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태조 이성계의 가족들
태조 이성계는 74세를 향수하는 동안 3명의 아내에게서 13명의 자식을 얻었는데, 첫째부인
신의왕후 한씨에게서 장남 방우를 비롯한 6형제와 두 딸을, 신덕왕후 강씨에게서 방번, 방석
형제와 딸 하나를, 그리고 다른 후궁에게서 두 딸을 두었다.
제1대 태조 가계도
조선의 제1대 왕인 태조는, 1335년에 태어나 1408년에 세상을 떴다. 재위 기간은 1392년
7월부터 1398년 9월까지로 6년 2개월간이다. 아래에 태조의 가계도를 약술한다.
태조의 고조부 목조(안사)는 효공왕후 사이에서 증조부 익조(행리)를 낳았고, 증조부 익조는
정숙왕후 사이에서 조부 도조(춘)를 낳았다. 조부는 경순왕후 사이에서 아버지 환조(자춘)를
낳았는데, 태조는 환조와 의혜왕후 사이에서 태어나 조선을 건국하고 제1대 왕이 되었다.
태조는 부인 3명에게서 8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신의왕후 한씨에게서 진안대군(방우), 조선의 제2대 왕인 정종(영안대군, 방과),
익안대군(방의), 회안대군(방간), 제3대 왕인 태종(정안대군, 방원), 덕안대군(방연), 경신공주,
경선공주 등 6남 2녀를 두었으며, 신덕왕후 강씨에게서는 무안대군(방번), 의안대군(방석),
경순공주 등 2남 1녀를 두었다. 그리고 다른 후궁에게서 의령옹주, 숙신옹주 등 2녀를 두었다.
신의왕후 한씨
태조의 첫째부인이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본관은 안변이며 증영문하부사 한경의
딸이다. 그녀는 이성계가 아직 벼슬을 하지 못하던 때에 영흥으로 시집와서,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에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씨 소생으로는 방우, 방과(정종),
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 등의 6남과 경신, 경선 등 2녀가 있었다.
조선이 개국된 다음날 한씨의 시호는 절비로, 능호는 제릉으로 추존되었고, 1398년 정종이
즉위한 후에는 신의왕후로 추존되었다.
신의왕후의 제릉은 현재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있다. 능을 개성에 둔 것은 그녀가 조선 개국
이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신덕왕후 강씨
태조의 둘째 부인이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본관은 곡성이며 판삼사사 강윤성의 딸이다.
그녀는 신의왕후 한씨와는 달리 권문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조의 집권 거사에도 참여했을 뿐
아니라 조선 개국 이후에도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태조는 그녀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기까지 한다.
강씨 소생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에게 살해당한 방번, 방석 형제와 경순공주가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뒤에 강씨는 현비로 책봉되었으며, 1396년 사망 후에 신호는
신덕왕후,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성계가 죽은 후에 태종은 몇 차례에 걸쳐 이장을
단행했으며, 그녀에 대한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서모에게 행하는 기신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2백년 뒤인 현종 때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강씨는 다시 종묘에 배향되고 왕비의
기신제도 복구되었다. 송시열이 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 이념을 강조하면서 강씨가 이성계에
의해 정비로 책봉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릉이 왕비의 능으로 조성된 점을 일깨웠던 까닭이다.
신덕왕후 강씨가 묻혀 있는 정릉은 현재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묘역을 조성할 때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정릉동 자리로 정해지게
되었다. 능이 정릉으로 이장된 것은 이성계가 죽은 후 태종 9년 때의 일이다. 태종이 강씨의
무덤을 여러 차례 이장한 것은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한 분풀이였다. 태종은
능을 옮긴 뒤에도 정자각을 헐고, 십이지신상 같은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드는 등 강씨에
대한 노골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그 때문에 정릉은 현종 때 복구될 때까지 2백여 년 동안
주인 없는 무덤으로 버려져 있어야 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은 모두 8명으로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이 6명,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
2명이다. 이들 8명의 형제들은 조선 개국 이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여 노년의 이성계를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한씨 소생의 형제들이
단합하여 강씨 소생의 왕자들을 참살한 '제1차 왕자의 난'은 조선 개국의 역사를 피로
얼룩지게 만든 첫번째 사건이었다. 아래에 이들 왕자들의 삶을 약술하여 그들이 조선에 끼친
영향을 되짚어 본다(8명의 형제 중 방과와 방원은 각각 정종과 태종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그리고 덕안대군 방연에 대해서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으므로 나머지 5명에 대해서만
약술한다).
진안대군 방우(1354-1393)
방우는 1354년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장자로 태어났으며, 찬성사 지윤의 딸과 결혼했다.
일찍이 관직에 나가 예의판서를 역임하였다. 창왕 즉위년인 1388년에는 밀직부사로 밀직사
강회백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어 창왕의 친조를 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환했다.
방우는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 8월에 진안군으로 책봉되고 함경도 고원의 전답을 녹전으로
받았다. 그러나 지병으로 이듬해 4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사망함에 따라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조선 제2대 왕은 둘째인
방과가 이어받게 된다.
익안대군 방의(?-1404)
방의는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이 개국되자 익안군에 봉해졌으며,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가담하여 방원을 보좌한 공로로 정사공신 1등이 되었다.
정종 즉위 이후 종친과 훈신들이 군사들을 나누어 관장했을 때, 그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1400년, 아우 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이를 개탄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간접적으로 방원을 지원하였다. 그는 태종이 즉위하자 1400년에 익안대군으로
진봉되었으며, 1404년 병으로 죽었다.
방의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야심이 적고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싸움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 것으로 전하고 있다.
회안대군 방간(1364-1421)
방간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판서찬성사 민선의 딸과 결혼했으며,
이후 2명의 아내를 더 두었다.
그는 조선이 개국되자 회안군에 봉해졌으며,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회안공이 되었다. 또한 정종이 즉위하자 풍해도 서북면의 병사를 관장했으며, 1400년
박포와 함께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원과 대립하였다. 방원의 군대에 패배해 생포된
이후로 죽을 때까지 유배지를 전전했다('제2차 왕자의 난'은 태종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그는 왕권에 대한 야심이 대단했고, 성격도 괄괄한 편이었다. 그래서 박포에게서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자 앞뒤 가리지 않고 병사를 일으켜 개경으로 진군했다.
난을 일으켰음에도 방간은 태종과 세종의 배려로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58세를 일기로
홍주(지금의 충청남도 홍성)에서 죽었다.
무안대군 방번(1381-1398)
방번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으로 태조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귀의군 왕우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아버지 이성계의 지원에 힘입어 어린 나이에 고려왕조로부터 고공좌랑의 직위를
제수받았으며, 조선 개국 후에는 무안군에 책봉되어 희흥친군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393년에는
13세의 나이로 좌군절제사로 제수되었으며, 한때 태조와 강비의 추천으로 세자로 내정되기도
했으나 조준, 정도전 등이 '성격이 광망하고 경솔하다'고 반대해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
1398년 방원이 주동이 된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석과 함께 피살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훗날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이 그의 후사로 정해졌으나 광평대군이 요절함에
따라 방번의 후사는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의안대군 방석(1382-1398)
방석은 방번의 연년생 아우로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다. 현빈 유씨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폐출되자 춘추관대제학 심효생의 딸과 재혼했다.
조선 개국 원년에 세자 책봉 문제가 일어났을 때 배극렴 등이 정안군 방원의 세자 책봉을
주장했으나, 이때 왕비 한씨는 이미 죽고 없었기에 계비 강씨의 의향에 따라 태조는 무안군
방번을 세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 개국 공신들의 반대로 방번의
세자 책봉은 무산되었고,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불과 11세밖에 안 된 나이로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된 방석은 어머니 강씨의 보살핌과 정도전,
남은 등 개국 공신들의 지원에 힘입어 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강씨가 죽고
태조마저 병석에 눕게 되자 그의 배후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 틈을 타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난을 일으켰고, 이 난의 성공으로 세력을 잡은 방원은 방석을 유배시키고 이어서
방번과 함께 살해했다. 이때 방석의 나이 17세였다.
후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 방석의 후사를 이었으나, 금성대군이 세조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고 32세의 나이에 처형되자 후사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