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중퇴하고 방위 복무를 마친 연학은 특별히 할 것이 없었다.
볼트, 너트를 생산하는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선배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연학은 거절했다. 어차피 한번밖에 못살 인생이라면 삶의 테두리에서 서성거릴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 서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끌려 다니는 인생이 아닌 자신이 개척하는 삶에 뜨거운 열정을 솟아 붓고 싶었다.
연학이 가장 자신 있는 것, 그리고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것,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도 좋다고 생각되는 것은 역시 향기사업이었다. 연학은 비록, 가진 돈은 없었지만 향기에 관해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연학은 우선 향수사업의 전망과 자신이 향수사업에 어떤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투자자와 어떤 방법으로 같이 회사를 운영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세부적인 사항을 인터넷에 올렸다. 사업계획을 인터넷에 올린 다음날 서울에서 바로 연락이 왔다.
“인터넷에 올린 내용 잘 봤습니다. 투자를 하고 싶은데 서울에 한번 올라와서 더 상세히 다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내일 당장 서울로 올라가겠습니다.”
연학은 서울이 아니라 외국이라도 투자자가 부르면 달려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음날, 연학은 서울로 향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울김포공항에는 투자자 김중걸씨가 마중 나와있었다. 김중걸씨는 40대 후반으로 작은 키에 이마가 좀 벗겨졌지만 대체로 좋은 인상이었다. 연학은 김중걸씨의 안내로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작은 사무실로 들어섰다.
10평정도 되어 보이는 사무실 정면에는 책상과 컴퓨터가 놓여져 있고 창문 맞은편 벽에는 빛 바랜 소파가 놓여져 있었다. 연학은 김중걸씨에게 다시 한번 향수사업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데, 의외로 김중걸씨는 향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있었다.
“천연학씨, 설명은 감명 깊게 잘 들었습니다. 우리 손잡고 본격적으로 향수사업을 한번 시작해 봅시다. 우선 이 사무실은 연학씨가 쓰도록 하세요.”
김중걸씨는 향수사업을 벌써부터 시작하려고 했던 사람처럼 연학이가 울산으로 내려와 짐을 챙겨 서울로 올라오는 사이에 인수 할 공장까지 알아두었다.
“천연학씨. 아-, 이제부터는 천사장이라고 불러야겠네. 나는 그냥 김고문이라고 불러요. 천사장, 내가 부도난 향수회사를 하나 인수할까 하는데 같이 가봅시다.”
연학은 김중걸씨가 모든 일을 알아서 척척 진행시키자 한편으로는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일이 빨리 진척되는 것 같아 기뻤다.
연학은 우선 부도난 공장 생산라인을 수리하고 향수 만드는데 필요한 첨단정밀기계를 부분적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부도난 향수회사의 직원들도 간부들 외에는 대부분 출근시키고 영업사원들에게 판매교육도 시켰다. 모든 일이 너무나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직원이라고 해봐야 20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 직원이 활기에 차 있었고 부도회사라는 이미지도 불과 두 달만에 완전히 벗어 버렸다. 부도난 회사를 인수하여 ‘(주)향’이라는 향수전문회사로 성장시킨 것은 순전히 연학의 공이었다. 연학은 회사를 위해서라면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다. 사무실에 침낭을 갖다 놓고 잠을 자고 낮에는 생산라인 직원과 같이 일하고 저녁에는 영업직원들의 판매현황을 체크하는 등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연학은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1년을 지내는 동안 회사도 몰라보게 발전했다. 직원수도 배로 늘어 40명이 되었고 매출도 몇 배나 늘어났다.
연학은 그 날도 영업직원들의 판매현황을 점검하고 사무실로 들어서는 길이었다. 사무실에는 평소에 얼굴 한번 내밀지 않던 김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사장, 요즘 고생이 많은 것 같은데 몸을 생각해서 좀 쉬어가면서 하지 그래.”
김고문은 연학을 보자 무척 반가운 듯 쇼파에서 벌떡 일어나 반겼다. 처음과는 달리 회사 일에는 전혀 신경을 안 쓰다가 동생이나 친척들을 회사에 취직시키려고 할 때 한번씩 나타나는 김고문이라서 이번엔 무슨 일인가 싶어 연학은 무척 긴장이 되었다. 그런 연학에게 김고문은 불쑥 흰색 봉투를 내밀었다.
“김고문님, 이 봉투는 뭡니까?”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매출이 늘기는 다 틀린 것 같으니까, 이번 기회에 정리해고 시킬 직원들 명단일세.”
연학은 정말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아니, 어려울 때일수록 함께 이겨 나갈 생각을 해야지. 정리해고라니요? 그리고, 아무리 경기가 안 좋다지만 우리회사 매출은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엔 굳이 직원들을 정리해고 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천사장, 자넨 사업을 너무 몰라. 1년 안에 정리해고를 하게 되면 퇴직금을 주지 않아서 좋고 또 남아 있는 직원들은 정리해고 안 되려고 더 열심히 일 할 테니까 좋고. 이거야말로 일거양득 아닌가.”
연학은 너무나 화가 나서 봉투를 거칠게 찢어 김고문이 적어 놓은 정리해고 명단을 보았다.
“신창섭, 김종철, 최종곤...... 아니, 이 사람들은 우리회사의 실질적인 창단멤버들 아닙니까?”
정리해고 명단에는 회사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초창기 멤버들만 포함되어 있었고 최근에 김고문이 추천한 사람은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저는 이 정리해고 명단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회사 사정이 안 좋아서 한 명이라도 정리해고 시킬 것 같으면 최근에 입사한 사람부터 경기가 좋아질 때까지 집에서 쉬게 해야지 어떻게 생사고락을 같이 한 사원을 먼저 쉬게 합니까? 그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될 일입니다.”
의외로 강한 연학의 반대에 부딪친 김고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임마, 정리해고 시키라면 시킬 것이지 뭐가 그리 말이 많아. 정리해고 시키기 싫으면 너도 보따리 싸 가지고 울산으로 내려가면 될 것 아냐.”
김고문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삿대질하며 폭언을 퍼붓자 연학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나도 당신 같은 사람하고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으니까 애초에 제게 주기로 한 지분이나 빨리 내 놓으십시오.”
“지분 좋아하시네. 너한테 줄 지분이 어디 있어. 젊은 나이에 사장 시켜 줬으면 고마운 줄이나 알아야지. 빨리 밀린 사무실임대료나 내고 꺼져, 임마.”
연학은 김고문의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김고문이 모든 서류를 연학이 도저히 발뺌을 할 수 없도록 조작해 놓은 것이다. 연학은 억울했지만 어렵게 돈을 마련하여 1년 동안 밀렸다는 사무실임대료 1200만원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김고문에게 건넸다. 김고문은 큰 선심이나 쓰는 것처럼 밀린 이자를 안 받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했다. 지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울산으로 내려오는 연학의 가슴엔 피눈물이 쌓였다.
연학은 울산에서 친구들이 회사를 그만두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것이 (주)향기나라의 시작이었다. 서울에서의 1년은 연학에게는 값진 경험이었다. 그 경험을 토대로 막힘 없이 향기사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김고문이 정리해고한 사람들도 불러와서 (주)향기나라에 합류시켰다. 연학은 조금이라도 이익이 발생하면 신상품개발에 돈을 투자했다. 그러던 중 연학은 서울 김고문의 (주)향이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디지털 향 발현 시스템’은 (주)향기나라가 회사의 운명을 걸고 개발중인 향기사업의 마지막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향 발현 시스템은 냄새 성분을 확인하는 인코딩, 향기를 뿜어내는 디코딩 등 두 기능으로 이뤄진다. 인코딩은 꽃향기 등 필요한 향기를 화학분석기로 분석, 후각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부분을 뽑아내 데이터로 만드는 과정이다. 향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색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흡사하다. 컬러프린터가 빨강. 파랑. 검정 등 3원색의 혼합을 통해 갖가지 색을 만들어내듯 향은 ‘향원소’로 불리는 ‘원향’의 배합으로 가능하다.
이 시스템은 프린터의 카트리지처럼 ‘향 카트리지’가 있어서 진한 커피 향에서부터 갓 구운 고소한 빵 고유의 향까지 TV시청자가 집에서 편안히 그 향을 맡을 수 있게 한 획기적 장치이다. ‘디지털 향 발현 시스템’ 개발이 50%정도 진척되었을 때 시스템설계도의 도난사건이 발생했고 뒤이어 서울 김고문도 ‘디지털 향 발현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연학은 누구에 의해 설계도가 도난 된 것인지 짐작이 갔다.
그 후로 연학은 설계도 도난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연구진척사항을 일체 비밀로 하고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
운명의 날.
연학은 서울에서 투자 설명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투자설명회가 끝난 뒤에 ‘디지털 향 발현 시스템’의 특허신청을 할 계획이라는 말을 김고문 쪽으로 흘렸다. 특허신청을 하려면 ‘디지털 향 발현 시스템’의 설계도가 꼭 필요한 김고문으로서는 어떤 식이던 연학에게 접근 할 수밖에 없었다.
“천사장, 투자설명회가 정말 대단하더군요. 축하합니다.”
하이에나 같은 인물, 보기만 해도 피가 역류할 것 같은 김중걸 그가 사업설명회장에 연학의 예상대로 억지 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뭘 요. 다 김고문님의 뼈아픈 가르침 덕분이죠.”
연학의 의미 있는 한마디에 김중걸은 움찔하면서도 눈빛은 연학이 들고 있는 서류 가방을 재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오늘 천사장님께 옛일을 사과도 할 겸 제가 한잔 사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김고문님이 한잔 사 주신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연학은 기다렸다는 듯 술 제의에 응했다. ‘디지털 향 발현 시스템’의 설계도는 연학이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본인이 직접 서류가방 속에 넣어 다닌다는 사실을 김고문은 이미 들어 잘 알고 있는 눈치라 연학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김고문의 최고급 승용차 다이너스티를 타고 어딘지 모를 서울의 밤거리를 질주해 가면서도 연학은 의도적으로 서류가방을 가슴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차창 밖을 보니 차는 ‘천호동’이란 표지판을 지나서 한참을 더 달려 상당히 괜찮아 보이는 나이트클럽 주차장으로 쑥 들어갔다. 주차장을 걸어나와 김고문이 안내한 곳은 나이트클럽이 아니라 ‘야화’란 간판이 붙어있는 옆 건물 지하 술집이었다.
괜찮은 룸싸롱이라고 소개한 김고문의 말과는 달리 내부 시설은 그리 훌륭한 편이 아니었다. 미로와 같이 좁은 통로와 다닥다닥 붙어있는 룸이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연학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김고문을 따라갔다.
“어머, 김사장님 오셨어요.”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미모의 여자가 장미룸을 나서다가 김고문을 보자 반가운지 얼굴이 환해졌다.
“박마담은 볼수록 더 예쁘지는 것 같은걸.”
“김사장님도 참. 오늘따라 왜 이러셔.”
박마담은 아마도 장미 룸에서 김고문과 연학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박마담의 안내를 받으며 장미 룸으로 들어갔다.
“이봐 박마담. 천사장님은 귀한 손님이니까 어서 이화를 데려와.”
“김사장님은 참 유별나다니까. 다른 애들도 많은데 유독 이화 밖에 안 찾으니.”
이화가 누군 지는 몰라도 아마 김고문은 ‘야화’에만 오면 이화란 여자와 술자리를 같이하는 모양이다. 박마담이 이화를 데리러 나간 사이 연학은 김고문이 따라준 술잔을 단숨에 마셨다. 뱃속을 찌르르 울리는 알코올의 기운을 느끼며 연학은 문득 (주)향기나라 직원들과 두부김치에 막걸리를 마시던 생각이 났다. ‘과연 지금의 최고급 양주가 그때의 그 막걸리 맛보다 나을 수 있을까?’ 연학은 피식 웃었다.
“김사장님, 오래 기다리셨죠? 저 이화예요.”
낯설지 않은 이 목소리. 연학은 순간 백만 볼트의 전기가 심장을 관통하는 듯한 느낌에 너무 놀라 소리나는 쪽으로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최선희, 그녀였다.
가슴속에 치유할 수 없는 아픔을 남겨 주고 떠난 그녀. 그녀도 연학을 본 순간 너무 놀라 할말을 잃었다. 시간이 일시 정지하는 듯 했다.
산은 연학에게 안식처와도 같은 곳이다.
태어날 때부터 공장굴뚝에서 내뿜는 시커먼 연기와 매캐한 매연냄새를 맡고 자라온 연학으로서는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산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연학은 오염된 자신의 폐부를 수정처럼 맑은 계곡의 물로 깨끗이 씻어 버리고 이름 모를 들풀과 솔 향기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산으로 향할 때 연학의 마음은 항상 흥분으로 들떠 있다. 오늘의 목적지는 천황산이다. 밀양 얼음골 뒤쪽으로 이어진 등산로는 바위투성이라 오르기가 매우 힘들다. 누구의 간섭 없이 혼자 오르는 등반이라 연학은 힘들면 쉬어가고 가끔 길옆 들풀의 향을 음미하기도 했다. 산을 오르며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반가운 사람들이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힘내십시오.”
처음 대하는 사람들과 어디서 이런 정겨운 인사를 나눌 수 있겠는가? 산을 오른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서로간에 따뜻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수고가 많습니다.”
귀를 시원하게 해주는 맑은 목소리에 발 디딜 곳을 찾던 연학은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만큼이나 상큼한 이미지의 아가씨가 눈에 들어오자 연학은 숨이 막혔다.
“벌써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시는 모양이죠?”
그녀는 대답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정상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합니까?”
연학은 그녀와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었다.
“한 20분쯤 더 올라가면 되니까 힘내세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조심스레 산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연학은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다가 서둘러 산을 올랐다. 20분만 더 올라가면 산 정상이라니까 서두르면 내려오는 길에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분만 올라가면 있다는 산 정상이 30분이 지나고 40분이 다 되어가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그 깜직한 아가씨에게 속은 것이다.
연학은 그후 1시간이 지나서야 천황산 정상에 올라 설 수 있었다. 산 정상에서 쉬는 것도 잠시, 곧바로 산을 내려온 연학은 이미 그녀는 가고 없을 것 같았지만 혹시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았다. 연학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그녀는 계곡 물가에 앉아 있었다. 물 속에 노니는 작은 물고기를 보고 있는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유난히 길어 보였다.
“아니, 어떻게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겁니까?.”
연학의 말에 고개를 들던 그녀는 뽀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
“어머 미안해요. 전 다만 힘내시라고 한 거짓말이지 다른 나쁜 뜻은 없었어요.”
“그래도 거짓말을 한 건 사실이니까 그 벌로 자판기 커피라도 한잔 사세요.”
그렇게 해서 연학은 그녀와 알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최선희. 나이는 20세. 올해 울산전문학교 전자과에 입학했다한다. 연학은 뛸 듯이 기뻤다. 자신도 다름 아닌 울산전문학교 기계과에 입학했으니 앞으로 교내에서 자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가슴 벅찼다.
그 후로 선희의 곁에는 항상 연학이가 있었다. 연학은 살아오면서 그렇게 행복해 본 기억이 없었다. 항상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한 기분. 선희와 함께 있으면 심장 박동수가 몇 배나 빨라지고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지구온난화 탓인지 조금 빨리 찾아온 더위 앞에 시원한 맥주생각이 간절하던 연학에게 선희로부터 맥주한잔하자는 연락이 왔다.
“웬일이야. 대낮부터 맥주를 다 마시자 하고?”
여름방학이 시작된 터라 창 밖으로 보이는 학교앞 거리는 한산했다.
“나 거짓말 잘 못한다는 거 알지?”
연학은 난데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 선희를 쳐다보는데 선희는 심각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난 내 감정에 솔직하고 싶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데?”
선희의 딱 부러지는 성격을 잘 아는지라 불길한 예감이 든 연학은 마시던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나-, 너보다 더 좋은 느낌의 남자가 생겼어.”
선희의 그 한마디에 연학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린 듯 할말을 잊어 버렸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선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을 나갈 때까지 연학은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선희를 사귄 지 한달 조금 지났을까. 연학은 선희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웬 남자가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선희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야, 선희.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날 두고 다른 놈과 사귀다니, 너 이럴 수 있어.”
상대방 남자는 몹시 화가 난 듯 씩씩거리는데 그런 남자의 손을 냉정히 뿌리치며 선희는 또박또박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난 이제 내 감정에 솔직하고 싶어. 넌 이제 싫어 졌고 여기 이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됐으니까 어서 가 줘.”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던 그 남자는 선희의 말에 갑자기 어떤 큰 충격을 받은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뒤돌아서 갔다. 그때 그 남자의 심정이 지금 연학의 심정과 같았을까? 연학은 여름방학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학교에 찾아가 자퇴해 버렸다.
선희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선희를 잊기 위해 향수와 향기에 대해 미친 듯이 공부하고 있을 때 친구로부터 선희가 새로 사귄 남자와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희와의 추억이 기억 저편으로 아련해질 무렵 연학은 나라의 부름을 받아 방위(단기사병)가 되었다.
국방부에서는 오래 전에 방위라는 이름 대신 단기사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하달했지만 연학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연학을 방위라고 불렀다. 벌써부터 언론에는 단기사병이 공익근무요원으로 바뀐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지만 제대 날짜를 몇 달 남겨 두지 않은 연학으로서는 아무런 혜택도 없이 방위소리만 들었다.
고참이 되어 연학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점점 무게가 실릴 즈음 신병 한 명이 부대로 전입해 왔다. 연학은 신병의 얼굴을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아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디서 봤을까? 학교 동창은 아닌 것 같은데.
“야, 너 마지막 출신학교가 어디야?”
연학의 묻는 말에 신병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병 김윤구. 저의 마지막 출신학교는 울산남고입니다.”
연학은 ‘김윤구’라는 이름을 듣자 아득한 기억 속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대체 선희의 애인이 어떻게 생겼을까’하며 몹시 궁금해하던 연학은 결국 선희와 애인이 만나는 장면을 몰래 훔쳐봤다. 그때 연학의 눈에 비친 선희의 애인은 늘씬한 키에 잘생긴 얼굴. 그가 바로 김윤구였다.
연학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야, 너희들. 나 윤구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내무반 밖에 나가 있어.”
고참의 표정이 너무 심각한지라 신병군기 잡을 거라고 들떠있던 연학의 후임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밖으로 나갔다.
“너 가족사항 숨기지 말고 다 말해.”
연학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이병 김윤구, 말씀드리겠습니다.”
“야-, 나 귀 안 먹었으니까 악쓰지 말고 조용히 말해.”
연학은 윤구를 옆에 앉게 한 뒤 담배를 권했다.
“저의 가족사항은 매우 복잡합니다. 제게는 아버지와 새 엄마가 있고 이제 백일이 지난 이복동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집나간 아내와 돌이 다되어 가는 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
연학은 집을 나갔다는 선희의 소식에 가슴이 저며오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집을 나가다니. 선희가 이제 돌도 안된 아기를 두고 집을 나갔다는 말인가?’
“니 마누라는 아주 나쁜 여자구만. 짐승도 자기 새끼는 버리지 않는다던데 어떻게 어린 자식을 두고 집을 나갈 수가 있어.”
연학의 씁쓸한 말에 윤구의 눈에 언뜻 눈물이 비쳤다.
“그 사람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다 환경이 그렇게 만든 거지요.”
윤구는 괴로운 듯 자신의 과거와 지금까지의 일을 숨김없이 연학에게 털어놓았다.
윤구의 아버지는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바다의 사나이 마도로스였다. 윤구는 그런 아버지가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한번 배를 타면 몇 개월 동안 거친 바다를 항해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윤구의 아버지는 바다처럼 넓은 가슴에 윤구를 안고 윤구의 뺨에 수염투성이인 얼굴을 마구 비벼댔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윤구는 자기도 커서 어른이 되면 아버지처럼 큰배를 타고 전 세계를 누비는 마도로스가 되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땐 정말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윤구의 어머니에게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간 사이 어머니가 춤바람이 난 것이다. 처음엔 취미생활로 춤만 배우겠다고 시작했는데 점점 술도 마시게 되고 밤늦게 들어오는 횟수도 많아졌다. 나중엔 동네에도 소문이 퍼져 버렸다. 힘들게 번 돈도 대부분 다 써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윤구의 아버지는 두 번 다시 배를 타지 않았다.
윤구의 사춘기는 아직 춤에 미련을 못 버린 어머니와 막노동판에서 잡일을 하며 술에 취해 폭언과 구타로도 분을 삭히지 못하는 아버지로 인해 일그러졌다. 차라리 이혼을 해서라도 자유로워지기를 원했던 어머니의 애원에 아버지의 말은 섬뜩했다.
“난 널 용서 할 수가 없어.”
아버지는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를 철저히 무시하고 윤구마저 자식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어디 한군데도 자신과 닮은 구석이 없는 윤구는 틀림없이 어머니의 부정으로 인해 태어난 자식이라고 아버지는 믿고 있었던 것이다.
비가 억수같이 솟아 지던 밤.
그 날도 어머닌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신 채 들어 왔다. 윤구는 그런 어머니를 붙잡고 ‘자신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냐’며 울부짖었다. 윤구의 그 말에 어머니는 술이 확 깨는 듯 정색을 하고 앉아서는 “지금의 네 아버지가 진짜 너의 아버지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 뒤 윤구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은 듯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아버지의 무시와 폭언은 여전했지만 그런 대로 생활의 안정을 찾아갈 즈음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다. 췌장암 말기였다. 암 말기가 되도록 아픔을 숨겨온 어머니도 독한 분이었지만 췌장암 말기란 소리를 듣고도 남의 일 대하듯 하는 아버지도 독한 사람이었다.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퇴원한 어머니를 이제는 따뜻하게 대해 줄 수도 있건만 아버지의 태도는 냉정했다.
어머니는 그 해 겨울 윤구에게 “지금 아버지는 분명 네 아버지가 맞다”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때가 아버지는 며칠째 집을 비울 때였고 윤구가 고3 마지막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윤구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돈벌이에 나섰다. 돈을 벌어 아버지에게 드리는 길만이 한집에서 같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였기 때문이다.
선희를 만난 건 울산대학 근처에서 붕어빵 장사를 할 때였다. 가로등 불빛아래에서 붕어빵을 굽다가 손님이 없어 시집을 읽고 있는데 선희가 나타났다. 붕어빵을 사면서 첫 느낌이 너무 좋다는 선희의 말이 농담인줄 알았는데 선희는 날마다 찾아왔고 결국 떨어질 수 없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1년 후, 윤구의 아버지는 주위 사람의 소개로 재혼을 했다. 윤구는 아버지의 결혼생활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자신도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선희가 졸업하던 날 윤구는 선희로부터 폭탄 선언을 들었다. 임신 5개월이니 윤구의 집에 들어와 살겠다는 거였다. 불편한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윤구는 낙태수술을 하길 원했다. 그러나, 선희는 이미 결심을 굳힌 듯 낙태수술은 절대로 할 수 없으며 이미 배가 불러오는 터라 자기 집에는 못 있으니 윤구집에 들어와 살겠다고 우겼다. 윤구는 따로 독립해서 살면 아버지와는 영영 끝일 것 같아서 당장은 힘들겠지만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선희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선희의 임신사실을 전해들은 아버지의 한마디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아버지는 아직도 윤구를 친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 뒤 알게 모르게 아버지와 새 엄마로부터 선희가 당한 고통은 컸다. 아마 윤구가 아버지에게 생활비라도 내지 않았다면 당장 쫓겨났을 것이다. 선희가 임신 10개월 째 접어들었을 때 새 엄마가 임신을 했다. 임신 3개월이었다. 새 엄마의 임신에 윤구의 아버지는 뛸 듯이 기뻐했다. 좋아하던 술도 끊고 집에도 일찍 들어왔다. 새 엄마의 임신으로 선희는 애를 낳고도 몸조리도 제대로 못한 채 하녀취급을 당했다. ‘손자를 보게 되면 나아지겠지’하는 윤구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진작 독립을 했어야 했다. 이미 시기는 놓쳤지만 윤구는 더 늦기 전에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에 사글세방을 구하러 다녔다. 그토록 나가 살기를 원하던 선희였다. 그러나, 정작 윤구가 울주군 청량면에 위치한 단칸방을 계약하고 왔을 때는 집을 나가고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혼자 놀고 있는 아기를 보니 윤구는 눈앞이 캄캄했다. 설상가상으로 윤구에게 영장이 날아왔다. 방위복무로 돈을 못 버는 상태에서 집에 있어봐야 아버지로부터 집 나가라는 소리만 들을 것 같아 윤구는 그 길로 계약한 사글세방으로 짐을 옮겼다. 마침 남편과 사별을 한 주인 아줌마는 아들 내외가 외국에 이민 가 있어 많이 적적하다면서 아들 영준이를 보살펴주기로 했다. 정말이지 천만다행이었다. 윤구는 아침에는 신문배달을 하고 방위복무 마친 저녁에는 군고구마 장사를 할거라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연학은 어긋난 윤구의 인생여정이 여기서 끝난 게 아니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연학은 뭐든지 윤구에게 작은 도움을 주고 싶었다. 연학은 우선 내무반 밖에 나가 있는 후임병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그리고는 윤구가 처한 현실을 실감나게 눈물까지 흘려가며 설명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연학은 한마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희들 내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도 윤구를 괴롭히는 놈이 있다면 내 이름을 걸고 가만 두지 않겠다. 전우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게 진정한 전우다. 윤구의 군고구마 많이 사먹고 주위에 홍보도 많이 해서 진정한 전우애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바란다.”
연학의 전폭적인 지원에 윤구의 군대생활은 편해졌다. 아무도 윤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윤구의 군고구마는 많이 팔렸다. 연학이가 중대장님과 인사계에게 윤구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각종 명목을 붙여 자주 포상휴가를 보내 주었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날, 윤구의 단칸방에서 영준이 돌잔치가 있었다. 연학은 부대원들과 함께 찾아가서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축하케이크를 앞에 두고 윤구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연학은 혹시 윤구의 군고구마 통을 박살내버린 깡패들 때문에 그런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주인집 아줌마가 얼마후면 집을 팔고 호주에 이민 가 있는 아들에게 간다고 한다. 당장 살집과 영준이를 돌봐 줄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연학은 “걱정하지 마라. 분명히 무슨 방법이 있을 거다. 힘들어도 굳굳하게 살아가자.”라고 위로했지만 가슴 한켠이 찌르르 아파 왔다.
다음날, 확실한 방법을 강구하려고 부대원들과 의논하던 연학은 오전 내내 윤구가 부대로 출근하지 않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연학은 서둘러 인사계에게 이야기하고 윤구집으로 갔다. 주인집 아줌마는 이민 가기 전에 친척집에 다니러 간다고 집을 비운 상태였다. 연학은 담 모퉁이를 돌아 구석진 곳에 위치한 윤구의 방문을 확 열었다. 순간 방안에 가득 찬 연탄가스냄새에 연학의 가슴은 산산조각이 났다. 어제 밤에는 정말 열심히 살겠다며, 이 어려움을 꿋꿋이 이겨 나갈 거라고 연학이와 손가락까지 걸고 맹세했었다.
연학이의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자식, 죽으려면 너 혼자 죽지.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잠자듯 하얗게 누워 있는 영준의 모습은 꼭 천사 같았다. 영준의 머리 위에 곱게 접은 쪽지가 슬픈 듯 바람에 떨리고 있었다.
- 천상병님 정말 죄송합니다.
천상병님과 손가락까지 걸고 열심히 살겠다고 맹세했지만 오래 전부터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도 목적도 잃었습니다. 우리 영준이 혼자 두고 가면 분명히 온갖 서러움을 다 받고 자랄 것 같아 함께 데리고 갑니다. 저승 가기 전에 돌잔치라도 해주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제는 아버지를 용서하렵니다. 저 또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보니 충분히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됩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많은 도움을 준 부대원들에게 죽어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다고 꼭 전해 주십시오.
천상병님, 저의 몫까지 합해서 오래도록 행복하시고 열심히 살아 주십시오.
먼 곳에서 항상 천상병님을 지켜보겠습니다.
- 충 성 -
윤구는 그렇게 갔다. 윤구와 영준의 빈소는 동강병원 영안실에 마련되었다. 연학은 우선 이 사실을 윤구의 아버지에게 알려야 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한 결과 윤구의 아버지는 마침 동강병원 소아과에 자신의 또 다른 아들이 입원한 곳에 와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연학은 즉시 윤구 아버지에게 부대원을 보내 윤구가 연탄가스로 죽어서 영안실에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갑작스런 아들의 죽음에 무척 놀라시겠지. 그래서 허겁지겁 영안실로 뛰어오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윤구의 아버지를 기다렸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연학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한달음에 소아과에 뛰어갔다. 소아과 병실 안에는 고사리 손을 부여잡고 안쓰러운 듯 자기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윤구 아버지란 사람이 보였다
“당신 아들이, 지금 싸늘한 영안실에 누워있는데 아버지로서 한번 가봐야 되지 않습니까?”
연학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놈은 내 자식이 아니야. 난 그런 자식 둔 적이 없어.”
너무나 분명한 윤구 아버지의 어조에 연학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네 같은 놈은 영안실에 올 자격도 없어. 그래도 네 아들은 죽는 순간까지 아버지를 용서하고 이해한다고 했는데. 윤구 이 바보 천치 같은 놈.”
그곳에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연학은 그 말을 끝으로 영안실로 다시 돌아왔다. 빈소에는 부대원들 외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에게서조차 버림받은 윤구의 기구한 운명이 불쌍해서 연학과 부대원들은 울음을 삼키며 깡 소주를 마셨다. 그 날 저녁, 중대장님과 인사계가 찾아왔다. 연학은 중대장님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윤구 이 나쁜 놈. 중대장님이 오셨는데 새카만 쫄따구 놈이 빠져 가지고. 빨리 벌떡 일어나서 경례하지 않고 뭐 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연학은 힘없이 돌아서는데. 윤구의 씩씩한 경례소리는 들리지 않고 부대원들의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윤구와 영준의 시신은 화장되어 일산 앞 바다에 뿌려졌다.
아버지의 넓은 품에 안겨 넓고 푸른 바다를 항해하는 마도로스를 꿈꾸었던 윤구는 지금도 어느 바닷가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연학은 선희를 본 순간 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독한 양주만 연거푸 마셨다. 선희도 연학도 아무 말이 없었다. 김고문 혼자 옆에서 떠들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버렸다.
“우리 6년 전에 헤어진 뒤 처음이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묻는 선희의 말에 연학은 대답대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구- , 나하고 군생활 같이 했어. 영준이라고 하던가. 아들이 한 명 있는데 정말 잘 생겼더군.”
연학의 말에 선희는 몹시 놀란 듯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알고 있었어? 윤구씨하고 우리 영준이 잘 있겠지.”
‘젠장 지 남편 죽은 줄도 아직 모르고 있단 말인가’
“윤구하고 연락을 안하고 사는 모양이지?”
선희는 갈증이 나는지 앞에 있는 양주잔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집 나온 주제에 무슨 연락을 할 수 있겠어. 다만 번 돈 일부는 집으로 부쳐 주고, 나머지는 모으고 있는데 집 살 돈만 모이면 윤구씨랑 합칠 생각이야.”
연학은 윤구가 죽고 난 뒤 정확히 두 달 후에 윤구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아무 일도 못하고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벌을 받은 게지’ 하고 생각하는데 친구 성우가 정확한 내막을 알려줬다. 윤구의 장례가 끝나고 난 뒤 병원 측에서 연학이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윤구의 유품을 윤구 아버지에게 전해 주었다한다. 그것은 일기장이었는데 거기에는 아버지에 대한 윤구의 애절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 나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가 미웠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미움보다 더욱 나를 두렵게 만든 것은 내가 진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오늘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들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친자확인검사를 받으러 갔다. 그런데, 결과는 내가 정말 아버지의 친아들이라는 거였다.
너무 기뻤다. 나를 구박하는 아버지의 행동이 이제는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이제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일기장에는 친자확인증명서류가 끼어 있었다. 그것을 본 윤구 아버지의 충격은 컸다고 성우가 말했다. 실성한 사람처럼 윤구의 뼛가루가 뿌려진 바다를 쳐다보곤 했는데 결국 쓰러졌다는 거였다. 연학은 ‘윤구의 아버지가 벌어둔 돈도 없을 텐데 어떻게 지낼까’하고 궁금하게 생각했었는데 아마도 선희가 붙여준 돈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었던가 보다.
연학은 의식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다. 선희와 ‘야화’를 나와 근처 여관방으로 향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필름이 끊겼다.
연학은 아침에 심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책갈피를 넘기는 듯한 미세한 소리에 잠을 깼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소리나는 곳을 보니 연학의 서류 가방을 뒤지고 있는 선희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직 날이 밝아 오지 않아 주위는 어두웠다.
작은 손전등으로 급하게 서류가방을 뒤지던 선희는 목적했던 것을 찾았는지 서둘러 품속에 넣고는 연학이가 누워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간밤에 입은 옷 그대로 누워 있는 연학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던 선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연학은 선희의 처진 어깨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선희가 가져간 서류는 가짜영상인식향기배분시스템 설계도였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아무 문제없이 작동이 되다가 갑자기 악취가 발생되는 실패작 설계도였다. 100%완성품 설계도는 애초에 가져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것이다.
선희도 김고문도 연학이로 인해 피해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연학은 다짐했다.
상처받아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주)향기사랑은 빛이 되고 희망이 될 거라고. 메마른 그들의 가슴에 포근한 사랑의 향기로 가득 채워 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