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저 : 耿铁华의 저서 『好太王碑一千五百八十年祭』(2003, 中国社会科学出版社) 중 제1장 제2절, 3절, 4절
번역 : 임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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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好太王碑 건립
391년(東晋 武帝 太元 16年) 好太王이 고구려왕으로 즉위하였다. 好太王은 부친이 국가를 다스려 경제를 발전시킨 것을 기반으로 하여 국내 정치 형세를 더욱 안정시켰고 일련의 정책을 시행하여 경제를 번영시켰고 국력을 증강하였다. 이와 함께 군사역량을 키워 강토를 개척하고 통치구역을 확대할 수 있는 군사행동을 준비하였다.
이 시기 중원과 북방의 정치형세의 변화는 고구려 국가의 안정과 발전에 유리한 사회 환경을 마련하여 주었다.
서진(西晉)이 멸망한 뒤 중원과 북방에 많은 소수민족 할거정권이 나타났는데 역사상 이를 16國時期라고 한다. 4세기 초부터 5세기 중엽까지의 백여 년간 각 정권이 분열할거하고 정권교체가 빈번하였으며,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가 대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동북의 遼東지구에는 잇따라 모용선비(慕容鮮卑)가 건립한 전연(前燕), 후연(後燕)과 북연(北燕)정권이 있었다. 이런 정권의 일부 통치자들은 유민을 招撫하여 사회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주력하였기 때문에 전란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전쟁 규모도 작았다.
4세기 중엽 慕容鮮卑는 고구려와 요동을 쟁탈하기 위하여 몇 차례 교전을 벌였다. 342년(東晋 成帝 咸康 8年) 모용황(慕容皝)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丸都城을 함락하고 돌아왔다. 그 때 고구려의 故國原王은 고구려 북방의 험요한 곳에 의지하여 추격을 막아내었고, 고구려로 하여금 국력을 회복할 기회를 얻게 하였다. 故國壤王과 好太王 통치시기에 이르러 慕容鮮卑는 서쪽과 남쪽으로 세력의 중심을 옮겨 동쪽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 기회를 틈타 고구려 사회는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룩하였다.
왕위를 이은 후로 5년 되는 해 즉 395년 을미(乙未)에 好太王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비려(碑麗)를 정복하여 碑麗의 세 개 부락 육칠백 개 영(營)을 격파하고 우마와 양을 헤아릴 수 없이 탈취하였다.
이어서 백제를 쳐 신라를 구하였으며, 왜구를 몰아내고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好太王의 고구려 대군은 이미 요동, 백두산과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好太王은 그가 통치하는 22년 사이에 고구려를 북방의 봉건적인 군사제국으로 발전하게 하였다. 조상인 여러 왕의 업적을 돌이켜 보고 好太王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없고, 스스로 뜻을 이룩하였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紀功碑를 세워 오래도록 전할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好太王碑의 마지막 부분에 “조왕과 선왕께서는 ‘다만 원근의 옛 백성들만을 골라서 능묘를 지키고 관리하라’고 말씀하셨으나, 나는 이들 옛 백성들이 점차 쇠락해지는 것을 염려한다. 만일 내가 죽고 만년 뒤에 나의 능묘를 편안하게 지킬 사람들은 내가 몸소 돌아다니면서 정복해 온 韓族과 穢族들만을 골라서 관리하는 일을 맡도록 하라(祖王先王 但敎取遠近舊民守墓洒掃 吾慮舊民轉當嬴劣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洒掃)”고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생전에 하교하여 한 말을 새겨놓았다. 분명히 好太王은 고구려의 일대 영주(英主)로서 국가를 다스리고 강토를 개척하는 문물 진흥과 군사적 업적 방면에서 매우 뛰어나게 훌륭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죽은 이후의 뒤처리를 조치하는 방면에서도 독특한 면이 있었다. 즉 그는 오랜 세월 이후에도 자기를 위한 수묘인을 준비하였는데 새로 약탈해온 韓族과 穢族으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도록 하였을 뿐더러 원래 있던 구민으로도 무덤을 지키도록 하였고, 守墓人煙戶들이 잘못되어 누락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겨 세워놓았다.
好太王은 생전에 자기가 죽은 뒤에 비석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비석을 세우는 목적은 위에서 말한 守墓煙戶를 기록하여 잘못됨이 생기지 않게 하려는 데에 있는 이외에 고구려 왕족의 守墓制度를 유지하고 완벽하게 하여 이를 비석에 새겨 당대와 후세에 알리려는 데 있었다.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목적은 자기의 공적을 기록하려는데 있다. 好太王碑의 제1면에 “하늘이 불쌍하게 여기지 아니하시므로, 39세에 승하하여 나라를 버리시었다. 甲寅年 9월 29일 乙酉에 산릉에 옮겨 모시고 이에 碑銘을 세워서 공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려 한다(昊天不弔 卅有九 晏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辭曰······)”라는 기록이 있다. 비문 기록에서 보면 好太王碑의 제1면 제7행부터 시작하여 제3면 제8행 사이의 총 22행 조금 더 되는 문자는 好太王碑가 군사를 거느리고 동정서토(東征西討)한 전적(戰績)을 기술한 것이다.
과거 일부 사람들이 好太王碑를 紀功碑라고 한 것도 일리가 있다. 好太王碑를 묘비라고 한데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묘비가 무덤과 상당히 떨어져 있고 신도(神道)에 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사람들에게 혼란을 초래하였다.
나진옥(羅振玉, 뤄전위이)부터 시작하여 오늘의 후학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好太王碑 서남쪽으로 대략 200m 정도 떨어져있는 대형의 방단계제석실묘(方壇階梯石室墓)를 好太王의 능묘라고 보고 있다. 일본의 저명한 고고학가인 삼상차남(三上次男)과 같은 분들도 이와 같은 관점에 찬동하고 있다.
우리들이 好太王陵이라고 인정하는 근거는 주로 세 가지이다. 첫째, 好太王陵에서 여러 개의 문자가 있는 벽돌이 잇따라 출토되었다. 이런 벽돌은 好太王陵 위의 건물을 위해 구워 만든 벽돌로서 위에 “태왕릉이 산과 같이 안녕하고 산악처럼 견고하기를 바라나이다(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라는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학자와 일본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모두 논문을 써서 연구를 진행한 바가 있다. 둘째, 好太王陵에서 일련의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이 출토되었다. 이런 와당은 대체로 세 가지 화문(花紋)으로서 모두 청회색(靑灰色)이고 구부조육판(高浮彫六瓣) 혹은 팔판연화문(八瓣蓮花紋)이 위주이다. 고구려 연화문와당의 편년 배열에서 위의 세 가지 연화문의 와당 연대는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로서 好太王 시기와 들어맞는다. 셋째, 好太王릉은 方壇階梯石室墓로서 왕릉 유형에 속한다.
무덤의 터는 정방형에 가까우며, 너비의 길이는 66m이고 잔고(殘高)는 14.8m이고 방향은 265도이며 외부는 16층의 돌계단으로 구축하였다. 1990년 가을,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와 집안시박물관(集安市博物館)은 공동으로 好太王陵 墓室에 대하여 정리를 진행하였는데, 墓室 안에서 이미 파괴된 석곽이 발견되었는데 마치 양쪽 경사면을 가진 맞배지붕 형식의 집과 같았다. 따라서 好太王陵이 고구려 왕릉 중에서 꽤나 특수한 유형을 갖춘 方壇階梯石室墓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고 集安 지구의 기타 몇 개의 고구려 왕릉의 구조 형식과 건축 규모와의 비교 연구에 근거하여 그 연대가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로 단정 할 수 있으며, 고구려 제19대 왕인 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능묘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好太王의 능묘임이 이미 확인되고, 또한 능묘의 묘도(墓道)가 거의 정서(正西)로 되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묘비로서의 好太王碑가 오히려 능묘 뒤에 세워졌고 능묘와 200m나 떨어져 있을까?
다년간의 지표조사 결과를 통해 集安市 지역 동쪽 교외의 우산(禹山)과 용산(龍山) 사이는 원래 고구려 왕릉 구역으로 밝혀졌다. 好太王陵은 왕릉 구역의 서남에 있다. 이는 아마도 서남을 높이는 중국 고대의 전통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기 · 곡례상(禮記 · 曲禮上)』에서 “남의 자식 된 자는 방에 있을 때 아랫목에 앉지 않는다(爲人子者 居不主奧)”라고 하였고 이에 정현(鄭玄)은 주를 달아 “부모와 同宮하는 것을 이르는데 그 尊處를 감히 쓰지 못하며, 室中에서 서남 모퉁이를 奧라고 한다(謂與父母同宮者也 不敢當其尊處 室中西南隅 謂之奧)”라고 하였다. 옛 사람들이 사후세계를 살아 있을 때와 같이 보았기에 능원 중의 위치는 묘 주인의 생전 존비와 직접 서로 연결시켰다.
好太王陵과 長壽王陵 사이에는 응당 능원을 지키는 守墓煙戶들의 거주지와 그들이 생활을 유지하는데 사용되는 경작지가 있어야 한다. 묘비로서의 好太王碑는 好太王 일생의 공적을 기록하였을 뿐더러 守墓煙戶의 배당, 수량 및 그 제도도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내용을 법률문서로 반포하였다. 이는 주로 守墓煙戶와 고구려 신민(臣民)에게 보게 하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好太王碑는 守墓煙戶들의 집거구에 세워졌고, 능묘와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이렇게 되어 守墓煙戶들이 거석 위에 새겨지게 되어 함부로 능묘 구역을 떠나지 못하였으며 임의로 매매하지 못하였다. 이는 守墓煙戶를 안정시키고 직업에 충실하도록 하는데 매우 중요하였다. 동시에 고구려 역대 선왕의 守墓煙戶가 누락되는 어려움도 해결하였다.
好太王碑의 건립은 고구려국가의 일대 대사였다. 이 대사는 好太王의 생전에 준비하였으며 好太王 사후에 완성되었다.
好太王은 스스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자신을 기념할 수 있는 비석을 세우려고 결정하였고, 그가 먼저 생각한 것은 분명히 비문 내용과 석재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好太王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비문의 대체적인 내용으로 자기가 東征西討하고, 강토를 확대한 전적 그리고 守墓煙戶의 배당 및 수량과 제도도 포함시킬 것을 제시하였다. 비문 중의 “好太王이 생존했을 때 하교하여 말씀하다(好太王存時敎言)”에서 이를 실증할 수 있다.
문자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 好太王 비문을 쓴 사람의 성명과 족원(族原)을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비문을 쓴 사람의 한자 실력이 상당히 심후하고 중원의 문화와 전적(典籍)에도 상당히 익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惟昔始祖”,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躬率往討”, “遷就山陵”, “要截蕩刺”, “擧國駭服”, “歸王請命” 등 사언절구(四言句式)는 완전히 중원의 문헌인 『시경(詩經)』, 한위(漢魏)의 시부(詩賦), 兩晋의 문장 중에서 자주 보이는 구식(句式)이다. 비문을 씀에 있어서도 당연히 好太王 혹은 長壽王의 재가를 받은 뒤에야 비로소 거석 위에 새길 수 있었을 것이다.
석재의 선택도 매우 특색이 있다. 고구려의 통치 영역에는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았고 각종 암석이 있어 비석 재료를 선택할 여지가 충분하였다. 일반적으로 비석에는 대개 화강암을 사용하는데, 화강암은 석질이 단단하고 색깔이 典雅하여 조각에 적합하다. 하지만 고구려왕은 오히려 과립이 섞인 성형(成形)이 더욱 조악한 각력응회암(角礫凝灰巖)을 선택하였다. 이런 석재는 압록강 중 · 상류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화산 용암이 냉각되고 응고되어 형성된 것이다. 혹시 화산이 폭발하는 장려한 경관이 고구려인들에게 신성한 전설과 인상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이런 화산 용암을 비석으로 선택하였을지도 모른다. 비석을 세우고 문자를 새긴 것은 好太王 사후의 일이다.
412년(東晋 安帝 義熙 8年)에 好太王이 일생을 끝마치고, 好太王의 아들인 거련(巨連)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바로 長壽王이다. 長壽王은 한편으로는 부친의 관을 안치하고장례 치를 일을 준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好太王 생전의 뜻에 따라 왕릉 구역 안에 비석을 세우고 비문을 쓰고 거석 위에 새기도록 하였다. 好太王碑의 현존 문자 상황으로 보면 필자는 비문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고 두 사람이 비석에 글자를 새겨 완성한 것으로 판단한다. 제1면과 제3면 비문의 필체가 균일하고 새긴 흔적이 단정하며 새긴 깊이가 적당하여 숙련된 刻工이 새긴 것임에 틀림없다. 제2면과 제4면의 문자는 필체가 더욱 거칠고 새긴 흔적이 균일하지 못하며 새긴 깊이도 일치하지 않아 제1면과 제3면과 도공(刀功), 품격에 차이가 있어 아마도 그다지 숙련하지 못한 刻工이 새긴 것으로 보인다.
好太王이 제안하고 기획하여 준비하고, 長壽王이 비석을 세우고 새겨 넣었다. 414년(東晋 安帝 義熙 10年 甲寅) 夏曆 9月 29日 乙酉에 好太王의 영구를 산릉에 옮기고 好太王碑의 새김도 전부 완성하였으며, 好太王의 매장 의식과 好太王碑의 낙성 전례를 동시에 진행하였다. 이는 고구려 일대 영주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시대가 끝나고 長壽王이 통치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제3절 好太王碑의 형상과 구조
好太王碑는 굉장히 큰 한 덩어리의 각력응회암(角礫凝灰巖)을 약간 다듬어서 만든 것으로서 方柱形의 비석이다. 높이는 6,39m이고 각 면의 넓이는 서로 같지 않다. 저부(低部) 제1면의 너비가 1.43m, 제2면의 너비가 1.34m, 제3면의 너비가 1.97m, 제4면의 너비가 1.43m이다. 정부(頂部)의 문자가 있는 곳의 제1면 너비가 1.61m, 제2면 너비가 1.00m, 제3면 너비가 1.95m, 제4면 너비가 1.00m이다. 제일 넓은 곳은 제3면 밑으로부터 4.00m되는 곳으로서 너비가 2.00m이다. 제일 좁은 곳은 제2면과 제4면 頂部의 문자가 있는 곳으로서 너비가 1.00m이다. 비석의 제2면과 제4면의 표면은 평평하고, 제1면의 중부는 조금 안으로 들어갔으며, 제3면의 중부는 조금 부드럽게 밖으로 나왔다. 제1면의 頂部가 약간 밖으로 나오고, 제2면과 제4면의 頂部는 약간 안으로 들어갔으며, 제3면의 상부와 하부의 너비는 거의 차이가 없고 중부는 조금 밖으로 나왔다. 전체 외관이 상당히 균형이 잡히고 반듯하며 또 자연적으로 형성된 운치를 지니기도 한다. 조형이 소박하고 장엄하며 큰 기운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비문은 각 면 비석의 상황에 따라 頂部는 0.70m 비워두고 底部는 0.25m 비워두었다. 가운데의 長方形 비면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세로 선을 그려 칸을 만들고 문자를 써 넣은 뒤에 문자와 세로 선을 함께 파서 새겼다. 제1면 문자가 11행이고 각 행마다 41자(字)이며, 제6행의아랫부분은 두 글자가 비어 있다. 그리하여 제1면에 모두 449개의 문자가 있다. 제2면의 문자는 10행이고 각 행마다 41자이며, 제9행과 제10행 윗부분의 원석이 훼손되어 각각 7번째 글자에서 16번째 글자 길이가 되는 곳의 글자들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제2면에 문자가 모두 387개이다. 제3면의 문자는 14행이고 각 행마다 41자이며, 모두 574자이다. 제4면의 문자는 9행이고 제1행의 첫머리 네 글자가 비어 있는 이외에 다른 행의 글자는 각각 41자이며, 모두 365자이다. 비석의 전체 문자는 모두 44행이며 본래 새긴 문자는 1775자이다.
비문은 한자(漢字)로 되어 있으며 네모반듯하여 단정하고 장엄하며 무게가 있어 보인다. 대부분 사람들이 글자체를 예서(隸書)라고 하나, 예서체로부터 해서(楷書)체로 넘어가는 시기로서 그 문자로 말하면 예서가 있을 뿐더러 해서도 있으며 또한 전서(篆書)의 일부 특점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석을 세울 때가 바로 東晋과 西晉이 교체하는 시기로서 문자 서체는 隸書부터 楷書로 변화하는 시기였으며, 그 문자 형태가 네모반듯하고 단정하고 무게가 있었다. 이런 문자 형태는 고구려 국가의 官方文字 서체였을 것이다. 好太王碑 비문 글자의 대소 차이가 많지 않고 일반적으로 편방형(扁方形)이며 길이가 9㎝, 너비가 10㎝ 좌우이다. 일부 글자는 조금 커 長方形을 이루는데 이는 획수가 더욱 번잡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1면 제5행 제36자인 “谷”은 길이가 12.5㎝이고 너비가 11㎝이며, 제4면 제1행 제19자인 “奧”는 길이가 12.5㎝이고 너비가 12㎝이다.
好太王碑의 기좌(基座, 기단부)는 한 덩어리의 불규칙적인 화강암 석판으로서 대체로 오각형을 이룬다. 길이가 3.55m이고 너비가 2.70m이다. 비신의 무게가 37톤이나 되기에 基座는 압력으로 인하여 이미 세 부분으로 갈라졌다. 基座의 중부는 비석의 중압을 받아 양 측의 基座보다 5㎝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好太王碑의 이런 方柱形 조형과 불규칙적인 基座에 대하여 회의를 품었다. 즉 고구려 사람들의 비석은 무엇 때문에 이런 모양일까, 만약 이런 모양이라면 비석이라고 부를 수 없고 응당 기둥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는가? 필자 또한 그런 의혹을 가진 학자 및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했었다. 고구려 사람들의 비석은 왜 이런 모양이 될 수 없었을까? 고구려 사람들의 비석은 어떤 모양이어야 했을까? 비석에 대해서 역사나 고고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물론이고 제대로 체험한 사람은 적고, 그들의 머리 속에 모두 일종의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중국 경내에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내려온 비석이 실재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비석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왕왕 명청(明淸)이래의 석비를 전형으로 하여 머리 부분의 반룡(蟠龍), 扁方形의 비신과 귀부(龜趺)로 구성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비석의 형태는 다종다양하며 비석의 변화발전의 역사도 상당히 오래다.
『예기 · 단궁하(禮記 · 檀弓下)』에 “公室은 豊碑로 하고 三家는 桓楹으로 한다(公室視豊碑 三家視桓楹)”고 하였는데, 주에서는 “豊碑는 대목을 베어 만드는데 형태는 석비와 같으며 관곽 전후 네 모퉁이에 세운다. 가운데를 구멍 뚫어 轆轤로 하고 관곽을 내릴 때 밧줄로 감는다. 천자는 밧줄 여섯에 비가 네 개이며 앞뒤를 각각 무거운 轆轤로 한다. 벤 것이 마치 큰 기둥과 같다. 네 곳에 박은 것을 楹이라 하는데 제후는 네 개 밧줄과 비 두개이며 비는 楹과 같다. 大夫는 밧줄 두개, 비 두개이다. 사는 밧줄 두 개이고 비는 없다(豊碑 斫大木爲之 形如石碑 於槨前後四角樹之 穿中於間爲轆轤 下棺以繂繞 天子六繂四碑 前後各重轆轤也 斫之形如大楹耳 四植謂之桓 諸侯四繂二碑 碑如桓矣 大夫二繂二碑 士二繂無碑)”라고 하였다. 고대에 관을 묘혈에 넣을 때 묘혈 위의 네 모퉁이 혹은 양측에 원목(原木)을 박아 밧줄을 묶고 관이 천천히 내려가게 하였다. 이런 원목을 비(碑)라고 하였다. 고고학자들은 섬서(陝西)의 봉상(鳳翔) 남쪽 교외에서 진공대묘(秦公大墓)를 정리할 때 이런 관곽의 하장에 사용하는 원목을 발견하였으며 그 연대를 대개 춘추시기 말기로 보고 있다. 이는 문헌 기록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였다.
이런 하장에 사용한 原木碑는 최초에 관구와 함께 땅 속에 묻었고 원목 위에 사자의 사적, 생몰연월 등을 써넣었다. 뒤에 와서 이런 원목을 석재로 바꾸어 다듬어서 사용하였으며 아울러 묘도의 입구에 세우고 神道碑 혹은 묘비라고 불렀다. 옛날에 비석의 윗부분에 구멍을 뚫기도 하였는데 바로 관곽을 묘혈에 넣을 때 동아줄을 묶은 흔적이다.
하장할 때 비석을 사용하였을 뿐더러 기타 기능의 비석도 있다.
궁실 앞에 세워 日影을 관찰하는 것도 비라고 불렀다. 『의례 · 빙례(儀禮 · 聘禮)』에는 “上當碑는 남쪽에 둔다(上當碑南陳)”고 주를 달아 “궁에는 반드시 비가 있어 日景을 식별할 수 있고 음양을 알린다(宮必有碑 所以識日景 引陰陽也)”라고 하였다.
종묘의 대문 안에 짐승을 묶는 돌기둥도 비라고 부른다. 『예기 · 제의(禮記 · 祭義)』에 “종묘의 제삿날에 임금은 신령께 바칠 희생을 끌고 태자는 역시 희생을 같이 끈다. 卿大夫는 지위서열에 따라 희생물의 뒤를 따른다. 이미 묘문에 들어서면 희생을 돌기둥에 매어놓는다(祭之日 君牽牲 穆答君 卿大夫序從 旣入廟門 麗于碑)”고 하였고, 주를 달아 “麗는 매는 것과 같다(麗猶係也)”고 하였다.
길 옆에 세워 공덕을 기록한 돌도 역시 비라고 한다. 여기에는 각종 記事를 새기고, 전쟁을 새기고, 제사 등을 새긴 비석이 포함된다. 대체로 문자를 돌 위에 새겨 세우고 이런 것들을 모두 비라고 부른다.
사회역사가 발전하고 등급과 존비가 확립됨에 따라 비의 규격, 형상과 구조는 규범화 되어가기 시작했으며 왕조마다 서로 다른 표준이 있었다.
(일부 생략)
好太王은 자기를 위하여 묘비를 세우려고 준비하였다. 이는 好太王 전에 고구려인이 비석을 세운 선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好太王碑의 비문에서 매우 명백하게 “上王 및 祖王과 先王 이래부터 능묘 위에 비석을 세우지 아니하여서 능묘를 지키는 사람의 煙戶가 잘못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오직 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께서 祖王과 先王을 위하여 능묘 위에 碑銘을 세우고 그 煙戶가 잘못되지 않게 하셨다(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煙戶差錯 唯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墓上立碑 銘其煙戶 不令差錯)”라고 기술하였다. 비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고구려의 역대 왕들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둘째는 好太王이 이들에게 이미 비석을 세워주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옛 서울인 集安에는 好太王 이전에 적어도 열일곱 왕의 능묘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好太王이 先王들을 위하여 비석을 세웠기에 마땅히 集安에 적어도 17개의 비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好太王碑 외에 集安에서 아직 기타 왕의 묘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好太王 이전에 고구려인들은 비석을 세우는 습관이 아직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 경내에 석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244년(曹魏 正始 5年)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은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을 습격하자 고구려를 정복하였다. “수레를 이어서 丸都山에 올라 고구려의 수도를 파괴하였는데,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삼은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돌을 새겨 공을 기록하였으며, 丸都山에 문자를 새기고, 不耐의 城이라 기록하였다.(束馬懸車 以登丸都 屠句麗所都 斬獲首虜以千數·······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라고 하였다. 毌丘儉은 丸都城을 깨뜨린 후 고구려 도성 부근에 기공비(紀功碑)를 세웠다. 하지만 이 비는 아마 고구려인들에 의하여 훼손되어 땅 속에 묻혀져 있었을 것이다. 1904년(淸 光緖 30年)에 이르러 집안현(輯安縣)의 鄕民들이 길을 닦을 때에 縣城 서쪽 17㎞되는 판차령(板岔嶺) 서북 천구산(天溝山) 기슭에서 毌丘儉 紀功碑를 발견하였다. 현재 요녕성박물관(遼寧省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毌丘儉 紀功碑는 편장방형(扁長方形)이며 자홍색 화강암(赭紅色花崗巖)을 다듬어서 만들었다. 발견할 때에 비의 상부만 잔존하였는데 길이가 39㎝, 너비가 30㎝, 두께가 8~8.5㎝이다. 비의 정면에 隸書로 한자를 음각하였다. 모두 7행 48자(이밖에 두 개 글자의 흐릿한 필적이 있다)이다. 아래의 것은 보완을 거친 비문 내용이다.
正始三年高句麗反
督七牙門討句麗五年…無
復遺寇六年五月旋
討寇將軍魏烏丸單于寇婁敦
威寇將軍都亭侯
行裨將軍領玄菟太守王頎
行裨將軍
이 비석은 245년(正始 6年)에 毌丘儉의 대군이 이기고 돌아올 때 세웠다. 이 시기는 고구려 東川王 말년으로서 好太王 즉위와 아직 146년이라는 거리가 있다.
고구려인들은 대개 한․위(漢․魏) 시기의 비석을 분명히 보았을 것이며 비석을 세우는 일을 알았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이 세운 첫 왕릉의 능비인 好太王碑의 조형은 오히려 매우 특색이 있는 자연방주형(自然方柱形)이다.
好太王이 자기의 상조선왕(上祖先王)을 위하여 묘비를 세우려고 결정하였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도 실물을 발견하지 못하였기에 각 비석의 조형을 추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존하는 몇 개의 고구려 碑碣의 조형은 대체로 柱形, 方柱形 혹은 팔릉주형(八棱柱形)이다. 이 점은 好太王碑 조형과 유사하여 사람들에게 흥미를 가져다주고 있다.
JSM1411은 봉토석실쌍실묘(封土石室雙室墓)이다. 산성 아래의 무덤 구역 북측, 丸都山城 동남쪽 깎아지른 절벽에 가까이 있다. 묘의 동북쪽 흙을 쌓는 기단 부분에 석비가 하나 있었으나 지금은 이미 두 墓室門 가운데로 옮겼다. 석비는 화강암으로 다듬었으며 위가 가늘고 아래가 굵은 八棱柱形이고, 頂部는 작은 팔릉추(八棱錐)인데 직경은 0.48m, 높이는 0.14m이다. 석비 전체의 底部 직경은 0.84m이고 총 높이는 1.16m이다. 비신에 글자를 새긴 흔적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JSM1080은 꽤나 큰 封土石室墓로서 우산촌(禹山村) 一組의 길 북쪽에 있다. 1976년에 정리할 당시 도굴하고 나서 메운 흙더미 속에서 거꾸로 놓인 석비를 발견하였다. 석비는 원래 묘의 위에 세워졌으나 뒤에 묘 남측 길옆에 옮겨졌음이 분명하다. 비석의 석질은 화강암이고, 형상은 위가 둥글고 아래가 네모졌다. 하부의 평면은 長方形을 이루고 길이가 0.97m, 너비가 0.73m이다. 이 方形 부분의 높이는 0.27m이다. 方形 윗부분의 네모는 다듬어졌고 꼭대기 부분에 이르러서는 둥글게 안으로 수축되었는데 여덟 줄의 稜線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총 높이는 1.6m이다. 비면은 풍화로 인하여 마모가 심각하였다. 그리하여 탁본을 시도하였지만 어떠한 글자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사회분(四盔墳)은 오회분(五盔墳) 1호와 2호 묘 뒤로 40m되는 곳에 있는 네 개의 꽤나 큰 封土石室墓이다. 集安 기차역의 뒤쪽, 禹山村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네 무덤은 한 줄로 배열되어 五盔墳과 평행선을 이룬다. 규모는 五盔墳보다 조금 작다. 동구(洞溝) 옛 무덤 떼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1995년 8월에 비가 상당히 내렸다. 우리들이 옛 무덤을 보호하고 배수구를 정리하는 과정에 3호 묘의 서남 구석에서 글자가 없는 비석을 발견하였다. 3호 묘의 높이는 4m이고 둘레의 길이가 116m이다. 글자가 없는 비석은 묘의 기단 부분에 닿아 있었고, 비신은 약간 方柱形을 이루었다. 꼭대기 부분은 둥그스름한 사릉추형(四棱錐形)으로 되었다. 총 높이는 1.4m이고, 꼭대기 부분의 높이는 0.45m이며 너비가 0.80m이다. 비신 부분 높이가 0.95m이고 윗부분 너비가 0.80m, 아랫부분 너비가 0.70m이다. 하부에는 작은 方形의 基座가 있다. 앞부분 왼편 아래 모퉁이는 조금 떨어져 나갔고, 반대쪽의 한 모퉁이의 훼손은 조금 더 심했다. 비면에 글자를 새긴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 세 개의 묘비 가운데서 조금 연대가 앞선 것이 JSM1411로서 대개 5세기 중후기이고, 연대가 늦은 것이 JSM1080으로서 6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四盔墳의 연대는 제일 늦어 대략 6세기 중후기이다. 비면에는 모두 문자를 새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아마 비면에 비문을 써놓고 새기지 않았기 때문에 연대가 오래되어 먹의 흔적이 빗물에 모두 씻겨져 없어졌거나 원래부터 글자가 없는 비석일 수도 있다.
JSM1411, JSM1080, 四盔墳은 모두 고구려 귀족의 무덤이며 이 세 개의 묘비는 모두 好太王碑 이후에 세운 것으로서 好太王이 先王과 자기를 위하여 비석을 세우려고 한 결정이 이후의 제왕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귀족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好太王碑와 고구려 귀족 묘비의 조형은 매우 유사하고 모두 남성숭배에서 오는 걸출한 작품들이다. 好太王碑의 석재는 자연에서 취하여 약간 가공을 하여 만든 方柱形이며 가장자리는 둥그스름하여 稜角이 없고 꼭대기 부분도 둥그스름하다. 그리하여 제1면을 바로 보면 하나의 거대한 석주와 같다. 이밖에 八稜形 두 개와 四稜形 석비도 남성숭배의 변형이기도 하다. 이는 고구려 민족의 남성우월 및 원시부계 통치의 영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부 학자들이 이런 남성숭배의 석조형(石造型)을 기둥으로 일컫는 것은 아마도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集安 경내에 또한 두 개의 고구려 석주가 있다. 集安市 구역 동쪽 2.5㎞되는 기차역 남쪽 500m되는 곳은 원래 고구려의 건축유지였다. 이곳에서 八稜形 礎石을 발견하였고 돌담과 담의 기반을 정리한 적이 있었다. 두 개의 석주는 화강암을 다듬어서 方錐形을 만들었으며 꼭대기 부분은 둥그스름하였고 銘文은 보이지 않았다. 동서로 나눠 놓여 있었으며 그 사이는 40m 거리다. 동쪽 석주의 높이는 2.2m이고 폭 너비가 0.34~0.64m이다. 서쪽 석주의 높이는 3.6m이고 폭 너비는 0.4~0.77m이다. 이런 석주는 화표(華表)나 석궐(石闕)과 유사하다. 우리들은 이를 고구려 석주라고 부른다.
1993년 7월 27일, 필자가 한국에서 고찰하는 기간에 하나의 고구려 비석을 보게 되었다. 이 비는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입석촌(中原郡 可金面 龍田里 立石村)에 있다. 학자들이 이 비를 “中原高句麗碑”라고 부른다.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中原高句麗碑의 형태가 好太王碑와 매우 비슷하여 역시 方柱形을 이루고 각 면의 구성 심지어 몇 곳의 결손도 好太王碑와 매우 근사하다는 점이다. 다만 몸체가 작아 총 높이는 1.44m(지상 부분이 1.35m), 너비가 0.55~0.59m, 두께가 0.37~0.38m였다. 실로 好太王碑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好太王碑의 문자 새김 방식과 서로 같았고 역시 네 면에 隸書體의 한자로 비문을 새겼다. 현재 문자에 대한 확인에서 아직 적지 않은 의견 차이가 있다.
이로 보아 고구려인들이 이런 方柱形 조형에 대하여 독특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자가 있는 비석이나 문자가 없는 비석을 막론하고 모두 方柱 혹은 그와 유사한 기둥 모양을 선택하였다. 好太王碑는 이런 석주의 전형으로서 높고 웅장하여 고구려인들의 거대한 기둥이라고 부를 수 있다. 好太王碑의 비문 중에서 “이에 碑銘을 세워서 공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려 한다.”고 하였고 “上王 및 祖王과 先王 이래로 능묘 위에 비석을 세우지 아니하여서 능묘를 지키는 사람의 煙戶가 잘 못 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오직 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께서 祖王과 先王을 위하여 능묘 위에 碑銘을 세우고 그 煙戶가 잘못되지 않게 하셨다”고 하였기 때문에 우리들은 기둥이라고 부르지 않고 好太王墓碑, 好太王碑 혹은 廣開土王陵碑, 廣開土王碑라고 부른다.
제4절 好太王碑의 1천5백80년 경력
1천5백80년은 인류사회로서 말하면 평화, 전쟁, 교류, 융합, 발전, 진보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역사이다. 1천5백80년은 하나의 거대한 묘비에 관해 말하면 매우 긴 침묵 속에 서서 바람에 쏘이고, 비에 젖고, 햇볕에 그을리고, 눈 속에 파묻히고, 서리 맞고, 剝蝕 당해온 자연과 인류로부터의 시련을 겪어내는 역사이다.
이 지역의 인문역사의 특수한 관계로 인하여 好太王碑는 매우 긴 무언의 침묵 속에 서있게 되었고 몇 번 찬란한 시기를 거치기도 하였다.
好太王碑가 세워진 414년부터 시작하여 668년 고구려 멸망할 때까지 好太王의 업적과 고구려의 역사는 이 보기 드문 거석 위에 새겨지게 되었고, 또한 고구려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고구려 도성이 국내성에 있던 평양성에 있던 250여 년 동안 好太王碑는 고구려 왕조의 군신백성의 존경과 숭배를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好太王碑는 고구려 도성의 동북에 위치해 있다. 네 면이 청산녹수여서 환경이 그윽하고 우아하다. 몇 개의 고구려 왕릉의 건축은 웅장하고 위엄이 있다. 천여 가구의 守墓煙戶가 왕릉 구역 내의 好太王碑 주위를 보살피고 청소하였고 고구려 군대가 왕릉 구역을 수호하였다. 그리하여 好太王碑는 매일 고구려 사병과 守墓煙戶들의 부지런한 노동을 대하고 있었다. 매번 고구려인들의 명절이 오면 고구려 왕공 귀족과 군신 백성들이 왕릉 구역에 와서 제전(祭典)을 베풀었기에 이곳은 장엄하고 尊崇한 분위기 속에 처해 있었다.
好太王碑에 대한 고구려인들의 尊崇과 敬慕함에 대한 기록을 문헌에서 찾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들은 다만 현존하는 일부 墓誌와 碑刻 중에서 증거를 찾을 수밖에 없다.
集安 洞溝에 있는 옛 무덤떼 중의 하해방(下解放) 무덤구역에는 염모(冉牟)의 무덤이 있고 墓室 안에는 붓으로 쓴 제기(題記)가 있는데, 이 무덤은 일찍이 도굴을 당했다. 1935년 10월 일본인 이등이팔(伊藤伊八), 재등국태랑(齎藤菊太郞)이 발굴할 때 副葬한 물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내굉(池內宏) · 매원말치(梅原末治)가 기록할 때 “모두루총(牟頭婁塚)”이라고 칭하였다. 1940년 7월 노간(勞干, 로우간, 字는 貞一)이 글을 지어 정식으로 “염모묘(冉牟墓)”라고 칭하였다.
冉牟 무덤은 끝을 자른 方錐形 封土石室墓이다. 둘레의 길이는 70m이고 봉토 높이는 4m이며, 방향은 235도이다. 무덤 안에는 전실과 후실이 있고 용도(甬道)로 이어졌다. 네 벽과 무늬로 장식한 천정에 백회를 칠하였다. 전실의 바른 벽 즉 후실로 통하는 甬道 위의 들보에 붓으로 쓴 진귀한 題字가 있다. 본문은 79행이고 각 행마다 10자이며, 본문 앞에 따로 표제 2행이 있다. 전문은 대개 800여 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연대가 오래고 무덤 안이 축축하여 알아보지 못할 글자가 많다. 현재 식별할 수 있는 글자는 다만 436자 정도이다. 冉牟 무덤의 붓으로 쓴 문자는 隸書體의 한자이고,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내려 썼는데 글자가 깔끔하고 유창하여 한간서법(漢簡書法)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들이 冉牟 무덤의 붓으로 쓴 문자를 해독할 때 好太王碑 문자내용의 영향이 상당하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일부 구절 예를 들어 “昊天不弔”, “奴客在遠”, “韓穢使人”, “冉牟敎遣”과 같은 것으로서 구법(句法)이 서로 같을 뿐만 아니라 단어도 서로 같으며, 어떤 것은 한 글자 차이도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묵서문자 중에서 여러 번 “河伯의 손자이며, 일월의 아들인 鄒牟 성왕이 북부여에서 나셨으니,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천하사방이 알지니(河伯之孫 日月之子 鄒牟聖王 元出北夫餘 天下四方 知此國郡最聖德)”, “河伯之孫 日月之子 所生之地 來自北夫餘”, “河伯之孫 日月之子 聖王······”라고 여러 번 추모왕의 출신을 기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好太王碑의 머리말 “惟昔始祖 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德”이라는 한 단락이 떠오른다. 冉牟 무덤 묵서문자 중의 “河伯之孫 日月之子 鄒牟聖王”이라는 구절은 바로 好太王碑의 비문에서 나온 것이다. 묵서문자 중에서 “城民谷民竝饋前王 恩育如此 逮至國罡上太王聖地 好太聖王緣祖父不忝恩敎 奴客牟頭婁凭冉牟敎遺 令北夫餘守事”라고 好太王의 은덕에 대하여 높이 칭송하였다. 여기에서 好太王을 “國罡上太王” 또는 “好太聖王”이라고 칭한 것은 모두 好太王碑에 따른 것이다. 冉牟와 牟頭婁는 好太王과 長壽王 초년에 생존하던 인물로 보인다. 冉牟가 죽을 때가 대개 長壽王이 즉위하여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인 5세기 초 혹은 늦어도 5세기 중엽을 넘지 않을 것이다.
1979년 4월, 한국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입석촌에서 中原高句麗碑를 발견하였다. 1993년 7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형구(李亨求) 교수가 나를 안내하여 고찰하였다. 비석은 이미 마을길의 다른 한 쪽에 옮기었고 사각찬첨식(四角攢尖式) 정자로 비를 보호하고 있었다. 정원은 그다지 크지 않았고 푸른 풀이 깔려있었으며 깨끗하고 조용하였다. 놀라운 것은 中原高句麗碑의 형태 및 구조가 好太王碑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특히 그 정면은 매우 흡사하였다. 다만 형체가 好太王碑와 견주어 상당히 작았다. 中原高句麗碑도 역시 한 덩어리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서 만든 方柱形 비석으로서 비의 높이가 135㎝이고, 너비가 55~59㎝이고, 두께가 37~38㎝이다. 네 면에 비문을 새기었고 한자는 隸書體이다. 앞면 문자가 10행이고 각 행마다 23자이다. 좌측 면 문자가 7행이고 각 행마다 23자이다. 다른 두 면은 심각하게 剝蝕되어 문자가 분명하지 않다. 뒷면은 9행이고 오른쪽 면은 6행인데 각 행의 문자도 역시 23자로 되었을 것이다. 원래 있던 문자가 32행 730자 안팎이었으나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280개 안팎이다. 비면에서 보면 문자의 서체가 好太王碑와 매우 비슷하고 문자의 크기는 대개 好太王碑 문자의 절반가량 된다. 문자의 너비는 3~5㎝ 사이다. 비문 중의 일부 단어와 구절도 好太王碑와 서로 비슷하다. 예를 들어 “五月中, 高麗大王祖王公□ 新羅寐錦 世世爲願 如兄如弟 上下相守”와 “十二月卄三日 甲寅 東夷寐錦”, “古牟婁城守事”와 같은 것 등등이다.
中原高句麗碑의 형상과 구조, 문자의 품격 그리고 비액(碑額)과 귀부가 없이 세운 양식은 모두 好太王碑와 매우 비슷하다. 好太王碑는 고구려 비제(碑制)의 효시가 되었으며 후세에 대한 영향이 매우 컸다. 中原高句麗碑의 건립자, 撰文者, 조각자 모두가 好太王碑를 익숙하게 알고 있었으며 好太王碑를 尊崇하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금 中原高句麗碑의 연대에 대해서는 논쟁이 되고 있다. 長壽王 시기에 세운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문자왕(文咨王) 시기에 세운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며, 심지어 平原王 시기에 세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여하튼 中原高句麗碑는 好太王碑보다 늦은 시기에 好太王碑의 영향을 받고 세운 것이다.
冉牟 무덤의 문자나 中原高句麗碑의 형상과 구조 및 그 내용을 막론하고 모두 好太王이 죽은 뒤 고구려의 왕공 귀족과 백성들이 好太王에 대한 무한한 숭경과 그리운 감정을 충분히 나타낸 것이다. 好太王의 업적을 담은 好太王碑의 내용은 고구려 국가의 역사에 극히 휘황찬란한 한 페이지로 남겨졌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옛 수도인 集安은 발해국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 치하의 환주(桓州)가 되었다. 遼金 시기에는 동경도(東京道)와 동경로(東京路) 관할에 속하기도 하였다. 연대가 길고 전란이 끊이지 않아 사람들은 점차 고구려의 옛 수도를 망각하게 되었으며, 중원의 사가들도 역시 이미 멀어져 간 왕조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여태까지 사서를 편찬하여 기록한 好太王碑를 보지 못하였기에 더욱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誤記와 오전(誤傳)의 오해 속에서 好太王碑는 적막하고 쓸쓸한 세월을 보냈다.
명대(明代)에 이르러 변강 지역에 전쟁이 점차 적어지고 인가가 줄어들게 되었다. 따라서 압록강 가에 고구려의 옛 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더욱 재미나는 것은 조선의 일부 서적에서 고구려 고도의 옛무덤과 거대한 비석을 대금국황제릉(大金國皇帝陵)과 대금국황제비(大金國皇帝碑)로 잘못 기록하였고 국내성을 大金國의 황성(皇城)으로 본 것이다. 1536년 조선 경변사(警邊使) 심언광(沈彦光)이 압록강 가에 서서 대안의 國內城을 멀리 바라보면서 옛 일을 그리워하는 그윽한 정서가 담긴 시를 썼다. 그 시 중에 “完顔씨 옛 나라 皇城이 있고 황제가 남긴 무덤과 큰 비가 남았노라(完顔故國皇城在 皇帝遺墳巨碣存)”라는 구절이 있다. 1872년에 이르러서도 “皇帝城이 伐登鎭 피안 압록강 가에 있다. 성곽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완연하며 金國의 初都라고 한다(皇帝城 在伐登鎭彼岸鴨綠江邊 城郭今尙宛然 金國初都云)”라고 사람들이 생각하였다. 1천여 년의 풍운세월이 사람들의 역사 관념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기이한 변화를 가져오도록 하였던 것이다.
1877년(淸 光緖 3年) 환인(桓仁)에 현을 설치한 뒤, 서계(書啓)였던 관월산(關月山)이 황량한 풀 더미 속에서 好太王碑를 발견하였다. 이때부터 好太王碑와 고구려 역사는 다시 새롭게 발견되고 인식되었으며, 好太王碑는 재차 조명을 받게 되었다.
好太王碑가 발견되자 사람들이 먼 길에서 찾아와 비문을 감상하였고 탁본을 떠갔다. 학자들은 먼 바다를 넘어와 고찰을 하였으며 탁본을 구입해 갔고 사진을 찍어 남겼다. 간첩들도 몰래 고구려 고성에 잠입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침략의 여론을 조성하였다. 혼란한 시기에 好太王碑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불을 질러 이끼를 없애고, 무분별하게 椎拓하거나 석회를 칠하여 好太王碑는 여러 가지 피해를 입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어 인민들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好太王碑는 고구려 고도의 기타 문화재 및 유적지와 함께 인민정부의 보호와 중시를 받게 되었다. 보호관리기관과 보호조직을 세웠다. 보호표시와 설명게시판을 만들었고 보호구역을 정하였다. 그리고 보호와 연구를 위한 서류기록을 만들어 두었다. 새로 비석의 정자를 고쳐 짓고 정원을 만들었으며, 정원에 나무와 꽃을 심어 아름답게 꾸몄다. 好太王碑에 대해 보호를 위한 조사를 진행했고, 과학적인 실험을 했으며, 화학적 밀폐 보호 처리를 했고, 관찰한 것을 기록하여 종합적 연구를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好太王碑는 진정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찬란한 앞날로 나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