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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엘리멘트와 원자에 대하여
과학의 관점과 오컬티즘의 관점에서
오컬티스트가 “엘리멘트”들과 지질 시대 동안에 살았던 인간들에 대하여 말할 때, 가장 유명한 지질학자들 중에 한 명의 의견에 따르면,[1] 그 시대 기간을 정하는 것이 물질의 성질처럼 불가능하다는 것이 보인다. 그것은 그가 무엇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Man)”과 엘리멘트를 말할 때, 그는 현재 상태의 생리학적 인류학적 형태의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엘리멘탈 원자, 즉 가설적 개념으로 과학자 마인드 속에 현재 존재하듯이 고도로 희석된 상태 속에 있는 물질의 실체가 있는 추상성이나 고대의 복합 엘리멘트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오컬티즘에서 “엘리멘트(Element)” 단어는 모든 경우 “기초(rudiment)”를 의미한다. 우리가 “엘리멘터리 인간”이라고 말할 때, 미완의 미계발된 상태 속에 있는, 그래서 평생 동안 육체 인간 속에 잠재하고 있으며, 어떤 조건 하에서만 가끔 형상을 띠는 그 형태 속에 있는, 시초의 인간의 윤곽을 의미하거나, 혹은 “엘리멘터리”로[2] 더 잘 알려진 물질체보다 오래 살아 남는 그 형태를 의미한다. “엘리멘트”에 관하여, 그 용어가 형이상학적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유한한 인간과 구분하여 시초의 신성한(divine)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최초 미분화된 상태 혹은 라야 상태 속에 있는 초기의 미완의 물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상태는 질료의 영원하고 정상적인 상태이며, 주기적으로만 분화하고 그 분화 동안 비정상적인 상태—다른 말로 하면 감각들의 일시적인 환영이다—속에 있게 된다.
“엘리멘탈 원자들”에 관하여, 오컬티스트는 힌두인이 브라흐마를 “아누(ANU)” 혹은 “원자(Atom)”라고 부를 때, 브라흐마에게 준 그것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 그 이름으로 부른다. 한 명 이상의 화학자가 연금술사들이 나타낸 길을 따라서 엘리멘탈 원자를 찾아 갔으며, 모든 엘리멘탈 원자는 그들의 확고한 믿음에서 (지식이 없을 때) 하나의 혼이다. 그것은 반드시 체가 없는 혼이 아니라, 힌두인이 부르는 하나의 지바(Jiva), 그 속에 잠재하는 지성을 가진 잠재적 활력(POTENTIAL VITALITY)의 센터이며, 그리고 복합 혼의 경우에, 최고 등급부터 가장 낮은 등급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분화들로 구성된 하나의 형태, 어떤 지성적 활동적 존재이다. 우리가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자, 특히 동양의 형이상학자가 필요하다. 그 모든 원자-혼들은 하나(ONE)에서 나온 분화들이고, 신성한 혼—붓디—이 생명을 불어넣는 분리 불가능한 영 혹은 아트만과 갖는 관계와 똑 같은 관계를 갖고 있다.
고대인으로부터 원자 이론을 차용한 근대 물리학은 그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요점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껍질만 얻었고 핵심에 결코 도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물질 원자를 채택하면서 아낙사고라스부터 에피큐로스, 로마의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심지어 갈릴레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철학자들이 “야만적” 물질의 보이지 않는 한 점이 아닌, 어느 정도 생명이 불어넣어진(animated) 원자를 믿었다는 암시적인 사실을 뒤에 남겨 놓았다. 회전운동은 그들 견해로 더 큰 (더 신성하고 순수한) 원자가 다른 원자들을 아래로 몰아내면서 발생되었다; 더 가벼운 원자가 동시에 위로 밀쳐졌다. 이것의 비의적 의미는 각각이 그것의 시작점 혹은 탄생지에 다시 도착할 때까지, 주기 사이의 존재 단계를 통해서 분화된 원소들의 위아래로의 변함없는 주기적인 곡선이다. 그 개념은 형이상학적일 뿐만 아니라 물리적이다. 숨겨진 해석은 원자 형상 속에 있는 “신들(gods)” 혹은 혼을 신성한 체에서 나온 유출물에 의해서 지상에서 만들어진 모든 결과들의 원인들로 받아들인다.[3] 고대 철학자들은 심지어 유대 카발리스트들도 영과 물질을 결코 분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하나(ONE)에서 유래하였고, 하나에서 나오면서 결국에는 그 하나로 돌아가야 한다. “빛이 열로 되고, 불의 입자로 응고된다; 점화되면, 둥글고 부드러운 차갑고 딱딱한 입자로 된다. 그리고 이것을 물질 옷 속에 갇힌 혼으로 부른다.”[4] 입문자들 언어에서 원자(Atom)와 혼(Soul)은 동의어였다. 많은 박식한 유대인들이 믿었던 (멕켄지의 왕립 메이슨 백과사전 참조) 길구렘(Gilgoolem), “소용돌이치는 혼”은 비의적으로 다른 의미가 없다. 박식한 유대 입문자들은 “약속의 땅”을 결코 팔레스타인만으로 의미하지 않았고, 불교도와 브라만이 의미하는 니르바나를 의미하였다—지상에서 그 대체물로 팔레스타인으로 상징되고, 아브라함의 가슴으로 상징된 영원한 하나(Eternal One)의 가슴.[5] 혼-원자가 “일곱 행성의 방”을 지나가는 것은 같은 형이상학적 물리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에테르 속으로 용해된다고 말할 때 물리적 의미이다 (아이시스 언베일드, 1권, 297.) 심지어 원자론자이자 물질주의자인 에피쿠로스도 고대의 지혜를 많이 알았고 믿어서 혼이 (모든 원자 입자처럼 불멸의 영이 그 속에 잠재한 채 간직될 때 불멸의 영과 완전히 구분되는) 가장 부드럽고, 둥글며, 미세한 원자들에서 형성된 미세하고 부드러운 본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고대 가르침을 다소 밀접하게 따른 고대의 입문자들이 “원자”라는 용어로 혼, 수호신(Genius), 천사, 모든 원인의 숨겨진 원에서 최초 태어난 자를 의미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들의 가르침이 이해될 수 있게 된다. 그들 계승자처럼, 그들은 신과 수호신(Genii), 천사 혹은 “악마”가 우주 플레눔(Plenum) 밖이나 독립적이 아닌 그 속에 존재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플레눔은 생명 주기 동안에만 무한하다. 그들은 근대 과학이 이제 가르치는 많은 것을 인정하였고 가르쳤다. 즉, 주기적인 존재 기간 동안을 제외하고 언제나 영원히 동질적인, 그리고 세계가 형성되어 나온, 원초의 “세계-질료” 혹은 우주 질료의 존재, 그것이 분화될 때, 무한한 공간으로의 보편적 분산, 그리고 그것에서 별의 체가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것을 인정하였고 가르쳤다. 그들은 하늘의 회전운동, 지구의 자전, 태양중심 체계 그리고 원자의 소용돌이—사실상 혼과 지성—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원자론자”들은 영적, 대부분 초월적이고 철학적인 범신론자들이다. 그들은 저 괴물 같은 대조되는 후손, 우리 근대 문명 인종의 악몽—한편으로 무생물의 물질, 스스로 안내하는 원자와 다른 한편으로 우주 밖에 있는 신—을 꿈꿔오거나 생각해온 것이 아니다.
고대 입문자들의 가르침에서 모나드가 무엇이고 그것의 기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 유용할 수 있다.
근대 정밀 과학이 청소년기에서 나오기 시작하자마자 위대한 그리고 지금까지 비의적인 금언, 즉 영적인 계, 심령계 혹은 물질이건, 아무것도 무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공간이건 시간 속이건, 현현된 우주에서 모든 원인은 적합한 결과가 있다. 원초의 원인이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고, 원초 원인 자체도 한층 더 높은 원인 때문에 존재한다—궁극의 절대적 원인은 인간이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원인없는 원인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심지어 이것이 어떤 해결책이 아니더라도, 최고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문제에 다가가지 않은 채 남겨놓는 것이 더 낫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형이상학의 섬세함에 아무리 수련이 잘되었을 지라도—이 무너질 것으로 위협하면서 흔들리는 어떤 추상성이다. 진정한 베단틴 학자의 단편들로 존재의 문제를 풀려고 시도하는 유럽 사람에게 이것을 보여줄 수 있다. 그가 샹카라차리아의 혼과 영에 대한 지고의 가르침(비베카 추다마니)을[6] 읽고 연구하게 하라. 그러면 지금 말한 것을 독자가 깨닫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은 인간의 혼이 혼의 숨결—영원한 존재로 창조된다고, 즉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그래서 결코 영원하다고 부를 수 없다)—이라고 배우지만, 오컬트 가르침에서는 “아무것도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변형된다고 말한다. 이 우주에서 아무것도—구체부터 애매하고 빠른 생각에 이르기까지—이미 우주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현현할 수 없다. 주관계에 있는 모든 것이 영원하다. 객관계에 있는 모든 것이 언제나 되어가는 것처럼—왜냐하면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모나드—진실로 “불가분한 것“으로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를 두지 않은 굿 씨가 정의하듯이—가 여기서 붓디 그리고 상위 마나스와 함께 아트마로 표현된다. 이 삼위일체는 하나이자 영원하고, 붓디와 마나스는 모든 조건화된 환영의 삶이 끝날 무렵에 아트마 속으로 흡수된다. 그래서 그 모나드는 현현된 우주 초기 단계부터만 그 순례여행의 과정과 일시적인 매개체의 변화를 통하여 추적될 수 있다. 프랄라야 혹은 두 만반타라 중간 기간에서, 그것은 그 이름을 잃어버린다. 마치 인간의 진정한 자아가 상위 사마디(투리아 상태) 혹은 궁극의 열반의 경우에 브라흠 속으로 합쳐질 때처럼 그 자아를 잃어버리듯이; 샹카라의 말을 인용하면, “제자가 그 성질이 형태도 행위도 없는 진리, 절대적 지복, 원초의 의식을 성취한 후에, 배우가 의상을 벗듯이, 아트마가 입어온 이 환영체를 버릴 때.” 붓디 (아난다마야 코샤)는 절대적 지복을 반사하는 거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구나 그 반영 자체가 무지에서 아직 자유롭지 않고, 프라크리티의 영적 변형인 상태에 영향을 받아서 하나의 결과로 지고의 영도 아니다. 아트마 홀로 하나의 진정한 그리고 영원한 만물의 토대이다—본질이자 절대적 지식—크쉐트라그나.[7] 비의 철학에서 그것은 “하나의 증인(One Witness)”으로 부르고, 데바찬에서 쉬는 동안에는 “카르마의 세 증인”으로 부른다.
아트마 (일곱 번째 원리)는 보편 영과 동일하고 인간은 그 본질에서 그것과 하나이기에, 그러면 순수한 모나드는 무엇인가? 그것은 원초의 “일곱”에서 나와서—그리고 일곱으로 한층 더 발산하는—수 백만 광선으로 발산하는 저 동질적 불꽃이다. 그것은 창조되지 않은 광선(Ray)에서 나온 발산하는 그 불꽃이다—신비이다. 그것은 비의 불교와 북방불교에서 아디-붓다(Chogi dangpoi sangye), 시작도 끝도 없으며, 파라브라흠과 아인-소프와 동일한 미지의 하나가 어둠에서 밝은 광선을 내뿜는다.
이것이 로고스 (첫째) 혹은 바즈라다라, 지고의 붓다 (또한 도르제창으로 부른다)이다. 모든 대신비의 주로서 그는 현현할 수 없고, 현현계로 그의 심장—"다이아몬드(금강) 심장,” 바즈라삿트바 (도르제셈파)—을 보낸다. 이것이 창조의 두 번째 로고스로, 여기서 일곱 (일반대중에는 다섯) 디야니 붓다, 아누파다카로 부르는 “부모가 없는 존재”가 발산하여 나온다. 이 붓다들이 무형의 존재계, 아루파계에서 온 원초의 모나드들이며, 아루파계에서 그 대지성은 (그 계에서만) 일반대중 체계에서 형상도 이름도 없지만, 비의 철학에서 구분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디야니 붓다들은 자신들로부터 디야나로 천상의 대아들—초인 보디삿트바—을 발산 혹은 창조한다. 지상에서 모든 인간 주기가 시작할 즈음에 유한한 인간으로 화신하는 이들은 이따금 그들의 개인 공로 때문에 인류의 아들들 사이에서 보디삿트바로 되고, 그리고 마누쉬 (인간) 붓다로 다시 출현할 수 있다. 이렇게 아누파다카 (혹은 디야니 붓다)는 브라만의 마나스푸트라, “마인드에서 태어난 아들들”과 동일하다—브라흐마나 삼위일체 다른 두 위격(시바, 비쉬누)에서 태어나건, 그래서 리쉬 및 프라자파티와 또한 동일하다. 이렇게 아누기타에서 한 구절이 보인다. 그 구절을 비의적으로 읽으면 다른 비유적 표현이지만 똑 같은 생각과 체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세계에 움직일 수 있는 혹은 움직일 수 없는 실체들이 무엇이건, 그들이 (프랄라야에) 소멸되는 바로 그 첫째이다; 그리고 그 원소(그것에서 보이는 대우주가 형성된다)로부터 발전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런 발전 후에 (실체들을 진화시킨 후에), 모든 원소들이 나온다. 그것이 실체들 사이에서 상위로의 점진적 이행이다. 신, 인간, 간다르바, 피사차스, 아수라, 락샤사, 모두가 행동이나 원인이 아닌, 즉 어떤 물리적 원인이 아닌, 스바바바에 (프라크리티 혹은 가소성 성질) 의해서 창조되었다.”
“이 브라흐마나들 (리쉬 프라자파티?), 세계 창조자들이 여기 지상에서 반복해서 태어난다. 대양에 있는 큰 파도처럼, 그것에서 만들어진 것은 무엇이건 때가 되면 바로 그 다섯 거대한 원소 (인류의 “엘리멘트”로 불리는, 다섯 오히려 일곱 디야니 붓다) 속으로 용해된다. 이 거대한 엘리멘트는 모든 면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조잡한) 엘리멘트 너머에 있다. 그리고 심지어 이 다섯 엘리멘트 (탄마트라)에서[8] 해방된 자는 최고의 목적지로 간다.” “주 프라자파티 (브라흐마)가 마인드만으로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 즉 디야나 혹은 디야니 붓다처럼 신비한 힘과 추상적 명상으로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 그러면 분명히 이 “브라흐마나”는 천상의 디야니 붓다의 보디삿트바와 동일하다. 둘 다 원초의 지성적 “엘리멘트”로서 인간이 될 운명인 모나드들의 창조자 혹은 발산자(emanator)가 된다; 그 후 그들이 스스로 진화하고, 말하자면, 하늘과 땅에서 보디삿트바 혹은 브라흐마나로서 그들 자아들(selves) 속으로 확장하여 마침내 단순한 인간으로 된다—진실로 세계의 창조자들이 여기 지상에서 반복해서 태어난다.” 북방불교 혹은 대중 종교에서, 모든 붓다가 지상에서 선법을 설파하면서 삼계에서 동시에 자신을 현현한다고 가르친다: 무형계에서 디야니 붓다로, 유형계에서 보디삿트바로 그리고 욕망계, 가장 낮은 계에서 인간으로서. 비의적으로 가르침이 다르다. 신성하고, 순수한 아디-붓다 모나드가 보편 붓디 (마하-붓디 혹은 힌두 철학에서 마하트)로, 신성한 지성의 영적, 전지전능한 뿌리, 최고의 애니마 문디 혹은 로고스로 현현한다. 이것이 존재의 주기 “끝까지 언제나 똑 같은, 움직일 수 없고, 증가나 감소도 없는, 영원한 불에서 퍼지는 불기둥처럼” 하강하여, 세속계에서 보편 생명으로 된다. 의식적인 대생명(Life)의 이 계(界)로부터, 일곱 불의 혀처럼, 빛의 아들들(대생명의 로고스들)이 분출한다; 그리고 관조하는 디야니-붓다들; 무형의 그들 아버지의 구체적 형태들—빛의 일곱 아들들, 브라만의 신비 구절이 적용될 수 있는 여전히 그들 자신들: “그대가 ‘그것’—브라흠Brahm)—이다.” 그들의 차야 (그림자), 천상계의 보디삿트바, 초-지상의 보디삿트바의 원형 그리고 지상의 붓다의 원형,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원형을 발산하는 것이 바로 이 디야니-붓다들이다. “빛의 일곱 아들들”은 또한 “별(Stars)”로 불린다.
인간 실체가 태어날 때 영향 주는 별이 하나의 만반타라 속에서 화신 전체 주기에 걸쳐서 영원히 그의 별이 된다고 오컬트 가르침에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천문학상 별이 아니다. 이것은 개성과 관련 있고 연결되며, 전자는 개체성과 관련 있다. 그 별의 “천사” 혹은 디야니-붓다가 안내하는 혹은 주재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즉, 그 자신의 본질의 일부분인 모나드가 그의 매개체를 통한 새로운 모든 재탄생에서, 안내하는 혹은 주재하는 천사가 되고, 인간은 이 사실을 영원히 모를 수 있다. 초인들은 각각 그들의 연장자 “쌍둥이 혼,” 디야니-붓다가 있고, 그것을 “아버지-혼(Father-Soul)” 그리고 “아버지-불(Father-Fire)”로 부르면서, 그것을 한다. 마지막이자 지고의 입문에서만 그 밝은 “이미지(Image)”와 대면할 때 그것을 안다. 불워 리튼이 최고의 영감 상태 중에 하나에서 자노니가 그의 오고에이데스(Augoeides)와 대면하는 것을 묘사할 때 이 신비한 사실을 얼마나 많이 알았을까?
로고스 혹은 현현된 그리고 미현현된 말씀을 힌두인은 이쉬바라, “주”라고 부른다. 오컬티스트는 그것에 다른 이름을 부여한다. 베단틴 학자는 이쉬바라가 자연 속에 있는 최고 의식이라고 말한다. “이 최고 의식은 현현된 로고스의 계—혹은 영계에서—통합하는 단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디얀-초한 의식의 총합이기 때문이다”라고 오컬티스트는 말한다. “오, 현명한 자여, 영이 아닌 것(not-Spirit)이 영이다라는 개념을 제거하라”고 샹카라차리아가 말한다. 아트마는 궁극의 파라브라흠 상태 속에서 영이 아니다(not-Spirit). 이쉬바라 혹은 로고스는 영이다; 혹은 오컬티즘에서 설명하듯이, 그것은 현현된 살아있는 영들의 복합 단일성, 모든 현세와 지상에 있는 모나드의 육아실이자 어버이-근원 그리고 그들의 신성한 반영으로, 로고스에서 발산하여 나와서 각각의 최고 시기에 로고스로 돌아간다. 그런 디얀 초한들의 일곱 가지 주요 그룹이 있고, 그 그룹들은 모든 종교에서 보이고 인식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태초의 일곱 광선들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일곱 가지 주요 그룹과 멘탈, 영적 그리고 육체적 일곱 가지 하부그룹으로 나눠진다고 오컬티즘에서 가르친다.[9] 그러면 하나로서 본 모나드는 (인간과 대우주에서) 일곱 번째 원리 위에 있고, 삼개조로서 그것은 이미 말한 복합 단위의 직접 방사하는 자손이다. 그것은 그 단위가 불려지는 “신”의 숨결(그리고 무에서의 특별한 창조)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개념은 상당히 비철학적이고, 신성을 유한한 속성의 조건으로 끌어내리면서 비하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의 최고 보석”의 번역자가 잘 표현하였듯이, 이쉬바라가 “프랄라야의 가장 심오한 심연과 만반타라의 가장 강렬한 활동 속에 있는 변치 않는” “신”이지만 . . ., 여전히 “그 너머에 ‘아트마’가 있고, 그 천막 둘레는 영원한 마야의 어둠이다.”[10] 같은 어버이-행성 오히려 하나의 똑 같은 행성령(디야니 붓다)의 발산 하에서 태어난 “삼개조들”이 여기 지구에서 여러 생과 재탄생 속에서 자매 혹은 “쌍둥이-혼”이다.[11]
이것은 모든 시대 그리고 모든 나라에 있는 모든 고위 입문자에게 알려져 있다: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예수가 말했다. (요한복음 10장 30절)[12] 그분이 다른 곳에서 말할 때 (요한복음 20장 17절): “나는 나의 아버지이자 너희 아버지께로 올라간다,” 방금 발한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분에게 이끌린 제자들과 추종자 그룹이 그분과 같은 행성 구분 및 영역의 똑 같은 디야니 붓다, “별(Star),” 혹은 “아버지(Father)”에 속했다는 것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다. T. 수바 로우 씨가 “백연화의 목가”에 대한 리뷰에서 다음과 같이 썼을 때 바로 이 오컬트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다: “모든 붓다는 이전 시대에 붓다 상태에 도달한 모든 위대한 초인들을 마지막 입문에서 만난다 . . . 모든 등급의 초인들은 그들을 함께 묶는 영적 교감의 결속을 가지고 있다. . . . . 그런 형제애 상태로 들어가는 가장한 효과적인 방법은 . . . . 자신의 로고스에서 발산하는 영적 빛의 영향력 속으로 자신을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더 지적할 수 있다 . . . . 그런 교감은 혼이 똑 같은 신성한 광선에서 그들 생명과 부양(영양)을 얻는 사람들 사이에만 가능하고, 일곱 가지 구분되는 광선이 ‘중심의 영적 태양’에서 발산하기 때문에, 모든 초인과 디얀 초한이 일곱 그룹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그들 각각은 신성환 대지혜의 일곱 형태 혹은 현현 중에 하나에 의해서 안내되고 통제되며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신지학자,” 1886년 8월.)
그래서 바로 “빛의 일곱 아들들(Seven Sons of Light)”이 그들 행성들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대중이) 종종 그 행성과 동일시한 것이 이다—즉, 토성, 목성, 수성, 화성, 금성 그리고—아마도 고대 종교의[13] 표면 밖에 들어가지 못하는 근대 비평가들에게—태양과 달로, 오컬트 가르침에 따르면, 이들이 하늘의 우리 부모 혹은 통합적으로 “아버지”이다. 그래서 이미 말했듯이, 다신교가 인격화된 유일신보다 사실과 성질상 진실로 더 철학적이고 올바르다. 토성, 목성, 수성 그리고 금성은 알려진 네 개 행성과 이름을 말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어야 하는 다른 셋이 지구와 아스트랄적 그리고 심령적으로 직접 소통하는 천체들이고 도덕적으로 물리적으로 지구의 안내자이자 감시인들이다. 보이는 구체들이 우리 인류에게 외적 내적인 특이성을 제공하고, 그들의 “섭정자(Regents)” 혹은 “교구장(Rectors)”은 우리의 모나드와 영적 능력을 제공한다. 새로운 오해를 만들지 않기 위하여, 세 가지 비밀 구체 (혹은 별-천사)에는 천왕성과 해왕성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고대인들에게 이런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많은 다른 모든 행성처럼 그들은 우리 태양계 속에 있는 다른 구체의 칠중 체인의 신이자 수호자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발견된 두 개 거대한 행성은 다른 행성들처럼 태양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해왕성이 우리 지구보다 900배 그리고 천왕성은 390배 빛을 덜 받으며, 그들의 위성들이 태양계 다른 행성들에서 발견되지 않는 역순으로 회전하는 특이성을 보여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여튼 최근에 그 사실이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우리가 말한 것은 천왕성에 적용된다.
존재의 보편적 질서와 그들 자신의 분류 체계를 혼동하는 사람들은 이 주제를 당연히 매우 엉뚱한 생각으로 간주할 것이다. 하지만 받아들이건 혹은 거부하건, 오컬트 가르침에서 나온 단순한 사실이 경우에 맞게 제시된다. 엄청난 형이상학적 추상성 때문에 들어갈 수 없는 세부사항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양이 태양계 속에 있는 모든 행성과 긴밀한 관계를 갖듯이, 우리의 행성들의 일곱 개만이 우리 구체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만 말한다. 이 행성들 중에 천문학에서 알려진 1차 그리고 2차 행성이라는 가련한 작은 숫자가 진실로 초라하게 보인다.[14] 그러므로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고대 천문학자들—그들 모두가 입문한 초인들이다—이 그 존재를 확실히 알고 있었으며, 크건 작건 많은 수의 행성들이 있다는 것이 도리에 맞다. 그러나 그것들과 신과의 관계가 성스러웠기 때문에, 다르 행성들과 별들의 다양한 이름이 비밀로 남아있어야 했다.
이것 이외에도, 심지어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도 이 지구의 국가들의 운명을 주재하는 “70개 행성”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잘못된 적용을 제외하고, 근대 천문학보다 이 전통에 더 진리가 있다. 70개 행성은 이스라엘 민족의 70장로와 연결된다. (민수기, 11, 16) 왜냐하면 이 행성들의 섭정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체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70이라는 단어는 하위 구분인 7 x 7에 대한 하나의 장난이자 블라인드이다. 각각의 민족과 국가는 이미 말했듯이 직접적인 감시자, 수호자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 행성령을 갖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국가 신, 여호와에게 이스라엘의 후손, 사바오스(Sabaoth) 혹은 새턴 숭배자들에게 맡길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로 그가 선택한 민족의 모나드들은 그 자신의 것이고, 성서는 그것에 대하여 결코 비밀로 하지 않았다. (개신교) 영어 성서의 본문이 70인역 성서 및 불가타 성서 부문과 불일치한다. 이렇게 전자 성서에서 (신명기 32장 8절과 9절),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여호와가 아님) 국가들에게 그들 유산을 나누었을 때 . . . 그는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따라서 그 민족의 경계를 정했다,” 70인역 성서에서 그 본문이 “천사들의 수에 따라서” (행성-천사들)로 읽으며 진리와 사실에 더 일치한다. 게다가 모든 본문이 “주의 (여호와의) 부분이 그의 백성이다; 야곱은 그의 유산의 몫이다”라고 일치한다. (신명기 32장 9절); 이것으로 이 문제가 해결된다. “주” 여호와는 그의 몫으로 이스라엘을 가졌다—다른 국가들은 그 특정 국가 신과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천사 가브리엘”이 이란을 지켜보게 하고 “미카엘-여호와”가 헤브르인을 지키게 하라. 이것들은 다른 국가들의 신이 아니고, 왜 기독교인들이 예수께서 반발하여 최초로 일어선 그 계명에 반대하는 신을 선택하였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모나드와 그 기능(능력)의 행성 기원을 그노시스파에서 가르쳤다. 지구에서 돌아가는 길처럼, 지구로 오는 길에서, 혼 각자는 “무궁한 빛(Boundless Light)”[15] 속에서 그리고 거기로부터 태어나서, 일곱 행성 영역을 지나갔다. 가장 오래된 종교의 순수한 디야니와 데바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로아스터교인에게 아흐리만의 장관들인 일곱 데브(Sevs)로 되었으며, “각각이 그의 행성에 묶여 있는다.” (오리겐의 차트 복사본) 그리고 브라만들에게는 아수라와 리쉬들로 되었다—선하고, 나쁘고 무관심한. 그리고 이집트인 그노시스파 사이에서 그것은 오리겐이 태양의 수호신, 아도나이(Adonai)로, 달의 수호신, 타오(Tao)로, 목성의 수호신, 엘로이(Eloi)로, 화성의 수호신, 사바오(Sabao)로, 금성의 수호신, 오라이(Orai)로, 수성의 수호신, 아스타파이(Astaphai)로 그리고 토성의 수호신, 일다바오스(Ildabaoth) (야호와)로 이름을 준 일곱의 우두머리인 토트(Thoth) 혹은 (헤르메스)였다. 마지막으로 그노시스 믿음에 대한 가장 위대한 근대 권위자인 C.W. 킹이 “저 귀중한 그노시스 기념물”로서 언급한 피스티스-소피아(지식-지혜), 이 오래된 문서가 종파적 목적으로 그것을 왜곡시키지만 그 시대의 고대 믿음을 메아리친다. 구체들의 아스트랄 통치자들이 “그들 눈의 눈물과 그들 고통의 땀”에서 나온 그들 자신의 질료에서 모나드(혼)을 창조하며, 그 모나드들에게 그들의 질료인 신성한 빛을 부여한다. 2권에서 왜 이 “황도대와 구체들의 주들”이 종파적 신학에 의해서 기독교인들의 반역 천사로 변형되었는지 보여줄 것이다. 그들은 그 비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마기의 일곱 데브(Seven Devs)에서 그들을 가져왔다. (II부 “일곱 혼에 대하여” 그리고 “신들, 모나드들 그리고 원자들”에 대한 부분 참조)
언제나처럼 처음부터 신성하고, 순수하며 가장 초기 통일성 속에서 영적이고 그랬던 그것이, 인간의 개념이라는 왜곡된 프리즘에 의한 분화 때문에, 반사하는 인간 자신의 죄 많은 성질처럼 인간적이고 불순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행성 토성이 다른 “신들”의 숭배자들에 의해서 욕을 먹게 되었다. 야샬의 서와 오피스파에서 토성의 아들로서 간직되어 온 후에 여호와로 된 토성 영향 하에서 태어난 민족들—예를 들면 유대인—이 토성-여호와를 제외하고 목성, 수성 혹은 다른 행성 영향 아래서 태어난 민족들과 영원히 싸우고 있었다. 혈통과 예언에도 불구하고, 입문자 예수 (혹은 여호수아)—"역사적” 예수가 복사된 원형—는 순수한 유대인 혈통이 아니며, 이렇게 여호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알았고, 모든 고위 입문자처럼 그가 “영에서 영으로 그리고 혼에서 혼으로” 교감한 자신의 “아버지”를 제외하고 어떤 다른 행성 신을 숭배하지 않았다. 만약 반대자가 바리새인과 논쟁하는 동안에 네 번째 복음서 (8장) 저자가 예수의 입으로 말한 이상한 문장을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이것에 거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안다[16] . . .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 . . . 너희는 너희 아버지의 일을 행한다 . . . 너희는 너희 아버지, 마귀에서 나왔으니 . . .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그 속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에, 진리에 서지 못하였다. 거짓을 말할 때, 제 것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버지가 되기 때문이다” 등등.
바리새인들의 그 “아버지”는 카인, 토성(새턴), 벌칸 등등과 동일하기 때문에 여호와였다—그들이 그 아래서 태어난 행성이고, 그들이 숭배한 신이다. 아무리 잘못 번역되었을지라도, 이 말과 훈계 속에는 오컬트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형제에게 단순히 바보(raca)라고 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지옥불로 위협한 분이 표명하였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22절) 그리고 분명히 그 행성들은 공간 속에서 빛나는 그리고 아무 목적 없이 빛나게 만들어진 구체들일뿐만 아니라 세속인이 지금까지 모르는 다양한 존재들의 영역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간 및 구체들과 신비하고, 끊어지지 않는 강력한 연결관계를 가지고 있다. 모든 천체는 어떤 신의 사원이고, 이 신들 자체가 “영이 아닌” 미지자, 신(God)의 사원들이다. 우주 속에는 세속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대자연은, 에드워드 영이 말하듯이, 신에게 바쳐진 곳이다: -
“이 별들 각각은 종교적인 집이다.” . . .
이렇게 모든 대중 종교가 비의 가르침을 위조한 복사판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물질주의를 지지하는 반작용에 대한 책임이 사제에게 있다. 바로 이교도의 이상의 껍질—비유 목적으로 인격화된—을 숭배하도록 대중에게 강요함으로써 대중 종교가 서구 땅에서 아수라장을 만들었고, 그 속에서 상위 계층은 황금 송아지를 숭배하고, 하위의 무지한 계층은 흙으로 만들어진 발을 가진 우상을 숭배하게 만들었다.
[1] 어느 친구에게 답하면서, 그 저명한 지질학자가 썼다: . . . . “당신의 편지에 대답으로, 현재 그리고 아마도 항상 지질 시대를 몇 년 혹은 심지어 몇 천년으로 한정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할 수만 있습니다.” (왕립협회, 윌리암 펜젤리.)
[2] 플라톤이 “지, 수, 화, 풍으로 구성된” 비이성적 난폭한 엘리멘트를 말할 때, 그는 엘리멘터리 데몬(Elementary Daemon)을 의미한다. (티마이오스 참조.)
[3] 플라톤은 사나운 엘리멘트들의 “유출물(secretions)”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티마이오스)
[4] 발렌티누스의 길굴(Gilgul) 가르침에 대한 비의론.
[5] 확실히 교육받은 유대인은 누구도 이런 비유의 의미를 글자 그대로 믿지 않았다—즉, “외국 땅에 놓인 유대인의 체는 “혼의 소용돌이”라고 부르는 어떤 과정에 의해서 불멸의 입자가 “약속된 땅”의 성스러운 토양에 다시 도달할 때까지 그 속에서 쉴 수 없는 혼의 원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의미가 오컬티스트에게는 분명하다. 그 과정은 일종의 혼의 이주(metempsychosis)가 수반된다고 여겨진다. 심령적 불꽃이 새, 짐승, 물고기 그리고 가장 작은 곤충을 통하여` 이동된다는 것이다. (왕립 메이슨 백과사전 참조, 멕켄지.) 그 비유는 체의 원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들 각각은 모든 원자의 출발점인 마지막 상태—원초의 라야 상태—에 도달하기 전에 모든 형태를 지나가야 한다. 그러나 길구렘 혹은 “혼의 회전”의 태초 의미는 윤회하는 혼 혹은 자아(Ego)의 사상이다. “모든 혼은 길구라(gilgoolah)로, 주기적 혹은 회전하는 과정 속으로 들어간다.” 즉, 그들 모두는 재탄생의 주기적인 길로 나아간다. 어떤 카발리스트들은 이 가르침을 사악한 혼을 위한 일종에 연옥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6] 1886년 모히니 M. 챠터지가 “지혜의 왕관 보석”으로 번역하여 신지학자에 기고. (신지학자, 7월과 8월판 참고)
[7] 성서의 개정판이 출간되어서 구 버전의 눈에 띄는 오역이 수정되었기에, 요한일서 5장에 있는 말을 더 잘 이해할 것이다: “그 영이 진리이기 때문에 증인이 되는 것이 그 영이다.” 이 “세 증인”---지금까지 “아버지, 말씀 그리고 성령”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에 대한 오역된 버전에 나오는 말을 보면, 그 작가(성 요한)의 진정한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고, 이렇게 이런 측면에서 그의 가르침과 샹카라차리아의 가르침과 동일하다는 것을 한층 더 강하게 보여준다. 그 문장이 위대한 베단타 스승의 더 철학적 진술과 아무런 관계나 연결관계가 없다면, “증인이 되는 셋---영과 물과 피---이 있다”는 문장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그분은 (인간 속에 있는 원리) 지바, 비그나나마야 등등 외피에 대하여 말할 때, 그것이 물질 현현에서는 “물과 피” 혹은 생명으로, 아트마 (영) 만이 외피들을 빼고 남는 것이며 그것이 유일한 증인 혹은 통합된 통일성이라고 덧붙인다. 덜 영적이고 덜 철학적인 학파는 오직 삼위일체를 고려하여 “하나”에서 나온 세 증인을 만들었고, 이렇게 하늘보다 지상과 더 연결시킨다.
[8] 탄마트라는 글자 그대로 특질이 없는 어떤 원소의 유형 혹은 기초이다; 그러나 비의적으로 그들은 물리학이 아닌 고대에 제시된 의미에서 진화의 발전 속에서 우주적 원소로 되는 그것의 태초의 본체이다. 그들은 로고스, 로고스의 일곱 발산 혹은 광선들이다.
[9] 그래서 내면에 거주하는 일곱 영의 구체, 일곱 가지 주요 행성이 있고, 그 행성 각각의 영향 하에서 인간 그룹들 중에 하나가 태어나고 그것에 영향받고 안내받는다. (지구와 특별하게 연결된) 행성은 일곱개만 있고, 열 두개 집이 있으며, 그것들 측면의 가능한 조합은 무수히 많다. 각각의 행성이 열 두 가지 측면 속에 있는 다른 행성 각각과 있듯이, 그들 조합은 거의 무한하다; 사실 무수히 많은 다양성을 가진 인류 속에 있는 영적, 심령적, 멘탈적 그리고 육체적 역량만큼이나 무한하다. 그 다양한 각각이 일곱 행성들 중에 어느 하나의 영향 하에서 태어나고 말한 무수한 행성 조합들 중에 어느 하나 아래서 태어난다. 신지학자, 1886년 8월호 참조.
[10] 이제 고대인들이 다른 행성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곱 개 행성만 알았다는 보편적인 오류는 그들의 오컬트 가르침에 대한 일반적인 무지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나중에 발견된 행성들의 존재를 알고 있거나 혹은 알지 못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네 개의 알려진 행성과 비밀의 세 개 위대한 신---별-천사---에게 보낸 존경이 어떤 특별한 이유를 갖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작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감히 말하고, 그것은 이렇다. 그들이 지금 우리가 아는 것처럼 많은 행성에 대하여 알았다면, (그리고 이 질문인 현재 거의 결정될 수 없다) 그들은 여전히 일곱 개 행성만 종교적 숭배와 연결시켰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일곱이 우리 지구와 직접적으로 그리고 특별하게 혹은, 비의 철학을 사용해서, 우리 구체의 칠중 체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윗부분 참조.)
[11] 그것은 기독교 삼위일체—"하나 속에 셋”—개념과 똑 같은 여전히 한층 더 형이상학 개념이다. 즉, 붓디와 마하트의 계, 두 가지 상위계에서 현현하는 보편적 “너머-영(over-Spirit)”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인격이 아닌, 형이상학적 세 가지 위격(hypostases)이다.
[12] 천사-모나드와 인간-모나드에 대한 착각을 일으키는 분화와 동일성이 다음 문장에서 보인다: “나의 아버지는 나보다 더 위대하다” (요한복음 14장 28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열광을 돌려라” (마태복음 5장 26절); “의인들은 그들 아버지 왕국에서 빛날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다) (마태복음 13장 43절) “너희가 신의 성전인 것과, 신의 영이 너희 속에 거주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장 16절); “나는 나의 아버지께 올라간다” 등등.
[13] 이것들이 분별 점성학의 목적을 위하여 받아들여진다. 신학적 구분이 이것과 다르다. 중심 별(star)이자 행성이 아닌 태양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우리 구체의 일곱 행성과 더 오컬트적으로 신비한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태양은 일곱 “아버지”의 위대한 아버지로 간주된다. 이것이 칼데아인과 다른 국가들의 일곱 그리고 여덟 위대한 신들 사이에 보이는 변형을 설명한다. 지구나 (그 위성) 달---다른 이유로 아직은 별이 아니다---은 비의적 목적으로 대체 행성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심지어 태양과 달을 계산에서 빼더라도, 고대인들은 일곱 행성을 알았던 것 같다. 지구와 달을 뺀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더 많은 것이 알려졌는가? 일곱 그리고 더 이상 아니다: 일곱 가지 주요 혹은 1차 행성, 그리고 나머지는 행성이라기보다 소행성이다.
[14] 저 저명한 천문학자인 W. 허쉘 경의 강력한 망원경으로, 우리 지구가 차지하는 센터인 적도면에 있는 하늘 부분을 관측하면서, 15분 안에 116,000개를 봤으며, 이 계산을 “은하수”에 적용할 때, 1800만개의 태양을 발견하였다는 것을 기억할 때, 라플라스가 나폴레옹 1세와 대화에서 신(God)을 하나의 가설로 불었어야 한다는 것에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이다---하여튼 물질 과학한테는 추측하는 것이 완전히 쓸모없는 것이다. 오컬트 형이상학과 초월적 철학만이 이런 방향으로 꿰뚫을 수 없는 베일의 가장 작은 구석을 들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15] C.W. 킹은 그것을 “동양인의 열망의 최고선, 불교도의 열반,” 완전한 평정, 에피쿠로스파의 인돌렌시아(Indolentia)와 동일시하였다. 그 표현에서는 경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크게 틀리지 않다.
[16] 아브라함과 토성은 천문-상징학에서 동일하고, 그는 야훼주의자 유대인들이 선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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