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비평은 성서본문에서 생긴 의문, 혹은 성서본문에서 비롯된 질문에 대답하되 조금이라도 더 객관성을 높이는 학술적인 대답이 되게 하려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성서비평이 어디쯤에서 발생하게 되는지에 대한 순서도를 그리면 다음과 같다.
(1)본문숙고-> (2)질문-> (3)대답(성서비평)-> (4)결과(말씀에 더 가까이)-> (5)적용
이 순서도에서 (1)과 (2)는 성서비평에 의한 학술적이며 객관적인 대답을 유발시키는 동인이 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의해 갖게 된 질문에 대답할 때 타당성 있는 근거에 기반을 두고 신뢰도 높은 대답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객관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과정이 위 (3)의 성서비평이다. 성서비평은 객관성 확보를 위하여 학술적인 방법으로 진행된다.
ㅇ 너 같이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놈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지
본문과의 소통이 원활해지고 대화가 깊어짐에 따라 말씀에 더 가까이 이르게 되는 기쁨을 갖기 위해서는 질문도 본문에 기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대답을 구하는 질문이 그 이전의 것에서 시작된다면 그것은 본문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다. 언어유희의 말장난이 될 뿐이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활동 이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주창조 이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는 등의 질문을 한다면 그에 대해 논증적이지도 못하고, 논리도 없으며 객관적인 타당성도 결여된 분풀이성 대답만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너 같이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놈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지.’
ㅇ 성서본문에 기초한 질문의 예
그러면 어떤 질문이 성서본문에 기초한 질문일까? 다음과 같은 시골교회 40대 중반의 여선교회 회장의 질문은 도시 교회 목사들에게도 큰 도전이 된다. 성서비평을 통한 답변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아주 좋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질문은 본문에 근거하여 시작되었는데 ‘성서비평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답변에 이를 수 없는’ 질문이었다.
막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마16:28, 눅9:27)
이 구절을 통해 그녀는 두 가지 질문을 했다. 그러므로 대답은 두 가지로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둘 중의 하나만 대답으로 주어지면 안 된다. 질문을 두 가지 했는데 대답은 한 가지로 주어진다면 영혼의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로 제시되어 질문자의 영혼이 만족할 수 있는 흡족한 기쁨이 제공되도록 해야 한다.
그녀의 질문 두 가지 중의 하나는 이렇다. 예수님과 함께 서 있던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했다면 지금 이 시대는 이미 죽음이란 것이 없는 하나님 나라 세상이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누가복음은 마가복음과 비슷한데 왜 마태복음은 두 복음서와 다르냐는 것이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말씀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하여 세 복음서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세 본문들을 서로 비교하며 읽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이 질문들에 대해 벧후 3:8의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이제 겨우 이틀 지났을 뿐이다’라고 대답하면서 첫 번째 질문에 응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두 번째 질문까지 해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질문에 객관적인 대답을 함으로서 성서본문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그 깨달음의 폭을 넓혀 말씀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기쁨이 충만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도우려면 성서비평을 통한 타당성 있는 대답으로 본문에 대한 신뢰도를 한껏 높여야 한다.
ㅇ 성서비평이 지향하는 목표점
성서비평은 “누구나” 동의하고 ‘어떤 사람이든지“ 수긍할 수 있는 대답을 내놓기 위해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제시하려는 학술적 수고이다. 따라서 성서본문을 기초로 제기되는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신뢰도 높은 설득력을 갖춘 대답으로 자리매김 되려면 타당성 있는 근거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학술적인 수고로서의 성서비평은 이에 맞추어 이루어진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인간이 어떻게 비평할 수 있느냐’며 ‘읽고 은혜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본문을 읽기만 해도 은혜가 된다면 설교가 필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을 좀 더 잘 이해함으로서 말씀에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는 본문에서 비롯된 질문에 적절한 대답이 주어지도록 해야 한다.
ㅇ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렸다는 민12장에 대한 이해
미리암이 아론에게 대들었다가 문둥병이 걸렸다는 민12장의 본문을 주일설교 본문으로 내놓을 때 교인들은 열이면 열 모두 ‘목사님께 대들면 미리암처럼 벌 받아. 주님의 종이신 목사님의 잘못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야. 그러니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려야 해.’ 라는 내용을 예상할 것이다.
목회자들 입장에서 보면 정말로 감격스런 이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런 식으로 이해되고 그렇게 적용되어야 할 본문인가? 민12:1에 의하면 아론도 가세하여 둘이 한꺼번에 모세를 비판했다. 9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미리암에게만 화를 내지 않으셨다. “그들에게” 화를 내셨다. 그런데 왜 아론은 멀쩡하고 미리암만 문둥병에 걸렸나? 이런 질문에 대해 객관성 높은 대답을 제시함으로서 말씀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학술적인 수고가 바로 성서비평이다.
ㅇ 성서비평이 아닌 경우들과 성서비평
그런데 성서비평이 아닌 것을 성서비평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면이 있다. 먼저, 성서비평의 목적은 본문을 비난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니며 성서를 이리저리 찢어내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성서비평은 타당성 높은 객관적 근거들을 바탕으로 대답에 신뢰도를 높임으로서 말씀에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돕는 성서신학의 학술적 수고이다.
또 성서비평은 기존의 아름답고 바람직한 믿음을 조각내어 부수려는 것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기존의 믿음을 조각내어 부순다면 그것은 잘못된 맹신에 한정된다. 그러므로 성서비평은 오히려 잘못 알고 있는 이해를 교정하는 신학적, 학술적 노력이다.
나아가 성서비평은 지금까지 당연시되고 있었던 비성서적, 비신학적 이해를 성서신학적 입장에 맞추어 수정하도록 인도하는 것을 지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비평은 이제까지 전혀 몰랐던 내용들을 알게 함으로서 말씀에 더 가까이 접근하도록 돕는 작업이다.
한편, 성서비평은 성서본문에서 분츨되어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좀 더 분명하게 듣기 위한 사람 쪽의 수고이다. 본문을 통해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기를 갈구하는 교회구성원들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질 수 있는 객관적인 답을 제시하려는 학술적 작업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하나님의 생기를 끊임없이 그 코에 불어넣는 것으로 작용되도록 방향이 설정되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서 그 자체가 이미 종교적 신앙적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성서비평은 최종적으로 성서로 하여금 자신의 기능을 조금이라도 더 객관적으로 역할하게 하기 위하여 사람 쪽에서 쏟아 붓는 성서 신학적, 학술적 수고이다.
ㅇ 성서비평 방법론
이와 같은 사람 쪽에서의 진지한 수고로서의 성서비평은 다음과 같이 크게 대분된다.
- 역사비평
역사비평은 본문들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지나왔는지에 관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비평은 본문이 인간역사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에 더 가까이 다가서고자 한다. 그래서 역사비평 방법론들을 모두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비평이라는 범주에 넣는다.
통시적 비평이라는 어휘는 왼쪽 지점에서 오른쪽 지점에 이르는 수평선 개념을 갖는다. 본문이 왼쪽 지점에서 츌발하여 오른쪽 지점인 ‘지금 여기’에 이를 때까지 수많은 시간을 통과해 오면서 어떻게 달라졌으며 그에 따라 그 의미는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 역사비평의 절대적인 관심인 것 같으나 결코 아닌 것
그러므로 역사비평은 성서본문이 인간역사의 특정한 시공 안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이냐 아니냐를 판정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역사비평의 목적이 본문의 역사적 사실성을 판단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의 본문이 과거 특정의 시공 안에서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에 그 특정의 시공 안에서 본문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을지에 대해 논의하다 보니까 본문의 성격이나 배경 등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 그 때 본문에 대한 역사성을 다루게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다. 왜냐 하면, 역사비평의 지향점은 본문이 역사적으로 실제 사건을 단순히 기록한 다큐멘터리이건 문학적 창작이 가미된 내용이건 비유이건 말씀이건 기적이건 상관없이 본문의 종교적, 신앙적 역할과 기능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 문학비평
문학비평 부류에 속하는 방법론들이 관심을 갖는 핵심은 ‘지금 내 손에 들려진 이 모습 이대로의 본문’이다. 그래서 문학비평 방법론들을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비평이라는 범주에 넣는다. 공시적이란 수직선 개념이다. 공시적 비평으로서의 문학비평은 “지금 이 본문 이대로의 현재 모습”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이냐에 절대적인 관심을 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비평의 성과들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다. 객관적인 시각을 확보하기 위하여 역사비평의 긍정적인 결과들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 문학비평에 대한 반반의견
이와 같은 성격의 문학비평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문학작품이라고 본다는 말인가?”라고 질문할 때 ‘반은 그렇고 반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문학비평은 인간의 문학작품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려놓고 보면서 비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은 아니다.’라고 답한다.
동시에 ‘반은 그렇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특정 문학의 형식을 빌려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편은 문학적으로 볼 때 시의 양식을 갖고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약의 서신들은 문학 양식상 편지의 모습을 갖고 있는 말씀들이다. 복음서들은 제 3자가 들려주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의 형태를 띤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창작한 문학이란 말이냐?’라는 믿음 좋은 이들의 신경질적인 질문에 ‘반은 그렇다’라고 답한다.
문학비평은 본문에서 비롯된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제시하기 위하여 사람 쪽에서 수고하는 학술적인 또 다른 노력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목표를 이루려다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문학작품 대하듯 다루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이 쓴 어떤 소설작품, 누가 썼는지 모를 어떤 수필이나 에세이를 골라잡아 놓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소설 같은 문학작품 형태로, 시 같은 문학형식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편지같은 서신형태를 빌려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문학작품을 이해하는 틀을 사용하여 본문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며 학술적인 수고이다.
ㅇ 성서비평으로 말씀에 더 가까이 이르기 위한 과정
이 같은 성서비평을 통해 말씀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한 훈련을 하고자 할 때 아래의 1번과 같은 4년 과정이 가장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성서신학 주석이나 본문 해석을 위한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도 아니고, 한마디로 너무 길다. 그렇지만 아무리 길다 해도 구약 1년, 신약 1년의 시간은 투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후에 1년 정도 더 투자하여 신론이니, 교회론이니, 구원론이니, 삼위일체론이니 하는 등의 조직신학적인 교리들을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정리할 때, 손에 들려 있는 본문 제쳐놓고 다른 사람이 쓴 교재에 은혜받았다고 자족하면서 그것에 머무는 수준을 탈피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아래 2번과 같이 2년 정도의 시간이 투자되는 과정을 통해 합리적인 지성을 소유하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스스로 대답을 찾아 나가도록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1. 4년 과정
2. 2년 과정
주의해야 할 한 가지는 ‘문학비평과 예언서’라고 표기되었다고 해서 “예언서는 문학비평 방법으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역사비평과 복음서’라고 해서 ‘복음서를 역사비평 방법만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 것과 같다. 성서비평 방법론과 성서를 엮어 기술한 것은 성서방법론만 전적으로 익힐 수 없으므로 편의상 묶어 놓은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사실은, 어느 한 가지 방법만으로 본문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안 된다는 점이다. 그 어느 한 가지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발명된 여러 다양한 방법들을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근거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대답의 타당성을 높임으로 격조 높은 신뢰성이 담보되도록 해야 한다.
ㅇ 성서비평으로 말씀에 더 가까이 이르려는 노력이 절대로 필요하지 않은 경우
그런데 본문을 좀 더 잘 이해하려고 할 때 반드시 성서비평 방법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직관적인 이해능력도 남다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성서비평을 사용하는 이유는 본문에서 생기는 질문들에 대해 객관적인 대답을 제시함으로서 말씀에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돕기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성서비평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본문을 읽고 은혜받을 수 있다면, 성서비평 없이도 본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성서비평과 그 결과들이 어떤 것들인지 궁금해 하면서 기웃거릴 필요가 전혀 없다.
따라서 아래의 내용들이 절대적으로 틀림없다고 확신하는 경우, 혹은 아래의 내용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성서비평을 통한 해답 찾기”가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다.
1. 오경은 모세가 기록했다.
2. 출애굽 사건과 관련된 성서의 기록들은 글자 그대로 다 이집트 역사상에서 발생했던 실제 사건이었으며 본문은 그것을 기록한 역사 다큐멘타리 같은 기록이다.
3. 노아 홍수 이야기는 둥그런 지구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발생한 전 지구적 사건으로서 40일 동안 전체 지구를 완전히 덮었던 대홍수였다.
4. 골리앗을 죽인 사람은 소년 다윗이다.
5. 말라기 선지자는 구약성서 최후의 선지자이다.
6. 마태복음의 예수탄생과 누가복음의 예수탄생 이야기 등 복음서들의 이야기들이 서로 약간 다르긴 하지만 얼마든지 하나의 이야기로 조화시킬 수 있다.
7.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성경에만 나와 있는 유일한 기적 이야기이다.
8. 부활이란 썩을 육신이 이 모습 이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9. 부활하신 예수님은 글자 그대로 하늘로 승천하셔서 우주 어딘가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계시며 늘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다.
10. 앞으로 심판주로 재림하실 예수님은 성경에 적혀 있는 글자 그대로 하늘로부터 구름타고 오실 것이다.
11.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은 일점일획도 거짓없는 실제 발생 사건들이다.
12. 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은 하나님께 영감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모순, 불일치, 서로 다른 해석 등과 같은 오류가 절대 있을 수 없다.
성서비평은 이성과 지적 합리성,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에서의 각종 논증만으로는 본문이 말씀하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판단이 설 때 지성적, 학술적 도구로서의 성서신학적 수고를 활용함으로서 객관성이 담보된 해답을 얻으려는 방법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런 성서신학적인 학술적 수고 없이도 본문이 잘 이해된다면, 또는 본문에 대해 별다른 의문도 없고 질문도 생기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지켜온 말씀에 대한 믿음에 굳게 서서 그 믿음을 계속 유지해 나가길 권한다. 성서비평의 최후의 보루도 결국은 그러자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