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대한 게오르규의 예언
지은이 C.V. 게오르규
옮긴이 민희식
출판사 범서출판사, 1984, 쪽수 192
한국에 대한 게오르규의 예언
게오르규 박사
게오르규(constantin virgil gheorghiu, 1919~1992)는 소설 「25시」로 세상에 알려진 루마니아의 작가이자 정교회의 사제다. 그는 1949년에 「25시」를 간행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25시」에서 그는 서구 물질문명의 붕괴와 동방에서 빛을 발할 영적 부흥의 도래를 예언했었다. ‘빛은 동방에서 온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25시」란 서구 물질문명이 초래한 인간성 부재의 상황과 폐허의 시간, 절망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게오르규는 「25시」가 출간된 지 25년 후인 1974년, 그 절망에서 인간을 구원할 동방은 한국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1974년 3월 「문학사상」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25시」에서 자신이 예언한 동방은 동양의 ‘작은 나라’인 한국이 분명하다고 했다.
“… 나는 25시에서 직감적으로 ‘빛은 동방에서 온다’는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빛은 아시아에서 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25시」를 읽은 젊은 사람들은 그 「동방」이 모택동의 중공을 의미하는 줄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중공은 빛과 반대되는 암흑의 세계인 것을 압니다. 내가 작품 속에서 빛이 온다고 말한 그 동방은 당신네들의 작은 나라, 한국에 잘 적용되는 말입니다. 이것은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며 당신네들의 마음에 들려고 과장해서 하는 말도 아닙니다.
내가 그걸 알 수 있는 것은 구주이신 예수님이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신 걸 알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 지도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는 태어났습니다. 광명의 상징인 예수님이 베들레헴이라 불리는 그 소촌(小村)에서 태어나리라는 것을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빛은 결코 뉴욕이나 모스크바나 북경과 같은 큰 도시에선 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무명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온 것처럼 지금 인류의 빛도 작은 곳에서부터 비쳐올 것입니다.
내일의 빛이 당신네 나라인 한국에서 비쳐온다 해서 놀랄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네들은 수없는 고난을 당해온 민족이며, 그 고통을 번번이 이겨낸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고난의 수렁 속에 강제로 고개를 처박힌 민족이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고개를 쳐든 사람들입니다. 당신네 한국사람들은 내게 있어서 젊은 시절에 읽은 성서의 ‘욥’과 같은 존재입니다…”
(제1·2차 강연-이화여대·대구 계명대, 1974년 *「문학사상」, 1974년 5월호, p.60~61, 게오르규, 「25시를 넘어 아침의 나라로」, 서울: 문학사상사, 1987, p.76~77)
게오르규의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부합하는 예언적인 말이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그가 모르고 있던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을 발견함으로서 25시라는 흑암의 시간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지구상에 아직 소망의 빛이 남아 있음을 예언적으로 인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을 ‘열쇠의 나라’라고 정의하였다. 25시의 절망에서 인간을 구원할 열쇠가 한국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지도를 펴놓고 유심히 살펴보면 한국은 열쇠처럼 생겼는데, 한국은 동아시아와 러시아(유럽)가 시작되는 ‘태평양의 열쇠’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도상에서 한국은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가 연륙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대륙이 시작되는 위치에 열쇠처럼 걸려있다. 그는 세계의 모든 난제들이 ‘열쇠의 나라’ 한국에서 풀릴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이다. 아주 뛰어난 영적 직관이 아닐 수 없다.
게오르규는 「25시」의 어두움 속에서 영적 등불이 될 한국이 존귀한 나라임을 분명히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또한 한국을 ‘아시아의 보석’ 이라고 예찬했다:
“한국은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극동 아시아의 하나의 반도이다. 그러나 평면구형도(平面球形圖)를 놓고 볼 때 그것은 반도가 아니다. 한국은 아시아 대륙의 귀고리다. 아시아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 자리에 한국이라는 귀고리를 달아 놓은 것이다. 한국은 보석처럼 정교하게 깎여지고 만들어지고 가꾸어진 것이다. 그 해안은 레이스로 되어 있다. 칠보로 되어 있다. 그것은 정말로 자수이다. 오직 보석만이 그런 식으로 재단된다.
한국은 반도가 아니고 하나의 장식품이다. 하나의 보석, 하나의 귀고리다. 레이스로 수놓은 1천8백㎞의 해안에 3천4백 개의 섬이 있다. 세공된 크고 작은 섬, 온갖 형태의 섬들이 해안을 장식하고 있다. 이 해안에서 등을 돌려 한국의 내부로 시선을 돌린다면 한국이 보석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지리학자는 이 반도는 3/4이 산악지대라고 말할 것이다. 구름 위까지 뻗치는 산이 있고 거기에 다른 산들이 연결되어 있다. 토지의 기복을 제하면 그것은 해안과 마찬가지인 레이스이다. 산들은 구름에 걸린 레이스와도 같다. 레이스를 이루는 산꼭대기인지, 하늘과 구름인지를 때로는 분간할 수가 없다. 아시아의 귀고리는 부조(浮彫)로 된 작품이다. 그 산은 칠보의 레이스이다.
지도상의 한국은 매우 작다. 모든 보석이 그런 것처럼 하나의 귀고리는 제아무리 커도 역시 작은 것이다.”(게오르규, 「25시를 넘어서 아침의 나라로」, 문학사상사, 1987, p.15~16)
지도를 펴놓고 살펴보면 일본은 장검(長劍)처럼 생겼다. 그래서 ‘칼잡이’ 사무라이의 나라다. 일본은 ‘아시아의 칼’이다. 총검을 들고 전쟁을 일으켜 무수한 인명을 살상한 전범 국가이며 침략근성은 바로 그들의 현저한 민족성이다. 왜구들의 노략질, 임진왜란, 한일강제병합, 남경대학살, 태평양전쟁, 독도침탈 등의 야욕을 보라. 또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칼로 자기 배를 ㄱ자로 갈라 창자를 쏟아져 나오게 해 목숨을 끊는 ‘할복’이라는 자살방식을 보유한 독종 민족이다. 이렇게 섬나라 일본은 장검처럼 생긴 칼의 나라답다. ‘아시아의 칼’ 일본이 청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우리 한국 영토의 모양은 게오르규의 지적과 같이 열쇠처럼도 생겼고 귀고리처럼도 생겼다. 그런데 여기서도 게오르규는 한국이 ‘작은 나라’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아시아 대륙에 한국이라는 귀고리를 달아 놓으셨는데, 모든 보석이 그런 것처럼 귀고리는 제아무리 커도 작다는 것이다.
현재 13억의 인구대국 지나에는 8천만 명이라는 많은 수효의 기독교인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느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과 어떤 나라를 선택하여 마지막 주자로 쓰시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덩치 크다고 쓰시는 사대주의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작고 약한 것을 선택하여 크고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성경은 하나님이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시는 분이라고 말한다(시 8:2). 즉 세상의 약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영적 현자와 강자로 만드셔서 잘난 체 하는 자들의 허위와 교만을 격파시키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항상 ‘소수’로 하여금 ‘다수’를 압도하게 하신다. 그는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레 26:8)라고 말씀하셨다.
기드온이 미디안, 아말렉을 비롯한 여러 이방족속의 연합 공격에 대비하려고 32,000명의 군사를 모집했을 때, 하나님은 31,700명을 집으로 돌려보내셨다. 그분은 단 300명으로 승리를 주시고자 했다(삿 6:33; 7:1~8). 약한 것들을 들어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없는 것들을 선택하사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만들려는 것이 자비하신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심지어 이스라엘을 천손민족으로 선택하신 이유도 그들의 수효가 작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으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작으니라.”(신 7:6~7).
그렇다! 수효가 많지 않은 작은 나라를 선택하셔서 인류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것이 자비로운 하나님의 성품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임으로 오히려 큰 소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대주의(事大主義)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효가 13억이 넘는 지나와 같은 영토대국, 인구대국은 ‘마지막 주자’로 쓰실 백성이 아니라고 얼마든지 단정할 수 있다. 이 글의 논지를 잘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우리나라만 쓰신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지나 교회는 선교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선교활동 영역에서 이웃 나라들과의 파트너십을 부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승패를 결정짓는 마지막 전투일수록 ‘소수 정예 특수부대’가 더욱 필요하다. 특수부대는 혹독한 훈련을 많이 받은 부대다. 하나님께서 우리 겨레를 수천 년 동안 고난으로 단련하신 까닭은 “마지막 전쟁의 특전사 군대”로 쓰시기 위해서다. 즉, 다섯이 백을 쫓고 백이 만을 쫓는 하늘나라의 특전사 부대, 그들이 바로 ‘알이랑 민족’ 한국인인 것이다.
충전을 오래 한 배터리는 강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을 배터리로 비유한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충전할까? 그것은 ‘고난’일 것이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우리 겨레는 오랜 세월 고난으로 충전되었다. “열방 백성들아 너희가 고난을 아느냐?” 지금도 우리는 국토가 분단되어 60년 이상 엄청난 고난을 겪고 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렇게 크고 긴 고난을 허락하셨을까?
이웃 민족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고난으로 충전하여 마지막 때에 귀하고, 강하게, 오랫동안 쓰시기 위해서다. 그래서 게오르규의 말처럼 동방의 의인 ‘욥’과 같은 백성이 한민족이다. 고난의 사람 욥은 말년에 갑절의 복을 받았다(욥 42:12~16). 우리 한민족’도 말세에 넘치도록 큰 복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태평양시대의 중심 국가는 차이나가 아니라 통일 코리아가 될 것이다. 성경을 모르는 세상 학자들은 소위 팍스 시니카(Pax sinica)의 시대가 올 것처럼 이야기 한다. 차이나가 세계의 차세대 슈퍼파워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꾸준히 들려온다. 그들의 예측은 틀렸다. 멀지 않아 승천하던 붉은 용(龍)은 떨어지리라! 숨어 있던 동방의 봉(鳳)은 그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비상하리라! 말세를 위해 택하신 민족(Chosen People) 한국인은 셈의 후손으로서 나중에 쓰시려고 동방에 은닉해 두신 제2의 성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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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게오규는 루마니아 출신으로 프랑스인 신부(희랍정교)로 「25시」라는 책으로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74년 이후 세 번이나 한국을 다녀갔는데, 이 글은 지난 84년에 다녀가면서 범어출판사에 남긴 미공개 신작 산문시「한국찬가」를 제1장으로 하고, 74년 월간문학사상사의 초청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여러 강연원고와 그때의 대담들을 모은 「빛은 동방에서」를 제2장, 게오르규의 전 저작집에서 뽑은 그의「어록」을 제3장으로 하여 범어출판사에서 출판한 책이다.
제1장 / 한국 찬가
극동의 미지의 나라
나는 한국(Corea)을 사랑하고 찬미한다. 그것은 나로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다. 나는 나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늦게 한국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나는 항상 모범적인 우등생이었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중학교인 군사중등학교에 다녔다. 학생들은 국왕의 제복을 입었으며 40명을 뽑는데 2천명의 지원자가 몰려들 정도로 경쟁이 심한 학교였다. 교수들도 가장 뛰어난 분들이었으나 8년 후 내가 중학을 졸업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한국의 민중과 한국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나는 다시 대학공부를 마쳤고 루마니아의 해외 주재 대사관의 문정관이 되었다. 나는 외교관이었으나 여전히 한국이라고 부르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극동아시아의 한쪽 구석에 하나의 반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처음으로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I945년 여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이었다. 일본제국이 패망하고 5천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인이 독립을 선언하였을 때 붉은 군대는 나의 고향을 점거하였고 나는 포로의 몸이었다. 나에게는 한국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 책이나 도서관도 없었다. 나는 감옥에 있었던 것이다. 고립된 채로 나는 한국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산채 매장된 민족들
어찌하여 나는 한국 민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가? 그것은 학교 교과서에 그 이름과 그 역사가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도에도 한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반도였을 뿐이다. 한국인을 살아있는 민족의 리스트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한국인들은 봉기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한국인들은 파리의 평화회의에도 참석하였고 한국인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들은 살과 뼈를 가진 민족으로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온 것이다.
월슨 대통령과 파리의 평화회의의 의원들은 한국인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으나 그 후 그들은 공식적으로 한국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들은 침략자의 비위를 거슬리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지상에 살아있는 인간의 리스트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삭제하였던 것이다.
내가 한국의 존재에 대해서 오랫동안 알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세계 어떤 나라의 교과서나 어떠한 역사 지리책도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일을 상기할 때 나는 분노와 반항과 노여움과 고통으로 이를 악물게 된다. 왜냐하면 인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잔학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산 채로 인간을 매장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한민족 전체를 생매장하는 것이다. 수천만의 인간을…….
그것은 노예제도보다 더 나쁘다. 노예상인은 인간을 광장에 내놓고 무게를 달고 재고 해서 판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노예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민족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여기 하나의 예가 있다. 유럽의 내부에 세 개의 멋진 소수 민족이 있다. 그 하나하나가 고유한 언어와 조국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리튜아니아인ㆍ에스토니아인, 그리고 레트인들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 세 나라는 유럽의 지도에서 다 없어져버렸다.
발트의 세 나라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 세 나라는 소련에 병합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발트의 백성만이 산 채로 매장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 똑 같은 비극 속에 사는 다른 민족들이 있다. 그것은 자유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소련을 자극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소련과 협상을 하기를 원한다. 그들과 무역을 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살아있는 민족을 리스트에서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소련이다.
아시아의 귀고리
한국은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처림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극동 아시아의 하나의 반도이다. 그러나
평면구형도(平面球形圖)를 놓고 볼 때 그것은 반도가 아니다. 한국은 아시아 대륙의 귀고리다.
아시아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 자리에 한국이라는 귀고리를 달아 놓으신 것이다. 한국은 보석처럼 정교하게 깎여지고 만들어지고 가꾸어진 것이다. 그 해안은 레이스(Lace)로 되어 있다. 칠보(七寶)로 되어 있다. 그것은 정말로 자수(刺繡)이다. 오직 보석만이 그러한 식으로 재단된다.
한국은 반도가 아니고 장식품(裝飾品)이다. 하나의 보석, 하나의 귀고리이다. 레이스로 수놓은 천 8백 킬로미터의 해안에 3천 4백 개의 섬이 있다. 세공(細工)된 크고 작은 섬, 온갖 형태의 섬들이 해안을 장식하고 있다.
이 해안에서 등을 돌려 한국의 내부로 시선을 돌리면 한국이 보석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지리학자는 이 반도는 4분의 3이 산악지대라고 말할 것이다. 구름 위까지 뻗치는 산이 있고 거기에 다른 산들이 연결되어 있다. 토지의 기복을 제하면 그것은 해안과 마찬가지의 레이스이다. 산들은 구름에 걸린 레이스와도 같다. 레이스를 이루는 산꼭대기인지, 하늘과 구름인지 때로는 분간할 수가 없다. 아시아의 귀고리는 부조(부조)로 된 작품이다. 그 산은 칠보의 레이스이다.
지도상의 한국은 매우 작다. 모든 보석이 그런 것처럼 하나의 귀고리는 제 아무리 커도 역시 작은 것이다.
한국은 22만 평방킬로미터 라고 씌어 있다. 나에게 있어서 그 면적은 평방킬로로 잴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한국은 정확하게 나의 조국 루마니아와 같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조국은 어머니이다. 어떤 것이 자기 어머니와 같은 크기를 가졌을 때 면적이라는 말은 의미를 잃는다. 그것이 설사 저속한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만일 사람들이 나에게 한국의 크기는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리라. 한국은 나의 어머니의 크기, 나의 조국의 크기이다 라고…….
비단옷을 만드는 종교
한국인은 이곳 지상에 어떻게 나타났는가? 어떻게 그들은 아시아 대륙의 귀고리를 자기의 조국으로 만들었는가? 사랑하는 자에게 인간은 수많은 종류의 질문을 하는 법이다.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 자신이 한국인을 여기 이 자리에 자리 잡게 한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 날짜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기원전 2333년 10월 3 일이다.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예외적인 존재는 초현실적인 기원을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아프로디테(Aphrodite)는 바다의 거품 속에서 태어났다. 하나님의 친구인 모세는 나일강의 푸른 물 위에 떠 있는 광주리 속에서 발견되었다. 로마제국은 암 이리에 의해서 키워진 로물루스(Romulus)는 와 레뮤스란 쌍동이가 건설하였다. 한국은 한국을 창조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백두산 꼭대기로 내려온 단군이라는 신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한국은 또한 세계에서 그 문자의 공포일을 국경일로 삼는 유일한 나라다. 한글날인 10월 9일은 공휴일이다. 마치 7월 14일이 프랑스의 국경일인 것처럼….
단군은 한국인에게 꾸지뽕나무 재배와 직조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의류에 대한 기술은 매우 중요하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는 옷을 벗고 살다가 무화과 잎으로 옷을 대치하고자 한 일이 있다. 단군은 여자에게 비단옷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여자들은 쉽사리 그 일에 익숙해졌다. 한국의 비단은 선녀의 옷과도 같았다. 몽고의 유목민이 한국을 침략하였을 때 한국 여인이 다채로운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한국을 [무지개의 나라]라고 불렀다.
단군은 민족의 왕이며 아버지이며 주인이다. 그가 한국 민족에게 내린 헌법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그것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복을 주는 일이다. 그 이후 한국인은 다른 많은 종교를 받아들였지만 단군의 법은 변함 없이 5천여 년동안 계속 유지되고 있다. 왜냐하면 단군의 법은 어떠한 신앙과도 모순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모든 종교나 철학의 이상적인 형태로 「최대한의 인간을 위한 최대한의 행복」 또는 모든 인류를 위한 행복과 평화이다.
우주를 향한 깃발
국기란 조국의 참된 현존(現存)이다. 내가 프랑스의 깃발에 인사할 때 내가 새로 얻은 조국인 프랑스는 나의 눈앞에 존재한다. 유엔이나 유네스코 등 모든 국제기구 건물에서는 많은 나라의 국기를 볼 수 있다. 수많은 민족ㆍ땅ㆍ역사가 그 국기들에 나타나 있다. 국기는 각기 다르며 그 민족들도 너무나 다르다. 만국기를 보면서 나의 마음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국기가 없는, 산 채로 매장된 국가에 대한 것이다. 다음에 소련에 지배되는 나라들이 떠오른다. 자유를 잃은 민족 - 불가리아ㆍ폴란드ㆍ루마니아, 헝가리 - 그 밖의 많은 다른 나라들.
국기는 지배자의 표지를 달고 있다. 낫과 망치ㆍ소련의 문장, 가축이 그 소유자의 이름의 첫 글자를 붉은 쇠로 몸에 낙인찍듯 소련에 예속된 나라들은 모두 망치와 낫의 표지를 지니고 있다. 이 지상에 살아있는 나라의 국기 가운데 붉은색ㆍ노란색ㆍ파란색으로 된 삼색의 루마니아 국기를 볼 수 있다. 지금 이 국기는 차드의 국기이다. 루마니아를 지배한 후 붉은 군대는 루마니아의 국기를 차드인에게 팔아버렸다.
이 중앙아프리카의 흑인은 근래에 독립한 것이다. 그 민족은 국기가 없었다. 붉은 군대는 그 혹인들에게 우리의 국기를 판 것이다. 나는 요사이 매일 같이 뤼 드 벨르 페이유에 있는 파리의 차드 대사관 앞을 지나가며 나의 국기에 인사한다. 나는 나의 조국 루마니아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나의 조국, 나의 어머니에게…….
한국의 국기는 유일한 것이다. 어느 나라의 국기와도 닮지 않았다. 거기에는 세계의 모든 철학의 요약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 태극기(太極旗)는 멋지다. 거기에는 하늘과 땅, 네 개의 방향, 낮과 밤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선과 점이 있다. 그것은 우주를 나타낸다. 거기에는 남자와 여자ㆍ선과 악ㆍ불과 물이 있다. 우주의 대질서, 인간의 조건이나 살아있거나 죽어있는 모든 것의 운명이 선ㆍ점ㆍ원ㆍ붉은색ㆍ흰색 그리고 파란 색으로 그려져 있다.
일본이 한국의 국기를 말살했을 때 한국인은 무궁화를 심었다. 무궁화보다 더 한국 민족을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없다. 한국사람은 그것을 영원한 꽃이라고 부른다. 일본인이 그들에게 그들의 국기를 금지했을 때 수백만의 한국인은 도처에 무궁화를 심었다. 그 꽃이 그들의 국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지배자는 감시하였다. 일본제국은 한국인에게 무궁화를 심는 일까지 금지하였다. 지배자의 군대는 한국 전 지역에서 무궁화를 뽑아버렸다.
무궁화는 정복자들에게는 위험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뿌리째 뽑아야만 했다. 금지된 것은 국기와 무궁화 뿐은 아니었다. 일본의 지배 하에서는 연도 역시 금지되었다. 한국에서 연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신년에 어린이들은 모두 그들의 소원을 하늘에 보내기 위해서 연을 날리고 연끼리 싸우게 한 것이다. 가장 강한 연이 적수의 연 끈을 끊고 싸움을 종결짓는다. 승리자의 연이 땅에 내려지면 수많은 군중들은 운동시합의 챔피언을 맞이하듯 박수갈채를 한다. 하지만 일본의 지배자들은 연의 제조와 연싸움도 금지케 하였다.
연을 가지고 놀 때 한국인은 의젓하였다. 그들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을 쳐다보는 자는 노예의 조건을 거부한다. 일본인은 포로가 된 자가 자유를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이다. 승자는 차라리 용감한 죄인이 되고.
1945년 이래 한국의 국기는 다시 하늘에 휘날리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상징인 무궁화는 도처에서 재배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45년 해방된 날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한국의 반은 폴란드ㆍ루마니아ㆍ체코슬로바키아ㆍ헝가리ㆍ쿠바ㆍ앙고라처럼 소련의 고행의 공화국이 되었다. 한반도의 북쪽에는 한국의 국기는 휘날리지 않고 무궁화도 피지 않는다.
사랑과 자유를 위한 싸움
무엇보다도 나를 한국과 강하게 유대를 맺게 하는 것, 그리고 한국을 열렬하게 사랑하게 하는 것은 그 군대이다. 그것은 1944년 8월 23일 붉은 군대가 루마니아를 지배하여 나에게는 이미 조국의 군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때 이래 나의 어머니인 조국은 자유를 잃고 나의 민족은 노예상태에 빠졌다. 나의 나라의 군대는 패배하여 해산되어 버렸다.
똑 같은 일이 헝가리나 모든 동구라파의 나라에서 벌어졌다. 우리는 우리를 해방시킬 자국의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지금 나의 조국을 지배하는 붉은 군대와 싸우는 유일한 군대는 한국의 군대다. 한국군은 나의 백성을 해방시켜주는 군대이기도 한 것이다. 길에서 지나가는 한국 군인을 만나면 나는 절을 한다.
한국군은 한국의 자유를 지키고 북반부를 해방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뿐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자유를 잃은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 존재하는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소련과 싸움으로써 한국군은 월남ㆍ라오스ㆍ앙고라의 해방을 위해서도 싸우는 셈이고 그 지배자에 의해 예속된 지상의 3분의 1 이상의 민족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다.
시인으로서 나는 한국군을 찬양하는 데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그것은 한국군의 장교가 계급장으로 어깨에 무궁화를 달고 있는 데 기인한다. 소령은 무궁화 하나, 중령은 둘, 대령은 셋…. 그래서 내가 한국 군인에게 인사를 할 때 나는 그 무궁화에 인사하는 것이다.
하위의 장교들은 어깨에 꽃을 달지 않는다. 그들은 잎을 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무궁화의 잎이다. 영원히 피는 꽃의 잎사귀들….
노년의 왕관
현대 사회에 있어서 한국은 많은 분야에서 모범이 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노인에 대한 공경이다. 현재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노인들은 버림을 받고 있다. 나에게는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변호사인 한 사람의 친구가 있다. 어느 날 그가 파리에 왔다. 그는 머리에 염색을 하고 있었다.
“자네 암탉처럼 머리를 염색했군. 웬일이야?” 하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나는 그의 염색한 머리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참다운 루마니아인이었다. 루마니아 사람은 머리를 염색하지 않는다. 그들은 노년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노년은 인생의 일부이다. 죽음이 그렇듯이….
“만일 내가 머리를 염색하지 않으면 나는 미국에서 직업을 유지할 수 없다네.”
하고 나의 친구는 변명을 하였다.
나는 미국에 살지 않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지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은 미국을 꿈꾼다. 그곳은 풍요의 나라다. 이전에 나도 미국에 사는 그 친구를 부러워했다. 그는 백만장자의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를 가련하게 여긴다. 루마니아에는 “노인이 없는 마을은 노인을 하나 사야 한다”는 격언이 있다. 세계 어디에도 노인들이 한국처럼 존경받는 곳은 없다. 모든 문명화된 나라에서 노년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인간은 늙는 것이 부끄럽다. 자동차 공장의 못쓰게 된 부속품처럼 사람들은 노년을 가려낸다. 한국은 이와는 반대이다. 한국에서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존경을 받는다.
내 책의 한국어 번역을 한 여성은 대학의 교수다. 아주 귀여운 부인이다. 그녀는 다람쥐 같은 익숙한 손을 가지고 있다. 그녀를 볼 때 나는 제비를 연상한다. 나는 그녀 이름을 한국어로 발음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녀를「제비」라고 부른다. 그런데 말을 할 적마다 그녀는 나를 노인처럼 대접한다. 그녀는 내가 마치 백 살쯤이나 된 것처럼 나를 자상하게 돌본다. 마침내 나는 좀 화가 났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부인, 왜 당신은 항상 나를 늙은이 취급을 합니까? 물론 나는 늙었소. 나도 그것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의 남편보다 아주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요. 그에게 당신은 항상 그가 늙었다고 말하지는 않겠죠. ”
“내가 당신을 노인 대접하는 것은 존경하는 뜻에서입니다, 신부님.” 하고 그녀는 대답하였다.
그녀는 얼굴이 붉어지고 매우 당황해 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한국에서 누군가를 노인처럼 대접하는 것은 그가 아름답고 현명하다고 칭찬하는 것보다 더 큰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다. 나는 놀랐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동방의 기독교도들이 사제가 비록 나이가 어려도 칼로이로스(Kaloyeros)」즉「아름다운 노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기하였다. 왜냐하면 노인은 현명한 자이고 그 예지(叡智)는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늙은이처럼 슬기롭게 사는 사제는 비록 나이가 스무 살 정도라도 역시 아름다운 노인인 것이다. 노인의 슬기를 공경할 줄 아는 것, 바로 이것이 다른 문명화된 나라가 한국에서 배울 점이다.
내가 한국에 왔을 때 나의 도착을 알리는 신문들은 내 나이를 두 살이나 더 붙였다. 처음에 나는 항의하였다. 늙는 것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는 자기의 나이에, 태어나기 전에 살아온 아헙 달을 덧붙인다. 그 다음에 또 한살 더 붙여서 계산한다.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은 영광이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인간은 성숙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앙새의 사랑
지상의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행복을 갈망한다. 단군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복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생을 영위하여야 한다. 나는 한국인에 있어서 행복이 무엇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에 대해 알려고 시도하였다. 그것은 배우기 쉬웠다. 행복의 표어는 병풍에 새겨져 있다. 벽에 붙인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모두가 이 행복의 말을 알고 있다.
나는 행복의 요소가 다섯 가지임을 배우고 있다. 장수ㆍ부ㆍ평화와 건강ㆍ자식과 덕ㆍ편안한 죽음….
두 번째 표어인 부는 장수 후의 부이며, 셋째가 건강, 넷째가 불행의 결여이고, 다섯 번째가 덕이다. 세 번째 리스트는 행복의 조건으로 장수ㆍ부ㆍ고귀함ㆍ평화ㆍ건강 그리고 다섯 번째가 풍요이다. 행복을 열거한 리스트 가운데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사랑이라는 말이 없는 점이다.
서양에서는 사랑을 제일 첫머리에 놓는다. 그것은 개인의 행복의 요소 중 하나다. 한국인은 결코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인가? 인류의 시초 이래 세상의 모든 시인들이 읊고 연극의 장면에서 음악으로 노래 부른 사랑이 한국에는 없는 것일까? 나는 감히 갑작스럽게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남녀의 거동을 관찰하였다. 한국인은 세계의 모든 젊은 남녀와 똑 같은 사랑의 몸짓을 하였다. 한국인에 있어서는 서구의 나라 사람들보다 사랑이 좀 수줍고 내부에 간직되어 있었을 따름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차이였다. 세상 어디서나 사랑의 상징은 비둘기다. 아주 사랑스러운 새이다. 그 새는 육신화된 애정을 나타낸다.
한국에서의 사랑의 상징은 원앙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모든 혼례의 방에는 병풍에 그려진 원앙새를 볼 수 있었다. 침대 옆 테이블, 사기나 도자기에도 나무로 된 원앙새가 있다. 집집의 어디에나 원앙새가 있다. 나는 박물관에서도 원앙새를 보았다. 그것은 언제나 사랑의 상징이었다. 한국의 건국 이래, 즉 기원전 2333년 10월 3일 이래 모든 화가들은 화폭에 원앙새를 그렸다. 한국의 시인들은 항상 원앙새를 노래하였다. 나는 사랑의 상징으로 이 새를 고른 것이 이상하여 원앙새의 모든 종류에 대해서 자료를 모아보았다.
첫 번째로 내가 놀란 것은 우리 서양 사람들도 원앙새를 사랑의 상징으로 여긴 것을 알았을 때이다. 그것은 백조이다. 그런데 백조는 오리이다. 백조의 노래만큼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백조가 원앙새의 종류에 든다고 해서 원앙새를 사랑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새들 가운데 원앙새만이 일부일처제다. 그 말은 충실하다는 뜻이다.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충실성이다.
우리 기독교 신자도 역시 그것을 선언한다. 「죽을 때까지 충실하라. 그러면 왕관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결혼을 통해 남자와 여자는 영원히 결합된다. 좋은 경우나 최악의 경우나 결혼이란 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실제 결혼에 있어 그것은 실천되지 않은 채 이론적으로만 가능하였다. 한국에 있어서 충실성이 없는 사랑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너무나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시골의 여인들은 과부가 지나가는 것을 볼 때 그 여자가 아직도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놀라는 것이다. 결혼의 결합은 그처럼 강하기 때문에 그의 동반자가 죽은 후에도 살아있을 때는 놀라는 것이다. 과부는 흔히 미망인(未亡人)이라고 불린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놀란다.
한국에서 죽은 사람은 「도착한 사람」이라 부르고 살아있는 사람은「지나가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한국적인 사랑은 또한 다른 특징을 지닌다. 이해관계를 초월한 것이다. 인간이 서로 사랑할 때 사로 기다리지 않는 법이다. 젊은 남자나 여자는 그 사랑의 대상이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건 적대시하건 무관심하건 언제나 사랑하는 법이다. 그것은 무조건의 사랑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규칙을 벗어난다. 서양의 소설이 지니고 있는 자기 애인의 정복이나 자기 곁에 잡아두려는 줄거리는 한국의 여인들에게는 이상한 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위하여 사랑한다. 그들은 소유의 갈망이나 파괴적인 질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한 젊은 한국의 여인이 어느 날 우리 집에 왔다. 나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신발을 벗고 한국의 습관에 따라 신을 문 앞에 놓았다. 그녀는 파리에 들른 것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오는 길이었다. 그녀는 의자 위에 앉았다. 그녀는 밤새도록 여행을 하였기 때문에 피곤했다. 그녀는 한국식으로 앉았다. 그녀는 의사의 치료를 받기 위해서 미국에 갔다 오는 길이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암에 걸려 있었다. 미국 학자들은 그녀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곧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아직 인생의 반도 살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행복해 했다.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저는 모든 것을 다 정리했어요. 이제 저는 편안하게 죽을 수 있어요.”
나는 그녀가 편안하게 죽기 위해서 무엇을 정리하였는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오직 성인만이 행복하게 죽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저는 제 남편을 몹시 사랑했습니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전 그의 취미는 뭐든지 다 알고 있어요. 그의 버릇도 모두 알고 있죠, 그의 변덕까지도요. 저는 제가 죽는 날 저를 대신할 수 있는 한 처녀를 찾아냈어요. 저의 남편은 아무 것도 눈치를 못 채고 있지요. 제가 불치의 병에 걸려 있는 것을 알기가 무섭게 나는 그녀를 우리 집으로 오도록 했어요. 그리고 그녀에게 나의 남편을 돌보아주는 일을 맹세케 하였죠. 제가 죽으면 제자리를 대신 맡아 달라고요….”
“저는 물건이 들어있는 모든 서랍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지요. 그리고 저의 남편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는 법도 가르쳐 주었어요. 그리고 어린애를 돌보는 법도 가르쳐 주었어요. 그녀는 저를 대신해주기로 약속하였어요. 그러니 저의 아이들이나 남편이 제가 죽어도 슬퍼할 이유가 없지요. 내가 없는 것에 대해서요. 저는 마음 편하게 죽을 수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행복합니다….”
나는 이처럼 가슴 아프게 하는 자기희생의 고백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사랑에 의한 자기희생, 완전한 희생. 나는 후에 이 여인이 한국에 있어서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한국 여인의 본성에 맞게 행동한 것이다. 그때 이래 나는 행복의 다섯 가지 요소 가운데 왜 사랑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가 없는지를 알게 되었다. 한국에 있어서의 사랑이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사막을 꽃피게 하는 강
자유진영에 있는 한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성장해온 나라 중 하나이다. 그것은 나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운다. 한국은 내가 좋아하는 나라이며 나는 한국이 산업국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볼 적마다 행복을 느낀다.
기술면에 있어서 미국 사람은 세계의 챔피언이다. 그들은 달나라에까지 갔다. 그들은 천체의 공간을 여행하고 있다. 미국의 문명은 세계의 경이이다. 예전에 세계에는 일곱 개의 경이가 있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단 하나의 놀라움밖에 없다. 그것은 미국의 기술이다. 한국은 미국보다 많이 뒤떨어진 곳이 아니다. 일 년도 채 되기 전 한국은 현대의 아주 전설과도 같은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한국인은 사막에다 인공의 세 개의 큰 강을 만들고 사막을 꽃피게 하는 일을 착수한 것이다. 그것은 달나라 여행이나 피라밋을 세우는 일 못지않은 큰 계획이다. 거기에는 국제적인 경쟁이 있었다. 모든 산업화된 나라는 이 경쟁에 한몫 끼었는 데 한국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한국인은 리비아의 벵가지의 남쪽 1,000 킬로미터나 되는 사막의 모래를 파는 일에 착수한 것이다. 한국인은 석유가 아니라 물을 끌어올리기 위한 작업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한국인은 타제르보에 거대한 호수를 만들기 위한 땅 가운데서 물이 솟도록 만들 것이다. 그 호수는 1,000 킬로미터나 되는 인공적인 강을 적시게 될 저장소가 될 것이다.
강은 사막 가운데에서 지중해로 흐를 것이며, 그것이 사막의 모래를 비옥하게 만들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수에즈 운하나 파나마 운하를 만들고 라인강을 론느강과 연결하는 등 수많은 공적을 이루어왔다. 그러나 사막 한가운데에 천 9백 킬로미터나 되는 인공적인 강을 만드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리비아의 사막에 이 인공적인 강을 만들기 위해서 미국ㆍ캐나다ㆍ이탈리아ㆍ일본ㆍ독일ㆍ영국의 학자와 기술자들은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계획은 한국의 학자와 건설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인공적인 강은 현재 실제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한국인은 83개월 안에 끝마치기로 약속하였다.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천 2백만의 한국인이 이 인공의 강을 만들기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업적에 대해서 어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은자의 왕국
지나간 5세기 동안은 한국인에 있어서 수난기였다. 1600년경 한국은 사방에서 너무나 심한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위축되어 살아 왔다. 한국 민족은 세계에서 격리되었다. 한국인은 은자의 민족이 된 것이다. 그 동안은 그들에 있어서 침묵의 세기였다. 한국인들은 그 동안 과거에 그들이 이루어 놓은 놀랄 만한 업적이나 가치를 남기지 못하였다. 구텐베르크보다 2백년 전에 한국사람들은 인쇄술을 발명하였다. 목판 활자도 여전히 존재해 있었다. 한국인은 기술의 기적을 이루어온 것이다. 한국인은 그들의 발명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양사람보다 먼저 군함을 만들었다. 그것은 거북선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철갑선을 사용하여 바다의 격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국인은 측우기도 발명하였다. 그것은 지금 서울의 박물관에 있다. 그들이 세상을 은퇴할 때 그들은 모든 그런 것을 버린 것이다. 원수들은 바다의 모래나 둘의 풀처럼 많았다. 한국인은 거기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침묵과 고립의 세기는 고통스러웠으나 한편 한국인의 영혼을 단련한 것이다.
베들레헴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무렵 두 종류의 초대자만이 존재하였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천사와 땅에 있는 양치기이다. 이따금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가 양치기를 택하였는가 하고 자문한다. 양치기의 조합은 다른 조합보다 뛰어난 것일까? 양치기는 농민이나 직공 또는 의사보다 뛰어난 것일까? 천사는 동등하고 다른 인간들보다 뛰어나지 않은 인간을 초대하지 않는다. 양치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점은 바로 그들이 고독하게 살며 순수함 속에, 명상 속에 생활하는 데 있는 것이다. 여러 세기 동안 한국사람은 은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석한 양치기들처럼 세상에서 격리되어 살아왔다.
한국의 일상생활은 준엄하다. 한국말에는 쌀이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기근의 달이 계속되는 봄의 기나긴 달이다. 쌀은 모자라고 쌀독은 바닥이 난 것이다. 새로운 수확의 시기는 아직 멀다. 이 어려운 시절에 한국인은 음식을 고안해낸 것이다. 식물성의 요리. 모든 여인들 처녀들 어린이들은 지붕이 둥근 그들의 집에서 눈이 녹을 무렵에는 나온다. 그녀들은 마당ㆍ들ㆍ산의 기슭으로 식물이나 나무뿌리 등 많은 종류의 식물을 캐러 간다. 그러나 대지는 굶주린 자를 먹이기에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의 여인들은 바다물속에서 그들이 먹을 수 있는 바다 식물이나 김을 따러 간다. 한국의 집에는 어디나 양식을 저장할 큰 항아리가 있다. 보릿고개란 헛된 말만은 아니다. 그것은 기근의 달이다. 한국의 민화(民畵)에도 보릿고개가 나타나 있다.
기근 때의 일이다. 한 어린이가 어머니가 굶어죽게 되는 것을 보다 못해 애태운다. 그는 어머니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양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울면서 강가로 간다. 그는 어머니에게 물고기를 잡아 갖다 주려고 한다. 그런데 강은 얼어 있다. 그는 얼음을 깨뜨릴 만한 힘이 없다. 그는 체온으로 얼음을 녹이기 위해서 얼음 위에 앉는다. 그는 울며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마침내 얼음이 녹았다. 그는 물고기를 잡아와 그의 어머니를 구출한다.
이러한 기근의 시기에 한국사람들은 꽃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시들은 국화꽃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그것으로 신년에 떡을 만들기 위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간직해 둔다. 그들은 국화ㆍ무궁화도 부엌에서 식용으로 쓴다. 한국 민족은 언제나 대지와 인접해서 살아왔다. 자연과 우주와 함께 살아온 것이다.
우물을 파는 장소, 집을 짓는 장소, 양친의 무덤을 파는 장소는 해박하게 연구하여 선택한다. 그것은 에콜로지(ecollogy/생태학ㆍ풍수지리를 말함)에 대한 고도의 지식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지세ㆍ바람의 방향ㆍ샘의 깊이ㆍ토지의 성질을 고려한다. 토지ㆍ물ㆍ나무ㆍ꽃은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산은 하나의 영혼으로 간주되었다.
어느 날 나는 절에 간 적이 있다. 그 절은 산꼭대기에 있었다. 길이 아주 좋았다. 포장이 되어 있었다. 현대식 도로였다. 그러나 꾸불꾸불했다. 나를 따라오던 한국 부인은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았다.
“미안합니다, 신부님, 우리는 이 산길을 덜 가파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주 뛰어난 기사가 있으니까요. 그들은 미국에서 공부를 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굴을 파지 않기 위해서 이 길을 만든 것입니다. 굴을 파면 산신령을 화나게 하고 방해하게 되니까요…….”
한국의 기사는 미국 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후에도 자동차의 소음이나 도로의 건설에 있어 산신령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마음먹는다.
한국인은 나무ㆍ꽃ㆍ식물ㆍ뿌리의 형제들이다. 한반도에는 4,500 종류 이상의 식물이 있다. 덴마크에는 1,500종, 영국에는 2,000 종밖에 없다. 매년 4월 5일은 자연의 축제일인 식목일이다. 한국사람은 누구나 나무를 심는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을 지배한 소련은 남쪽을 침범하였다. 침략자는 수없이 많았다. 탱크로 된 사단은 급류처럼 한국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도시와 마을을 불태웠다. 그들은 수많은 숲과 정원을 파괴하였다. 전쟁은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침략자가 물러갔을 때, 전 한국은 온갖 재로 덮여버렸다. 그것은 소련의 초토작전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은 그들의 도시와 집을 다시 세웠다. 그 전에는 그들은 먼저 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한국은 그들이 형제인 나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오늘날 한국은 다시금 나무로 덮여있다. 매우 오래된 숲을 볼 때 나 자신 놀라게 된다.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그처럼 빨리 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대답하였다. 미국식 방법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30년에 걸려 크는 만큼을 5년 동안에 자라게 만든다. 그것은 과학적인 숲이다.
나는 이 과학적 숲이 미국인의 의해, 남미 브라직의 커피재배로 불모지가 된 아주 방대한 대지에 만들어진 것을 알고 있다. 전나무ㆍ참나무ㆍ너도밤나무는 3년 동안에 20년간 자란 만큼 커진다. 미국인의 과학적 업적에 대한 나의 열정은 다시금 넘치게 된다.
그러나 나의 친구인 브라질 사람들은 나를 실망케 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이 기적적인 숲에서는 새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단 한 마리의 새도 여기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살려하지 않는다. 새들은 과학적인 숲을 좋아하지 않는다. 미국인에 의해서 브라질에 과학적으로 심어진 아름다운 숲은 유령이 깃든 집과도 같다. 학자들은 새들이 그 숲에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현재 그들은 발생론적 변종에 의해 과학적인 숲을 좋아하는 새로운 종류의 새를 만들어내는 중이다.
나는 한국에서도 똑 같은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반도를 덮은 과학적인 숲은 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한국은 가을에 북쪽의 얼어붙은 땅을 버리고 남쪽 테평양의 섬으로 겨울을 지내러 가는 수많은 철새가 휴식하며 기력을 회복하는 장소다. 현재 한국에 머무는 새의 수는 증가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숲을 좋아한다. 한국사람은 매혹되었다.
약 1,000만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 서울에는 새가 오지 않는다. 새들은 서울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늘의 새들은 현대의 대도시보다 과학적인 숲을 더 좋아한다. 한국사람은 철새의 방문이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서울을 뚫고 지나가는 한강변에 일 년에 두 번 한국의 철새들이 도시 위로 날아갈 수 있도록 특별한 공원을 옮겨 놓았다. 그것은 정말로 새들의 숙소이다.
거기에는 수십 종이 있다. 강물 줄기를 따라서. 도시 한복판에. 현재는 새들이 서울에도 찾아온다. 새들은 더러운 초현대의 대도시도 마다하지 않는다. 새들은 자기 취미에 맞는 숙소를 발견한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은자들처럼 고독 속에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세기 말에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 떠났던 서양인들은 한국을 알지 못하였다. 포르투갈인ㆍ영국인ㆍ프랑스인ㆍ네덜란드인은 인도ㆍ중국ㆍ일본ㆍ모든 태평양의 섬들은 발견하였으나 한국이 존재하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항해자들은 자주 일본에 가곤 하였다.
그들은 한국 근처의 바다를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알지 못하였다. 프랑스인은 월남에 자리 잡아 식민지화 했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다. 1653년 루이 14세 때 하멜이라고 부르는 네덜란드인이 36명이 수부와 함께 한국 해안에서 조난을 당한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간 하멜은 미지의 땅 한국에 대해서, 즉 은자의 나라 사람들의 생활에 대하여 썼다. 새로운 민족의 발견은 감동적인 것이었다.
첫댓글 눈물이 흐릅니다.
게오르규의 한국 사랑이 너무 감동스럽니다.
우리가 부끄럽네요.
아멘~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