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차 (22) 2011/1/2 차인
차선과 잔 탁이 올려져있는 <가례증해>의 산실
연안 이씨 정양공 종가
글/ 이연자 한배달우리차문화원장
200여 년 전, 논쟁 심한 가가례를 없애고 관혼상제 이 4례를 통일하고자 만든
예절 책<가례증해>에는 조상이 돌아가신 기제사는 물론
설 . 추석 차례 상에도 차를 올려야 한다고 했다.
제례상 옆에는 찬선과 차합, 잔 탁까지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으로 보아
차를 제사의 의례 물로 통일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 책의 원본인 목판 각425장과 책을 펴낸
이 의조(1727~ 1805)선생의 영정, 간행할 당시의 건물 명성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경북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 마을을 찾았다.
원터 마을은 조선 성종 때 이시애 난을 평정한 일등공신 정양공,
이숙기,(1429~ 1489)선생으로부터 500여 년간 그 후손들이 살아온 터전으로
<가례증해>를 펴낸 이 의조는 이숙기의 후손이다.
‘원터 마을‘은 조선시대 관영숙소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했다.
문화의 산실 ‘방초정’
입향조 이숙기로부터 18대째 500여 년을 살아온 집성촌 원터마을은
김천 시내에서 거창으로 가는 3번국도로 24km를 달리다 보면
이 마을을 알리는 빗돌이 서 있고
그 길을 따라 100m거리에 원터마을의 상징적 건물 방초정이 있다.
방초정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부호군 이정복이 1625년에 건립했지만
화재와 홍수로 유실되어 1787년에 <가례증해>를 펴낸 이의조가
현재의 건물을 증건 한 것이다.
땅에서 2m 높이로 세운 이층 누마루로 설계된 이 정자의 특징은
가운데 방의 벽을 모두 문으로 처리해 문을 모두 걷어 올리면
바깥풍경이 한눈에 들어와 사계를 즐길 수 있게 한 점이다.
정자 곳곳에는 자연의 순리에 따르며 인격을 닦고
삶에 운치를 더한 문객들의 글들이 있어 건물의ㅣ 면모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정자 앞으로는 연못을 파서 인공적으로 작은 동산을 두 개나 만들어 뒀다.
둘레엔 나이를 알 수 없는 수양버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구부정하게 누워있고,
연못가에 심어둔 백일홍 나무도 나이를 알 수 없다.
연못은 아름다운 수목들과 어우러져
우리나라 정원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정자 옆으로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열녀비각은
정자를 세운 이정복에게 시집온 화순 최씨의 정려각이다.
17세에 혼례를 마치고 신행도 오기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죽어도 시댁에서 죽어야 한다며 노비를 데리고 신행을 오던 중
왜병을 만나 겁탈의 위기에 놓이자
종가를 30리 앞두고 연못에 몸을 던져 자결을 했다.
그 남편 이정복은 절갤 지키기 위해 자결한 부인을 위해 정자를 짓고
열녀비각을 세워 넋을 위로했다고 한다.
그 옆에는 함께 목숨을 끓은 은 노비 석이의비석도 세워져 있다.
신분사회였던 당시로는 흔하지않은 모습이다.
그 옆에는 연안 이씨 집안으로 시집온 18세 어린 신부가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뜨자 식음을 전폐하고 단식 48일 만에
남편을 따라간 풍기 진씨 열행비도 있어 유학적 덕목을 실천한 가문임을 보여준다.
자연의 질서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도포를 갖춰 입은 입향조 이숙기의 18대 종손 이철응(65)씨와
문중 어른들이 동구 밖까지 마중을 나왔다.
‘예를 중시한 집안인지라 앉아서 손님을 맞는 것은 예가 아님을 안다’는 것을
말없이 보여주는 듯했다.
농협에서 정년퇴임 했다는 종손과 갓과 도포로 예복을 갖췄지만
긴장되지 않고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문중어른들의 따뜻한 표정에서
정겨운 사람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내세울 것 없는 곳을 찾아 먼 길 와주어 고맙다는 종손의 인사말에
팔순이 넘은 문중 어른 이석영 옹이 한 말씀 거든다.
“조상이 살던 집과 신주를 모신 사당을 문화재로 지정만 해두고
종손은 도회지에서 사는 댁을 여럿 보았지요.
사람도 살지 않는 곳을 국비를 낭비하면서 으리으리하게 보수해 두면 뭣해요,
99칸이었던 우리 종가는 한국전쟁 때 집이 불탔지만
어디에도 이런 사정을 하소연 할 수 없었어요.“
종가고택은 남아 있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만
<가례증해>를 정리하고 후학을 양성했던 “명성재”는 200여 년이 된 옛집인데도
무슨 이유인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쓰러져 가고 있다고 했다.
이 뿐 아니라 문화재로 지정해 둔<가례증해> 목판도 예산이 없다는 핑계로
국역 번역을 하지 않다가 몇 년 전 어느 대학 한문과 교수가
번역을 해 보겠다고 했지만 아직 그 결과는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관혼상제의 증해판<가례증해>
9권 10책으로 구성된 <가례증해>는 사람의 일생을
의미 있도록 만든 관혼상제를 정리한 예절 책이다.
출간된 지 20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전통 예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필독서로 읽혀지는 책이다.
한국전례원 원장 김정 씨는 “주자의<가례증해>를 바탕에 깔고
우리나라 여러 예학자들의 예설을 꼼꼼하게 첨삭하고 해설한
관혼상제의 증해판이라 손이 닿는 곳에 두고 사전처럼 보고 있다“고 했다.
책은 종손의 종 8대조인 이의조(1727~ 1805)선생이
관혼상제 예법을 전국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펴내려고 한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를 지해한 최대의 정치적 사안인
예송논쟁으로 관혼상제 예법이 가가례로 더욱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처음 책을 준비한 것은 의의조의 선친 이윤적 선생이다.
이윤적은 송나라 때 주자의<가례증해>를 바탕으로
퇴계 이황 . 율곡 이이 . 사계 김장생 . 우암 송시열 . 한강 정구 등
우리나라 쟁쟁한 예 학자들의 예설을 더 보태서 정리를 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그 아들이 대를 이어 13년 만에 <가례증해>초본을 환성했다.
환성된 초본을 가지고 다시 판각준비에 들어갔는데
가까이 있는 직지사 경내에 있는 느티나무를 구해
틀어지지 않도록 갈무리한 다음 판각을 잘하는
김풍해라는 분에게 부탁을 해 3년에 걸쳐 완성을 본 것이다.
그 해가 1798년이니 선생이 세상을 뜨기 7년 전이다.
판각 작업은 방대한 일리라 개인이 만들기엔 어려움이 많아
국가예산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가례증해>는 선생의 사비로 완성시킨 것이어서 더욱 값진 것이다.
책은 선생이 세상을 뜬 후 19년이 지나 1824년에 간행되었다.
차합 차선 차잔탁이 그려진 제사상
<가례증해> 목판은 마을 들러미에 있는 ‘숭례각’에 소장돼 있다.
가로 31. 세로 21.3cm 목판 425장이 원본이다.
앞 뒷 면을 합치면 850장이 된 긴 문장이다.
새로 가로 양 끝에는
다른 나무를 씌워 뒤틀림을 막을 만큼 치밀한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글자가 고르고 정밀하게 새겨져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도 받고 있어
경상북도 지방문화제 제 67호로 지정됐다.
<가례증해>를 사펴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제사상에 오르는 과일을 두고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시비를 할 필요가 없다.
책 어디에도 과일 이름을 적어 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조상이 돌아가신 날 모시는 기제사와 설 . 추석 차례상 차림과
제사 모시는 장소까지 다름을 확실하게 해 두었다.
<권지 1>의 ‘정지삭망속절출주, 독전가증서립지도’에는
초하루 보름에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의 신주 앞에, 각각 술 한 잔과 차 한 잔,
과일 한 접시를 올리도록 한 간소한 상차림이 보인다.
초하루 보름이라면 설 . 추석에 해당된다.
명절에는 사당에서 차례를 모시기 때문에
간단한 제물을 올리도록 명시한 점이 돋보인다.
제계의 근원을 살피지 않고 음식만 많이 올리면 복을 받는다는
기복사상만 전해와 돈을 주고서라도 제사상을 푸짐하게 차리려는
지금의 풍속은 제사의 본질과는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권지 13>의 도설에
안채에서 지내는 시제의 에는 술과 차가 함께 오른 작은 상이 있다.
술잔과 차합 차선 찻잔탁 등이 나란히 놓여졌다.
<권지 13> 뒷면에는 제상 차림의 음식 이름을 일일이 적어두었는데
할아버지 , 할머니 한분마다 상차림을 따로 했다.
한분의 상차림에는 신주로부터
첫째 줄 오른 쪽에는 밥과 술잔, 수저와 초장과 국이 올라 있다.
2번째 줄에는 국수와 육고기와적과 생선과 덕이 보이고
3번째 줄에는 포와 나물 한 접시, 그리고 생선젓갈과 야채초무침과 생선식혜,
나박김치가 올랐다. 마지막 과일이 놓였는데
이름은 없고 여섯 가지 과일만 올랐다. 간결한 제상 차림이 돋보인다.
치우침 없는 도도한 삶
<가례증해>를 완성한 이의조 선생의 영정이 모셔진
<가례증해>산실인 명성재는 종가 뒤 북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3칸짜리 소박한 건물을 짓고 책을 읽으며
후학을 양성하던 선생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우물도 그대로 있다.
재실 아래에 있는 구성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의 글읽는 낭랑한소리가
선생의영정이 있는 명성재까지 들린다.
재실이 있는 이 골짜기를 두고 사람들은 도덕골이라 부른다.
예를 숭상하며 은둔선비의 삶을 지향했던
선생의 정신을 오랫동안 기리기 위해붙여진 이름이다.
나라에서는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해 참봉벼슬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치우침 없는 도도한 선비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의 묘소는 명성재 오른편 양지바른 고에 있다.
음력 3월 초 정일에는
후학과 후손들이 모여 선생의 영정 앞에서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