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남씨 시조묘소(宜寧南氏 始祖墓所)
의령남씨 시조묘소(宜寧南氏 始祖墓所)는 조선(朝鮮) 100대(代) 명당(明堂)안에 속하며 의령군청(宜寧郡廳)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청룡(靑龍) 자락의 용맥(龍脈)에 명당(明堂)인가 구분하기가 어렵다.
下지점에 있는 것을 10m 정도 上으로 새로이 단장을 하였다.
남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문헌에는 57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영양·
의령·고성 3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상세히 알 수 없다.
이들 세 본관은 모두 같은 시조에서 분파한 혈족으로
남민(南敏)을 시조로 삼고 있다.
남민은 원래 중국봉양부 여남(汝南) 지금의 하남성 여남현 사람으로 본명은 김충(金忠)이었다.
그가 755년(경덕왕 14) 안렴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지금의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에 표착한 후 신라에 영주할 뜻을 밝혔다. 그러자 경덕왕은 중국여남의 여로 사성하고 이름은 민으로 지어주었으며 영양현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러나 시조 이하 누대가 실전되어 세계를 잇지 못하다가 고려조에 이르러 남민의 후손 3형제가 있어 첫째 남홍보(南洪輔)는 영양남씨, 둘째 남군보(南君甫)는 의령남씨, 막내 남광보(南匡甫)는 고성남씨의 1세조가 되어 각각 세계를 잇고 있다.
그 중 둘째인 의령남씨가 가장 번성하고 인물도 많이 나와 중추를 이루고 있다. 의령남씨의 계파는 판서공파·진사공파·중랑장공파·충간공파·직제학공파·의산위공파·강무공파·보문제학공파·사천백공파·좌찬성공파·시중공파·양정공파가 있다.
의령남씨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갈담리 파담마을에 주로 세거하였고 초부리 하부곡의 약천남구만(南九萬)의 묘 아래에 일부가 거주한다. 남구만은 효종 때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문장과 서화로 이름을 떨쳤으며, 숙종 때 소론의 영수가 되어 대제학·영의정 등을 두루 거쳤다.
5세손인 남계우(南啓宇)는 남나비·남호접 등으로 불릴 정도로 나비를 잘 그렸다 한다. 남구만이 은퇴 후 파담마을에 낙향하여 살았고, 사후 잠시 양주에 묻혔던 것을 제외하고는 옆 동네인 초부리 하부곡 뒷산에 묘소를 썼기 때문에 자연히 그 후손들이 거주하게 되어 파담은 남구만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조선 개국공신 남은과 그의 형 남재의 후손들이 광주와 용인 지역에 세거하고 있으며,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남은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면서 상대적으로 남재의 후손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근대에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출신으로는 독립 운동에 헌신한 남정각(南延珏)과 모현의 교육에 큰 자취를 남긴 남계양(南啓暘), 그리고 남태원(南台元), 남규원(南圭元) 등이 유명하다. 모현면 갈담리 파담에 남구만 후손이 세거하고 있으나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곳
은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창리이다.
남구만 영전 ~남씨 파보에서~
남씨 시조 기원(起源)
남씨 최초의 족보 계유보(癸酉譜) 시대적인 배경
우리나라에서 지금과 같은 체계적인 족보는 숙종(재위: 1675-1720)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는 족보가 없으면 사회적인 행세를 할 수가 없었다.
비록 양반이라도 족보가 없으면 상민(常民)으로 전락하게 되고,
또 양반에게는 군역(軍役)이 면제되는 특권이 있는데,
족보가 없으면 군역을 치러야 했었다.
그래서 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심지어 상민들은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 남의 족보에 끼어드는 폐습도 생기고, 본관은 하나인데 파(派)가 몇 개씩 갈라지고 그 파가 족보를 따로 만들어, 당파 싸움이 심해지면서 족속의 단결을 위해 족보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져 갔다.
이와 같이 숙종 대(代)는 족보의 전성기였다.
거의 대부분의 성씨가 이때에 만들어졌으니, 조선왕조 이전의 기록은 대부분 믿을 없는 것이 통례가 되어 있다.
남씨 족보 역시 이 범주를 벗어 날수 없다.
영양, 안동, 의령, 고성 중에서 그 당시 가장 번영을 누리고 있던 의령이 가장 족보편찬을 먼저 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697년(숙종 23년)8월에 발행된 의령 남씨 계유보가 남씨 최초로 발행한 정확한 족보로서 제일 오래된 것이다.
남구만(南九萬) 공이 계유보 서문(序文)
계유보는 1693년(숙종 19) 계유(癸酉)년에 남익훈(南益熏)이 함흥에서 최초 목판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도 족보의 서문이 있었을 텐데,
왜 4년 후에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 공이
발간경위 설명과 인사 정도가 아니고, 남씨의 유래를 위주로 쓴 머리글(序文)을 丁丑(1697)년에 다시 써서 대체하여야 했는가 하는 의문점이 나온다.
이는 필시 그 당시에 남씨 시조의 유래에 대한 논란이 많아,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 공이 직접 나서서 시조 공 김충(金忠)에 대해
“천보 년대(天寶年代)에 당 현종(玄宗)이 촉(蜀)에 행차할 때 시종한 신하로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신라에 표착하였다는 기록은 당서(唐書)에나 동사(東史)에 하나도 없고, 안렴(按廉)이란 직명도 또한 천보 년대에는 없었으니, 이것이 모두 후세 사람들이 말로만 서로 전해서 들은 대로 기록하였으니, 고증(考證)할 수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역사적으로 의문시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서기 755년의 당시의 역사적 정세 고찰
(영양, 의령, 고성) 분파되기 이전의 500여 년 동안의 기록은 대부분 유실되어 버리고, 시조 영의 공 남민(敏)의 신라 표착 사실도 당나라 서적 또는 동사(東史, 조선 역사)에도 그 기록이 없고, 후세 사람들의 구전(口傳)과 수문(隨聞)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3파로 분파된 1세조 이상의 대(代)는 전해 내려오는 기록이 부정확하고, 1세조 이하는 정확한 기록이라 믿을 수 있다.”라고 구보(舊譜)에서 전하여 오던 얘기를 쓸 수밖에 없는 사정을 토로 하면서 일단락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 755년의 당시의 역사적 정세 고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14) 서기 660년 신라 무열왕(武烈王) 7년에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 문무왕(文武王) 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켜 형식상으로는 삼국통일을 완성하였으나,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땅은 물론 신라에까지 계림도독부(溪林都督府)를 설치하여 문무왕을 계림도독(溪林都督)으로 삼았다.
신라는 이에 맞서 676년에는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 부대가 서해를 들어온 것을 이를 격파하여 제해권(制海權)을 쥐게되자,
당나라 도독부도 겁을 집어 먹고 철수하자 비로소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통일신라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시조 영의공(英毅公)의 신라(新羅) 유린(有隣)에 표도(漂到) 한 것이 755년 경덕왕(景德王) 14년이니,
이시기의 신라는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려 극성기(極盛期)에 있을 때다.
경덕왕(景德王) 14년의 중요한 년중 사기(史記)를 보면 4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나와있고,
경주 분황사(芬皇寺)의 약사여래(藥師如來) 동상(銅像)을 주조(鑄造)하였고, 효자(孝子) 동덕(同德)에게 상을 준 기록이 나와 있을 뿐, 중국사신의 표도(漂到)해온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당천보(唐天寶) 14년의 당사(唐史)
서기 755년 당천보(唐天寶) 14년이면, 당사(唐史)의 기록은 거의 전부가 안록산(安祿山)의 반란(反亂)에 관한 기록(記錄)으로 매워져 있다.
이해 11월에 평노절도사(平盧節度使)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글씨체로 유명한 안진경(顔眞卿)이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12월 달에는 고선지(高仙芝)를 부원사(副元師)로 삼아 난(亂)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안록산은 12월에는 이미 동경(東京)을 함락 시켜버렸다.
황제 현종(玄宗)은 서촉(西蜀)으로 피난(避亂)하고 756년 천보(天寶)15년 6월에는 양국충(楊國忠) 및 그의 여동생 천하일색을 자랑하던 양귀비(楊貴妃)도 사사(賜死)되었다.
황제 현종(玄宗)은 다시 마외(馬嵬) 로 피난하였다.
서기 757년에는 숙종(肅宗)이 등극하고 이해 1월에 안경서(安慶緖)가 자기 아버지인 안록산(安祿山)을 죽이고, 9월에는 곽자의(郭子儀)가 서경(西京)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758년에는 다시 사사명(史思明)이 반란(反亂)을 일으켜 759년 건원(乾元) 2년에는 사사명(史思明)이 안경서(安慶緖)를 죽이고 연왕(燕王)으로 자칭(自稱)하게 되었다.
서기 760년 11월에는 다시 유전(劉展)이 반란을 일으켜 다음해 1월에 유전(劉展)이 잡혀 사형당하고,
3월에는 사조의(史朝義) 사사명(史思明)도 사형 당하였고, 서기 762년에는 황제(皇帝) 숙종(肅宗)이 사망하였다.
이와 같이 서기 755년 당천보(唐天寶) 14년 부터 불과 6년사이에 황제(皇帝)가 두번이나 바뀌고 해마다 반란(反亂)이 계속되어, 당(唐)나라는 이를 진압하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고, 김충(金忠)에 관한 기록이라던지 일본에 사신을 보낸 기록 등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일설에는 영의공(英毅公)이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을 피하여 동국(東國)에 왔다고 하나 이 설도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동국에 왔다면 이듬해인 경덕왕(景德王) 15년으로 시기가 맞지 않고, 계유보에 전연 없는 얘기이다.
정사(正史)에 어떤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이 없으니, 사학적(史學的)인 연구로 이를 구명(究明)해 나갈 도리(道理)가 없다.
참조 : 영양 남씨 남경칠씨의 카페 글
안록산의 반란군에 항전한 남씨 성(姓)의 <남제운>장수의 활약상
당천보(唐天寶) 14년 11월에 평노절도사(平盧節度使)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동경(東京)을 함락 시켜버렸다.
황제(皇帝) 현종(玄宗)은 서촉(西蜀)으로 피난(避亂)하고, 756년 천보(天寶)15년에는 다시 장순과 함께 반란군의 윤자기군 13만명을 상대로 끝까지 항전하는데, <남제운>이란 남씨 장수의 마외(馬嵬) 로 피난하였다.
이 시기에 특기 할 만한 일은 6천명의 군사로 수양성을 지키고 있던 허원은 맹활약으로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수차례나 적을 격퇴시켰으나, 중과부족으로 끝내 함락되어 처형당했다.
그러나 그 항전의 여파로 반군들의 힘이 많이 소모되어 3일후에 하남절도사 장호가 거느린 지원병이 윤자기 일당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 당시에 중국에는 이미 남씨가 존재해 있었고, 오늘날에도 100위 이내에는 들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시조공의 표류 시 동해상의 조류는 남방지역으로 남하
이와 같이 사실을 미루어 보았을 때 동해상에서의 조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쪽에 표류하게 될 것으로 보아진다.
시조의 기원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영양 김씨와 평해 구씨
다른 점은 함께 일본에 다녀오던 그의 첫째 아들인 김석중(錫中)은 성을 받기 전에 출생하였으므로, 본래의 성을 따라 영양 김씨로 하였으며, 후에 출생한 자식들은 성를 남씨로 하였다는 것이다.
남민이 최초로 살았다는 곳이 축산(丑山)이라 하고 축산에는 남민과 그의 후손들이 김씨들과 함께 살았다는 김이부동(金吏部洞)이라는 마을 이름이 아직도 동네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영양 김씨는 그 이후 몇 대에 걸쳐 후대의 기록이 없으므로 후손인 김충황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영양으로 하고 있고, 재실도 영양 남씨 재실과 똑 같은 여남 강당을 사용하고 있다.
영양 김씨 집성촌(集姓村)으로 경북 영천군 화산면 연계동. 봉화군 봉성면 외삼리에 평해 구씨(平海丘氏)의 기원도 비슷한 시기에 우리와 비슷한데,
당나라 장군 구대림(丘大林)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풍랑을 만나 울진, 평해에 표착하여 구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족보가 성행하던 시대는 의령남씨 계유보 발행시(1693년)와 비슷한 시기인 숙종(1675~1720년) 때부터 크게 유행하여 대부분의 성씨가 이때에 족보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씨의 시조가 모화사상(慕華思想)의 영향으로 중국과 연관하여 있는 성씨가 240개 성씨로 외래성씨가 우리나라 성씨의 53%에 달한다고 하니,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영양 남씨는 경주 김씨에서 개성(改姓)되어 나간 성씨로
남씨 시조가 경주 김씨로부터 나왔다고 당사자인 남씨 후손들에게 주장하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며, 터무니 없는 얘기로 한마디로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경주김씨 (김알지 계) 대동보에서는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 자신들의 성씨에서 <영양남씨>로 개성(改姓)되어 나간 성씨로 엄연히 기록되어 있고,
인터넷에서 경주김씨 분관록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내용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고,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씨는 가락(駕洛) 김씨이외에는 전부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로 약 400여 본관에 이르며 아래와 같다.
동원이관성(同源異貫姓)
안동권씨, 광주이씨, 수성최씨, 감천문씨, 강릉왕씨, 철원궁씨, 곡산연씨, 태안함씨, 영양남씨
9세기 이후 후삼국이 출현할 무렵 통일신라는 통치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각 지방에 실질적인 세력가로 등장한 것이 바로 호족 이었다.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 신라의 왕권은 진성여왕이후 급속도로 붕괴되기 시작 하였다.
진성여왕은 왕위에 오르긴 하였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자신의 숙부이자 남편인 위홍에게 있엇는데, 위홍이 1념만에 죽고 말앗다.
위홍이 죽고나자 진성여왕은 타락하여 왕으로서의 지도력은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최치원은 당에서 돌아오자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신라말의 사회 개혁을 추진했으나, 진골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쳐 뜻이 좌절되자 은둔하였다.
진성여왕이후 등극한 효공왕때에는 신라의 영향력은 죽령 이남으로 후퇴되었고, 왕권은 서라벌 이외의 지역에서는 유명무실하였다.
효공왕이 개혁을 포기하고 정사를 게을리 하자 김씨를 제쳐두고 박씨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가 곧 신덕왕인데, 5년만에 타계하자 아들인 경명왕이 이었다.
경명왕 이후 신라는 고려와 화친하고,
경애왕 때에는 노골적으로 후백제를 적대시 하였다.
이에 몹시 분개한 견훤은 927년 신라지역인 영천을 공격하였고,
이에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견훤은 남하하는 왕건을 상대하지 않고,
경주를 공격하게 되자 무방비 상태로 있던 경애왕은 달아나다 붙잡혀 자진케 하고 만다.
견훤은 경애왕을 대신하여 경순왕을 오르게 하였다.
경순(敬順)왕은 신라 마지막 제56대왕(재위 927-935년)으로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부, 경애왕의 외 종재였다.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이미 왕으로서의 권위가 전혀 없었다.
그저 고려와 후백제에 의해 형식적으로 유지되고 있을 뿐,
양국의 싸움에 의해서 결정 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경순왕 10년인 935년 경순왕은 사방의 영토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소유가되어 존립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소신료들을 이끌고 고려에 항복하여 개성으로 가 고려에 귀화하고 만다.
경순왕은 신라3성인 박.석.김씨중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후손으로 왕건의 맏딸 낙랑공주를 후비로 맞았으며,
아들 아홉중 장자(마의 태자)와 차자는 왕위에 있던 때의 죽방 부인의 소생이며, 나머지 7자는 고려에 귀순한 뒤의 낙랑공주의 소생이다.
장자 마의태자(麻衣太子)는 신라가 망하자 통곡하며 왕에게 하직을 고한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 일생을 마쳐 후손이 없고,
차자는 나주 김씨, 3자, 4자는 경주 김씨, 5자는 의성 김씨, 6자는 강릉 김씨, 7자는 언양 김씨, 8자는 삼척 김씨, 9자는 울산 김씨로 각기 분종 되었으며, 그 후손으로 다시 전주 김씨, 안산 김씨, 도강 김씨, 양근 김씨, 영천 김씨 등이 있다.
참고로 경주 김씨 계의 본관으로 안동.의성.강릉.선산.언양.상산.나주.울산.김녕.안노.수원.광산.연안.청풍.고령.순천.청도.서흥등 400여 본이 있다.
경순왕 직계외에도 신라가 극도로 부패하고 잇단 민란으로 국운이 기울어가자 신라왕족인 김씨 중에는 궁예와 같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거나,
고려 왕건을 도와 고려 공신이 되어 성(姓)을 사성(賜姓)받는 등 신라 멸망을 전후로 새로운 성씨들이 많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김알지 후손의 경주 김씨에서 새로 생긴 주요
동원이관성(同源異貫姓)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본성(本姓)이 김씨(金氏)로 승호(僧號)가 선종(善宗)이다.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하여 독자 세력화했다.
918년 장군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등의 모의로 왕건(王建)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가 철원에 도읍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철원으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순천김씨(順天金氏), 광산김씨(光山金氏), 광산 이씨 등은 궁예와 관련이 있거나 궁예의 후손으로 전해지고 있다.
안동 권씨(安東權氏)
시조 권행(權幸)은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본래의 성은 김씨이다.
신라말 경애왕 때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입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추대하였다.
이에 격분한 권행은 930년(경순왕 3년) 겨울 후백제의 견훤이 대군을 몰아 고려 태조와 대치했을 때 이 고을 성주 김선평(신 안동김씨 시조)
그리고 이 곳 지도급 인사 장정필(안동장씨 시조) 의논과 함께 향병을 모으고 태조 왕건을 도와 고창군 병산(지금의 안동군 와룡면 서지리)에서 견훤의 8천 대병을 함몰시키고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 고창은 후삼국의 전략상 중요 지역이었으며, 병산에서 이들 세 사람의 도움으로 승리함으로서 후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항복 등 삼국통일에 큰 영향을 준 싸움이었다.
김행의 공을 가상히 여긴 고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권씨 성을 내리고 벼슬을 삼한벽상아부공신 삼중대광태사로 제수한 후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고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안동을 본관으로 하였다.
태안 사씨(泰安舍氏)
사씨(舍氏)는 본래 광산김씨(光山金氏)였던 김극윤(金克胤)이 성(姓)을 사씨로(舍氏) 개성(改姓)하였고 본관을 태안(泰安)으로 하였다고 전 한다
감천 문씨
감천 문씨 시조는 경주 김씨 17대손(고려초 900년 이후 30X17=510년)
김고벽(생몰 1410년-오차 50년)의 아들로 전한다.
김고벽이 남양 문씨 감천공파의 사위가 되었고, 그의 아들이 모계성인 문씨 성을 개대하면서 감천 문씨가 창성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강릉 왕씨
강릉 왕씨는 신라 명주 군왕 김주원(金周元)의 6대손 김선희(金善希)의 아들 김예(金乂)
또는 왕예(王乂)을 시조로 하는 성본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김주원의 7대손 김예(金乂)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김예(金乂)에게 왕씨 성을 사성 하면서 창성되었다.
이후 고려 태조 왕건의 아들 왕유도 강릉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김씨 성(姓) 고찰
오늘날 중국의 성씨는 56개 종족에 12,000여개의 성씨가 있을 것이라고 그것도 추정된다고 하니, 가히 13억 인구답게 성씨 백화점이라고 할 만하다.
혹자는 중국에는 김씨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김(金)씨가 없는 것은 아니고, 표기는 같이하되 부를 때에 <금씨>라고 한다.
따라서 본래 남씨의 시조로 일컫는 김충(金忠)은 <금충>이라 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김씨는 신라시대에는 왕손의 성씨로 귀한 성씨였으나,
오늘날에는 약 22%로서 5명중 1명일 정도로 많다.
중국에서는 이(李)씨가 제일 많고, 다음 왕(王)씨, 장(張)씨 순으로 금씨는 64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보아 당나라 시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지며, 금씨는 그리 흔한 성씨가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김충의 고향이라고 하는 중국의 여남에 남씨 대종회에서 김충의 남씨 기원사적을 세울 적에, 그곳에 김씨들이 살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추진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았을 때 신라 왕실 김알지 계통의 경주 김씨에서 개성(改姓)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중국(中國) 도래설(到來說)이 아닌 신라가 멸망할 시기인 경순왕 때 일 것으로 추론(推論)되는데, 이에 대한 사학(史學)적인 연구가 더 필요하다.
참고자료 : 인터넷 검색 자료 - 경주 김씨 대동보, 경주 김씨 분관록
족보에 대하여 중 <동원이관성同源異貫姓>
철원 궁씨
철원 궁씨 시조 궁예(弓裔)는 신라 제48대 경문왕(또는 헌안왕의 손자)의 아들이다.
그는 본성(本姓)이 김씨(金氏)로 승호(僧號)가 선종(善宗)이다.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하여 독자 세력화했다.
918년 장군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등의 모의로 왕건(王建)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가 철원에 도읍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철원으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순천김씨(順天金氏), 광산김씨(光山金氏), 광산이씨등은 궁예와 관련이 있거나 궁예의 후손으로 전해지고 있다.
강릉 왕씨
강릉 왕씨의 인구수는 2000년 기준 442가구 1526명이다. 강릉 왕씨는 신라 명주 군왕 김주원(金周元)의 6대손 김선희(金善希)의 아들 김예(金乂), 또는 왕예(王乂)을 시조로 하는 성본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김주원의 7대손 김예(金乂)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김예(金乂)에게 왕씨 성을 사성하면서 창성되었다. 이후 고려 태조 왕건의 아들 왕유도 강릉을 본관으로 하였다. 조선 개국과 함께 신라 호족계 강릉 왕씨는 대부분은 본래 성으로 복성하고, 고려 왕씨들은 타성으로 개성하였다고 전하지만, 2000년 인구조사에 강릉 왕씨 442가구, 1,526명으로 실존하고 있으므로, 조선 초기 모든 강릉 왕씨들이 일괄적으로 김씨로 복성하거나, 타성으로 개성하지 않았다는것을 반증하고 있다. 현재 신라 호족계 왕씨, 고려 왕씨의 후손들이 소수지만, 강릉을 본관으로 세계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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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이씨
광산 이씨는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 헌안왕의 7세손 이정(李靖)을 시조로 한다. 득성조는 이정의 아버지는 이종금(李宗金)으로, 그는 1010년 고려 현종 때 거란의 40만 대군을 강감찬 장군과 함께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1018년 거란의 3차침입때에도 강화성을 굳게 지켜 광산군에 임명되고 이종금(李宗金)이라는 성명을 하사받았다. 후손들은 이종금을 득성조, 그의 아들 이정을 시조로, 이정의 7세손 이순백, 이숙백, 이승백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수성최씨(隋城崔氏)
시조 최영규(崔永奎)의 본래 성은 최씨가 아니라 김씨다. 경주김씨에서 분적한 안동김씨의 후예로 신라 경순왕 김부의 13세손이다. 그는 고려 원종 때 서경의 학도들에게 학문을 가르쳐 명망이 높았다. 충열왕 때 지금의 수원 일대에 풍속이 퇴폐하고 사람들의 행동이 짐승과 같아 왕이 개탄했다. 이 때 최영규가 자청하여 호장으로 나가 백성을 잘 다스려 윤리. 도덕을 회복시킨다. 왕이 가상히 여겨 1302년(충열왕28년) 그를 수원백에 봉하고 최씨를 사성(賜姓)했다. 수성은 수원의 옛 이름이다.
시조 최영규의 5세손 최경 이 평택시 송탄으로 옮겨간 귀 현재도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들은 안양공파의 직계 후손이다. 가산공파와 찬성공파도 모두 송탄에서 뿌리를 내리다 인근으로 옮겨갔다. 유수공파는 4세손 최거경이 과천에 살다가 고향인 나주로 옮겨갔다.
최원개는 공민왕 때 시무 18책을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의 아우 최문개도 벼슬을 떠나 학문에 전념했다. 최희량이 임진왜란 때 쓴‘파왜보첩’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양양김씨 시조 김충(金忠)의 유래
원조 김충(忠)은 당나라 하남성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으로서 형주자사(刑州刺使)를 지냈다.
755년(신라 경덕왕 14, 당나라 현종)에 안염사(安廉使)가 되어 당(唐)의 사신으로 일본(日本)에 다녀오는 도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신라 유린지(有隣地, 지금의 영덕군 축산면)에 도착하게 되었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이를 알고 당나라에 통보하였으나 당나라 천자가 김충의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하자 경덕왕이 영양군(지금의 경북 영양군)에 봉하고 여남(汝南)에서 왔다며(일설은 남쪽에서 왔다고 해서) 성을 남(南)씨로, 민첩하다하며 이름을 민(敏)으로 해서 하사함으로써 남(南)씨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함께 일본에 다녀오던 그의 첫째 아들인 김석중(錫中)은 성을 받기 전에 출생하였으므로 본래의 성을 따라 영양 김씨로 하였으며 후에 출생한 자식들은 성을 남씨로 하였다.
그래서 영양김씨와 남씨는 성은 틀리나 원조는 김충으로 같다.
그러나 그 이후 몇 대에 걸친 후대의 기록이 없으므로 후손인 김충황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영양으로 하였다.
남민이 최초로 살았다는 곳이 축산(丑山)이라 하고 축산에는 남민과 그의 후손들이 살았다는 김이부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아직도 동네 사람들에게 전해내려 오고 있다.
모두 같은 시조에서 분파한 혈족으로 영의공 남민을 유일조로 삼고 있다. 시조 남민은 원래 중국 봉양부 여남(지금의 하남성 여남현) 사람으로 본명은 김충 이었다.
그는 775년(경덕왕 14) 당나라 현종 때 이부상서로 안렴사가 되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 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신라 유린지( 지금의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에 표착, 신라에 영주할 뜻을 밝히자 경덕왕은 그가 남쪽에서 왔다하여 성은 <남>, 이름은 <민>으로 사성명하고, 영양현을 식읍으로 하사하였으며, 사후에 시호를 영의로 내렸다.
그러나 시조 이하 누대가 실전되어 세계를 잇지 못하다가 고려조에 이르러 남민의 후손 3형제가 있어 맏이 홍보(관직 삼중대광 도검의찬성사)는 영양남씨, 둘째 군보( 호 백천, 관직 밀직부사)는 의령남씨, 막내 광보(고성군)는 고성남씨의 1세조가 되어 각각 세계를 잇고 있다. 그 중 둘째 집인 의령남씨가 가장 번성하고 인물도 많이 나와 중추를 이루고 있다. 시조의 묘소는 영양현 북도항 동대항구(지금의 영양군 영양읍 동부동)에 있었다고 전하나 실전되고, 1675년 그 산서편에 제단을 모아 매년 10월 10일에 향사하고 있다. 남씨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움으로써 중앙 정계의 중추에 오른 뒤 왕실과 척연을 맺거나 당쟁에 깊숙히 관여하였고, 또 대대로 현신과 석학을 배출하여 명문의 열좌에 올랐다. 남씨는 조선조에서 상신 6명, 대제학 6명 호당 3명, 청백리 1명, 공신 7명, 장신 1명을 배출했다.
상신 6명은 본관별 서열로는 20위에 지나지 않지만 씨족 규모에 비해서 대단한 숫자요, 대제학 6명은 전주이씨 연안이씨 광산김씨의 각 7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그리고,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과 조선조에서 충무로 시호를 받은 인물 9명 중 한 사람인 남이를 내어 더욱 빛난다. 문과 급제자는 모두 180명으로, 이를 본관별로 분류하면 의령남씨가 139명, 영양남씨가 28명, 고성남씨가 8명, 본관미상이 5명이다.
의령남씨의 1세조 남군보의 증손 을번, 을진, 을경 3형제중 을진은 고려 말기의 명신으로 국운이 기울자 사천(양주의 속령)에 은거, 조선 개국 후 태조가 불렀지만 불응했다.
그의 충절에 감복한 태조가 사천백에 봉했으나 이를 오히려 수치로 알고 감악산 깊숙한 석굴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을번은 고려 말에 밀직 부사를 지내고, 조선 개국공신이 된 아들 재, 은의 공으로 검교시중이 되었다.
남재, 남은 형제는 같은 개국공신이면서도 태조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상반된 길을 걷게 된다. 남은은 방원, 정도전등과 함께 조선 개국의 중추 세력이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함께 세자 방석의편에 가담했다가 방원에게 살해당했다. 남재는 1차 왕자의 난 때 잠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태종 즉위 후 세자사부가 되고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라 남씨의 첫 정승이 되었다. 그의 손자 남지는 좌의정, 남간은 예문관 직제학, 남휘는 태종의 사위가 되었다. 남이 장군은 남휘의 아들로 태종의 외손이자, 좌의정 권람의 사위이다. 그는 세조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 적개공신에 올랐으며, 북변의 여진족을 소탕하는 등 무훈을 쌓아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평소에 그를 시기하는 류자광의 모함으로 예종 즉위년에 죽임을 당했다. 문정공 남효온은 남간의 증손으로 김종직의 문인이며, 김굉필 정여창 김시습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그는 세조에 의해 물가에 이장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의 복위를 상소했다가 묵살 당하자 실의에 빠져 유랑 생활로 생애를 마쳤다.
연산군 때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 복위를 상소했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까지 당하였다. 만녕에 저술한 <육신전>은 빛을 못 보다가 숙종때 비로소 간행되었다. 뒤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 생육신의 창절사에 제향 되었다. 지족당 남곤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중종 때 훈구파 대신으로 심정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신진사림파를 숙청한 후 좌의정이 되었다가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남씨는 이렇듯 부분적으로 화를 입기도 했으나 그 세력은 꾸준히 확장되어 성종 때는 남지의 증손 치원 섭원이 부마가 되어 왕실과 척연을 굳게 했고, 선조조 이후는 사색당쟁과 밀접히 연관되면서 숙종조에 이르러서는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일가이면서도 정치적 이해로 당파를 달리하기도 했다. 남씨 중에서도, 특히 좌의정 남지의 후손들이 북인과 소론으로 갈리게 되었다.
<소북>의 영수였던 남이공은 남지의 6대손으로 본래 북인의 강자였는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북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자 류영경 등과 함께 소북을 영도했다.
그러나 선조 말년에 이르러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소북과 대북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대북이 추대했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소북은 쇠운을 맞았다.
한편 서인의 분파인 <소론>의 영수였던 문충공 남구만은 남지의 셋째아들 남구의 7대손이다. 숙종 때 대제학 영의정을 지낸 그는 기사환국으로 유배생활을 하다가 갑술옥사로 남인이 몰락하면서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문헌공 남공철은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낸 남유용의 아들로 순조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학자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당시 제일의 문장가로 시와 글씨에 뛰어나 많은 금석문과 비갈을 썼다. 철종 때 대제학을 지낸 문정공 남병철은 남유용의 형 남유상의 5대손이다. 문정공 남이웅은 남공의 사촌으로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공신에 오르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충장공 남이흥은 부총관 포도대장 등을 지내고 이괄의 난을 평정, 진무공신에 올랐으며 정묘호란 때 안주성을 사수하다가 끝내 순절했다.
한편 고성파로 집현전 출신 학자 남수문이 <고려사절요>의 초고를 썼으며 벼슬은 직제학에 이르렀다. 남주는 기묘사화 때 조광조일파로 몰려 남곤에 의해 추방당한 후 시문에 전심했다. 영양파로는 남사고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역학풍수 천문 복서 상법 등에 도통하였고, 특히 풍수학에 조예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주유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밖에 남치리 남해준 남용만 등이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유명한사람으로는 우선 정승의 반열에 오르신 남재 공(公)과 남이장군, 그리고 조광조를 모함하였다는 남곤(南袞), 그리고 조선후기의 소론의 영수엿로 영의정까지 오르셨던 남구만공 그리고 순조때 영의정을 지내신 남공철 공..
그리고 남공철공의 아버지로 대제학으로 정조대왕을 가르치는 일도 맡으셨다는 남유용공 등이 잇는데..
역시 유명한분으로는 남재공과 남이장군, 그리고 소론의 영수인 영의정 남구만공 그리고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을 숙청하여 영의정까지 오른 남곤 공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유명한 점술가로 격암유록 이라는 예언서를 낸 격암 남사고도 의령남씨이며 생육신의 한사람인 남효온 공도 의령 남씨입니다.
남씨의 족보가 제일 처음 체계화된 것은 남사고(南師古, 1509-1571)에 의해서라 한다.
조선후 기때 번성하던 가문중의 하나로 의령남씨로 곱고, 남씨의 본관은 문헌에 50여 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위의 3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자세히 살필 수가 없다.
집성촌(集姓村) : 경북 영천군 화산면 연계동, 경북 봉화군 봉성면 외삼리
본관지(本貫地) : 경북 영양(英陽)
인구(人口) : 1985년도 6,850명,
2000년도 7,462명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전국에 53,016가구에 222,26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남씨 (南氏)의 본관
경주 |
고령 |
고성 |
남양 |
남원 |
남평 |
밀양 |
보성 |
선령 |
안동 |
영양 |
율영 |
의령 |
일흥 |
진주 |
창녕 |
함열 |
해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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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8개의 본관과 222,246명이 있다.(1985년)
출처~백과사전.남씨카폐 와 본인 답사기를 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