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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1:13-14
❏흑암 권세 →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김
❍ 김익두 목사
김익두는 오늘도 장터에서 사람들에게 시비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서양 여선교사가 시장에서 전도하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선교사(샐리)는 김익두에게도 전도지를 주며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였습니다. 전도지를 건네받은 김익두는 “뭐라고? 나보고 서양귀신을 믿으라고?” 하면서 전도지로 코를 풀어서 바닥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선교사는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어요!!”하며 꾸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익두를 잘 알지 못했던 여선교사와 여선교사가 전해주는 복음을 알지 못했던 김익두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 보라고 건네주는 선교사의 전도지를 구겨서 호주머니에 넣은채로 집으로 돌아온 김익두는 무심코 구겨진 전도지를 읽어 보았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이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김익두는 “세세토록”이라는 네 글자에 심장이 떨리는 느낌을 받고 스스로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선교사가 전해준 종이에 적혀 있는 말씀은 세세토록 있는 것이라고 했고 그 세세토록은 “영원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일까? 이 말씀은 며칠동안 김익두의 머릿속을 흔들어 놓으며 잠을 설치도록 하였습니다.
며칠째 고민에 빠져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친구이며 예수교를 신앙하는 “박태환”(후일금산교회 장로로 피택되었음)이 김익두를 찾아 왔습니다. 훌륭한 선교사가 오셔서 부흥사경회를 하는데 함께 교회에 가자는 권유를 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평소때의 김익두 라면 “교회는 무슨? 조상도 모르는 서양귀신에게 홀려서 잘하는 짓이다!”라고 해야 당연한 것인데 그날은 박태환의 권유를 못이긴 척 하고 받아 주었습니다.
1900년 3월, 금산교회에서 개최된 남자 부흥사경회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 “스왈렌”(소안론,Swallen,W.L.)이 강사로 초빙되어 “영생”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서양사람이 한국말에 능숙한 것에 한번 놀라고, 서양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수없이 몰려든 한국사람들에 또 한번 놀라고, 방탕한 생활로 교회라면 치를 떨었던 자신이 교회당에 앉아 있는 현실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물론 주먹깡패 김익두를 바라보는 교인들과 사람들도 모두 놀라며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시골장터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어야 할 사람이 부흥사경회에 앉아 있으니 혹시 무슨 행패라도 부려서 집회를 망치게 될까 염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선입견이었고 기우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실패하고 술이 아니면 하루도 살수 없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을 바라본 김익두는 스왈론의 설교속에서 녹아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받아들게 된 전도지 한 장과 박태환이라는 친구의 소개와 스왈론 선교사의 만남을 우연하게 여기기 않았습니다. 김익두는 스왈렌 선교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지난날을 통회하고 자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지난날의 무섭고 두려웠던 모든 죄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는 자복의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을까요? 김익두는 아직도 통회하며 얼굴과 온몸은 땀과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깨를 짓눌러 왔던 인생의 죄짐들은 이제 가벼워 졌습니다. 집회를 인도하였던 스왈론 선교사님도 김익두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왈론 선교사는 처음 만나는 김익두를 축복하였습니다. “하나님, 죄인이었던 김익두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어서 불의 사자로 일하게 하옵소서”라는 놀라운 기도를 하였습니다. 스왈론 선교사는 김익두에게 순한문 신약성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모펫 선교사와 함께 한국 부흥의 주역이었던 스왈론 선교사와 김익두의 만남은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김익두는 스왈론 선교사로부터 받아든 순한문신약성경을 1년간 100독을 하였습니다. 성경을 읽는 과정에서 김익두는 가슴을 칼로 찢는 것 같은 불세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에 도전한 김익두가 산에서 금식기도를 마치고 하산하던 중 하늘에서 큰 불덩어리가 가슴에 떨어져 견딜수 없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김익두야! 김익두야!” 하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해 한없이 울고 찬송하며 밤을 맞도록 기도 하였습니다.
1900년 7월, 세례를 받기로 예정하여 부부가 각방을 쓰고 매일 목욕재개하며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세례를 준비하였으나 선교사의 순례가 늦어져 1901년 7월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에 어머니와 아내까지 함께 스왈렌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평양신학교는 장로교의 유일한 신학교로서 1901년에 설립되어 1907년, 길선주와 서경조 등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김익두 전도사는 김관근, 박정찬, 김종섭, 안승원, 우종서, 주공삼, 채정민 등 27명과 함께 1910년 제3회 졸업생이었습니다. 1910년 9월20일, 37세의 김익두는 평안북도 선천군 염수동교회에서 개최된 제4회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1920년 10월20일, 2주간의 금식기도를 마친 김익두 목사는 제8회(1919) 마펫 선교사에 이어 서울 안동교회당에서 제9회 장로교 총회의 총회장에 취임하였습니다.
❍ 이기풍 목사
이기풍 목사는 1865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1883년까지 개인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젊을 날을 허송세월하면서 서양선교사들을 박해했다. 특히 그는 1890년 어느날 평양서문통 네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던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이기풍은 원산으로 갔다. 기거서 스왈른(Swallen) 선교사를 보았는데, 스왈른 선교사를 보고 이기풍은 자신이 돌로 쳐서 피 흘리게 했던 마펫 선교사가 계속 떠오르면서 마음에 괴로워하였다. 하루는 마루에서 그 일을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났다. 그분은 너무 환하게 빛나셔서 쳐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너무나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고,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이기풍은 그 자리에 엎드렸다. 과거에 지은 수많은 죄가 자꾸만 머리에 맴돌면서 회개의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분의 증인으로서 어떤 것을 전해야 할지 몰랐다. 그 후 하나님의 은혜로 스왈른 선교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스왈른 선교사는 그의 체험을 듣더니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었다. 복음은 그를 감격시켰고, 그의 내면에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1894년 그는 슬왈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매서인으로 함경남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어 1902년 부터 1907년까지는 황해 안악,문화, 신천, 해주 등지를 돌며 조사로 시무했다. 한편 이때 마펫 목사의 권고를 받고 1903년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길선주,양천백 등과 함께 최연소자 신학생으로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했다.
그가 졸업하던 해에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서경조, 길선주,양전백,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이기풍 목사는 이 독노회의 결의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떠났다. 부인 윤씨와 함께 인청항을 출발하여 목포를 경유해 제주도를 가려고 했다. 목포에 도착해 보니 마침 풍랑 너무 심하여 목포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제주도를 향해 떠나 난항을 거듭한 끝에 1908년 봄에야 제주도에 도착했다.
한편 그의 부인 윤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한편 이때는 이미 정부가 기독교의 선교를 허락한 때이었지만 1899년의 신축교난으로 제주도 주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은 편견은 여전히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주민들의 위협을 당해야 함을 물론이고 굶주림과 생활고까지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복음 전파에만 전심전력을 다했다.
뒤이어 총회에서는 그를 돕기위해 전도인 이관선 김홍련을 제주도 선교는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11년 10월 전라노회에가 결성되어 제주도는 1912년부터 전라노회 관할이 되었다. 이기풍 일행은 주민들의 온갖 핍박과 방해공작 속에서도 성내교회를 비롯삼양 내도 금성 한림 협제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 백사겸
한국초대교회에 맹인전도사 백사겸(白士兼, 1860-1940)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백사겸은 원래 평양에서 유명했던 맹인점쟁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김제옥이라는 사람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맹인점쟁이 백사겸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소문이 평양에 전해지자 평양사람들이 크게 놀랐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백사겸은 어렵게 성경을 한권 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맹인이라 성경을 읽을 수가 없어서 그의 부인이 성경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는 성경 한절을 세 번씩만 읽어주면 그대로 외워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에 성경 한장과 찬송 한장을 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백사겸이 성경의 이야기를 듣다가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쳐 주셨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 백사겸은 자기도 눈을 뜨게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몇날 동안을 기도했지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일까? 내가 소경된 이 자리에서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이 하나님의 무슨 섭리가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백사겸은 눈을 뜨는 것은 내 뜻이지만 하나님의 뜻은 소경인 상태로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80이 넘도록 평양과 개성 철원 파주 고양까지 걸어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오영동, 한국초대교회 맹인전도자 백사겸이야기, 한들출판사,200 5,pp.73-76).
가을이라 가을 바람 백사겸 백남석 부자 이야기
가을이라 가을 바람 솔솔 불어오니 붉은 잎에 분홍치마 갈아입고서
남쪽 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 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노라....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가을이라는 아름다운 동요이다.
작사자는 백남석 당시 연희 전문학교 영문과 교수이고 1936년 현제명씨가 펴낸 어린이 찬송가에 처음 실린 노래이다.
백남석은 맹인 점쟁이였던 백사겸(1860~1940)의 장남인데 그는 평남 평원군 순안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실명하고, 1년 후 어머니마저 잃은 불우한 사람이었다.
그는 살 방법을 찾아 당시 맹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인 복술업 즉 점(占) 치는 일을 배우는데 4년 만에 승어사(스승보다 나음) 경지에 이르렀고 스승이 준 산통(算筒)과 죽장(竹杖)을 갖고 고향을 떠난다.
가까운 평양으로 가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동강변에 자리를 펴고 점을 치기 시작했는데 워낙 눈치가 빠르고 말재주가 능해 금방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평양에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그는 서울로 왔다가 다시 이천과 원주를 거쳐 서울 근교 고양읍에 자리를 잡는다.
거기서 이십 년 가까이 점을 치다보니 고양읍 백장님 하면 명복이다 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고 양반 집에서 가마를 보내 초청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람을 기만하여 돈을 버는 것에 대한 큰 죄책감이 있었다.
그래 뒷마당에 제단을 쌓아놓고 매일 첫새벽이면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데 18년 동안을 그렇게 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는 작심을 하고 100일 기도를 시작하는데 마지막 날 아침, 뜻 밖에 예수교 매서인(賣書人)김제옥이라는 여인이 찾아와 복음을 전하고 인가귀도라는 표지가 빨간 책을 주고 갔다.
그리고 며칠 후 신기한 꿈을 꾼다.
“나는 예수다. 내가 주는 산통(算筒)은 의의 산통이니라. 받아 가거라”
그리고는 은으로 만든 산통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 날 이후 백사겸은 점치는 일을 중단하고 감춰두었던 전도책자를 찾아 아내더러 읽어달라고 하였다.
아내가 읽어주자 그는 소리쳤다.
내가 꿈에 얻은 산통이 바로 이 책이요. 김제옥이라는 여자를 불러오오. 나도 예수 믿겠소.
1887년 5월 2일, 그와 그의 온 가족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 후 그는 하루 종일 아내와 어린 아들 남석에게 성경을 읽어 달라 하였다.
듣는 대로 외운 그는 마침내 성경을 다 외워 걸어 다니는 복음서라는 평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아무데나 돌아다니며 전도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런 그를 보고 사람들은 조선의 삭개오라 불렀다.
타고난 재치와 달변으로 그의 설교는 웃음과 눈물의 연속이었고 1899년 정식으로 남감리회 전도인이 되어 장단과 파주를 거쳐 개성 평양 철원 김화 평강 서울 등지에서 전도하였고 말년에는 개성에 정착했다.
개성 남부교회, 장단읍교회, 감바위교회는 그가 직접 개척하여 설립한 교회들이다.
남감리교인이었던 윤치호는 1906년 개성에 한영서원(韓英書院)을 설립하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백사겸은 아들 남석을 이 한영서원에 보내었고 남석은 졸업 후 윤치호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된다.
백남석은 흥업 구락부에도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주일학교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가을- 이 노래는, 현제명 박사가 아동 찬송가를 편집할 때 대 선배교수인 백남석에게 가사를 부탁하여 작곡한 노래이다.
이 노래는 아동 찬송가 중에서도 백미일 뿐 아니라 우 나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동요이기도 하다.
그러나 국정 교과서에 실리면서 2절의 가사가 바뀐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다시 불어오니 밭에 익은 곡식들은 금빛 같도다
추운 겨울 지낼 적에 우리 먹이려고 대자연이 내려주신 생명의 양식
그러나 원래는 “하나님이 내려 주신 생명의 양식”이고 최근에는 원래대로 불려 지고 있다. - 효덕교회 이경남 목사. 이덕주 교수의 논문을 요약
인생을 지으심/백사겸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생을 내시기 전에
천지만물 먼저 내어 의식거처 예비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녀인생 지어내실 때
흙을 빚어 육신 짓고 귀한 영혼 넣으셨네.
주의 성질 모범하여 선한 양심 지으시고
생명 호흡 기거동작 기력정신 주옵시고
귀한 영혼 천한 육신 선한 양심 지은 후에
영생복락 주셨으니 남녀인생 되었도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 인생 내신고로
결코 죄로 사망 없이 주와 같이 영생하네.
(‘빛과 소금’ 이 덕주교수 글 중에서
영혼의 불쌍한 사정/백사겸
매일 서산에 지는 해와 매일 동녘에 뜨는 달은
일주야로 왕래하고 무기징역에 맨 죄인과
무한년 정배 간 죄인도 풀려올 때가 있겠지만
지옥에 가는 영혼들은 영원히 풀려날 수 없다
❏ 내게 이루어지이다(피앗 미히: fiat mihi)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피앗 미히: fiat mihi) 눅1:38
지금부터 말씀 대로 살면 사역, 삶, 운명 바뀌겠습니다.
믿음생활 잘 해야겠습니다.
나부터 변화 - 말씀 이 와서 나를 변화, 소원:
하나님의 말씀 100% 믿고 말씀 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복음찬양)
1.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우리 할일이 무엇인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후렴 형제여 서로 사랑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자
사랑의 주님 계명 지켜
힘써서 사랑하자
2. 하나님은 곧 사랑이요
주 예수님도 사랑이라
성령받은 자 큰 증거는
온전한 사랑이라
3. 사랑은 모든 일에 참고
또한 범사에 믿으며
범사에 항상 바라면서
범사에 견디도다
약한 나로 강하게 (What the Lord has done in me)/CCM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수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사셨네
내가 건너야할 강 거기서 내 죄 씻겼네
이제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해흐르네
깊은 강에서 주가 나를 일으키셨도다
구원의 노래부르리 예수 자유주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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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