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10-4 로뎀나무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엘리야의 기대와 반대)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1)그가 이 형편을 보고 2)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3)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4)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5)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1)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2)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3)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6)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4)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5)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호렙 산의 엘리야
1)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천사가 나를 어루만졌습니다.
2)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하나님께서 일어나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먹으라 하십니다.
3)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하나님께서 구운 떡과 물을 주셨습니다.
4)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천사가 다시 나를 어루 만졌습니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니다.
-네가 갈길을 가지 못할까 걱정하십니다.
5)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께서 내게 오셨습니다.
1)그가 이 형편을 보고
2)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3)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4)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5)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6)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8)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1)그가 이 형편을 보고
나는 내가 어떤 일을 하고 난 후에 다가올 것을 기대한다.
비단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기대이기도 할 것이다.
일을 하면 반드시 그 댓가에 대한 기대가 있다.
그러나 기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기 있게 되면
실망을 하거나 좌절감을 갖기도 한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예수님을 믿으면
금방이라도 삶이 변화될 것 같은 기대도 있었다.
사실 너무나 곤고한 삶을 살아왔기에 또 그 기대도 컸었다.
그러나 눈에 보일 정도의 변화는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점점 생활이 나아지고는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갈증을 느끼고 있는 만큼의 해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목회를 시작하면서 우리 교단의 전통이 그러한 것처럼 오직 부흥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기적들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러했기에 기도와 은사에 집중을 했다. 오직 더딘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의 부재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성령의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고대하면서 그 성령의 역사를 위해서 부단히 기도하고 기도했다. 흔히들 말했다. 죽은 자만 살아나면 그 때부터 교회의 부흥은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 기적이 내게 또 우리 교회에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렇게 소망하고 기도한 탓인지 내게도 많은 기적의 체험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초신자 때부터 일어난 기적이기도 하지만 더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령치유훈련을 받고 난 다음에는 더 많은 기적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암과 중풍병, 관절염, 디스크 별의 별 병들이 손을 얹으면 치유되는 일이 일어났다. 심지어는 제초제를 마시고 자살한 사람도 살아나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 일이 있을 때 마다 나는 많은 기대를 했다. 그 기대는 이정도가 되면 이제 “교회부흥은 일어날 것이다.‘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도, 한 달 두 달, 일 년 이년이 지나도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에 허탈감이 밀려왔다. 치유되는 기적의 소문이 멀리 퍼지면 퍼질수록 교회부흥은 가까워질 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로인해 부흥된 교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 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더 조용했고, 성도들도 감격도 없었고, 놀람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 일어난 듯, 무감각한 것만 같았다.
그때 느낀 느낌이 지금 엘리야의 느낌이 아닌가 싶다. 엘리야는 갈멜산 제단에 하늘에서 떨어진 불로 제단을 태우고, 갈멜산 꼭대기에서 기도함으로 큰 비를 내리는 큰 기적을 행했다. 그 기적을 행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아합 앞에서 달려가는 엘리야의 마음은 한 가지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이 정도이면 이세벨도 하나님을 알게 되겠지, 이정도이면 내가 주의 종이며,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을 알겠지, 이제 이스라엘도 무엇인가 변할 것이다.”라는 기대를 했을 것만 같다.
그런데 그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오히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엘리야는 기대가 무너지는 허탈감을 느꼈다.
이렇게 기근을 겪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큰 기적을 체험하고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마치 불신자들을 전도하면서 수없이 겪는 그런 질문처럼
또 변하지 않은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그 기대가 꺾이는 목회자처럼 말이다.
또한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엘리야도 기대했을 것 같다.
나는 성령의 역사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면 부흥이 오고.
성도가 변화되어서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변할 것이다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병이 치료되고 불치병이 치료가 되어도 그 때 당시의 감격은 있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오히려 그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절망을 했다.
그리고 다시는 치유사역을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을 하기도 했다.
그런 후에 나는 다른 것이 부족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많이 읽으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많은 시간을 성경과 씨름했어도 변화는 없었다. 또 최근에 내 설교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생각하고 설교를 잘해보려고 노력을 했다. 노력한 결과 그래도 이전보다 조금은 나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설교를 통해 아내도 많은 은혜를 받고, 나 자신도 많은 변화를 겪었고, 은혜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내가 기대했던 것에 대한 결과는 다가오지 않았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 것 같은데 그 역시 미동하지 않았다. 교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느낀 허탈감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이정도면 되겠지 하면서 열심히 달려봤다. 그리고 또 많는 반향도 일어났다. 그러나 잠시 일어나는 파장일 뿐 마치 부동의 바위처럼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 형편을 보니 그만 허탈과 탈진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새벽기도를 하면서 성도가 모두 다 가고 나면 강단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마치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처럼 말이다. 그리고 엘리야가 말했던 것처럼 말을 하곤 했다.
엘리야가 갈멜산의 사건 후에 이 형편을 보고 광야로 가서 로뎀 나무 아래 누워버린 것을 이해할 만하다. 그 정도면 변할 줄 알았는데 세상은 변화되지 않았다.
변화되지 않은 악, 변화되지 않은 이세벨에 좌절하고 스스로 탈진해버린 것이다.
이세벨이 변할 것이란 기대, 그것이 무리한 기대였을까?
이세벨은 변하지 않은 존재일까?
나는 이세벨과 같은 존재와 함게 오랜 시간을 지냈다.
내가 용서하고, 항상 내가 져주고, 내가 손해보면 변할 줄 알았다.
그래서 항상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내가 죽어주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대로 였다. 세월이 지난 후에 그 기대가 얼마나 어리석었나하는 것을 자책하기도 했다. 내가 사람을 변하게 만들려는 것자체가 교만이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그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은 후에 한가지 방법을 배웠다. 내가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기대를 접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되는 사람을 붙잡고 기대하고, 또 기대하다보니 내가 엘리야처럼 기대가 무너지는 탈진을 겪게 되었다.
지금 나는 이 형편을 보고 탈진해버린 엘리야처럼 많은 탈진을 겪었다. 이 후에 나는 한 가지 나를 보호하는 길을 발견했다.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도, 또 기적이 일어나도 그 후에 기대를 접는다. 그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만 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시라면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이 내가 할 일 이었다.
내가 사람을 변화시킨다거나 내가 기대를 가지면 항상 내게 탈진이 다가왔기에 이제는 기대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찬양)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잠잠히 너를 사랑 하시며
0--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잠잠히 사랑하신다.
다만 그 사랑을 바라보고 형편을 보지않으려고 오늘도 애를 써본다.
2) 천사가 나를 어루만졌습니다.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때
부드럽게 다가와 내 손 잡아 주시면 나에게 말씀 하시네....
너는 내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어린시절 어머니께 떼를 쓰던 일이 생각이 난다. 물론 자주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우리 집이 먹을 것이 없고 형제들이 많은 탓에 항상 먹을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단식투쟁이라는 것을 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데 문득 내 눈시울이 적셔지는 일이 기억이 난다.
언제인가. 내가 연탄까스를 많이 먹어서 몇시간을 깨어나지 못한 적이 있다. 연탄까시를 먹은 탓에 며칠을 먹지 못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아가 내 새끼야 먹어야지 그래야 산다.“하면서 동치미를 먹이고 미음을 입술에 넣어주셨다. 평소에 그렇게도 그리던 사랑스런 말로 내 힘을 북돋우어 주셨다.
내가 먹지 못하겠다고 고개를 돌려도 다시 또 다시 먹여 주셨다.
평소에 느끼지 못한 사랑이 내가 정말 고통을 당할 때 보여주셨다.
문득 천사가 엘리야에게 두 번째 다가와서 음식을 먹으라가 하고
“네가 기진하여 네 갈 길을 다가지 못할까 걱정이 된다.”는
말이 내 가슴을 적셔온다.
마치 오늘 하나님은 자애스러운 어머니로 다가 오신듯하다.
실망을 하고 기운을 잃고 드러누운 엘리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달래주신다.
엘리야를 만지는 손은
마치 아픈 아이의 배를 쓸어내리는 어머니의 손과 같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길이었다.
또 그 손길은 머리 아픈 아이의 머리를 만져주는 그 정성어린 어머니의 손길과 같다.
하나님은 오늘 어머니의 손으로 엘리야를 만지시고 계신 것 같다.
그렇게 만지시는 하나님은 낮고 촉촉한 목소리로
“아가! 먹고 기운차려야지”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로 말씀해 주신 듯이 들려온다.
그는 나를 만졌네(낮은데로 임하소서 중에서 )
그는 나를 만졌네 내 영혼을
나는 그를 느꼈네 그 숨결을
주의 사랑 있으면 나 외롭지 않아
주의 사랑 안에서 나 두렵지 않네
그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고
나는 그를 떠나지 아니하리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만져주셨다.
세상에 버림받은 문둥병자를 만져주시던 그 손길로 나를 만지셨다.
지쳐 쓰러진 나를 얼굴을 쓸어주셨다.
내가 어린시절 행복한 가정을 찾아, 참 부모를 찾아 헤메다가 허기와 굶주림에 썩은 음식을 먹고
사경을 헤멜 때 내가 다가온 어떤 여인이 있었다.
20대 중반정도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익산 역에서 쓰러져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때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그녀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더러운 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내 배를 훓어주면서
“얘 애 정신차려 정신차려 아- 큰일났네”하는 탄식소리가 가물가물 들려왔다.
그리고 어디론가 급히 달려갔고 얼마 후에 그녀는 많은 것을 사와서 내입에 넣어주고 극진히 간호를 했다. 다행히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그녀는 나를 데리고 익산에서 군산 도선장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천사처럼 나를 떠나갔다.
내가 주를 만난 후 그 자비롭고 사랑스러운 손길을 듣고 그 음성들을 들었다.
그 사랑의 음성이 오랜 고통과 탈진에 쓰러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나를 여전히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않으셨다.
다만 내가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는 나를 언제나 돌보시고 계셨다.
위험의 순간에도 돌보셨고 너무나 지쳐서 독한 마음을 먹고
세상을 끝을 내려고 했을 때에도 나와 함께 하셨다.
내가 느끼지 못하고 내가 보지 못한 것은
다만 내가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시선을 돌려 주를 보고 내 손을 주께로 내 밀때 주님은 나를 만지셨다.
그 누구도 만지지 않았던 나를 만지셨다.
그리고 자애로운 목소리,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하고 나를 만지셨다.
지금 낮은데로 임하소서에서 흐르는 찬양속에서
그 음성이 내 영혼을 적시고
그의 손길이 내 얼굴을 보드랍게 만지고 지나간다.
그 음성이 내 가슴을 파고 들고
그 손길은 내 손을 잡아 일이킨다.
1)그가 이 형편을 보고, 2
아무리 아무리 생각을 해주고, 기도해주고, 헌신해주어도 안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어찌보면 나 혼자만의 연민의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린시절부터 셋째형과 각별하게 지냈다.
형과 나는 내 것, 네 것이 없이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 혼자 그런 생각에 빼져서 산것 것 같다.
어린시절부터 나는 형의 보호자 아닌 보호자의 역할을 했다.
나의 월세보증금을 사업 한다고 가져가서 그 흔한 방한 칸 없는 사람이 되어서
거리에서 잠을 잘 때도 원망하지 않았다.
북태평양이라는 지옥에서 건져온 돈을 한입에 삼킬 때도 원망하지 않았다.
나는 형이 잘되는 일이라면 온몸을 바쳐 헌신했다.
그러나 형은 그렇지 않은듯했다.
들리는 후문에 그는 나를 바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형의 공장에서 적은 보수를 받으면서 밤낮으로 수고한 적되 있다.
오직 형이 잘되는 길이라면 나의 이익정도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번은 형이 노름에 빠져서 그것을 제지하는 중에
형에 내게 말하지 말아야할 막말을 쏟아 붙고 막말을 해댔다.
내가 선을 베풀었지만 형은 언제나 나에게 악으로 갚았다.
너무나 억울한 나머지 철야예배에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하소연을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내 등을 어루만지셨다.
그리고 “내가 새 곡식과 포도주를 주어 다시는 이방에게 수욕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위로해주셨다.
그 후로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대로 은혜와 위로를 더하셨다.
그 후로도 나는 형이 구원을 받게 하기위해서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러나 형은 나에게 하는 일은 술을 먹고 배를 씹어서 내 온몸을 목욕을 시켰다.
또 내가 사는 집 앞에서 신학생에게 모욕을 준다고
술에 취하여 발가벗고 난동도 부렸다.
형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리 애쓰고 애를 써도 돌아온 것은 모멸이었고
형은 변할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나를 이용하고 멸시하고 바보취급하면서
“저 녀석은 내가 이렇게 해도 되는 놈이야”라고 하면서
아무렇게 자기 기분풀이 대상이 되었다.
그때 나는 탈진을 했다.
차마 형제이기에 저주의 말도 못하면서
아무 말도 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찾았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 내 등을 안으시고 위로하셨다.
그리고 마치 이삭을 위하여 그 형제들을 멀리 옮기고,
야곱을 위하여 형 에서를 멀리 옮기신 것처럼
형이 나와 쉽게 만 날 수 없는 강원도 먼 벽지로 형을 옮겨 놓으셨다.
내가 형으로 인하여 탈진할 때 하나님은 이렇게 나를 위로하셨다.
그것은 마치 엘리야가 탈진해서 누워있을 때
자애로운 손길로 만지시면서 떡과 물로 위로하신 것과 같았다.
둘째 형의 이야기다.
내가 처음 논산에 개척을 했을 때에 형은 우리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물론 예수님을 영접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
그 당시 형은 간에 많은 질병을 가지고 있었다.
눈에는 황달이 와서 노랗게 변했고 한주먹의 양의 약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형수는 작은 분식점으로 가정을 이끌어갔고
형은 난과 수석에 몰두하면서 가정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형이 우리 교회에 출석하면서부터 그의 삶의 바뀌기 시작했다.
금요철야에서 안수기도로 간의 질병이 모두 치유되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하라고 지시해주셨다.
그것은 고물상을 하는 일이었다.
그 후 형님은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축복을 받게 되었다.
형에 대해서 내가 공로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지만
형의 가족은 나의 오랜 기도와 전도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나의 안수로 병이 치료되고 예언과 지도로 새로운 사업의 문을 열었으며,
어려운 순간 순간마다 기도로 형의 가족을 세워왔다.
실로 그 가정이 지금의 축복을 누리는 것에 대해서는
나 자신을 빼고는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전적인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것을 오늘 엘리야에 비유하자면 땅에 비를 주신 하나님의 축복과 같았고,
이스라엘을 위해 갈멜산에서 기도한 엘리야와 같다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형수를 통해 돌아온 것은 오직 배척과 질시였다.
자신이 잘되고 나서는 내가 기도해 주려고 사업장에 들르면 무엇이나
가져가려고 오지 않았나하고 경계하고 드러내놓고 가난한 목사, 가난한 교회라고 멸시를 했다.
그래도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받은 은혜를 생각해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수는 언제나 그런 태도를 보였다.
그런 모멸을 받고 나서 하나님 앞에 엎드린 마음이 로뎀나무 아래 누운 엘리야의 마음과 같았다.
“주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정말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럽습니까?
차라리 주의 종이 아니었더라면 그래도 말이라도 해볼텐데 그러지도 못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형님 댁의 그런 행동들이 나의 사역에 탈진을 가져왔다.
그뿐인가 신유사역을 오래해오면서 겪는 일들이 나에게 탈진하게 하였다.
죽은 자를 살리면 그래도 얼마정도는 변할 줄 알았다.
그러나 죽음에서 일어난 은혜도 얼마 가지 못했다.
각종 병을 고쳐도 그 은혜가 얼마가지 않았다.
그럴 때 사역에 대한 회의와 탈진이 다가왔다.
그럴 때는 그저 강단에 엎드려 있으면
그냥 그대로 강단밑으로 들어가 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오셨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내 등을 토닥거리시면서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니. 내가 너에게 있으면 되지 않겠니?”라는
작고 세미한 소리. 부드러운 그 음성으로 내게 들려주셨다.
그것은 내 귓가에 뜨거운 입김을 쏟아내면서 들려주시는 위로였고 평안이었다.
오늘 엘리야에게 두 번씩에 찾아와서
‘네가 기진하여 네 길을 가지 못할까 염려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물과 떡을 주신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나를 찾아오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가 낙심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꾸짖지 않으시고
위로 하시는 하나님이셨다.
비록 엘리야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 형편을 보고
광야로 도망하여 탈진하여 쓰러졌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꾸짖지 않으셨다.
제단에 불을 주신 하나님, 이스라엘에 기근도 주고, 큰 비를 주시기도 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을 잊고
고작 한 여인의 위협에 도망치는 나약함을 꾸짖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의 연약함을 보시고 엘리야에게 연민을 가지셨다.
마치 자그만 일에 낙심하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방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엘리야에게 다가 가신 것이다.
“에그 이 녀석아 그거 아무 일도 아니야, 얼른 먹고 기운차려야지 엄마가 있잖아”하는
그 모습으로 엘리야에게 다가 가신 것이다.
첫댓글 잘보고 은혜받고 도전 받고 나갑니다.
감사합니다.
^^; ^^; 승리하세요
주께서 성령타임 시간에 만나주시고 열어주시기를 소망하며 다녀갑니다.
귀한 섬김과 나눔에 감사합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쉬며 먹고 마시고 힘을 얻어 갑니다.
엘리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