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의 높은 곳에서 책을 읽고 있는 환공에게
회당 낮은 곳에서 수례를 고치고 있던 윤편이
망치와 끌을 밀쳐두고 올라가서 환공에게 물었다.
공께서는 지금 무슨 말들을 읽고 계십니까 라고 하자
성인의 말이다 라고 했다.
그러자 윤편이 그 성인은 살아있습니까 라고 묻자
환공은 그는 죽었다 라고 대답했다.
윤편은 반문했다. 그렇다면 공께서 지금 일고 있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가 아닙니까? 환공이 말했다.
수레바퀴나 깎는 장인인 네가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을
논의하려고 하는가?
만일 네가 자신의 행위를 해명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너는 죽을 것이다.
운편이 말했다. 저는 그것을 제 자신의 일에 근거해서 본 겁니다
바퀴를 깎을 때 끌질이 느리면 끌은 나무에서 미끄러져
제대로 작업이 이루어 지지 않고
빠르면 끌은 나무에 박혀 빠지지 않게 됩니다.
끌질이 너무 느려서도 않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는 것을
저는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할 수 있을 뿐
입이 있어도 말로 옮길 수 없습니다.
끌질 하는 동안 몇몇 방법이 있겠지만
저는 제 아들에게 전달 할 수 없고
제 아들도 또한 제게서 배울 수 없읍니다.
이것이 나이 칠십이 되도록
제가 바퀴를 깎고 있는 이유입니다.
옛사람은 자신이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공께서 지금 옛사람들의 찌꺼기를
읽고 있는 것 아닙니까?(천도)
이 이야기를 인생의 궁극적 정답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이며, 온전한 참음 무엇인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에 답을 찾아 철학은
분별의 쳇바퀴을 끝임없이 돌리므로
문화와 문명을 발전과 발달시키는 철학서 등을 만들고
불교는 싯달타 등이 부처나 불법이 정답이라고
불경 등을 만들고, 유교는 공자 맹자 등이
도덕천의 인이 정답이라고 사서삼경 등을 만들고,
도교는 노자 등이 유무상생의 도가 정답이라고
도덕경 등을 만들고, 기독교는 모세와 바울 등이
야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정답이라고
성경을 만든 것처럼
장자를 대단한 선생이나 정답으로
이미 결론을 내어놓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말들로 분별하여
장자를 도구로 스스로 대단한 선생이 되는
무례한 오지랖을 펼치고 있지만
이 이야기의 본질은 성인의 삶이나, 환공의 삶이나,
운편의 삶에 대한 유불리를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
분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언어도단 불립문자처럼
온전한 이심전심은 불가능함으로
결국 각자의 인생으로 동일한 사람도 없고
각자의 행복이기에 온전한 공유가 절대 불가능
할뿐 아니라 온전한 전달이 절대 불가능하여
한 종교에도 수많은 교회나 절이 있는 것처럼
비슷한듯 다른 수많은 종파로 나누어 지듯이
어떤 삶도 죽고 나면 찌꺼기가 되는
각자 개인의 삶이기에 모두가 인정하는
온전한 삶의 분별이나 정답이 없다란
넉두리로 바로 알 때
참이 없고 모든 것이 헛된 이 세상에서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 원인이나 이유나
결과 등의 유불리를 분별하여 연합이나 야합하여
상생이나 공생하려고 정답처럼 철학서나 종교의
경전 등을 만들어 스스로를 속이는 삶이나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수행하는 삶은
바른 정답의 삶이 아닐 뿐 아니라 우리란 이념을
진짜 나로 착각하여 내가 원하는 너로 변화시켜
정복하여 다스리려는 감탄고토의 연기인
무례한 오지랖이 된다
따라서 온전한 지혜는 무분별 지혜이고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기쁨과 평안과 자유가
온전한 조화를 이룬 행복을 소유하여 누리는
사랑으로 혼자서는 불가능하고 또 너와 내가 아닌
스스로 거듭난 온전한 우리만 가능한 것으로
그 실상은 부모나 보호자가 없이 가능한 어린 아이의 삶이나
야훼 하나님 없이 가능한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의 삶으로
결국 스스로 만든 나만의 에덴동산에서만 온전한 행복을
소유하여 누리는 무주상의 삶인 진짜 사랑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