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경찰관 및 교도관 노조 총연맹(통칭 경찰노조)
(National Union of Police and Prison Officers : NUPPO)
현재의 영국 경찰노조총연맹의 전신은 바로 '전국 경찰관 및 교도관 노조 총연맹'이었다.
이 경찰노조는 존 자임(John Syme) 경위의 선동으로 창립되었으며, 그러나 매우 단명했던 경찰노조를 말한다.
이 노조는 1918년 런던에서 대성공을 거둔 경찰파업을 일으켰으나, 다음 해인 1919년에 가서 전국경찰총파업이 실패하게 되면서 붕괴되고 말았다.
그 유래와 활동 및 붕괴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13년, 존 자임은 '폴리스 리뷰' 지에 런던수도경찰노조 설립 사실을 광고를 통해 알렸다.
이 폴리스 리뷰 지 사설은 경찰노조론에 대하여 '피식' 하고 코방귀를 뀌었으나, 자임은 비밀리에 조합원을 끌어모았으며 경찰노조를 마치 비밀결사체처럼 운영했다.
조합원 상황은 그 총수만 확인해 주었는데, 그 이유는 조합 가입 사실이 밝혀지면 규정 위반이라 하여 즉각 파면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4년, 자임은 경찰노조 명칭을 '전국 경찰관 및 교도관 노조 총연맹'으로 격상시켰으며, 지방에서도 조합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조합원은 자임이 1917년 두 번째로 투옥되었던 당시 불과 2백 명에 불과했다.
자임이 투옥되어 있는 동안, 경찰노조에 적극성을 가지고 있던 런던경찰청 소속 경찰관들이 비밀결사의 운영을 맡게 되었는데, 당시 이들은 자임의 경찰노조 운영과 관리 방식이 아무런 체계도 없이 무질서한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자임이 그 자신이 처해 있던 불만사항 해결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으며, 그의 괴팍스런 시위방법으로 인해 경찰노조의 평판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점도 깨닫게 되었다.
결국 자임은 감옥에서 출소한 후, 집행부 투표에서 집행위원직에서 배제되고 마는 불운을 겪게 되고 말았다.
당시 천부적인 선동가인 제임스 마스톤(James Marston)이 경찰노조위원장이 되었으며, 보어전쟁 참전용사로서 인기가 높았던 토미 틸(Tommy Thiel) 순경이 지방자치경찰에 대한 경찰노조 조직책임자가 되었다.
경찰노조에 대해서 동조하는 입장을 갖고 있던 노동당 소속 의원들은 당시 런던수도경찰청 에드워드 헨리 경에게 경찰파업을 막기 위해서는 경찰노조를 인정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헨리 청장은 노사분규가 발생하면 파업금지 조항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 것이라고 확신했으며, 영국노총(TUC) 측에서 경찰노조를 접수하고 싶어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1912년,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인기 높았던 부두 파업 당시, 경찰은 단순한 질서 유지자로서보다는 오히려 파업 분쇄자로 동원되어 활용되어졌으며, 이는 영국노총 측을 극도로 분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1918년 만체스터 카운티 자치경찰청장은 잉글랜드 북부지역에서 경찰노조 조합원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틸이 서신을 보낸 것을 입수하여 이를 런던경찰청 측에게 보냈으며, 이로 인해 틸은 파면되었다.
경찰노조 측은 즉각 틸의 복직과 함께, 전시 인플레 및 정부측의 극도의 내핍 등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던 경찰관들에게 즉각 보수인상을 해주도록 요구하였다.
헨리 청장 및 그의 청장보는 보수가 순경이나 경사계급보다 더 많으며 나이도 연상에 속해 있는 총경 계급 측의 말만 듣고, 봉급보다는 오히려 연금에 대한 불만이 더 크며 따라서 경찰노조 측 요구에 대해 즉각 반응을 보여야 할 긴급성은 없다는 식의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마침내 경찰노조 측은 헨리 청장이 휴가 중일 때 헨리 청장이 예상한 대로 파업금지 약속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렸으며, 청장보인 우드하우스(Wodehouse)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1918년 경찰파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었으며, 전국의 경찰관들에게 상당히 많은 명확한 봉급인상 조치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로이드 조오지(Lloyd George) 해법에 따라 경찰관은 '전국 경찰관 및 교도관 노조 총연맹'에 가입이 허용되었다.
이때 단서조항은 경찰노조는 징계사항에 개입해서는 안되며, 형사혐의에 대해서는 경찰노조 대표를 보내 대변할 수 없고, 전시기간 동안에는 봉급과 근무조건에 관한 사항을 협상하는 기구의 기능을 정지시키도록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경찰노조 조합원 수는 지하조직으로 있을 때 2백 명 선이던 것이 영국 전역의 6만여 경찰관 중에서 거의 5만 명에 육박하는 경찰관들이 가입하여 포괄하는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래서 전국 경찰관 및 교도관 노조 총연맹 측은 회비를 거둘 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기관지인 '저널'(Journal) 지를 제작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마스톤과 잭 하이에스 경사는 현직 경찰관직을 사임하고 경찰노조로부터 봉급을 받는 풀타임 상근자가 되었다.
파업 해결과정에서 이룬 합의에서 약속되었던 대로 '경찰이익대변위원회'(경찰대표기구)가 설치되게 되자 런던경찰청 소속 경찰노조 조합원들이 거의 그 모든 의석에 당선되었으며 이 노조가 지명한 협상단이 경찰대변위원회 집행부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임 청장인 네빌 메크리디 경은 노조를 파괴해야 한다는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그는 경찰노조를 '소비에트'와 같은 존재라고 간주했던 것이다.
그는 경찰대변위원회에서 경사와 경위 계급의 별도 경찰노조를 따로 떼어내 재구성하기 위한 새로운 선거를 하도록 하는 책략을 구사했다.
결과적으로 경사와 경위 계급이 순경 계급에 비해 훨씬 더 온건할 것이라고 본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경찰노조 측은 조합원들에게 이 선거를 보이콧하도록 요청했으며, 새로운 경찰대변위원회에 후보를 거의 내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경찰노조는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았다.
실제로 노조측이 그 새로운 선거에서 획득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고작 상징적으로 스팩맨(Spackman) 순경의 순직을 인정받은 정도였다.
그와 동시에 런던 이외의 경찰노조 조합원들은 런던 지역 경찰관들이 경찰노조를 지배하고 있는데 대하여 강한 불만을 표출했으며, 이에 따라 마스톤은 경찰노조 위원장직을 상실하고 말았다.
데스버로우 위원회 측은 매크리디 청장이 경찰노조를 3개 계급으로 나누어 운영토록 하는 경찰노조총연맹(Police Federation) 방안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도록 결정했으며, 이로써 마침내 '전국 경찰관 및 교도관 노조 총연맹' 시대는 공식적으로 마감하게 되었다.
마스톤은 1919년 경찰파업 당시 자신이 런던지역에서 매우 인기가 높기 때문에 많은 경찰관이 파업에 동참하리라고 본 것은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다.
당시 마스톤 자신이 소속해 있던 라우톤(Loughton) 경찰서에서는 아무도 그의 파업참여 요청에 동참하지 않았다.
결국 이 '전국 경찰관 및 교도관 노조 총연맹'은 창립 때 신속하게 지지를 얻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신속하게 붕괴되고 말았으며, 마스톤은 공산당에 입당하여 '전러시아인단체협력연합회'(ARCOS : All Russian Cooperative Society)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그는 음주 습성으로 인해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사직하게 될 때까지 거기에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