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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인의 옥사 (獄事)
진주 강씨 강상인은 태종의 최측근으로 병조참판에 올랐으며 태종 이방원은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있으면서 군권만은 직접 장악하고 있었다. 강상인과 도총제 심정(심온의 동생)이 군사에 관한 일을 처리함에 있어 임금에게만 고하고 상왕 태종에게 고하지 않자 이를 문제 삼아 처벌한다.
심온의 행차상황을 보고 그를 제거할 명분을 찾고 있던 차에 병조좌랑 안현도의 거짓음해가 시작되고 좌의정 박은, 우의정 유정현도 평소 권력다툼 관계인지라 죄인으로 몰아가니 마침내 강상인은 사지를 찢어 죽이고(거열형) 나머지는 사형에 처해진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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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온은 사약을 마시면서 '박씨와는 혼인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이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것이 좌의정 박은이라는 것으로,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청송 심씨는 반남 박씨와 혼인하지 않는 전통이 지켜져 온다.
실로 놀라운 '600년 원한'이다.
ㅇ 영릉(英陵)
영릉(英陵)은 여주에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여주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1446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헌릉 서쪽에 조성하였고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했다.
조선조 최초로 합장릉인 동분이실(同墳異室)로 능을 축조, 그해 7월 17일 왕비를 동실(東室)에 안장하고 서실(西室)은 자신의 수릉(壽陵·죽기 전 미리 만들어 놓는 무덤)으로 삼았다. 석실 가운데 칸막이에는 직경 50㎝정도 크기의 구멍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서로 왕래하도록 배려했다.
이후 세조 때 영릉이 불길하다는 논의가 대두되었으나 서거정 등이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세종이 죽은지 19년이 되는 예종 1년(1469)에 현 위치로 천장했다. 천장 때 그 자리에 묻었던 옛 석물들은 1973년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가 발굴해서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다. (현재 국정원 영내에 영릉이 있었다.)
이곳이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고 풍수가들은 입을 모은다. 영릉의 명당이 조선조를 100년이상 연장시켰다고도 한다.
2대 정종(후릉, 개성), 6대 단종(장릉, 영월)을 제외하면 도성에서 가장 멀다. ‘왕릉은 도성 100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서 벗어나지만 ‘물길로 가면 하루거리’라는 논리로 합리화했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석실과 병풍석을 조성하지 않으니 능역에 동원된 부역군이 6천명에서 절반인 3천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영릉 입구.... 70년대 박대통령에 의한 성역화 사업으로 대규모 정리 된 곳이다.>
<세종대왕릉 재실... 70년대 성역화시 복원된 곳이다.>
<훈민문을 거쳐 왕릉으로 들어간다. 東入西出.... 가운데는 임금만이 다니는 문이다.>
<훈민문을 들어서 왕릉으로 가는 길이 매우 잘 조성 되었다. 그런데 어딘지 옛스럽지가 않다...>
<왼쪽에 있는 연못은 뜬금없이 왕릉 경내에 있음에도 철판을 용접하여 알록달록한 채색난간을 세워 유치원 같다.
70년대 개발당시 자연스럽던 둥근모양의 옛 연못을 크게 확대하여 네모꼴로 만들고 이렇게 만들었다 한다.>
<마침내 금천교가 나타나고 홍살문이 우뚝 서 있으니 이제부터 신성한 권역으로 접어드는것이다.
금천교도 얼마전 새로 지었다고 하니... 아직 새것인듯한 느낌이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
<홍살문 옆 배위도 흠 잡을데 없이 깔끔하게 잘 되어 있다.>
<홍살문을 들어서서 참도를 따라 들어가다보니 참도가 신도와 어도의 2도가 아닌 3도였다.
고종이후 나타난 황제릉이 되어 버렸다... 잘 만든다고 한것이 오히려 훼손해버린 셈이다.
70년대 성역화 사업에서 생긴 오류의 대표로 지탄받고 있는것이다. 원상복구 계획이 있다 한다.>
<바로 옆 17대 헌종의 영릉(寧陵) 참도... 투박해보이지만 박석이 깔린 옛날 모습 그대로가 오히려 정겨워보인다.>
<아무튼 반질반질하게 잘(?) 깔아놓은 참도는 한번 꺾어지면서 영릉 정자각으로 이어진다.>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니 일송정 푸른솔 아래 영릉의 모습이 참으로 단아하다.
참도 좌우로 소나무가 빽빽했었다는데 역시 70년대 성역화 작업시 베어내고 넓게하여 잔디를 심었다고 한다.>
<정자각 오른쪽... 동계(東階) 역시 3도에 걸맞게 계단이 하나 더 있다. 이것도 인위적으로 추가한것인지???>
<정자각에서 배례 자세로 몸을 낮추고 뒷문을 통해보면 비로소 능침이 보인다.>
<서계(西階).... 제례후 철상할때에 축문을 태우러 내려가는 계단이다.>
<정자각 뒷편... 신도가 능침으로 이어진다. 마주보이는 것은 영릉비각.>
<정자각 북서쪽의 예감...>
<정자각 왼쪽으로는 수라간, 오른쪽으로는 수복방이 있다... 모두 70년대에 재현한것이다.>
<영릉 비각...
소헌왕후가 왼쪽에 합장되어 있다고 씌어 있다. >
<세종대왕릉은 다른곳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낮아보이고 경사도가 완만하여 부드러워 보인다.
그런데 이 역시 성역화 작업당시 인위적으로 깎아낸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능침에 올라가서 내려다 보아도 다른곳보다는 부드러운 시각으로 편해 보인다.
참도 좌우로 인공적인 평면작업을 한 흔적이 느껴진다.>
<세종대왕릉... 우리가 만난 최초의 합장릉이다.>
<처음 헌릉옆에 모셨을때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었을듯 하나
19년후 예종에 의하여 이곳으로 천장될때는 세조의 명에 의하여 왕릉에 병풍석을 쓰지 않을때였다.
유해만 모셔오고 나머지는 그곳에 모두 묻었으니 모두 새롭게 만들었을것이다.
그리하여 처음 조성한 영릉과는 다소 달라졌을것으로 생각된다.>
<혼유석은 2개를 나란히 설치하므로써 합장릉임을 알수 있다... 고석은 4개를 받쳤으며 귀면(鬼面)을 새겼다.>
<곡장 안으로 석양과 석호 2쌍씩을 세운것은 일반적이다. 석양은 숫놈인듯하다...>
<망주석의 세호가 단순한 모습이다. 마치 귀모양을 하고 구멍 하나 뚫려있다. 중앙에는 팔각 장명등이 서 있다.>
<문인석을 중계에... 무인석을 하계에 세웠다. >
< 능침 뒷부분... 잉에 올라서서 바라다 본 모습... 참으로 전망 좋은곳이다.>
ㅇ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조선시대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 다섯 가지의 예(禮)의 종류와 그에 합당한 의식(儀式)을 정리해 놓은 것으로 세종때 시작되어 성종때 완성되었다.
건국 초기에 나라의 의전이 갖추어지지 못해 그때 그때 재량에 따라 처리하는 불편이 있어 오례(五禮)를 규정화시키도록 한 것이다.
세종때 세자였던 문종 비 현덕왕후 권씨가 세자빈의 신분으로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24세에 숨을 거두자 시부모인 세종 내외는 5일간, 세자인 문종은 30일간 상복을 입고 애도하면서 상을 치루었다 하는데 당시만 해도 세자빈에 대한 초상절차가 없어 우왕좌왕 했다고 한다. (왕이나 왕비의 상례는 있었으나 세자빈은 이때가 처음임) 따라서 세종이 명하여 신분별 상세한 상례절차를 기술하도록 지시하여 국조오례의가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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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실일도 많으신데 자료 찾고 정리하고 요약해서 수월하개 볼수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이런 노력이 있기에 명품클럽이 아닐지요? 힘드시지만 건강하게 계속해 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