묘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땅은 임자가 있다고 했다. 이여송을 따라 조선의 지맥을 많이 잘랐다고 전하는 그였다. 비록 명령에 따라 했다고는 하지만 조선의 산하가 그런 그를 제대로 받아 주었을까? 나는 만무한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사충은 조선에 귀화하여 두릉두씨(杜陵杜氏) 복야공파(僕射公派)의 시조가 된다. 두릉두씨에 관한 성씨일람을 찾아보면 크게 경녕계(慶寧系)와 교림계(喬林系)로 나눈다고 나와 있다. 경녕계는 고려 목종 때 송나라에서 귀화하여 지금의 전북 김제군 만경에 자리잡고 세거한 성씨로 만경두씨라고도 부른다. 교림계는 두사충의 아버지 두교림을 1세로 하고 있다. 1985년 인구통계조사에 따르면 현재 전국적으로 4,800명 정도가 사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곳을 떠나면서 아까 보았던 혈처로 추정되는 곳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두사충 묘 있는 능선은 이곳의 청룡에 해당되었고 앞에 잘 생긴 안산이 똑바로 향해 있었다.
태백에서 백두대간과 갈라진 낙동정맥이 부산으로 향해 곧장 내려가다가 경주 단석산(827m) 위 사룡산(685m)에서 서쪽으로 한 맥을 뻗어 영천 구룡산(675.1m)을 만든다. 다시 경산 용성면 장백산(650m)으로 이어져 비리재와 다천고개를 넘어 청도 대왕산(605m)으로 연결된다. 북고개를 넘은 산맥 하나는 백자산(486m)으로 가 경산시를 이루고, 이현재를 거친 산맥은 선의산(756.4m)과 용각산, 하도터널을 지나 남성현을 넘어 상원산(669.5m)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서쪽으로 팔조령을 넘은 산맥은 우미산과 통점령, 헐티재를 지나 비슬산(1083.6m)을 이루어 앞산(660m)으로 연결되고, 북쪽 동학산(603m)으로 뻗은 산맥은 병풍산(571m)을 지나 대구월드컵경기장 뒤 대덕산(600m)을 기봉한다. 여기서 내려온 산맥이 당고개를 넘어 황금동 두리봉(216m)을 기봉하고 다시 만촌동 담티고개를 넘어 모봉(151m)과 형제봉(196m)을 이루니 이곳의 주산이다.
앉아있는 곳 앞으로는 조종산인 두리봉(경복고등학교 뒷산)에서 내려온 산봉우리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특히 두리봉에서 대구산업정보대학 쪽으로 내려온 산줄기는 이곳을 유정하게 감싸주고 있다.
형제봉 뒤로는 금호강이 감아주고 있다. 이는 보국 안의 생기를 보호해주는 공배수(拱背水)이며 수전현무(水纏玄武)하는 길수(吉水)라 할 수 있다.
두사충의 신도비는 이순신 장군 7대손인 삼도통제사 이인수가 찬(撰)을 했다. 모명재에서 내려오면서 입구 음식점에 들렸는데 뽕나무 잎으로 닭죽을 끊인 것이 나왔다. 맛이 특별했는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두씨들이 계산동에 심은 뽕나무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운전을 해야하기 때문에 구수한 닭죽에 소주 한잔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두사충의 사위로 알려진 나학천은 나학천비결(羅鶴天秘訣)에서 조선팔도 인물평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팔도의 형상을 각각 인체와 동물에 비유하였다. 필사본(筆寫本)이기 때문에 진위여부가 확실치 않고 내용의 현실성은 떨어지나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함경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머리(頭)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장어다. 함경도 사람은 우직하지만 지혜를 가진 우직지협(愚直知夾)이다.
2)평안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얼굴(面)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매다. 평안도 사람은 의지가 강하고 용감하며 날쌘 견강용예(堅剛勇銳)다.
3)황해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손(手)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소다. 황해도 사람은 느리고 어리석어 옹골차지 않는 우준무실(愚蠢無實)이다.
4)경기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가슴(胸)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범이다. 경기도 사람은 앞에는 억세고 뒤로는 부드러운 선용후유(先勇後柔)다.
5)강원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갈빗대(脇)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꿩이다. 강원도 사람은 자기 거처에 가만히 있고 아는 것이 부족한 칩복지단(蟄伏知短)이다.
6)충청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배(腹)고, 동물에 비유하면 까치다. 충청도 사람은 행동이 경솔하지만 용맹스러운 부경용호(浮輕勇豪)다.
7)경상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다리(脚)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돼지우리다. 경상도 사람은 어리석고 순하고 질박하지만 참된 기질이 있는 우순질신(愚順質信)이다.
8)전라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발(足)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원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