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언약, 바벨탑 사건, 준비된 족장 아브라함
창세기 9장, 11장
1절~11절
창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3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5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7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8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소개됩니다. 첫째, 인간이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긍정적인 명령은 그 피조물들이 인간을 '두려워하며....무서워하리니'라는 부정적인 언급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둘째, 이전에는 사람들이 채소를 먹는 것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인간이 육식을 먹을 것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동물들을 먹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동물의 피는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피를 먹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이 여호와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1~4절).
동물을 죽이는 것 먹을거리로 취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 다음, 하나님은 살인에 대해서 다루십니다. '모든 생물'(11절), 인간과 동물의 포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홍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홍수사건 이후에도 인간의 본성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인간과 동물의 포악함을 막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적법한 법을 통해서 그것을 방지하려고 의도하십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피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만약 어떤 동물이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게 하면 그 동물이나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의 목숨에 대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곧 인간의 대리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것이니'(6절) 곧 '생명은 생명으로'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이와 같은 신중한 대응이 라멕의 77배의 복수보다 훨씬 더 바람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매우 고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형벌 제도를 통해서 인간의 생명이 보호되어야 마땅합니다(5~6절).
하나님은 노아와 노아의 아들에게 자녀를 많이 낳아서 땅에서 번성하라고 지시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포악함이나 또 다른 홍수에 의해서 그들이 멸망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노아의 후손, 그리고 모든 생물과 맺으실 언약에 대해서 요약적으로 소개됩니다. 홍수 사건 이전에, 이 언약은 6:18에서 간략하게 언급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이것은 맨 처음으로 명백하게 언급되는 언약입니다.
나중에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과 비슷한 언약을 맺으십니다. 서로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과 헌신하는 것에 기초해서 언약은 관련된 두 대상을 공식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노아의 후손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생물도 언약에 포함됩니다. 이것은 노아가 새로운 아담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언약이 모든 생물에게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하시면서, 또한 하나님은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11절)고 약속하십니다(9~11절).
12절~17절
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여러 가지 언약들은 각각의 언약에 적합한 표징 또는 상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증거해주는 표징입니다(17장). 안식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 산에서 맺으신 언약을 증거해주는 표징입니다(출 31:12~17). 그러나 이 경우에 하나님이 언약의 증거로 지정하신 것은 '무지개'입니다(13절).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눈으로 보여주며 기억나게 할 것입니다(16절). 바로 이때 무지개가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추측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던 무지개를 이 시점부터 언약의 증거로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지개라는 표징은 하나님이 싸움에서 사용하는 자신의 활을 걸어놓으신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돼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는 그와 같은 의미가 전혀 암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12~17절).
18절~29절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년을 지내었고 29 향년이 구백오십세에 죽었더라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라는 언급은 홍수 사건 이후에 노아가 새로운 출발을 성공적으로 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20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21절), 노아가 술에 취한 것을 매우 짤막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노아의 행위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을 암시해줍니다. 그리고 함의 행위는 심각한 비난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함은 버릇없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벌거벗은 것)를 보고 나서 이 사실을 자신의 형제들에게 조롱하면서 알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함이 자신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 이외에 그릇된 성행위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암시해주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이 본문은 어떤 행위가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함은 분명히 자신의 아버지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했으며 또한 불명예를 안겨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함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형제들에게 그와 같은 부끄러운 일에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반면에 함의 두 형제들은 노아의 벌거벗은 몸을 보지 않으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뒷걸음쳐 들어가서'와 '얼굴을 돌이키고'(23절)라는 표현이 이 점을 잘 입증해줍니다. 이와 같이, 셈과 아벳의 행위는 함의 행위와 두드러지게 대조 됩니다. 비록 노아가 어리석은 행위를 했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셈과 아벳은 아버지를 공경했습니다(21~23절).
'그의 작은 아들'(24절. 히, '베노 하키톤'- 이 표현은 ESV[영어성경번역]에서 '그의 막내아들'[his youngest son]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어 번역 성경의 번역을 따른다면, 여기서 함을 막내아들로 언급하는 것은 특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함은 셈 다음에 그리고 아벳 앞에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밝혀지지 않은 어떤 이유에 근거해서, 세 아들의 이름이 셈과 함과 아벳의 순서로 언급되는 것은 그들이 태어난 순서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 듯합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25절). 함의 행위에 근거해서,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 앞부분에서 이 결과는 명백하게 예고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문맥에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었지만, 함이 가나안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두 번(18, 22절)이나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25)이 될 것이다. 곧 가나안은 가장 낮고 천한종이 되어, 자신의 형제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이 구절은 잘못 이해되어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정당화하는데 악용되어 왔습니다.
이와 같은 오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잔혹하고 불의하게 마치 상품처럼 취급하는 비참한 결과를 빚어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에 대한 노아의 저주는 그가 종으로 섬기게 될 것이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가나안 족속에게 임하게될 심판을 예고해줍니다. 이 저주는 오직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해당됩니다. (곧 북아프리카 지역에 살게 될 함의 다른 아들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적용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24~27절).
'바벨탑 사건', 이 사건은 여기서 짧게 소개되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사람들이 서로 하나가 되어 또한 모든 자원을 결집시켜서 한 도시를 건설하는 모습을 묘사해 줍니다. 이 행위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의도에 명백하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자율과 독립을 상징합니다. 또한 그 당시 도시를 세우는 사람들은 여호와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확립해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11장1절~9절
11: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라는 표현은 바벨탑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연대기적인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이미 창세기 10장에서 다양한 족속들과 나라들이 다양한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 소개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벨이라는 명칭이 창세기 10:25에 언급된 벨렉('나뉨'을 뜻함)이라고 이름 짓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면 연대기적인 측면에서 바벨탑 사건은 아마도 창세기 10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포함하는 어떤 시기에 일어났을 것입니다(1절).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우리 이름을 내고'(4절), 한마디로 말해서 바벨탑을 세우려는 의도는 하나님 없이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여 인간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 스스로 만족하자는 것입니다. 이 탑의 건축자들은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로 뭉칩니다. 또한 그들의 기술은 오직 자신들의 능력만을 신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들은 야망을 품고,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고 시도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들이 땅에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반대하며 이들은 스스로 성읍과 탑을 세워서 자신들이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드러내십니다. 이 단락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 지역에서 불러내시는 사건의 배경을 제공해 줍니다. 곧 하나님은 장차 아브라함을 온 세상을 위한 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려는 것입니다(2~4절).
풍자적인 어조로 저자는 여호와가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 오셨더라'고 지적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로 똘똘 뭉치고 자만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잠정적인 위험을 꿰뚫어 보십니다(6절).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서로 마구 섞이게 하셔서, 여호와는 그들이 하는 말을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만드십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온 땅으로 흩어지게 하는 효과를 거둡니다(5~8절).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도시는 바벨(히, '바벨')이라고 불립니다. 이 단어의 동사형은 '발랄'입니다. 이 동사는 '혼란스럽게 하다' 또는 '서로 뒤죽박죽이 되게 섞다' 등을 의미합니다. 한편 '바벨'은 구약 성경에서 도시 '바벨론'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도시로서, 바벨론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이 땅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야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9절).
'족장들의 역사', 창세기 이야기는 지금까지 인류 전체에 대한 개관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탄생시키는 오직 한 특별한 가문의 초점이 맞춰집니다. 그 이야기는 사실은 매우 충실하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또한 저자는 등장인물들의 생활을 묘사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창세기 앞부분에서 상당히 많은 세대들을 다루는데 오직 11장의 분량이 소요되었습니다. 반면에 족장들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네 세대에 지나지 않지만 39장이라는 많은 분량이 활용됩니다.
족장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해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거쳐서 이삭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로 이어집니다. 그다음 마지막 부분은 야곱의 아들들 특별히 요셉에게 초점이 맞추어 집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특별한 요소들, 곧 땅과 백성과 축복과 여호와의 부르심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26절~32절
26 데라는 칠십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27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30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32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여기서 데라의 세 아들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이것은 족보의 일반적인 형식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데라 이전까지 각 세대마다 계보에 있는 오직 한 명의 아들의 이름만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 아들 가운데 아브라함의 이름이 제일 먼저 언급됩니다. 그 이유는 이후에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족보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데라의 자손',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는 표제어는 여기서부터 창세기에 또 다른 주요 단원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장들은 데라의 직계 후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또한 이 족보 이야기는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관심의 기울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을 통해서 앞으로 유일한 직계 족보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26절).
데라의 가족에 대한 간략한 소개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와 관련된 세부 사항들이 간략하게 소개됩니다. 곧 롯의 아버지 하란의 죽음(28절). 데라의 가족이 메소포타미아 북부로부터 남부로 이주함(31절), 또한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임신하지 못함(30절) 등입니다(27~32절).
'갈대아인의 우르'는 의심할 여지없이 바벨로니아의 남부에 있는 고대 도시입니다. '갈대아인'이라는 용어는 아마도 주전(BC) 1000~500년 사이에 생겨났을 것입니다. 우르라는 이 도시를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있는 비슷한 이름을 지닌 도시와 구별하기 위해서 '갈대아인'의 우르라고 덧붙여졌을 것입니다. 갈대아인은 주전 1200년 이후로 바빌로니아의 남부 지역에 정착한 칼두 민족을 가리킵니다(28절)
사래의 이름은 나중에 사라로 바뀝니다. 사래가 임신하지 못하는 것은 아브람의 가계를 잇는데 명백한 장애 요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족장들의 아내들이 처음에는 임신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는 모티브가 여러 번 나타납니다(참조 25:21, 29:31). 원래 데라는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 여정을 계획했던 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 데라는 메소포티미아 북부에 있는 하란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 도시는 오늘날의 터키에 있으며 현재는 터키어로 '에스키하란' [옛 하란]이라고 불립니다). (29~32절).
데라의 가족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으로서, 이 절은 데라가 205세에 죽었다고 말합니다. 데라가 70세였을 때, 아브람이 태어났고(26절), 또한 아브람이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75세에 하란을 떠났다면(12:4), 데라는 아브람이 떠나간 지 60년 후에 죽었습니다(70+75+60=205). 그러나 사도행전 7:4에서, 스데반은 아브람이 데라가 죽은 후에 화란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이 연대기적인 문제점을 해결하는 간단한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아마도 (오늘날 사마리아의 모세오경에 기록되어 있는) 다른 본문에 근거하여, 스데반은 그와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그 본문은 데라가 145세에 죽었다고 말합니다(3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